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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밭을 간다"
중생(생명의 무리)에게 심는
정각(해탈·열반)에 대한 믿음은 내가 뿌리는 씨
중생에게 지혜와 자비를 가르치는 것은 내가 밭가는 모습.
나는 몸으로 입으로 마음으로
나날이 중생의 악업을 제거하나니
그것(지혜와 자비, 수행과 계율을 가르치고 실천케 하는 것)은
내가 밭에서 김매는 것.
내가 모는 소는 정진이니
행하여 그릇됨이 없고
중생을 괴로움 없는 편안한 경지로 나르도다.
나는 이리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감로(甘露)의 열매를 거두노라.
- <숫따니빠따(Sutta-Nipāta) 中, '밭가는 사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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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붓다(석가모니 부처님)는 마가다국의 시골인 ‘에카사라‘라는 마을에 계셨습니다. 그 당시 부처님과 제자들이 탁발 중에 일어난 한 가지 일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경입니다.
그날 아침에도 부처님은 어느 집 앞에 서서 탁발을 하셨습니다. 그 집은 한 바라문의 집이었는데, 마침 씨 뿌리는 철이었으므로 그 집 주인인 바라문은 마을 사람들을 시켜서 그 준비를 서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탁발 온 부처님을 본 그 바라문은 부처님께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문이여, 나는 밭 갈고 씨를 뿌려서 내가 먹을 양식을 마련하고 있소. 당신도 또한 스스로 밭 갈고 씨를 뿌려서 당신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그것은 아마도 힐난조의 어조였을 것입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이런 생각이 그 말 속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바라문에게 부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간다네. 나도 밭 갈고 씨 뿌려서 먹을 것을 얻고 있다네."
그것을 들은 바라문이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사문이여, 우리는 누구 하나 당신이 밭 갈고 씨 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소. 대체 당신의 그런 모습은 어디에 있소? 그리고 당신의 소는 어디에 있소? 당신이 밭을 간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지 나는 묻고 싶소."
그때 부처님이 답하신 말씀이 위에 인용한 숫따니빠따 중의 한 게송으로 기록되어 전해 오는 경입니다.
부처님은 "내가 뿌리는 씨는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나도 정각(바른 깨달음)·해탈(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열반(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행복의 경지에 도달함)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이요, 내가 밭(心身의 밭)을 가는 모습은 중생들에게 지혜와 자비를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지혜와 자비, 수행과 계율을 가르치고 실천케 하고, 중생들이 나날이 신구의(身口意)의 악한 업(業; 행위)과 탐진치를 제거케 하는 것은 곧 내가 나날이 김매는 작업이며, 내가 모는 소는 정진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모는 정진이라는) 소는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나아가 물러섬이 없고, 또 (당신께서 가르치신 지혜, 자비, 계율 그리고 수행을) 행함에 그릇됨이 없어 중생이 온갖 괴로움과 슬픔과 속박에서 벗어나 평안하고 행복한 경지(상태)에 도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경작하여 감로(甘露, amrta)의 열매를 거둔다."고 말씀하십니다.
감로(amrta)는 '불사주(不死酒) 또는 천주(天酒; 하늘의 술)'라고도 한역되는데, 그것은 꿀같이 달고 향기로우며 한 번 먹으면 죽는 일이 없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불교(부처님 가르침)에서 ‘감로의 열매를 거둔다’는 표현은 ‘해탈(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열반(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행복의 경지에 도달함)을 성취하는 것’에 대한 비유로 사용됩니다.
위의 경에서 보듯이 불교(부처님 가르침)에서 말하는 믿음은 '정각(해탈·열반)에 대한 믿음'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팔정도(정각에 이르는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 길)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면 '나도 정각(바른 깨달음)·해탈(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열반(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행복의 경지에 도달함)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불교(부처님 가르침)에서 말하는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맹신)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그 가르침에 따라 바른 수행(팔정도를 닦는/계발하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여 직접 경험해 봄으로써 갖게 되는 믿음입니다.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에 대한 경험적·합리적인 바른 이해를 통해서 스스로 바른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 바른 믿음의 시작입니다. 부처님 가르침(佛法, 佛敎)에서 말하는 믿음은 지혜(경험적·합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입니다. 지혜(경험적·합리적 이해) 없이 무조건 믿는 것을 '맹목(盲目; 눈 먼, 보지 못함)적인 믿음 또는 맹목적인 신앙, 맹신(盲信)'이라고 합니다. 부처(깨달은 사람)는 존경의 대상이지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모든 가르침은 (부처님 가르침을 포함하여) 무조건적인 믿음의 강요가 아니라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바른 실천을 유도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예컨대 수학 선생님(스승)의 가르침은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스스로 바르게 실천하도록 (수학 문제를 스스로 바르게 풀도록) 유도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을, 혹은 당신의 가르침(설법)을 무조건 믿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실천하여 스스로 직접 경험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부처님은 "깨달음은 여래(如來; 자연의 이치/법칙에 따라 그렇게如 온來 자, 부처님이 자신을 지칭하시는 호칭)의 경험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의 경험으로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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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나도 밭을 간다."고 말씀하신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바가 있습니다.
대체로 ‘인구어(印歐語), 인도-유럽 어족계통의 언어’에서는 밭을 경작하는 것과 인간의 정신을 계발하는 것이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 가령 영어에서 ‘cultivate’라는 단어의 어원은 ‘cultiv(경작된)+ate(상태로 하다)’인데, ‘①[땅을] 경작하다, 갈다, 개척하다 ②[식물·작물 등을] 재배하다, 돌보다 ③[재능 등을] (교육·훈련에 의해) 기르다; ④[정신을] 도야하다, 계발하다, 수련하다, 닦다; ⑤[남을] 교화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culture(문화)’라는 영어단어의 어원은 ‘cult(경작된)+ure(장소)’인데, ‘①문화, 문명, 배양 ②(토지의) 경작 ③(심신의) 훈련, 수양, 수련; 교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agriculture(농업)’의 어원은 ‘agri(밭)+culture(경작)’입니다. 이처럼 인구어(인도-유럽어)에서 문화와 농업은 어근을 같이하는 단어입니다. 문화와 인간정신의 경작 계발(啓發; 열리고 발전향상함)이 언어에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문화와 인간정신의 계발의 근본원리가 부처님이 표현하셨듯이 경작(밭을 갈아 농사를 짓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대지를 갈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어떻게 경작하고, 어떻게 수확을 거두는 것일까요? 그 기본적인 방식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농사꾼에게 처음 주어지는 것은 거친 대지입니다. 그것을 경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잡초와 잡목을 제거하고,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치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흙을 갈아 부드럽게 해야 하고, 토양이 곡식의 성장에 적당치 못하다면 토질개량도 꾀해야 할 것입니다. 또 관개시설도 정비하여 물길을 열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논밭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씨가 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당한 햇볕과 물대기와 김매기, 거름주기 같은 작업을 꾸준히 하여 마침내 수확을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신(心身)의 수양이니 수행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것 또한 농사짓는 것과 비슷합니다. 무명 상태의 인간의 심신(心身)이란 농사꾼에게 처음 주어진 거친 대지와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거친 심신에서 잡초와 잡목을 뽑고 크고 작은 돌멩이를 치우며 심신의 토양도 개량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거칠던 심신(心身)은 수확을 기대할 수 있는 논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바른 지혜의) 씨앗이 뿌려지고 꾸준한 노력과 때에 따라(조건에 따라) 적절한 손질이 행해질 때, 마침내 심신(心身)의 땅에서 훌륭한 수확(정각, 해탈, 열반)을 거둘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이 "나도 밭을 간다."고 하신 말씀에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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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심신(心身)의 '행(行)을 닦음(修)' 또는 심신(心身)을 '닦는(修) 행(行, 행위)'이라는 뜻을 지닌 수행(修行)은 '경작하다, 계발하다'라는 뜻을 지닌, 부처님이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바와나(bhāvanā)'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수행이라는 말이 매우 익숙하니 바와나는 '계발 수행', '계발하는(닦는) 수행'으로, 팔정도 바와나는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 '정각에 이르는 여덟(八)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을 경작하여 계발하는 수행', 또는 '팔정도를 닦는(修) 행(行)' 정도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유사합니다.
부처님은 '팔정도 바와나'를 수행의 관점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시고, 설법(법을 설명)하실 때의 편의를 위해,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를 사마타,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바와나'를 위빠사나라고 명칭하셨습니다. '오계 등의 계 또는 계율의 실천을 포함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바와나'는 그냥 실라.
실라를 바탕으로 사마타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고, 사마타를 바탕으로 위빠사나가 계발됩니다. 발전향상된 사마타는 실라와 위빠사나를 더 발전향상시키고, 발전향상된 위빠사나는 사마타와 실라를 더 발전향상시키며, 발전향상된 실라는 다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더 발전향상킵니다. 부처님이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팔정도 바와나, 즉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 실라(계戒)-사마디(정定)-빤냐(혜慧)를 계발하는/닦는 수행, 실라(계행)-사마타(정행)-위빠사나(혜행)는 이와 같이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팔정도 바와나를 완성하여 정각을 증득하고 나면 팔정도는 더 이상 계발해야(닦아야) 하는 길이 아니라 삶 또는 생활 그 자체가 됩니다.
[부처님이 설(설명)하신 팔정도 바와나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913880552257844&id=100009077529459 '를 참고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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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心身)을 개간하는 일을 하자면 먼저 인간의 무지몽매함(무명)을 어느 정도나마 제거하는 일이 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미망이 있고, 탐욕이 있고, 성냄이 있고, 어리석음이 있고 전도몽상과 번뇌망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잔인성이 있고, 극단을 즐기는 버릇,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심지어는 고통(고행)까지도 즐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설법(법을 설명함)이야말로 이런 황무지를 지혜와 자비로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하신 인간(인간의 심신心身이라는 밭)을 개간하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지몽매(무명)에 덮여 있는 인간정신의 황무지에서 어느 정도 '탐욕을 갈아엎고, 증오심을 베어내며, 어리석음을 뽑아내서', 거기에다 씨를 뿌릴 준비를 지혜와 자비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거기에 (바른 지혜의) 씨가 뿌려진대도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지를 경작하는 데에도 적당한 물대기와 적당한 햇볕과 때에 맞는 거름주기와 때에 맞는 제초작업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정신의 경작 또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일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른 수행, 즉 팔정도를 계발하는/닦는 수행, 실라(계행)-사마타(정행)-위빠사나(혜행)를 바르게 실천하고 정진하는 일입니다.
날마다 중생의 신(身; 몸), 구(口; 입), 의(意; 마음)에서 악한 업(業; 행위)을 제거하는 일, 그것이 '내가 김매는 일'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대지(심신心身의 밭)를 경작할 때, 일단 개간한 땅이라고 하여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잠시라도 밭에서 눈을 뗀다면, 모처럼 자라던 곡식도 순식간에 잡초로 뒤덮여 버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심신(心身)의 밭도 얼마만큼 계발되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만일 그리하다가는 잡초가 우리의 심신(心身)의 밭을 차지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신구의(身口意)에서 날마다 나쁜 행위를 제어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戒) 또는 계율(戒律)을 닦는 수행, 계행(戒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왠지 규제, 통제를 강요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자(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배우고 바르게 실천하는 자)로서 지녀야 할 오계는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계(戒)라고 합니다. 계(戒)는 불교(부처님 가르침)의 수행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지켜야 할 실천 덕목을 말합니다. 계(戒)의 원어인 실라(Sila)는 ‘행위, 습관, 도덕’ 등의 뜻입니다. 예로부터 수행자들은 계행(戒行)을 '소극적으로는 악을 막는 일(防非止惡)이며, 적극적으로는 선을 향상시키는 일(諸善增上)'이라고 했습니다. 계행은 결국 나쁜 버릇을 없애고 좋은 생활 습관을 기르는 일이며, 바꾸어 말하면 좋은 방향으로 성품, 성격을 개조해 가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의 행위(身行)와 말(口行)과 생각(意行)에서 나날이 악행의 풀을 제거해 감으로써 뿌려진 지혜의 씨앗이 잘 자라나도록 보살펴야 합니다. 그것이 계(戒; 경계할 계)를 닦는 수행(계행)이며, 심신(心身)의 밭을 경작해가는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의 방식인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 수행은 (어떤 절대자에게 구원을 받거나 또는 소위 대오각성해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어떤 경지로 뛰어오름으로써 만사가 끝나 버리는 그런 방식은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심신(心身)을 개간하고, 지혜와 자비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기실 그 출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제초작업을 하고 심신(心身)의 밭을 경작하여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는 꾸준한 노력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로마의 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닦아지지) 않는다.'라는 격언처럼.
그런데 사실 심신(心身)의 밭을 개간하고 경작하여 계발하는 그러한 작업(수행)은 어느 정도의 초기 단계(처음 밭을 개간하는 초기 단계)를 벗어나면 그 작업(수행) 자체가 세상 어느 일보다도 즐겁고 행복한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게 심신(心身)의 밭을 개간하고 경작하여 계발하는 그러한 작업(수행;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 수행, 팔정도 바와나, 계행-정행-혜행)을 꾸준히 실천(정진)하여 마침내 '감로의 열매'를 수확하고, 그 큰 지혜와 큰 사랑(자비)과 큰 행복을 세상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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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밭갈이 하기 좋은 봄날
식목일이자 한식인 오늘 심신(心身)의 밭도 한 번 갈아 보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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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성불하세요.^^ _()_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_()_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May all beings
following the Buddha's sammā Dhamma
be happy.. be peaceful.. be liberated(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벗어나기를, 해탈하기를)...
불교수행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바른 수행을 실천하고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사두(선재).. 사두(훌륭합니다).. 사두(공감합니다, 동감입니다) !
성불하십시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