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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특하신 우리 산신령님
1959년 10월 *일(첫째 둘째 날)
추석을 전후해서 어렵게 시간을 내었다. 윤인진군과 이명선군(작고)과 셋이서 지리산을 찾았다. 오랫동안 별러오던 중산리→ 순두류→ 법계사로 오르는 길을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지도가 있을 리 없다.
지난밤에 상중산리 홍순표댁에서 민박하면서, 길을 잘 안다는 나무꾼들을 모아 애기를 듣고 개념도를 만들어 조심조심 오르기 시작했다. 면이 있는 논길과 밭길을 돌면서 중산리 윗 계곡에 도착했다. 왼쪽에 있는 민가는 칼바위로 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논길을 따르면 순두류라 했다. 사람이라도 있으면 물어볼 텐데 답답한 마음으로 약도만 보며올랐다. 중산리에서 1시간 40분 정도 헤매고 나니 지붕이 보인다. 날아가고픈 심정으로 순두류에 닿으니 집이라고는 다 찌그러져 가는 초가집 네 채가 고작이다. 중산리보다는 작겠지 생각은 했지만 이토록 초라한 부락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주인은 安氏 라고 했다. 안씨로부터 한번 더 상세한 설명을 듣고도 안심이 안 되었는데, 길이 뻔히 나 있으니 안심하고 가란다. 큰 위안을 받고 다음을 기약했다.
아는 사람들은 길이 빤할런지 모르지만 우리는 첩첩이 들어선 잡목 때문에 동서남북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다시 돌아설까 생각도 여러 번 해 보았지만 이왕 내친걸음이다. 생각 끝에 판쵸를 한 장 잘게 찢어 길 표시를 하기로 했다. 만약의 경우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군용대검으로 나무를 자르고 잔가지는 꺽으면서 길표시를 하기에 소홀하지 않았다. 벌써 단풍이든 큰 나무들에선 한 잎씩 낙엽이 떨어지고 있는데, 수림 속에 갇힌 우리 신세는 적막강산이다. 계곡이 빨리 어두워 진데다가 적당한 켐프지가 없어 잡목 위에다 A형 텐트를 덮어씌우고 잡목 사이로 발을 뻗어 새우잠을 잤다.
10월 *일(셋째 날)
아침식사를 하면서 작전을 바꾸기로 하였다. 무거운 짐을 한없이 지고 다닐 것이 아니라 500m 단위로 길을 개척한 다음 짐을 운반하자는 작전이었다.
간식과 수통만을 주머니에 챙긴 다음 칼과 도끼 등을 들고 길을 뚫기 시작했다. 길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쓰러진 고목 때문에 완전히 차단되기도 했다. 우회하기도, 좌회하기도, 엉금엉금 기기까지도 했다. 단지 초조한 마음은 금물이었다. 4시가 넘었다. 어디서 야영을 해야 하는지 걱정이 되는 시간이다.
그런데 산 밑에서 쇳소리가 들려온다. 모두가 자동적으로 조용해졌다. 땡 땡 땡 얼마나 반가운 소리인가? 그러고 보니 법계사 뒤편을 돌아 법계사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명선군이 소리가 나는 곳을 헤집고 나가더니 법계사 초막이 저만큼 보인다고 고함을 지른다.
일시에 피로가 싹 가시고 개선장군처럼 되어 밑으로 향한다. 손 보살님의 따뜻한 손길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10월 *일(넷째, 다섯째 날)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올 때 마다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던가? 더위나, 추위나 비 올 때나 바람 불 때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맹세에 맹세를 거듭하면서도, 또 다시 찾아오지 않고는 베기지 못하는 줏대 없는 인간임을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욕해왔던가?
그러면서도 또 다시 법계사에서 일박하고만 내 자신이 한없이 미웠지만, 법계사 까지만 오면 이런 생각이 스르르 지워지고 여기까지 고생 고생하면서 오른 걸 생각하면 내려가기 싫어지는 게 또 다른 마음이다.
무거운 륙색으로 정상에 올라가서 꼭 필요한 1박2일의 주부식과 간식, 그리고 장비만 챙기고 나머지는 법계사에 두고 출발했다. 한결 가벼워 경쾌하리라 생각했지만 체력이 차츰 떨어지더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힘이 든다.
애써 오른 보람이 있어 또다시 천왕봉에 올랐다. 올라서면 언제나 것, 이것이 나를 미치도록 만들었단 말인가? 올라온 것이 아까워 또 1박을 하기로 했다. 지리산 주능선들의 낯익은 봉들이 한없이 펼쳐져있고 계곡이며 능선들이 정연하게 늘어서있다.
이 계곡은 이름이 무엇이며, 저기 봉들은 이름이 무엇일까? 산 일지를 쓰는데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산하면 선배님들을 찾아뵙고 산 이름이며, 계곡 이름이며 중요한 지점들의 이름을 새로 만들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며, 이틀을 산꼭대기에서 약도를 그리며 나침반으로 방향을 잡아서 삽입하기 바빴다.
10월 *일(여섯째 날)
이틀간의 천왕봉 생활을 마치고 법계사로 내려오니 약속대로 손 보살이 팔선주로 환영한다. 팔선주는 8가지 나무껍질과 뿌리로 빚은 술인데 청주처럼 노르스름한 것이 굉장히 독했다.
상봉답사의 무사고를 축원하면서 축배를 들었다. 얼음만 얼지 않았다 뿐이지 바깥 날씨는 매우 차가운 날씨였지만 얼마나 군불을 때었는지 엉덩이가 뜨거워오고 술기도 도도하게 올라 흥이 절로 일어난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처럼 쏴하고 바람이 불 때면 신문지나 돌가루(시멘트)포대 같은 것으로 도배를 한 천정이며 벽이 벌렁벌렁하고 동시에 흙먼지가 촛불 속에서도 뿌옇다.
내일 아침 코라도 풀라치면 새카맣게 나오겠지만 그래도 좋다. 내가 사랑하는 지리산의 품에 안겨 좋은 벗들과 진미의 팔선주를 대작하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확실한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방문 밖에서는 상제가 아까부터 장작 팬다고 뚝딱 거리고 있다. 헌대 3시경이나 되었을까? 상제가 호랑이 보라고 소리친다. “와 크다. 송아지만하다.”라고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 호랑이 발자국은 많이 보았지만 실물은 본적이 없는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겨우 기어 드나드는 자그마한(줄을 달아 여닫는 문) 문을 왈칵 열고 내다보았다. 정말 말로만 듣던 호랑이가 대웅전(서까래만 세워둔 곳)앞을 어슬렁어슬렁 지나고 있지 않는가? 좀더 자세히 볼 요령으로 양말만 신은 발로 마당에 내려섰다. 굉장히 컸다. 대웅전 앞을 유유히 지나 바위 위의 3층 석탑을 지나고 있었다. 마당이라야 폭 3~4m 길이 5m 정도인데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든 말든 산중왕 답게 자세를 흐트러지도 않고 앞만 보고 조용히 걸어갈 따름이었다. 한번이라도 뒤돌아보았으면 하는 소망도 헛되이 실고랑을 건너 능선 잡목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얼굴이라도 한번 봤으며 하는 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상견례에 엉등이만 보여준 채 아쉽게 헤어지고 말았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는 우리에게 상제가 아는 척 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놈 상제야! 냉큼 들어오너라!” 벼락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항상 조용하시기만 했던 손보살이 대노를 했던 것이다. 어디에서 이런 헛소리가 나는가? 멀쑥해진 우리도 상제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이놈 상제야 우리 산신령님을 보고 호랑이가 무엇이냐?” 준엄한 꾸지람이 있었다. 상제가 나가고 나니 손보살은 예전의 손보살로 돌아와 있었다. 큰소리를 쳐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고는 하늘같이 영특하신 우리 산신령님을 호랑이라고 해서 되겠는가?고 반문했다. 빨래를 할 때나 식사를 할 때 자주 나타난다고 했다.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합장을 조용히 한다고 했다. 그러면 모른 척 지나가 버리고 절대로 해꼬지를 안 한다고 했다. 영특하신 우리 산신령님, 영특하신 우리 산신령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 대단했다.
출 처 : <우리들의산1991년6월호 게재> |
사진 : 법계사 앞 대륙산악회원
1965년 4월 7일 부산대륙산악회 회원들이 지리산 등정에 나서 법계사 복원 공사 현장을 찾았다.
왼쪽부터 김 건일, 한청화(본명 손 경순)보살, 곽 수웅, 김 구수씨. (부산산악포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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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누가 산에 왜 가냐 하고 물어면 산이 그곳에 있어 간다고 한다고 하던데....
아름다운 산행기 입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요즘은 반나절이면 정상정복이 가능한거겠지요....
호랑이가 있었다는게 넘 신기하기도 합니다.
성산 선생님은 직접 호랑이를 만나기도 했다네요.
그 이야긴 다음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1959년에 지리산 호랑이,,,참 전설같은 이야기입니다
어! 대륙 성고문님? !
성산 고문님을 아십니까 ?
@공갈공명(김병수,부산) 알죠^^ 산악회입학식에 오셨었죠.
그게 벌써 20년이되가네요.ㅠ
@젖가락( 김흥태*밀양)
어, 반갑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입학한 6기생입니다. ^_^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동입니다^^
지리산에 호랑이요~~~? 공식적으론 멸종 되었을땐데~~
다음글이 기대 됩니다~~~~
진정한 산악인의 정신이 읽혀집니다,,,
존경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하네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