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1.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에리히 프롬 (1900 ~1980) 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독실한 유대인 가정에서 성장했다. 하이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전공하였고 뮌헨과 베를린에서 정신 분석학을 연구했다. 한때 프랑크푸르트 학회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며, 1933년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프롬은 마르크스의 철학 사상과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융합하고 근대인의 자유 의미를 연구하여 현대 휴머니즘 사상을 발전시켰다. 프롬의 대표작으로는 『자유로부터의 도피』, 『인간 상실과 인간 회복』, 『건전한 사회』, 『마르크스의 인간 개념』, 『사랑의 기술』, 『희망의 혁명』, 『소유냐 존재냐』가 있다.
2. 시대적 배경
1930년에 들어서면서 독일 사회에 급격한 정치적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바로 히틀러의 등장이다. 그리고 1933년에는 마침내 나치 정권이 성립되었다. 프롬은 파시즘이 발생한 원인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근대인에 대한 자유의 의미를 주제로 이 책을 저술한다. 파시즘이 승리한 원인에 대해서 하나는 정치·경제적인 설명 방식으로 경제 공황과 독점 자본의 제국주의적 충돌이나 소수 지배자의 권모술수와 탄압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다. 또 다른 원인은 심리학적 설명 방식으로 히틀러를 광인이나 정신병자로 보는 것이다. 프롬은 이러한 설명 방식들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다고 지적하고 정치·경제적인 설명 방식과 심리적인 설명 방식의 변증법적인 상호 작용 속에서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 심리적인 설명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3. 자유의 의미
프롬은 근대 서구의 역사가 인간들을 구속한 정치적·경제적·정신적인 질곡에서 벗어나 자유를 쟁취하려고 하는 노력의 역사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근대 서구인은 자연의 지배와 교회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절대주의 국가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많은 사람이 제1차 세계 대전이 최후의 투쟁이 될 것이며, 이로써 자유를 위한 궁극적인 승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파시즘이라는 권위주의 조직의 등장은 이러한 믿음이 순진한 희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프롬은 권위주의 조직이 등장하게 된 것은 근대적인 자유의 양면성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인간은 전근대적인 사회의 여러 가지 구속에서 벗어나면서 자신을 분리·독립된 존재, 즉 개인으로 의식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프롬은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부른다. 근대적인 자유의 진전은 이 개체화 과정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전근대 사회에서 인간은 공동체적 유대에 관계에 속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그러나 개체화 과정은 안정감을 주었던 유대 관계로부터 분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근대의 자유는 한편으로 인간을 독립적인 개인으로 성장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을 고독으로 빠뜨릴 위험이 존재한다.
개인이 견디기 어려운 고독에 빠지게 되면,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권위주의 조직이 승리하게 된 심리적 원인이라고 프롬은 주장한다. 프롬은 자유를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와 ‘~에로의 자유(freedom to)'로 구분한다. 전자는 소극적인 자유이고 후자는 적극적인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에서는 이 후자가 전자보다 더 본질적이다. 근대 서구가 획득한 자유는 소극적인 자유이다. 그래서 적극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개인에게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가능성이 없을 때 개인은 고독과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개인은 고독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의존할 수 있는 외적 권위를 찾게 된다. '소극적인 자유로부터 적극적인 자유로 전진해 갈 수 없는 한, 결국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하게 된다.’
이런 도피 심리는 많은 사람이 전체주의를 지지하게 된 원인이었다. 그런데 근대에서 사람들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려 했던 일은 파시즘의 등장이 처음은 아니다. 파시즘 이전의 대표적인 사례로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이 있다. 이렇게 보면 근대는 자유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자유로부터 도피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사회적 조건이 되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4. 도피의 메카니즘
프롬은 근대인들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메커니즘을 권위주의에 대한 도피, 파괴성에 대한 도피, 기계적 획일성에 대한 도피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권위주의에 대한 도피는 인간이 개인적 자아의 독립을 버리고 자신이 의존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자신을 융합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프롬은 권위주의에 대한 도피를 심리학적으로 사디즘(sadism)적 성향과 마조히즘(masochism)적 성향으로 설명한다.
마조히즘적인 성향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형태는 열등감, 무력감, 자기 무가치 감정이다. 마조히즘적인 성향을 지닌 인간은 자기를 무력하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느끼고,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나 제도에 복종하려고 한다. 사디즘적 성향은 타인을 완전히 지배하고자 하는 성향이다. 사디즘적인 성향에서 본질적인 것은 타인의 지배로부터 쾌락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다. 마조히즘 성향과 사디즘적 성향은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성향은 모두 참을 수 없는 고독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공통점을 가지기 때문에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파괴성에 대한 도피는 외계를 파괴함으로써 그 외계에 대한 무력감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파괴성에 대한 도피는 외계의 압박에서 자기를 구제하는 거의 자포자기적인 최후의 시도이다. 기계적 획일성에 대한 도피는 ‘자동 인형적 순응’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프롬은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거의 모든 정상인이 취하고 있는 해결 방법이라고 한다. 대다수 사람은 현대 민주 사회에서 스스로 어떤 권위에 예속되지 않고, 사상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인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현대인은 강제적으로 획일화된 퍼스낼리티를 자신의 자아로 받아들여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상태로 순응해 간다. 이렇게 다른 자동인형과 같은 인간이 됨으로써 고독이나 불안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치러야 할 대가는 자아의 상실이다. 현대인은 평균적 인간이 되어 자아를 상실한 채 살아간다. 이것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만연하고 있는 자유로부터 도피 현상이다.
5. 자유와 민주주의
프로이트가 개인의 심리를 사회 과정과 분리하여 자연적 본능으로 본 데 반하여 프롬은 개인의 심리가 사회적인 조건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 있는 것으로 본다. 사회적인 조건들이 개인의 심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개인의 심리가 사회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고독감과 무력감이라는 심리는 사회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구조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해결 방법도 사회의 구조적 개혁에 결부되어 있다. 근대인이 고독감과 무력감에 빠지게 된 것은 소극적 자유는 획득하였지만, 개인적 자아의 실현이라는 적극적인 자유를 아직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롬은 자본주의적 사회를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구조적 개혁을 적극적 자유의 획득을 위한 전제 조건으로 주장하면서 ‘모든 사람과의 적극적인 연대감과 애정과 노동이라는 자발적인 행위’를 적극적 자유의 실현 방법으로 제시한다.
6. 후기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인간이 주어진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이유를 사회 심리학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치러야 할 자아의 상실에 대해 개인적 자아의 실현으로 적극적인 자유를 획득하라고 주장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눈길이 가는 부분은 자아의 상실과 자아의 실현에 관한 부분이다. 프롬은 1930년대 후반과 1940년 초반에 호나이, 아들러, 매슬로우와 지적 교류의 기회를 가졌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지식인들의 인간 이성에 대한 실망과 충격은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었을 것이다. 도구적 이성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 대한 해답은 인간의 주체적 삶을 위한 자아실현이다. 그 결과 매슬로우를 중심으로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심리학이 탄생한다. 모든 이론과 사상은 시대 정신의 결과이다. 공자의 『논어』가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했듯이 매슬로우의 인본주의 심리학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물이다.
평소 인본주의 심리학을 배우면서 막연히 생각했던 자아실현의 개념이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을 읽으면서 그 이론적 바탕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왜 인간의 성장과 사회구조의 변화를 위해 자아실현이 중요한 개념인지 이 책은 권위주의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설명한다. 자아실현은 윤리적이나 도덕적인 명제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실존적인 명제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힐링과 위로, 인문학이 넘쳐나는 시대를 지나가고 있는 것도 이런 자아의 상실로 인한 고독과 무력감을 치유하려는 몸부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근대에서 벗어나 계몽의 시대를 거쳐 자유(소극적)를 만끽하고 있다는 지금,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적극적) 존재인가를 반성해 본다. 신자유주의의 자본이 권력이 된 시대에 정치적·경제적·정신적 권력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적극적인 자유를 획득하고,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사회 구조의 변화를 위한 선행 조건은 각자 삶에 대한 자각과 노력을 통한 자아실현이다. 이러한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행위가 인간이 중심이 되는 적극적 자유로 향하는 길이 되고 희망이 될 것이다.
참고 도서 :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지음, 원창화 옮김, 홍신문화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