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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30일 월요일(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욥기 1,6-22
복 음 : 루카 9,46-50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욥기에는 몇 가지 주제가 들어 있습니다.
무죄한 사람의 고통은 큰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욥은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시는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는]”(욥 1,1)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고통을 겪게 된 것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죄 탓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욥기가 던지는 큰 질문입니다.
이 문제는 욥기 마지막 부분에 가서 답을 만날 것입니다.
다른 질문들 가운데 오늘 사탄이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
“까닭 없이”라는 표현은 히브리 말에서는 ‘거저, 공짜로’를 뜻하기도 하는 낱말입니다.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탄은 하느님께, 먼저 하느님께서 욥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그를 부유하게 하셨기 때문에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확인하고자 욥이 모든 재산과 자녀, 그리고 건강을 잃게 만듭니다.
그럴 때도 인간이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요?
욥기의 사탄이 오늘 나를 이렇게 시험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을 거두어 가신다 하여도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까?
욥은 아들들과 딸들을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가 순수한지를
시험하는 순간들은 계속 주어집니다.
그 시험들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돌아보면서,
하느님에 대한 나의 경외심의 깊이를 헤아려 봅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는 여행을 참 많이 했습니다.
여행을 통해 큰 힘을 얻을 수 있었고, 나의 세상을 확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여행하며 느끼는 것은 삶의 확장이 아닌 삶의 축소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고 하지만, 사실 집에서도 전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행 중의 경험은 힘들고 불편할 뿐입니다.
힘듦과 불편함 속에서 나의 모습은 작아집니다.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삶이 축소되었을 때,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단순히 낭만, 예술, 아름다움 등을 찾고자 한다면 집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는 자기가 주체이니 원의만 있다면 스스로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집처럼 하겠다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어떨까요?
나의 힘듦과 불편함을 없게 하겠다고 옷만 가방 25kg을 가득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비행기도 탈 수 없습니다(비행기 수화물 25kg 이하).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여행자입니다.
언젠가는 여행을 마치고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려놓고 내려놓아야 작은 내가 되어, 훌쩍 떠날 수 있게 됩니다.
겸손의 삶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진정한 여행자의 모습이 됩니다.
불편함과 힘듦도 여행자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을 기억하면서
작은 존재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대표로 세운 일, 타볼산에 올라갈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가신 일들이 서열 문제를 일으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의 랍비신학에서는 천상에 있는 낙원의 주민들을 일곱 등급으로 나눈 것,
꿈란 공동체에서도 확고한 서열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볼 때,
모든 유다인의 주 관심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역시 세상일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즉, 세상의 서열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린이 하나를 세우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어린이를 순진, 소박, 겸손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이처럼 순진하고 소박한 마음 또 겸손을 갖춘 사람만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세상의 여행자일 뿐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부는 어제 복음과 병렬구문으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오늘은 전반부만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이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요,
동시에 ‘작아질수록 커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 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은 큰 사람’이란, 단지 ‘작은 이’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라기보다,
‘작은 이’를 받아들여 ‘같이 작아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크기 때문에 큰 사람인 것이 아니라,
‘크면서도 작은 이인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이’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큰 것을 비우는 바람에
‘작은 이’가 된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비우고 낮아져
인간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는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힘없는 약한 사람을 표상하며,
예수님께서는 발가벗고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니 이는 ‘자신을 타인보다 위에 두지 않는 사람,
곧 높이 있어 우러름 받는 이가 아니라 아래에서 천대받는 이’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력함과 낮아짐,
동시에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미천하고 버려진,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작은 이’, ‘무능하고 비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리 2,3)
사실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이되,
허물과 허약함이 있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나아가서, ‘허물을 함께 지는 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높아지고 커지고 첫째가 되고자 안달인 이 시대에,
작아지고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가 진정한 큰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것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보잘것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겸손한 마음
반영억 라파엘 신부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하면서 포장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9,48).
스스로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 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23,12).
만약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성 안또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면 다 환영할 일이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웠습니다.
누가 하든지 주님의 일을 하면 환영하고 그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구원의 혜택을 입으면 기뻐할 일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필리1,18).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격 미달입니다.
낮아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희망을 주님께 두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인간(human)과 겸손(humble) 어원은 흙(humus)
인간(human)과 겸손(humble)의 어원은 흙(humus)이다.
단지 한 줌의 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 인류인 아담(םדָאָ)이라는 이름도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המדא)에서 나왔다고 한다.
흙은 나무의 뿌리를 보듬어 안으며 열매와 잎을 맺도록 양분과 수분을 제공한다.
흙은 언제나 사람의 발아래에서 사람을 우러러볼 때 흙은 진정한 흙일 수 있다.
흙은 머리 위에 얹으려 해도 안 되고 멋진 의자에 앉으려 해도 안 된다.
‘흙’의 성질은 더 이상 낮춰질 수 없는 ‘최저의 낮음’,
한 줌의 힘으로도 바스러지는‘연약함’이다.
겸손은 ‘흙’과 같은 태도를 말한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고, 흙의 성질은 겸손함이니,
사람이 사람답게 되려면 흙과 같아져야 하며 ‘흙’과 같이 되려면 겸손해야 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만함을 감사하고 겸손해야 한다. [글/허준혁].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9월에 있었던 일을 돌아봅니다.
3일에는 ‘김수환 추기경배 골프대회’가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150명이 함께 했습니다.
점수를 계산하는데 약간의 오류가 있었습니다. 순위가 바뀌는 실수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연락을 드리고, 상패를 전달했습니다. 일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입니다.
상패를 받은 분들도 이해해 주었고, 기뻐하였습니다.
10일에는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그날은 4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의 기일이었습니다.
4년 전에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날도 저는 뉴욕에서 세상을 떠난 형제님의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형제요, 어머니인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어머니이다.”
장례미사를 봉헌하면서 어머니의 기일을 기억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22일에는 ‘본당의 날’ 잔치가 있었습니다. 2012년에 본당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성소국에 있었고, 신문사에 있었습니다.
12년 만에 본당의 날 잔치에 함께 했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함께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본당의 날 주제는
“수고하고 짐 진 자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교우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잔치를 위해서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9일은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이었습니다.
미카엘은 사탄을 물리치는 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라파엘은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천사입니다.
사탄과 맞서 용감하게 싸우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아픈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천사입니다.
저의 축일을 축하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순교자성월인 9월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순교자 영성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순교자 영성의 시작은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타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가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죄의 결과” 곧 죄에 대한 벌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으심도 이를 통한 죄의 용서도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믿기 이전의 삶에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더 이상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부활은 믿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는 것이며,
우리의 희망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저희의 마음을 북돋아 주시어 거룩한 가르침을 깨닫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당신 옆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 옆에 있다는 것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런 작은 아이 하나를 대접하는 자는
당신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또한 당신을 대접하는 자는 하느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어린이는 순수함과 겸손의 본보기이다. 어린이는 속이지 않는다.
어린이는 생각이 단순해서 높은 지위를 탐하지도 않고 높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바로 이런 아이를 두고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48절) 하신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당신 곁에 서 있을 자격이 있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를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49절)
제자들은 그러한 권한을 자기들만 받았다고 생각했다.
사도로 불림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 그 일을 해도 되는지 알고 싶었다.
구약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모세가 70명의 원로를 주님 앞에 오게 했을 때, 두 사람은 진영에서 영이 내려 예언을 하였다.
이때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들을 말려야 한다고 모세에게 말했다.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이것은 성령께서 모세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는 아드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50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사탄을 쫓아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은 우리와 같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다는 것을 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봉사를 통하여
진정으로 “주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걱정이나 근심, 유혹이 다가올 때면 즉시 성경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언젠가 진심으로 성경에 매료되어 목숨 걸고 성경을 공부하던 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교구나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이런저런 성경 공부 과정을 빼놓지 않고 수료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2년 과정의 가톨릭교리신학원까지 졸업했습니다.
제가 그분께 여쭈었습니다.
“형제님, 평생토록 산업현장의 역군으로 죽기 살기로 일하셨으니,
이제는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시고, 운동도 나가시고, 좀 여유 있게 지내시면 좋을텐 데,
어찌 그리 성경을 파고드십니까?”
형제님, 왈, “그동안 제 안에서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사방 천지를 헤매다녔지만 찾지 못했는데, 성경 안에 답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 유혹과 갈등을 떨치는 데는 성경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예로니모 사제 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좀 놀았습니다. 이교에 빠지기도 하고, 세상의 유혹에도 빠졌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다 보니, 삶의 균형이 무너져 중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니지 하면서, 지난 삶을 반성하며 은둔 수도 생활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맛을 본 세속의 유혹은 수시로 떠올라 예로니모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로니모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 그는 유혹을 물리치는 방편으로 그 어려운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유혹은 예로니모를 흔들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성경을 펴 들었습니다.
본문을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번역하고 연구하고, 그것이 그의 하루 일상이었습니다.
어떤 날 그는 하루 온종일 성경 번역에 매달렸었는데,
잠깐의 휴식은 다름 아닌 성경 읽기였습니다.
탁월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예로니모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습니다.
대단했던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대대적 성경 번역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장장 20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깔끔하게 번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학자였던 예로니모였지만 늘 겸손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너무도 사제직에 부당하다고 생각했던지
한동안 한사코 미사 봉헌을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예로니모는 보다 정확한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금 신구약성경에 대한 번역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를 위해 새롭게 카르데아어를 배웠고, 또다시 20여 년간의 세밀한 번역 작업 끝에
그 유명한 불가타 성경 번역을 완성시킵니다.
예로니모의 탁월한 지적 능력, 성서에 대한 열정은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교부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조금도 의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대학자 예로니모였지만 그에게도 십자가는 있었습니다.
과거 영위했던 세속생활의 유혹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죄책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쉼 없이 하느님의 도움을 청했던 노력, 어려울 때마다 인간적인 위로를 찾기보다
하느님의 보화가 담겨있는 성경에로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했던
그 노력으로 인해 그는 끝까지 자신의 성소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로니모는 사자 같은 용기로 교회를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강인함으로 자신을 잘 다스렸습니다.
자신을 극기했었고, 자신의 결점이나 악습 같은 가시들을 제거하기 위해
부단히 투쟁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대한 예로니모의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을 파고드십시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로 모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하늘나라의 자리를 결정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누가 높으냐는 것으로 제자들이 다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겸손은 곧 포용력입니다.
사람을 품으려면 자기만 크고 옳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모든 동물과 사람들을 정말 잘 받아들입니다.
물릴지도 모르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봅니다.
사람도 그렇게 받아들이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늘에서 큰 사람이 된다고 하십니다.
요한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그냥 내 버려두라고 대답하십니다.
웬만하면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틀리면 어떻게 하라고 무작정 다 내 버려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린이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의 잘못을 바로잡아줄 해답지인 부모가 있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일본에서 67세의 나이로 숨진 미야우찌라는 거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다락방에는 5천만 원이 예금된 통장과
1억 7천만 원 가량의 주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생 헐벗고 굶주리며 모은 돈이었으며,
이를 모으기 위해 어쩌다가 현미 쌀을 사다 먹고 남이 주는 채소 부스러기나 날로 먹고
어쩌다가 끓일 것이 생기면 방안까지 들고 들어와 풍로에다가 주워 온 나뭇 조각을 때서 끓여 먹었고
목욕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만 하였습니다.
결국 그 노인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싼 음식을 먹은 결과 영양실조와 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고생하며 사느냐고, 자신을 위해 돈 좀 쓰면서 살라고 말하는 이들이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200살까지 살 것이기 때문에 돈을 아껴둬야 할 필요가 있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답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정답지는 부모입니다.
이것이 포용력의 차이, 곧 하늘나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의 차이를 만듭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교만해지기에 십상입니다.
특별히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이 망하게 된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과 긴 보급선이
재앙적인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고문과 장군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812년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무적이라고 믿으며 완고하게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그동안의 성공으로 나폴레옹이 얼마나 교만해졌는지를 상기시킵니다.
나폴레옹의 오만함과 전략 조정 거부는 그의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60만 명이 넘는 초기 병력 중에서 약 10만 명만이 캠페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재난으로 그의 제국은 심각하게 약화 됐고, 결국 그의 몰락이 시작 되었습니다.
묻고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맞히는 즐거움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해답지가 있어야 합니다.
대본을 들고 연기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과 행동,
대사가 맞는지 끊임없이 대본과 자신을 맞춰갑니다.
그러면 맞추는 즐거움에 틀리는 아픔을 잊을 수 있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진리’로 믿는 이들만이
이러한 겸손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해답지가 부모인 것처럼,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분을 해답지로 여기면 틀리는 게 두렵지 않고,
오히려 나를 성장 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이 향상됩니다.
그러니 주님을 진리로 받아들입시다. 그런 사람은 묻기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묻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내가 틀릴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나의 삶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포용력도 향상됩니다.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48)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스카 와일드의 「욕심쟁이 거인」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는
자신이 가꾼 정원에 동네 아이들이 몰래 들어와 노는 것을 싫어하여 아이들을 모두 쫓아내는데
그러자 갑자기 봄은 사라지고 겨울이 계속되며 키다리 아저씨의 마음도 꽁꽁 얼어버리지요.
어느 날 한 꼬마(=예수님의 현신)로부터 봄이 시작됨을 알았고
꼬마의 정체를 알면서 이후에는 동네 아이들이 자신의 정원에 놀러 오는 것을 막지 않자 언제나 봄이 찾아왔지요.
한참 시간이 흘러 그 키다리 아저씨가 죽자,
예전의 그 꼬마가 다시 찾아와 그 키다리 아저씨를 천국으로 데려가고
나중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니 키다리 아저씨가 꽃밭에 누워 행복한 표정으로 죽어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일까요?
이기적이고 욕심쟁이 키다리 아저씨는 꼬마(=예수님)를 만남으로써
단지 키가 큰 사람만이 아니라 마음도 커졌기에(=회개를 통해) 천국으로 들어갔잖아요.
우리 역시도 단지 키만 큰 사람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9,48)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려면 가장 작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는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거듭날 때만이 가능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 역시도 이기적이고 욕심쟁이 키다리 아저씨처럼
마음이 부드럽지도 못하고 따뜻하지 않고 오히려 차갑고 무뎌져 가는 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요즘 제게는 ‘사라짐과 살아짐의 경계선’에서 붙잡아야 하는 것과
동시에 놓아야 하는 것과 싸우고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사라지는 삶이 아니라 살아짐의 삶을 살고 싶지만,
마음 한편에 나의 이기적인 자아가 아직도 준동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늘나라로 들어갈 때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낮아지고 작아지려고 하기보다 더 크고 힘 있는 자가 되려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자신을 더 낮추고 작아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과 달리 마태오 복음에서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인가를 말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라.”(18,3)하고 가르치신 말씀에 담긴 지향처럼
지금껏 자신이 주인처럼 걸어왔던 길과 삶의 태도가 아닌
주님을 자기 삶의 참 주인으로 모시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했던 높아지려는 삶에서 벗어나 내려가는 삶, 자신을 낮추는 삶,
하느님과 이웃 앞에 겸손하고 온유한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요3,3)이며,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길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는 삶입니다.(9,48참조)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48)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은 단지 어린이만이 아니라 최후 심판의 장면에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라는 말씀에 드러난 것처럼
작은 사람은 바로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무시당하는 이들에게 베풀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갈 때,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작은 사람이며,
가장 작은 사람은 바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임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마태23,12)
루카가 전하는 갈릴래아 활동기의 마무리 설교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복음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 광야유혹의 40일을 보낸 후
고향인 나자렛과 갈릴래아 지방을 거점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셨음을 보여준다.(4,14)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고행 나자렛의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대목(이사 58,6)을 빌려
메시아로서의 자기 身元과 使命을 명백히 선포하신 점이다.
따라서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신원과 사명을
그 내용과 함께 구체적으로 밝혀나가는 것이 루카복음의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숙제의 핵심은 메시아이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과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루카는 자신의 숙제를 예수님의 직접적인 활동으로 하나씩 풀어간다.(4,31-9,50)
우선 이 땅에 도래한 메시아의 활동은 이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구마기적과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병자치유 기적으로 드러난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치고
그들 가운데서 뽑은 사도들을 교육시킴으로써 미래의 선교를 준비한다.
급기야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교의 지도층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파견되어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을 예의 주시한다.
와중에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구약율법의 근본정신을 새로 세우고 죄의 용서를 發說한다.
그들에게 예수가 걸림돌이 되는 만큼 예수의 신원은 서서히 밝혀진다.
결국 제자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로 고백한다.(9,18-21)
그러나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은 정작 예수의 참된 신원과 평행선을 긋는다.
끊임없는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자기 신원에 대한 확신과 사명에 대한 다짐은
두 번씩이나 수난과 죽음의 예고로 이어지는데,
제자들은 이를 간파하지도 물어보지도 못한다.(9,45)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 두 번째로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발설한 목소리의 메아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으냐.’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다.(46절)
이처럼 한심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둘 이상 모인 곳에 누가 더 높은가를 가름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늘 있는 일이다.
어떤 공동체는 그 안에 리더가 있기 마련이며 또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 공동체가 누구에 의해, 무엇을 위해 창설되었느냐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 공동체라면 이는 필시 예수의 정신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 가운데 어린아니 하나를 세우신 것은 겸손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회의 힘없는 자를 의미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를 받아들임은 곧 예수를 파견한 아버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들 가운데 제일 낮은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원칙이 세워진다.(48절)
계속두면 스승의 책망이 더 이어질까 두려웠던 것인가?
요한이 나서서 엉뚱한 말을 던진다.
예수의 제자단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을
자기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이다(49절).
사실 이 지적은 제자들의 질투와 투기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제자들에게도 마귀를 제어하는 권세가 주어졌다.(9,1)
그러나 제자들은 이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이는 9장 40절을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올라가 계신 동안에,
악령이 들린 아이를 아버지가 데려와 제자들로 하여금 악령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지만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했던 것이다.(9,40)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니 막지 마라.”(50절) 하고 말씀 하신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마귀는 쫓아내었으나,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예수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서로 다른 공동체가 있을 수 있음이 암시되었다.
여기까지가 루카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카 4,16-9,50)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