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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를 걸으며 추억을 심고,
바다를 바라보며 사랑을 가꾸고
구 본 황
내 고향 산저루와 금강
2013년 3월 2~3일의 갓집 제3차 가족여행은 두 동생이, 올해가 내 회갑이니 축하도 하고, 여행으로 산저루 고향 시절의 아름다운 정을 되살리자고 제안하여, 10명의 대가족이 뭉쳐서, 개학일 직전, 새로이 즐거운 추억을 쌓고 돌아왔다.
내 고향 산저루는 금강 가에 위치한 강촌 마을이다.
1960년대까지 버스가 다니지 않아서 5일 마다 열리는 강경장에 장배를 타고 가서 필요한 물건을 교역하였는데, 장배가 반조원 산모퉁이를 돌아 머리를 내밀면 짐을 나누어 들고 오기 위해 아이들은 달음질을 하곤 했다.
물때를 잊고 물놀이를 즐기던 벌거숭이가 물귀신에게 잡혀가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지만, 앞마당의 복사꽃이 귀여운 얼굴을 내밀 때에는 황복(금복)이 바다에서 둥글둥글올라와서, 일부러 찾아온 외지 손님들이 귀한 음식을 대접받고는 흐뭇한 발걸음으로 돌아갔고, 뒤꼍 담장 가 앵두가 빨갛게 익어갈 무렵에는 우여(웅어) 떼가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냇가까지 누비고 돌아다녀서, 할머니 손가락 사이로 미나리 우여회 무침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곤 하였다.
뭉게구름을 머리에 인 파진산이, 그림자를 길게 봉무정이 나루터 물속에 담그면서 더위를 식힐 때에는, 글갱이를 쥔 마을 사람들이 물살이 살랑대는 모래펄을 누비며 엄지손가락 크기 강 조개를 주워 담기에 바빴고, 추수가 끝난 논 물고에서 참게, 새우 잡이가 저물면, 빨간 노을이 지는 하늘 위에도, 파란 조수 물이 밀려오는 강물 위에도 철새 소리가 메아리치곤 하였다.
갓집 어린 시절로 가볼까요!
마을에서 우리 집은 마을 어귀, 청룡부리 코앞에 있는 갓집이었고, 조부모님, 부모님, 삼형제 3대가 초가집 안에서 오순도순 지냈었다.
모깃불이 소 외양간 앞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초가집 앞마당에 멍석을 깔고 온가족이 누워 솔가지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웠고, 하얀 눈 위로 달빛이 부서지는 밤에는 아련한 창호지 불빛이 새어나오는 방에서 이불 가에 둘러앉아 시루떡 맛을 즐기곤 하였다.
집안 어르신 생신날에는 동네방네 누비며 모셔온 어른들이 사랑방, 안방, 건넌방을 가득 채우고 이야기보따리를 푸느라 햇살이 마루 끝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이웃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얼른 모셔와서 식사 대접을 하고, 밤에는 이웃집으로 마실가서 주전자 째 갖다놓고 술친구가 되어드리곤 하였다.
1차 갓집 가족여행이 이루어지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삼형제는 차례로 대전 유학길에 오르다보니, 산저루와 갓집은 금강과 더불어 학창시절부터 그리운 이름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2003년 초가을, 어른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어머니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고향은 명절 전후에나 찾게 되고, 형제들 집을 오가면서 차례와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짧은 만남에 그쳐서, 지난 시절 고향에서 나누었던 따뜻한 정에 목마름을 느낀 나머지, 모든 가족이 참여하는 대규모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1차 가족여행은 2006년 2월 25일~26일에 있었고, KTX 열차 행선지는 부산이었다.
둘째네 둘째 아들 대현이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참여하다 보니, 13명의 대가족이 되었고, 부산역에 내려서 먼저 찾아간 곳은 영도대교 건너, 섬 남쪽 끝에 숨어 있는 태종대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태종대 입구에 도착하자 먼저 <기사식당>에 들어가서 민생고도 해결하고, 여독도 풀기로 하였다.
옹기종기 앉아, 활달한 아주머니의 입담 속에 해물 된장국으로 점심 식사를 하니,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태종대 산책길, 유람선에서 남도의 정취를 즐기다
태종대란 이름은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이곳 경치에 반하여, 활쏘기를 하면서 머물렀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곳은 해변을 따라 울창한 송림과 난대성 상록수인 후박나무, 동백나무 등이 우거져 있고, 해안단구가 절벽 형태로 이어져 있어서 멋진 경관을 이룬다.
푸른 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 중턱에 폭 7m, 길이 4.3㎞의 순환 관광도로와 2.1㎞에 이르는 오솔길이 있으며,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五六島)와 동남쪽으로 일본의 대마도(對馬島)가 시야에 들어오는데, 여기서 대마도와의 거리는 56㎞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태종대 산책길을 걸으면서 울창한 송림과 동백나무 숲을 구경하였는데, 흐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추워서 고생하였으며, 대마도도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 벼랑 위에는 흰 영도 등대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고, 그 밑으로 신선대(神仙臺)라 부르는 평평한 바위가 누워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망부석(望夫石)이란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얀 영도 등대에 내려와서 인어상과 함께 푸른 바다와 멋진 절벽을 이구동성으로 감탄하며 살펴본 다음, 신선대를 경유하여 유람선 선착장으로 내려와서 유람선을 탔는데, <부산의 상징> 갈매기들이 우리 배 꽁무니를 열심히 따라오는 것이었다.
배 위에서는 산책길에서 조망한 정경을 올려다보니 또 다른 감흥이 일어나는데, 주전자 섬, 오륙도까지 바라보면서 남도의 낭만을 즐길 수 있었다.
해운대에서 새긴 추억들
항구 도시에서의 즐거운 추억을 가득 안고 부산역에 다시 모인 일행은, 좌석버스로 해운대에 도착한 다음, 막내 동생이 회사를 통해 예약한 글로리 콘도에 안착하여 짐을 풀고 나서, 황혼이 지는 저녁, 맛 여행을 시작하였다.
여행 정보에 밝은 둘째 동생이 주선하여 바닷가 횟집 명가, <선창횟집>을 찾아갔는데, 파도 소리가 철썩이는 한적한 해운대 해변 길을 따라 고운 모래를 밟고 지나가던 기억, 예술적인 데커레이션 차림상에 혀에 척척 감기던 맛깔스러운 회 맛이, 지금도 아련히 그립기만 하다.
식사 후에는 달맞이 고개를 찾아갔다.
해월정 같은 분위기 있는 정자도 올라가고, 멋진 카페 <언덕위의 집>에 들어가서, 해운대 너머 바다와 광안대교 불빛을 내려다보았는데, 방을 통째로 빌려 음료와 다과를 나누면서, <쥐를 잡자>를 외치며 게임도 하고, 손을 마주 잡고 <전기 보내기> 놀이를 하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해운대의 또 다른 맛 집, <금수복국>에 가서 어린 시절 맛보았던 추억의 복국(까치복지리, 매운탕)과 복찜을 포식하였는데, 색다른 음식이라고 사양하던 큰딸아이가 한 번 맛을 보자 <오뉴월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수저를 드는 것을 보고는, 모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식사 후에는 다시 해운대 백사장을 가로질러 동백섬을 산책하였는데, 해운정, 누리마루 APEC 하우스, 등대 등을 소나무, 동백나무 길을 따라 둘러보면서 또 다른 추억을 만들었고, 점심 식사 장소로 찾아간 <해운대 암소갈비집>은 옛날 대가 집 같은, 고래 등 기와 가옥인데, 개인 반찬에 야들야들한 갈비 맛과 감자사리 맛이 일품이었다.
2차 갓집 가족여행의 추억
2차 가족여행은 2006년 12월 24일~25일에 있었고, 대전에서 모여서 막내가 빌린 12인승 승합차로 남도를 누비면서 크리스마스 마지 여행을 하였다.
우리 집에서는 아내, 작은 딸, 병모가, 둘째 집에서는 대현이가 불참하여 10명이 참석하였고, 전북 지역에서는 고창을, 전남 지역에서는 목포, 해남, 완도, 강진, 영암 지역을 돌아다녔다.
역사 문화 유적 안내는 내가, 맛 집과 숙소 인도는 둘째가, 운전은 막내가, 회계는 막내 제수씨가 각각 맡아서 알찬 여행이 이루어졌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고창이었는데, 점심 식사로 본고장 풍천 장어를 포식하니 맛 기행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으나, 빡빡한 일정으로 빼어난 자연미와 풍부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선운사, 도솔암 일대를 찾아가지 못하여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목포에 와서는 유달산을 둘러보고 나서 해양유물전시관을 찾아가 1975년 해저에서 발견된 신안선과 우리나라와 중국의 자기를 살펴보면서, 13세기 동아시아 교류사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해남 땅에 입성해서는 매서운 찬바람 속에서 울돌목을 찾았다.
전망대에 올라 거센 물살이 꿈틀대며 흘러가는 좁은 해협을 바라보면서, 5백 년 전 민족의 운명을 판가름 내는 전쟁을 앞둔 선배들의 비장한 심정을 느껴본 다음, 명량대첩비와 충무사를 돌아보고 나니, 이미 황혼이 지고 있었다.
아쉽지만, 진도대교 너머 진도 땅은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맛 집과 숙소가 부르는 해남읍으로 말머리를 돌리면서, 하루 종일 운전하느라 수고한 막내에게 모두 감사 인사를 하였다.
맛 기행 하는 즐거움
이제는 둘째가 나서야 할 차례가 되었다.
동생은 별도의 방이 갖추어져 있는 한정식 집, <천일식당>으로 우리 일행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부드럽고 고소하면서도, 달달한 떡갈비와 맛난 반찬에 반해서, 일행은 모두 해남읍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지르곤 하였다.
다음 날은 충분한 수면을 취한 뒤에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땅끝 마을을 찾아갔는데, 크리스마스 날이라서인지 엄청난 인파가 전망대 주변은 물론 인도까지 메우고 있어서 주차하기에 애를 먹어야 했다.
다시 기수를 돌려 완도로 마차를 몰고 온 다음, 장도 앞마을 장좌리에 도착하니, 마침 물때가 적당하여 청해진 본영이 있었던 장도에 걸어서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동백꽃과 동박새를 보면서 복원작업이 한창인 성 주변을 돌고나서, 달도에 와서 완도의 명물, 전복 선물 세트를 쇼핑한 후, 강진으로 향하였다.
다산 초당으로 갓집 가족들을 인도하여 초당과 천일각, 서암을 돌아보면서, 19세기 전반의 역사적 상황, 당시 사회의 모순점과 다산의 개혁책에 대하여 이야기하는데, 만덕산 동백나무 숲을 지나온 바람 소리가 백련사를 돌아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위로해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영암 맛 집에서 살아 꿈틀대는 세발낙지와 낙지구이로 포식한 후, 함박웃음 속에 귀경(서울, 대전행) 길에 올랐다.
3차 갓집 여행의 주인공들을 소개합니다!^^
이번 3차 여행은 지난 설날, 갓집 대가족이 차례를 지내기 위해 분당 우리 집에 모이면서 일사천리로 추진되었다.
지난 1차 여행처럼 KTX 열차로 여수EXPO역에 모인 다음, 막내가 운전하는 렌터카를 이용하여 이동하기로 하였고, 숙소와 맛 집은 역시 둘째가 예약, 인도하기로 하였다.
KTX 열차는 둘째 딸 나연이가 예약하였는데, 용산 팀과 서대전 팀이 각각 5명씩이었다.
3월 2일(토) 오전 8시 20분, 용산역에서 탑승하는 용산 팀은, 우리 부부와 , 큰딸 영롱, 막내아들 병모, 셋째 집 큰딸 다은이가 주인공이고, 9시 20분, 서대전역에서 합류하는 서대전 팀은, 둘째 집 부부와 큰 아들 준모, 셋째 집 부부가 이번 추억 여행 드라마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새벽 100m 달리기 대회의 우승자는 누구일까요?
분당에서 용산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서울역으로 가는 광역버스를 타야 하는데, 내가 사는 야탑동에서는 9300번 하나 밖에 없고, 주말 아침에는 배차간격이 워낙 띄엄띄엄 있어서 긴장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전날 대충 여행 준비를 해놓고, 알람 시간에 맞추어 아직 깜깜한 5시에 기상하였는데, 아빠의 회갑 여행에 참석하기 위해 휴가를 받아 나온 병모는 어제 밤 새 내내 거의 눈을 붙이지 못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서 대견스러웠다.
그런데 스마트폰에 <도깨비 같은> 9300번 광역버스의 도착 예정 시간이, 갑자기 5분전으로 찍히지 않는가!
우리 4 가족은 대충 옷을 걸치고 배낭을 멘 채, 즉석 100m 달리기 대회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산행 때 <공비> 같이 빠르다는 부러움을 사곤 했던 나는 물론, 현역 군인인 병모 보다, 영롱이가 총알 같이 앞서 질주하여서 어안이 벙벙하였다.
명절 날 기차를 타고 귀향하던 기억!
서울역에서, 혼자 한양대역부터 2호선→1호선을 쿨하게 갈아타고 찾아 온 다은이(서울 생활 1년 만에 서울 시민이 되었음을 인증함!)를 반갑게 끌어안고, 서대전역에서는 서대전 팀 5총사와 멋진 하이파이브 인사를 나누었다.
호남선은 아직 옛 철로를 사용하여, 학창 시절 명절 날 기차를 이용하여 고향을 찾아가던 추억이 저절로 떠올랐다.
대소가 형제들과 만원 열차를 달음박질하여 올라탔는데, 출입구에라도 비비고 들어갈 수 있으면 천만다행이었고, 그렇지 못하면 피난열차처럼 증기기관차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타고 돌아가야 하였다.
그런데 칙칙폭폭 검은 연기를 내뿜는 기차가 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실외 탑승객은 졸지에 흑인으로 돌변하여,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로 웃음보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정거장에 내린 후에는 늦은 밤, 나루터에서 강을 건넌 다음, 8km 강변길을 마을도 보이지 않는 산굽이 굽이를 돌아 걸어가야 했는데, 추석마지 둥근 달빛이 강물에 부서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대낮보다 밝은 산길을 오순도순 걸어가던 기억이 그립기만 하다!
여서동 한일관에서 맛 기행을 시작하다
11시 50분 경, 아담하면서도 새롭게 단장한 여수EXPO역에 하차한 후 서대전 팀과 다시 반가운 인사를 나눈 다음, 미리 예약한 렌터카를 몰고 온 관계자들과 계약 내용을 서로 확인하고 인수인계를 마쳤다.
다음에는 말할 것도 없이 <금강산도 식후경>, 점심 식사 장소로 마차(11인승 승합차)를 몰았다.
여서동 <한일관>인데, 막내가 친구의 <강추>를 받은 곳으로, 전라남도가 지정 관리하는 남도 음식 명가 2호 맛 집이란다!
여서동 4거리 부근에 있는 한일관은 관광객 대상 전문 음식점인데, 일식요리와 정통한식을 접목시킨 <여수 해산물 한정식>이 주 메뉴로, 다양한 해산물이 4차례나 나왔다. 전복, 장어구이, 새우 요리, 간장 게장 등이 입맛을 돋우었는데, 푸짐한 요리 후에 맛보는 매생이 죽도 일품이었다.
그런데 맛 집에 밝은 둘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저녁 식사를 기대하시라>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닌가!
선암사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2시쯤, 식당을 나와 마차에 올라탄 다음, 이제는 선암사가 있는 순천시를 향하여 갈 길을 재촉하였다.
17번 국도를 통하여 여수반도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여수공항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선거 공약으로 지방 곳곳에 몇 조 원씩 투자하여 공항을 조성하여 놓았는데, 애물단지로 전락하여 국민세금을 축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순천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호남고속도로로 갈아탄 다음, 승주IC에서 857번 지방도로 접어들어 이름도 아름다운 상사호를 껴안고 산길을 재촉하니, 지난 우리산악회의 가족여행이 저절로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3시 30분 경, 주차장에 마차를 세워놓고 발길을 재촉하였는데, 측백나무 숲 속에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는 승탑을 바라보며, 딸에게 한없이 다감한 아빠인 막내가 해설을 부탁하여 다은이에게 탑과 승탑에 대하여 도란도란 속삭여 주었다.
산모롱이를 돌자 무지개다리인 승선교 형제가 반가운 손길을 내미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일행을 찻길로부터 떼어내어 동생 다리부터 건너게 한 다음, 계곡 건너편 옛길을 걷다가 형 다리가 가까워오자 계곡 아래로 인도하였다.
무지개다리 아래로 강선교 정자를 바라보는 환상적인 정경 앞에서, 일행은 스마트폰을 앞 다투어 꺼내들고 멋진 포즈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산사를 걸으며 추억을 심고
선암사는 다른 절처럼 웅장한 대웅전이나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규격화된 가람 배치를 하고 있지 않고, 오래되었으면서도 나지막한 건물들이 멋진 수목을 껴안고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어서 친근감을 심어주는 특이한 절이다.
대웅전 앞에서 선암사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들려준 후, 일행으로 하여금 발길 가는대로 시골 마을 집 같은 전각들을 둘러보면서, 산사를 거니는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우리 일행은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서 삼전, 팔상전 등을 지난 다음, 마침내 종정원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무우전 돌담길로 빠져나왔는데, <아뿔사!>하는 아쉬움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수령이 500~600년이나 되었고,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된 원통전 뒷담 길의 50여 그루나 되는 늙은 매화나무들은, 기습적으로 찾아온 갓집 자손들을 위해서는, 아직 꽃봉오리도 준비해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머나먼 남도 길을 달려서 갓집 어르신들 같이 정겨운 할아버지, 할머니 나무들을 <뵈니>, 우리 일행은 모두가 싱글벙글 옹기종기 모여서 상견례 사진을 함께 나누는 즐거운 추억을 심고 돌아설 수 있었다.
장경각 앞에서는 학창시절 탐독했던 <군협지>의 기억을 떠올리곤 달마역근경을 화제로 삼형제가 이야기꽃을 담뿍 피운 다음(장경각에서 주인공이 달마역근경으로 최고의 무공을 연마했다), 삼성각 앞에 꿈틀거리며 누워 있는 와송을 돌아보았다.
나는 추사의 글씨가 지그시 내려다보는 무량수전과 당당한 자태로 천하를 호령하는 장군봉을 배경으로 늙은 용 소나무를 뵐 것을 둘째 내외에게 권하니, 감탄하여 마지않는 것이었다.
용왕 괴물 고기로 동네 잔치하는 식당을 아시나요?
5시쯤, 선암사 산문을 나선 다음, 다시 막내가 모는 마차에 올라, 선암사로 오던 길을 거슬러 내려가서 여수시내로 들어가는데, 내비 아가씨가 자꾸 시골 마을길로 인도하여, 운전 보조 기사인 둘째가 막내의 꾸지람(?)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것을 보고, 일행은 웃음보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6시 30분 경, 마차는 여수시청 부근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허름한 식당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집이야말로 맛 집에 밝은 둘째가 자신 있게 추천한 <미로 횟집>으로, 본고장 사람들이 알아주는 숨은 맛 집이었다.
이 집은 손님들이 일정한 수가 모이면, 여느 식당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자연산 광어를 잡아서, 마치 옛날 시골 마을에서 집에서 기르던 소나 돼지로 동네 잔치하듯, 회 잔치를 하는 것이 주특기란다.
잠시 기다리니, 술과 안주 거리를 가져온 종업원이, 마루에 전시한 <오늘의 주인공>을 구경하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일행은 둘째를 필두로 슬금슬금 일어나서 대면식을 가졌는데, 아 글쎄 이놈이, 예전 같으면 <용왕>이라고 불렸을 <괴물 고기>라서, 옆에 놓인 맥주병과 비교할 때, 덩치가 1m를 훌쩍 넘길 것 같지 않은가!
우리들은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가, 다투어 스마트폰을 꺼내어 놓칠세라 그 모습을 열심히 주워 담았다.
둘째는 양식 광어는 저렇게 큰 놈이 나오지 않고, 저 놈을 잡으면 엄청난 회가 나와서 이방 저 방으로 동시에 배달된다는 것이었다.
멋진 건배사와 두루미샷으로 회갑, 생일을 축하하다
한일관에서는 내가 건배사를 하였노라고 사양하니, 둘째가 일어나더니 <파란만장>을 선창하자, 일행은 일제히 <억>, <억>, <억>으로 화답하였다. (만×만=억)
막내가 다시 일어나서,
“갓집 가족이 여행하니까 좋지요?”
하고 선창하자, 일제히,
“그렇지요!”
“형님 회갑을 축하하니 좋지요?”
“그렇지요!”
“형수님 생신을 축하하니 좋지요?”
“그렇지요!”
멋진 건배사가 이어지고, 잎새주(남도 소주)와 해삼물회, 왕꼬막 등 별미가 목 줄기를 따라 넘어가자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었다.
둘째와 제수씨가 러브 샷을 하자, 막내와 다은이가 러브 샷 2단계로 한 차원 더 높였고, 드디어 나와 병모가 상대방 만 주시하는 <두루미 샷>으로 만장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드디어 변죽이 좋은 여사장님의 걸쭉한 인사와 함께 회가 배달되었는데, 혀에 착착 안기는 두툼하게 썬 회가 무한정 리필되는 것이 아닌가!
평소 양식 회도 비싸서 맛보기가 어려웠는데, 꿀 같은 자연산 회가 혀에 안기니 그만 먹는 것 자체가 고통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행복한 고민(?)을 하며, 남도 정취에 취해 대취, 포식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밥과 함께 나온 지리도 일품이었다.
곰탕 같이 시원하면서도 구수한, 용왕 물고기의 마지막 서비스 작품으로, 배가 부른 데도 깨끗이 뚝배기를 비우지 않을 수 없었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둘째 제수씨가 준비하신 케이크에 촛불 4개를 밝히는 것이었다.
올해가 내 회갑이고, 아내 생일이 내일(3월 3일)이며, 두 동생의 생일이 모두 3월(비록 음력이지만)이어서인데, 우리 부부가 주인공이라면서 촛불 끄기를 이구동성으로 요청하는 것이었다.
갓집 대가족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면서 뜻 깊은 회갑, 생일 축하를 받으니,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케이크로 후식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둘째가 용단을 내려 여사장님을 불러 선물하니, 고맙다면서 새로운 특식으로 보답하였는데, 갑자기 여닫이창이 열리더니, 옆방에서 손님들이 <회갑 축하합니다!>를 합창하며 일제히 박수를 쳐서, 얼른 일어나서 감사 인사를 드려야했다.
향일암 일출 마지는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흥겨운 잔치 마당을 마치고 나니, 8시가 넘어 사방은 깜깜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이미 도취되어 몸이 흔들거리는 막내를 대신하여, 대리기사 아저씨가 마차를 몰게 되었다.
아저씨에게 내일의 가장 관심거리인 <향일암 일출>에 대하여 물어보니, 여수 엑스포역 부근인 숙소에서 향일암까지 무려 1시간 30분이나 걸린다고 하지 않는가!
7시 부근에 일출이 시작될 테니, 준비하는 시간을 감안하면 새벽 5시 이전에 기상하여야 하는데, 대가족 전체가 여독과 주독이 겹친 상태라서, 이분에게 마차를 다시 부탁한다고 해도 도저히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천시, 인복은 얻었으나, 지리가 따르지 않음)
우리 일행은 일생의 축복 거리라는 <향일암 일출> 전망은 깨끗이 단념하기로 하고, 6시 30분에 호텔 앞에 모여서 가까운 <오동도 일출마지>를 하기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마차에서 내리자 8시 30분이 넘은 늦은 시간이라서 다른 일정은 생략하고 숙소에서 푹 쉬기로 하였다.
우아한 장식이 눈을 편안하게 하는 최신식 호텔 로비를 지나 말쑥한 12층 숙소에 들어가니, 3형제의 관심거리였던 WBC(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한국 ↔ 네덜란드 경기가 진행되고 있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MVL(엠블) 호텔에서 밤을 지새운 이야기
그런데 예상 외로 우리나라가 지고 있지 않은가!
타자들은 힘없이 방망이를 휘두르고, 투수들은 자신 없이 공을 던지다가 실점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가족 힘을 빼놓는 것이었다.
지루한 나머지 아내가 광고 시간에 채널을 돌리니, 웬걸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세시봉 사나이> 이장희 씨가 대담 프로에 나와 열정을 쏟아내고 있어서, 70년대 아날로그 정서를 되살리면서 시간을 잊고 시청하였다.
영롱이는 슬그머니 탈출하여 막내네 다은이와 호텔 탐방에 나서고, 어제 밤샌 병모는 먼저 쓰러져서 꿈나라로 가버렸다.
<노자(老子)>에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험을 면한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는 말이 있다.
<멋진 사나이> 이장희 씨의 퇴장과 함께 TV를 끄고 병모를 따라 침대 속으로 들어갔어야 하는데, 그만 야구경기의 마력에 홀려서 다시 채널을 돌리고 말았다.
기막히게 더욱 큰 스코어 차이로 지고 있는데도, 캐스터와 해설자는 <베이징 올림픽 전승 우승> 신화에 빠져서인지 긍정적인 멘트만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아내마저 꿈나라 행을 단행했는데, 나는 마치 도박 중독자처럼, 무수히 투수를 교체하며 시간을 질질 끌면서 비참하게 지는 지루한 경기가 끝날 때까지도 자리에 눕지 못하였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서 1시간가량이나 더, 앞으로의 일정과 예상까지 쏟아내며 필사적으로 야구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주관 방송사의 함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여수 박람회를 계기로 지어진 멋진 호텔에서, 그것도 모처럼 군에 간 병모까지 합류한 숙소에서, 금쪽같은 하루 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아쉬운 시간이었다.
오동도 일출을 보지 못하고, 범선 같은 호텔을 나서다
긴장을 한 탓인지, 알람과 관계없이 아침 6시 이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런데 가족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오동도 일출>을 사양하는 것이 아닌가!
방학 중인데도 면역력이 떨어져서, 이마에 붉은 반점(대상포진 증세)이 생긴 이후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내 몸 상태가 갑자기 생각이 나고,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6시 20분 경,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우리 가족은 참여하지 못하겠다는 연락을 하니, 막내는 아쉬운지 형님이라도 같이 가자고 하였지만 끝내 사양하자, 짐 정리를 하고 8시 30분에 호텔로비에서 만나기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결국 둘째, 막내 가족은 뜻 깊은 오동도 일출을 다녀왔지만, 우리 가족은 1명도 참여하지 못하고 2시간 동안의 단잠으로 여독을 달래서, 지금도 <금쪽같은 하루 밤>이 반성되어진다.
단잠을 자는 가족들이 깰까 샴푸도 없이 씻은 다음, 짐 정리를 하고 나서 8시 가까이 되어 커튼을 열어젖히니, 눈부신 햇빛 아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여수항이 손짓하고 있지 않은가!
지난 밤 늦은 시간에 호텔에 도착하여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지만, 이 숙소는 여수 EXPO에 맞추어, 여수 오동도 부근 바닷가에 멋진 범선 모양으로 여수 박람회장을 향해 지어진, 특1급 호텔이었던 것이다.
자매식당에서 담백한 통장어탕으로 여독을 훌훌 털어내고
아침 9시 경 여수시 국동 잠수기 조합 내 바닷가에 위치한 자매식당에 도착하였는데, 이집 역시 둘째가 추천한 맛 집 명가이었다.
주 메뉴는 통장어탕인데, 산 장어의 머리와 뼈를 우려낸 육수를 먼저 마련한 뒤에, 싱싱한 바닷장어를 듬성등성 썬 다음 우거지와 함께 끓여서 뚝배기 그릇에 담아 내오는데, 다른 식당에서 먹는 것과는 달리 담백하여, 여자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장어 소금구이와 멍게 젓갈, 갓 김치, 장어 쓸개주가 곁들여지니, 어제 밤의 피로가 훌훌 달아나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따끈한 개떡과 갓김치를 맛보던 추억을 밟으며,
아내와 손잡고 금오산 비탈을 오르다
10시 30분 경, 드디어 이번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 향일암을 향하여 마차가 출발하였다.
지난 2번의 우리산악회 향일암 여행이 고개를 내미는데, 날씨는 쾌청하기 비할 바 없어서, 하늘도 바다도 갓집 가족을 축복해주는 것이 느껴졌다.
11시 10분 경, 막내가 향일암 가까운 마을 비좁은 공터에 아슬아슬하게 주차한 다음, 일행은 마차에서 내려 향일암을 향해 금오산 비탈을 오르는데, 영롱이는 여독 탓인지 마차에 남아 있겠다고 하였다.
아내와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데, 주변에는 말린 홍합, 굴을 파는 가게가 여기저기서 눈을 붙잡으니, 지난 날 아내와 자그만 가게에서 따끈한 개떡과 갓김치를 맛보던 기억이 자꾸만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향일암은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원통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관세음보살을 만난 곳인데,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일출이 아름다워서 조선 시대에 향일암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남해 보리암, 강화 석모도 보문사와 함께 4대 관음도량으로 유명한데, 2009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서, 복원된 전각은 보다 화려하여졌지만, 예전 같은 고졸한 맛이 사라져서 아쉬웠다.
향일암에서 수평선에 기대어 사랑을 가꾸다
갓집 가족은 바위굴 사이에서 숨바꼭질하면서, 붉은 꽃이 탐스러운 동백나무 숲을 꼬마들 같이 오르내리면서, 산저루 어린 시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원통보전 종각 옆 바닷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바다는 가없이 파란 천으로 이어져서, 세집 가족을 함께 담아 올려, 그리운 조부모님, 부모님이 계신 옛 산저루 고향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았다.
끝없이 넓은 파란 품에 안겨서, 그리움이 밀려오는 수평선에 기대어서, 차례로 어깨를 맞대고 새로운 추억을 가꾼 기쁨을 사진에 담다보니, 가슴 속에서는 사랑의 파도가 끝없이 일렁이는 것이었다.
( 2013년 3월 23일 적음 )
※ 갓집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형의 회갑을 축하해주느라 애쓴, 두 동생에게 먼저 감사의 말을 적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사진 자료를 보충해준 <네이버 블로거>님들에게도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