기 계 치의 설움
김 재 현
음치에 대해서라면 제법 아는 편이다. 죽마지우 한 친구가 자타공인의 음치였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면에서 모범적이고, 우수하고, 다재다능한 이 친구가 돌림노래 순서만 되면 노래 자체를 사양하고 다른 장기로 대신하거나 그럴만한 상황이면 슬며시 차례를 넘기곤 했다. 그럴 때 마다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애꿎은 술잔만 연속 비웠다. 음치의 괴롭고 따분한 신세를 생생히 보여주는 딱한 모습이었다.
이 친구의 음치실력[?]은 애국가나 간단한 동요도 음정,박자는 거의 무시하고 가사의 정확성에만 치중하는 수준이었다. 어쩌다 절친하고 만만한 몇몇 친구들 모임에서 희귀한 그의 십팔번 노래를 듣게 되는 때가 되면 좌석이 갑자기 팽팽한 긴장으로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가 된다. 모두들 마음의 준비를 하며, 미리 안면근육도 정돈하고,표정관리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고난 천형[天刑]같은 음치라는 사소한 장애는 그의 인품이나 능력이나 재주에 비해 볼 때 그저 ‘옥의 티’이거나 ‘완벽함 속의 애교있는 틈새’정도로 보이곤 했다.
음치외에도 비슷한 치[癡]자 돌림에 길치, 몸치, 기계치가 있다고 한다. 길치는 같은 길을 몇 번 가도 헤매는 사람이고 몸치는 운동신경이 매우 둔한 사람이며 기계치도 심심치 않게 볼 수있는데 바로 나같이 기계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사람들이다. 기계치는 기계류는 물론이고 각종 도구나 전자제품의 사용이나 수리에 이르기까지 보통사람들에 비해서 선천적으로 어려워하고 매우 서툰 사람들이다.
ROTC하계훈련때 처음으로 소총 분해,결합연습을 하게되었다. 모두 난생 처음 소총을 받고 조교의 시범을 보면서 실습했다. 나는 다른 모든 과목에서는 우수한 장교 후보생이었지만 이 종목과 각종 화기류 정비에서만 바닥을 기는 수모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단순한 기구나 도구라도 매뉴얼을 보며 조작해야하는 정도가 되면 우선 가슴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이걸 안 할 수는 없을 까 하는 궁리를 하게되곤 했다. 포병장교로 임관하고 전투사단에 배속된 뒤에는 자청해서 기계,장비와 관계없는 정보,작전 분야만 골라 다녔으며 어쩔 수없이 측지장교[측량업무]를 맡을 때는 기술,실무 일체는 선임하사에게 위임하며 속 편히 근무했다. 단기 복무 장교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결혼후 얼마 안 되어 내 아키레스건-바로 기계치 라는 약점이 여지없이 노출되었다. 그러나 신혼시절이며 회사일로 숨가쁘게 살아가는 새신랑에게 사소한 집안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타박할 신부는 드물 것이다. 게다가 내자는 유능하고 활달한 성격에 손재주도 뛰어나서 차츰 집안의 모든 일을 혼자서 척척 해 치웠다. 그러다보니 나는 아예 집에 오면 못하나 박는 일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큰 아이 첫 돌 때 처가 식구들만 따로 모셨다. 장인,장모님은 물론 세 분 내자의 자매님 가족들도 참석했다. 식사를 하는 도중 갑자기 정전이 됬다. 내자는 평소대로 서슴없이 아이를 나한테 안기고 서랍에서 구리선과 일자 드라이버를 꺼내고 나서 걸상 하나를 끌고 가더니 즉시 두꺼비 집을 열고 구리선을 갈아 끼우고 스위치를 올리니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그 동작이 물 흐르듯이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자동적으로 이루어 졌다.
잠시후 손 윗동서들이 웃으면서 한 마디씩 던졌다. “역시 셋째 딸한테 장가가야 좋다더니 그게 허튼 소리가 아닐세” “이러다 이 집 신랑이 애 보고 밥하는 거 아냐?” 어쨌건 그 날부터 우리집은 남편천국이라는 칭송아닌 칭송을 듣게 되었는데 사실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상은 이 정도보다 더 했었다. 그 당시 즉 80년대식 전화기, TV, 오디오, 냉장고, 세탁기는 물론 상하수도 및 연탄 보일러까지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우리 애들마저도 으레 내 쪽은 쳐다 보지도 않고 엄마만 찿아서 손 봐 달라고 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니 이제는 맏아들이 제 어미 뒤를 이어 모든 기계류 문제[?]를 콧노래를 부르며 해치웠다. 그렇게 돼서 우리 집안에서 나의 기계치로써의 입장은 확고하고 편안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더욱 성숙하고 안정되야할 나의 기계치 신세가 정년퇴직후 세 아이 모두 독립시키고 우리 두 부부만 산골 농가주택 생활을 시작하면서 최대의 위기와 난국을 맞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아파트생활과 달리 시골 농가에서는 농사는 물론 주거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스스로 처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농사도 기계화가 상당 부분 이루어져 차량 한 두 대는 거의 모든 집이 보유하였으며 이앙기. 경운기, 탈곡기를 다루는 사람도 흔했다. 그리고 간단한 기계나 도구, 집기들은 거의 모두 남자들이 직접 다루고 수리하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웬만한 전기, 상하수도, 보일러등의 고장수리도 기술자 안 부르고 각자 처리했으며 지붕,벽체, 문짝 수리까지 척척 해냈다.
뒤늦게 나는 기계치신세의 뼈아픈 설움을 톡톡히 맛보게 되었다. 전기배선에 문제가 생겨 전기가 안 들어 왔고 내자도 속수무책이어서 읍내 유일한 전기기술자를 불렀더니 이 사람이 유명한 고주망태여서 술독에 빠지면 며칠씩 아무리 독촉을 해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군소재지까지 나가서 왕복 교통비까지 부담하며 기술자를 불러 닷새만에야 전기를 켤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정도는 뒷집 미선 아범이라는 이웃에게 부탁해도 될 일이었는데 서울생활에서는 전혀 생각도 할 수 없는 발상이어서 그런 일들이 자주 벌어지곤 했었다. 농사일과 기계와 관계없는 일들은 차츰 익숙해 지고 재미도 붙기 시작했지만 기계앞에만 서면 주눅이 들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는 처지는 변하지 않았다.
다행히 맏딸의 남편후보자가 우리 시골집을 찾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급속히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 청년은 나하고는 아주 다른 그야말로 [맥가이버]스타일의 다재다능한 재주꾼이었다. 우선 P/C부터 신형으로 사 놓더니 각종 편리한 프로그램을 쫙 깔아 놓았다. 내 신세를 재빨리 눈치채더니 그 때부터는 일체의 기재,도구등을 일일이 손 봐주기 시작했다. 나로써는 구세주가 나타난 셈이다. 드디어 그가 정식으로 사위가 되자 우리집은 그이후 졸지에 전용 만능 기술자를 둔 것같이 기계류문제의 처리에 하등의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게다가 춘천으로 이사하여 아파트생활을 다시 하게 되자 기계치의 고민도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기계치 삶의 어려움을 절절히 느끼며 사는 동안 지난 시절 음치로 고생하던 그 친구 생각이 가끔씩 떠오르곤 했다. 뭔가 결함이나 약점을 갖고 살아야 하는 인생은 때로는 남모르는 고통을 겪으며 살게 되기도 한다. 사람이 모두 완벽할 수가 없고 누구나 장단점이 있고 능력과 소질과 취향의 차이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 주위에는 말은 안 하고 있어도 음치,길치,몸치 그리고 기계치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쩔 수없이 자신의 약점이나 결함을 드러냈을 때 우리들은 입장을 바꾸어서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 한번 쯤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의 실수나 무능함을 이해해 주려고 노력할 수는 있을 것이다.
정년퇴직을 앞둔 어느해 친구가 괴로운 사연을 토로하고 마음을 수습하고 싶다고 해서 둘이서 같이 노래방 주점을 찿아 갔다. 가슴에 쌓인 고통을 풀어 헤치고 폭음을 거듭하더니 급기야 자신이 음치라는 사실도 잊어버렸는지 말리는 나를 뿌리치고 무대로 나가 마이크를 잡더니 아무리 죽마고우 라도 차마 들어 주기 난감한 목청으로 노래-라기 보다는 비명과 함성 비슷한 소리를 지르고는 끝나갈 쯤 해서야 주점내의 손님들을 쳐다 보았다. 잠시 기가 막히다는 듯 조용하던 분위기가 웃음과 야유와 수근거림으로 소란해 지고 나는 서둘러 나가서 그 친구를 보호하듯이 데리고 내려왔다. 속을 털어 놓고 후련한 기분에 소리까지 질렀던 그 당당함은 어디가고 주위의 야유와 비웃음소리에 비참하고 서글픈 표정으로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몸짓을 했다. 참 보기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노래 좀 이상하게 불렀다고 무슨 야만스러운 행동이나 난동을 부린 것처럼 취급하는 태도가 몹시 마음에 거슬렸다. 그러나 한편 으로는 기계치는 다행히 음치같이 대중앞에서 공개적으로 치부를 노출할 위험성이 아주 적다는데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그날 음치와 기계치는 사이 좋게 어깨동무까지 하고 세상을 향해 대단한 항의시위라도 하듯이 보무도 당당하게 거리를 누비다가 결국은 어느 포장마차집에서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순수하고 맑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음치, 길치, 몸치, 기계치라고 사람들이 흔히 말들 하지만, 실은 그 외에도 거절을 못 한다든지, 정리정돈을 못 한다든지, 많이 있을 겁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콤플렉스라고 하는 것들이죠. 젊었을 적엔 그런 콤플렉스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곤 했는데, 제 경우는 길치인데, 여전합니다. 제게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노력해서 개선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 콤플렉스는 버렸습니다. 우리는 장점도 많은데 단점에 더 집착하지 않나 생각하게 됩니다. 이 번 글도 너무 재미 있고 진솔해서 참 좋습니다.
글 쓰는 일이 일종의 자기고백이나 성찰의 면도 있어서 풀어 놓으면 개운한 느낌이 들기도 함니다.
사람이 완벽할순 없지요.. 어느하나라도 흠이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흠이 있어 인간같고 정이 가는건 아닐까요? 잘읽고 공감하며 감사드립니다...
저도 [호가삼정]님의 말씀에 공감함니다.
@산절로나절로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 못하는게 없는데 노래는 싫어한답니다
다 잘할수는 없나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찿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다 잘합니다.노래도 춤도 기계도 컴퓨터도 다들 절보고 팔방미인이라고 합니다.이 내공은 대학시절 4년동안 자취를 하게되어 저절로 쌓은 내공입니다.ㅋㅋㅋ 요리는 더 잘합니다.ㅎㅎ
지금도 집안에 자질구레한 일이 생기면 모두 저에게 전화합니다.ㅋㅋ대부분 전화로 끝나기도 하고 안되면 직접 출장가서
처리 해주면 술도 밥도 다 나옵니다.ㅋㅋ
가장 좋았을때는 캐나다에서 살때 저를 아는 사람들이 저의 이 솜씨를 알고 여기저기서 불러 수리 해주고 톡톡히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캐나다는 기술자를 부르면 기본이 100불입니다.ㅎㅎ
쌓아 올린 내공도 물론 있으시겠지만 저는 아무래도 타고난 기질,성향.취향,그리고 재능.... 이런 쪽에 더 비중을 더 둡니다. 어쨌건 참 부러운 재능을 가지셨네요...
캄사합니다.ㅋㅋ
나도 기계치에다가 몸치 라서 공감가네요
[동병상련]의 처지라 피차 편하게 공감이 가겠네요.
저는 길치에 기계치에 몸치랍니다
다행스럽게도 음치는 면했답니다^^
제 글에 정말 공감이 가셨겠네요. 고맙습니다.
저희 두 형님과 남동생은 기계에 관한한 거의 맥가이버 수준인데,
유독 저만 기계치입니다.
지금도 무슨 일이 생기면,
형님은 좀 그렇고,...동생을 부릅니다. ㅎㅎ
저는 아직도 사위가 들르면 그동안 쌓아둔 [기계류 문제]를 일거에 처리하도록 [ 전속하청]을 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이드니 더 기계치가 되네요
어쩔 수 없겠지요.
^^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