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을 다녀와서
瓦也 정유순
오늘은 4월 19일. 1960년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로 폭발한 4월 학생혁명 63주년 기념일이기도 하지만, 곡우 하루 전이다. 곡우(穀雨)는 24절기의 여섯 번째 절기로 청명(淸明)과 입하(立夏) 사이에 있으며, 음력 3월 중순경으로 양력 4월 20일 무렵에 해당한다. 곡우의 의미는 봄비[雨]가 내려 백곡(百穀)을 기름지게 한다는 뜻이다. 곡우가 되면 농가에서는 못자리를 하기 위해 볍씨를 담그는데, 부정한 일을 했거나 본 사람이 볍씨를 보지 못하도록 솔가지로 볍씨 담근 가마니를 덮어둔다.
<모판 - 국립민속박물관>
특히 우리나라에서의 볍씨를 담그는 것은 그 해 농사의 시작으로 상당히 엄숙한 행사였다. 그래서 “곡우에 모든 곡물들이 잠을 깬다.”,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자가 마른다.”,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 든다.”, “곡우가 넘어야 조기가 운다.”와 같은 농사와 관련한 다양한 속담이 전한다. 녹차(綠茶)도 곡우 전에 따는 것을 우전차(雨前茶)라 하여 귀히 여긴다.
<모내기>
우리나라의 벼농사는 지금까지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믿어 왔지만, 충북 청주시 옥산면 소로리에서 발견된 1만 5천 년 전 볍씨나, 고양시 가와지에서 발견된 5천 년 전 볍씨로 볼 때 우리 땅에서 최초의 벼농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소로리볍씨는 1994년 소로리 일원에 오창과학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발견되었고, 가와지볍씨는 1991년 일산 신도시 개발 중에 발견되었다. 가와지볍씨는 발견된 동네 이름이 가와지마을이라 이름이 붙었으며, ‘가와지’는 기와집이란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
날씨도 모처럼 쾌청하고 기온도 많이 올라 산책하기 좋은 날,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과 태실을 둘러보고 지하철 3호선 원흥역에서 가까운 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을 방문하였다. 고양가와지볍씨박물관에는 5020년 전 인류 농경문화의 기원이 되는 재배 볍씨가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입구에서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서면 5천년 역사의 씨앗인 볍씨가 크게 보인다.
<가와지볍씨 모형>
<신석기시대 볍씨>
가와지볍씨 발견은 우리나라 농업의 역사를 다시 쓰게 만든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그동안 가와지볍씨 발견 전까지 한반도에서의 벼농사는 고조선(청동기)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왔으나 가와지볍씨의 발견으로 벼농사의 역사가 배달조선인 신석기시대로 까지 올라가게 되어, 적어도 무려 5∼6천여 년 전에 벼농사가 시작된 것이다. 막연히 쌀은 아열대식물이므로 벼농사도 남쪽에서 시작되었으리라는 그간의 학설이 수정된 것이다.
<우리나라 벼자료 출토지>
<청동기(고조선)시대 볍씨>
화살표 방향으로 전시장에 들어서면 석기가 보인다. 석기(石器)는 돌을 이용하여 만든 인류 최초의 도구다. 식물을 채집하거나 동물을 사냥할 때 주로 사용되었고, 사용 목적에 따라 석기의 형태나 제작기술, 특정한 돌감의 선택이 달랐다. 해발 8∼10m 정도의 야트막한 야산에 위치한 가와지 3지구 유적에서도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이곳은 중기(약 4만 년 전)와 후기(약 1만5000년 전) 구석기시대의 두 문화층이 확인된 고양의 첫 구석기 유적이다.
<가와지 석기>
일산 3지역에서는 빗살무늬토기도 발견되었다. 토기(土器)는 1만 년 전 인간이 진흙을 불에 구워 만든 최초의 발명품이다. 토기의 등장으로 날 것으로 먹는 방식에서 음식을 끓이고 삶는 등 다양한 조리방법이 가능해졌고, 재료의 보관 및 운반도 간편해졌다. 중국인들은 유물을 발굴하면서 안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빗살무늬토기, 비파동검, 청동다뉴세문경과 온돌(구들)이라고 한다. 이는 중국 유물이 아니라 조선의 유물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발견 된 것은 당시 농경활동이 선진적으로 활발했다는 증거다.
<빗살무늬토기>
더욱이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유적은 서기전 3000∼4000년경 시대의 마을이 남아 있는 곳으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최대 규모의 그 당시 마을 유적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등의 조사에 의하면 둥근꼴과 모줄임네모꼴[말각방형(抹角方形)] 형태를 갖춘 움집터들로 공동체 사회를 이루며 가장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문화를 꽃피웠다. 이 유적들은 우리나라 고대시대의 생활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신석기시대 취락>
인류 최초의 산업혁명인 ‘농경’과 ‘목축’은 강가나 바닷가에 움막을 짓고 정착해 살면서 고기잡이와 사냥과 채집으로 생활했는데, 최근 여러 신석기 유적에서 볍씨가 출토되고, 빗살무늬토기에서 벼의 규소체가 확인됨으로써 조·피 등과 함께 벼를 재배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가을에는 돌칼과 뼈낫으로 이삭을 잘라 수확하고 낟알은 빗살무늬토기에 담아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 돌갈판과 갈돌로 껍질을 벗겨 먹었다.
<갈판과 갈돌>
고조선이 들어선 청동기시대에는 인류가 금속재(金屬材)인 청동(靑銅)을 사용한 시기다. 청동검·청동거울 등 다양한 청동제품이 만들어졌고, 돌도끼·돌낫·반달돌칼과 같은 석기시대 보다 정교한 농기구로 농업생산력을 크게 증가시켰다. 벼·보리·콩·수수·기장 등의 곡물이 여러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당시 여러 농작물이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벼농사 등 농업이 발달하면서 대규모 마을이 생기고, 사회적 계층화가 되었다.
<청동기(고조선)시대 농경>
특히 충북 충주시 조동리(早洞里) 유적은 남한강변에 위치한 유적으로 청동기문화층을 중심으로 신석기문화층이 함께 발굴된 곳이다. 두 문화층에서 각각 볍씨가 발견됐는데, 청동기문화층에서는 쌀·보리·밀·귀리·수수 등 많은 양(1,000알 이상)의 불탄 낟알이 검출됐고, 직사각형의 집터와 불 땐 자리가 남아 있었으며, 농경과 어로생활 등에 사용한 민무늬토기와 굽전토기를 비롯해 반달돌칼·돌보습·그물추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충주 조동리 유적>
청동기시대를 이어 철기시대에 들어서서는 인류가 철(鐵)로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했던 시기다. 철기의 생산과 사용이 본격화되면서 농업이 발달해 경제기반이 크게 확대됐다. 괭이·따비 등 철로 만든 농기구는 흙에 대한 마찰력이 적고 단단해 흙을 깊숙이 팔 수 있고, 쇠 낫은 벼의 밑둥을 포기 째 배면서 추수를 쉽고 많이 할 수 있었다. 쟁기의 보급과 함께 소를 이용한 우경(牛耕)이 시작되면서 농업생산력은 크게 향상됐다. 철기의 보급은 농경의 발전을 가져와 고대국가를 공고히 하는 토대가 되었다.
<철기시대 유물>
<철기시대 농경>
충주댐수몰유적 조사 당시 발굴한 충북 단양군 수양개(垂楊介)유적은 초기철기시대 유적이다. 남한강 유역에서 발달한 취락유적은 26개 집터에서 많은 토기와 철기유물이 출토됐다. 취락(聚落)의 밀집도로 미뤄볼 때 수양개Ⅱ지구는 최소 500∼1000호를 상회하는 큰 취락으로 판단되며, 초기철기시대 집터는 생김새가 무척 독특해 중원지역 철기시대 생활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생활상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와 발해·고려·조선에 이어 현대까지 발전해 왔음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 유물>
<고려시대 유물>
그리고 지금은 특별한 경우에만 겨우 볼 수 있는 농악(農樂)은 농사일을 할 때 필수적이었다. 그때는 힘들게 일을 하는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농업에서는 빠져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역할이었다. 나팔이나 태평소, 꽹과리와 징 등의 금속성 울림소리가 해충(害蟲)을 퇴치한다는 것이다. 특히 징의 파장은 멀리 있는 해충들에게 고막을 파괴하는 힘을 가졌다고 한다. 이러한 지혜롭고 과학적인 선조들의 영농방법은 농약과 비료 등 화학약품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김매기와 농악>
가와지볍씨박물관은 단순히 농업사를 정리해 놓은 것을 넘어 더 큰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던 인류가 농경생활을 하면서부터 문명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문명의 기원도 볍씨의 발견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식량 사정이 안정화되면서 인류의 관심이 생존에서 탈피하여 예술이 시작되고 철학이 발생하였으며 사회체제가 조직화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충북 단양 수양개 유적>
당연히 오늘도 우리 집 밥상에는 쌀밥이 올라온다. 이제껏 밥을 먹을 수 있게 해준 신에게 감사하거나 농사를 지어준 농부들에게 감사를 한 적은 있어도 볍씨 자체에게 감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사람은 밥심으로 살아왔는데, 오천년 이상을 이어서 ‘내 밥상까지 와주어 고맙구나.’라고 오늘은 쌀밥에게 인사를 건넨다.
<추수>
https://blog.naver.com/waya555/223086121668
첫댓글 등제감사합니다.
농경사회의발전상고맙습니다.
청동기시대-고조선
철기시대-삼국시대
(15박장춘)
맞습니다. 선배님.
우리는 일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도 고조선 대신 청동기시대로
표기하고 있지요.
우리가 다시 도약하기 위해서는
일제가 망가뜨린 고대사를
복원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