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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 272 파장(波長)
작은 소리였지만 두 명의 도사에게 전달되기에는 충분한 성량이었
다. 철면자의 눈썹이 역팔자로 곤두섰고 알고자의 얼굴에 황당함을
넘어선 그 무엇이 깔렸다.
"지금 자네는 무림맹을 능멸하려는 건가!"
"흐음......"
대노한 철면자와 달리 왼팔로 오른 팔꿈치를 받치고 턱을 쓰다듬던
알고자가 고개를 모로 꼬고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뭘 그리 꾸물거리는 게요!"
천둥도 이런 천둥이 없을 만큼 커다란 음성과 함께 판관필을 든 도
사가 쑥 나섰다.
'여태까지 참는 게 용타 했다!'
혀를 내밀며 뒤로 슬슬 물러서는 알고자의 표정은 그야말로 우스운
것이었으나 비무대의 중앙에 우뚝 선 도사의 위용 때문에 그런 건 모
두 묻혀 버렸다.
"자, 장비다......"
"쉿, 말조심하게. 팔파지교 가운데 한 분이라지 않는가."
"그래도 어딜 봐서 저 인물이 도사야......"
사람들의 웅성거림처럼 나선 도사는 도저히 도를 닦는 인물로 보이
지 않았다. 팔뚝까지 숭숭 걷어붙인 소매 사이로 까맣게 난 털과 험
상궂은 얼굴, 그리고 목소리까지.
"다 필요없소! 어서 이들을 호북지부로 데려갑시다!"
나선 이는 종남의 각유자(覺柔子)라는 도인이었는데 부드러움을 깨
달았다는 도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로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이라도
구워 먹을 듯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성격이 워낙 급해서 두 마디 이상 나누면 제 가슴을 치고, 원리 원
칙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 빽빽함을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별칭이
사심안자(死心眼子).
'역시 사심 사형은 기름기 많은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있다니까.
저 기세로는 사람 여럿 잡겠구먼.'
알고자의 한탄 따위는 한 귀로 흘리고 판관필을 땅에 세차게 박아
넣으며 사심안자가 우렁우렁 소리 질렀다.
"여기서 백날 입씨름해 봐야 답이 나올 리 없다. 어서 호북지부로
가자!"
"못 간다면?"
여기서 치고 나오지 않으면 장추삼이 아니다.
"끌고 간다."
역시 사심안자다운 화답.
"능력이 될까?"
능글거리는 장추삼의 말에 일일이 대꾸한다면 사심안자가 아닐 터.
"보여주마!"
쿠르르르ㅡ
그가 판관필을 땅에 박으며 공력을 모으자 주위의 흙먼지들이 돌풍
에 휘말려 솟구쳐 올랐다.
"그만."
아쭈, 하고 치고 나가려는 장추삼보다 먼저 죽립인이 입을 열었다.
워낙 차분한 목소리라 그대로 묻혀 버릴 수도 있었지만 어쩐 일인지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싸우려고 올라온 것이 아닐 테고, 그렇다고 자기 과시나 하기엔 어
울리지 않는 자리인 듯하니 공려을 거두게."
홱!
고개를 돌려 죽립인을 바라보던 사심안자가 발을 크게 구르고 다시
장추삼에게 소리 질렀다. 성격이 급하다고는 하나 그 역시 도인인지
라 장유유서를 지키는 모양이다.
"역시 잡음이 많다. 어서 호북지부로 갈 준비를 하거라!"
"이씨!"
하고 장추삼이 나서려는데 죽립인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둘 사이
에 끼어들었다.
"이쪽 일도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일을 또다시 벌이겠다는
건가? 그건 아니지."
"노인장께서 나설 일이 아니잖습니까, 무량수불......."
화를 겨우 삭이며 사심안자가 도호를 외웠다.
"어쨌든 먼저의 일부터 해결해야....."
"죄송합니다. 더는 지체하기 어려운지라."
죽립인의 말을 뚝 끊어버리고 사심안자가 뒤를 돌아보며 눈짓을 보
내자 나머지 세명의 팔파지교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고자는 아직
도 폭발 지점을 맴돌고 있었지만.....
"뭐 하는가!"
"아니 뭐... 알았소이다."
뒷머리를 긁던 알고자가 어쩔 도리 없다는 듯 양팔을 벌리고 저벅저
벅 걸어왔다. 고개를 떨구고 괜히 슬픈 척하던 매정방의 입가에 회심
의 미소가 그려졌음은 물론이다.
'이제 너희들은 끝이야! 감히 나를 건드리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
전부 다 죽여 버릴 테다!'
"어딜 가려고?"
"노인장하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소이다. 고정하시고 그만 내려가
주십시오."
사심안자가 퉁명스럽게 말을 뱉고 장추삼들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했다.
이때.......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컥!'
속삭임과도 같은 말이었는데 사심안자를 비롯한 넷은 고막이 떨어
져 나갈 듯한 충격을 받고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오호~! 정체를 숨긴 고인이였군요? 미처 몰라뵌 점 죄송스럽게 생
각합니다."
'호오, 내 일성(一聲)을 그대로 받아낸다?'
과장된 말투로 놀라움을 표현한 알고자가 죽립인에게 그만큼 커다
란 동작으로 포권을 올렸다. 조금 떨리는 음성으로 보아 그 역시 음
파의 충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나머지 네 사람보다
는 나아 보였다.
그런데 자신의 일갈을 받아내는 알고자에게 감탄을 표한다는 건 바
꿔 말해 죽립인 스스로가 자신을 금칠하는 것 아니겠는가.
대체 누구기에.
"내 정체 따위는 중요하지 않네."
'흐윽!'
이번에는 알고자만을 향한 음파였기에 그 강도는 앞서의 것과 차원
이 달랐다.
"그... 그래도 정체 정도는 알아야....."
"갈(曷)!"
'으드득!'
죽립인의 외침에 꺾여지는 무릎을 억지로 버티며 알고자가 어금니
를 소리나도록 깨물었다.
상상 이상이다!
뭔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내력이라니!
'이건 차원 자체가 달라!'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무위라는 건가?
알고자는 그가 만나본 최고수들을 머리 속으로 하나하나 떠올려 보
았다. 각파의 장문들, 각 세가의 가주들, 그리고 팔파지교의 사형들,
그리고 우연히 만난 강호십장 가운데 몇몇.
그 모두가.....
'비교조차도 할 수 없다!'
우뚝 서서 전방을 바라보는 죽립인의 발꿈치도 따를 수 없단 말이다!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보며 적당히 지내고 있지만 사실 알고자는 이
들 다섯, 아니, 팔파지교 가운데에서도 단연 발군의 무위를 가지고 있
는 인물이었다.
방금 전 머리 속에서 그려본 인물 가운데에서도 알고자와 제대로 승
부를 논한다면 동수를 이룰 인물은 한둘에 불과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의 놀람은 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노시주!"
가슴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던 승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힘으로 핍박을 하시겠다면 소림의 이름을 걸고 결코 좌시하지 않겠
습니다!"
그는 만경(卍竟)이라는 법명을 가진 승려로서 몇 달 전 장추삼이 상
대했던 하남삼주와 같은 항렬의 소림사 제자였다. 주지하다시피 만 자
돌림이라면 소림의 일대제자라는 의미.
그러나 죽립인에게 소림의 일대제자라는 이름이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보다.
"소림의 이름으로 좌시하지 않겠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중얼거리던 죽립인이 몸을 빙글 돌려 만경과 마
주 대했다.
"허참....."
헛웃음을 짓던 죽립인이 등 뒤에서 거대한 검을 뽑아 땅에 쿵 박아
넣었다.
"혜광도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거늘!"
우당탕!
위태롭게 서 있던 네 사람이 결국 나가떨어졌고 버티던 알고자 역시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휘이잉 ㅡ
일진광풍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가자 비무대의 중앙엔 죽립인 혼자
독야청청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누가 오더라도 죽립인의 기세를 꺾을
이는 없어 보였다.
이런 걸 두보 만부막적(萬夫莫敵)이라 하던가?
"끄으으......"
애써 오른 무릎을 세우며 알고자가 툴툴 웃었다.
"소림의 방장까지 발 아래로 두시는 분이라, 이 불쌍한 도사는 정말
이지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습니다."
"......"
말없이 장내를 굽어보는 죽립인의 기도는 조금 전까지의 온유로움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파괴와 분쇄만을 위한 절대적인 강함만
을 흩뿌리고 있었으니까.
장내의 군중들은 그야말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장추삼
이라는 날건달과 무당의 자랑이라는 유소추의 대결에서 어이없는 사고
가 발생하고 범인이 확실해지는 마당에서 아이들의 항변, 그리고 무림
의 태두라는 팔파의 교두 격인 사람들의 등장.
이 숨 돌릴 틈 없는 전개도 따라가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절대적이라
고 믿었던 팔파지교가 이름 모를 노인네의 말 한마디에 숨도 쉬지 못
하고 있으니 어째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대체 누구냐! 저 노고수가 누구냔 말이야?"
"몰라! 저런 사람을 어떻게 알겠나!"
"저런 정도의 고수라면...."
웅성거림 속에 걸려진 한마디.
저런 정도의 고수라면.......
알고자가 반짝 눈을 빛내는데 멀찍이 떨어져 있던 장추삼이 건들건
들 걸어왔다.
"뭐 이리 일을 크게 벌여놨대. 에휴, 노인네가 힘도 좋아, 정말."
중얼거리던 그가 땅에 박힌 검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바라보며 고개
를 흔들었다.
"이건 암만 봐도 내가 아는 사람의 애병(愛兵)과 크기 면이나 재질
면에서 무척이나 닮은 듯한데? 안 그래, 하...."
고개를 돌려 하운 쪽을 향했던 장추삼이 자연스레 옆에 서 있는 북
궁단야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을 딱
벌렸다.
북궁단야의 경악 어린 얼굴, 이건 뭘 의미하는 걸까?
침을 한번 꿀떡 삼키고 장추삼이 천천히 죽립인을 뜯어보았다.
우선 몸집.
'노인네답지 않게 기골이 장대하고....'
그리고 검,
'얼음 덩어리랑 똑같은 형태고.....'
또한 기도.
'열받으니까 무서워지는 것도 같고.....'
그런데 절대 장인 후보는 아니었다. 만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목소리를 잊었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일단 나이 면에서 말도 안 된다.
'뭐야, 그럼 저 표정은?'
이때 군중들 가운데 작은 소란이 일었다.
"설마인데 말이야, 저 노고수 온통 하얀색 일색이잖아!"
그랬다. 삿갓부터 신발까지 노인네는 하얀색으로 완전 통일이었다.
눈이 부실 지경이니까. 그런데 그게 뭐?
"그리고 저토록 커다란 검을 쓰는 고수도 별로 없잖아!"
맞는 말이다. 들기조차 버거운 검이기에 웬만한 완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장추삼이 알기로도 이런 검을 사용하는 검수는 별로 없었으니
까.
'저런 기도를 본 적 있어? 제아무리 난다 긴다는 무인이라도 저토록
강렬한 기세를 가진 이는 없다고 했네!"
어디서 싸움 구경 좀 하고 다녔다 보다. 뭐, 어쨌든 맞는 말이라 장
추삼도 턱을 쓰다듬으며 인정을 해야만 했다. 이건 외적인 기도라기보
다 자신감과 관록이 어우러진, 진짜 기세였으니까.
"마지막으로 손 한 번 쓰지 않고 팔파지교의 다섯 분을 굴복시킬 무
위, 그래도 모르겠나? 이 모든 가정에 맞아떨어지는 무인이라면 오
직....."
두두두두!
귀를 쫑긋 세우고 구경꾼의 말에 집중하던 장추삼이 어지러운 말발
굽 소리에 인상을 왈칵 구겼다.
왜 결정적인 순간은 항상 잘려야 하는 건가!
'뭐야, 한참 재미있는데.... 어?'
삼십여 기의 인마가 폭풍처럼 들이닥쳤는데 선두의 인물들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고, 또한 지금의 등장에 인과 관계가 전혀 없
는 것도아니라 장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과 관계 정도가 아니라 어찌 보면 늦은 감이 있는 출현이니까.
그 가운데 선두에 섰던 인물 하나가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도포 자
락을 흩날리며 비무대로 올라섰다.
"결과나 보자고 천천히 오던 와중에 불의의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
네. 어찌 된 일인가?"
팔파지교들에게 급히 질문하던 무당 장문 죽선자가 눈을 꿈뻑였다.
"음? 자네들 행색은 왜 또 그 모양인가?"
털털한 성격의 사심안자야 그렇다 쳐도 단정 그 자체의 오관을 자랑
하는 나머지 넷의 지금 몰골은 그야말로 가관이 아닌가?
"옷에 묻은 흙먼지는 뭐고, 산발한 머리는 또 뭔가? 자네들... 대
체......"
"장문께서 친히 왕림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한 육 개월 됐던가요,
뵌 지?"
씨익 웃으며 포권하는 알고자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흘린 죽선
자가 손짓으로 됐다는 시늉을 하고 뭔가를 더 물으려다 유소추를 발견
하고 급히 달려갔다.
일단 급한 게 제자의 안위니까.
비록 속가제자라고는 하지만 무당에서의 유소추는 그저 문외제자(門
外弟子)가 아니었다. 지닌 바 오성과 무공도 높게 사야겠지만 무엇보
다 무당의 기상을 제대로 이어받은, 그야말로 진짜 무당인이 바로 유
소추였고 그래서 무당의 원로들 사이에서도 칭차이 자자한 제자였으니
까.
"어디 보자!"
팔파공동문하를 밀어내고 유소추의 맥을 짚은 죽선자가 내리 감았
던 눈을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하길 다행이다. 내적으로 상한 부분은 없으니. 운기 중에 기
혈이 놀라 맥이 어지러운 정도니 한 사오 일 정도 정양하면 괜찮아질
거다."
다행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새기던 죽선자가 유소추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지냈는가?"
"보시다시피!"
장추삼이 양팔을 들어 보였다.
"우리는 늘 좋지 않은 일로만 마주하게 되는군."
"결과적으론."
변명이 먹힐 분위기도 아니어서, 아니 변명하고 싶지 않아서 짧게
대답한 장추삼이 멀거니 하늘을 우러렀다.
'젠장....'
우르르.
뒤따라 올라온 다섯 노인이 죽선자에게 유소추의 상태를 확인하고
몸을 돌려 구름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 장추삼에게 뭔가 말을 던지려다
머뭇머뭇 서로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이네요."
눈도 돌리지 않고 장추삼이 인사를 던지자 무당의 가장 큰 어른이라
고 할 수 있는 오송이 겸연쩍게 화답했다.
"어, 그, 그렇구먼."
"표국에서의 일 들었네."
입 발린 인사가 지겨워서 입술을 깨문 장추삼이 주저하는 오송을 마
주 보며 허탈한 미소를 보냈다. 그들의 저어함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짐작하지 못할 바가 아니고,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아마도 오는 길에 들었으리라. 비천혈서에 관한 이야기를. 그들이
발길을 재촉한 이유가 유소추의 안위 때문도 있겠지만 비천혈서 역시
한몫을 담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장추삼은 썩 기분이 언짢아졌
다.
"빌어먹을 책 하나가 아주 속 썩이네. 그렇지 않아요?"
그나마 제대로 세월을 산 양반들이었는데.....
"아, 으음!"
이것만큼은 비켜갈 수 없다 이거요....
"표정을 보아하니 노인장들도 무림인끼리 해결하자, 뭐 그런 거 같
은데... 맞소?"
"당연한 일이네!"
오송의 맏형답게 청목자가 나섰다.
"이건 강호의 일이고, 그렇기에 강호인이 해겨해야만 할 일이야. 서
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다네."
장추삼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해결의 주체는 물론 구파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자네는 지금 무림맹을 부정하고 싶어서
그러나?"
피식!
"있는 걸 없다고 할 바보는 아니오. 그나저나 늘 궁금한 게 있는
데... 무림맹이면 다 되는 거요?"
"무슨 말인가!"
이번에는 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오송의 등장으로 자리를 피
했던 팔파지교까지.
"새삼스럽게 아닌 척할 건 없을 텐데? 뭐든지 뚱땅뚱땅 처리하고 이
게 무림법이고 무림첩이니 따라라 하면 다 되었잖소?"
"그건 무림인들이 합의를 하고 서로 지키자고 했던 법률이야."
청목자가 자애롭게 웃었다. 모난 돌은 정으로 두드리기보단 부드럽
게 밀어넣는 편이 나을 때가 있다. 그리고 신진삼성 가운데 한 명이라
면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아도 된다.
"복룡표국 건으로 심기가 상한 듯한데 무림맹을 대신해서 내 깊이
사과하지. 그리고 맹에서도 그에 합당한 보상을 치르기로 했다네. 언
뜻 듣기로 호북지부의 표물 운송은 앞으로 복룡표국에서 전담을 할 거
라는......."
"우리 국주는 양양에 계시오."
대상의 전도를 명확히 한 장추삼이 청목자를, 더 정확히 그의 두 눈
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무도 투명한 눈길이라 속내 깊숙이까지 쳐
다볼 것만 같아서 외면하고 싶어지는 눈빛.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해결의 주체가 구파냐고 묻잖소?"
말이 잘렸음에도 청목자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장추삼
을 잘 본 것도 있고 이런 경우로 그가 가지고 있는 팔파에의 반감을 희
석시킨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주체는 어디까지나 무림맹일세. 구파는 그저 돕는 입장이지. 생각
해 보게. 그 많은 무림맹원들이 모두 구파의 사람들이겠는가? 그리고
그들 모두 바보가 아닌데 어찌 구파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겠나? 그러
니 안심하게."
말이 공전되고 있다. 구파가 뭐 어쨌든, 비천혈서가 어쨌든 지금 문
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입이 아프게 무림맹의 문제를 씹어
봐야 단물이 나올 상대가 아니다.
믿음을 넘어서 신앙에 가까운 사고로 뭉친 사람과는 토론 자체가 무
의미한 법.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장추삼의 탄식에 청목자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이 늙은 도사를 봐서라도 자리를 옮겨주지 않겠나? 내 공정하고 정
확한 처리를 약속하지. 어떤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던 장추삼이 하운과 북궁단야를 돌아보았
다.
이때.....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 비천혈서를 논의하기에 앞서 벌어진 상황
을 수습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소?"
'음?'
그제야 죽립인을 의식한 청목자가 묘한 시선으로 그를 보다가 환한
미소로 포권을 했다.
"무량수불. 고인께서 자리하심을 몰라뵈었구려. 이 늙은이는 무당
의 청목이라고 하오. 늙어서 눈까지 제 구실을 못하는 늙은 도사의
실수 정도로...."
"아아........"
죽립인이 손을 휘휘 저어 청목자의 말을 막자 한 켠에서 이들의 하
는 양을 지켜보던 무당인들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감히 누가 있어 무당오송의 포권을 손짓으로 응대한다는 건가!
수양이 깊은 청목자의 얼굴에도 은은한 노기가 맺혔다.
문제는 죽립인이었는데 거의 실체화에 이르는 무당인의 기세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사건의 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무도 태연하게.
"자, 그럼 사건으로 돌아가서 폭발 지점을 살펴보면......"
"이보시오, 도우!"
드디어 청목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경우가 없어도 유분수지, 너무하지 않은가! 내 비록 나이나 지위를
가지고 상대를 핍박해 본 적은 없지만 도우처럼 예의를 모르는 이라면
무당을 떠나 개인적으로 예절을 알려줘야겠소!"
"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죽립인이 잠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다
몸까지 완전히 돌렸다.
"아,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고 죽립인이 삿갓을 천천히 벗어 들었다.
"이제 되었소?"
죽립 안에서 드러난 얼굴은 청목자의 예상대로 나이를 짐작하기 어
려운 노인이었다. 뭐, 그렇다고 특이한 점은 없었지만. 굳이 말하자
면 머리가 한 올도 없다는 정도?
눈썹까지 하얗게 센 대머리 노인이 노인이 죽립을 바닥에 내려놓으려
할 때 번개처럼 인영 하나가 튀어나가 그것을 받아 들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손이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진작 인사를 드렸어야 옳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엥?"
"어?"
장추삼과 하운이 입을 딱 벌렸다. 죽립을 받아 든 이는 바로 북궁단
야였으니까.
"어쩐지 심상치 않은 기품이라 생각했거늘."
하운이 기분 좋게 웃고 있을 때,
'할아버지라면!'
장추삼은 초긴장의 상태가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북궁
단야의 할아버지라는 말은 북궁설의 할아버지라는 말과 같고, 그렇다
면 장추삼에게는.......
"일어나시게."
죽립인, 북궁노백이 손자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북궁가의 가주는 아무 곳에서나 무릎을 꿇지 않는 법. 예는 마음으
로 받아두겠네."
"그동안 무고하셨습니까. 불민한 소손이 연락 한번 제대로 드리지
못하여 안부를 여쭙지 못했습니다."
"허허... 소일이나 하는 늙은이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조손간의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무당의 오송 가운데 청금자가
툭 끼어들었다. 어디 누구인지는 몰라도 자신들의 맏형이자 무당의 큰
어른을 무시했던 북궁노백이었기에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무량수불, 조손간의 정겨운 대화에 끼어들어 송구하오만 회포는 나
중에 따로 자리를 내시도록 하시오."
"아, 그렇군."
북궁노백이 자신의 머리를 딱 치고 북궁단야에게 자리로 가라는 시
늉을 했다.
"자, 하던 말을 마저 하기로 합시다. 저기 폭발 지점에서....."
북궁노백이 오송들에게 말을 꺼내는 순간 한구석에서 바들바들 떨
던 매정방이 발악처럼 소리를 질렀다.
"비천혈서를 잊으신 겁니까! 저기 북궁단야의 할아비란 작자가 갑자
기 나서서 판을 깨려는 것도 비천혈서가 탐이 나니까 그러는 거라고요!
이렇게 시간을 끄는 동안 장추삼이가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그러세
요!"
그놈의 비천혈서.....
사건 현장을 돌아보려던 모두의 움직임이 한순간 우뚝 멈췄다.
그때......
"이런 게 뭐가 중요해!"
버럭 고함치며 매정방이 장풍을 날렸다. 물론 폭발 지점으로.
순간적으로 모두가 멍해져 있었기에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상황. 그
러나 한 사람은 달랐나 보다.
스르륵 ㅡ
물처럼 유연하면서도 급작스런 움직임으로 폭발 지점에 이른 북궁노백
이 매정방의 장력을 소매 한 번 흔드는 것만으로 와해시켰다.
"또 한 번 장난을 친다면...."
소매를 툭툭 털며 북궁노백이 낮게 읊조렸다.
"이번에는 공동에 죄를 물을 것이다."
쿵!
일개인의 선전 포고로는 너무도 광오하지 않은가. 구파의 한 축인
공동에게 죄를 묻겠다니.
"노인장, 죽고 싶은가!"
매정방의 눈에 광기가 일고 철면자가 칼을 빼 들었다. 사문의 욕을
방관하는 것도 가장 큰 죄일 테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 그리고 계속해
서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었던 무당인들도 북궁노백의 이번 발언에 눈살
을 찌푸렸다.
어느 정도의 재간이 있다는 건 인정하겠으나 이건 지나치지 않은가.
"도우, 말씀이 과하십니다. 무량수불."
발빠르게 청목자가 나섰다. 일을 크게 벌일 생각도 없었고, 크게 벌
일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북궁노백의 차디찬 한마디에 그의 중재 시도는 물거품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망나니 같은 자식이 말썽을 부린다면 의당 그 아비에게 죄를 물어
야 하는 것이 순리."
"감히!!"
실력을 익히 아는지라 바로 나서지는 못하고 철면자가 소리 질렀다.
그의 분노는 무당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떨떠름한 오송을 제외하
고는 구파에 적을 두고 있는 모든 무인이 북궁노백을 둘러싸는 형국이
되었다.
단 한 사람을 빼고.
"어어, 이러다가 사건 현장이 훼손되겠는걸?"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알고자였기에 슬쩍 걸음을 옮
겨 폭발 현장을 가로막은 그가 매정방을 돌아보았다.
"존경해 마지 않는 사형을 다치게 한 사람이 분명 있으니 필히 밝혀
야지, 안 그래?"
미소 뒤에 감춰둔 비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싸늘하게 굳은 눈동
자.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알고자는 매정방에게 알 수 없는 적의
를 드러내고 있었다.
알고자의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워 고개를 슬쩍 돌린 매정방이 마지
못해서 대답했다.
"무, 물론입니다."
"그럼 사건 현장을 다시 한 번 돌아봐야겠군. 모두들 비켜주시지 않
겠소이까? 영 방해되서리."
흥분한 무인들의 사이를 헤집으며 어깨를 툭툭 쳐 긴장을 풀어준 알
고자가 그들이 병장기를 갈무리하고 자리로 돌아가자 폭발 지점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 적잖은 폭발물을 보아왔다고 자부하거늘 이런 형태의 물건은 처
음 보는군. 이것 좀 보시겠소이까?"
사건의 원흉인 듯한 물건을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던 알고자가 북궁노
백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지닌 바 무공을 떠나 존장에 대한 예의
측면에서라도 자신이 움직여야 옳겠지만 현장 보존이 먼저였고 그의 속
내는 북궁노백에게도 전달되었다.
"무슨 일인가?"
"요놈이 폭발물입니다. 그런데 형태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흐음!"
알고자가 치켜든 건 사람 주먹만한 원통이었는데 표면에 수많은 구
멍이 뚫려 있었고 가운데가 텅 빈 형태였다.
"그러니까 이 구멍마다 채워져 있던 철구가 중앙에 매설되었던 화약
류의 폭발력으로 튀어나온 거로군. 그런데 이건?"
알고자에게서 물건을 받아 들고 돌려보던 북궁노백이 깜짝 놀랐다.
그의 경악에 알고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눈으로 주변에 나
뒹구는 철구들을 바라보았다.
"네, 그렇습니다. 구멍은 한쪽 면, 즉 원통의 반 바퀴에만 뚫려 있
습니다. 일반적인 폭발물이라면 살상력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
원통 전체에 구멍을 뚫어놨을 테지요. 철구의 숫자만큼 피해량이 증가
할 것은 불문가지일 테니."
철구 하나를 집어 들고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하던 알고자가
문득 매정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말은 여전히 북궁노백에게
건네는 형태였다.
"그런데 이놈은 한쪽을 완전히 버려둔 형태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
인지 아시겠습니까?"
"특수 제작물이라는 소리로군."
북궁노백의 침중한 말에 알고자가 손뼉을 딱 쳤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런 형태의 폭발물은 중원 천지를 뒤져 보도 찾
아볼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 특수 제작물이 말하는 의미가 무엇
일까요?"
원통을 받아 들고 벌덕 일어선 알고자가 모든 이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건 이 폭발 자체가 처음부터 계획되었다는 겁니다. 아니, 싸움 자
체라고 해야겠지요.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런 형태의 폭발물은 중원
천지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쪽 면을 철저히 막아놓았다는 것은 다른
한쪽에 전혀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뜻일 테고 그런 용도로 쓰일 폭발
물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한마디로 피해를 줄 곳과 주지 않
을 곳이 처음부터 선택되어졌다는 건데, 그렇다면 정황 증거나 여러 면
에서 삼성 측의 소행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이~ 씨! 우리가 안 그랬다니까!"
말은 느낌이 중요하다. 알고자는 장추삼들에게 혐의를 두는 듯했으
나 분위기로 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발작하려는 장추삼을 하운이 제지했고 씨근덕거리던 천둥벌
거숭이도 북궁단야까지 고개를 내젓자 입을 삐죽 내밀고 제자리로 돌아
가야 했다.
"한 번만 더 헛소리 해봐."
라고 투덜거리는 것을 잊지는 않았지만.
장추삼의 광분을 미소 띤 얼굴로 마주 보다 그가 자리로 돌아가자 고
개를 돌리며 알고자가 말을 이었다.
"목청 한번 좋은 도우로군. 아무튼 말을 이어서, 그렇다면 삼성 측에
서는 비무첩을 받자마자, 아니, 적어도 하루나 이틀이 지난 후에 곧바로
이 폭발물의 제작에 착수했어야 합니다. 왜일까요? 이놈, 보기에는
별거 아니지만 폭발물이라는 것의 성질을 아는 분이라면 결코 만만치
않은 물건이라는 걸 아실 겁니다."
일반적인 폭발은폭발 지점을 기점으로 균등한 힘을 발산하며 주위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이런 특이 형태의 폭발물은 많은 계산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만들어졌음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유례가 없었던 물건인만큼 이 녀석을 어떻게 만들었느냐
가 중요한 일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설계 도면부터 필요했을 거라는
거지요. 한마디로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정신으로 제작된 물건이
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알고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그렇군. 설계 도면을 완성하는 것만으로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텐데 그에 맞춘 틀을 제작하고 이 녀석을 찍어내었겠고. 이것만 해도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터인데 거기에 실험까지 했을 테니."
북궁노백은 이 젊은 도사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말은 모르겠지만 여
태까지의 추론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사건만을 바라보는 냉정함이 좋았다.
"물론입니다. 또한 폭발에 필수적으로 작용하는 화약의 양과 비율
을 가지고도 무던히 고심했겠지요. 상대는 최고의 후기지수였으니 웬
만한 폭발력으로는 소맷자락이나 뚫고 말았을 테니."
그렇게 또 며칠을 보냈을 테고,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북궁노백이
머리를 쳐들었다.
이 빈정빈정 머리 좋은 젊은 도사가 왜 이리 시간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맞아! 듣기로 강호삼성과 무당신룡의 비무는 삼성의 갑작스러운
균현 방문으로 결정되었다고 들었지. 예비된 일이 아니었다는 거지.
바꿔 말한다면 그 폭발물 역시 예비된 물건이라 보기 어렵다는 것이
고."
"그렇습니다."
기분 좋게 대답한 알고자가 폭발물을 북궁노백에게 정중히 건네고
장추삼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 말은 이들이 범인이라면 폭발물을 바로 이곳, 균현에서 제작했
다는 말이 되겠지요. 도면을 완성한 후에 인편이나 전서구를 통해 그
들이 아는 철구포로 제작 의뢰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
겠지만 대답은 '절대로 불가능하다!'입니다. 왜냐하면 주지하다시
피 전무후무했던 물건이기에 제작보다는 시행착오에 더 많은 시간을 할
애했을 게 뻔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간단한 제작품이라도 머리 속에서 그려낸 것을 그대로 실체화시키기
란 매우 어렵다. 하물며 화약을 이용한 대인 살상용 무기라면 어떻겠
는가.
"물건의 보정(補整)에도 바쁜 와중에 그걸 외부에 재의뢰하고 다시
받을 시간은 없을 게 뻔하지. 열흘이라는 시간은 생각만큼 길지 않았
을 테니."
"결과만 봐도 그걸 입증합니다. 폭발 현장에 패인 흔적을 보면 분명
위력적이었고 튀어나온 철구의 수도 어림잡아 열 개는 넘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철갑주 정도는 가볍게 관통했겠지요. 그러나 소추에게 치명
상을 가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론과 실제가 달랐던 것인지 소추의 공력
을 낮게 잡았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수법의 악독함으로 볼 때 상해자를
배려해서 폭발력을 낮춘 것은 아님에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절반의 성
공이었다는 얘기지요. 그리고... 어라?"
장황하게 주절거리던 알고자가 원통의 내부를 살피던 중에 뭔가를
발견하고 상큼 눈을 빛냈다.
'그랬군, 그랬던 거야. 이 물건... 정말이지 대단한걸?'
고개를 끄덕인 그가 다시 목청을 높였다.
"자자, 하던 말을 마저 하지요."
장추삼들에게서 팔파공동문하 쪽으로 몸을 돌린 알고자가 매정방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좌중을 향했다.
"이곳 균현에서 솜씨가 좋은 철구포를 몇 군데 소개해 주시지 않겠
습니까?"
그의 말에 사람들이 저마다 몇 군데의 철구포를 입에 올렸다.
"흐음, 보통 솜씨 좋은 장인들은 이름있는 무인들의 공개 비무에 빠
짐없이 참관하지. 괜찮은 무기를 직접 견식할 가장 좋은 기회니까."
점점 창백해지는 매정방의 얼굴을 뒤로하고 혼자 중얼거리던 알고자
가 빙글빙글 웃으며 멀뚱히 서 있는 팔파지교에게서 무기를 갈취하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겐가?"
"뭐 하시려는... 아미타불?"
다소의 반발이 있었지만 특유의 느물느물 함으로 상황을 무마한 알
고자가 전리품처럼 네 가지의 무기를 치켜들고는 좌중에 대고 크게 소
리 질렀다.
"자, 앞서 거명된 철구포의 주인장 되시는 분들은 모두 단상 위로 올
라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여기 명품이라고 자부할 만한 무기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나선 이는 하나도 없었다.
'흐음, 실체적으로 인식시켜야겠군?'
무기 하나하나를 치켜들고 요놈이 그 무섭다는 귀산판(鬼算板)이요,
요게 하늘도 두 쪽 낸다는 천멸봉(天滅捧)이요, 어쩌고 하며 시전 장사
치마냥 열심히 주워섬기는 알고자의 모습은 희극적이었으나 일부의 사
람들에게는 그리 웃겨 보이지 않았나 보다.
"오오, 이름만큼이나 좋은 재질이야! 대체 어느 장인이 있어 저런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건가!"
어디선가 경탄성이 들리며 노인 하나가 술에 취한 듯 비무대로 비척
비척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거명된 몇몇 철구포의 주인 가운데 하나
일 터.
"내 생에 저런 물건을 볼 수 있다니! 이건 행운이야!"
처음 나온 노인의 용기에 동화된 듯 또 한 사람이 나서고, 다시 또
한 사람... 그렇게 다섯 명으로 불어난 인원이 비무대에 올라 알고자의
손에 든 물건을 훔쳐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삼류무사 273 무인의 긍지. 장인의 긍지
'이 사람들은 아닌데... 오지 않았나?'
그때 군중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자네는 왜 올라가지 않나?"
"아, 저는 괜찮습니다."
"에이, 무슨 소리야. 저런 물건을 대할 기회가 얼마나 있다고! 어서
가서 구경하게!"
"저,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냥 저는......."
"자네만한 대장장이가 어디 있겠냐마는 저런 건 눈으로만 봐도 실력
이 는다고 하지 않았나. 어서 보고 오게."
아마도 거명된 철구포의 주인 가운데 한 명이 나서지 않으려는 듯한
데 목소리로 미루어 이제 서른 갓 넘은 젊은이였다.
"아아, 젊은 주인장. 어서 나오시오."
부드럽게 청하면서 알고자의 입에 회심의 미소가 걸렸다.
눈에 띄게 불안한 기색, 빨게진 두 볼, 그리고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눈동자. 부끄러움을 탄다는 구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뒤숭숭함
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드디어 행차신가?'
우물거리며 다가오는 젊은 장인을 느긋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알고자가
가지고 있던 무기를 장인들에게 내밀었다.
"오오!!"
"우우!!"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몰입하는 대장장이들을 무시하고 그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기는 젊은 대장장이에게 알고자가 깊숙이 포권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동네의 명장으로 소문이 자자하니 이 도사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존성대명을 알 수
있을까요?"
"조, 존성대명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조그마한 대장
간을 운영하는 조석(曺石)이라는 대장장이입니다. 높으신 도사님께서
그리 과례를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본래 선량한 건지 아니면 심약한 편인지 다리마저 후들거리며 간신히
대답하는 조석의 모습은 석 달 자리보전하다 겨우 일어선 병자 같았으
나 힐끗힐끗 병장기를 넘겨볼 때마다 희열에 차는 눈빛은 천상 장인임
을 알 수 있었다.
"하하, 뭐 넘어가기로 합시다. 그런데......."
알고자가 조석의 눈앞에 문제의 원통을 불쑥 내밀었다.
"이 물건, 어떻게 생각하시오?"
"헥!!"
"뭘 그리 놀라는 거요?"
그저 원통형의 쇠붙이일 뿐이다. 그런데 조석이라는 장인에게는 그
렇지 않았나 보다.
"혹시 이 물건 본 적 있소?"
그의 질문에 조석이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요! 처음 봅니다, 정말로 처음이에요!"
"흐음....."
필요 이상의 부정과 흥분.
엄지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던 알고자가 조석의 놀람을 일단 제쳐
두고 원통을 빙글 돌리며 그에게 한 발 다가섯다. 이렇게 되자 조석은
보기 싫어도 원통을 눈앞에서 봐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대장장이의 눈으로 한번 분석해 주시구려. 정말 잘 만든 물건 아니
오? 내 도사의 본분에게 어울리지 않게 기관지학에 관심이 많아 수많
은 기관물들을 구경했고, 또 만들어도 봤지만 이렇게 깔끔한 물건은 처
음 보오."
"아, 아하하...."
마치 자신이 받는 칭찬마냥 알고자의 원통 예찬에 겸연쩍어하던 조
석이 뭔가를 생각하고는 흠칫 몸을 굳혔다. 내친김이라고 생각했는지
알고자는 계속 주절거렸다.
"보시오. 원통의 내부를. 폭발력을 조금이라도 올리려고 매끄럽게
다듬은 주변하며 발사된 철구가 제 방향으로 뻗기 좋도록 잡은 구멍의
각도까지! 거의 이건 명공의 손길을 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소이다!"
"그, 그런데 왜 이런 얘기를 저에게....."
당황하는 조석의 어깨를 꽉 쥐며 알고자가 능글맞게 웃었다.
"장인의 전문적인 의견을 듣고 싶어서라고 하지 않았소? 그렇다고
저기 열심이신 노인들께 질문하기도 그렇고. 어서 평가를 내려보시구
려. 정말 잘 만든 물건 아니오?"
"저, 저는 잘....."
어깨를 잡혔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조석이 도리질을 했다. 그나
마 움직일 수 있는 건 머리라는 걸까.
"그런데 말이오. 보기 좋은 떡이라고 반드시 먹기 좋다고는 할 수
없다는 말처럼 그럴싸해 보이는 이 물건, 사실 쓰레기요."
갑자기 일변한 분위기. 수중에 들고 있던 원통을 바닥에 내던지며
알고자가 차갑게 웃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석이 눈을 크게 떴지만 알고자의 조소는 그치지 않았다. 아니, 오
히려 더욱 깊어졌다고 해야 할까.
"겉보기엔 번지르르하지만 쓰레기라는 거요."
멀뚱히 굴러다니는 원통을 바라보는 조석을 슬며시 보고는 알고자가
목청을 드높였다. 뭔가 도발적인 말투였는데 무엇을 이끌어내려는지
알 수 없어서 좌중의 사람들은 그저 변덕스러운 도사의 푸념 정도로
생각했다.
"한쪽을 막고 다른 편으로 화력을 집중시킨다는 건 꽤나 어려운 작업
이고 또한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오. 폭발력을 완충해야 할 공간 또는
완충제나 여타의 물건이 있었어야 했소. 그래서 저기 폭발 지점을 보
면 반대편의 흙이 더 깊게 패였던 거요."
손을 들어 폭발 지점을 가리킨 알고자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별것 아닌 동작이었지만 뭔가 빈정거리느느 느낌을 강하게 주는 행동이
엇고 왠지는 몰라도 조석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폭발 순간 이 원통은 제 위치에서 뒤로 튕겨졌던
거요. 위로 솟구치지 않았던 게 다행이지. 아마 뭔가로 지지해 둔 모
양이나 후 폭풍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었소. 그래서 철구는 삼분지 일
정도의 힘을 스스로 잃은 거요. 아니었다면 상해자는 목숨을 잃었을지
도 모르지. 후 폭풍을 고려했다면 조금이라도 크기를 늘려서 완충물을
채워 넣었어야 했소. 그 왜 사천 지방에서 얻을 수 있다는 심연중수
(深淵重水) 같은 것으로 말이오. 아니면 질긴 천 따위를 대던지. 그런
데 이 건 영 아니었잖소? 한마디로....."
빙글빙글 손가락을 돌리던 알고자가 허공에 커다란 가위표를 그렸다.
"이건 그저 쓰레기였소. 또한 이걸 만든 장인 역시 쓰레기였단 말이
지."
으드득.
이를 갈며 어깨를 푸들거리는 조석을 보는 둥 마는 둥 바닥의 원통
을 집어 든 알고자가 철저히 썩어버린 미소로 투덜거렸다.
"대체 어떤 장인이 있어 이따위 것을 만들었을까? 그래 놓고 잘도
밥을 뱃속에 밀어 넣었겠지? 어이없어서."
"으으....."
고개를 푹 숙인 조석에게 머리를 딱 붙이고 알고자가 이죽거렸다.
물론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당신이 이런 쓰레기를 모른다니 참으로 다행이오. 덧붙여 만약 이
런 쓰레기나 생간하는장인을 알게 되거나 실수로라도 만난다면 침이라
도 한번 뱉어주는 분별력은 잊지 말길 바라오."
학질 걸린 환자마냥 몸을 떠는 조석의 어깨를 툭툭 두르려 주고 몸을
돌리려는데 알고자의 손을, 더 정확하게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원통
을 꽉 쥐는 무엇이 있었다.
"음? 당신같이 정.직.하면서도 소.신.있는 장인이 이딴 쓰.레.끼.에
무슨 관심인 거요?"
".........."
입을 벌린 조석이 뭐라고 웅얼거렸으나 워낙 작은 소리였고 말과 말
끼리 엉켜 버린지라 당최 뭐라고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영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다시 한 번 말슴해 보시겠소?"
그의 입에 귀를 가져간 알고자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귀에 손을
가져갔다.
"그... 그건 쓰레기가......."
"아, 쓰레기라고요? 물론 쓰레기입니다. 아주 상 쓰레기지요. 이런
건 그냥 버려야....."
반대편 손에 들고 있던 원통을 패대기치려 알고자가 손을 치켜드는데
팔을 붙잡고 늘어지며 조석이 고함을 질렀다.
"그건 쓰레기가 아닙니다!"
"내가 봐서는 쓰레긴데?"
알고자가 빠르게 반문하자 역시 빠르게 반문하며 조석이 그의 손에서
원통을 낚아챘다. 아까까지는 다 죽어가던 사람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기백이 돌아왔는지 조석의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사용자의 잘못입니다! 원통의 내부를 잘 보십시
오! 뭔가를 억지로 떼어놓은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까? 여긴 완충제가
존재했던 곳입니다! 만약 원래대로였다면 천하의 고수라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용자가 이걸 떼어내고 화약을 우겨 넣은 겁니
다! 화약량이 많으면 무조건 폭발력이 높은 줄 알았겠지요! 그 결과
가 오히려 힘을 줄이는 것도 모르는 채로!"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열변을 토하던 조석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 내, 내가....."
순간적인 침묵.
뚝, 또르르.....
알고자의 손에서 원통이 힘없이 빠져나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 나는......."
짝. 짝. 짝.
"맞소. 당신은 유능한 장인이오. 사실 그 흔적은 미련한 도사도 보
았다오.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하오."
"내, 내가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물건을 보고 생각해 낸 겁니다!
믿어주세요!"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조석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알고자에게 애원하
듯 말을 했지만 그걸 믿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답답하구려. 모든 것을 토설하고 이제야 발을 빼려 하다니! 그러고
도 장인이라 하겠소! 원튼 원치 않았든 물건을 만들었고, 그것이 사용
되어 어떤 결과가 나왔소. 책임을 지라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외면은
하지 말아야지! 물건 하나하나가 자식 같다던 옛 명장들과 달라도 너
무 다르구려!"
"아아......."
알고자의 추상같은 질타에 조석이 끝내 눈물을 흘렸다.
"이씨, 당신이야?! 일루 좀 와봐!"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팔을 둥둥 걷어붙이며 장추삼이 튀어나왔
다.
턱.
추뢰보를 쓴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새 조석의 앞으로 돌진한 그가 하
염없이 울고 있는 대장장이의 멱살을 움켜쥐고 짤짤 흔들었다.
"이따위 살상 무기를 만들어놓고 잠이 왔어! 그리고도 목구녕으로
밥이 넘어갔냐고! 여기가 관부 병기창도 아닌데 어쩌자고 저따위 물건
을 내놨느냔 말이야!"
"아아......"
그의 측은한 모습에 한 방 내려치려고 주먹을 쳐든 장추삼이 곧 힘
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혹시 당신, 이 물건 어디에 쓰이는지도 몰랐던 거야?"
이로써 삼성이 폭발물을 매설하지 않았다는 건 명약관화해졌다. 그
러나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장추삼의 질문에도 그저 울기만 하
는 조석이었기에 가슴을 탕탕 치던 그가 발을 한번 쾅 구르고 재차 물
었다.
"누가 의뢰했는데? 만들어달라고 한 사람은 밝혀야 할 거 아냐!"
"으흐흐....."
"아씨~ 계집처럼 질질 짜지만 말고 말을 해! 누가 만들어달라고 했
냐고!"
"그, 그건........."
울먹이며 고개를 치켜드는 조석의 귓전에 쏜살같은 전음성이 파고
들었다.
[입 잘못 놀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이다! 내 말 무슨 뜻인
지 알지!]
'히익!'
소리난 쪽으로 돌아본 조석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곳엔 매정방이
독사처럼 또아리를 틀고 눈을 빛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건 저도 모릅니다."
"몰라?"
그의 대답에 장추삼이 방방 뛰었다.
"세상에 모른다고?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럼 유령이 만들어달라
고 했단 말이야, 뭐야?"
"그, 그게 아니라......"
땀을 닦으며 안절부절못하던 조석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 되는
대로 말을 쏟아냈다.
"아, 그게... 그래요! 전에 심심해서 만들어뒀는데 어느 날 보니까
없어졌더라고요! 별일이야 있겠나 생각했는데 이런 불상사가 벌어질
줄은...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요!"
"뭐? 잃어버렸다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아, 진짜 미
치겠네!"
으르렁거리던 장추삼이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문득 돌아보았다.
"잠시 비켜보게나."
장추삼이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피하자 천천히 조석에게 다가간 북궁
노백이 자애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젊은 나이에 이 정도로 금속을 다루기가 쉬운 일이 아니거늘, 정말
대단한 사람일세."
"........."
"그런데 말이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동을 책임져야 한다네. 비
록 용도를 모르고 만든 물건이라도, 또한 강압에 의해 제작한 물건일지
라도 자신의 손에서 만들어졌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제작자의 자식이자
분신인 걸세. 내 하나만 묻겠네."
넉넉한 음성 때문일까. 조석이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들었다.
"저 원통을 만들 걸 후회하나?"
"그... 그건 아닙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환하게 웃고 북궁노백이 재차 물었다.
"그 말은 용도를 몰랐다는 건데 그렇다면 자식 같은 물건이 이렇게
나쁜 쓰임새로 더럽혀졌다면 도의적으로라도 책임을 져야 하지않을까?"
"그, 그게...."
[잘 생각해라... 너 하나쯤은 파리...]
우우웅 ㅡ
또다시 매정방의 전음이 조석의 귓전을 두드렸으나 이번엔 중간에
끊겼다. 그리고 조석은 무언가 편안하고 안온한 기운이 자신을 감쌌
기에 아늑한 침상에 누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기 강기막으로 조석을 보호한 북궁노백이 눈을 감고 숨 호흡을
하는 그에게 겨울날 옛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처럼 포근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이는 진정한 용기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지. 두
려움을 극복해야만 진정한 용기를 끌어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생각해
보게. 풀무질만 하다가 처음 망치를 잡았던 때를, 처음으로 호미 하나
를 완성했을 때를."
북궁노백의 인도로 조석은 멀지 않았던 옛날에의 회귀를 시작했다.
과거에서 넘어온 수많은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스쳐 지나가고 젊은 대장장이의 얼굴엔 세월의 다리가 몇 겹씩 가로놓
였다 스러졌다.
뭔가를 결심한 조석이 몸을 굽혀 원통을 집어 들고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처음 한쪽 면만으로 살상이 가능한 폭발물의 의뢰를 받았을 때 의
구심이 들지 않았던 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의뢰하신 분의 신분도
신분이려니와 덕이 높은 도사 분의 호위를 위해서 만들어진다고 하셨
기에 그대로 믿었습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경솔했던 저의 잘못이 감
해 지는 건 아니겠지요."
"관에서 금하는 화약을 다루었으니 문제는 되겠으나 내 어떻게든 선
처를 끌어내겠네. 그래... 거짓으로 물건을 만들게 했다면 그런 의뢰
자의 신분은 지켜줄 필요가 없어. 앞으로 제이, 제삼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도."
"네!"
힘차게 대답하고 어깨를 쭉 편 조석이 몸을 돌려 삼성 쪽에 우뚝 멈
춰 섰다.
"여, 역시 그랬군! 저자였어! 가증스러운 놈, 네 죄는 이제 백일하
에 드러난 거야!"
신이 나서 떠드는 매정방을 뒤로하고 장추삼을 지그시 바라보던 조
석이 털석 무릎을 꿇었다.
"어, 뭐야?"
"장추삼 대협이라고 하셨습니까? 못난 이 대장장이는 일신의 안위
때문에 대협께서 누명을 뒤집어쓰는 걸 뻔히 보면서도 나서지 못했습
니다. 비열하고 또 비열한 이 졸부를 꾸짖어주십시오!"
이러면 또 약해지는 게 장추삼이다.
"아니, 뭐, 그러니까, 에... 됐수다."
남을 꾸짖을 위인이나 돼야 말이지, 하면서 머리를 긁는 장추삼을
올려보던 조석이 다시 한 번 큰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이번에는
팔파공동문하를 바라보았다.
"내 비록 미천한 대장장이지만 남을 속이고 살지는 않았소. 그런데
당신은 그리 높은 신분이면서 뭐가 아쉬워 나 같은 이를 이용하여 이
런 짓을 벌인 거요."
누구에게 하는 소리일까 다들 어이없어하는데 매정방이 튀어나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스캭 ㅡ
"이노옴! 천한 대장장이 놈이 감히 누구에게 헛짓거리냐! 건방진
놈!"
꽝!
"케엑!"
어느새 빼 들었는지 칼을 휘두르며 조석에게 달려들던 그가 무형의
무언가에 부딪치며 나가떨어졌다.
"내 분명히 말했지. 또다시 이런 짓을 하면 공동에 책임을 물을 것
이라고."
오른 손바닥을 펴고 엄중한 얼굴로 구겨진 휴지 조각처럼 내동댕이
쳐진 매정방을 노려보던 북궁노백이 멍청하게 서 있는 철면자에게 고
개를 돌렸다.
"허언으로 들리는가, 내 말이."
허언? 그보다 더 웃긴 허풍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누가 있어 구파에, 대공동 전체에 책임을 물을 것인가.
그런데 이제 알겠다. 정체 모를 저 노인은 공동파가 아니라 소림이
라도 책임을 물을 사람이라는 것을. 그만한 담력과 연륜과 자존심,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힘이 있다는 사실을.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매정방에게 처연한 눈길을 던지던 조석이 손을
천천히 들어 그를 가리키고 입을 열었다.
"당신같이 비열한 인간의 말에 속아 물건을 제작했던 내 자신이 불쌍
하오.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걸 목도하고도 진실을 말하
지 못했던 이 입을 찢어버리고 싶소."
순간 엄청난 소란이 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정방이가 그랬다고?!"
철면자가 푸들푸들 입을 떨며 모두를 돌아보고,
"허어... 짐작은 했거늘 막상 확인하니 가슴이 메어지는군. 무량수
불......."
알고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러니저리니해도 어쨌든 팔파지교로서
책임감이 느껴져서일까.
"허어........"
청목자가 머리를 짚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인가. 저 장인의 말대로라면 이건
단순한 살인 미수가 아니다. 구파사상 초유의 동문 암살 미수극이었다
는 거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아닙니다! 지금 저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노인네의 사탕발림
에 넘어가 있지도 않았던 사실을 지어내는 거라고요!"
누가 들어도 구슬픈 절규이거늘 매정방의 입에서 터져 나와서인지
뭔가 공허하다.
그래도, 그래도 순박한 장인의 말은 일단은 인정하기 싫고 쉴 사이
없이 눈을 굴리는 매정방의 간사한 세 치 혀에서 흘러나온 말에 힘을
실어주고픈 사람들도 있었다.
"그, 그렇소. 일개 대장장이의 단독 진술만으로 마무리 짓기에는 사
안이 너무 엄중하오!"
철면자가 팔파지교들을 돌아보며 애원하듯 목소리를 높이자,
"맞아, 딱히 드러난 증거 하나 없이 사건을 마무리할 수는 없지 않은
가!"
라며 사심안자가 동조했다.
증거가 없다... 이 말의 파급력은 시로 간단치 않았기에 꺼져 가는
불씨를 잡는 심정으로 구파의 사람들이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조금씩
펴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인지상정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은 노골적인 적의로 외롭게 서 있는 젊은 장인을 쫓았다. 방금
전까지 장추삼이 받았던 모든 악의가 전도된 느낌이라 북궁노백과 알
고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할 말을 했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조석은 이들의 사념 어린 눈동자
를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편안한 얼굴로 하늘을 우러르고만
있었다.
"네 녀석이 내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런 거짓을 유포했는지는
몰라도 입을 잘못 놀린 대가를 곧 치르게 될 것이다. 대장장이, 넌
실수한 거야!"
매정방의 원독에 찬 목소리를 묵묵히 감내하던 조석이 품속에 손을
넣으며 힘없이 웃었다.
"맞소, 실수를 한 게지."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자 악귀처럼 눈을 빛내던 매정방의 표정
에 다급함이 어렸다.
"큰돈에 눈이 어두워 사용처도 확인하지 않고 살상병기를 만들었으니
어찌 실수가 아닐까. 다행히 일전도 낭비하지 않았소. 도로 가져가..."
"이익!"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아 있엇는지 번개처럼 몸을 날리는 매정방의 움
직임은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와도 같이 재빨랐으나 이미 전표는 장추삼
의 수중에 쥐어져 있었다.
"어디 보자... 음, 뭐야? 한 대 더 맞고 싶냐?"
뺑!
그의 발길질에 또다시 나동그라진 매정방이 흙먼지를 뒤집어쓴 얼굴로
팔파공동문하에 고개를 돌렸으나 어딘지 모르게 식어버린 동문들을 대
할 수가 없어서 잽싸게 머리를 처박았다.
"어이쿠, 오백 냥? 내 오백 냥짜리 전표를 다 만져 보네. 보자...
동해전장에서 발행한 전표고 가액이 오백 냥짜리라면?"
피식 웃으며 장추삼이 북궁단야를 바라보았다.
"개인의 이름만으로 발급이 거의 불가능한 액수. 당연히 취득자의
정보가 남아 있을 테니 이로써 증거까지 확보되었군."
얼음장처럼 시린 판결이 떨어지자 그때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철
면자가 풀썩 무릎을 꿇으며 오열했다.
"이,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렇게 대성통곡을 하던 철면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구겨져 있던
매정방을 잡아 일으켰다.
"이, 이 죄를 어찌하려느냐! 어쩌자고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냐!"
"우우우........"
겁에 질려 눈을 까뒤집은 매정방이 개처럼 앓는 소리를 내자 그를
잡았던 손을 풀며 한숨을 내쉬던 철면자가 알 수 없는 손짓으로 누군가
를 불렀다.
촤촤촤!
군중들을 가르며 한 무리의 인물들이 나타나 꿈틀거리는 매정방을
포박하여 뒤로 물러섰다.
"왜, 왜...."
어느새 일어나 좌정하고 운기조식에 들어간 유소추의 뒤에서 호법을
서던 면사여인의 입에서 무거운 탄식이 흘렀다. 그녀는 차하연이 언
급했던 팔륜관을 돌파한 두 명의 팔파공동문하 가운데 또 한 명인 아미
의 속가제자 임주주(林珠珠)였다.
그녀로서는 사랑하는 정인의 사고에 이은 또 하나의 충격이었고, 그
래서 얼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강직하고 깐깐한 성품이라 남들과 두루뭉술하게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유소추는 사형제들에게 원한을 살 행동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이건 정인으로서가 아니라 사매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형으로서의 무
당신룡이고, 그것을 부정할 이는 없다고 자부했다.
그렇기에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원인이 없는 행동은 없다는데 지
금 행동의 결과로 정인은 정양 중이고 범죄의 동기는 뜬구름이었으니까.
"저, 정말 네가 맞느냐? 그렇다면 이유가 뭐란 말이냐? 이 사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멍하게 말문을 여는 임주주를 힐끗 돌아본 매정방이 문득 히죽히죽
웃었다. 나름대로 완전했다고 생각햇던 범죄가 발각되어 심신이 무력
해져 버린 걸까, 아니면.......
미쳐 버린 걸까?
"크크... 사저는 무슨."
"무슨 말이냐?"
임주주에게서 고개를 돌린 매정방이 이죽거렸다.
"웃기지 말라고! 엄연히 사문이 다른데 얼어죽을 사형제는 무슨!
저기 어떻게든 나를 범인으로 몰아붙인 작자도 한때는 팔파지교랍시고
우리를 지도했던 사숙님이 아닌가!"
알고자가 어처구니없어 양팔을 벌리는데 악이 받친 매정방이 온몸을
뒤틀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진정 사숙이고 사형제였다면 조금 더 나를 지켜줘야 했던
거 아니야?! 내가 복룡표국이라는 이류 쓰레기 표국에서 굴욕을 당하
고 있을 때 뭘 해줬느냔 말이야! 이 매정방이는 그래도 구파를 능멸하
는 저 녀석들을 단죄하기 위해 이런 노력이라도 기울이지 않았냐고!
그런데 결과가 이게 뭐야! 포승을 받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저기
쓰레기 같은 세 놈과 미친 노인네란 말이야! 알겠어, 알겠냐고?! 알면
어서 이걸 풀란 말이야!"
장내는 매정방이 내뿜는 독기와 광기로 뒤덮였다. 그러나 임주주는
아지곧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이미
원귀처럼 변해 버린 인간 말종에게 다시 물어야만 했다.
"아니, 아니... 왜 유사형에게만 폭발이 향하도록 했느냐? 유 사형
께서 네게 무슨 해코지를 한 적도 없을 텐데, 왜?"
"크크크... 나도 처음에는 장추삼이라는 녀석에게 철구를 잔뜩 씌워
주려고 했지."
그의 혓바닥은 더 이상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리 일을 벌이면 남은 두 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잖아? 분
명 시시콜콜 캐고 다닐 거라고. 무엇보다 장추삼이 하나로는 성에 안
차는 일이지. 특히 화산의 대제자라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하
운이라는 저놈! 저놈은 감히 나를 공동의 수치네 뭐네 하면서 더러운
입질을 했었지. 그때 기막힌 생각이 들더군. 유소추를 폭사시켜 버리
면 장추삼이뿐 아니라 다른 두 놈에게도 죄를 씌울 수 있잖아? 저 세
놈은 화근 덩어리거든. 언젠가 우리 팔파를, 무림맹을 전복시킬 거라
고."
"그래서, 그래서 아무 죄 없는 유 사형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거
냐?"
매정방의 조소는 광소로 변했다. 까마귀의 울부짖음처럼 듣기 싫은
음향이 천지에 메아리치고 모두는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무슨 말이야?! 감사해야지! 제 한 몸을 희생해서 화근 덩어리를
삭초제근할 수 있었는데! 그랬다면 팔파의 역사에 영원히 남았을 거
야!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유소추가 한 일이 뭐야?"
입을 떡 벌리고 뭐라 하려는 임주주의 앞으로 한 발 다가서던 매정
방이 무림맹 나졸들의 제지로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광기 어
린 눈동자는 여전히 희번덕거리며 그녀의 전신을 훑어보고 있었다.
"유소추가 한 일이 뭐냐고! 팔륜관을 뚫어놓고 고작해야 벽보고 도
나 닦은 게 전부였잖아! 그럼 뭐 하려고 수련을 했어? 힘은 사용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야! 저런 쓰레기들을 청소하기 위혀서 주어진 특권
이라고! 그런데 못하더군. 또 당신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병신
같은 놈."
그의 음탕한 시선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 임주주의 귓전으로 매정
방의 혼잣말이 꽂혔다. 더 이상 추악할 수 없는 나락의 끝에서나 울
려 퍼질 듯한 메아리를.
"빌어먹을 대장장이 놈이 물의 용도만 알려줬더라면 깨끗이 처리할
수 있었을 거야... 크크."
그랬을지도 모른다. 만약 유소추가 폭발로 인하여 즉사했더라면 이
런 논리적인 사건 해결 없이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을 테고 사건은
잊혀진 채 원한만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고한 희생자들을 향한 독설과 응징....
"이제 알았지? 이 매정방이 벌인 거사(巨事)에 얼마나 깊은 뜻이 숨
어 있었는지? 자, 이제 어서 이걸 풀어. 누구든 이걸 풀란 말이야!"
"금수만도 못한 놈!"
"아서라!"
칼을 빼 드는 임주주를 막아서며 알고자가 고개를 저었다.
"너까지 이러면 어쩌자는 것이냐."
"삼지교님!"
"그래, 이후는 우리에게 맡겨라."
겨우 임주주를 달래고 알고자가 장추삼들을 돌아보았다.
"괜찮겠나?"
"댁이라면."
"고맙네."
뜻 모를 질문과 역시 뜬금없는 대답.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치고 알
고자가 이번에는 북궁노백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괜찮겠습니까?"
"믿네."
"감사합니다."
역시 뜻 모를 질문과 대답.
"호북지부로 압송하라. 그곳에서 치죄할 것이다!"
치죄와 압송, 매정방은 그가 사용했던 단어를 그대로 뒤집어쓴 채
킬킬거리며 끌려갔다.
"가만?"
단 아래로 내려가는 매정방을 물끄러미 보다 장추삼이 소리쳤다.
"너... 비천헐서에 관한 얘기, 어디서 들었어?"
넋이 나가 있던 사람들도 비천혈서라는 말이 나오자 눈을 번쩍 떴
다. 워낙 황당하고 가증스러운 결말이라 정신이 없었는데 생각해 보
니 중요한 것을 빼먹고 있었다.
"그거?"
빙글 몸을 돌린 매정방이 사이한 미소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궁금해? 키히히히! 그렇지만 말해 줄 수는 없지. 이 매정방이 네
놈의 강압 따위로 입을 열 사람으로 보였더냐?"
"이 자식이!!"
"아아, 가만, 가만."
분노해서 뛰쳐나가려는 장추삼보다 한 발 앞서 알고자가 뛰어나가 빈
정빈정 웃고 있는 매정방의 턱을 치켜들었다.
"대답하지 말게. 여기서 절~대로 대답하지 말게."
빈정의 급수가 다르다!
웃음기를 머금고 알고자가 매정방을 똑바로 쳐다보며 친근하게 충고
해 주었다. 절대로 친근하지 않은 내용을 담은 말이니 엄밀하게 따진
다면 충고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래야 호북지부 뇌옥(牢獄)에서 하릴없이 시간 죽이고 있는 황씨
형제들도 오랜만에 할 일이 생기는 것 아닌가. 자네는 자존심을 지키
고, 그들에게는 밥값거리가 생기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역
시 사나이 매정방, 한 번 뱉은 말은 책임을 져야지. 암, 그렇고말고!"
순간 매정방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황씨 형제라면 무림맹 호북지부로 압송된 이라면 누구나 이를 가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함을 가진 것이라 지
목된 죄인들은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낸다고들 했다.
"그러잖아도 요즘 황씨 형제들이 심심해서 지나가는 똥개들에게라도
육골분시(肉骨分屍)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고 들었
었지. 하긴, 육 개월 이상 일거리가 끊기면 누구나 미쳐 버릴지도 모
르지."
육 개월! 육 개월 동안 참았던 일!
결정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왼 손톱을 빼는 시늉을 하면서 천연덕스
럽게 웃는 알고자의 행동에 매정방은 혼이 다 달아나 버렸다. 황씨
형제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들이었으니까.
"마, 말할게요!"
"에이~ 왜 그래? 자존심 하나로 먹고사는 매정방인데 그까짓 육골
분시 때문에 토설이라니?"
"내, 내가 그 말을 들은 건!"
알고자의 꼬일 대로 꼬인 조소를 가르며 매정방이 절규처럼 소리 질
렀다.
"이틀 전이었습니다! 이틀 전 이곳에 폭발물을 매설하고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가 다가와서 알려주었습니다!"
"그게 누군가?"
들이닥치듯 알고자가 물었다.
"나도 모릅니다."
"황씨 형제......."
"저, 정말 모릅니다! 정말로 모른다고요! 처음 본 사람이고 강호
에서 그런 차림새를 한 인물은 듣도 보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발
믿어주세요!"
"그게 말이 되는가? 처음 보았고, 강호상에 알려지지도 않은 인물
의 말을 어떻게 믿고 그리 떠들었다는 거야?"
역시 황씨 형제를 불러야, 하는 알고자의 중얼거림에 매정방이 털썩
무릎을 꿇으면서 엉엉 울었다. 남에게 해코지를 하는 인물일수록 자신
의 아픔에는 민감한 법일까.
"으흐흑! 그자가 그랬습니다! 장추삼이에게 비천혈서의 단서를 찾
을 수 있을 거라고! 구파는 뭐 하는 거냐고! 그래서 누구냐고 물었지
만 신비로운 웃음을 짓고는 가버렸습니다! 워낙 순간적인 일이라 잡을
생각도 하지 못했고요!"
"특이점은 없었어?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해봐!"
다급하게 장추삼이 물었다. 이 정도까지 사건의 흐름을 꿰는 인물이
라면 그가 맏는 주위의 동료들과 빌어먹을 사숙밖에는 없다. 그도 아
니라면 짚이는 곳은 단 하나!
"그, 그것이... 흐흐흑!"
"아, 병신처럼 울지만 말고 말을 하라니까!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일
수는 없잖아! 얼굴에 칼자국이라도 났다던가, 아니면 희한한 옷을 입고
있다던가!"
"아......"
엉엉 울던 매정방이 뭔가 생각해 내고 고개를 쳐들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다른 건 모르겠는데, 뭐?"
그의 반응에 하운과 북궁단야까지도 몸을 움직여 매정방을 둘러쌌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하나 생각나는 것은......"
"자꾸 뜸 들일래? 내가 황씨 형제한테 몇 푼 쥐어주고 은밀한 부탁
이라도 할까? 가령 분근착골(分筋錯骨)은 조석으로 한두 번씩 잊지 말
라던가 하는?"
알지도 못하는 황씨 형제를 들먹이며 장추삼이 실소했다. 얼굴도 본
적이 없거늘, 무슨.
그러나 반응은 의외로 즉각적이었다.
"마, 말한다니까요! 글니까 그자는 오십대 초반의 중년인이었는데
관록을 느끼게 하는 얼굴이었고......."
순간 장추삼이 정색을 하며 하운을 돌아보았다.
"하 형, 얼마 있어?"
"대락 삼십 냥 정도는."
"그럼 한 육십 냥 쥐어줄 수 있군."
"백 냥이면 시키는 대로 다 해줄 거다."
북궁단야가 전낭을 풀어 장추삼에게 내밀었다.
"아악! 정말로 그게 다요, 그게 다란 말이오! 그리고, 그리고...
아!"
더듬거리며 머리를 쥐어짜던 매정방의 눈이 커졌다.
"맞아! 가슴에 문양이 있었어!"
"뭐?"
"그 문양은?"
"문양이 뭔가!"
세 청년이 나란히 소리쳤다. 이 돌연한 기세에 움찔 놀라 눈알을 굴
리던 매정방이 북궁단야의 손에 여전히 대롱거리는 전낭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게 산맥의 문양이었소. 칼끝 같은 산이 세 개 중첩된 문양
이었소!"
"......!"
"......!"
"......!"
세 청년의 눈이 한 점에서 모아졌다.
"십장생!"
"산(山)!"
"몸통을 두드리니 이제 머리가 슬슬 나온다는 건가?"
무슨 말인지 몰라 물으려다 알고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삼성의 몫이다. 처음부
터 삼성의 일이었고, 앞으로도 삼성의 일일 터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피식 웃고 알고자가 매정방의 압송 명령을 내렸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황씨 형제에게 보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매정방의 모습을
외면하며 알고자는 문득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았다.
'사제, 처음으로 네가 부럽구나!'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상의하는 세 청년을 바라보며 그는 문득 도
복을 벗고 그들과 어울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저리 매진한다는 건 멋진 일이니까.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자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더 남아봐야 볼 것도 없고, 남길 것도 없었으니까. 그들이 바랐던 우
상의 승리는 물거품처럼 날아가고 지역 이기주의라는 이름 아래 뭉쳤
던 민심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알맹이 없는 잔치의 뒤안길은 그렇게 허무했다. 모두에게는 아니었
지만.
"아저씨!!"
"음?"
돌아서던 사람들 가운데 문득 장추삼과 눈을 마주친 동소가 엄지손
가락을 우뚝 세웠다.
어째 화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장추삼은 이 어린 지기에게
양쪽 엄지손가락을 모두 세워주었다.
북궁단야에게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며 총총히 사라지는 수수와 손
가락에 입을 넣고 기성을 지르며 난리 치는 아이들과 행여 무림에 관
여될까 급히 걸음을 재촉하는 부모들.
"이... 보시오, 장 대협."
운공으로 몸을 다스렸지만 아직까지 몸을 수습하지 못하고 임주주에
게 기댄 채 겨우 일어선 유소추가 떠듬떠듬 말문을 열었다.
"아!"
소리난 방향으로 몸을 돌린 장추삼이 그의 파리한 안색에 그만 몸을
돌렸다.
괜찮은 친구였는데, 괜찮은 대결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매듭지어져서 대단히 송구스럽소이다."
누가 할 소릴.
"팔파공동문하, 아니, 이제 당분간은 칠파공동문하겠구려, 아무튼
공동문하를 대표해서 장추삼 대협께 심심한 사과를 드리는 바이오. 입
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으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여 주신다면 유모 감
읍하여 무릎이라도 꿇겠소이다."
"부상당한 사람 맞아? 말 하나만큼은 청산유수네. 됐시다, 그건 됐
고....."
손을 휘휘 저으며 유소추의 깊은 포권을 사양한 장추삼이 주먹을 들
어 쭉 내밀었다.
"다음번엔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아...."
씨익하고 짓궂게 미소 짓는 장추삼을 멍하니 바라보던 유소추가 팔
떨어지겠다는 그의 엄살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턱!
유소추 역시 주먹을 들어 장추삼의 주먹에 맞대었다.
"다음번엔 제대로!"
"좋아, 된거라고. 그럼 가서 푹 쉬시오. 한 사나흘은 칼싸움하지
말고 말이야."
유소추를 받치고 있는 임주주에게 '이 사람 당분간 검 쥐게 하지 마
요' 하는 간섭 아닌 간섭까지 하고 손을 흔들며 몸을 돌린 장추삼이 청
명한 하늘을 올려다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담백한 사람이로군요."
장추삼의 등을 말없이 응시하다 임주주가 유소추의 어깨를 꼬옥 잡으
며 중얼거렸다.
"장부니까!"
임주주에게서 억지로 몸을 뗀 유소추가 장추삼의 등에 대고 다시 한
번 깊은 포권을 보냈다.
'진정한 장부의 등이 이런 것이었군요. 이번 만남에 너무도 많은 것
을 알고 갑니다. 다시 뵐 때까지 건승하시길.'
그렇게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장내는 팔파의 사람들과 북궁
노백, 그리고 삼성만이 남았다. 아니, 죽립을 눌러 쓴 사람 한 명하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참인가?"
북궁노백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자 멀거니 서 있던 죽립인이 삿갓
을 벗어 들었다.
"아버님?"
"헥, 자, 장인 후보 어르신까지......."
북궁단야와 장추삼이 동시에 입을 열었고 그때까지 사건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던 북궁헌이 떨떠름한 얼굴로 비무대에 올라섰다.
"별일없이 해결되어 다행일세."
둘 모두에게 한 말인지라 장추삼과 북궁단야 모두 '덕분에'라고 대
답하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음, 잘 해결되었어."
턱을 쭉 내밀며 북궁노백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슬며시 그 모습을
외면한 북궁헌이 장추삼의 어깨를 탁탁 쳤다. 왠지 몰라도 약간 서운
한 기색의 북궁헌이라 그를 잘 모르는 장추삼으로선 의아했지만 그를
너무도 잘 아는 북궁단야였기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방금 전의 상황, 잔소리하기에 너무 좋지 않았는가!
이런 기막힌 기회를 놓쳤으니 어찌 서운하지 않았겠는가!
일장 연설의 기가 막힌 순간을 날려 버린 아쉬움을 어찌 모르랴!
"아아, 피곤들 할 텐데. 객방에 가서 쉬게. 힘든 시간을 보냈어,
모두들."
"그러고 보니 어깻죽지부터 은은히 아려오는데요?"
첫댓글 즐감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