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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소리여행
바다가 흐른다. 강처럼 빠른 물살을 타고 바다가 흐른다. 바다는 흐른다. 빠른 물살을 타고 울부짖으며 바다는 흐른다. 나는 지금 울부짖으며 흐르는 바다, 그래서 이름도 울돌목(鳴梁)인 바다 앞에 서 있다. 음악평론가 김진묵 선생이 이끄는 인문학습원의 진도 소리여행을 따라와 진도로 들어가기 전 울돌목 앞에 선 것이다. 414년 전 저 바다에선 아군과 왜군의 전함이 어지러이 교차하며 북소리, 대포 소리와 병사들이 지르는 함성 소리가 저 좁은 해협을 가득 채우고 있었겠지. 세계 해전사(海戰史) 어디에 13척의 배로 적선 133척을 격파하고 완벽한 승리를 쟁취한 해전이 이순신 장군의 명랑대첩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난 후 선조가 해군을 없애려고 할 때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고 하였지.
나와 같이 울돌목을 바라보고 있는 회원들은 말은 하지 않아도 다 같이 414년 전의 그 해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것이다. 저 밑 바닷가에선 이순신 장군이 한 손에 서첩을 펼쳐들고 빠르게 소리 지르며 흐르는 바다를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고, 해협 건너편에는 또 다른 이순신 장군이 높은 대 위에서 긴 칼 옆에 차고 가슴을 펴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이순신 장군은 이 울돌목에서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작전 구상에 여념이 없으신 것 같고, 저 건너편 높은 대 위의 장군은 해전을 승리로 이끈 후 자랑스럽게 다시 이 울돌목을 바라보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공원을 둘러보는데 커다란 돌비석 위에 쓰여 있는 것은 ‘若無湖南是無國家’. 명랑대첩이 끝난 후 장군께서 하신 말이다. 그렇지 그 때 이순신 장군이 있어 호남을 지키지 못하였다면 왜놈들은 서해로도 치고 올라와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어졌겠지. 그런 장군을 속 좁은 선조는 죽이려 하였지. 만약 그 때 장군이 선조의 의도대로 사형에 처해졌다면 이 나라는 어찌 되었을 것인가? 장군은 그렇게 모진 고문을 당하고 나와 백의종군을 하시다가도 여기 이곳에 오셔서 13척의 배로 또 다시 이 나라를 지켜주셨다.
공원에는 당시 이름 없이 장군을 도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민초들의 이야기도 있다. 아버지가 적선에 포위된 통제사 이순신 장군을 구원하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하자 그 시신을 안고 일성통곡으로 복수를 맹세한 마씨 형제들. 그들은 적이 패퇴할 때까지 결사의 항전을 그치지 않았다. 열심히 배를 수리하는 민초들의 모습도 보인다. 온전한 전선(戰船) 하나 남은 게 없어 해전이 불가능하다 할 때 밤낮으로 폐선을 수리하여 전쟁 준비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저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 저들 민초들이 충심으로 이순신 장군을 도우지 않았던들 저 앞바다의 승리가 가능하였겠는가?
이제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타 진도대교를 건너 드디어 보배로운 섬 진도(珍島), 땅이 기름지다고 하여 옥주(沃州)라고도 불리었던 섬 진도로 들어간다. 예전 목포에 근무할 때에 주말이면 서울로 올라가기 바빠 여름 해가 길 때에 새벽 4시에 관사에서 일어나 차를 몰고 이 다리를 건너 진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었지. 이제 11년 만에 다시 이 다리를 건너가나?
지금 우리는 편안하게 차를 타고 순식간에 섬으로 들어가지만, 옛날 돛단배를 타고 이 울부짖는 해협을 건너던 선조들은 어떠했을까? 진도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섬이지만 울돌목으로 인하여 심정적으로는 더 멀리 떨어진 섬이지 않았을까? 다리를 건너자마자 버스는 여기서 합류하기로 한 몇 분의 회원과 여행 내내 구수한 입담으로 우리에게 진도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알려주려 애쓰던 문화해설사를 태우고 진도대교 바로 앞에서 솟아오른 망금산의 녹진전망대로 올라간다.
전망대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斜張橋)인 진도대교와 그 너머로 조선시대 해역사령부가 있던 우수영(右水營)이 바로 보인다. 1984. 10.에 완공된 진도대교도 울부짖는 울돌목에는 차마 다리를 담그지 못하고 울돌목 양쪽에서 늘씬하게 강철교탑을 올리고는 여러 가닥의 강철 로프를 내려 대교를 붙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저 우수영의 수군절도사 이억기는 이순신 장군을 도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이순신 장군이 억울하게 투옥되자 장군의 무죄를 변론하였다지.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하는 동안 원균과 함께 칠천량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대패하자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을 선택했다고 하고... 그가 전투에 패배한 괴로움을 안고 바다로 뛰어들 때 그는 '이순신 장군과 이 전투를 함께 했더라면...' 하며 자기 가슴을 쳤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해군은 이순신 장군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억기 장군도 추모하여 잠수함 한 척을 이억기함으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울돌목 한 가운데에선 웬 구조물 하나가 울돌목의 그 빠른 바닷물에도 아랑곳없이 다리를 바다 밑에 굳건히 박고 서 있고, 그 위에선 크레인들이 긴 팔을 들어 올려 움직이고 있다. 조류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그렇구나. 울돌목의 그 빠른 바닷물을 이용하여 수차(水車)를 돌려서 전기를 생산하려는 것이구나. 이미 2009. 5. 14. 시험용 조류발전소가 세워져 시간당 1000kw의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는데, 지금 보이는 저것은 본격적인 조류발전소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인가?
배가 슬슬 고파온다. 이제 본격적인 소리여행을 하기 전에 진도읍내의 궁전음식점에 들러 뜸부기라는 바닷말로 만든 진도 특산음식 뜸북국으로 배부터 채운다. 우리 일행이 가득 채운 방으로 종업원들이 뜸북국을 들고 들어오는데, 여기서 사건이 터졌다.
한 종업원이 우리 일행 박상인 사장의 몸에 뜸북국을 쏟은 것. 그것도 살짝 쏟은 것이 아니라 아예 국 한 그릇을 다 엎어 부었다. '앗! 뜨거워!' 박사장님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선다. 그런데 정작 사건을 일으킨 종업원 아줌마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다. 아니? 우리 일행의 인솔자가 급히 약국으로 달려가 약과 거즈를 사올 정도로 화상을 입었는데, 사과 한마디도 없어? 종업원은 그렇다 치고 사장은 또 뭔가? 나는 당연히 약값은 식당에서 부담한 줄 알았는데 사장이나 종업원이나 피해 보상은커녕 사과 한마디 없다니???
사건을 일으킨 종업원은 옆에 놓인 카메라를 피하다가 그렇게 되었다는데, 그래서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얘기인가? 시작부터 화상을 입어 여행 내내 왼손과 오른발에 붕대를 감고 슬리퍼를 신고 다녀야 했던 박사장님. 다른 사람 같으면 당장 욕설이 튀어나오고 보상을 요구하며 큰소리가 오갈 텐데, 박사장님은 그냥 아픔만 참고 계신다. '나눔문화'의 회원으로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분이라 그냥 혼자만의 아픔으로 끝내시려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더 열이 오른다. 이 음식점, '궁전음식점'이라더니 자기들만 궁전에 살고 손님은 단지 자기들 돈벌이 대상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가?
소리여행 시작에 우리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어쨌든 소리여행은 진행되어야 하기에 우리는 진도향토문화회관으로 향한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토요 민속여행 상설공연'을 보기 위해서다. 가야금, 대금, 해금, 장구 등 국악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우리의 전통악기들이 소리를 울리고, 예쁘게 한복을 차려입은 진도의 소리꾼들이 목청을 뽑는다. 농악도 당연히 나오고 진도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강강수월래도 나오더니, 마지막에는 출연자들이 관객들의 손을 이끌어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춘다. 서양의 음악은 무대와 관객이 분리되지만 우리네 음악은 청중과 음악은 하나가 되는 것이기에 마당공연이 아닌 이런 서양적 음악홀에서도 관객과 음악은 기어이 하나가 되고야마는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김진묵 선생은 강강수월래의 새로운 맛을 알았다며 눈은 아직도 강강수월래의 잔영(殘影) 속에서 놀고 있다. 클래식에서 재즈로, 재즈에서 월드뮤직, 국악으로, 요즈음은 한국가요 트롯의 속맛에 빠져있는 음악평론가 김진묵. 평생을 음악 속에서 살아와 난청이라는 직업병 - 늘 음악을 들어야 하는 음악평론가에게는 난청이 직업병이겠지? - 까지 얻은 김진묵 선생. 선생이 풀어놓는 다음번 음악세계가 궁금해진다.
향토문화회관을 나와 다음에 우리가 들른 곳은 남진미술관. 나는 처음에 남진미술관이라 하기에 가수 남진이 먼저 떠오르는데, 이 미술관을 세우신 장전 하남호 선생님의 '南'과 선생의 아내인 현풍 곽순진 여사의 '辰'을 합쳐 남진미술관이다. 미술관은 두 분의 고향마을에 세워졌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니 마당에는 스피커와 앰프가 설치되고 뷔페 식당에서 가져왔음직한 식탁과 의자들이 한쪽에 몰려있는데, 펼침막에 나타나는 글씨는 '미술관이 있는 하미마을 어르신 자축연'. 아니? 예술의 향기를 기대하며 왔는데, 웬 동네잔치? 곽순진 여사가 작년 이맘때쯤 돌아가셨는데, 여사께서 자기 제사 지내는 대신 동네어른들 대접하라고 하여 자녀들이 어머님의 유지를 이행하려는 것이다. 그렇구나!
마당에서는 떡대가 좋은 한 남자가 잔치 준비를 지휘하고 있는데, 육군헌병 중령인 아들 하영규씨란다. 자녀들이 대부분 예술가의 길로 들어섰는데, 이분은 예술가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 헌병이네. 모르지. 이분도 군복을 벗으면 예술가의 기질을 뿜어낼지... 그런데 서양화가인 둘째 아들 하영술씨는 2007년에 장전 선생이 돌아가셔서 발인하는 날에 신장염으로 돌아가셨다는군.
여기 저기 조각 작품들이 널려있는 마당을 지나 미술관 안으로 들어간다. 3층의 미술관 안에는 옛 선인들의 작품 뿐 아니라, 생존해 계시거나 타계하신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이 빼곡히 걸려있다. 나 같은 문외한도 알만한 작가들의 작품이 계속 나타나면서 나를 설레게 한다. 다산 정약용의 매화 그림. 그림이 조그만 벽 전부를 차지할 만큼 그림이 크다. 다산 선생이 그림도 그렸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전문 화가도 아닌 실학자가 이런 대작도 그리셨단 말인가?
한석봉 선생의 또박또박 써내려간 해서체의 글씨도 보인다. 선생은 나이를 초월한 친한 벗 허균과 밤새도록 대작(對酌)하고 돌아가다 나귀에서 떨어져 정말 어처구니없게 돌아가셨지. 얼마 전에 허균의 글에서 선생을 뵈었다가 여기서 선생의 친필까지 보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다. 그리고 서예가가 세운 미술관이니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는 당연히 있고, 그뿐 아니라 우암 송시열, 율곡 이이,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자결한 민영환, 갑신정변의 김옥균의 글씨도 있다. 예전에 선비들은 붓으로 글씨를 써야했으니 이렇게 작품으로 걸릴 만큼 글씨도 뛰어났는데, 컴퓨터 세상인 요즈음 나는 글씨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남농 선생의 손녀사위인 임농 하철경 선생의 작품은 나도 소장하고 있기에 여기에 걸려있는 선생의 작품은 단박에 알아보겠다. 내가 목포지원에 근무할 때에 선생이 목포지원 조정위원을 맡고 계셨기에 나도 선생에게 작품을 선물 받았지. 흥선대원군의 난초 그림은 여기에도 있구나. 그런데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무정 정만조 선생의 꽃그림이다. 고종 때 진도에서 12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한 선생이 여기서 그림도 그렸나? 이미 서양문물이 밀고 들어오는 구한말의 선비라 그런지 꽃들은 노랗게, 빨갛게 피어있을 뿐 아니라, 많은 꽃들이 작품의 길이를 따라 길게 늘어서있다. 조선의 꽃그림에 이런 대작도 있었나? 하여튼 조선의 선비들을 대할수록 선비들이 자기의 관심분야 한곳에만 머무르지 않고, 시, 서, 화에 두루 능통한 것을 보면서, 자기가 전공한 좁은 한 분야 외에는 잘 모르고 관심도 두지 않으면서 지식인인체 하는 요즈음 학자들을 생각하게 된다.
남진미술관을 나와 문화해설사가 우리를 안내한 곳은 동석산. 높이가 219m 밖에 안 되는 산이지만 산 전체가 통째로 하나의 바위인 것처럼 산은 온통 바위로 되어 있다. 꿈틀꿈틀 하는 바위산을 보니 내 근육도 당장 꿈틀꿈틀 하면서 저 산위로 달려 올라가고 싶다. 바로 앞 종성(鐘聲)골 기슭에 보이는 조그만 암자는 천종사(千鐘寺)이다. 722년 신라의 중 김대비가 중국에서 하동 쌍계사로 탑을 세우러 가다가 잠시 이곳에 머물렀는데, 동석산의 봉우리들이 일시에 종소리를 토해내었다나? 그 후부터 이 골짜기를 종성골이라 부른다하고, 지금 천종사의 주지는 절 이름처럼 천개의 종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해설사는 동석산 위에서 바라보는 낙조가 일품이라는데, 올라가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고 있는 나를 놀리나?
해설사는 동석산의 낙조를 보지 않는 대신에 그보다 더 유명한 세방낙조를 보러 가잔다. 지산면 세방해안에 도착하니, 해안가 언덕 위에는 일몰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아직 해는 바다로 내려가지 않고 거리를 두고 서서히 바다를 물들일 채비를 하고 있다. 예전에 목포에 근무할 때에 이곳 세방해안에서 바다 밑으로 떨어지는 해를 넋을 잃고 바라보던 기억이 새롭다. 요 앞의 손가락섬, 발가락섬은 그 이름만큼이나 재미있게 생긴 섬인데, 이곳에서는 바로 앞의 섬에 가리고, 지는 해의 역광에 흐릿해져 사람들의 눈은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전망대에서는 전남 무형문화재 18호인 진도북놀이 생생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다. 진도북놀이는 북을 흰 헝겊 끈으로 묶어 허리에 차고 두 손을 모두 사용하여 북을 두드릴 수 있게 했다. 덕분에 진도북놀이는 흥이 나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도 북을 칠 수 있게 되었다. 잠시 보던 나도 이번 소리여행을 같이 신청한 오연석 사장과 함께 생생체험에 뛰어든다.
전망대 옆에 갖다놓은 큰 바위 면에는 이곳 진도 둔전마을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는 김정화 시인의 시 '그 섬에 가리'가 새겨져 있다. 그 섬은 당연히 진도이겠지?
바람 따라가듯
길 없어도
바다를 향해 가슴을 열고
너에게 가리
일곱 빛깔 영롱한 별빛 아래
바다와 하늘이 몸을 섞으며
슬픔을 묻는 곳
그 섬에 가리
넘어지고 또 일어서고
돌아온 길 돌아다보며
먼 하늘 한 자락 눈에 묻고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서 있는
남쪽 끝 그 섬으로
나는 가리
이제 해도 오늘 하루를 접고 바다로 들어가려 한다. 우리도 오늘의 보금자리를 찾아 소포마을로 들어간다. 그러나 소포마을에 단순히 잠만 자려고 온 것은 아니다. 소포마을은 진도에서도 남도 가락이 가장 살아있는 전통마을로 마을 사람 전체가 소리 한 가닥씩은 뽑아낼 수 있는 소리마을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소포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소포마을의 소리를 체험하려고 이 마을을 찾아오는 것이다. 오늘 이곳에는 우리 일행뿐만 아니라 청주 전교조 교사들도 가족들과 같이 소리를 찾아 왔다.
우리는 지정된 방에 짐을 놓고, 공연장 앞으로 모여든다. 공연장 한구석에는 이 마을에서 나서 평생 고향을 지키며 북을 치고 제자를 양성한 설북의 명인 박태주(1897-1980)를 기리는 예적비(藝蹟碑)가 서있다. 판소리 명창 임방울 선생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북을 메고 양손으로 북을 치는 선생을 보고 감탄하여 같이 공연 다닐 것을 권유했으나, 선생은 아내와 자식들의 만류로 고향에 남았다는군. 진도북놀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보존, 발전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선생의 업적이었고...
어둠이 밀려오고 공연장에 불이 켜지면서 무대에는 소포전통민속전수관 김병철 관장이 나와 인사를 한다. 공연은 할머니 한 분이 나와 손자를 품에 안고 자장 자장 재우는 자장가부터 시작하여, 이어서 이 마을 아낙네들이 출동하여 흰 한복에 빨강 댕기로 강조를 둔 한복을 입고 강강술래를 돌기 시작하는데, 무대 한쪽에서 세 분의 부녀자들이 나와 선창을 하면 부녀자들이 후렴을 부르면서 강강술래를 돈다.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강강술래 -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 차림으로 옥매산을 빙빙 돌도록 하여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던가?
어쨌거나 강강술래는 농촌 생활에 힘든 부녀자들이 달밤에 나와 빙글빙글 돌면서 나름대로 현실의 애환과 피곤함을 씻어버리는 역할도 하지 않았을까? 강강술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보기는 처음이다. 그러니 나는 강강술래는 그저 부녀자들이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단순한 춤인 줄 알았는데, 소포마을에서는 두 패로 나누어 서로 꼬리잡기를 한다든지, 한 아녀자가 허리를 굽히고 일렬로 늘어선 아녀자 등을 밟고 걸어간다든지 다양한 춤 형식이 펼쳐진다. 현대에 와서도 강강술래는 계속 진화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문화재 38호인 김내식 선생의 북춤은 또 어떠한가? 아까 세방마을에서 북 체험을 했기에 더욱 친근감 있게 북춤을 보는데, 역시 인간문화재답게 선생은 북채를 든 양손을 들어 올려 유연하게 어깨를 들썩거리다가도, 어느 순간 신명나는 북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김내식 선생의 신나는 북춤이 끝나니 무대에는 관이 놓이고 전통 상복 차림의 마을 사람들이 올라와 곡을 한다. 김관장님은 김진묵 선생과 청주의 한 선생님을 무대에 불려 올리더니 죽음의 체험을 해보라며 관속에 들어가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다시 무대에 올려 선생들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곡을 하라 한다.
망자의 체험 - 죽은 듯이 누워있는 사람에게나 그 앞에서 곡을 하는 사람에게나 죽음을 한 번 더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이리라. 밤은 계속 깊어가고 공연의 마지막에 꽃상여가 등장하며 공연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상여 앞에 나오는 여자 상두꾼들이 구슬프게 만가를 부르며 꽃상여는 천천히 마당을 돈다. 관중들도 일어나 꽃상여를 따라 돌고... 이걸 보자니 임권택 감독이 이청준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한 '축제'가 생각난다. 진도 사람들은 장례도 축제처럼 치른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요, 망자는 또 다른 세상으로 가고, 이 짧은 세상 우리도 얼마 안 있으면 망자를 만나러 그 세상으로 갈 것 아닌가? 그러니 이 한 세상 주어진 대로 살다 떠나는 이에게 잘 가시라 웃으며 보내고...
예전에 목포에 근무할 때 가족들을 데리고 진도를 돌다가 우연히 진짜 꽃상여를 만난 적이 있었지. 그때도 꽃상여 앞에서는 여자 상두꾼들이 소리를 하며 어깨를 들썩들썩 춤을 추며 장지를 향하여 나아갔지. 아들은 나에게 물었지. "아빠! 사람이 죽었는데 왜 저 사람들은 춤을 추고 노래를 해요?" 죽음을 기피하지 않으며 음산한 것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축제처럼 노래를 하며 춤을 추는 꽃상여 앞에 나도 나아가 어깨를 들썩인다. 이윽고 꽃상여와 상두꾼들이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며 오늘의 무대도 하나, 둘 조명이 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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