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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25-36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본문에서 모세는 요셉을 죽이려는 형제들의 계획을 르우벤이 중단시킨 사실을 기록합니다. 또 요셉의 형들이 야곱을 속인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25-27절은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황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입니다.
그들의 야만성은 경악할 만합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의도하는 것으로 보아서 자기 동생을 여러 번 죽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말없이 음식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들 마음에 한 가닥 인정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들은 적어도 마음 속에 약간 가책을 느꼈을 것입니다.
극히 악한 사람도 죄를 짓고 난 뒤에는 두려워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족장들은 그토록 인사불성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행한 사례로부터 두려워하는 일을 배워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분노로 말미암아 그와 같은 무기력이 우리를 사로잡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이 놀랄 만큼 훌륭하게 진전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이미 두 번이나 죽음을 통과했습니다. 이제 다시 그는 예상외로 구출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 번째 죽음과 같습니다. 외국인에게 노예로 팔려 가는 것은 죽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의 형편은 구덩이에서 끌려 나옴으로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구덩이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루우벤이 그를 구덩이로부터 몰래 건져서 자기 아비 집으로 보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돌아올 기약 없이 먼 곳으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밀스러운 형세 변화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그를 높이 올리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가서 이 사건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집에 편안히 남아 있는 것보다 자기 가족을 떠나 멀리 끌려간 것이 얼마나 더 나은 것이었는지 보여 주십니다.
유다는 자기 형제들에게 요셉을 팔자고 설득하는데 그 말에는 다소 그럴듯한 점이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만약 요셉을 구덩이에서 죽게 내버려 둔다면 살인죄를 범하게 된다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는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의 피를 감춘다 하더라도 우리 손은 이미 피로 더럽혀 진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때까지에는 그들의 맹렬한 분노도 다소 누그러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유다의 인간적인 권고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제 동생을 낯선 자들에게 팔아 치운다는 것은 이만저만 패역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랄 대로 다 자란 멀쩡한 청년을 유괴하였습니다.
또 거의 왕족의 신분을 갑자기 노예로 바꾸어서 부모 형제로부터 유배되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담보되지 않는 상태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그를 산 채로 보낸다는 것은 그래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그는 노예이기는 하지만 생명은 부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자기 죄를 사람 눈으로부터 숨겨서 유익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을 때는 그들을 불태우던 악마적 광란의 불길이 가라앉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인죄는 필연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처음에 그들은 마치 하늘에는 심판관이 앉아 계시지 않는 듯이 자기들이 죄가 없다고 했었습니다.
증오심과 잔인성 때문에 그들 앞에 바른 의식은 마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스러운 인식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이 같은 시간의 흐름은, 인정머리를 완전히 저버린 것처럼 보이는 타락자에게도 한 가닥 인간미가 남아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악한 마음이 격렬하게 격동할 때는 그 과격한 마음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에 그 사람 본래 성품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 악을 깊이 반성하고 때때로 희한에 가득 차지 않을 만큼 우둔한 마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석에 나아올 때 변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은 제일 먼저 자신 안에서 자기를 정죄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회개로 인도하시며 치료가 가능한 자들이 타락자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타락자는 완고하게 자기 죄에 대한 지식을 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치료 가능한 자는 점차 방종하던 죄에서 돌아와 이성의 음성에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가 여기서 자기 동생에 대해 선언하는 것을 선지자를 통해서 전 인류에게 연장시키십니다.
그러므로 타락된 욕망이 부당한 폭력이나 다른 피해를 강요할 때마다 우리는 온 사회가 함께 묶여 있는 이 신성한 결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결속은 우리로 하여금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육신의 원수가 되며 자연 질서 전체를 깨뜨리고 왜곡시킵니다.
2. 본문 28-29절은
"(28)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29) 르우벤이 돌아와서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입니다.
혹자는 요셉이 장소에서 두 번 팔렸다고 생각합니다.
미디안은 아브라함과 그두라의 아들이기에 그의 자손은 이스라엘 자손과 확실히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상이한 이름들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즉 요셉을 택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를 살 수 있었는데 미디안인들은 그의 구입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인들이 샀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요셉을 파는 자들에게 대해 의심을 품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 그래야 마땅했지만 이익에 대한 욕심 때문에 묻기를 그만 두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여행 도중에 요셉이 어떤 자인지 물었을 법도 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민 출생을 중시하여 돈벌이를 중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들에게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 곧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육신을 따라서는 택함 받은 자손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택함 받은 자손에게는 장차 교회에 대한 소망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 두 아들에게서 그토록 많은 후손이 번식되었고, 여러 곳에 펼쳐져 있는 상인들도 그 두 사람의 후손이었다는 것을 압니다.
반면에 여호와께서 자신을 위해 택하신 아브라함 자손은 번식과 확산이 아직 미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자녀들은 마치 일찍 익는 과일처럼 극히 큰 재물도 재빨리 얻고 행복의 절정에도 신속하게 도달합니다.
이에 반해 교회는 극히 큰 난관을 느릿느릿 기어서 통과하며 오랜 기간 중에 범상한 형편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3. 본문 30절은
"아우들에게로 와서 가로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 입니다.
르우벤은 다른 용무를 구실로 슬그머니 자기 동생들 곁을 떠났다고 추측합니다.
르우벤은 그들 몰래 자기 동생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어 그 아비에게 돌려보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팔릴 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는 우회로를 이용해 그 구덩이에 도달할 목적에서 그들과 반대편 방향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르우벤은 모든 희망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므로 체념하고 자기 의도를 동생들에게 털어놓습니다. 전에는 그런 의도를 감히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소년 요셉이 당장 살해되지 못하게 노력한 것도 바로 그런 의도였다는 것을 이제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두 번째 범죄를 시인하고 안타까워 합니다.
첫 번째에는 자기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부친의 침상을 범하였습니다.
이때는 모처럼 선한 의도를 가지고 최선을 다 하노라고 했지만 허망한 꼴을 당하고 장자로써 아버지를 뵈올 면목이 없어 진 것입니다.
4. 본문 31-34절은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33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입니다.
그 형제들은 이제 최초 계획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가 자기들의 범죄를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피묻은 옷을 보냅니다.
야곱은 그 옷으로 요셉이 어떤 맹수에게 찢겨 죽었다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자기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냈다기보다 그 범죄에 가담하지 않은 종들 중 몇몇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얼마 안 있어 곧 그의 아들과 딸들이 슬픔중에 있는 그를 위로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에 약간 모욕하는 듯한 투가 숨어 있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들이 자기들에게 대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이런 말을 전하라고 명령했을 것같이 보입니다.
그들은 곤란한 일을 당할 때처럼 당황하는 듯이 가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의도하든지 간에 그들의 악은 그들을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갑니다. 그들은 자기 아버지의 마음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까지 합니다.
위선자들은 한 가지 과오에 결과에서 도피하기를 원하는 나머지 죄에 죄를 더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가장에 의해 얻는 이득입니다.
야곱은 그토록 많은 면에서 시험을 받았고 또 언제나 승리자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슬픔에 지쳐버렸습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아내의 더러운 근친 상간이나 세겜인들의 피살 그리고 자기 딸의 능욕보다 아들의 죽음에서 더 큰 슬픔을 느꼈다는 것은 아주 불합리하였습니다.
천사를 이기기까지 했던 무적의 힘은 어디로 갔습니까?
절대로 실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내로 단련시키셨습니다.
그 많던 인내의 교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슬퍼하는 성격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도 슬픔을 모를 만큼 영웅적 미덕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슬퍼하는 것은 육체가 갖는 약점 중에 하나입니다.
그 약점은 때때로 하찮은 일로서도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시련에 익숙하게 시달려 와서 역전의 용사처럼 온갖 공격에 용감히 대항해야 마땅한 자들이 풋내기 신병처럼 어떤 사소한 전투에서 엎드러지는 일이 생깁니다. 우리는 거룩한 야곱이 그토록 많은 인내에 대한 증거를 보이고 난 뒤에도 기진맥진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중에 누가 자신을 위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5. 본문 35절은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입니다.
1)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라는 말씀에서 야곱에게 닥친 슬픔의 무게는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러 회집한다는 상황에서 더욱 명백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필요에 쫓겨 함께 오기로 합의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났다' 는 말에는 공동 토의가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인간에게 고유한 위선 행하는 방식이 굉장히 폭이 넓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또 마음에 전혀 없는 경건의 직분을 이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존중했다면 자기들 잘못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비록 자기들의 악에 대한 치료책이 발견되지 않더라도 회개는 얼마간 열매를 맺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바람처럼 공허한 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 사례로써 우리는 위선을 매우 주의 깊게 피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위선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새로운 올무에 걸려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2)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라는 말씀에서는 야곱이 완전히 인내의 덕을 버렸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의미를 상당히 풍깁니다. 더욱이 그는 알면서 또 자발적으로 슬픔에 빠지기 때문에 더욱 심한 죄를 짓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가 고의로 자기 슬픔을 증가시키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이 했던 위로 거부가 인간이 줄 수 있는 슬픔의 경감에 한정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생토록 그렇게 온유한 성품으로 하나님의 멍에를 매었던 성자가 이제는 길들지 않은 말처럼 자기 재갈을 물어 뜯는다면 그것보다 불합리한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슬픔을 짓씹고 더 확대시킨다면 성질을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으로 확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비록 인간 위로를 거부하지만 여호와께 기꺼이 복종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는 성을 내어 자기 아들들을 꾸짖습니다.
그는 요셉에게 대한 그들의 시기와 악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한 아들을 다른 모든 자식보다 더 중하게 여긴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들을 책망하는 듯한 감을 줍니다. 그는 아직 살아 있는 열 아들과 함께 지내느니보다 차라리 죽어 무덤에 있는 요셉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정죄한 과도한 슬픔을 여기서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의 아들들이 죽음을 통과하여 더 나은 생명으로 들어가지 않는 듯이 음부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이로써 자신이 슬픔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과도한 슬픔의 맹목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나친 비애는 성도들에게서 신앙의 불빛을 거의 꺼뜨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열심히 슬픔을 억제하려고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욥은 경건이 크게 빼어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큰 슬픔에 짓눌리고 나자 속된 방법으로 죽음에 있어서는 짐승과 사람을 함께 다룬다는 것을 읽습니다.
절반은 천사와 같은 마음이 슬픔 때문에 이처럼 어두워진다면 우리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만일 그분의 말씀과 성령의 비췸으로 우리 슬픔을 흩으시고 우리 또한 적절한 염려로 슬픔이 우리를 사로 잡기 전에 시험을 대적하지 않는다면 음울은 얼마나 깊이 우리에게 머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슬픔을 경감시키는 주요한 것은 미래 생활에 대한 소망스런 위로입니다.
미래 생활에 열중하는 자는 누구나 과도한 슬픔에 흡수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야곱의 지나친 상심은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모세의 특별한 의도는 그의 아들들의 마음 속에서 잔인하게 왕 노릇하는 강퍅에 치욕의 낙인을 찍는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만일 그들의 아버지가 비참한 생애를 끝맺고 슬픔으로 소멸한다면 바로 자기들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아버지 야곱이 그들의 악 때문에 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상처를 치료할 능력이 없다면 고통을 완화시킬 노력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 아버지의 생명을 충분히 보살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능력이 있는데도 그의 슬픔을 경감시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심히 악합니다.
6. 본문 36절은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 입니다.
이것은 슬픈 광경이었습니다.
요셉은 한 사람의 손에서 다른 손으로 넘겨졌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린다는 것은 이전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또 적지 않은 모욕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쉬지 않고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그는 심지어 요셉을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그가 하늘의 인도로 바로 그 주권 즉 꿈에서 약속 받은 그 통치권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보디발은 환관으로 불리웁니다.
이는 그가 실제로 환관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동양에서는 내시라는 명칭이 조정의 태수나 방백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가 시위대장이었다고 말하는 자들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보디발은 전체 군대를 통솔한 것이 아니라 왕실 수호군 지휘하며 자기 휘하에 두었습니다. 거기다가 형옥 책임자 직분까지 합친 것이 시위대장 입니다.
이렇게 요셉이 사람들의 부패한 안목과 의지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부패한 안목과 의지에로 넘겨집니다.
그 방식이 철저하게 사람들의 법과 손에서 사람들의 법과 손으로 넘겨집니다.
그러나 그에 길에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크신 의지와 선하시고 크시고 넓으신 손길의 보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아래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로 만들어져 가고 훈련되어 갈 것입니다. 이런 점은 우리가 이미 기록된 어떤 상황을 넘겨짚어서 만이 아는 게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본래 정하심이 있고 인간의 의지보다 더 크신 의지로 이루실 일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