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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은 뜻없이 외우는 주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모방해야 할 원형으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어떤 형식을 가져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배워서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할 때에 어떤 형식을 가지고, 어떤 내용으로,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놀라운 은총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 기도하라 하심은 곧 응답을 주겠다는 약속이 들어가 있습니다.
· 기도하라고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을 받고 은혜와 복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므로 주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십시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부르게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내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고백하게 될 때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하고 있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가 됩니다. 우리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가 됩니다. 이것은 특권입니다.
우리는 본래 죄로 인해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를 위하여 아들을 죽음에 일으켜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던 것입니다.(요 20:17)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 기도는 ‘하나님’이란 말이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뿐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라는 불렸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통상적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에 가장 소중하게 사용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여호와’입니다. 출애굽기 3에 보면 하나님을 스스로 자기 이름을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3계명에서도 밝혔듯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를 꺼려했고, 대신에 ‘아노나이’㈜라는 말로 대신하여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대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을까요?
‘아버지’라는 이름에서 가지는 일반적인 개념이 무엇입니까?
(1) 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이라는 개념입니다.
히브리적인 전통은 자녀의 생명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시조에도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고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뜻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부름은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도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랑의 배반자를 사랑하며 사랑할 만한 대상으로 창조하십니다. 이 새로운 인간 창조를 위해서 우리를 고난의 과정으로, 교육적인 진노가 나타내시기도 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공의와 사랑을 한꺼번에 이루신 것과 같이 의로운 진노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참사랑을 드러내시기도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2)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함은 다스리시는 주관자로서 자녀를 보호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정상적이라면 자녀들은 아버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고 또 필요한 것을 청구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예수님께서는 탕자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가지고 집을 떠난 탕자는 허랑방탕하게 지내며 죄 속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뉘우치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없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였습니까? 아들의 무리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물러주고 떠나 보내면서, 기다려 주시고 또 돌아왔을 때 큰 잔치를 베풀며 영접해 주었습니다. 탕자로 하여금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인내하시면서 한없이 기다리고, 돌아왔을 때에 책임져 주시는 아버지셨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나의 필요를 돌격대가 앞으로 나아가듯이 쏟아놓기 전에 우리가 기도하는 아버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침착하게 묵상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참으로 귀합니다.
우리는 기도에도 너무 조급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가지는 개인기도 시간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묵상하면서 찬송하면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그 은혜를 느려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입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하나님의 자녀된 공동체적 의미가 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경고하라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나고, 큰물고기 속에서 고생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은 오로지 유대인들의 하나님이라는 선민사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참 뜻을 잘못 이해한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는 자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형제요 자매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나오기 전에 먼저 불화한 사람과 화해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면서 나아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뜻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늘의 개념을 헬라적인 것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유대인에게 하늘은 천문학적으로나 물리학적인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쳐다보는 푸른 하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늘’은 우선 하나님이 게신 곳을 뜻합니다. 위냐 아래냐 하는 공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나아가 피조물의 세계가 아닌, 창조주가 계신, 하나님이 계신 우리가 머무는, 생각하는 공간과는 차원이 다른 신적인 공간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란 결국은 전적 타락한 인간은 아무리 도달하려고 해도 도달 수 없는 저 높은 곳에 계시는 초월하신 하나님, 인간이 아무리 애써도 그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로마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신이 아닙니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과는 다릅니다. 인간이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상관없이 추월해 계시는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2) 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에 우리와 너무 떨어져 계시니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란 우리에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1)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하늘에까지 계시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편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아가 어디든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어디에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위해서 특별히 어떤 장소를 구분하고 시간을 정해서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어디든지 계십니다. 그러기에 어디서나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나서는 언제든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 대량 학살된 유태인수용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조사하던 사람들이 짐승 우리와 같은 감옥 안을 돌아보면서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 갇혀서 고문과 처형으로 죽어갔지만 지옥과 같은 수용소에서 병들어 죽고 자살하여 죽어갔습니다. 그런 곳에서 한 벽면에 “God is here and now"라는 글귀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장소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글귀 밑에서는 이런 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말로 다할 수 없다”
지옥같은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찬송하던 그 감옥은 아마도 천국과 같았을 것입니다.
월남 전에서 남편이 포로가 되어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슬퍼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아이가 어느 날 그림을 그리는데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 집을 그려 놓은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무슨그림이니”
“응아빠가계시는포로수용소야”
이 이야기를 들은 부인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습니다. 그때에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왜울어?”
그 다음에 하는 말이
“이곳에도하나님이계시잖아엄마왜울어?”
감옥에 있는 남편을 생각하고 우는 엄마에게 아들이 엄마의 눈물을 씻어주었습니다. “엄마! 이곳에도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콘스탄틴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할 때까지 수많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언제나 핍박으로 늘 죽었고 엄청난 대박해가 있었음을 교회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저인망 그물로 조그마한 치어까지 깡그리 잡아버리듯 무시무시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 박해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씨가 마르는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천만입니다. 카타콤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뚜껑을 열어놓고 보니까 300년만에 콘스탄틴 황제의 왕자들도, 귀족들도, 공주도 모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의 예수, 어떤 세력에 대해서도 승리하는 예수,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예수,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죽음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하는 부활의 예수, 그리고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성도를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불 가운데 지날 때는 불이 너를 사르지 못하고 물위를 건널 때는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라 내가 너를 지극히 보배롭게 여겼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이 편재성의 하나님은 늘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이 긍극적으로 승리의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큰 권세를 가지신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사랑의 하나님이나 자비의 하나님, 하나님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이 있습니다. 바로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죄를 심판하시는 심판주 하나님이십니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 쫓겨났습니다.
그 후예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어겼을 때에 노아시대에 홍수의 거대한 물결로 지구상의 모든 인생을 멸하셨습니다.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이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유황불을 비처럼 내려서 그 범죄하고 타락한 도성을 명망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너무 쉽게 망각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아버지의 존재감이 자꾸만 떨어지고 있지만 아버지라는 존재는 한 가정의 기둥이요, 제사장적인 핵심 리더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가정을 돌보고 안전하게 지킵니다. 자녀 교육에도 체벌을 합니다. 훈계도 하고 매를 들고 훈련을 시켰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자녀 된 자들의 죄악을 지나치지 않습니다. 훈계하고 체벌하십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따집니다.
그 죄의 결과로 멸망에 이르게 하지는 않지만 죄의 대가는 분명이 있습니다. 나아가 이 세상의 마지막에도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너무 쉽게 여길 때가 많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우리가 죄로 인해 영원한 심판으로 멸망 받아야 할 죄를 없이 하기 위해서 공의로우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죽이시는, 자기 아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는, 그렇지 않고는 그 죄를 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무서운 아픔을 스스로 겪으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십자가에 자기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아니 자기 자신을 내어 놓아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로우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대할 때마다 죄악의 무서움을 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극심한 사랑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사랑이신, 공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늘 가까이에 계시기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건한 두려움으로 나아가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찬송 / 예수 십자가의 피로259 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