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민간인학살 100문 100답 또한 널리 배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에 6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100문 100답
발행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ㅣ편집 사무처ㅣ삽화 박건웅ㅣ발행일 2004년 11월 19일
5편 : 흰 옷 입은 사람은 무조건 쏴 죽여라!
39. 소달구지와 함께 가고 있는 주민들을 포위하라. 반복한다. 그들을 포위하라
(노근리 사건)
노근리 사건은 1999년 9월 두 건의 미국 비밀 문서와 당시 학살에 가담했던 군인의 증언을 토대로 AP통신에 의해 공개된 후 전세계에 알려졌습니다.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미군이 피난 가던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주겠다며 끌고 가다가 폭격, 기총소사로 400여 명을 학살한 것입니다. 당시 7기갑연대의 미군 중위였던 로버트 앤 캐롤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 사건은 우리가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그 누구도 통과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직후에 일어난 일이다. 한 사람도 전선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라, 전선을 넘어오려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사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40. 곡계굴의 잠들지 않는 통곡소리 (단양 곡계굴 사건)
1951년 1월 단양군 영춘면 주민 가운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노인, 어린아이들과 영월 등지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다 길이 막혀 더 내려가지 못한 강원도 사람들 등 줄잡아 400여 명이 곡계굴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1951년 1월 20일 오전 10시쯤, 미군 비행기 4대가 갑자기 곡계굴을 향해 4시간 동안 집중 폭격을 가했고 피난민들은 흰 옷을 흔들어 피난민임을 알렸으나 폭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폭탄 파편이나 기관총에 맞아 쓰러졌으며 좁은 굴을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 대부분이 질식사했습니다.
41. 태극기 흔드는 민간인을 향한 미군의 폭격 (익산)
인민군이 수원 근처에 있던 1950년 7월 11일, 전시 비상 상황에 대한 교양교육을 받고 휴식중이던 기관사들은 상공에 나타난 비행기에 성조기가 그려진 것을 보고 태극기를 흔들며 아군임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B29 전폭기 2대가 이리역(지금의 익산역) 기관차 사무소, 송학동 민가, 평화동 호남선 철길과 변전소 등을 무차별 폭격했고 이로 인해 3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습니다.
42. 헤이븐 호의 함포사격 (포항 폭격)
미 해군기록도서관의 태평양함대 소속 구축함 헤이븐 호 전투일지에 따르면 1950년 9월 1일 오후 2시 8분 해안함포사격통제반으로부터 포항 여남동 송골계곡 피난민에 대한 함포사격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헤이븐 호는 육안으로도 피난민임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목표물이 인민군이 아니라 피난민이라는 사실을 사격지휘대에 알렸으나 지휘대는 인민군이 섞여 있다는 첩보가 있다며 재차 폭격을 지시했습니다. 당시 해변 백사장에는 당일 새벽 포항시내로 들어온 인민군을 피해 포항지역 주민들 1천여명이 피난길에 나선 중이었고, 이 폭격으로 수백명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포항 일대에서는 1950년 7월부터 10월 사이 곳곳에서 미군폭격으로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43. 팔 다리가 잘린 시신들이 즐비했다
(사천 조장리, 마산 곡안리, 진주 등 폭격)
1950년 8월 2일 사천시 곤명면 조장리 앞 하천 제방에 300여 명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습니다. 상공에 정찰기가 나타났다 사라진 지 30분쯤 지난 후 미군 폭격기 4대가 폭격, 기총사격하여 15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마산에서는 1950년 8월 11일 진전면 곡안리 재실에 모여 있던 피난민을 폭격, 기총사격하여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8월 10일 밤 미군이 통역관과 함께 재실을 찾아와 이들에게 피난을 권했다는 점입니다. 피난민임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11일 아침 인민군과의 교전에 광분한 미군이 피난민 속에 인민군이 있다며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것입니다.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에 진주 곳곳에서 피난민에 대한 폭격이 자행되는 등, 경남 일대에서 유사한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44. 더 이상 폭격할 곳이 없다? (북한 지역 폭격)
미군의 폭격은 군사시설에만 국한되지 않았으며 민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전쟁 초 6개월 동안 미 극동 공군 폭격 사령관을 지낸 오도넬은 맥아더 청문회 증언에서 중국군이 개입하기 전에 이미 북한의 5개 주요 도시(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가 모두 파괴되었다며 "이름을 붙일 만한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더 이상 목표물이 없었다. 평양 시내는 허허벌판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무자비한 폭격이 정전 1분 전까지도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인민 치하에서 살아남은 게 죄? 부역혐의자 학살
45. 식량 문제도 있고 해서 죽여버렸다? (강화에서의 학살)
강화 지역에서는 1950년 9. 28 수복 후인 11월경부터 1951년 1.4 후퇴 직후까지 선원면 냉정리 찬우물터, 길상면 온수리 공설운동장 부근, 강화대교 갑곶나루터, 옥림리 옥계갯벌 등 곳곳에서 인공치하의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고 피해자의 수는 수백 명에 이릅니다. 학살은 경찰의 방조 아래 우익청년단인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저질렀습니다. <중앙일보>에 연재된 '민족의 증언'(1972년 7월 17일)에서 특공대장 최중석은“1월 7일 인천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석방된 공산당원 1백여 명을 생포, 그중 악질당원 60여 명을 식량문제도 있고 해서 처형했다”고 당당히 밝히기도 했습니다.
46. 저기, 금정 구뎅이에 가서 다 죽었다 (고양금정굴 학살)
1995년 고양시 탄현동 일제 시대에 금을 캐던 수직폐광굴인 금정굴을 발굴하기 전까지는 경찰과 우익치안대, 태극단에 의해 자행된 고양, 파주 일대의 민간인학살은 전설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가해자들이 유골이 나올 리 만무하다고 장담하던 금정굴에서 어린아이, 부녀자를 포함해 최소 153구의 유골이 발굴되었습니다. 고양 파주 지역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피난갈 틈도 없이 인민 치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9.28 수복 직후인 1950년 10-11월 사이에 인민군에게 부역했거나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혐의로 수천 명이 고양 금정굴, 그리고 가까운 강가나 골짜기에 끌려가 불법 학살되었습니다.
47. 죄가 가벼울수록 죽을 확률이 높다니 (부역자 재판)
수복 직후 전국 곳곳에서 자행된 부역혐의자 학살의 경우 인민 치하에서 피해를 당하거나 억눌려 있던 사람들에 의한 보복학살의 성격이 짙었습니다. 때문에 부역 정도가 경미할수록 학살당할 확률이 높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족을 데리고 월북한 열성 부역자들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으며 단신으로 월북한 경우에는 그 가족이 대살되었습니다. 또 스스로 부역이라고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인민 치하에서 그저 '생존'했을 따름인 많은 이들이 우익에 의해 자의적으로 좌익 혹은 좌익 동조자로 분류되어 군, 면, 리 단위에서 즉결심사 후 학살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적 보복이 빈번하게 자행되었고, 이렇게 혐의가 적어 재판에도 넘겨지지 않은 사람들이 임의로 학살된 데 반해서, 재판을 받은 부역자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훈방되어 살아남았습니다. 참고로, 서울 지역에서 재판에 회부된 5만 5천여 부역혐의자의 경우, 수복 직후의 광풍 속에서 검거된 160여 명이 사형당했을 뿐 대부분 경미한 형을 살거나 훈방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