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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개신교의 교회에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예배에는 순서와 그 내용이 있다. 그 내용과 순서에 따라 하나님께 경건한 예배를 올려 드린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예배의 내용과 순서를 표기한 “주보”가 필요한 데, 이 주보의 순서와 내용은 일개 개인이 만든 것도 아니고, 어느 교회가 그냥 만든 것도 아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인 예배학자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잘 올려 드릴 수 있는가?”를 고심하며, 성경에 근거하여, 여러모로 심사숙고 하여 만든 것”이다. 따라서 주보는 예배학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주보를 사용함은 오늘날 모든 교회의 예배의 예전에 하나의 지침과 표준(standard)이 되어온 것으로서, 모든 교회에 하나의 전통이 되어온 것이다. 이런 전통을 따라 올려 드리는 예배를 가리켜 소위 “Traditional Worship 혹은 Classic Worship”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고로 예배의 순서를 기재한 주보에는 언제나 1) 오르간 전주 2) 예배의 부름 3) 기원(Invocation) 4) 찬양과 경배의 찬송 5) 고백의 기도 6)영광송 7) 목회기도(pastoral prayer, or prayer of intercession) 8) 말씀 봉독 9) 성가대의 찬양 10) 설교 전 기도 11) 설교(preaching), 12) 감사와 응답의 찬송 13) 봉헌 14) 봉헌기도 15) 교회소식(광고) 16) 축도(Benediction, 하나님의 복의 선언 혹은 선포) …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예배학 개론).
여기서 위에 열거한 예배의 내용인 1) 부터 14) 까지의 모든 것을 다(all) 다룰 수는 없다. “축도Benediction”에 대해서만 다룬다면 이에 대한 저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혹시 필자의 축도에 대한 견해에 부족함이 있다면 언제든 지적과 양해를 하여 주시길 바란다.
축도 Benediction 이란 무엇인가?
주보의 마지막 순서인 축도(Benediction)는 1) 예배를 집례한 목회자가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선포하는 것이다. 2) 동시에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을 향한 담임목사의 간절한 바램과 염원이 함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선포”가 담임목사의 바램 보다도 더 우선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에배에 초청하였기에, 이제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의 선포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 이시다. 목회자가 아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는 것 뿐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일군, 심부름군)이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Benediction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의 선포” 혹은 “복의 선언”이지, 축복을 비는 기도가 아니다. 그래서 축도의 마지막 말은 “… 축원 합니다”가 아닌 “... 있을 지어다” 이다. “… 있을 지어다”가 맞다. 주보에 Benediction을 “축도(祝禱)”라고 표기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축도(祝禱)”를 한자어 뜻대로 보면 “복을 빌어주는 기도”이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Benediction이란 순서를 넣은 예배학자들의 정신과 그 의도를 볼 때, 축도가 아닌 복이 있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복의 선포” 혹은 “하나님의 복의 선언”이 맞다. 따라서 “축도”란 단어를 쓰지 말고 “하나님의 복의 선언, 혹은 하나님의 복의 선포”등에 맞는 용어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혹은 여기에 맞는 적합한 용어로 대체해야만 할 것이다.
축도의 유래
이러한 “하나님의 복의 선포, 하나님의 복의 선언”인 Benediction은 성경에 기인한다. 주보를 만든 예배신학자들은 축도(Benediction)의 그 기원을 민수기 6:22-27절과 고린도후서 13:13절에서 찾았다. 또한 사도들의 다른 서신에서도 찾았다(참고: 롬 15:13, 히13:20,21,25. 유다서 24. 벧전 5:14절. 요한삼서15).
구약성경 민수기 6:22-27절에 하나님께선 모세를 통해 아론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에게 명령하시기를 기도가 아닌 “복을 선포하라”고 하셨다. 복을 주는 주체가 아론이 아닌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27절에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민수기 6:22-27절에는 아론 제사장이 복의 선포를 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2-26절).
민수기 6:22-2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의 선포를 정확히 이해한 사도 바울은 성 삼위 하나님의 기능을 구약시대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였기에, 성 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선포를 고후13:13절에 이렇게 선포하였다(예배학개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절).
이처럼 아론 제사장과 사도 바울은 “원하노라” 혹은 “있을지어다”는 말로서 “복의 선포(Benediction)”를 하였던 것이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선포
민수기 6:22-27절을 볼 때, Benediction(하나님의 복의선포, 복의선언)의 창시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기에 아론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명령한 그대로 순종하여 “원하노라”는 하나님의 복을 선포한 것이다. 아론 제사장의 복의 선포의 개념을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사도 바울 역시 “있을지어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축도(Benediction)란 “축원 드리옵나이다” 가 아닌 “있을지어다” 혹은 “원하노라”가 맞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가 아닌 “있을 지어다”인 복의 선포 / 선언이 맞다.
축도(Benediction)를 할 때, 목사들이 사도 바울의 선포인 고후13:13절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고후13:13절의 말씀 보다 더 좋은 “복의 선포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고후13:13절 말씀 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다면 능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선포한 고후 13:13절에는 복을 주시는 주체인 성 삼위 하나님이 들어있고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을 것을 선포하는 강력한 Powerful 메시지 이기 때문이다. 예배학 시간에 어느 교수가 아론 제사장의 선포인 민수기 말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라 하였다.
Benediction(축도)가 담임목사의 마지막 폐회인사이기도 하고, 성도들 가정에 복이 있기를 바라는 담임목사의 염원의 기도(빌어주는 기도)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축도(Benediction)에는 목회자가 아닌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에게 복을 주신다는 더 놀라운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 근거는 민수기 6:22-27절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7절), “… 할지니라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주보에는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성도의 반응이 계속 교차된다
사실, 예배(Worship)는 우리가 올려드리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부터 시작된다. 부르신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바로 예배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예배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그래서 주보를 만든 신학자들은 주보를 만들 때, 그냥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하여 여기에 대한 성도의 응답과 반응, 하나님의 말씀하심 여기에 대한 성도의 응답과 반응,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이에 대한 성도의 응답…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 성도가 교차되어 계속 반복되는 모습으로 주보를 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 낭독, 여기에 대한 성도의 찬양이나 회개기도 등으로 주보를 구성한 것이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주의 종(일군)이 대신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에배에 부르셨기에 우리가 응답하여 예배를 올려 드렸다면,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선 무엇인가를 주셔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선 복을 주시는 것이다. 즉, 부르심에 응답한 당신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선 축도 (Benediction)를 통해, 축도의 순서를 감당하는 당신의 일꾼(종)인 목회자를 통해, 당신의 복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뜻이 바로 축도 (Benediction)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축도 Benediction (하나님의 복의 선언)을 하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하나의 도구요, 매개체에 불과 하며, 하나님의 복을 그대로 전달하는 하나님의 종(심부름군)인 것을 알 수 있다.
축도하는 자의 구비 조건
Benediction축도를 하는 목회자는 겸손해야 한다. “~ 있을지어다” 함으로서 하나님의 복을 목회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축도하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종의 자세를 취해야 하며, 겸손해야 한다. “있을지어다” 함으로서 마치 자기가 복을 주는 것처럼 하면, Benediction의 정신에 어긋나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목사가 들어 앉는 교만과 우를 범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예배학 책은 이런 점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오늘의 목회 현장을 보면 많은 목사들이 복을 선언하고 빌어주는 행위를 상품화 하여 평신도들의 신앙을 오도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마저 탈선하는 사례를 본다. 그러나 곧 초라한 인간의 정체는 밝혀지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마는 것을 우리는 엄숙히 기억해야 한다”(예배학 개론).
또 이렇게도 지적한다. “목사는 여기 저기에서 축도를 남발하는 습관적 태도를 삼가하고, 정중한 Benediction으로서 그 진지성을 지속해야 한다”(예배학개론).
축도는 예배를 인도한 목회자의 전적인 권한이다
칼빈은 이에 대해 이런 말을 하였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탁 받은 사람들, 그것도 모든 시간과 정신을 온전히 바쳐 주어진 사명에 전념하는 종들에 의해서만 선포 되어져야 한다” 또한 “Benediction 을 선언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제적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 받고, 그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는 목사들”이라고 규정한다(예배학개론).
축도는 두 손을 높이 들고 당당히 하는 것
아마도 예배학자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는 그 근거를 레위기 9:22절에서 찾았을 것이다(성경대백과사전, 정인찬 편).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레위기 9:22).
그러므로 축도를 행하는 목회자는 아론 처럼 두 손을 높이 들고 당당히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은 축도를 겸손히 한다고 기도의 형식을 취하여 “원하옵나이다 혹은 축원합니다”로 마치는데, 이 것은 주보를 만든 예배학자들의 축도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Holy Bible)을 따르기에 오히려 아론처럼 당당히 할 필요가 있다. 예배학개론은 축도(Benediction)를 할 때 조심할 2가지를 이렇게 말한다.
첫째,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여 축복하소서”…. 등의 표현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더 높은 신에게 우리를 위하여 복을 빌어달라는 뜻이 되므로,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신다는 인식을 계속하면서 거기에 맞는 어휘를 활용해야 할 것이다.”
둘째, Benediction의 끝맺음을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나이다”’고 함은 “하나님이 주실 복을 선언하지 않은 기도이기 때문에 목사는 여기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복을 달라고 호소하는 일반적 기도와 복을 선언하는 목사의 benediction과는 혼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예배학 개론).
구약의 제사장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사용했던 축도(Benediction)은 단순한 기도라기 보다 하나님이 내려주실 것을 선언하는 Pronounce 행위라는 것이다(예배학개론).
“축도 (Benediction)의 근본 취지는 결코 오늘의 육적인 삶에 풍요한 물질적 만족을 누리도록 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Benediction 의 참 목적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세상에 나아가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한 생활을 강조하고, 하나님을 위한 사명적 존재로서의 삶을 위한 복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요즈음의 많은 교회들은 “오늘의 위탁(charge)”이라는 순서를 마련하여 새로운 사명의 부여를 강조한 후에 Benediction을 하는 예가 많이 있다”(예배학개론).
맺음말
요즘에도 축도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하고 이런 저런 주장이 난무함을 본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목사가 아닌 일반교인도 축도를 할 수 있다고 자기 주장을 한다. 이러한 것은 예배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주보가 무엇이고, 예배의 순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도 모르고, 왜 축도가 예배의 마지막에 있는가도 모르고, 왜 축도를 담임목사가 해야 하는가도 모르고, 축도는 어떻게 하는가를 모르기에 하는 소리들이다. 예배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축도가 성경적인 분명한 근거가 있음을 모르기에 하는 소리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볼 때에
1) “축도”는 예배를 인도한 목회자의 전적인 권한이다. 축도는 담임목사가 맡는 것이 정상이다. 이유는 예배에 부른이는 하나님이시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복 주기를 원하는 하나님이시기에, 동시에 돌아가는 성도들을 향한 간절한 염원과 바램이 담임목사에게 있기에, 공예배의 축도는 예배를 인도한 담임목사가 축도(Benediction)를 하는 것이 타당하다.
2) 담임목사는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당당히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도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성도들의 각 가정마다 넘치도록 정중히 해야 할 것이다.
3) “축도”란 용어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선언 / 선포에 적합한 용어로 대체해야만 할 것으로 사료된다. 축도(祝禱)는 “빌어주는 기도”란 뜻을 가졌기에 많은 분들이 오해와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가 쉽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의 일군(심부름군, 종)인 목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것이기에 사도 바울처럼 “… 있을지어다 !!”(고후13:13)로 끝내는 것이 바르고 성경적인 것이다.
5) 축도를 할 때에 가급적 다른 말들을 붙여서 길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공예배의 격식에 맞주고, 예배의 소요시간을 생각하여, 사도바울처럼 간결하게 POWERFUL한 선포를 하며, 복 주시는 성 삼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하심”이(고후13:13) 반드시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참조 : 예배학개론( Page 150-152, 1997, 정장복 저) / 성경대백과사전(정인찬 편)
김한길 목사,(미남침례한인총회 원로목사, 세이연 위원)/http://www.bonhd.net/news/articleView.html?idxno=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