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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8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코헬 11,9―12,8
복 음 : 루카 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모든 것이 허무라고 말하던 코헬렛이
그다음에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제 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고 하더니,
이제는 젊음을 즐기고 근심을 떨쳐 버리라고 권고합니다.
코헬렛은 오늘 독서에 해당하는 부분 외에도 그의 책 여러 곳에서 인생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허무라고 말하던 그의 태도와 모순되게 보여서
어떤 이들은 이 책이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조화시킬 수 있는 열쇠가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코헬렛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을 절감하였고,
그래서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그분께서는
모든 일을 “제때에 아름답도록”(코헬 3,11) 만드신다고 믿을 때,
더 이상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고민으로 삶을 어둡게 만들지 않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 즐기라는 것은 영원한 기쁨이 아닙니다.
코헬렛은 아직 영원한 생명이나 천국의 기쁨 같은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라고 믿으며 맡깁니다.
젊은 시절에는 젊은 시절에 누릴 수 있는 것을 즐기고,
꽃이 피면 그 꽃이 시들기 전에 꽃을 즐깁니다.
젊거나 꽃이 핀 그 순간을 영원하고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가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심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모순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의탁으로 채웠기에,
코헬렛은 허무한 삶 속에서도 오늘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루에 책 한 권을 목표로 책을 읽습니다. 맞습니다. 다독합니다.
물론 많은 분이 이것저것 많이 읽는 다독보다는
한 권의 책이라도 정독하는 편이 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정독보다 다독이 맞다고 판단됩니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오랫동안 한 권의 책만 읽는 것보다는
여러 장르의 책을 다양하게 읽으면서 깊이가 부족해도
넓게 지식을 갖추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질보다는 양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 안에서도 질보다 양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실패라는 ‘양’입니다. 이런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도자기 공예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학기 과제를 내면서
반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눠 평가 기준을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에게는 “50개 이상을 만들면 A, 40개 이상이면 B, 그 이하는 C”라고 했고,
두 번째 그룹에게는 “몇 개를 만들든 가장 잘 만든 한 점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어느 그룹에서 최고의 작품이 나왔을까요?
첫 번째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만들면서 실패의 과정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완성도 높은 최고의 작품을 만든 것입니다.
양보다 질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질 높은 ‘나’를 만들려면 양적으로 많은 실패가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려고 하지만, 이 실패는 성공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양적으로 많은 실패에 질적으로 높은 성공을 가져올 확률도 높아집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가 있었던 예수님이고, 예수님에 대한 평가 역시 대단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 상은 정치적 메시아입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할 힘 있는 임금님,
개선장군처럼 늠름하게 들어오는 영광의 임금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없이는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다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이 실패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활로 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삶에서 모든 실패처럼 보이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 끝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영광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다음,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루카 9,45 참조).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라는 말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실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순명’, ‘순종’을 표현할 때, 구약성경은 히브리 단어 ‘쉐마’를 사용하는데,
이는 단순히 청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듣는 것보다,
말씀하시는 분의 명을 ‘마음의 귀에 담아 행동에 옮긴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어,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너희를 높여주실 것이다.”(신명 28,1)
그래서 말씀은 ‘믿음의 순명’과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따를 수가 없나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사실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성경 본문이 아무 말씀도 안 할 때도 있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말이나 난해할 때도 있습니다.
곧 말씀이 뜻을 감추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도
사랑의 마음,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고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알아듣기 어려운 성경본문을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고 이렇게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장애라고 여겼던 대목들이
실로 크고 거룩한 유익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필로칼리아)
또한 사막의 마카리오는 역시 믿음으로 먼저 ‘실천’할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 분량에 만족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애쓰십시오.
그리하면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바가 여러분의 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들은 말씀을 비록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은 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 혹은 삶은 품고 살아야 하는 선물이요,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 분을 만나야 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셨듯이,
오늘 우리도 형제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는
‘부활 신비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9,45)
주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죽음에 넘겨져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죽어 사라져 되살아나는 사랑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학창 시절에 시험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것은,
잘 모르던 것이 시험을 코앞에 두어서야 이해되는 것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당장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들어놓으면 때가 되어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에 놀라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셨고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9,44).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예고였습니다.
말씀하신 이유는 헛된 이상에 사로잡히거나 허망한 희망에 들떠 있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의 수난을 목격한 후에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은 참으로 좋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불완전하고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의 손'이 하느님을 죽였습니다.
우리 손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될 때 하느님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내 탓이오"를 일깨우는 날 이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작업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때가 되면,
부모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아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제자들도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고, 오늘 우리도 그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명심하면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그분과의 통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1,21).
말씀을 귀담아들으면, 때가 되면 그 의미를 알아듣게 되고 그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1,22).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야고1,25).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루카10,38-43)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2).
참으로 들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근본이 섭니다.
경청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충만하게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말씀 안에 굳건한 믿음을 더하고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제가 당신의 가르침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온종일 그것을 묵상합니다.
당신의 계명이 저를 원수들보다 슬기롭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영원히 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119,97).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2024년 9월 28일입니다. 이 시간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로부터 2024년이 지나간 날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물리적인 시간 속에서 생활합니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된 현대사회는 이 물리적인 시간의 틀 속에서 바쁘게 돌아갑니다.
시간은 돈처럼 여겨집니다. 평균 시급은 시간당 15$ 정도 합니다.
주차하는 경우에도 시간당 주차비를 계산합니다. 시간은 평가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육상 경기에서 시간은 순위의 기준이 됩니다.
9월 28일이 뜻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이 결혼기념일, 생일, 축일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9월 28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이것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의미의 시간에 가족들이 만나고, 연인이 만나고, 이웃이 만납니다.
74년 전 9월 28일은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빼앗긴 서울을 되찾은 날입니다.
‘9.28 수복일’이라고 배웠습니다.
이런 의미의 시간들이 모여서 문명이 되었고, 문화가 되었고, 역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약속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시간은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신앙의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가치의 시간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신앙인들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영원한 시간을 찾으려 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에서 우리는 모두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의미의 시간에서 우리는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신앙의 시간은 우리를 부활의 문으로 안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물리적인 시간, 의미의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고난과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사람,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치의 시간을 사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에게 영원의 시간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하느님은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식별’입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한번 써보고, 살아봐야 안다.’ 겉보기와는 다른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식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식별의 결과입니다. 결과가 좋고, 결실이 있으면 영적식별을 잘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고, 결실이 없으면 그것은 악의 유혹을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위로와 고독’이 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결과는 늘 기쁨과 평화입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도 ‘위로와 고독’이 있습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 결과는 늘 불평과 불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영적 식별을 잘 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적 식별을 잘하는 사람은 3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의 의견도 충분히 듣습니다.
누군가 영적 식별을 잘했는데, 교만하다면 그것은 악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둘째는 진중함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과 탓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깊은 바다와 같아서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의견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를 때,
교회를 비판하고 순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영적식별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영광의 길이기도 하지만,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다음,
그리고 간질 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 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경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알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젊은이 여러분, 꽃 같은 시절은 잠시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꽃같은 시절은 잠시입니다.
코헬렛 저자의 삶과 신앙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그는 인생의 산전수전과 우여곡절을 다 겪고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현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었지만,
이 세상을 초월해서 살던 사람, 인생의 지혜와 경륜으로 충만했던 스승이었습니다.
그런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후배들에게 건네는 조언과 권고는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빛나는 보석 같습니다.
두고두고 마음에 새기고, 틈만 나면 연필로 꾹꾹 눌러 필사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코헬렛 말씀을 묵상하면서 개인적으로 크게 반성하게 됩니다.
나는 나름 인생을 좀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 어려운 시대 갈팡질팡하는 후배들에게
지혜와 경륜을 갖춘 선배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때그때 적절한 조언과 행동으로 젊은이들에게 삶의 이정표가 되고 있는지?
오늘 우리가 봉독한 코헬렛 말씀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참으로 요긴한 말씀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읽고 마음에 새길 명언입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편도나무: 아몬드 나무라고도 합니다. 성막의 등잔대가 아몬드 나무의 꽃 모양으로 만들어집니다.
*참양각초: 근동 지방에서 서식하는 생존력이 강한 나무, 케이퍼 나무로 추정됩니다.
건조한 광야에 뿌리를 내리고 어여쁜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연어 요리를 먹을 때 이 열매를 절여 곁들여 먹곤 합니다.
젊은 형제자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꽃같은 시절은 잠시입니다.
순식간에 세월은 흐르고 마치 번개처럼, 섬광처럼 인생이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오늘 하루에 충실 하십시오.
젊은 시절부터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께서 기뻐하실 삶을 추구하십시오.
오늘은 다시는 오지 않는 축복과 은총과 구원의 날입니다.
부디 오늘을 허송세월하지 마시고 충만히 누리고 만끽하십시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9,44)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다가오는 구절은
바로 ‘귀담아들어라.’라는 표현입니다.
사실 요즘 ‘공감적 경청’이라는 말을 근래에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공감적 경청은 상대방의 관점과 입장에서 듣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울러 「명량」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참된 리더쉽이 무엇인지 보여 준
이순신 장군도 경청을 소홀히 하지 않았잖아요.
요즘 와서 경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경청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잠시 공감적 경청에 대하여 ‘이정훈’의 「소통의 기술」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자는 경청의 수준과 단계를 5등급으로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5등급: 상대방을 무시한다. 전달 내용이 하나도 없다.
둘째, 4등급: 듣는 척한다. 자신의 생각 속에 빠지고 집중하지 않음으로 계속 불편해진다.
셋째, 3등급: 선택적으로 듣는다. 즉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내용이 나중에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넷째, 2등급: 귀 기울여 듣는다. 내용에 집중해서 듣는다.
다섯째, 1등급: 공감해서 경청한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경청의 단계에서 가장 높은 단계는 바로 공감적 경청입니다.
공감적 경청은 한 마디로 상대방에게 집중하여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상대방의 생각과 느낌 즉 감정까지 깊이 공감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청득심以廳得心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 들음으로써 마음을 얻는다.”라 는 뜻입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 가운데 듣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바로 귀는 둘이지만,
말하는 입은 하나로, 이는 곧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듣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데
우리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말을 배우는 데는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략 2년 정도 걸리나
제대로 듣는 것을 배우는 데는 60년도 더 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하는 이유는 듣는 사람의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듣고 상대방을 판단하려 합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은연중에 자기 생각대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조종하려는 태도 때문에 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감적 경청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늘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 능력(?),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늘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편리대로 듣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의 수난이 일어나고 오해와 갈등이 생길 수 있는 지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까, 말씀하시지 않고
특별히 자기들에게만 따로 말씀하셨음에도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그러기에 “이해하지 못하였다.”(9,45)라는 표현은 성서에 무려 17번이나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저희와 달리(?) 이해력이 부족했을까요.
물론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만 여기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9,45)라는 말을 통해서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듣고
거의 멘붕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듣고도 듣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이 없었으며,
공감적 경청 능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천국은 무한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곳,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제자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처지와 심정을 들어주고
마음을 깊이 헤아려 주려는 마음이 부족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들의 영혼 상태는 천국이 아니라
지옥과도 같은 어둠과 절망을 느낄 만큼 혼란 그 자체였다고 보입니다.
들음을 잃어버린 세상, 들어야 할 내면의 소리는 물론
타인의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자연의 소리마저 잃어버린 것이 현대인입니다.
정말 들어야 할 소리보다는 하루 내내 지나치게 오랫동안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살다 보니
청각에 관계된 질병이 증가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이러니 침묵이 사라졌고, 침묵을 잃어버렸기에 생각함도 잃어버린 세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담아들어라.’하고 말씀하신 까닭은
단지 청각적으로 들어라!, 는 의미만이 아니라
주님의 목소리를 침묵 가운데서 잘 듣고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향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침묵 가운데 주님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것이며,
이 공감적 경청이 회복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께서 가실 수난의 여정을 동행하고 동반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주님, 당신 말씀에 귀 기울이고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아멘.”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보충 계시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의 신원에 대한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 간의 대담을 전하면서, 함구령과 함께 첫 번째 수난 예고를 들려준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의 신원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을 했다.
헤로데는 예수가 소생한 엘리야도 아니오,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오,
소생한 세례자 요한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신원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면서
예수를 한 번 만나 볼 궁리를 하고 있을 즈음,
예수께서는 직접 당신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던지신다.
제자들에게 던져진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누라고 하더냐?”는 것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에 대한 신원에 대한 질문은 마태오복음(16,13-20)과
마르코(8,27-30)복음에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지재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마을을 향하는
길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루카복음은 예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기 전에 “혼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 수행은 루카가 즐겨 사용하는 고유특성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기도’와 예수의 신원‘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루카복음에서 ’예수께 대한 헤로데의 호기심‘(9,7-9)과
’예수의 신원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9,18-21) 사이에
’오천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사화‘(9,10-17)가 삽입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헤로데가 예수의 신원을 두고 불안에 싸인 이유는 아직 만나 본 적이 없는
예수를 여론에 의존하여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루카가 곧바로 들려주는 ’빵의 기적‘이 헤로데의 생각을 입증해 주려는 듯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한 삽입 의도는 기적의 방법에 있다.
예수께서 굶주림에 지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신 기적은
헤로데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權謀術數‘로 이루어낸 治積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올려바친 ’감사의 기도‘(루카 9,16)로 이루어낸 祈蹟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12사도를 선발하실 때와 같이 기도하신 후(루카 6,12)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예수께 있어서 기도란 무엇일까?
다른 복음서는 제쳐두고라도 루카복음서에만
예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는 대목은 여러 군데 있다.
빵의 기적을 베푸실 때(9,16),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들고,
그리고 빵을 손에 들고 바치신 기도(19,17-19),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하신 기도(24,30)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올린 감사의 기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그 외의 다른 기도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고(5,16),
제자들 가운데서 12사도를 선발하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으며(6,12),
거룩한 변모 사건도 기도하시는 중에 이루어졌고(9,28-29),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전수하기 전에도 기도하셨으며(11,1),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셨다.(22,32)는 부분이 바로 그런 대목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2,42)
이 기도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가 수렴되는 예수님 신원과 사명을 확신하는 기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목전에 놓인 고통의 십자가를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거부하고도 싶지만,
기도 안에서 다시금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神的 사명을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기도하셨다 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기도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와 기도하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1-22)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인 셈이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에게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신원의 확신이며,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다짐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기도도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질무능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어떤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제자들의 입을 빌어 스스로의 신원을 확신하고 아울러 스스로를 啓示하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권세 당당한 정치적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수난과 부활의 메시아로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기에
그들의 입을 빌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늘 제자단을 대표하여, 나아가 전체 교회를 대표하여 비록 자신의 입으로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다.‘(20절)고 고백하지만,
논리적 고백에 따른 실제적 행위에 도달하기는 베드로도, 우리도 아직 멀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자신의 수난예고로 수정해 주시고 보충해 주시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