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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jtr28114
8강. 다섯째 날, 궁창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창 1:20-23)
창 1:20-2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 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 이야기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실을 창조 사역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창조 기사가 갈라내고 채우고 안식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사역을 보면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천지 속에 만물을 가득 채웠다는 의미입니다.
이 일을 누가 하셨는가 하면 말씀이신 하나님이 하십니다.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는, 집을 짓고 그 안에 살림살이들을 가득 채우는 것과도 같습니다.
집을 짓고 나면 살림살이들을 가득 채우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집들이를 하고 온 가족이 모여서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을 창조의 세 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텀은, 갈라내는 것이고,
둘째 텀은, 채우는 것이고,
셋째 텀은, 안식하는 것입니다.
첫째 텀인,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갈라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둘째 텀인,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셋째 텀인, 일곱째 날은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는 것입니다.
첫째 텀은,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입니다.
첫째 날은, 빛과 어둠을 갈라내고,
둘째 날은, 궁창 위와 궁창 아래로 갈라내고,
셋째 날은, 바다와 땅을 갈라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을 분리하셨습니다.
이 일을 십자가로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과거적 사역을 말합니다.
둘째 텀은,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입니다.
넷째 날은, 하늘에 해와 달과 별로 채우시고,
다섯째 날은, 궁창 위는 각종 새들로 채우시고 바다에는 각종 물고기들로 채우십니다.
여섯째 날은, 땅에서 살아갈 짐승과 하늘에서 살아갈 사람을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성령으로 거듭난 하늘에 속한 빛의 아들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이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하고 교회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시고,
찾아냄을 당한 자들을 교회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에게 하늘의 것으로 채우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를 예수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셋째 텀은, 일곱째 날로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안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천년 왕국에서 안식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창조의 첫째 날부터 마지막 일곱째 날까지는 모두가 예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어가는 구속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 하시고 승천 하신 후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장차 하늘나라에서 살아갈 백성들을 양육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 한 백성들을 광야 40년 동안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백성으로 양육하신 것과 같습니다.
양육의 때가 차면 이 세상의 이동식 텐트 생활 하던 것을 다 마치고 나면 약속의 땅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집을 짓고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비로소 창세전에 언약하신 모든 일들이 마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이 세상이라는 역사 속에서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느 시대나 항상 계셨습니다.
이는 항상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전에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지켜주는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장차는, 죄와 사망의 나라로부터 빼내 가실 것입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하신 “전에는” 사역입니다.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부활 후 성령으로 오셔서 하는 “이제는” 사역입니다.
일곱 째 날은 재림 하여서 하시는 예수님의 “장차의” 사역입니다.
첫째 날, “빛이 있으라고 명하신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흑암이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날, “궁창을 만들어서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을 가르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늘 백성과 땅 백성으로 갈라내신 것을 뜻합니다.
셋째 날, “바다에서 뭍을 끄집어 낸 것”은,
예수님이 무덤 속에 들어가서 무덤 속에 있던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내신 것을 의미합니다.
넷째 날, “해와 달을 만들어서 땅을 비취게 하고 주관케 하신 것”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이 세상에 교회와 성도가 생겨나서 세상에 빛으로 존재케 된 것을 말합니다.
앞선 시간 첫째 텀과 둘째 텀은 서로 짝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날은 넷째 날과 짝이고,
둘째 날은 다섯째 날과 짝이고,
셋째 날은 여섯째 날과 짝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날 빛이 있으라는, 넷째 날에는 해와 달과 별로 나타났고,
둘째 날 궁창 위와 궁창 아래로 갈라짐은, 다섯째 날 궁창 위의 새들과 궁창 아래 바다에 물고기들을 만드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오늘은 다섯째 날을 살펴봅니다.
다섯째 날은 궁창에는 새들로 채우시고,
바다에는 물고기로 채우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궁창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번성케 하고 충만케 하는 일 속에도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궁창 위와 바다는 서로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궁창은 하늘에 속하였고, 바다는 땅에 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궁창에 살아갈 생명과 바다에 살아갈 생명을 만드십니다.
날개가 달린 새들은 하늘의 궁창에 날게 하셨고,
날개가 없는 고기들은 바다에 살게 하였습니다.
날개가 있고 없고 에 따라서 살아가는 곳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궁창 위 하늘을 천국이라고 하고, 바다를 지옥이라고 합시다.
그럼 날개가 있는 하늘을 나는 새들은 천국의 백성이 되고,
날개가 없이 물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들은 지옥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해석이 무리한 해석인지,
아니면 이렇게 영적으로 해석을 해야 되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우리가 성경을 볼 때 항상 두 가지 해석을 하여야 한다고 배워 왔습니다.
첫째는 교훈적인 의미에서의 문자적 해석이고,
둘째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로 이해하는 영적 해석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언제 왜 하셨습니까?
이는 예수님 자신을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 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은 어렵도다”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떠나 갈 때 하셨습니다.
떠나간 사람들은 예수님이 “내가 하늘로서 온 산 떡이고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시자 사람들은 “말 같지 않는 소리 하지 말라 우리가 너를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을 다 아는데 무슨 망발을 하느냐” 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갈래”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서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온데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히니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육은 무엇이고, 영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본 것은 육이고,
예수님이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영입니다.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보고서 떠나간 사람들은 육적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라는 영의 말씀을 하시자 알아듣지 못하고 걸림돌이 되어서 다 떠나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육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문자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니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 영생을 한다고 하신 말씀을 알아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끝까지 쫓아다녔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믿는 것을 영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자들은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성경은 문자적이면서 영적인 이야기입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비록 인간들이 사용하는 문자로 기록을 하였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을 담아 놓았습니다.
이를 축자영감설이라고 합니다.
말씀 하나 하나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 뜻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셔야지만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아래서 성경을 보았을 때 예수는 이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예수님이 바로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눈에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까 문자 속에 담겨진 영적인 비밀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눈에 비늘이 떨어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을 봅시다.
고후 3:13-18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바울은 구약의 모세의 율법은 수건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수건을 쓰고 성경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그 수건이 벗겨졌습니다.
아직도 수건을 쓰고 구약을 읽는 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예수그리스도에게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진다고 합니다.
수건이 벗겨지면 비로소 자유를 누리게 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모든 말씀을 예수그리스도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모든 일이나 사건들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로 해석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경의 진의를 올바로 깨닫게 되고 영적으로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고 합니다.
문자적 해석은 역사적 사실만 이해를 하지만,
영적 해석은 역사적 사실 속에 담아 놓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차적으로는 문자적 해석을 하되 거기서 머물지 말고 영적 해석까지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창조 이야기를 영적 해석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였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첫째 날부터 넷째 날까지 모든 일을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럼 다섯째 날도 영적으로 해석을 하여야겠지요.
그냥 새를 창조하고 물고기를 창조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궁창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가지고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라는 영적인 어떤 이야기를 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궁창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로 살펴봅시다.
궁창을 하늘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늘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땅은 세상 나라를 상징합니다.
이러면 궁창 위를 나는 새는 언약의 후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하고,
바다 물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비언약의 백성들로서 이방인을 상징하게 됩니다.
새와 물고기는 날개가 있느냐 없느냐로 차별이 납니다.
날개가 있으면 새이고,
날개가 없으면 물고기입니다.
날개가 있는 새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날개가 없는 고기는 물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날개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날개”를 “카나프” 라고 합니다.
이는 성경 속에서는 다양한 용례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사야 24장 16절에서는 “땅 끝”으로도 사용하였고,
에스겔 16장 8절에서는 더러운 죄를 “덮어주는 옷자락”으로도 사용하였고,
말라기 4장 2절에서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으로도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에스겔 1장에서는 하늘의 네 생물들을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권능으로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 오실 때 독수리 날개로 업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독수라 날개가 카나프입니다.
또한 성막에 보면 지성소를 지키는 두 그룹이 날개를 펴서 법궤를 지키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두 그룹의 날개가 카나프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암탉이 자기 새끼들을 날개 아래로 보호하듯이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고자 오셨다고 하심으로 날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보호를 받는 것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호하심이 카나프 날개입니다.
성경에서 날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고 성령의 능력으로도 상징합니다.
이러면 새와 물고기의 영적 의미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고기를 만드셨습니다.
하나에게는 날개를 주어서 하늘을 날라고 하셨고,
다른 하나는 날개를 주지 않고 물속에서 살도록 하였습니다.
새와 고기를 의인화 하면 두 부류의 사람으로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바다에서 살아가는 고기들은 땅(육)에 속한 자들을 말하고,
궁창에서 살아가는 새들은 하늘(영)에 속한 자들을 말합니다.
땅에 속한 자들은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갑니다.
땅의 기운으로 사는 자는 죽어서 땅으로 가고,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서 땅으로부터 떠나 하늘로 올라가게 합니다.
넷째 날 하늘의 해와 달고 별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이 땅에 교회와 성도들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를 일컬어 하늘로부터 거듭났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를 일컬어 하늘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들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영적인 가치로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새들이 날개를 활짝 펴서 궁창 위를 날아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궁창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날개 짓을 하면서 땅을 벗어나서 궁창 위를 날아다니는 새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하늘에 가치로 살아가는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을 봅시다.
골 3:1-17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느냐?
그럼 땅에 것을 버리고 위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위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소속이 하늘에 속하였습니다.
장차 하늘로 가야 합니다.
비록 이 땅에 살지만 하늘에 것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땅에 것이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탐심이라고 합니다.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우린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에게 부르심을 입기 전에는 땅에 가치로 살아갔습니다.
땅 강아지처럼 땅의 기운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옛날처럼 땅에 가운으로 살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로 땅에서 비상하여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이전에는 육체가 이끄는 대로 육신의 소욕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성령의 소욕으로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날개를 얻은 새들이 살아가는 방식인 것입니다.
하늘의 날개를 받았으니 땅의 것을 먹고자 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먹으라고 합니다.
땅의 것에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생각들로 가득차서 땅에 것을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쉼을 얻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쫓기게 된다고 합니다.
쫓기니까 불평과 원망과 악한 말들을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났으니 예전처럼 살아서 되겠느냐,
이젠 하늘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옛날처럼 싸우려하지 말고,
누가 욕을 하더라고 옛날처럼 맞받아서 같이 욕하지 말고 이제는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두루미가 우물 안 개구리가 흉을 본다고 해서 우물 안으로 내려 와서 따따부따 변증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소속이 다르고 종자가 다르니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흔한 말로 멍멍이가 짖어도 경부선은 달린다고 하듯이 멍멍이가 짖는다고 해서 달리던 경부선 열차를 멈추어서 너 왜 짖느냐고 따지지 말고 그냥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상대 할 것을 상대 해야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이 땅에서 뭐라고 한다고 해서 시시콜콜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른이 어린 아이하고 싸우지 않듯이 하늘에 소속한 성도는 땅에 속한 사람들과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날개를 단 새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하늘과 땅을 대조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늘을 신령한 세계로 말하고,
바다는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늘에 올라가 보니까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땅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 위를 운행을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운행하시는 곳을 수면 위라고 합니다.
수면 위라는 말은 바다 위라는 뜻입니다.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땅을 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악 된 세상이 바로 바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나오는 적그리스도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온다는 것은 바다는 짐승이 사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짐승의 혼은 아래로 내려가고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는 신자와 불신자를 사람과 짐승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를 사람이라고 하고 불신자를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바다에 큰 물고기를 두셨습니다.
바다의 “큰 물고기”를 히브리어로 “탄닌”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사야 51장 9절에서는 “용”이라고 하고 27장 1절에서는 “뱀”이라고도 합니다.
큰 물고기는 문자적으로 보면 고래나 상어나 악어와 같은 몸집이 큰 동물들을 말합니다.
영적으로는 사단과 그 세력들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봅시다.
계 13:1-18절.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 된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 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사도 요한이 가만히 보니까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이 이 짐승에게 권세를 줍니다.
용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참람 된 말을 하고 하나님을 훼방하고 그에게 속한 성도들을 핍박하는 일을 합니다.
용은 옛 뱀 마귀 사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사단으로부터 권세를 받은 적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장차 일어날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땅에서 또 다른 짐승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이 짐승은 앞에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인 적그리스도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경배하게 합니다.
만약에 경배하지 않으면 몇이든 다 죽이는 것입니다.
이 짐승은 적그리스도와 같은 성격을 가진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잘 보시면 용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있습니다.
용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사단의 삼위일체를 뜻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은 성부 하나님을 모방하고 있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예수그리스도를 모방하고 있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주의 종들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하늘을 나는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신령한 세계를 상징하고,
바다는 타락한 세계를 상징합니다.
이로 보건데 바다의 큰 고기와 생물들은 마귀와 그의 세력들을 뜻합니다.
이러면 두 그림이 그려집니다.
하늘에는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을 상징하는 새들이 번성해서 날아다니고,
바다에는 사단에게 속한 백성들을 상징하는 물고기들이 번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들을 번성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창 1:20-2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 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하나님은 왜 마귀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동시에 번성케 하셨을까요?
이는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마귀의 세력들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후손과 비언약의 후손이 공존하면서 언약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치는데 양의 무리 속에 염소를 둡니다.
왜 그럴까요?
양을 치는데 염소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들에서 방목을 할 때는 양과 염소를 함께 있게 하였다가 저녁이 되면 양과 염소를 갈라내서 각자의 우리에 둔다고 합니다.
목동들의 이야기를 빌리면 양들은 게을러서 먹고 나면 존다고 합니다.
그럼 병든다고 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염소를 풀어서 양들을 들이 받게 하여서 도망 다니게 한다고 합니다.
양들은 염소를 피해서 도망을 다니면서 소화를 시키고 체력도 키워가고 튼튼해진다고 합니다.
염소가 많이 괴롭힐수록 양은 강건해진다고 합니다.
이건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학대가 심할수록 더욱더 번성해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좋은 신앙은 고난 속에서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을 풀어서 경건한 욥을 시험하듯이 성도들을 시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배부르고 편하면 하나님을 떠났고 힘들고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가까이 찾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의 세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훈련케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속에 하나님께 속한 자와 사단에게 속한 자들을 두셨습니다.
이 둘은 모두가 정한 때까지 번성하고 충만해 갑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오시면 갈라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까지는 서로가 대적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게 됩니다.
아담의 집안 속에 가인과 아벨을 두셨고,
노아의 집안 속에 셈과 함을 두셨고,
아브라함 집안 속에 이스마엘과 이삭을 두셨고,
이삭의 집안 속에 에서와 야곱을 두셨고,
야곱의 집안 속에 요셉과 그 형제들을 두셨습니다.
사라와 하갈,
라헬과 레아,
한나와 브닌나,
다윗과 사울,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
표면적 이스라엘과 이면적 이스라엘,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
육으로 난 자와 성령으로 난 자,
율법 아래 있는 자와 은혜 아래 있는 자,
옛 언약을 전하는 자와 새 언약을 전하는 자,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종과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종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항상 형제라고 하는 자들이 싸웠습니다.
말이 싸움이지 실상은 육에 속한 자들이 영에 속한 자들을 일방적으로 당합니다.
유대교가 기독교를 핍박하고,
천주교가 개신교를 핍박하고,
인본주의가 신본주의를 핍박을 합니다.
신학적인 이념에서도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하는 칼빈주의와 인간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알미니안 주의가 싸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실 때 네 후손이 “하늘에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 같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에 별과 같은 후손은 약속으로 난 이삭의 계열”이고,
“바다의 모래 같은 후손은 육으로 난 이스마엘의 계통”을 말합니다.
이 둘이 서로 적대적인 원수의 관계로서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어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의 후손과 이스마엘의 후손을 동일하게 12 방백으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집안에 약속으로 난 이삭과 육으로 난 이스마엘이 있었듯이,
지금도 교회 안에는 육(세상)에 속한 자와 영(하늘)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양과 염소처럼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듯이 육에 속한 자들이 영에 속한 자들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양과 염소를 기질 자체가 다릅니다.
양은 싸움을 싫어하고, 염소를 싸우길 좋아합니다.
영적 성도는 양의 기질로 살아가고, 육적 신자는 염소의 기질로 살아갑니다.
창조 시부터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 간에는 항상 전쟁이 있어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뱀과 아담으로 나타났고, 인류 역사 속에서는 가인과 아벨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집안에 형제 싸움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창 21:8-13절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젓을 떼는 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아브라함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차 일어날 일로 큰 근심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장차 큰 민족이 되어서 싸우게 될 것을 보고서 근심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 후손도 번성케 하셨고, 이삭의 후손도 번성케 하십니다.
이것이 이 시대 이스라엘과 이슬람권의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의 후손과 비언약의 후손 간에 일어날 전쟁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표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믿음과 행위의 싸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치 초대교회 율법의 의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와 같은 것입니다.
이 시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자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인협동론입니다.
신인협동론이란? 구원은 인간의 반응의 결과로 주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도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알미니안 주의라고 합니다.
알미니안 주의의 사고는 모든 신앙의 주체를 인간이 행사하는 것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를 동원해서 순종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창세전 언약의 예정론을 전하다 보면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짜증을 내는 것을 봅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성격적 근거로 반박을 하는데 모두가 인간 입장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예수는 모두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라는 이름 자체가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뭔가요?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에요.
자기 백성만 예수를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봅시다.
요 10:3-15절.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이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지요.
자기 양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양이 아니고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왜 이름을 부른다고 합니까?
이름이란? 소유를 말하고 소속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하였다는 것은 어린 양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봅시다.
요 6:38-44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살리느냐 하면 예수를 믿게 해서 살려낸다고 합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떠나갑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네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다 아는데,
어떻게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너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을 할 수가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떠나가는 이들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의 껍데기만 본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니까 예수가 요셉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 떠나간 것입니다.
다시 후반부를 봅시다.
63-71절.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 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걸려 넘어져서 떠나갑니다.
이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가려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이것은 너희가 잘나서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오게 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라도 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너희 중에 다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아니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가룟 유다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주십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을 봅시다.
계 13:6-9절.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장차 적그리스도가 엄청난 박해를 가할 것입니다.
그러자 모두가 적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를 합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경배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죽음으로 신앙을 지켜냅니다.
잘 보세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데,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지 않은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이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다는 것은 어린 양의 것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할 것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이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4-7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 하셨습니다.
누구 안에서 선택했다고 합니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창세전에 예정된 것을 믿지 않습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구원한다는 것이 뭐가 그리 화가 납니까?
그게 왜 싫은 것입니까?
꼭 자기가 결정을 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구원을 하고 싶어도 우리가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신인협동론이라고 합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예수를 믿고 안 믿고의 믿음의 주체를 자기가 행사한다고 합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을 구원한다는데 그게 그리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구원하지 않습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예수 라는 이름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자기 백성만 구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염소를 양 만들고자 오지 않았습니다.
창조시에 양은 양으로 창조가 되었고 염소는 염소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염소가 양이 되고 양이 염소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양과 염소가 모두가 섞여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양과 염소를 분리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유유상종이라 같은 종끼리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정론이 좋은 사람은 예정론을 말하는 사람끼리 모이고,
신인협동론이 좋은 사람은 신입협동론을 말하는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결국 자기 안에 어떤 증거를 가지고 있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얻은 구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각자의 신앙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에 아멘 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란? 자기 주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인간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양과 염소처럼 신자와 불신자를 예정하였다고 하면 싫어하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창세전에 천국 갈 자와 지옥에 갈 자가 정해져 있다고 한다면 누가 예수를 믿겠느냐? 고 주장합니다.
예정된 사람이라면 가만히 있어도 구원이 될 것이고,
예정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목자가 잃은 양을 찾는 것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린 잃어버려진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잃어버리진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자가 찾아 왔습니다.
목자가 어깨에 울러 메고 천국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양이 무슨 일을 했나요?
양이 목자를 찾아 갔나요?
아니면 목자에게 전화를 해서 오라고 했나요?
양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목자가 다 하셨습니다.
이를 은혜라고 합니다.
목자가 왜 양을 찾아 갑니까?
자기 양이기 때문에 찾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원래 자기 소유였는데 잠깐 동안 버려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주인은 자기 양이기 때문에 산을 넘어 물을 건너 찾으러 간 것입니다.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몸에 상처를 입어 가면서 찾아 간 것입니다.
찾고 나서 얼마나 기쁘면 잔치를 벌리겠습니까?
왜 구원을 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일컬어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목자가 찾아 와도 내가 안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오케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이 오케이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양이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목자를 받아 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의 주체가 누가 됩니까?
목자인가요?
양인가요?
양입니다.
이걸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인간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이 된다고 하면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은 너무 불쌍하지 않느냐?
그건 하나님의 사랑에 맞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 모두가 자기 입장에서 보니까 그런 것입니다.
창조는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 하시고 난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빛과 어둠으로 갈라내기 위해서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빛에 속한 자로 예정을 했고, 다른 하나는 어둠에 속한 자로 예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일을 하시겠다고 창세전에 작정을 하신 것입니다.
그 작정에 따라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와 녹명 되지 않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감독이 영화를 찍기 위해서 배우를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배우는 선한 역할로 캐스팅을 하고, 어떤 배우는 악당으로 캐스팅을 합니다.
각자 맡은 배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감독이 원하는 영화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감독은 배우의 입장을 고려치 않아요.
오로지 시나리오를 어떻게 하면 잘 화면에 담아낼까를 고민을 합니다.
악당의 역할을 맞은 사람이 나는 왜 악당이냐고 따지만 안 되어요.
그건 영화에 필요해서 그런 배역을 맞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에서가 불쌍해서 어쩌나,
에서가 무슨 잘못을 해서 지옥을 가나,
이건 불공평하다, 라고 따집니다.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주가 하는 일을 시시비비한단 말입니까?
시시비비한다는 말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만 구원을 한다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따질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드라마를 찍는데 에서와 야곱이 필요해서 만드셨어요.
하나님이 지옥도 만들고 천국도 만들었어요.
그래서 지옥에 갈 사람과 천국에 갈 사람으로 나누어서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서 분리수거 하듯이 각자 갈라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을 예수 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보내서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을 갈라내는 일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걸 심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뜻대로 자기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는 것입니다.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왜 난 천한 그릇으로 만들었느냐고 따지만 안 되지요.
따지는 게 바로 죄라고 합니다.
기어코 자기는 맞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해야 직성이 풀립니까?
왜 하나님의 편에 서서 바라보지 않고 에서의 편에 서서 따집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예정론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그 은혜로 구원을 해 주시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건 자다가도 춤을 출 일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들이 천국에서 세세토록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도 고마워서 말이에요.
얼마나 감사하면 세세토록 찬양을 드리겠어요.
인간의 가치를 주장하는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절대로 이걸 이해하지 못해요.
이렇게 일하는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라고 합니다.
로봇이 아니라고 하니까 악한 것입니다.
로봇이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로봇이 아니라고 하니까 죄가 되는 것입니다.
로봇은 따지지 않아요.
주인이 입력시켜 놓은 대로 아멘으로 화답을 해요.
여러분이 로봇의 주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내가 입력한대로 움직이는 것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을 원하십니까?
자기가 입력한 것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 맘대로 움직이면 고치겠지요.
자기 맘대로 움직이면 어 이놈 바이러스를 먹었나 보네 라고 하면서 수리 할 것입니다.
지금 죄인들이 그러해요.
처음 창조된 인간들이 아니에요.
죄라는 바이러스를 먹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인이 찾아 왔는데도,
자기가 맞아들일지 거절할지 결정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주어도 내가 반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응해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이걸 믿음이라고 하고 있어요.
우리 더러 결정을 하라고 하니까 인간들 쪽에서 들으면 엄청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불순종입니다.
이게 죄에요.
죄가 자기 생각으로 판단을 하게 하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만 구원을 한다고 예정하신 일에 동의 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차라리 로봇이 되었으면 좋아요.
로봇은 자기 생각이 없어요.
주인이 입력시켜 놓은 것으로 움직여요.
이걸 순종이라고 합니다.
제가 과거에는 지독한 율법주의로 살았습니다.
율법주의가 바로 알미니안 사상이에요.
알미니안 사상은 신앙의 주체를 자기가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은혜를 주어도 내가 반응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도 내가 결정해서 얻게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뜻에 반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항상 내가 마음을 열어서 구원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러니까 창세전에 구원 받을 자와 유기 된 자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과거 율법주의로 살 때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열심히 행하였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내가 나를 믿고 있는 것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기쁨 아니라 내가 행한 것을 기쁨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기분이 좋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기분이 엉망인 것입니다.
이게 다메섹 이전의 바울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열심은 특심하고 흠이 없는데 마음이 곤고한 것입니다.
늘 내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짓눌리는 것입니다.
물론 남들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지요.
하지만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고 보니까 성경은 우리더러 무얼 하라는데 초점이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셨다는데 초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내가 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여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영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영접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주이진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게 기분 나쁜 게 아니고 엄청 감사해요.
왜 나의 동의도 없이 일하느냐고 따질 문제가 아니고 덩실덩실 춤을 추어야 할 일입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언약 하신대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언약하신 것을 역사 속에서 펼치신 결과로 주어진 것이지 우리가 따낸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먼저 언약을 심어 놓고 이루어 가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입고 보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너무도 초라한 것입니다.
내 속에 선이라곤 털끝만치도 없고 나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비로소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 하였는데,
이제는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으니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힘을 달라고 기도 했는데 이제는 긍휼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였다 하여도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무슨 일을 해도 내 자랑거리였고 내가 영광을 받았어요.
내가 대견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난 참으로 보잘 것이 없고 주님의 은혜만 커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일을 행하고 계심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깨달아지니까 나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둘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내 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나를 포기 할 수가 없어요.
여전히 내가 살아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꿈틀거려요.
그러면서 또 다른 나는 어떤 일을 앞에 두고서 나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뭔가 해야 하는데,
그 일을 주의 뜻대로 행하기에는 내가 너무도 부족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I can Do it” “난 할 수 있어 해 보자” 라고 하였는데,
이제는 주여 도와주세요!
주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도움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을 해도 이제는 그 일을 내가 했다고 여겨지지가 않고 모두 예수님이 도와주셔서 했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동일한 일을 했는데도 과거에는 내 자랑이었는데,
이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행함의 주체가 나였지만,
이제는 행함의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예정론을 말하는 성도들은 아무렇게나 막 사는 줄 알고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혹여 주변에 예정론을 잘못 이해하여서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산다고 해서 예정론이 틀린 것이 아니에요.
진짜 예정론을 아는 성도는 알미니안 주의자들보다 더 경건하고 더 열심을 내면서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제 주변에도 복음을 잘못 이해하여서 막살아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이런 자들은 복음을 자기 사욕을 쫓는데 악용하는 자들이에요.
신자라고 할 수 없어요.
저는 이런 자들을 거듭난 신자라고 보지 않아요.
예정 되었으니 막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거듭난 신자가 맺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를 이용하는 자들이지 예수님에게 붙잡힌 자들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용서 해 주었으니 막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 때문에 예정론이 틀린 것으로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자들에게 그건 복음을 가리는 것이라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건 가장 귀하고 좋은 복음인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다 예수를 믿더라는 예정론을 무너뜨리게 하는 마귀의 술책인 것입니다.
마귀가 자기의 일꾼들을 가지고 예정론이 마치 틀린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예정 된 것에 감사하지 않고 막살아도 된다고 하면서 육체의 소욕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너무 귀한 복음이다 보니까 마귀가 가짜들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가짜들이 더 설쳐대는 것입니다.
진짜보다 가짜들이 더 많아요.
그러다 보니 알미니안 주의자들 눈에는 예정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아무렇게 막 살아도 된다는 것으로 오해를 하여서 비판하는 것입니다.
제가 봐도 비판 받을 짓들을 하고 있어요.
열매로 나무를 알아요.
이건 속일 수가 없어요.
복음이 마음에 새겨진 성도들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미음에 새겨지지 않고 복음적 내용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자들은 입술로는 복음을 말하나 그 삶은 정반대로 반 복음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영지주의에요.
이 시대 영지주의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이것은 하나님이 스스로가 나는 복음에 합당치 않은 가짜라고 커밍아웃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은 몰라요.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 어찌 막 살 수가 있나요.
절대로 그럴 순 없어요.
온전하게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고자 해요.
그 안에 하나님의 선한 열심이 일을 해요.
때론 엉터리 짓을 해도 금새 이건 아니지 라고 회개하게 되어 있어요.
신앙은 날마다 죄와 싸우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자기 안에서 발호하는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싸움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들에게는 반드시 나타나는 본능적인 것입니다.
성령은 죄를 거부하고자 하는 반응을 나타내요.
본능적으로 방어기제를 발동을 해요.
그런데 우리 안에 또 다른 놈이 순수하게 응하지 않고 어깃장을 놓잖아요.
이 놈 때문에 때론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의 즐거움은 상실이 되고 성령의 탄식함이 일어나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린 한시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음을 또 다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할 자리는 은혜의 자리뿐입니다.
은혜의 자리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지 마세요.
금방 넘어져요.
신앙은 장담하는 것이 아니에요.
수많은 실패를 겪어가면서 왜 우리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만 주어지는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넘어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잘 났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되고,
실패하고 못 났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되면 하나님을 떠나고 잘못하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마귀를 제거해 달라고 합니다.
기도를 해도 사단아 물러가라고 합니다.
그럼 사단이 그래 알았어 하고 물러가던가요.
아니에요.
더욱 더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사단을 제거해 주시지 않아요.
반대로 사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도망가도록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마귀가 없으면 신앙생활 잘 할 것 같으세요..
아니에요.
그건 착각이에요.
역설적으로 신앙생활은 사단의 참소가 있을 때 잘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고난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신앙생활을 잘하면 상대적으로 마귀의 역사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가장 경건하게 살 때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당하였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도 욥의 신앙을 칭찬했어요.
그런데 가장 심한 시험을 당하였어요.
그래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많은 핍박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불같은 시험이 오거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지요.
그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제련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내가 약할 때 가장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되는 때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봅시다.
고후 12:7-10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은 엄청난 은혜를 입었습니다.
삼층천에도 다녀왔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몸에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를 사단의 가시라고 합니다.
바울이 세 번씩이나 자기 몸에 사단의 가시를 좀 빼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필요해서 두신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아픔이 무엇인지를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었으면 세 번씩이나 기도를 했다고 할까요.
바울이 세 번 기도 했다는 것은 이 대목 밖에 없어요.
그만큼 바울에게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의 몸에 둔 사단의 가시를 제거시켜주지 않았어요.
도리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것은 내 은혜가 네게 머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이는 내가 약할 그 때가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게 되는 믿음이 강한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사단의 가시라고 할까요?
가시는 아픔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아픔들을 당합니다.
그럴 때마다 머리터럭 하나도 검게나 희게 할 수 없는 연약한 자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고 나자 초대교회가 세워집니다.
이게 넷째 날의 모습입니다.
이제부터 온 세상으로 하늘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증거됩니다.
그러자 사단도 거짓 종들을 세워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변질시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다섯째 날의 모습인 것입니다.
궁창에는 새가 날아다니고 물속에서는 물고기들이 다니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리에 꼭 거짓선생들이 따라다녔어요.
믿음에다 행위를 섞게 합니다.
이를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예수라고 합니다.
다른 복음이란? 예수그리스도 의에 인간의 의를 첨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갈라디안식 신앙입니다.
예수도 믿고 율법을 지켜야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당시 유대교에서 들어온 자들에게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는 그 속에 인간의 가치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뱀이 하와를 어떻게 미혹했는지를 보세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미혹하였습니다.
마귀는 늘 인간의 가치를 상승시켜주겠다고 하면서 미혹을 합니다.
이게 인간의 구미에 딱 들어맞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성령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성행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운동이란? 다름 아닌 인간들을 신의 자리에 앉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행하여지고 있는 성령 운동을 보세요.
대부분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거짓 영들의 역사입니다.
이들은 신앙을 마치 무당들 푸닥거리 하는 것으로 변질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하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였듯이 지금도 수많은 교인들이 표적 신앙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는 종말의 타락한 교회를 일컬어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을 보세요.
각양의 이름으로 신비스러운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무슨 프로그램이 그리도 많은지,
수많은 방법론들이 난무합니다.
이 모두가 인간들의 의지적 결단으로 자기가 바라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인본주의 사고들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복음과 함께 비복음도 함께 전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그 정체성들이 확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말씀을 쫓아가는 자와 표적을 쫓아가는 자들로 나누이게 됩니다.
가을이 되면 잎사귀는 떨어지고 열매만 남게 됩니다.
내가 맺고 있는 열매는 어떤 것인지 보세요.
무얼 쫓아가고 있나요?
지금은 궁창의 새도 번성하여서 충만하였고, 바다의 물고기도 번성하여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궁창에 새가 번성하는 것만큼 바다의 물고기도 번성을 합니다.
하나님은 육에 속한 자도 번성케 하고, 영에 속한 자도 번성케 하십니다.
창조 시부터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 간에는 항상 전쟁이 있어왔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뱀과 아담으로 나타났고 인류 역사 속에서는 가인과 아벨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인류의 시작과 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날, 예수님이 빛으로 오심으로 갈라짐이 일어납니다.
둘째 날,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늘에 사람과 땅에 사람으로 갈라짐이 일어납니다.
셋째 날,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십니다.
넷째 날, 죄와 사망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세상의 빛으로 두셨습니다.
다섯째 날, 궁창 위 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하늘에 속한 자들도 번성하고 바다 속 물고기처럼 땅에 속한 자들도 번성합니다.
날개를 받은 자들은 하늘을 날면서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날개를 받지 못한 자들은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창조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곧 영원히 갈라지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요?
궁창 위를 날아다니는 새처럼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바다 속의 물고기들처럼 땅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요?
하늘이 좋은 사람은 하늘의 가치로 살아가고,
땅이 좋은 사람은 땅의 가치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이 곧 그 사람의 본질이고 그의 정체성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늘을 나는 새인가?
바다 속의 물고기인가?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이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소속이 하늘이라는 것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높게 날아서 세상의 종말을 보게 하옵소서. 노아 당시 비둘기처럼 땅에 접촉할 곳이 없어서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방주로 돌아오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영적으로 깨달은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통화 하실수 있는가요 ?
예 감사합니다 인터넷에서 울산 목양교회 정낙원 목사 검색하시면 통화 가능 합니다 차려진 밥상 배불리 마니마니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