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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 18대 환웅천황의 역사와 통치강역
2012.03.12. 00:21
배달국 18대 환웅천황의 역사와 통치강역
한민족사를 바르게 알게되면
초대 환웅천황께서는 환국 말기인 약 6천년 전 환국의 마지막 환인인 지위리 환인으로 부터 배달국을건국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동물이 아닌 토템사상에 의해 족호를 나타낸 것임]
이때 환웅천황은 신교 신앙을 기반으로 신시에서 배달나라를 일으키고, 백성에게 천경신고(天經神誥: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가르치고 삼신상제(三神上帝)님의 진리로 백성을 교화하였습니다.
배달 환웅천황의 가르침 (환단고기 태백일사 - 소도경전본훈)
민족사의 첫 기원을 열었다. (5903년前, 2006년 기준)
한민족의 정기가 서린 민족의 영산 - 태백산(백두산)
배달은 하늘의 광명이 비친 땅이란 뜻이며, 신시란 신의 도시란 뜻이다.
우리 민족을 배달 민족, 배달의 후예라고 일컬어 온것은 이 배달국이 실질적으로 한민족 역사의 시조이다.
월드컵을 통해 크게 알려진 ‘치우천황’이 배달국 14대 환웅천황이며, 인류문명의 시조인 태호복희씨, 의학의 시조인 신농씨 등 중국인들이 신화로 모셨던 인물들이 사실상 모두 배달국시대 실존했던 우리의 선조들인 것이다.
중국사의 실체 그 뒤를 이은 하나라의 주임금, 상(은)나라의 탕임금,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모두 100% 동이족 혈통이다.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 불렀다. (동이족 - “동방에 큰활을 잘쓰는 민족” )
중국 고전 <초서>를 보면 ‘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라 기록하고 있다. 또 <맹자>와 사마천의 <사기>에는 ‘순임금은 동이인(東夷人)이다’, 라고 전한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고대사는 바로 우리 배달 조선민족이 직접 현지에서 개척하여 나라를 건설한 창업의 역사이다. 즉, 중국의 고대사는 바로 우리 배달 조선민족의 역사이며, 오늘날 중국은 한민족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중국 한족역사의 계보(혈통)
단군조선 건국이념으로 잘못 알고 왜곡된채 세뇌되어 온 홍익인간, 재세이화, 광명개천의
신시배달국 환웅 계보 (18대, 재위년수 : 1,565년)
배달국 14대 치우천황의 동방 대통일 전쟁사
2002년 월드컵 온 국민이 '대한민국'을 외치며 다같이 응원하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설레입니다.
붉은악마 그 깃발의 주인공 치우천황을 아시나요? 그 깃발의 주인공이 바로 배달국 14대 치우천황 이십니다.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109, B.C.2706, 일명 치우천황, 151세)
치우천황은 누구인가?
동방 한민족의 고대사가 송두리째 뿌리 뽑힌 지난 2천여 년의 세월속에서 잊혀졌지만, 치우는 바로 동방의 배달국을 다스리면서 당시 우리의 영토를 가장 넓게 개척한 배달의 14세 자오지 환웅천황이다. 병법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당시 염제 신농씨 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8대 유망이 쇠퇴의 길을 겆자, 치우천황은 웅도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이때 서방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던 황제헌원이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동방 최초의 국제 전쟁인 '탁록 대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탁록대전 상상도
10여 년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 이 전투에서 치우천황은 쇠로 만든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뛰어난 도술로 큰 안개를 지었다. 이 안개술법에 대항하기 위하여 헌원은 지남차를 만들어 싸웠다한다. 당시 치우천황의 군대는 갈로산에서 쇠를 캐어 금속무기를 만들었는데 이 내용이 춘추전국시대에 기록된 [관자]에 전해져 온다.
마침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은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의 시조가 되어 수천 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중국 한족에게까지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사기]에 주석을 붙인 응소는 '치우는 옛 천자였다(蚩尤古天子)'라고 했고 , [사기정의]는 치우 군대가 '동두철액', 즉 '금속 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 등 각종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의 진실을 조작한 중국
그런데 사마천은 사기를 쓰면서 이러한 역사의 진실을 '금살치우'로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동북아 역사와 문명의 뿌리를 황제 헌원으로 조작하고, '중국이 천자국으로 천하의 중심이며 주변민족은 모두 야만족' 이라는 중화사관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중화사관 즉, 중국사대주의 발원의 시작이다.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 탁록 대전
한중 고대사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날조한 기록상의 첫번째 인물은 2100년 전 한나라 무제(BCE 141~BCE 87) 때의 사관, 사마천(BCE 145~?)이다. 그가 왜 한민족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는지는 당시의 시대 배경을 살펴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북방 흉노족을 정벌한 한 무제는 동북아 전역에 한나라 군현을 설치하여 명실상부한 중화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리하여 위만조선(BCE 194~BCE 108)을 멸망시키고 이어 고조선을 계승한 북부여(BCE 239 해모수가 개국)의 영토까지 넘보았다. 그러나 동방 조선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그 야망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 같은 시대 배경 속에서 사마천은 중국 25사의 첫머리인 [사기]를 편찬했고, 그 첫 번째 왜곡작품의 상징적 문구가 [오제본기] 서두에 나오는 '금살치우(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이다.
신시배달은 동방문명의 뿌리: 교화敎化 시대
환웅 천황께서는 홍익인간, 재세이화, 광명개천의 3대 이념을 토대로 민중들에게 신교의 경전이었던,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설하고 하늘의 진리로 교화하였다.
배달국 시대는 교화의 시대로서 초대 거발환 배달환웅은 화백(고대의 민주주의 제도)으로 선정을 베풀면서 역법(달력)을 만들어 1년을 365일로 정했으며, BCE 3898년, 신지(神誌=사관)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鹿圖)문자’를 만들게 했는데, 사슴 발자국의 흔적을 보고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녹도문자라고 불렀다. 또한 음양, 오행, 팔괘, 십간십이지 및 청동기와 불을 발견하였다.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신시 배달문화의 생생한 증거들
1. 홍산문화(紅山文化, BCE4000~BCE 2300) 신시(神市) 환족(桓族)의 일원이 되어 중원지역에 신시문화를 전파시킨 웅씨국(熊氏國)의 유적으로 추정됨
2. 홍산유적: 1930년대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동북쪽 홍산에서 발굴됨 중국학계에서 양상: 채도(彩陶)문화나 삼황오제에 연결시키려 했으나 1979년 본격적인 발굴결과 전혀 다른 문화임이 확인 다양한 유적이 발굴되고 있음
4. 돌무지무덤(적석총: 고대 한민족 전형적인 능묘구조), 성터, 옥기(玉器) 발굴 : 바이칼호의 것과 일치, 바이칼호 주민들은 연옥 가공기술이 뛰어남
배달국 시대의 주요인물과 업적
태호복희太昊伏犧 (BCE 3528 ~ 3413): 역사상 최초로 우주관 정립
배달의 동방 9족(九夷) 가운데 풍이(風夷)족 출신으로 인류역사상 최초로 풍씨 성(姓)을 썼음.
「태백일사」의「신시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제5대 태우의 천황의 12대 막내아들임
송화강에서 하도(河圖)를 계시받아 태극기의 팔괘를 최초로 그으신 분임 우주의 변화원리를 음양논리로 처음 밝혀 역철학(태극·음양·오행·팔괘)의 창시자가 됨
복희팔괘
따라서 주역은 중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 민족에서 시작된 것이다.
뒤에 역학을 계승 발절시켜 나간 성인들이 문왕, 주공, 공자, 소강절, 김일부 인데, 모두 동이족 혈통출신이다.
주역이라 불리게 된 것은 복희 8괘가 후일 신농씨를 거쳐 주나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태호복희의 하도
하도는 상생의 순환도
염제신농
배달국 제8대 안부련 환웅의 신하로서 웅씨족의 후손이었던 소전(少典)의 아들임.
풍씨 성이 15대에서 단절되어 염제신농의 강씨 성姓이 현존하는 인류최초의 성씨가 됨 백가지의 약초를 맛보아 동양의학을 창시하여 경농과 의학의 창시자로 불림 즉 그는 중국의 농업 ·의약 ·음악 ·점서(占筮) ·경제의 조신(祖神)이며, 중국문화의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헌원
공손의 후손중에 황제헌원(BC 2692~2592)이 나왔다.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 → 공손씨公孫氏 (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 "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나고... 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중국: 초사-
제14대 자오지 치우천황(BCE 2706 ~ 2598): 배달문화의 최고 전성기 - 도읍을 청구(산동반도에 소재)로 옮김
중국의 하북, 하남, 산동, 강소, 안휘, 절강설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대통일함 중국의 시조로 알려지고 있는 황제 헌원(기원전 2692~2593년)과 그 유명한 탁록(하북성 소재)에서 10년간 73회의 전투를 벌여 마침내 그를 사로잡아 신하로 삼음.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치우천황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했고, 그를 무신(武神)의 원조로 섬기게 됨. 한고조 유방도 무신의 원조(兵主)인 치우천황에게 제사지낸 후 군사를 일으키며, 항우에게 이긴 뒤에는 치우천황의 사당을 장안(지금의 서안)에 짓고 제를 올리고 공경함.
당시 치우천황의 국사(國師)인 자부(紫府) 선사는 황제헌원에게「삼황내문」을 전하고 창힐에게는 문자를 가르쳐 줌으로써 한족의 황하문명의 뿌리역할을 함 신교의 대도를 전수받은 황제 헌원은 ‘황노학(黃老學)’ 이라 불리는 도교의 시조가 됨
결론적으로 위대한 우리 한민족은
인류 최초의 시원역사인 환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아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신시 배달국을 열어 동방문명의 뿌리가 되었으며, 중국 한족이 그토록 자랑하던 황하문명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소위 발해연안문화인 홍산문화, 요하문화, 우하량문화가 그 확실한 증거다.
이 배달국을 이어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으로 국통맥이 이어져 한민족 상고문화의 최고 전성기인 47대 단군(2,096년)의 찬란한 역사가 펼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국 한족과 일본에 의한 상고역사의 왜곡으로 이러한 우리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리고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지 못하여 한민족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안타깝고 서글픈 역사현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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