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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1월29일(월)맑음
영화 <1987>을 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했나? 봉암사 선원에서 하안거 중이었다. 전두환이 독재를 반대하는 데모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는 풍문이 들려오긴 했지만 산속은 언제나 그렇듯 조용했다. 비록 몸은 산 속에 있었으나 80년 5월의 서울역광장에서 미완성으로 남겨두고 온 민주화의 문제가 마음속에 앙금처럼 갈아있었다. 그런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그 앙금이 슬금슬금 일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봉암사 선원에서의 안거는 출가하고 나서 처음 참가하는 안거라 한 눈 팔 새 없이 오로지 정진에 임해야 했다. 처음 참가하는 안거를 ‘첫 철을 난다.’고 말한다. 선방에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참선에 입문한 스님이 첫 철을 어떻게 나느냐가 그 스님이 일생동안 어떤 식으로 수행할지를 틀 지운다고 한다. 당시에 벌어진 민주항쟁에 대해 한두 마디 듣고 짐작했을 뿐이니 하안거 동안 그 사건은 내 의식에 어떤 인상도 남기지 않았다. 그 운동의 의미를 인식하게 된 것은 그해 겨울 동안거 중에 있었던 13대 대통령선거 때였다. 6.29선언이 있고난 후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되고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1987년 동안거 정진에 몰입하고 있었는데 12월 어느 날 갑자기 봉암사 주지인 동춘스님이 선원 지대방에 대중을 모이라 해놓고 대통령 선거에 투표할 것을 권유하면서 외출을 허락한다 했다. 차비는 사중에 줄 테니까 나가서 노태우를 찍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지가 안거 중에 정진분위기를 깨는 것도 선원의 청규에 어긋나지만 무엇보다도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를 찍으라는 데 어안이 벙벙했다. 주지의 주장인즉 노씨가 불자이고 노씨의 모친이 동화사에 다니는 독실한 불자라는 것이다. 불교지도층의 노태우 짝사랑이요, 세상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었다. 당시에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산문출입을 하지 않고 정진하는 스님들이 많았다. 나는 도반인 일진스님을 따라 광주로 선거하러 간 것이 아니라 세상물정을 알아보기 위해 외출을 나갔다. 광주에 들어가니 분위기가무겁고 심각했다. 식당에서나 버스 안에서나 택시기사들이 모두 ‘이번에 선상님이 되야제,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나버려, 우리 아버지가 되야제, 암.’ 이런 말을 했다. 당시 광주시내에 법성스님(요즘은 학담이란 법명으로 활동하고 계신다)이 운영하는 근본불교 학당을 방문하여 법성스님을 만났었다. 법성스님은 요주의감시를 받고 있는 상태인지 불안하고 경직되어 보였다. 법성스님이 거주하던 선정원에서 하룻밤을 지낼 때 객실에 있던 <광주항쟁 르뽀 사진첩>을 처음 보았다. 너무나 처참하고 끔찍한 학살의 현장 사진을 보고 한 없이 울면서 광주항쟁의 진상이 뇌리에 각인되었다. 이튿날 일진스님과 봉암사로 돌아오면서 광주의 恨한과 미완성된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대통령 선거결과에 좌절했고 우울했다. 양 김의 분열과 단일화실패의 결과는 노씨의 당선이었다. 6월 뜨거웠던 민주시민투쟁의 열매를 노태우가 가져갔던 것이다. 민주화는 지체되었으며, 이어지는 민주화투쟁에서 희생자들은 늘어났다. 6월 항쟁이 성공한 후 왜 민주진영의 사령탑이던 국민본부는 분열되었는가? 양 김은 왜 단일화에 실패했는가? 6월 항쟁을 주도한 민주세력은 왜 13대 대통령선거에 대한 전략과 전술을 통일하지 못했던가? NL파와 PD파의 분열 때문인가? 양 김의 권력욕 때문인가? 당장의 이익이 눈앞에 놓여 있을 때 어느 누구라도 먼저 차지하고 싶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싶겠는가? 범부 중생세간에서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그런 둘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화해시킬 만한 민주절차적 스킬이 부족했음이 통탄스럽다. 하기사 인도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간디와 암베드카Ambedka(1893~1956)박사도 서로 분열했으니 할 말이 없다. 세월은 흘러 군부독재도 가고, 양 김도 가고, 이명박/박근혜도 사라지고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현재이다. 再造山下재조산하라, 천하가 달라졌는가? 전보다 조금 나아지리라. 그렇게 믿어보는 것이다. 욕계가 좋아진들 무슨 별천지를 기대하리오. 그러면 왜 나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에 대한 주의를 내려놓지 못하는가? 민주화가 되면 사람들의 고통이 적어지고 행복을 경험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사람들은 이기주의를 넘어서 이타적 동기를 실천하게 되면서 그들의 의식이 성장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면으로의 전향이 일어나면서 진정한 民主민주란 ‘자기 삶의 주인 됨’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거나 ‘자기가 주인이 된 삶이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가?’에 대한 성찰이 일어나 내면의 각성 내지 영적인 구도의 길을 가게 될 수도 있고, 욕계로부터 해탈을 향하는 마음을 촉발되는 계기를 만날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 정의, 평등을 실현하는 법적, 구조적 환경을 조성해준다. 그것이 성취되면 세속의 안녕과 복지가 어느 정도 정착된다. 그러면 인간의 본성인 출세간적 해탈을 추구하는 동기가 촉발되는 계기가 많아질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믿는다. 부처님께서 밧지국의 공화정을 칭찬하셨듯이.
<1987>영화를 보고 울었다. 박종철, 이한열을 비롯하여 많은 학생들이 죽었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들이 죽었을 때 나도 거기 그 자리에서 죽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없었고 살아있다. 죽은 그들은 나에게 무엇으로 남아있는가, 그들의 죽음은 나의 삶에 어떤 기여를 했는가? 그들의 죽음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그들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의미를 살려가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냥 살기는 쉽지만, 진정 살기는 어렵다. 밤이 깊어간다. 잠들지 않는다.
2018년1월30일(화)맑음
에피쿠로스Epicuros의 정원에 들어가는 문에 걸려 있었다고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Seneka가 이렇게 썼다.
“방황하는 나그네들이여, 여기야말로 당신이 거처할 진정 좋은 곳이요. 여기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선(善)인 즐거움이 있노라.”
HOSPES HIC BENE MANEBIS, HIC SUMMUM BONUM VOLUPTAS EST
호스페스 힉 베네 마네비스, 힉 숨뭄 보눔 볼룹타스 에스트
숨뭄 보눔summum bonum은 最高善최고선이라는 뜻의 라틴어이다. the highest good이라 영역한다. 영미권 불교학자들은 열반을 최고선이라 해석하여 nirvana is the highest good이라 한다. 에피쿠로스가 흔히 쾌락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의미하는 쾌락이란 아타락시아ataraxia로서 쾌불쾌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을 뜻한다. 그렇다면 열힉he biōsas λάθε βιώσας 라테 비오사스: 비밀스럽게 살라.
세속의 인기와 명예에 연연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평범한 무명인으로서 살아가라.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Summum Bonum
-Robert Browning(1812~1889)
All the breath and the bloom of the year in the bag of one bee:
All the wonder and wealth of the mine in the heart of one gem:
In the core of one pearl all the shade and the shine of the sea:
Breath and bloom, shade and shine,
--wonder, wealth, and--how far above them--
Truth that's brighter than gem,
Trust, that's purer than pearl,--
Brightest truth, purest trust in the universe--all were for me
In the kiss of one girl.
최상의 아름다움
-로버트 브라우닝
한 해 동안의 모든 향기와 꽃은 한 마리 벌의 주머니 속에 있고
한 광산의 모든 황홀과 재산은 한 보석의 가슴 속에 있고
한 진주 속에는 바다의 그늘과 광채가 들어 있다,
향기와 꽃, 그늘과 빛
---황홀과 재산, 그리고--그것들보다 더 귀한---
진실, 보석보다 더 밝은
신의, 진주보다 더 맑은
우주에서 가장 찬란한 진실, 가장 순결한 신의는
한 소녀의 키스에 들어 있다.
로버트 브라우닝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영광을 누릴 때 활동한 시인이었다. 부침하는 인생사에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을 모색하면서 신의 뜻을 발견하려는 시를 썼다. 그가 발견한 최고선은 한 소녀의 기도였다. 그것은 우주에서 가장 찬란한 진실, 가장 순결한 신의를 상징하는 표상이다. 그러나 그가 믿는 표상이란 쇼펜하우어가 설파 한 바 존재하려는 맹목적 의지(die Wille, 불교용어로 말하면 오히려 渴愛, 有愛에 가까운)에 종속된 표상이다. 그 소녀의 기도는 결국 신에게 귀의함으로써 얻어지는 영생을 원하는 것이다. 영생이란 신의 은총을 받아 영원불멸의 자아를 누리려는 중생의 욕망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선은 열반, 니르바나nirvana(혹은 닙반나nibbana)는 모든 중생의 욕망을 넘어서서 우주의 보편적 진리, 다르마Dharma에 귀의하여 적멸upasama을 누리는 것이다. 적멸은 모든 형성된 것들의 가라앉음이다. 그것은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맑고 시원함이요, 속상함과 열기에서 벗어난 청량함과 안온함이라. 기쁘거나 슬프지 아니하는 평온이 있고, 평온해진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가지고 머무는 경지이다. 일체의 불보살은 거기에 머물면서 불가사의한 교화를 행하신다. 그래서 나는 <둥근 연못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에다 이렇게 쓰려고 한다.
둥근 연못의 정원 The Garden of Round Lake:
길을 찾는 나그네여, 여기야말로 당신이 찾던 안식처라. 여기에 우리가 추구해야할 최고의 선인 열반과 보리행이 있노라.
You, truth-seekers, Here is the shelter you look for. Here the highest good is nirvana & bodhicariya.
요가 모임 하다. 점심으로 떡국 공양. 숫찌와 초연보살 참석.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커피를 나누면서 대화함.
2018년1월31일(수)맑음
니체가 이해한 불교는 精神衛生정신위생학 mental hygiene, 精神攝生정신섭생 mental regimen이다. 그 말이 너무도 산뜻하지 않은가?
그는 법구경의 한 구절인
“미움은 미움으로 대하면 끝내 풀리지 않는다. 미움은 미움이 없을 때에만 풀리나니, 이것이 여래의 진리이다.”
Hatred cannot be cured. Only love can cure hatred. This is the eternal law of Buddha.
를 불교의 핵심내용으로 이해했다.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상한 현실을 긍정적으로 볼 것과 원한감정(르쌍띠망ressentiment)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는 정신적 섭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불교가 “명랑light-heartedness과 평정과equanimity 무욕freedom from avarice을 최고의 목표”로 하고 있기에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교적 정신섭생의 방법으로서 위생학은 바로 현실의 긍정에 있으며, 몸의 단련을 통한 내면의 평화와 삶의 명랑성의 회복에 있다고 보았다. 니체는 불교의 위생학적 정신섭생요법이 삶의 고통과 허무를 느끼는 인간들에게 치료적 기능을 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가 느끼기엔 심오한 생리학자physiologist인 부처님은 삶의 고통과 허무를 능동적으로 치료하는 의사였다. 불교의 실천적 방법이 위생학에 기초해 고통과 원한감정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정신적 자유인이 되는데 있다고 이해했기에 니체는 몸의 치료로서 자기 치료를 통해 항상 깨어있는 자유정신을 추구해야한다고 했다. 니체가 높이 평가한 불교는 현실에서 도피한 채 명상을 통해 세계를 관조하는 수동적인 세계관의 불교가 아니라, 삶과 현실을 긍정하며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 움직이는 능동적인 세계관의 불교였다. 이런 이유에서 쇼펜하우어가 이해한 염세적 불교, 의지를 포기하고 세계로부터 물러나 관조하는 정적주의quietism의 불교를 극복하고 세계 속에서 살아있는 건강한 불교를 주장했다. 그리하여 짜라투스트라Zarathustra는 설산의 얼음동굴을 떠나 세계 속으로 들어온다. 그는 초인(Übermensch위버멘쉬, 超人)이며, 보디삿뜨바(Bodhisattva, 菩薩)이다.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오는 길을 닦아놓은 노자와 같이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불교가 유럽으로 들어오는 길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2018년2월1일(목)맑음
현실이 지금 여기서 몸과 마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총체이다. 현실은 삶의 현장이다. 어떤 현장이냐? 明명과 無明무명, 知지와 無知무지, 覺각과 不覺불각이 찰나에 갈라져 경험의 질적인 차이를 벌려낸다. 명, 지, 각에 의해 지각된 세계는 청정과 평화와 和諧화해의 場장을 벌려내고, 무명, 무지, 불각에 의해 지각되는 세계는 오염과 불화와 갈등의 장을 벌려낸다. 명, 지, 각의 심리적 흐름은 정념과 정지가 관통하면서 팔정도를 실현한다. 무명, 무지, 불각의 심리적 흐름은 거듭 태어남(再生)의 폭류를 형성한다. 정념, 정지는 좀비가 설치는 세상에서 면역항체를 보유한 것과 같아서 안전과 건강을 보장할 것인데, 그것이 없으면 네 가지 폭류(감각적 폭류, 존재의 폭류, 사견의 폭류, 무명의 폭류)에 무방비 상태가 되어 지리멸렬할 것이다. 좀비Zombie는 욕계의 흐름에 휩싸여 악도의 늪으로 빠져드는 삶, 지성을 잃어버린 군중이나 아귀를 비유한 것이다. 명과 무명이 찰나에 갈라지는 삶의 현장이 바로 수행의 힘이 발휘되어야할 최전방이다. 거기에는 만인을 대적하여 싸우는 一騎當千일기당천(한 사람의 기병이 천 명을 대적한다는 뜻으로, 무예나 능력이 아주 뛰어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의 실력을 발휘해야할 경우도 있고, 스스로 돌아가는 바람개비와 같은 경쾌할 때도 있으며, 도도히 흘러가는 대하처럼 평온할 때도 있으리라. 자신이 매일 맞이하는 현실이 수행할 곳이며 수행의 힘을 발휘해야할 현장이다. 그래서 현장은 엄숙하면서 위기의 순간이기도 한다. 왜 찰나가 위기의 순간이라 하는가? 현장에 처한 불자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삼보가 칭송되기도 하고 훼손되기도 하니까. 삶의 현장에서 불자가 선법을 드날리면 삼보의 위신은 올라갈 것이요, 선법은커녕 불선법을 일으키면 삼보의 공덕을 허무는 것이다. 불교의 위신은 불자가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다. 다시 왜 찰나가 위기의 순간이라 하는가? 그대가 윤회로 떨어지는 流傳유전연기와 해탈로 향하는 還滅환멸연기가 한 찰나에 갈라지기 때문에 매 순간이 위기의 순간, the critical moment라 하는 것이다. 아, 순간이여. 숨 쉬고 숨 내쉬는 순간, 한 생각, 말 한마디 일어나는 그 순간이여, 유전과 환멸, 윤회와 해탈이 길이 달라진다. 호리유차毫離有差면 天地懸隔천지현격이라. 화살이 시위를 떠날 때 무시해버린 극히 미세한 편차가 목표지점에서는 과녁을 하늘과 땅만큼이나 벗어나게 한다. 각과 불각의 털끝만 한 오차가 시간과 거리를 확대하면 윤회와 해탈이라는 엄청난 편차를 초래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이 중요하다. 이제까지 몰라서 잘못했다면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매순간이 시작이다. 시작이 정확하면 끝도 정확해진다. 좋은 끝맺음을 위해서 정념정지를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해야 할 것이다. 늦더라도 정확하고 철저해야 된다.
오후에 부동산중개사무소에 나가 아파트 매수자(買收집을 사는 사람)와 계약하고 공양을 함께 하다. 예술회관 앞에 인도음식점 <카시강가>에 앉아서 바라보는 강변풍경이 그럴싸하다.
2018년2월3일(토)맑음
대위스님과 점심 공양 함께하다. 강바람이 세게 분다. 성지순례 다녀온 감상을 회고하다.
回顧聖地巡禮회고성지순례:
歸來靜坐回巡禮, 귀래정좌회순례
思原摸跡能孝悌; 사원모적능효제
南江寒風覺額凉, 남강한풍각액량
瞑目常在古佛際. 명목상재고불제
돌아와 고요히 앉아 순례를 회고하나니
근원을 그리며 자취를 쓰다듬는 건 효행이 아니겠나,
남강에 찬바람 불어 이마가 서늘한데,
눈 감으면 부처님 계셨던 그때 그곳에 항상 가있네.
*능효제(能孝悌)에 대하여: <사자소학>에 나오는 문장으로 ‘능히 효도하고 능히 공손할 수 있는 것은(能孝能悌능효능제), 스승의 은혜가 아님이 없다(莫非師恩막비사은)’는 성현의 가르침이다. 불교식으로 이해한다면 능히 최상의 진리를 따르고(진리를 따르는 것이 孝효이다) 도반끼리 서로 사귈 수 있는 것은 모두 부처님(최고의 스승)의 은혜가 아니겠냐는 말이다.
달라이라마의 제자이자 불교학자인 로버트 써먼Robert Thurman(1941~ )은 人無我를 subjective selfless-ness로 法無我를 objective selfless-ness라 영역했다. 매우 유용하고 명징한 번역이다. 안으로도 ‘나의 소유, 나, 자아’라 동일시하려는 욕망이 없고, 동일시 할 대상이 없으며, 밖으로도 ‘나의 소유, 나, 자아’라 동일시하려는 욕망이 없고, 동일시 할 대상이 없다. 안에 있는 그 무엇을 거머잡으려는 심리적 경향을 뿌리 뽑고(다른 말로 ‘보이지 않는 손목’을 잘라버리고) 밖으로도 무엇을 거머잡으려는 심리적 경향을 뿌리 뽑아라. 그러면 툭 터져 꺼리길 것 없이 유연하리라.
오후에 부산에서 오신 우뻬까 님이 공양 낸다 하여 모이다. 해성, 문정, 현정이 동참하다. 해성보살님이 성지순례기념 앨범을 만들어 보시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현장을 성지로 만들 수 있다면, 일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성지순례이다. 어떻게 하면 일상생활을 성지로 만들 수 있는가? 일상에 사성제를 기억하고 사유하고 실천하라.
2018년2월4일(일)맑음
항아리가 아무리 귀하다 해도 구멍이 나면 쓸모가 없어진다. 그래도 조금 쓸모가 있기는 있다. 조화를 꽂아둔다든지, 아니면 골동의 가치가 있어 장식용으로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구멍 난 항아리는 물을 비롯한 액체를 담을 수는 없기에 항아리의 존재이유를 잃는다. 사람이 말할 때도 그렇다. 그 사람의 말이 사실과 부합되고 행실과 맞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구멍 난 항아리에서 물이 새는 것과 같다. 입에서 쉴 새 없이 말이 흘러나와 듣는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번뇌로 물들인다면 그 사람의 입은 구멍 난 항아리다. 오늘 하루 口業구업을 짓지 않았는지 반성한다. 입안이 까끌하면 차를 마셔서 윤택하게 하는 것이 좋고, 구업을 지었다면 향을 피우고 정좌하여 독경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