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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11월24일 (백)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청주] 기억해 주십시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2사무 5, 1 - 3
† 제2독서 : 콜로 1, 12 - 20
† 복음 : 루카 23, 35ㄴ - 43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 없음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
이다. 축일명대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
이심을 기리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셨다. 스스로 낮추심으로써 높아지신 것이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올해는
오늘부터 30일까지)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오늘 전례
올 한 해의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예로부터 성군은 궁궐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백성을
두루 살피고자 백성의 삶 곁에 자주 머물렀습니다. 참된 임금이신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임금의 신분을 버리고 종의 신분을
취하시어 우리와 똑같아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가운데
가장 버림받은 이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시다.
★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이 임금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원로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최대의 전성기를 이룬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찬가’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분이신지 소개한다.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고, 그분
안에서 온갖 충만함이 머무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시작이시요
마침이신 것이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 죄수 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신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자기 자신도 살리지 못하면서 임금 행세를 한다고 조롱하였지만,
함께 매달린 죄수 하나는 예수님께 겸손하게 자비를 청한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그를 낙원으로 인도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임금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의문이 생깁니다. 만물의 임금이신 예수님께서 너무나 무력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왜 그러셔야만 했을까요?
우리말 가운데 곰곰이 새겨볼 만한 글자가 있습니다. 바로 ‘높’
자입니다. ‘높’을 거꾸로 보면 ‘푹’이 됩니다. 곧 높아지는 사람은 푹
꺼지게 되고, 푹 아래로 내려간 사람은 높아집니다.
하늘 높은 곳에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그대로 간직하지
않으시고 ‘푹’ 내려오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참다운
임금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왕관은 가시관이었으며, 그분의
어의는 알몸이었습니다. 그렇게 푹 내려오시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조물이 그분을
주님이라 외치며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한자어 ‘왕’(王)은 본디 하늘(-)과 땅(_)을 연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해
주신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해마다 전례력의 끝에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의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당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였고 나치의 출현을 경험했던 터라,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고백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시대적인 과제였을 것입니다. 참된
통치는 무력이 아니라 사랑임을, 참된 권력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낮추는 데에서 오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우리 모두에게 보여 주십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기억해 주십시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11월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 루카 23,35ㄴ-43
기억해 주십시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천상을 차지하는 희망을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첫 자리에, 참 왕으로 모실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성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성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께 면류관이 가까이 있습니다.
죄인이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죄의 용서에로 초대받았습니다.
이방인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생명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생활을 청산하고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며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여하게 된 자들로서 육신의 행위를 끊어 버립시다.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용서와
자비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께서 계시니만큼 실망과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상태에서도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하며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빈정거렸습니다.
군사들도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하였고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주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런 조롱과
빈정거림, 모독은 유다인들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태평성대를 이룩하실 분으로 예수님을 기대했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을 가져올 분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자기가 만든
틀 때문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에는 천덕구러기,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도 한 죄수는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그러고
나서“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죄인의 간절한 바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죄인은 간절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온 왕국은 세상의 왕국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용서의 왕국, 화해의 왕국,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는
왕국입니다.
2독서 콜로새서1장 12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19-20절에서는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하느님의 왕국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암흑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죄의 상태, 바로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이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회복한
것입니다. 누가 이일을 해 주었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해 주셨습니다.
암흑의 권세로부터 죄의 용서를 통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왕권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칼과 폭력의 권력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십자가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통치권을 행하시는 곳은 우선 우리가 머무는 외적인 땅덩어리가
아니고 우리의 내면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마음을 다스린다면 그곳에 하느님의 왕국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왕국에서는 내 뜻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육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은 죽음이지만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헤 특별한 은총을 받아 그동안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
받게 되었습니다. 새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콜로새서 말씀대로 ‘암흑의
권세에서 벗어났습니다.’‘죄의 사슬에서 풀려서 아드님의 나라에 속하는
하느님의 백성, 하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시민으로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늘시민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의 구체적 표현은 용서를 통해 드러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 모든 허물을 용서해 주고 품어주는
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주님의 통치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용서로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요즈음 구치소에 수감되어있는 분을 몇 차례 면회하게 되었습니다.
특별면회를 신청하여 세상에서 말하는 죄인과 마주 앉게 되었는데
그분이 그러셨습니다. “저는 긴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심서적,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지에
있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없고 미움이 더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들에 대해 가슴이 아팠지만 지금은
하나 둘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가끔은 불쑥불쑥 인간적인
생각이 들지만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든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주님과 함께 이 길을 갑니다. 다 용서합니다. 아프게 만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덕입니다.”
그분의 얼굴은 처음에는 불안, 초조, 미움과 증오,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얼굴에 살도 붙고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겉잡을 없었지만 지금은 자유를 회복했습니다.
미움은 칼을 갈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에게 외적인
감옥의 굴레가 있지만 그의 마음은 아무도 옭아맬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높은 담장과 철조망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파아란 하늘과 날아가는 새를 봅니다. 마음의 감옥이
더 무섭습니다. 어떤처지 환경 안에서도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주님의 왕국으로 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까? 내 삶의 여정에서
무엇을 기억해 주시고, 감추고 싶은 부끄러움은 무엇인지 돌아보고,
자비와 용서를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천상을 차지하는데 걸 맞는 삶의
처신이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면 그 자리가
천국입니다.
사실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았다면. 주님,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부족함대로 상벌을 받겠습니다.
자비를 청할 염치도 없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뜻대로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천상에로 가는 과정에 있어서 죽음이라는 세상의 떠남과
이별을 거쳐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다가올 죽음이라는 종말을 통해 약속된 천상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천국의 문, 하늘의
문은 지금 여기서부터 열리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매순간, 머무는
자리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의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아드님의 나라에로
한 발 다가서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통치 안에서 사는 은총을
간구하며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누리시길 빕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 나의 믿음은?
2013년 다해 12월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맞이하는 별다른 일 없는 하루였습니다.
오전에 있었던 ‘신앙의 해’ 폐막 미사 말고는 특별한 일이 없었지요.
그래서 어제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오늘은 미뤘던 책도 읽고,
강의를 위한 글도 쓰자.’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의
산책 외에는 계속해서 방에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책도 많이 읽고,
글도 많이 썼을까요?
결론을 이야기한다면 책을 꽤 읽었지만 글은 한 글자도 쓰지
못했습니다. 편안해서일까요? 오히려 글이 써지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오히려 바쁘고 정신없었을 때 글을 더 많이 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글들이 간절함과 진실성이 더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사람들도 알아채는 것 같더군요. 제가 지금까지
7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 중에서 많이 팔린 인기 있었던 책들은
여유 있고 한가했을 때 썼던 책이 아닌 어렵고 힘들다면서 버거워하고
있을 때 썼던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어렵고 힘든 시간이 나를 성장시키고 지금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거부하고 피할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고통과 시련의 시간들이 주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면제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시간들은 선을 이끄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안에서 분명히 견디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그리스도 왕 대축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날이지요. 그런데 그
왕의 모습은 우리들이 알고 있던 모습과 많이 달랐습니다. 즉,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지배하는 왕이 아닌, 오히려 우리와 똑같이 아니
우리보다도 더 밑바닥까지 내려가셔서 우리의 아픔에 함께 하는 겸손한
왕, 사랑 깊은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만 봐도 그 모습을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신명기를 보면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21,23)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히
아니라고 확신에 차서 빈정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신 것이지요.
바로 그때 양 옆에 있던 죄수의 반응이 다릅니다. 한 죄수는 예수님을
모독하고, 다른 죄수는 예수님께 굳은 믿음을 보입니다. 이 둘은 지나가는
행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노상강도로 알려져 있지요. 똑같은 죄를 짓고
똑같은 십자가형을 당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면서 보였던 믿음을 통해
그 똑같은 상황이 역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왕답게 곧바로 판결을
내리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굳은 믿음을 통해 오히려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 가장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요?
전 생애를 통틀어 오직 한마디로만 기도할 수 있다면,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에크하르트).
신앙의 해 폐막미사가 어제 있었습니다. 사진은 미사 후의 제대 모습.
짜장면을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정용섭)
재미있는 기도입니다. 쉽게 바칠 수 있는 기도. 그러나 항상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를 외면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또 어떠한 시간에서도, 또 어떠한 장소에서도 주님께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주님이 주신 거지만
현실적으로는 북안면 입구에 있는 손짜장 집 주방장이
4,000원을 받고 만들어 준 거였습니다.
내 앞에 놓은 짜장면이 신비로워
젓가락을 쉽게 대기 힘들었습니다.
국수가 된 밀가루,
밀가루가 된 밀,
밀이 된 밀 이삭,
밀 이삭이 된 밀알,
감자와 돼지고기와 짜장,
요정처럼 그 사이를 헤집고
모든 걸 가능하게 한 어떤 메커니즘, 또는 능력.
주님, 원하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으나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짜장면을 먹지 못하는 일이
부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에는 짜장면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짜장면을 배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의 수고가 많은 이들에게 먹는 즐거움과
생명을 살리는 손길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때도
사고가 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시오.
지금 한국에 태어나셨다면 짜장면을 좋아하셨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그리스도 왕 대축일
2013년 다해 11월24일
작년에 전임 교황 베네딕또 16세께서는 ‘신앙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은 새로 선출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신앙의 해’의 폐막을
선포합니다. 전 세계 교회는 교황님의 권고에 따라서 ‘신앙의 해’를 의미
있게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모를 때는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
우리보다 지혜로운 사람, 우리보다 성공한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의 모범은 오늘 축일로 지내는 ‘그리스도 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의 열쇠로 열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한 사람, 섬기는 사람들이 쉽게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곳은 이미 하느님 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와 원망은 하느님 나라의 문턱을 높아지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용서와 희생은 아무리 부족한 사람도, 아무리 잘못한 사람도
하느님 나라로 초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서울대교구는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하였습니다. 신앙의 해는 비록
‘폐막’을 선포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이 다할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신앙은 말씀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말씀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원망과 분노가 제 안에 가득찬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의 말씀은 원망과 분노를 용서와 사랑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드렸다면 하느님께서 나쁜 것을
주신다 할지라도 감사를 드립니다.’ 욥은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저는 욥기를 읽으면서 제 앞의 시련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둘째, 신앙은 기도로 자라는 것입니다. 자동차는 아무리 좋아도
기름이 있어야 운행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시작된 신앙은 기도라는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기도라는 샘물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 하셨습니다. 40일 동안 단식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기도가 없는 신앙은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시련의 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지지 마련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단단한 바위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습니다. 태풍이
불면 그 사람 곁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셋째, 신앙은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가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나침판과 같습니다.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 나주의 율리아를 따르는
사람들도 말씀을 읽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참된 신앙의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없습니다.
신천지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말씀과 함께 하고, 기도를
하지만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잘못 설정한 것과 같아서 엉뚱한 곳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고, 사도들에게 교회를
맡겨주셨습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는 2000년 역사를 통하여
신앙의 나침판이 되었습니다.
넷째, 신앙은 미사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비교하는 것은 발전의
기회가 됩니다. 하지만 지나친 비교는 상대방을 무시하기도 하고,
나와 다른 것들은 틀린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럴 때 전쟁, 폭력,
다툼이 생기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하나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모시게 됩니다. 주님과 하나 된 우리는 신앙 안에서
모두 한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하나 될 때 우리는
‘이념, 지역, 학연, 혈연’의 벽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신앙은 사랑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고 합니다.
신앙은 나눌 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버릴 때 비로소 빛을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비로소 보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그리스도 왕은 어떤 분이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권위는 있으셨지만 권위적이지는 않으셨습니다. 힘은
있으셨지만 그 힘을 남용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셨지만 오히려 섬기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그분은 피땀을 흘리면서까지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병환자, 중풍병자, 소경, 세리와 창녀들과도 함께 하셨고 그들을
치유해주시고,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분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의 힘은 사랑함에서 생겼습니다. 그분은 비록 돈과
조직, 엄청난 배경은 없으셨지만 희생과 봉사 그리고 기도의 힘으로
세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분은
승리하셨고, 그분은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었고, 오늘 우리는 그분을
그리스도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말라버리는 들꽃과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서 외로이 떠있는 작은 배와 같다고도 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님과 함께 지내면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방울도 아름다운 보석으로 변하게 됩니다. 저녁이면
말라 버리는 들꽃도 천상의 향기를 갖게 됩니다. 고통의 바다에 떠있는
작은 배도 목적지를 향해서 힘차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2013년 다해 11월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
복음 : 루카 23,35ㄴ-43
<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나오는 ‘사랑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란
소제목으로 소개된 내용입니다.
현수는 손이 다쳐 붕대를 감고 있었습니다. 오전 내내 방에만 누워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 그동안 일하던 공사현장을 찾았습니다. 현장 소장은
쏘아붙이듯 말했습니다.
“설마 그 손을 해가지고 일하러 온 건 아닐 테지?”
그는 무작정 길을 걸었습니다. 도시 곳의 궁전을 짓다가 다쳐버린 손,
그리고 그 안에서 안락하게 사는 사람들, 방세도 내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 시골에 중풍으로 누워 자신의 돈을 기다리는 아버지. 그는 편의점에
들어가 소주 한 병을 샀습니다. 그리고 근처 아파트 놀이터에 앉아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가 구름다리 위에서 놀고
있는데 위태롭게 보여 달려갔습니다.
“조심해야지.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구.”
아이는 말없이 현수를 보며 웃었습니다. 현수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술을 다시 마시며 아파트 단지의 주차장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일할 시간인데도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했습니다. 그는 화가 나
마시던 병을 던져버렸고 병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병 조각에
반사된 햇빛이 현수의 눈을 자극했습니다. 그 빛과 함께 무시무시한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현수는 아이에게 다시 다가가 물었습니다.
“엄마는 어딨니?”
“집에 있어요.”
“아빠는?”
“아침에 회사 갔어요.”
“너, 지금 아빠 보고 싶니?”
“네.”
“그럼 수진아, 우리 아빠한테 갈까? 아저씬 아빠 친구란다. 우리 아빠한테
가서 인형 사달라고 할까?”
“아저씨가 아빠 친구예요?”
아이는 붕대를 감은 그의 손은 의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응. 아저씬 아빠 친구야. 그러니까 네 이름이 수진이라는 것도 알고 있지.”
수진이는 자신이 가지고 놀던 공에 자신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현수가
보았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는 몇 번 고개를 돌려 아파트를 쳐다보았지만
얌전하게 현수를 따라왔습니다.
현수는 아이를 자신이 살고 있는 금호동 산동네로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아이가 아빠를 찾을까 봐 마음 졸였지만 아이는 이상하게도 아빠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집 번호까지 알아내고, 언제 전화해서 얼마를
요구할 것인지 또 어떤 방법으로 돈을 전달 받을 것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자 아이가 불안해하더니 급기야 울기 시작합니다.
“수진아, 울지 마. 아저씨가 나가서 아빠한테 전화도 하고 빵도 사올게.
아저씨 올 때까지 여기서 나가면 안 돼. 밖에 나가면 아저씨한테 혼나.
알았지?”
전화는 좀 더 어두워진 때 하기로 하고, 가게에 내려가 빵과 우유를
사고 아래 문방구에 내려가 만일을 대비해 끈과 비닐테이프를 샀습니다.
수진이는 아빠에게 전화를 하고 왔고 오늘은 아저씨 집에서 자고 오라고
했다는 말을 믿지 않고 받은 빵을 던져버립니다.
“알았다. 알았어. 이따가 집에 데려다 줄게.”
그러자 마음이 놓였는지 그가 집어준 빵을 다시 받습니다.
“아저씨도 먹어요.”
아이는 빵 한 쪽을 손으로 떼어 그에게 주었습니다.
“아냐, 아저씬 배고프지 않아.”
그 순간 그는 냉정해져야 한다고 다짐하며 손의 붕대를 단단히 고쳐
맸습니다.
“아저씨, 손 왜 다쳤어요?”
현수는 아이의 물음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끈과 비닐 테이프가
들어있는 손가방을 한 번 더 본 후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화장실에서 다시 나왔을 때 아이는 방에 없었습니다. 다급한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다가 약국 앞에 서 있는 아이를 보았습니다. 현수는
죽일 듯이 쏘아붙였습니다.
“엄마한테 데려다 준다고 했잖아. 왜 혼자 밖에 나갔어? 아저씨가 나가지
말랬지? 어서 바른대로 말해. 너 밖에 나가서 엄마한테 전화했지?”
아이는 겁을 먹었는지 울기만 할 뿐입니다. 방으로 데리고 와서 끈과
비닐 테이프를 꺼냈습니다. 그 때 아이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습니다.
“아저씨 손 다쳤잖아요.”
대일밴드였습니다. 순간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그리고 낮에
현장 사무소에 갔을 때 소장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설마 그 손을 해 가지고 일하러 나온 건 아니지?’
현수는 재빨리 끈과 비닐 테이프를 등 뒤로 감췄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서둘러 방을 나왔습니다. 어두운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파트 단지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무렵이었습니다.
현수는 끝까지 아이를 속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진아, 저 있잖아. 아저씨는 아빠 친구가 아냐. 너한테 거짓말한
거야. 미안해.”
아이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빙긋이 웃었습니다.
“아빠 친구가 아니라는 거 나도 알아요. 우리 아빤 지금 하늘나라에
있거든요. 그런 것도 모르는 친구가 어디 있어요?”
아이의 말을 들은 현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근데, 낮에는 왜 아빠가 회사 갔다고 한 거야?”
“누가 물어보면 그렇게 말하라고 엄마가 그랬어요.”
“그럼, 아저씨가 아빠 친구가 아닌 줄 알면서 왜 아저씰 따라왔어?”
“아저씨가 불쌍해서...”
“아저씨가 왜 불쌍한데?”
“아저씬 손이 많이 아프잖아요. 아빠도 병원에서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었거든요. 엄마는 아빠가 불쌍하다고 만날 울었어요.”
현수는 목이 메어왔습니다.
“수진아, 정말 미안해. 다시는 아저씨 생각하지 마. 아저씨는 말야...”
“울지 마세요, 아저씨...”
현수는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아이에게 엄마에게 전화를 하라고 하고
길 건너편을 향해 뛰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엄마가 한참동안
수진이를 끌어안는 것을 보고, 또 수진이가 자신이 준 보라색 우산을
들고 자신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따라가는 것을 보며
세상엔 아직도 사랑이 있으며 사랑이 있기에 살만한 곳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975년 신안앞바다에서 한 척의 보물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안의
보물은 도자기와 화폐 등인데 그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보물선은 약 700년 전 중국 원나라 때 일본으로 가던 고급 상선이 어찌된
일인지 그대로 가라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보물선이 발견되게 된 발단이 재미있습니다. 신안앞바다에는
가끔씩 파도에 밀려 도자기들이 떠내려 왔습니다. 한 어부는 그것을 주워
개 밥그릇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온 친척이 그
도자기를 감정해 보겠다고 가져갔던 것입니다. 당시 감정가가 4억
5천이었습니다. 강남 아파트 한 채가 7천만 원 할 때였다고 합니다.
현수는 자신의 가치를 세상의 아무 쓸모없는 버려진 인생 낙오자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가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수진이는 현수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사랑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손이 다쳐 아무
쓸모없이 내쳐졌던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누군가의 사랑, 그것이
현수에게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주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오른 쪽에 못 박혀있는 강도에게 수진이와
같은 분이셨을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곳에서도 사랑을 발견할 수
없었던 강도. 그 분노로 자신도 망가지고 세상도 망가뜨리려고 했던
외톨이. 그런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어떤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을지라도 당신만은 이렇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의 고통을 함께 해 주시는 분. 그래서 우도는 오늘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치 현수가 같은 세상에 살면서 증오의 세상이
따듯한 세상으로 바뀌는 것을 수진이라는 한 아이를 통해 경험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나라는 장소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 날 장소적으로는 ‘저승’에 내려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랍어로
‘파라다이스’라고 표현된 하느님나라는 내 안에 사랑이 들어왔을 때
만들어지는 행복한 세상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오늘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참 행복의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치를 온전히 증명해 줄 사랑을 지니신
분은 오직 그분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느님도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왜 이 세상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힘든 지옥이기 때문에 덜 힘든 자살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의 행복을 관계를 통해 느끼게 하셨습니다.
늑대를 부모로 생각하는 아이들은 늑대수준의 행복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늑대는 나를 인간으로 느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의 온전한 가치를 부여해 줄 한 분만 있으면 됩니다. 한 사람과
혼인한 사람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이사람 저사람 쫓아다니는
카사노바와 같은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사실 한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과
아주 깊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 정처 없이 사랑을 찾아 헤매는 사람보다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그 ‘수준’이 매우 높아져있기 때문에 그 높은 수준으로 다른 모든 사람을
대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그 사랑
하나로 높은 수준에 도달하여 그 수준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를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런 자존감을 지닌 사람이 사는
세상이 파라다이스인 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인간이시기 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우리 가치를
아십니다. 우리 가치가 당신 생명을 바칠 만큼 소중하다고 오늘도
십자가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
나의 왕, 나의 행복,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입시다. 우리도
오늘 당장 내 가치를 다시 느끼게 되며 파라다이스에 들어가 그분과
함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행운아, 우도
2013년 다해 11월24일 그리스도와 대축일(성서 주간)
<주님,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루카 23,35ㄴ-43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행운아, 우도
우리의 하느님께서 자비의 하느님이란 사실은 십자가상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죄인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 하나를 남겨주셨습니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마지막 사목활동 한 가지를 수행하십니다. 극악무도한 죄인 우도를
구원으로 초대함을 통해 세상의 모든 죄인들에게 희망을 건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성 금요일 골고타 언덕에는 예수님 홀로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두 죄수가 함께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편의상 예수님 오른쪽에 매달린 죄수를 우도, 왼쪽에 매달린
죄수를 좌도라고 칭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10분 혹은 20분 전쯤이나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좌도가 많이 괴로웠나봅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거리며
놀려대고 모독하기 시작합니다.
“여보시오! 예수라는 양반! 당신이 메시아라메!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죽을 지경인데, 당신도 구하고 나도 좀 살려주시오!”
그때 좌도보다는 훨씬 인간성이 좋았던 우도가 이렇게 좌도를
꾸짖습니다.
“어이, 너 좀 조용해하라!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은 대체
무슨 죄가 있단 말이냐?”
그러고 나서 예수님을 향해 고개를 쳐듭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아주
어려운 부탁을 예수님께 올립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꼭 좀 기억해주십시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정말 충격적인 말씀을 한 마디 던지십니다.
“야, 우도, 너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거길 가겠다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이 몇 명이냐? 그리고 등쳐먹은 돈은 얼마냐? 그런 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이런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피투성이의
얼굴로도 우도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며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애자제 사도 요한에게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건네지 않았던 말씀, 100% 구원을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200주년
기념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가 오늘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
정녕, 진실로, 이런 표현은 아무 때나 쓰는 것이 아닙니다. 99.9%
확실시 될 때, 거의 확정적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도에게 확실한 천국행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도는 누구였습니까? 자기 말로 자신을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빈정되는 좌도의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봐서
이런 벌을 마땅하지만...”
우도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죄만 짓고 살았습니다. 사람도 죽였을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자행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에 넘겨져 가장 무거운 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그런 우도가 죽기 10분전에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도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도의 구원 가능성을 0%로 봤는데 예수님께서는 100%로 보신
것입니다.
‘우도 직천당 사건’은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큰 죄와 치명적인 과오, 오랜 악습과 방황의 세월로 인해 괴로울 때
마다 우도직천당 사건을 묵상하며 새롭게 출발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그들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2013년 다해 11월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루카 복음 23장 35~43절)
며칠 전에 공소에 갔다 와서 ‘여전히 문제인 것이 문제로 남아있고,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구나..’ 하면서 무력감을
느꼈던 거 같은데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들이 자신의 고집과 교만, 욕심과 탐욕을 내려놓길
원하고 도우려 하셨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그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심지어 주님이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하였는데요.
지도자들과 군사들과 예수님과 함께 달린 죄수들이 ‘당신이나 구원해
보시지...’ 하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걸 보면,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력한 모습이 아니라 영웅적인 능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능력있는 신부’
라고 하면 이런 걸 떠올릴 때가 있죠. 어떤 신부님처럼 말씀을
잘해서 신자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나, 어떤 본당의 신부님처럼
수억이나 되는 빚을 빠른 시간 안에 갚아내는 것, 그리고 큰 성당을
짓고 성지를 조성해 내는 것들을 떠올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걸
하지 못하는 신부는 능력이 없는 신부로 생각되어질지도 모르겠는데요.
그와 비슷한 시선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지도자와 군중들과 함께
매달린 죄수에게도 있었던 거 같습니다. 능력을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하고 있는 거 같은데요.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그런 게 아닌 거
같습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두려움이나 신기함으로 반짝 자신을
따르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믿음을 두고 끝까지 순종하며
살아가길 바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시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 순종하시며 ‘그 길이 생명을 얻는 길이다..’ 하고 가르쳐
주시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비참하고 무력한 모습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함께 매달린 두 죄수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런 느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우리 본당 신자들이 나에게
와서 ‘신부님 기도해 주십시오. 강복해 주십시오. 안수해 주십시오..’
라고 청하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여름엔가 동물들 밥을
주고 올라오는데 도시에서 나들이 온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레지오
단체였던 거 같은데 간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나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꽃밭에 물을 주고 호수를 정리하고 있는데 작업복 차림인 나에게
와서 한 자매님이 ‘신부님 저희에게 강복 좀 주세요~’ 하고 청하셨습니다.
그 시간 일하는 이가 아니라 신부임을 느꼈던 거 같은데요.
아마 예수님도 비참하고 무력한 모습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보아 준 그 강도의 말과 행동에서 작은 기쁨을 느끼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우리에게 바라던 모습과 대답을 그에게서 들으셨기
때문일 텐데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합니까?
대부분은 그렇다고 대답할 거 같은데요. 그럼 그분께서 당신 제자들과
교회에 맡기신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살아계심을 믿고 계신가요? 고해소에서 듣게 되는
용서의 말씀을 하느님의 용서로 생각하고 계신가요? 복음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허투루 듣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계신가요?
형제들의 얼굴에서 그분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가요?
그렇지 않다면 이천년 전에 그분을 알아 뵙지 못했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미사 안에 하느님이? 그게 빵이지
어떻게 예수님의 몸이야.. 용서가 느껴지지 않는데.. 말씀, 매일 듣는
지루한 것일 뿐이야..’ 한다면 이천년 전에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 안에 하느님을 가둬놓고 평범하고 소박함
가운데 머무르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거 같은데요. 내 생각이
아니라 그분의 생각과 지혜와 사랑을 알고자 한다면 믿고 깨닫는 바가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교회의 성사 안에서, 그리고 일상의 소박한 일들 안에서 그분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식사 후에 배추꽃 심는 작업을 했는데,
아까 내려가신다고 한 자매님이 내려가지 않으시고
성당에서 전례 관련 된 일을 하고 나오셨다.
그것을 보고 같이 꽃을 심던 자매님이
‘아까 내려간다고 했는데 안 내려갔네..’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잘 알아듣지 못한 자매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뭐라는 거야~ 내 욕한 거 아냐~”
- 밤송이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 [서울] 예수님을 오늘도 임금이라 불러봅니다.
2013년 다해 11월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예수님을 오늘도 임금이라 불러봅니다.
예수님께 최후에 붙인 이름이 ‘임금’이라! 참 신기하다고 생각합니다.
유태인들의 임금에서 인류의 ‘임금’으로 점점 커진 역사가 말입니다.
예수님을 신앙하는 이들에게 매일 새록새록 공감이 피어나니 말이지요.
죽음 바로 앞에 붙여진 이름이 역시 정확한 평가였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럼 내가 죽을 때 붙여질 이름은 뭔지 몰라도 그게 맞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저 신부라 붙여지기를 바라며 예수님을 오늘도 임금이라 불러봅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라는 죄명 패가
붙어 있었다.(루카 23,38)”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기타] 그분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
2013년 다해 11월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그분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루카 23, 35-43)
오늘 사무엘기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이 임금이 되기를 원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이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날의 온 세상의 임금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셨고,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하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제 구체적으로 온 세상의 임금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고,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신 분께서 어떻게 임금이
되시고, 어떻게 만물과 화해하셨는지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하느님 아버지께
자기 자신을 봉헌합니다. 자신을 못 박은 사람도, 찌른 사람도 용서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분 곁에는 유다인들의 지도자도 있고, 군인들도 있었고, 같이 죽어가는
사형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 그분을 임금으로 모시고 구세주로
받아들인 사람은 오른편에 매달리어 자신의 일생을 회개하는
사형수였습니다.
그는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라고 고백하며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선언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읽어도 자기 자신이 이 죄수와 같이 회개하지
못하기 때문에 임금이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합니다. 그는 세 시간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며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자신의 부모와
자신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자비를
청하였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진실되게 또 가슴 아프게
통회한 사람을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몇 백 명, 몇 천 명이 죽으면 그것 때문에 매스컴이 요란합니다.
물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나눔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매년 수
천만 명이 그들의 부모들에 의해서 이미 태중에서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하고 살해되는 것에 대하여 둔감하여 죄의식도 제대로 느끼지
못합니다.
태중의 아기는 도망갈 곳도 없고, 또 살려달라고 말도 할 수 없는 가장
나약한 인간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생명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사후 피임약 등 많은 새로운 약들이 개발되어 아예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게 수정된 생명체를 녹여버리기도 합니다.
수많은 문화들이 살인을 보여주고, 불륜을 보여주고 난잡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도 모르게 바라보고 거기서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수많은 청소년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이는 게임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회칠한 무덤처럼 자신의 영혼이 다 죽어가도
모르고 하루하루의 생명에 만족하며 쾌락을 좇아 살아갑니다.
온세상의 임금이신 분이 몸소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참 임금으로 모시기 위해서 자신을 봉헌하고, 또 오른편의
죄수처럼 진실한 통회를 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고, 그분이 내 안에
살아계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글 -
◈ [기타] 내일을 위한 시간은 오늘밖에 없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내일을 위한 시간은 오늘 밖에 없습니다.'
2013년 다해 11월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복음묵상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카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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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다. 성서를 열고 해당 복음말씀을 묵상한다.
초라하다 못해 비참해 보이는 삼라만상의 왕이신 그리스도.
당신께서 말씀하시는 왕의 모습이 이런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세 가지의 부르심 즉 왕직,
사제직, 예언직에 참여해야 함을 배워왔다. 오늘은 물론 왕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각자의 왕직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는 날이기도 하다.
참된 그리스도교적 왕의 의미는 수없이 이야기 되어왔다.
단 한 가지만 기억하자. 섬기는 일이다.
그분께서 그리도 강조하셨던 왕다운 모습이란 결국 섬기는 모습이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왠지 모르지만,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자꾸 눈에 들어오는 대상은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아니다.
함께 십자가에 죽음을 맞이한 두 죄인의 모습이다.
한 사람은 예수를 저주하고 조롱한다. 욕설을 퍼붓는다.
다른 한 사람은 저주를 퍼붓는 이를 나무라면서 예수님께 자신을 부탁한다.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은 두 사람이 강도라고 전하고 있고, 오늘
우리가 주일복음으로 대하고 있는 루카 복음서의 내용과는 달리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을 모욕하였다고 전한다. 물론 요한 복음서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두 사람이 있음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교회전승은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보다는 루카 복음서를 선택한
느낌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두 사람 중 오른 쪽에 있었던 사람(右盜)
이 회개한 사람이고 왼쪽에 있었던 사람(左盜)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을 저주한 사람이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도 있다. 사실
역사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보다 개연적일
것이라는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실 때 그 양쪽에는
두 사람의 죄수들이 있었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누가 보아도 처참한 마무리를 보여주고
있다. 두 사람의 삶 모두 상처투성이가 아니었을까?
한 사람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을 맺는 것이고,
한 사람은 마지막에 상처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은총을 입는다.
얼마나 고단한 삶들이었을까? 그들의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 죽음에 대한 명분이라도 그럴 듯 했으면 슬픔이 조금이라도
희석이라도 되었을 텐데……. 죽는 순간까지 이 두 사람의 몰골은
인간쓰레기로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앞 둔 세 인물의 거래는 십자가 위해서 진행된다.
한 사람은 모든 것을 저주하며 어둠으로 끝날 것을 선택하고,
한 사람은 해방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에 대한 보증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몰골이 말이 아닌 예수라는 인물이 서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하나는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선택이라는 유한성에 대해서이다.
먼저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두 사람의 삶이 비슷한
처지였을지 몰라도 마지막 선택하는 모습을 보면, 두 사람이 이해한
각자의 삶에는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를 짐작해본다. 하루아침에
회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는 회개라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사랑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죄에 늘 넘어지는 삶이지만 이
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이 평상시 회개한 강도에게 있지
않았었을까? 반대로 예수님을 죽는 순간까지 모욕했던 강도는
자신이 걸어왔던 삶 자체가 어둠이었고,
그 어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그저 상처에 머문 인생이
아니었을까? 한 가지를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가 미래를 생각하고자
할 때는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를 잘 가꾸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비록 허물투성이고 상처투성이의
모습이라도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늘 열려있을 것이고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회개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두 번째, 선택은 늘 주어지는 것 같지마는 결국 마지막 선택이 존재한다.
삶 속에서 숱한 선택에 의해 희비가 엇갈리기도 하지만,
그러한 과정 속의 선택은 어쩌면 마지막 선택을 위한 연습일지도 모른다.
루카가 전하는 십자가 위에서 두 강도와 예수님과의 거래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얼마나 찰나적인 선택이었던가?
다시 첫 번째 이야기의 내용과 연결이 된다.
마지막 선택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평상시의
자신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 이는 주사위 놀이가 아닌 분명
선택이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희망하지 않는다.
마지막 선택을 위한 준비는 이 순간에도 이루어져야 함을 생각했으면
한다. 오늘 이야기는 쉽지가 않다.
글을 써내려 가면서도 제대로 전달이 될까 망설여진다.
하지만 여러분께서 잘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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