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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29일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제1독서 : 민수 11,25-29
제2독서 : 야고 5,1-6
복 음 : 마르 9,38-43.45.47-48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민수기 12장 3절은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제1독서인 11장에서는 그러한 겸손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천막 주위에 모인 이들에게 모세의 영을 나누어 주실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영이 내리고 그들이 예언합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영은 모세에게만 주어지고
그와 함께 있는 이들만 예언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모세 자신은 그러지 않습니다.
모세에게는 예언자를 통해서, 되도록 많은 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그 일이 자신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요한과 예수님은,
민수기에서 여호수아와 모세가 보여 준 것과 같은 태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사람들이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자기 무리에 속한 이들만 그 일을 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지금 복음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
아니면 그 복음을 선포하는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지금 당장 다른 사람에게 맡겨진다 하여도,
또는 수고는 내가 하였는데 공로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 하여도
아무런 미련이 없어야 모세와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고
참으로 이 세상에 복음이 선포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고등학교 때의 친구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랜만의 통화라 정말 반가웠고, 요즘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의 목소리가 차분해지면서 “암에 걸렸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 “내가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나 봐. 그래서 네게 전화했어.”라고 합니다.
사실 큰 병에 걸리면 자기 잘못을 이야기하며 자책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병에 걸려 고통받는 환자가 죄책감까지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어느 철학자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병에 걸렸을 때 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는 병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는 일뿐입니다.”
병에 걸린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닙니다.
운동하지 않아서, 식습관이 잘못되어서, 성당에 안 나가서 등의 이유를 말하지만,
이런 생각으로 힘들어하는 것보다 이 역시 자기 삶을 받아들일 때
편안한 마음으로 치료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벌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해 곧바로 책임을 지우는 속 좁은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또 하나의 의미를 전달해 주시는 분이며,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쉽게 판단하고 잘못되었다고 단죄하는 우리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했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귀 쫓아낸 것은 하느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 판단이 옳지 않음을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에서도 진영에서 예언하는 사람을 말려야 한다는 여호수아의 말에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라면서 말리는 모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기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같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인간의 뜻과 같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몫은 철저하게 악을 멀리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손이나 발이 죄짓게 하면 잘라 버릴 정도로,
또 눈이 죄짓게 하면 빼 던져 버릴 정도로 철저히 악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모든 판단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늘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더 철저히 다가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 뜻대로 모두가 함께 구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는 모세와 그를 돕는 일흔 명의 원로를 뽑아 일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원로로 임명받은 두 명은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한 채,
그들의 진영에서 하느님의 영을 받고 예언하게 됩니다.
그러자 여호수가가 모세에게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모세는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님의 영을 내려주었으면 좋겠다.”(민수 11, 29)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받듭니다.
흔히 우리는 교회의 본질과 운영 방식에 대하여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성령주의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교회가 단순한 사회적 단체나 조직이 아니며,
그 본질은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성령의 활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말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성령의 주도성’을 보여 줍니다.
여호수아는 인간인 자신이 영을 받은 그룹으로서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을 지니고 싶어 하지만,
모세는 오히려 온 백성에게 영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물질적 소유적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의 전환을 요청합니다.
재물은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지만, 그것이 주인의 손에서 사용되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자신을 만족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며, 부
유한 자들에 대한 회개와 변화를 요구합니다.
“부자들이여!
...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야고 5,1-2)
오늘 복음은 두 개의 단락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앞 단락에서 요한은 제1독서의 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마르 9, 38)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요한이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이들을 제자그룹에 끼어 주고 싶지 않은 ‘제자임에 대한 특권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는 이가 우리를 따르는 이가 아니라 하여 그를 막는’
제자들의 옹졸한 마음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마르 9,39)
사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여러 분파들이 사도직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처럼, 제자들은 자기들만이 선택된 자라고 생각하기 싶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특정 분파나 집단에 국한되지 않음을 밝히십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활동이 더욱 확장될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또 신앙의 지평이 넓고,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제1독서에서 원로들의 항의에 대한 모세의 태도에서,
또 복음에서 제자의 옹졸한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서 보여 주듯이,
신앙공동체 안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하며 연대와 협력을 촉진하고,
‘다양성 안에 일치’라는 교회 정신을 실천해야 할 일입니다.
자칫,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내로남불의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모든 이를 당신 ‘협력자’로 모으십니다.
곧 교종이나 주교, 성직자나 수도자, 세례받은 신자들만을 당신의 협조자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만을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2코린 5,15)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하물며 자기 형제들을 막는 일은 더더욱 안 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뒤 단락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모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결국 오늘 제1독서에서는 권위의 독점에서 오는 갈등을 보여 주며,
제2독서에서는 재물의 독점에서 오는 악행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닌 독점과 독선의 태도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인 삶의 여정은 우리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독점과 독선의 악을 성령의 힘으로 정화하고 정련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2)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소서!
비록 그들이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이제는 제 손과 발이 그들을 가로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며,
그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당신께 꼭 붙들려 매여 있게 하소서!
오늘, 제 몸과 마음을 절단하고 수술하시어,
온몸이 망가져 사라질지라도 더 귀중한 당신의 생명이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를 믿는 이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마르 9,42)
주님!
자신의 구원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들의 구원도 바라보게 하소서!
남들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말게 하소서!
남들을 죄짓게 하지 말게 하소서!
남들의 구원을 도울 때라야 비로소 자신이 구원됨을 알게 하소서.
마음을 제 자신에게 붙들어 매지 않고,
남들을 향하여 있는 당신께 꼭 붙들어 매이게 하소서! 아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아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 풍성한 가을의 여유를 지니시길 바랍니다.
“행동을 통해서 수확하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성격이며
성격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듭니다.”
그러니 좋은 습관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덕이 되고, 좋지 않은 습관은 그야말로 악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행동으로 남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9,4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을 죄짓게 하여
신앙을 저버리게 한다면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마르9,45-47).
이렇게 섬뜩한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소나기는 피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다른 사람의‘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악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엄포성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섬김의 자세로 살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행동으로 다른 이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서 버려질 뿐입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이 스쳐 지나갈 말이 아니지요.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합니다.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권력과 돈과 허영을 쫓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봉사와 겸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세속적인 유혹’을 이겨내고
출세와 출세를 위해 타인을 망가트리고 싶은 유혹에 잘 맞서야 한다.'
날이 갈수록 신앙이 여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참된 신앙인의 삶보다는 무늬만 신앙인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환경은 좋아졌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정도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환경과 여건, 처지가 어려웠지만 믿음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박해를 받는 가운데 오히려 신자가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상 안에서 나를 유혹하는 것이 너무도 많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심지어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늘어만 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4,18).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잡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9,49-50).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은 보존하기 위한 소금이 아니라 주기 위한 소금입니다.
소금은 자기 맛을 느껴지지 않게 하고 오히려 각 음식의 맛이 좋아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자신의 풍요로움을 가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소금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그만한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과하면 소금 맛만 느껴지고 다른 식재료의 맛은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영원한 것을! 일상 안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내십시오”(에페5,10).
가끔은 지옥 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9,48).
지옥은 엄연한 실재이고, 되돌아올 수 없는 종착점입니다.
그러니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과장의 말씀입니다.
박해와 시련으로 공동체의 유대가 깨지고 배교자들이 생겨났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다고 해서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져 마음의 불안을 느낄 때를 생각하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옥 불의 뜨거움은 현세에서 불의 뜨거움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체험할 수 있겠지만,
원한에 사로잡힐 때 영혼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천국은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만 지옥은
온갖 분노와 증오, 원한, 적개심,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비가 허락되는 이 지상의 삶에서 천국을 희망하고 지옥의 삶을 피해야 합니다.
천국은 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사랑으로 천국을 완성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주에 ‘본당의 날’ 행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와 관심 속에 본당의 날이 잘 끝났습니다.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과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믿음과 미신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이 믿음입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 믿음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미신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바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원하는 것을 채워 주기 때문입니다.
이미 포도원이 많이 있음에도 나붓의 하나밖에 없는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왕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미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다윗 왕은
하느님께 기름 부음 받았던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미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내가 믿음의 삶을 사는지, 미신의 삶을 사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성숙한 신앙과 미성숙한 신앙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성숙한 신앙은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 길이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성서를 읽고, 교리를 잘 아는 지식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헌금을 많이 하고, 봉사활동을 많이 한 업적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은 성직자와 수도자처럼 직책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기 싫은 일일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쁘게 하는 사람이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더 좋은 땅을 조카 롯에게 기꺼이 양보한 아브라함,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의 제단에 기꺼이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은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던 형들을 용서하고, 품어 주었던 요셉은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용감하게 왕 앞에 나섰던 에스테르 왕비는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했던 마리아는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어떤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일까요?
하고 싶은 일만 하려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짜증 내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시기심에 동생을 죽인 카인은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했던 카인은 미성숙한 신앙입니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는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유다는 ‘나를 따르려거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미성숙한 신앙인입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잘 안다고 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중에도 미성숙한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도 미성숙한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미성숙은 직책으로도, 능력으로도, 지식으로도 가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성숙한 신앙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미성숙한 신앙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손을 버려야 한다.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손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다.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발을 버려야 한다.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발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다.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눈을 버려야 한다.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눈으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좋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신 것은 생각으로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손에 못이 박힌 것은 손으로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발에 못이 박힌 것은 발로 죄를 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창에 찔리신 것은 미성숙한 신앙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미성숙한 신앙인이었다면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
조욱현 토마 신부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모세는 여호수아를 꾸짖으며, 하느님의 영을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지극히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인간이 멋대로 지배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고,
우리가 다른 형제들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인 듯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형제들의 응답 능력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신자는 아니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신앙이 올바로 성숙하지 못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려고 하는 바리사이적 위험이 있다.
예수님은 이런 벽을 허물고 모든 진리의 씨앗들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기 위해 그들과의 접촉점이 무엇인지 발견하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논쟁적이거나 배타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모아들이고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에서는 구마 행위를 하던 사람에 대해 요한은 예수께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도록 막아 보려 하였습니다.”(38절) 말씀드린다.
이것은 어떤 차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할 선물로서가 아니라,
질투심에 의한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하신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려는 듯한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자신들을 진리의 소유주와 같이 자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와 어떤 신앙의 공통점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우리를 개방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써 인간 상호 간의 대화와
또한 그리스도인들 간의 일치운동 근거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하신다.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약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분을 해치게 되고 그 결과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진리와 선은 부분적으로는 다른 곳에도 존재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은 그러한 미세한 것을 통해서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은 교회라는 테두리는 물론 교회 신앙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요한이나 여호수아처럼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성령을 받거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공경하는 데 대해
질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우리의 신앙은 어떤 형식이 아니다.
때로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실천적 생활이다.
사도들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유다인들이나 이교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처음부터 권위의 태도가 아니라
봉사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공동체 내의 어떤 사람도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신앙의 위기에 놓일 수 있는 사람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목에 달린 연자맷돌은 예수의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무덤도 갖지 못하게 되는 버림받은 인간의 최고의 불행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죄를 짓게 하는 인간 신체의 세 가지 상징적 표현은 아주 소중한 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치명적으로 영원한 파멸을 초래할 죄로 인한 벌에
비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43-48절).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엔나(Geenna)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힌논(Hinnon) 계곡을 말하는데
버림받은 자들이 버려져 화장되던 곳이다.
그곳은 항상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는 악한 이들을 벌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던 곳이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로
육신의 일부를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윤리적 영적 의무의 차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선택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가 선택을 잘못하면 우리가 잃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불의한 방법으로 부자들이 쌓았던 그 재물은
실제로 마치 녹이 쇠를 부패시키듯이 그들 자신을 갉아먹을 녹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재물은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영원히 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탐욕을 생기게 하는 눈을 빼어버릴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르 9,47).
오늘의 말씀은 대단히 준엄한 가르침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잃는 것이 곧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나 공동체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도 사랑 안에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주민과 난민을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오늘 그분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시선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날입니다.
어린 시절 예수님께서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을 가신 적이 있습니다.
일종의 난민이셨던 것입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도 예수님께서는 어디 한 군데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철저한 이방인이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이주민이나 난민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쁘게 포용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주에 단체로 예멘 난민이 입국한 때가 있었습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그분들로 인해 곧 나라가 파탄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다문화 다민족, 다국적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시대에 제대로 된 국제적 망신을 당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솔직히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그네요 이방인입니다.
우리 것이라고 여기지만 솔직히 우리 것도 아닙니다.
그뿐인가요?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기고 힘겨울 때,
전쟁으로 모든 것이 풍비박산 났을 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난민이 되어 정처 없이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습니다.
난민들은 위험한 사람들, 혐오스러운 대상들, 두려운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엄마 잃고 상처 입은 어린 새 같은 존재들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 죽음의 공포,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 등,
갖은 트라우마를 안고 우리를 찾아온 나그네들입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 속에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난민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따뜻한 환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나마 세계 청년대회에 참석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난민’, ‘이주자’에 대해 언급하시며, 착한 목자로서 당신 자신의 품격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다른 여러 국가지도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교황님께서는,
부단히 난민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 보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헤로데 대학살 사건을 피해 이집트로 떠났던 난민이셨습니다.
난민들을 사회에 대한 위협으로 낙인찍는 것처럼 분별없고 무책임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버림받은 사람들, 땅과 뿌리, 가족과 일로부터 강제로 쫓겨났거나 빼앗긴 사람들을,
기쁘게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웁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난민들을 구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난민들을 외면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위선입니다.”
참으로 품위있고 품격있는 교황님의 말씀과 처신에 큰 박수와 아낌없는 지지를 보냅니다.
큰 슬픔과 고통 속에 빠져있는 난민들 입장에서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지난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 즉위 직후,
바티칸과 로마를 벗어난 첫 방문지 람페두사 난민 수용소에서 하신 말씀은
또 얼마나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가요?
“난민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각자 얼굴과 이름, 삶의 이야기가 있는 난민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사람 때문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하지 못하게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반면 당신을 믿는 이들을 죄짓게 만드는 사람은 마치 손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잘라내고
눈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뽑아내야 한다고 하십니다.
굉장한 포용력과 함께 굉장한 단호함을 보이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포용력과 단호함을 동시에 유지하며
사람의 애정과 미움에 흔들리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실 이 능력이 한 사람의 미래를 좌우합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배척하는 것도 문제고, 너무 쉽게 품는 것도 문제입니다.
끊어야 할 사람을 알고 품어야 할 사람을 아는 게 참 지혜입니다.
끊어야 할 사람을 끊지 못해도 망합니다.
베토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조카 카를에게 집착하였습니다.
형수에게서 그를 빼앗기 위해 오랜 재판과정에서 매우 노쇠하였으며
카를이 자신을 싫어하여 자살 시도한 것 때문에 더 급격히 쇠약해진 그는 몇 달 뒤에 사망합니다.
중국 항우란 인물은 품어야 할 사람을 품지 못해 망한 경우입니다.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秦)나라 시황이 죽자 두 영웅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항우와 유방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은 출신부터가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우는 초나라의 반듯한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유방은 평범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항우는 사람을 제압할 정도의 외모와 기개를 갖춘 영웅이지만,
유방은 한 마을 건달로 사람을 위압할 외모나 기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를 세운 사람은 유방입니다. 포용력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의 유방은 지금으로 치자면 배운 것도 없고,
할 일 없이 매일 술만 마시고 사고나 치는 백수건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유방은 함양에서 부역을 하다가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
대장부란 저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뜻을 키웠습니다.
반면 개인 능력이 특출했던 항우는 자기 자신을 너무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많았습니다.
이에 인재를 등용할 때 혈연관계를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반면 유방은 하층민들도 필요한 부서에 배치할 줄 알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꿈에 대한 의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목적이 분명하면 방법이 보이게 되어있습니다.
개울을 건너려는 마음이 생기면 그동안엔 관심 없던 배나 다리를 찾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진시황처럼 천하통일을 꿈꾸던 유방은 누가 품어야 할 사람이고
누가 맞서야 할 사람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항우는 자기가 곧 대의명분이었습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들처럼 미심쩍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누구를 품고 누구를 버려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방법은 ‘목적의식’에 있습니다.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입니다.
배우는 대본이 있습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조금 흔들리거나 흥분될 수 있어도 그 대본을 끝까지 연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관객은 배우의 연기나 주위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많은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의 대본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휘둘릴 수밖에 없습니다.
『보디랭귀지』 등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앨런 피즈와 바바라 피즈 부부는
많은 성공과 파산, 그리고 말기 암 등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언제까지는 암을 극복한다, 언제까지 베스트셀러를 써서 재기한다는 등의
목표를 세우고 밀어붙였습니다.
전립선암 방사선치료로 정자가 생성되지 않고 아내는 마흔이 넘었는데도
자녀를 낳겠다는 계획도 세웁니다.
개나 키우라는 의사는 차버리고 고환을 빼내어 정자가 생성될 수 있게
수술해 주겠다는 의사는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목적이 생기면 내 편과 아닌 사람이 명확히 구분됩니다.
돈 내고 방청석에 일단 앉았으면 무조건 내 편입니다.
그러나 연기에 방해가 되고 다른 사람들의 관람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끌어내야 합니다.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관객이 되지 말고 주인공이 되십시오.
그리고 대본을 받는 시간은 새벽 기도에서입니다.
하루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파견된 날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에 휘둘릴 일이 없고 같은 사명에 동참하는 많은 친구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인류는 오랜 進化 過程에서 얻은 遺産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같은 집단에 속한 個體들끼리 서로 보살피고 위해주어, 함께 번영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집단에 속하지 않는 개체들에게는 排他性을 보입니다.
우리는 내 가족, 내 고향, 내 나라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남의 가족, 남의 고향, 남의 나라를 卑下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용하는 血緣, 地緣, 學緣이라는 단어들이 그런 집단 이기주의를 감추고 있을 수 있습니다.
宗敎에 있어서도 내가 속하는 종교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종교들에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종교를 위한 우리의 집단이기주의는 그것이 감추고 있는 배타성을 信條化하여,
우리가 속하는 종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타종교들을 비하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1965년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타종교들 안에도 하느님의 ‘말씀의 씨’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것을 “기쁨과 경의를 가지고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11항)에서 공의회는
그리스도 신앙만을 옳은 종교라고 생각하던 과거의 관념을 탈피하고,
타문화의 종교들 안에도 하느님이 하신 일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에게 드리는 말씀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고 보고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말리지 마라.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집단에 속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일을 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이에게 물 한 잔의 성의라도 보이는 사람도
그리스도를 위해 일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보잘것없은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버리고 베어버리라는 유대적인 과장법을 사용하여 죄를 근본적으로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보잘것없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말째가 되어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마르 9,35)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 신앙인을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이고 섬김을 좌절시키는 것이 罪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리스도의 섬김을 은폐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은 과연 섬김의 실천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입어 나 한 사람 대우받고,
영원히 잘살아 보겠다는 수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실천합니다.
예_수님이 가르친 섬김을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敎會法이 있고, 그 법을 따라 조직된 것이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집단적 이기주의도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법과 제도를 배타성을 띤 집단이기주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만든 법과 제도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교회의 法과 制度는 한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법과 제도는 시대가 바뀌면, 새롭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시대적 여건이 다르면, 달리ㅐ 이해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을 실천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과거 한 시대의 법과 제도에 얽매여 그리스도의 일을 외면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민수기」는 모세의 古事 중 하나를 소개하였습니다.
모세는 長老 일흔 명을 택해서 만남의 장막에서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靈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택해 주지 않아, 장막에 가지 않았던
장로 두 사람에게도 靈이 내려 그들이 예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세의 제자이면서 侍從인 여호수아는 그 소식을 듣자,
그들을 말려서 그 집단 안에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모세에게 권합니다.
모세가 택하지도 않은 사람이 영을 받으면, 그 집단 안에 질서가 문란해진다고 말합니다.
모세의 답입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모세는 자기가 한 선택이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모세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일의 권위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선택한 집단에 속하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집단에 속한다는 사실이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보장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중요하고,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삶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사람들 안에 일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을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합니다.
옛날 사람들이 만든 교회법이나 제도에다,
배타적이고 소심한 우리의 해석을 가미하여 더 배타적이고 더 군림하는 장치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하느님의 일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가르친 섬김을 실천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손과 발을 찍어버리고, 눈을 빼어버리는 극단적 조치를 해서라도
그런 불행한 일은 없어야 한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한 세대의 사람들이 만든 법이나 제도 안에 갇혀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만든 身分을 보고 사람을 差別 대우하지 않으십니다.(사도 10,34 참조)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유대교의 법과 제도, 그리고 그제도로 말미암아
행세하는 율사와 사제들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셨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도 같은 실천을 하여,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자비와 그 용서를 실천하는 섬김이 교회의 기본 질서가 되어야 합니다.
옛날에 만들어진 법과 제도에만 충실한 것은
오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을 죄짓게 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신앙인들의 삶 안에 살아있어
섬김이 돋보이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