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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14권
삼류무사 279 오월동주
하남의 초겨울은 생각보다 그리 매섭지 않았다. 뭐 어차피 기본 내공력으로 몸을 데우는 하운에게는
그리 큰 문젯거리는 아니었지만 칼끝 같은 추위를 좋아할 리 또한 없었기에 적당히 추운 -적당히라는
말처럼 가져다 부치면 다 되는 단어도 없다- 정도의 날씨는 오히려 그의 정신을 맑게 해주었기에 기꺼
울 정도였다.
" 춘절이 오기 전까지는 이 모든 일이 종결되기를......"
더 이상 두려움 따윈 없다. 그런것에 연연하면 할 수록 일은 더욱 꼬여만 간다.
딱히 서두를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유유자적 볼 것 다 보면서 여유로웠다고 하기도 뭐한 여로,
단지 평소와 다른점이라면 혼자라는 사실이 아닐까.
때론 귀찮고, 때론 시끄러웠지만 늘 곁에 있었기에 자연스러웠던 동료들.
문든 하운이 피식 웃었다. 멀쩡하게 생긴 청년이 혼자 걷다 이런식으로 실실 웃으면 맛이 가도 한참
갔거나 아니면 정분난 여인네를 그리는 경우가 원칙이다.
그런데 그가 그린 사람들은 사내였다, 그것도 사나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구현하는.
그렇게 생각하니 하남으로 내몰면서 미안해 쩔쩔매던 그들이 떠올라 하운은 끝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
뜨렸다. 그들은 잘 몰랐겠지만 하운은 결코 삐치거나 했던 것이 아니었다.
삐친 척을 했다면 몰라도 말이다.
혼자만의 여로는 그에게 다소의 외로움과 더불어 다소의 여유를 주었다. 늘 누군가와 부대꼈던 무림행
에서 이렇게라도 혼자의 시간을 모내게 된 건 어찌 보면 대단히 소중한 시간이다.
그리고 하운 역시 이렇게 주어진 순간을 허비할 만큼의 바보는 아니었다.
무림맹과 화산의 관계, 강호사가 어긋났던 시점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문제들, 그리고 비천혈서와 뒤안
길에 감춰진 이름 모를 이들의 일, 그 모든 것들의 가운데에 선 자신들.
" 일단 문을 열면 모든것이 명명백백해지겠지."
듣는 이도 없을 텐데 독백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커다란 목소리로 하운이 중얼거렸다.
* * *
곡팔개가 말한 무덤은 어느 공동묘지들과 같았다. 아니 같은 정도가 아니라 눈을 부라리고 찾지 않으면
발견하기 어려울 정도였기에 안력 좋은 하운으로도 다소 시간을 지체해야만 했다.
"역시 대단해."
이렇게나 묘지가 많다니, 대륙 자체가 거대한 묘지라고 불리는 건 알았지만 온통 묘의 밭에서 우뚝 선
하운이 감탄의 탄성을 질렀다.
뭔지 모르지만 엄청난 비밀이 감춰져 있을 개방의 전대 방주 무덤이 거의 방치되다시피 버려져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그런 생각은 고사하고 개봉도 아닌 하남의 공동묘지에 시신이 안장되어 있을
줄 그 누가 알았을까.
분주히 묘지 사이를 누비던 하운의 눈에 곡팔개가 말한 비밀표식이 들어온 건 뜨거운 차 한 잔을 말끔
히 비워낼 만한 시간이 경과하고서였다.
"여기인가?"
씁쓸한 넋두리처럼 하운이 읇조렸다.
비문 하나 없이 방치된 무덤은 참배객의 헌화도 발걸음도 완전히 끊긴 형태로 손바닥만 한 깃발 하나를
의지한 채 외로이 세월을 곱씹고만 있었다.
"어디보자. 좌로 세번. 우로 세번, 그리고 다시 앞으로 일곱 번이 라고 했던가?"
무릎을 굽히고 깃대를 곡팔개가 일러준 순서대로 움직이자 봉문의 뒤쪽에 쌓여 있던 흙더미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이로 미루어 전대방주 본인 아니면 조력자가 기관 지식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음이 틀림
없었다.
꿀꺽-
목울대가 크게 울릴 정도로 침을 삼키고 하운이 주위를 돌아본 후에 봉분 사이로 생겨난 작은 구멍 속
으로 몸을 던졌다.
끼익-
그가 들어서자마자 봉분의 구멍은 얇은 판자에 의해 가로막혔다. 판자 위에는 흙과 잔디가 뒤엉켜 있었
기에 무덤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했다. 그야말로 기관물의 대가다운 솜씨.
그러나...
하운이 들어가고 잠시 후 봉분 앞으로 떨어져 내린 또 하나의 인영이 깃대를 움켜쥐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일을 도와주어 고맙군. 화산의 대제자."
그 역시도 하운의 방식 그대로 깃발을 움직여 구멍을 만들어내고 스며들 듯 안으로 들어갔다.
휘이잉-
두사람을 삼킨 봉분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겨울바람을 음미하며 제자리를 지켰다. 세상사야
어찌 돌아가든 이미 가버린 이에게는 모두 부질없는 일일테니.
그러나 고즈넉이 흩날리는 깃발만은 이 무덤의 주인이 결코 세상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깃대에 몸을 부딪치며 간간이 통곡을 하나보다.
소리없는 울부짖음을.
* * *
봉분의 지하석실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냥 넓은 정도가 아니라 눈이 튀어나올 만큼 거대했다.
" 전대 방부께서는 듣던 바와 조금 다르셨나 보군요."
하운이 고소를 머금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반경 이십여 장에 이르는 넓이 때문에 나온 말이 아니었다.
석실을 밝히고 있는 야명주는 그렇다 치더라도 벽면에 그려진 그림들 하나하나는 명장의 손을 탔음이
틀림없었으니까.
또한 석실 자체가 정팔각형이라는 다소 특이한 형태였고, 그 면면이 또하나의 벽화로 채워져 있었기에
무덤이라기보다 병풍으로 채워진 대갓집 안방 같은 화려함마저 느끼게 해주었다.
"대단하구나!'
벽화에 대해 그리 대단한 눈썰미를 가진 편은 아니었지만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청룡의 승천
도를 보며 하운이 절로 주먹을 쥐었다.
화산에도 수많은 벽화가 있지만 이것은 차원이 다른 무엇으로 그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 살포시 웃으며 너울너울 춤을 추는 선녀도며, 맹호도, 그리고 신선도까지 어느 하나 그냥
보아 넘기기 어려운 무엇으로 벽면을 수놓았기에 구경하던 하운의 입에서 절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단해를 연발하던 하운이 벽면을 다 돌고 머리를 긁적였다. 대단한 건 맞다. 그런데 자신은 예술 작품
이나 감상하자고 여기까지 온건 아니지 않은가.
"뭐야 이거?"
대단한 벽화들 그래 대단하다. 그런데 뭘 어쩌자는 건가?
조사전에 묻히지 못할 정도로 크나큰 한을 품은 개방방주가 산수화나 구경시키자고 이런 자리를 마련하
지는 않았을텐데.
"음......."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벽여 년간 풀지 못했던 숙제라고 했으니 보자마자 알리는 없을테니.
"잠시 쉬어볼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급박한 여로는 아니었지만 서두르지 않았던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머릿속을 떠나
지 않던 상념들의의 사투도 겸해야 했기에 노독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에라~"
딱 장추삼의 그것처럼 한숨지으며 털썩 주저앉은 하운이 턱을 괴고 멀뚱멀뚱 벽면을 바라보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이 모든 현실이.
'생각해 보면 옛날이 좋았어."
명상중에 졸다가 등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맞으며 정신을 차리던 수련 시절이 그리웠다. 한 가지 동
작을 몇백 번이고 반복하다 지겨워 몰래 다음 검로를 밟다 들켜서 점심을 굶어야 했던 때가 그리웠다.
그땐 최소한 근심이 없었으니까. 그저 주어진 일만 하면 됐고, 그것을 인생의 지표로 삼아도 상관이 없
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과연 좋은걸까?
좋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건 편했던 거다 책임이라는 멍에에서 자유로웠던 거다. 그렇다면 책임이라는
것은 단지 멍에로 치부해도 될만큼 귀찮은 얽매임일까?
책임을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이들에게 이런 고민이 어떨게 비칠까?
그리고 하운은 책임을 져야만 한다. 화산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료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
해서, 절대로 '강호'나 , '정의' 따위의 이름을 빌어 책임을 질 생각은 없었으니까.
"...........!"
고개를 끄덕이던 하운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의 찜찜함. 대상없는 누군가의 시선에서 오는 꺼림직함. 밀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은 그런 기분을 더
욱 부추겼고 하운은 곧 범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맹호도?"
그렇다. 범인은 눈을 부라리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맹호의 눈빛이었다.
대저 호랑이 그림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것이 시선의 집중이라는건 불문율이다. 어느 곳에서도 대상자
를 바라보는 맹호의 눈길, 그리고 얼마나 사실적인가가 걸작의 기준이 된다로 했다.
그런 견지에서 볼때 이 벽화는 분명 명품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넘어가려던 하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맹호의 눈길이 뭐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뭔가가...
"가만?"
맹호의 시선, 그것은 하운에게 모여 있으면서도 또한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뻘떡 일어선 그가 벽면의 그림들을 순간적으로 훑어보았다.
"맞아, 여기 그림들 가운에 독립적으로 산수만을 묘사한 작품은 단 한 점도 없다.!"
그 말은 석실을 수놓은 모든 그림들은 시선을 가진 모종의 것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고 그것들의 시선
은......
빙글 몸을 돌린 하운이 시선들이 합치하는 벽면으로 홀린듯 걸음을 옮겼다. 그곳을 채우고 있던 그림은
폭포를 거스르려 힘찬 요동의 치고있는 연어들을 묘사한 것이었다.
"연어도라......."
어찌 이 그림을 놓쳤던 걸까. 돋아난 비늘 하나하나까지 사실적이라 벽을 뛰쳐나와 땅바닥에서 펄떡거
려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명작 가운데 명작인데.
"흠...>"
다시 말하지만 명화감상은 나중이다.
그림을 살피던 하운이 문든 고개를 흔들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겁니까......"
대답없는 메아리, 그러나 너무 답답해서 절로 나오는 탄식.
그렇게 물끄러미 벽면을 바라보던 하운이 문득 중얼거렸다. 독백이라고 하기엔 꾸렷한 대상을 지칭한
말은.
"그렇게 숨어 있지만 말고 함께 고민해 봅시다. 어차피 목적은 같은듯하니 말이외다."
".............."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음영진 벽면에서 어떤 그림자가 불쑥 몸을 내밀었다.
"알고 있었나."
건조한 음성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사십대 후반의 사내가 하운의 방임되어 있는 뒷등을 묵묵히 바
라보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걸가?
하운은 사내의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감을 넘어 오만하기까지 하구."
사내의 훈계조에도 하운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보였소이까?"
'이것봐라?'
물론 이 젊은 도사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는 무인임에 틀림없다.
그저 주가 정도가 아니라 무림에서 내노라하는 고수들도 저어할 인물이라는 정도는 사내도 잘 알고 있
다.
하지만 고하의 비교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서슴없이 뒤를 내준다는건
분명 오만이라고 불러 마땅한 일이다.
"아니면 내 존재가 그리 희미했던가?"
스륵.
천천히 몸을 돌리는 하운의 옆얼굴에 음영이 내리깔렸다.
"희미하다니 그 무슨 겸손의 말쑴을."
"음?"
"현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십장생의 최고 수뇌에게 오만할 이가 어디 있겠소이까"
"음..."
놀랍게도 이 젊은 도사는 자신을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점이 사내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지만
당사자인 하운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그런데....
'무림을 좌지우지했다...........'
왜지 서글퍼서 사내가 자신의 가슴팍에 수놓아져 있는 문양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멍에처럼, 절대
로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따라다니는 이름을.
"그래 내가 십장생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결코 웃으면서 덕담이나 나눌 사이가 아니라는 정도는 인지하
고 있을텐데?"
우웅=
사내가 기를 불러일으키자 그의 장포가 팽팽히 부풀어 오르며 잔 먼지들이 들썩거렸다. 그러나 사내의
도발은 하운의 차분한 말에 간단히 부정되었다.
"어차피 공격하려 했다면 이곳 말고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그리고 무덤의 위치를 파
악하기 위해서 미뤘던 거라면 적어도 한 시진이 흐른 시점이기도 하지요."
"미행까지 알았다는 건가?"
대답없이 입가에 한줄기 웃음을 머금고 하운이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렇다면 사내의 잠행술에 문제가
있었을까. 아니면 이 젊은 도사의 공력이 상상 이상이라는걸까.
"별로 놀랄 건 없소이다. 신경을 곤두세우면 아무리 작은 기척이라도 놓치지 않는 법이니까."
하운의 말에 사내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비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그 반응과 말씀이야말로 저희를 얕잡아 본 오만의 소치로 들립니다만?
하운이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소위 십장생의 최고 수뇌라는 인물까지 나섰는데 목적지가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해
서 미련없이 손을 턴다는 게 자연스러울까요?"
"으음...."
그의 설명이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무엇을 어떻게 캐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그만큼 사안의 중대성을 인지한 일일진대 허수아비 넷만을 박
아놓고 발길을 돌렸다? 담백하다 못해 맥이 빠질 정도가 아닙니까?"
"허허........"
사내의 헛움음은 하운의 결론으로 가로막혔다.
"제가 겪은 십장생은 그 정도로 녹록하지 않았으니까요."
칭찬일까, 아니면 지존일까?
그런 건 중요하지는 않을지도, 어차피 그의 생각은 이 젊은 도사가 훤히 꿰뚫었고 결과가 이거다.
"그래 자네가 하고픈 말은 뭔가?"
이제야 말이 통한다는 표정으로 하운이 웃자 사내는 순간 미묘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뭔가 끌려가고 있
는데 딱히 제동을 걸 만한 무엇이 없다.
"귀하의 말씀대로 우리의 관계가 썩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당장 칼을 들이댈 정도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은 아님에 틀림없지요."
"그래서?"
사내의 차가운 눈길을 여유롭게 받으며 하운이 고개를 돌려 석실을, 더 정확히 ㅂ말해 벽화에 눈길을
돌렸다.
"또한 이곳을 찾은 목적은 저나 귀하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문제가 간다치 않은것도 사실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결론은?"
사내가 눈에서 힘을 풀자 하운이 벽황서 눈을 떼지도 않고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잠시 한 배에 몸을 싣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듯한데 어떻습니까?"
그의 말에 사내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하운. 올해로 꼭 서른 화산의 대제자이면서도 무슨일인지 호북에서 표국 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도사.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 때문에 유성으로 불리는 신진삼대고수 가운데 한 명. 화산의 검식을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적의 요체만을 뚫어 파훼한다고 하여 천재검수로 명성이 드높으나 그 실력은 아직 추측불가.
일설에 의하면 상대방의 무학을 가슴으로 느낀다는 황당한 말까지 도는 수수께끼의 인물.
'심계인가, 여유인가.'
갑자기 사내는 이 젊은이의 속내를 엿보고 싶어졌다.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내면 안에 어떤 생각이 꿈
틀거리고 있을까.
"오월동주라는 건데..."
그의 독백에도 하운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만약이대로라면 평생동안 움직이지 않을것처럼.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있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별로 믿지는 장사도 아니었고, 하운이라는 청년의 알 수 없는 분위기를 조금더 지켜보자는 속내
도 포함된 판단이었다.
솔직히.............
"뭐, 별로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ㅓ"
필승을 자신할 수 없다!
순간 몸을 빙글 돌린 하운이 정중히 포권을 올리자 사내는 적이 당황했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복룡표국의 하운이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바이오."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지만 사내는 맞 포권으로 ㅈ감정을 대신했다. 어차피 말은 바람결에 흩어지고 감
정은 시간과 함께 사멸할 테니.
"맥천 또한 잠시의 동주에 기꺼운 바이네, 하나 배에서 내리는 이는 오직 하나일 테니 그 점을 명심하
도록."
더 이상의 교감은 필요없다. 잠시의 휴전이면, 문제를 풀 시간이면 충분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불행히 우리에겐 사공도 없으니 손수 노를 잡아야 할 입장입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배를 저어볼까요?"
"좋다."
그의 말에 만족한 미소를 지은 하운이 고개를 돌려 정팔각의 벽면을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뭐, 좀 아시겠소이까?"
이심전심이라는 걸가? 뜬금없은 질문이지만 맥천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ㅅ
"시선이 한군데로 모였다는 정도는 알겠는데 그게 연어도라... 뭘 말하고자 하는 건지..........."
턱을 쓰다듬으며 하운이 연어도의 앞을 거닐기 시작했다. 이 당돌한 동주에 얼른 적응을 하지 못하던
맥천역시 하운의 분위기에 동조라도 하듯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긴..."
맥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백 년 가까이 풀지 못했던 숙제다 단 몇시진만에 뚝딱 해치워 버린
다면 이전의 사람들이 사흘은 식음을 전폐하고 곡을 할 일이 아니겠는가.
잠시 적막이 흘렀다. 장내는 하운의 발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발걸음도 얼
마 지나지 않아 멈춰야 했다. 그렇게 암묵적으로 두 사람은 도해ㅎ에 매달렸고 시간은 어둠 속에 모습
을 감추었다.
쪼르륵-
시간마저 가두어 버린 적막을 깬 건 어처구니 없게도 맥천의 인체 시계였다.
"이런. 또 멋쩍게 되어버렸구먼 대저 몸이라는 놈은 주인의 마음 따위와는 상관없이 반응을 하는 법이
라."
허허, 웃으며 그가 품을 뒤져 육포를 꺼내 들었다. 그 모습에 하운도 옅은 웃음을 그리고 자리에 앉아
건량을 펼쳐 입가에 가져갔다.
한동안 우물거리던 맥천이 입에 낀 고기살을 툇 뱉으며 투덜거렸다.
"젠장, 역시 육포는 정이 가지 않아."
"시장이 반찬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나마 없는것보다 나은 일이지요."
하운을 슥 돌아본 그가 멍하니 입을 벌리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육포 하나를 꺼내 들고는 눈싸움을
벌였다. 정말 먹기 싫은 표정으로.
"도사 나으리다운 말이기는 하나 미천한 속인에게 별로 와 닿지 않는군. 이렇게 질긴 녀석을 우물거리
자니 마치 소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질겅질겅 육포를 씹던 맥천이 문든 연어도를 보며 푸념아닌 푸념을 늘어놓았다.
" 거 보기좋군. 오동통하게 살이 올랐어. 많이도 바라지 않으니 딱 한마리만 튀겨 먹었으면 소원이 없
겠다."
두 마리를 준다고 해도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하고 킬킬웃는 맥천의 넋두리에 다시금 미소 짓던 하운
이 그의 웃음뒤에 남은 잔영을 말없이 쫓았다.
소문으로만 떠도는 음모의 주체, 십장생의 최고 수뇌가 저런 우스개를 신신히(??????)를 줄 아는 인물
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까. 소문과 억측으로 만들어낸 관념속에 스스로를 한정 지은 대중들은 결코 이
런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하운도 그런 부류로 영원히 살았을지도 칠 년 전의 그 사건과 복룡표국을 몰랐더라면 도호와 검
과 선이라는 이름ㅇ 파뭋겨 그렇게 정형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정형화?
"가만!"
"음?"
벌떡 일어선 그가 연어도를 바라보다가 주위의 벽화들을 돌아보기를 반복하며 손바닥의 딱 마주쳤다.
"왜 이걸 생각하지 못한거지!"
"뭐가 말인가?"
어정쩡하게 일어선 맥천에게 눈도 돌리지 않고 하운이 연어도를 가리키며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이그림과 다른 그림들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차이라고?"
차이라고 한다면 무수히 많은 차이들이 있을 것이다. 본래 같은 그림이 아니기에. 그러나 하운이 말하
고 있는 차이는 여타 일곱 개의 그림들과 연어도의 차이를 일컬음이니 입곱 개의 그림과 다른 하나를
얘기하는 것이리라.
"바로 떠오르는 것은 없는걸? 그저 다른 것들보다 잡아먹기 좋다는 정도랄까?"
너무 나른해서 질문자의 매가리를 다 빼버릴 듯한 대답. 그러나 하운의 호응은 전에 없는 열기까지 담
겨 있었기에 쉰 소리를 읇어댄 맥천으로는 어이없다 못해 겸연쩍어졌다.
"잡아먹기 좋다는 것은 동의 합니다. 또한 수량까지 풍부하여 장정 서넛은 배불리 먹을 정도가 아니겠
습니까?"
"글쎄? 용한마리면 연어 여덟마리보다는 배가 부를 텐데? 호랑이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단지 수량으로만
말하기엔 무리가 있지. 여덟마리라는 급수가 다르... 여덟?"
웅얼거리던 맥천도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섰다. 그제야 하운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했기에 뭐라고
말하려는 하운을 손짓으로 제지한 맥천이 벽화들을 정신없이 바라보다 손바닥을 딱 마주치고는 허허롭
게 웃었다.
"간단하다면 한없이 간단한 것이었거늘."
"그래서 난재였을지도 모르지요."
그리 말해 놓고 보니 이상해서 맥천이 하운을 돌아보았다.
"연어도를 제외한 모든 그림에 하나ㅅ씩의 동물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들의 시선이 한곳 즉 연
어도를 가리킨다는 것도, 그럼 이게 다라는 건가?"
"다가 아니라 시작인 게지요."
하운이 한 걸음 연어도 앞으로 다가섰다.
"연어도를 제외한 각 그림들은 이곡을 향한다는 것은 주저의 사실입니다. 반대로 말한다면 연어도는?"
"음?"
하운의 질문에 맥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생각해보니 연어도는 특정한 위치를 가리키고 있지 않았다. 그
건 여덟마리의 눈동자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말을 하고 싶은건가?"
"귀납이 있으면 연역도 존재하거늘 왜 귀납만을 생각하십니까?"
"음?"
하운의 말을 곱씹던 맥천이 서서히 눈을 돌려 연어도를 바라보았다.
아니, 연어 하나하나를 뜯어보았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건?"
연어 한마리마다 고개를 돌리던 그가 뭐라 하기전에 하운이 앞질러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연어들은 제각기 하나의 벽면을 바라보고 있지요. 달리 말한다면 그 벽면에 새겨진 동물
들과 시선을 마주한다, 이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연어들의 시선은 완전히 분산되어 있었다. 그래서 통일성이 없었고, 그 때문에 다른 벽화
와 차별성을 가졌던 거다.
하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매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야 질문자의 의도를 파악한 걸까."
"한 마리당 하나라.. 그렇다면?"
"연어의 수는 모두 여덟 그리고 벽면 역히 여덟 하나...."
하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쑥 나선 맥천이 연어도의 앞에서서 툭 내뱉었다.
"수의 허상일뿐, 일곱면의 대응에 필요 개체는 단지 일곱. 고로 남는 한 마리는?"
맥천이 손을 들어 중앙의 연어를 가리켰다. 정 중앙을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래서 어디에도 고정
시키지 않은 시선의 연어.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격하게 얽혔다.
"열쇠!"
연어를 가리키던 맥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그긍-
연어도의 벽면이 한 바퀴 회전하며 그들을 집어삼킨 공간은 정사각형의 형태였다. 순차적으로 켜지는
야명주의 광채에 눈살을 찌푸리던 둘은 곧 밝음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곧 전면에 그려진 벽화를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모습을 연속해서 그린 벽화, 애를테면 검식도였고 검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하운의 흥미를 끌
기에 충분했기에 그나마 즐거운 마음으로 벽화를 감상하던 그가 곧 입을 떡 벌리고 소리쳤다.
" 이, 이것은!"
"...?"
태산이 무너져도 여유로운 웃음으로 받아칠 것만 같았던 젊은 도사의 경악에 맥천이 고개를 갸우뚱거렸
다.
"어떻게 이 그림이 여기에?"
"뭔데 그러는 거.....""
벽화에 시선을 던진 맥천도 잠시 후 얼굴을 굳혔다.
그렇게 일각 정도의 침묵속에 간혹손을 들어 어떤 동작을 취하던 맥천의 눈이 부릅떠졌다.
" 이럴수가!"
이번에는 하운이 의아한 얼굴이 되었지만 그는 차분히 다른 벽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캐보지도 묻는다
고 선선히 대답해 줄 정도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으니.
정면- 정사각에서 정명이라고 칭하는 자체가 우스웠지만 하운이 가정한 정면은 하나였다.- 의 오른편에
위치한 벽면에 그려진 그림을 꼼꼼히 살핀 하운이 곧 무거운 탄신을 터뜨렸다.
"이렇게도 해석되는 건가. 천재 천재 하더니 진짜 천재들은 따로 있었군."
아마도 자신의 뒤에 수식어처럼 따르는 호칭 때문에 늘어놓은 푸념일까.
"음......"
어느새 고개를 돌린 맥천도 하운이 바라보는 벽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오른편에 그려진 그림은 정면의 그림, 즉 하운이 본 최초의 검식을 전혀 다른 형태로
재해석해 놓은 형태였다. 그리고 그건 하운역시 시도해 보았던 검식, 즉 월광활무의 완성형이었기에 놀
라움이 더했으리라.
즉, 하운이 정면으로 가정한 벽면을 수놓은 그림, 그것은 다름 아닌 어둠의 율법자들의 독문 검법인 월
광살무였다. 그래서 바로 알아보았고 놀랐던 거다.
"여기서 월광살무를 볼 줄이야!"
"이 검식을 그런 이름으로 부르나 보군. 월광살무라......"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기대할 수도 없었던 맥천의 대꾸. 그러넫 말의 내용은 그리 간단치 않은 것이
었다.
"이 초식을 아시오?"
"알 수밖에."
"대체 어디서?"
"그건 뭐 중요하지 않고........."
하운의 말을 슬쩍 비껴간 맥천이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이런 살기 어린 초식을 저리도 아름답게 바꿔놓을수 있단. 누군지는 몰라도 대단한 고수로군. 아마도
월광활무를 두고 일컬음이리리ㅏ. 그렇다면 왼편의 벽면은?
급히 고개를 돌리는 하운의 뒷목에 맥천의 다소 조소 어린 독백이 뒤따랐다.
"보나마나 파훼식, 즉 역일 테지."
맥천의 말처럼 왼편의 그림은 정면의 검식을 철저히 파훼하는 동작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그림대로라면
월광살무는 변변한 반항조차 해보지도 못하고 ㄲㄲ일 판이었다.
특정한 변초로 반전을 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세 벽면을 번갈아 보던 하운과 맥천이 눈을 돌려 정면, 즉 월광살무가 그려진 면과 대칭이 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문제이리라. 그런데 하운은 빈공간, 즉 개방방주의 마지막 물음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것에 충분히 놀라 있었고 머리가 복잡했으니까.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은 그가 넋 나간 사람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뒤따라 슬그머니 앉은 맥천도
눈동자를 허공에 던진 채 무언가를 회상했고, 그렇게 다소 고요한 소요가 시작되었다.
"그래, 율법자의 소행이라면 월광살무의 등장이 어색하지만은 않지 아니, 지극히 당연하고나 할까. 또
한 그림으로도 남은 전례가 있기에 벽화로 처리되었다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 그런데 저 변초와 역
초는 또 뭐란 말인가. 저 정도의 겅재에 이른 고수라면 당연히 율법자를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심득 정도로 그려낸 부분이 아니니까. 그런데 율법자들은 여전히 신비고, 그림을 남긴이는 오리무중이
다. 설마....."
"개방방주를 염두한다면 아니다에 손을 들어주고 싶군."
"음?"
하운의 말을 자르며 맥천이 자리에서 일었다.
"개방방주가 이 벽화에 개입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나 절대로 주체, 즉 작자는 아니라
는 거니, 그만한 힘이 있으면서 자파를 목락의 길로 인도할 지도자가 어디 있겠는가. 분명히 말하지만
개방의 몰락은 자초된 결과가 아니라는 거야."
"음.........."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린 이가 누구일까.
'쉽게 가자, 쉽게.'
이렇게 복잡한 매듭은 종종 엄청나게 단순한 무엇을 빌미로 하여 풀리곤한다. 어차피 사실은 하나고,
그런 진실에 접근하는 통로도 하나인 법이니까.
'장 형이 있었더라면....."
문득 하운은 이런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건달하나가 그리웠다. 그의 다소 멍청하면서도 때로 눈이
튀어나올 만큼 매서운 촌철살인이 그리웠다.
그라면 모든 것을 단순화시킬 텐데.
그라면 잡티 없는 눈으로 사실을 직시했을 텐데.
'그래, 단순화시켜 보자. 있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거야.'
마치 장추삼처럼 뒷머리를 벅벅 긁고 하운이 벽화에서 눈을 돌려 초점없는 눈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생각을 조합할 때는 머리에 담아두기보다 이렇게 읊조리는 것도 꽤 나 괜찮은 방법이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율법자가 개방방주와 조우했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벽화가 그려졌다. 그리고 개방방주는 벽
화의 정체를 알았다. 그의 사후작품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알았다."
"꼭 벽화라고는 인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맥천의 반박에 하운이 고개를 돌렸다.
"개방방주가 자신의 무덤에 뭔가를 남겼고, 그것을 어떤 난제로 봉인했다는 건 사실이지만 이모든 과정
을 지켜볼 수는 없었을지도 모르지 않나. 즉 난재의 정체는 몰랐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렇군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힘들다. 피하려고 해도 자꾸만 자신의 주관이 주관이 들어가니까.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서... 율법자가 조우했고, 벽화가 그려졌다. 개방방주는 벽화의 작자는 아니다.
벽화를 그린 이는 희대의 고수라는 율법자의 검식을 완벽하게 파훼하고 재해석할 정도의 고수거나, 그
런이의 설명을 들었다는 애기다. 그런데 그건 인물이 무림에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다
면....."
멍하니 허공으로 돌렸던 고개를 급히 꺾은 하운이 맥천을 바라보았다. 그의 넋두리에 귀를 기울이던 맥
천 역시 어느 시점에서 하운과 눈을 마주했다.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은?"
하운의 질문에 맥천이 나른하게 대답했다.
"죽림에 몸을 숨기고 세상을 조롱하는 은거기인일 수도 있겠지. 그도 아니라면....."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두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동시에 뇌까렸다.
"율법자........"
그렇다.
희대의 살인마라는 율법자의 무학을 파후ㅖ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재구성이 가능한 사람.
그러면서도 단 한 차례도 중원에 언급된 적이 없었던 사람.
위의 두 가지 가정을 충족시ㅋ키면서도 개방방주의 실종이라는 거대한 사건에 개입하고, 화두처럼 두
가지의 난제를 남긴 채 자취를 감춰 버릴 정도로 담백한(?)사람.
'그래. 담백한 것이 아니라 담백할 수 밖에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율법자가 정답에 가장 부합된다.
그렇다면 왜?
청부는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개방방주의 실종과 눈앞에 펼쳐진 벽화들의 상관관계가
무너지니까.
'그럼 살인을 저지르고 이런 무덤을 만들어줬다는 얘기인데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잖은가.'
어금니를 꽉 물고 생각에 잠긴 하운을 곁눈으로 바라보던 맥천이 손을 들어 빈 공간을 가리켰다.
"모든 해답은 저곳을 어찌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네만?"
맞는 말이라 하운의 입술을 한번 축이고 빈 벽을 마주했다.
'가정은 말 그대로 가정일 뿐이다. 추리는 여기까지가 좋아.'
이제 율법자의 질문에 답을 할 차례다.
그런데 뭘 어떻게?
"설마 이보다 뛰어난 무엇을 기록하라는 것은 아닐테고."
그럴 자신도 없고, 하며 하운이 피식웃자 맥처이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월광살무보다 뛰어난 무엇을 바랐다면 굳이 한 가지의 검식을 가지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늘어놨을 리
가 없겠지."
"음."
오월동주, 불안한 동행이지만 어쨌던 성공적이다. 가끔씩 날아오는 맥천의 한마디, 한마디에 크고 작은
암시를 맏는 하운이었으니까.
"정면의 월광살무를 원래의 형태, 즉 정이라고 보면 왼편의 벽화는 귀하의 말씀대로 역일 것이오, 그리
고 오른편은...."
"이라고 봐야겠지. 사물의 원형같은 것.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진실된 모습이라고 할까?"
묘하게도 맥천의 말에는 열기마져 담겨 있었으나 하운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머리는 세가지 벽화, 즉 세 초식으로 가득 차 다른 무엇을 담아낼 여유가 없었다.
차라리 정, 반, 합 처럼 간단한 조합이라면 편했을 텐데.
'정, 역, 이라.. 정, 역, 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기게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하운의 입에서 끝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대체 무슨말을 듣고 싶은 겁니까?"
삼류무사 280 신념의 소산
이렇게 유치한 푸념이라니.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장추삼이나 북궁단야가 있었더라면 한마디
들었을 판이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 하나 있긴 있어서 하운이 눈동자만 돌려 맥천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냐.라..."
맥천은 의외로 담담히 받아들였다. 담담한 정도가 아니라 하운의 화두가 썩 마음에 드는 눈치였기에 당
사자가 겸연쩍을 정도였다.
"정확히 뭔지 몰라도 누구나 해당되는 공통적인 한 가지는 있겠지."
"공통점?"
하운의 반문에 맥천이 고개를 조금 까닥거렸다.
"그래 공통점. 일단은 사람이라는 전제하에서의 생각해본다면 누구나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싶어지
는 법이지. 전 무림의 지탄을 받는 무림공적이라도 만인의 욕을 한 몸에 받는 탐관오리라도 할 말은 있
는 법이거든. 꼭 나쁜 행동을 한 범죄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신념에 매치되는 일을 해야 하는 이들 역
시 자신의 행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네."
"무슨 말로 포장해도 결국 변명이 아니오?"
"그래 변명이지."
맥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것어럼.
"그 어줍지 않은 변명마저 없다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처연함일까. 맥천의 어조에는 힘이 없었다. 그러나 하운은 감히 동정적이 눈을 보낼수 없었다. 이렇게
강렬히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며 어느 누가 위로를 염두할까.
"단지 일반론에 동화되지 않았다고, 일탈의 결과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외부적인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네. 자기 위안까지 거세하려고드는 일반론자들을 보면 정말이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아."
일반론자들의 대부분은 신이라니까. 하고 쓴웃음 짓는 맥천을 묵묵히 바라보다 하운이 상체를 뒤로 쭉
젖혔다. 어쩐지 자신도 그런 일반론자군에 속한 것만 같아서.
변명이라고 했다.밝혀서 나눈다는 뜻이니 사리를 분별하여 정확히 한다는 것인데ㅐ 언제부터인가 구실
을 달아 자기 합리화를 한다는 말로 둔갑해 버렸다.
일반적으로 말이다.
'고약하군, 이사람은.'
젖혔던 상체를 바로하며 하운이 맥천을 돌아보닸다. 흔들림없이 잔잔한 움직임을 보이는 눈동자와 약간
튀어나온 턱선, 그리고 단정하게 벗어넘긴 머리칼.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사람이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쉽게 묻혀가는 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을 부
류다.
'그래서 공감하는 건가?'
율법자에 대해선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은 살인자들이라는 정도, 물론 무림에서 살인은 정
당화될 수는 없지만 필요악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무림이라는 공간은 힘이 정의이고 그 힘을 행사하는 와중에 발생하는 부산물 가운데 하나가
살인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하나 율법자는 청부 살인자라는 데 문제가 있다.
스스로의 의지와 생각, 그리고 신념에 의해 행해진 결과가 아니라 타인의 조종을 받아 사람의 목숨을
취했다는 거다.
그렇기에 하운은 율법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인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 대해 단 한차례
로 염두하지 않았고,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옳을까?
늘 중립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도 모르게 일반론이라는 그물에 빠져 신이라도 된 양 사물과 사건을 멋
대로 단정 지어 버린건 아닐까.
반대편에 서지 않으면 바깥쪽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기 위원을 깃대처럼 잡고 자기 합리를 깃발 삼아 전진한다... 서글픈 일이로군요."
"동정할 건 없지 . 그럴 수 밖에 없고, 또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가, 하며 자리에서 일어선 하운이 다시 한 번 월광살무가 그려진 벽면을 마주했다.
십장생과 율법자, 왠지 닮은 점이 많은 인물들이다. 실체조차 알려지기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향한다는
점 말고도 무림전복이라든가 하는 개인영달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공적이 되어
버렸다는 것도, 그리고...
'역시 주체는 따로 있구나. 맥천이라는 사람, 결코 모든 일의 주모자는 아니야. 이또한 율법자들과 같
다고 할 수 있지.'
'정당화 그리고 변명. 최소한의 자기 위안이라...'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 청부업자들에게 그런 감정이 있었을까.
아니,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누구보다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힘들고 더러운 일이었으니까. 아무런 명분도, 실익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풀어가던 하운이 고개를 내저었다. 또다시 신이 되어버린 자신을 탓하면서.
'이런 바보 같으니! 실익은 몰라도 명분이 없었다고 왜 단정 짓는 거지! 그들도 그들 나름의 정의에 의
해 움직였을 텐데!'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막고 싶어 손을 치켜들던 하운이 문든 눈동자만을 움직여 오른편의 그림, 즉
월광활무를 바라보다 다시 왼편을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음?"
하운의 뜬금없는 말에 맥천이 고개를 쳐들었다.
"이들은 동정받으려 하지 않았소이다. 오히려 당당하기까지 했었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맥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초식을 헤아리ㄷ고 시전자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천재검수의 말에는 단순한 감
상 이상의 무엇이 녹아 있었으니까.
"검식이 그려져 있었기에 우리는 흔한 발상대로 검식적은 측면만을 쫓았던 겁니다. 그렇기에 중앙의 검
식을 중심으로 해서 정, 역, 이라고 칭했던 거였고. 그런데 그건 무의미한 말장난에 불과했단 말이지
요."
"그렇다면?"
한가하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는지 맥천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 즉 율법자 자신을 나타낸 월광살무가 그들의 정의라며 구태여이 , 다시 말해 월광활무 같은 변형
으로 자시들을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월광활무는 그저 자신들이 걸을 수도 있었던 또 다른 길에 불
과한 거였고."
"그렇다면 역은?"
"아마도........."
하운이 몸을 돌려 맥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회의겠지요. 때때로 찾아오느 자기 불신. 사람이라면 누구나가지는 공통점으로 정당화도 있겠지만 반
대로 회의감도 있단 말이외다. 인간은 신이 아니니까."
정곡을 찔렸을까. 목울대가 움직일 정도로 꿀꺽 침을 삼킨 맥천이 하운의 눈을 슬쩍 피했다.
"만사가 귀찮고 피하고만 싶어지고... 그런 무력감의 결과가 바로 저런 형태겠지요.자기 불신을 뛰어넘
은 자기부정. 뭐, 그래봐야 꾀병 정도겠지만."
"꾀병이라..."
적절하지 않은 듯하면서 묘하게 부합되는 비유라 맥천도 가만히 역월광살무를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작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스릉-
단호한 어조로 한발 나선 하운이 검을 빼 들고 텅 빈 벽면에 검극을 고정시켰다.
"신념이란 그런 거라고!"
휘리릭!
그의 발에 지면을 스쳐 너울너울 움직이기 시작했다.
츠츠츠!
착각일까? 하운의 검에 요사스러운 기운이 어리며 그의 검끝은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어지러운 움직
임을 보였다. 그에 따라 주위의 공기는 축축하고 암울한 무엇이 지배하여 맥천이 저도 모르게 주춤 뒤
로 물러섰다.
"꾸미고 치장한다고 해서 변한다면 처음부터 본질이라 부를 것은 없노라고!"
파바박!
하운의 검이 움직이면서 텅 비었던 벽면에 어떤 선들이 수놓아지기시작했다.
"피한다고, 앓아눕는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길이아니었노라고?!"
팍!
마지막으로 커다란 호선을 그리며 하우늬의 검이 지면에 콱 박혔다 떨어지자 명부의 그것처럼 사이한
기운은 언제 그랬냐 싶게 걷혔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검을 고쳐 잡노라고."
빙글 몸을 돌린 하운의 뒤로 어지럽게 그려진 궤적은 다름 아닌 월광살무였다.
'이해 따위를 구했다면 한 걸음도 떼지 않았을 길. 사건과 사실을 떠나 부끄럽지 않았다는 건가.'
그그긍-
하운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하나의 월광살무로 채워진 벽면이 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명불허전이라더니."
맥천의 독백에 대꾸없이 열린 벽면으로 걸음을 옮긴 하운의 눈앞에 허름한 석관 하나와 두꺼운 양피지
로 봉해진 편지가 놓여 있었다.
관의 주인은 확인할 필요도 없을 터.
거지들의 모임이라고는 하나 강호 최고의 전통과 인원수를 자랑하는 개방방주느이 시ㅅㄴ을 안치한 석
관은 흔하디 흔한 무늬 하나 없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서글픈 무엇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봉서.
"열어보게."
"음?"
하운의 놀람에 맥천이 낮은 탄식을 흘렀다.
"어설픈 연대였다고는 하나 어쨌든 한 배를 탔던 입장이고 누가 뭐래도 조타수는 자네였네. 배에서 내
릴 이가 누군지 모르지만 결과도 모른채로 끝낸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나?"
"흠."
망설이는 하운에게서 몸을 반쯤 틀고 뒷짐을 진 맥천이 어울리지 않는 농을 건넸다.굳은 얼굴과 대조되
는 우스개라 착한 도사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그리고 나란 사람은 천성적으로 남에게 무릎을 꿇지 않아. 아무리 백 년 전이 고인이라지만 생판 얼굴
도 모르는 이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단 말일세."
잡시 맥천의 쓸쓸한 옆모습을 바라보던 하운이 천천히 봉서의 앞에 닥섰다.
"복룡표국의 표사이자 화산의 제자 하운이 방주님의 유지를 감히 받들고자 합니다. 비록 같은 파는 아
니나. 관 문주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했고 최소한의 양해를 구했다고 사료되니 노여워하지 마시길."
몸을 숙여 깊숙이 심배지례를 올린 하운이 조심스레 봉서를 받쳐 들었다.
스륵-
봉서에서 밀려 나온 편지는 두 장.
이봉서를 여는 이가 개방의 제자이길 바라면서....
중용의 눈과 역지사지의 무, 이 두가지 관문을 통과하고 여기까지 와준 형제이게에 안심하고
봉서를 넘긴다.
불의는 길이 아니니 차라리 몸을 숙였다.
방관의 결과가 이것이기에 비천한 목숨값으로 대신 치르노라.
복수를 꿈꾸지는 말아라. 참여하지 않았으나 침묵과 동조로 지내온이백년의 결과일지니.
그러나 웅비하라. 힘을 키워라!
외치지 못하는 의기는 허구일 뿐이고, 구체적인 능력이 없는 지조는 만용일 뿐이니!
다시는, 다시는 못난 선택을 하지 말길 바라며 마지막으로 사실을 고하노라.
개방방주 이청천은 이백 년간 지속되어온 구파일방의 암묵적 밀약을 이 한 몸으로 거부한다.
이후 개방은 잠정적 봉문의 길을 걸을 것이나 이 편지가 공표되는 시점으 ㄹ기해 일제히
을 재개하라.
조사들을 우러를 면목이 없어 눈조차 감지 못할 죄인이.
나지막이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하운이 마지막 구절에서 가슴 한구석이 에려와 숨을 몰아쉬었다.
"외치지 못하는 의기는 만용일 뿐이고, 구체적인 능력이 없는 지조는 만용일 뿐이라. 거기다 이백 년간
지속되어온 구파일방의 암묵적 밀약까지... 뭔지 몰라도 대단한 무엇이 꿈틀거리는 듯하군."
감흥없는 맥천이 혼잣말에 잠시 편지를 내려다보던 하운이 두 번째 종이를 펼치려다 어쩐지 손끝이 떨
려서 오른편의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왠지 모를 불안감.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감.
'뭐지?'
하운이 알 수 없는 행동에 맥천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재촉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런 기억이...'
그렇다. 이렇게 떨렸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불안했던 순간이 있었다. 함께했던 이는 달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때 동석인은 이렇게 말했다.
"왜? 겁나는 거야?"
"..."
"뭐라고 했나?"
느닷없는 하운의 속삭임에 맥천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오, 혼잣말이오, 아, 혼잣말은 아니구나."
횡설수설하는 하운의 태도가 이상했지만 이번에도 맥천은 넘어갔다.
아무래도 저 착한 청년은 개방방주의 초라하다면 초라한 최후에 많은 충격을 받은 모양인가 보다.
'후~'
편지 한 장을 펴는데 왜 이리 힘이 드는 건지.
맥천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작은 숨 호흡으로 마음을 다잡은 하운이 어금니를 살짝 물고 두 번째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침묵.
"뭐하는 건가?"
기다리다 지친 맥천이 끝내 불만을 토로했다.
감상에 빠지는건 좋지만 같이 있는 사람도 생각을 해줘야 할 거 아닌가.
"아..."
순간적으로 눈이 풀려버린 하운이 고개를 돌려 초라한 관을 바라보았다.
"이봐!"
답답한 마음에 봉서를 빼앗아 들을 요량으로 맥천이 나섰다.
그때 하운의 입이 작게 열렸다.
개방방주 이청천-정월 초하루.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침묵. 굳게 입을 닫은 하운인데 대조적으로 그의 어깨는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
었다.
"그게 다인건가?"
예상했던 바다. 개방방주는 월광살무라는 살인초식을 사용하는 율법자에게 청부 살해당했을 터였다. 그
걸 확인하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란 말이다.
만약 이게 다라면 정말이지 맥 풀리는 순간이 아닐 수 없을 터.
"가만?"
뭐라고 더 따지려던 맥천이 순간 눈을 치떴다.
"그거 충부서라는 말인데... 율법자가 두고 갔단 말인가? 대체 왜?"
처연한 눈으로 관을 응시하던 하운이 상채를 들을 맥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 종이를 맥천의 앞에 불쑥 내밀었다.
"내용은 단 한 줄 뿐이로군, '개방방주 이청천- 정월 초하루', 그리고 뭐야 이건!"
편지를 낚아챈 맥천이 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곳엔 직인이 찍혀있었다.
아홉 마리의 용이 비상하는 모양의 직인이.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용두괴장이로군."
편지에서 눈을 땐 맥천이 무거운 음성을 흘렸다.
용두괴장. 천년개방의 장문직인.
청부자는 다름 아닌 개방방주 본인이었던 거다.
"설명해 주겠나?"
맥천이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그러나 하운의 침묵은 심연까지 이른 터라 좀처럼 깨어날 것
같지 않았다.
"내 참...."
털퍼덕 주저않은 맥천이 머리를 짚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때 영원처럼 닫혀 있을 것만 같았던 하운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이건 고발장입니다. 목숨을 담보로 한 고발장인 셈이지요. 아마 도 이토록 슬프고 절박한 고발장은 전
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것입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갑자기 고발장은 또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고개를 든 맥천에게 하운의 미소는 너무도 처연하여 감히 마주할 수 없었다. 슬그머니 눈을 돌린 그가
선한 도사의 잔영을 머릿속에서 애써 지우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뭐가 많이 알고 있군, 자네들은 말이야."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지했던 것이지요, 당신들 십장생이 말입니다."
듣기에 따라서 형제들 전체를 모욕하는 발언 그러나 맥천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운의 말에 깃든 묘한 설득력도 설득력이거니와 뒤따를 다음 말이 기대되어서였다.
이 정도의 호언이라면 근거가 있을터
"한심하기까지 하군요. 그토록 원했던 물건이 어떤 형태인지, 무슨 내용이 수록되었는지 조사해 볼 생
각을 하지 못했소이까? 십단금이라는 미끼를 던지면서까지 모추를 끌어들이고, 확이되지도 않은 ㅅ문에
이끌려 일 년이 넘도록 도박장에 잠입해서 동태를 살필 정성이라면 말이오."
"비천혈서를 일컬음인가?"
최소한 유추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라며 말을 맺는 하운의 어깨 위로 맥천의 무거운 음성이 내려앉았
다. 그저 앉은 정도가 아니라 짓누른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의 무게를 가진 반문이.
"그래 우리가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이상과 절대적인 기준
이 있다. 우리의 경우는 노태상의 말씀이 그것이고, 내용 따윈 알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기에 관심도 두
지 않았다. 지금도 후회는 없고."
드디어 십장생의 배후가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노태상.'
잠시 맥천을 내려다보던 하운이 손에 든 편지에 약간의 힘을 실었다. 이대로 조금의 압력을 더 가한다
면 바스러질 녀석인데.
"단 한 줄과 직인 하나밖에 없는 어찌 보면 허무하기까지 한 편지.. 이것이 비천혈서의 핵이라면 믿겠
소?"
"뭐라고?"
대경하여 입을 떡 벌린 맥천에게 하운이 눈을 반짝 빛냈다.
"이렇게 합시다. 내가 비천혈서에 관해 명확한 근거를 가진 이야기하겠소."
"그 말뜻은 내게도 뭔가를 바란다는 건데?"
맥천의 눈도 상큼 빛을 발햇다. 말은 그렇지만 누가 있어 비천혈서에 관한 진실에 담담할 수 있을까 평
생을 바쳐 그것을 찾아다닌 그의 입장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을터.
"대단한 건 아니오. 한가지 질문에 답을 해주시면 되오."
"맞교환이라?"
턱을 문지르던 맥천이 몸을 틀었다. 워낙 단호한 자세라 제안한 이가 다 무안해질 지경이었다.
"됐네 이제 와서 비천혈서가 뭔지 알아봐야 무슨 소용일까.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동주는 끝났다.
내가 할 일은 자네를 죽이고 봉서 를 가져가는 거라는걸 벌 써 잊은 건 아니겠지?"
"후후......"
나름대로 차가운 응대였는데 하운의 씁쓸한 미소는 맥천의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순식간에 풀어버렸다.
"여유라는 건가?"
"그럴 정도로 완성되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소이다. 그럼 이건 어떻소? 일단 비천혈서에 관한 얘기
를 듣고 나의 질문을 들어보시오. 대답하기 싫으면 안해도 좋소이다."
"........?"
맥천의 의아한 표정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운이 담담한 어조로 비천혈서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울러 율법자에 관해서도, 그리고 묻혀졌던 명고에 대해서도,
"그럴 수가......."
하운의 이야기가 끝나자 맥천이 고개를 흔들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비천혈서, 생각보다 무지막지한 파
괴력을 가진 물건이 아닌가. 만약 하운의 추리대로라면 단 열 장의 종이만으로 수백 년간 쌓아놓은 구
파의 명예를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끌어내릴수 있다는 거다.
"이 한 장의 청부서로 반론조차 제기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 어떠한 변명도 이 편지르 ㄹ막을 수
없지요."
"크크크...."
너무 놀라 멍청하게 서 있던 맥천이 입이 비틀리며 조금씩 웃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작은 웃음소리는 어느새 광소로 바뀌었고 작은 석실은 맥천이 터뜨리는 소음으로 가득 찼으나 하운은
일절의 동요도 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그래 그랬었어. 그래서 태상께서 ... 가만?"
숨길수 없는 탐욕을 드러내던 맥천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이런 얘기들을 왜 내게 하는 건가? 자네의 신분상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또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알 것 아닌가?"
아니면 필승의 자신이 있다거나.
그러나 하운으 쓸데없는 자신감으로 상대방을 낮춰잡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오만은 오래전에 잊어버렸
다.
"아까 당신이 했던 말처럼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맥천의 질문을 가볍게 일축한 하운이 고개를 돌려 반쯤 열린 석문 사이를 쳐다보았다.
"저 월광살무라는 검식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소?"
급작스런 화제 전환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맥천에게 하운이 피식 웃어 보였다.
뭐 그리 놀랄 것 있느냐는 투로.
"비록 오래 살지도 못했고, 아직 겪어보지 무학이 산재해 있다는 정도는 잘 알 지만 저 검식을 처음 대
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바요."
"그럴 만도 하지."
감상 어린 하운의 눈동자에 이끌렸는지 맥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 누가 있어 저런 검식에 감탄하지 않을까? 어떻게 치장하더라도 검이란 본시 사람을 죽이는 수단일진
에 저 검식을 보노라면 저도 모르게 예가 떠오르니."
"지당한 말씀이오."
맥천의 대꾸에 고개를 끄덕이며 하운이 말을 이었다.
"강호상에 그늘처럼 숨겨져 있는 천고의 검식. 강호상에 알려지지않은 천고의 노고수... 어쩐지 옛이야
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처연하지 않을까요?"
"흐음..."
분위기에 완전히 빠져 버린 맥천이 하운의 속삭임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세월을 반추하며 묵묵히 검을 들고 대상조차 불분명한 세월에 천고의 검식을 새겨 넣는 백발의 검수."
마냥 상념에 빠져 있는듯 보였지만 이 순간 하운의 눈은 상큼 빛나고 있었다.
입에서 나오는 구전동화식의 이야기와 전혀다른 눈망울은 먹이를 쫓는 그것이었지만 눈을 감고 있었기
에 맥천으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흘러가 버린 과거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할 일들과 사건이었기에 덮어두지도, 외면
하지도, 그렇다고 잊어버릴 수도 없는 시간. 그렇기에 시리도록 밝은 달이 솟아오르면 습관처럼 녹슨
칼을 움켜쥐고 정원에 나서는 백발의 검수와 그를 지ㅕ보는 제자들의 착잡함은 차가운 달빛과 엉기고
성겨 뿌연 안개가 되어버렸겠지요."
"맞아, 노태상께서는 그렇게 검을 휘두르셨네. 단 한점의 온기도 없는 얼굴로, 무엇을 용서하지 못하는
건지는 몰라도 말이야."
이것이다!
이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 지루하다면 지루한 가공 설화를 늘어놓은 것이다.
쾌재에 젖은 하운과 달리 맥천이 퍼뜨리는 상념의 물결은 점점거세졌다.
"그 검식을 보면서 처음에는 자네처럼 놀랐었지. 오싹했고, 경이로웠어. 그러데 말이야., 시간이 지날
수록 눈물이 나더란 말이지. 알 수 없는 서러움 같은게 밀려오는 거야."
알아낼 것을 알아내서일까. 맥천의 넋두리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던 하운이 품속에 손을 넣어 봉서를 확
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마주하고 말았다.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맥천의 음영 진 얼굴을.
"대부분 비슷했지만 한 가지 틀린 가정이 있었네. 노검수를 지켜봤던 이들은 결코 제자가 아니었어. 아
니, 영원히 제자가 될 수 없는 시동들이었다는 거지."
'이런....'
맥천의 회상은 하운의 말재간에 의한 결과가 아니어싸. 처음부터 그의 의중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던 거다.
나름대로 괜찮은 유도 심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얘기들을 내게 해준 거요?"
방금 전 맥천의 질문과 꼭 같은 질문.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전혀달랐다.
"자네를 죽여야 할 이유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
정이라는 이름의 미련을 말소하기 위하여....
간단명료한 맥천의 응대에 어쩐지 홀가분해진 하운이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이곳을 나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듯하오."
십장생의 배후는 다름 아닌 율법자이거나 최소한 그들과 관련된 인물이다!
일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어서 이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려야만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분위기
가 서서히 일변하고 있는 눈앞의 인물을 넘어야 할 것이다.
"더이상 머뭇거릴 것 있소이까? 어서 시작합시다!"
쿠르르!
주먹을 꾹쥐고 공력을 불러일으키자 장포가 펄럭이며 하운의 두 눈이 형형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좋아, 좋아!"
기세의 일변. 지금까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맥천의 몸 전체에서 자욱한 어떤것이 흘러나
오기 시작했다.
살기라는 이름의 분위기가.
스릉-
허리에서 칼을 꺼내든 하운이 중극으로 검극을 이동시키자 맥천도 양손을 펴서 가슴까지 끌어올렸다.
"여러 형제들 가운데에서도 어찌 보면 자질이 가장 떨어진건 나였지.
건암스스로는 자신이 가장 어리버리하다고 여겼는지 몰라도 단지 순발력이 뒤처진다고 해서 무학을 습
득하는 재능이 떨어지는건 아니거든."
닿을 수 없는 세월에의 아쉬움일까. 맥천의 눈은 하운을 지나 돌아 가지못할 어느 시절을 응시하고 있
었다. 결코 잡지 못함을 알기에 차마 내밀지는 못했지만 꼭 한 번은 다시 하고픈 어느 날의 공기와 웃
음소리. 그리고 땀방울들.
'건암이라...'
우연일지 모르지만 십장생 가운데 유일하게 하운의 손에 사그라진 명호가 거론되었고, 사건의 당사자는
짧은 회상에 젖어들었다. 철벽처럼 단단했던 무인과의 일전이 새삼 떠올라 하운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
밀어 입술을 축였다.
그가 상대한 건암은 자질이 뒤쳐진다거나 하는 수준의 실력이 아니었으니까.
"몰랐던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감싸줬던 걸까. 나 때문에 진도가 막혀서 모두에게 사과라도 할라치면
다들 제 탓으로 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초점없는 시선이 한 지점으로 모이면서 맥천의 손에 천천히 어떤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심했지. 형제들의 발목은 잡지 말자고, 형제들에게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피해는 주지 말자
고, 형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노력하지 말자고, 주제 파악을 하기로 한거지."
내용만을 놓고 본다면 다분히 암울한 회의조의 독백인데 당사자의 눈은 뜨겁게 , 아니, 다소 사이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묘한 확신이 서린 투지라고나 할까.
"하여 형제들이 여러가지 무학을 습득하는 동안 난 결코 연무자엥 발을 딛지 않았다. 오로지 단 하나의
무공에 매달렸고 그것하나만을 파고들었지."
우웅- 우웅-
맥천의 손에 깃든 기운은 고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야생마처럼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형제들에겐 그저 기본 바탕 무학이었던 암영기. 난 이것에 승부수를 띄웠다."
파악!
주먹을 쥐어 손바닥에 흔들거리던 기운을 눌러 끈 맥천이 한숨처럼 마지막 말을 토했다.
"자네의 마지막에 부끄럽지 않은 동반자가 될 것이다."
중극으로 세운 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하운이 맥천의 장광설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저런 얘
기의 결과치고는 다소 맥 빠지는 결론이었기 때문일까.
"아아."
먼가 말하려다 고개를 한번 갸웃하고 검을 고쳐 잡은 하운이 일견 느긋한 어조로 맥천에게 응대했다.
어니까지나 응대로써의 응대를.
"그런 말은 내 품에서 편지를 취하고 나서 음미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운의 태연한 반응에 맥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이정도 분위기로 윽박지를 사내였다면 애초에 상대하지 않았을 터였으니까.
"그래... 가볼까?"
조용히 대답하고 가슴까지 모았던 양손을 차분히 내리며 맥천이 한발 뒤로 물러섰다.
퍽!
알 수 없는 기운의 접근에 살짝 몸을 틀자 하운의 옆으로 묵직한 기운이 스쳐 지나가 딱딱한 벽면에 부
딪쳤다.
'침투경....'
평소의 신색을 유지하고 있지만 사실 하운은 놀란 가슴을 겨우 추스려야만 했다. 개방의 방주가 잠든
이곳의 재질은 전설상의 만년한옥같은 명품까지도 아니더라도 꽤나 단단한 것이라 일반적인 돌들과는
차원을 달리함이 분명했다.
한마디로 일반적인 장력으로는 작은 흠집 정도 내는 게 고작이라는 거다. 그런데 맥천이 발출한 장력은
그런 벽면을 으스러뜨려 버렸다. 충격을 가해 닿는 면을 훼손시킨 것이 아니라 잔 먼지 하나 없이 으깨
어 파고들었단 말이다.
이렇게 되면 단 한 번의 밋맞음이라도 허용하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빗맞음 자체가 승부로 연결되어질 상황이기에 하운은 가슴까지 치켜든 검이 더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묘하게도 맥천은 한번의 공세 이후로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순간 하운의 머리에 두 사내가 떠올랐다. 너무도 보고 싶은 둘의 얼굴이
물론 이럴때 장추삼이라면 주저 없이 치고 나갔을 터였다.
그럼 북궁단야라면?
하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하핫!"
퉁하고 튕겨나간 하운이 중극으로 향했던 검을 앞으로 쭉 뻗으려 했다.
번뜩!
또다시 무언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아 공격을 중단한 하운이 급급히 허공에서 몸을 틀어 기운을 피해냈
다.
퍽!
예의 파열음이 벽면을 타고 이리저리 떠돌면서 메아리 쳤지만 하운은 그것에 신경을 쓸 겨를조차 없었
다.
츠츠-
또 다른 기운의 엄습, 문제는 어디에 어떠게 날아오는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데 있었다.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가늠 자체가 불가능했다.
'헉!'
빠르게 반 바퀴 돌며 또 하나의 기운을 피한 하운이 전면에 시선을 고정시켰지만 맥천은 처음부터 그대
로 양손을 조금 치켜든 상태였다.
이점이야말로 맥천의 무서움, 맥천만의 암영기가 가진 최대 강점인 것이다. 그의 장력은 예비 동작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장력 자체에도 어떠한 소리가 동반외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방비도 불가능한 상태.
꿀꺼!
마른침을 삼키고 하운이 슬며시 옆으로 신형을 이동시켰다.
츠츠-
기다리기로 한듯 다가오는 어두운 기운
퍽!
또 한번 임기응변으로 몸을 피하긴 했지만 이대로라면 피하다가 볼장다볼 일이다.
"헉헉!"
입술을 앙다물어 더운 김의 방출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지만 이미 하운은 많이 지쳐 있었다. 네 번의
장력이었고 단 한차례도 격중되지도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 충분히 피곤한 장력.
'차라리 보이기라도 하면 마음껏 싸울 텐데.'
인간이 품는 가장 큰 공포는 미지에의 공포라던가.
"이런, 이런 벌써 지친건 아니겠지?"
맥천의 입술이 작게 달싹 거렸다. 승리자의 그것 같은 쾌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신적으로 피곤에 절어
있는 하운이 듣기에 무척이나 기분 상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하운은 이렇게 화답했다.
"아니, 지쳤소"
"음?"
의외의 대답에 담담하던 맥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쳤다니? 벌써 포기인 건가? 허허 좋네 그렇다면 잠시의 정리를 생각해서 고통없이 보내주도
록......"
껄껄 웃는 맥천의 얼굴을 보던 하운이 혀로 입술을 가볍게 축이고 어깨를 쭉 펴며 마주 웃어주었다.
"내가 지친게 그리도 좋소이까?"
"뭐?"
이 돌발적인 반문에 맥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에 반해 하운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몰랐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처음부터 비틀거리는 건데."
차가운 눈빛으로 하운의 말을 듣던 맥천이 입술을 비틀었다.
"흐흐흐.. 강호삼성 가운데 유성은 검을 잘쓰는 예의 바른 도사라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입심도 대단하
군."
"누구 옆에 있다 보면 다 그렇게 되더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근묵자흑.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진지하게 빈정거리는 하운을 쏘아보던 맥천이 손바닥을 살짝 뒤집었다.
슥!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위력의 장풍이 하운에게 날아들었다.
"어이쿠, 기분이 좋다더니 말짱 거짓이었소? 이리 화를 낼 것까진 없지 않소?"
슬쩍 피하며 여전히 농을 흘리는 그였지만 마음만은 무거웠다. 예정된 도발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까칠한 대꾸였기에 어떤 식으로든 동요를 보일 줄 알았는데 잠자는 뱀의 코털을 건드린 형국 아닌가.
이른바 도발 면역이라고나 할까.
하운의 빈정거림은 맥천에게 남아있던 인연이라는 이름의 끈을 끊어버리기에 충분했고 대가는 곧바로
찾아왔다.
츠츠-
난데없이 날아든 두 발의 장력은 미쳐 전투태세로의 전환이 완벽하지 않았던하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
기에 충분했고 어찌어찌 하나는 이화접목의 수법을 빌어 흘려냈지만 다른 하난를 어찌할 여유까지는 없
었다.
퍽!
그 와중에도 겨우 몸을 틀어 정타는 피했지만 하운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장력의 무게는 나름대로 진
중한 것이어서 그는 움찔 몸을 떨어야 했다.
츠츠-
다시 날아오는 장력, 순간적으로 치미는 구토기를 겨우 수습하는 하운은 그것이 하나인지 둘인지도 분
간키 어려웠다.
퍽!
본능적으로 몸을 돌린 하운이었는데 이번에는 고작해서 정면을 주지 않은 정도였다.
등판을 정확하게 격타당한 그가 굽혀지는 무릎에 우뚝힘을 실어 잰 튕김으로 권역을 벗어났지만 맥천에
게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숨긴다는게 안쓰러울 정도로 티가나는 하체의 경력과 눈에 띄게 기복을 보이는 가슴의 파도.
또 한방의 장력을 겨우 피해낸 하운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이대로라면 필패다. 어떻게 치명타는 피한다고 쳐도 간간이 스치는 빈타들의 누적되는 충격은 결코 무
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