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그림을 남겼고, 전칭 그림도 많다.
조선 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화풍을 보여줌으로 , 그림 자료를 조금 많이 올리겠습니다.
위의 그림은 금물로 그린 금미 산수화입니다. 이런 그림을 그릴려면 궁실이나, 권문세가의 비호가 있어야
묵란도도 보겠습니다.
이징의 묵란도
이징(李澄
본관은 전주. 자는 자함, 호는 허주. 왕족 화가 이경윤(李慶胤)의 서자이다. 화원으로 주부와 사과를 지냈다.
인조가 아주 좋아한 화가라고 한다,
1609년(광해군 1) 원접사의 수행화원으로 의주에 다녀왔으며, 1623년(인조 1)에는 여항문인 유희경의 요청에 의해 〈임장도 林莊圖〉를 그려주었다. 1628년 태조어진 개수에 참여했다. 만년에는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왔다가 3년간 머물고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산수·인물·영모·묵죽·화훼 등 모든 분야에 두루 뛰어나 일세의 명장으로 이름을 크게 날렸다.허균(許筠)은 그를 가리켜 이정(李楨-이상좌의 손자) 사망 후 "본국제일수"라고 했으며, 인조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궐내 가까운 곳에 있게 하고 화초와 산수를 즐겼는가 하면 당시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구하려고 애써 작은 조각이라도 얻으면 보배처럼 간직했다고 한다.
그의 화명은 18세기 말엽까지 지속되어 원체풍의 모범작가 또는 17세기 최고의 명가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남태응(南泰膺)은 "각체를 모두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대가였으나 옛법을 넓게 구사하되 웅혼한 맛이 없고 정밀하나 오묘하지 못하며 기교에 능하되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평했다.
(*소경인물산수화가 많아서 이런 평이 합당할 것이다.)
유작은 전칭작을 포함하여 18세기 이전의 작가로는 가장 많이 전하고 있는데, 산수화와 영모화·화조화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산수화에서는 조선 초기의 안견파와 중기의 절파계를 융합한 화풍을 즐겨 구사했으며, 궁정취향이 짙은 이금산수화도 잘 그렸다. 영모화·화조화에서는 절파풍이 가미된 묵법을 토대로 서정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소·말·기러기·원앙새 등을 많이 그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노안도 蘆雁圖〉(개인 소장)·〈연사모종도 煙寺暮鍾圖〉(국립중앙박물관)·〈이금산수도〉 등이 있다.
이징의 묵란도는 본래 산수화 9폭, 회훼1점과 한 화첩에 살료있다.
반드시 이징의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17세기 양식이다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