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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 281 나는 하운이다
꾸욱.
왼손의 검결을 푼 하운이 눈썹을 모았다. 미천한 쥐라도 궁지에 몰리면 찍소리는 내고 죽는다는데 하이
애나에게 쫓기는 토끼마냥 움츠러들다 승부를 긑내고 싶지는 않았다.
'좋다, 이 한 번의 돌진으로 내 모든것은....."
웅~ 웅~
대상을 향한 원념일까. 하운을 맞추지 못한 맥천의 장력은 벽면 사이를 떠돌며 긴 공명으로 억울함을
토로하는 듯했다.
"끈질긴 힘이로군."
힘을 잃고도 소리로 시위하는 장력의 집요함에 하운이 혀를 찼다.
이리저리 떠도는 공명성을 듣노라니 갈 곳을 잃고 밤거리를 헤매는 취객 같았기 때문이다.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군상.
그런데...
'제자리?'
앞으로 나가려던 하운이 마치 얼어버린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럴 수가...'
공명과 취객. 별것 아닌 두 가지의 단상이 마지막이 되었을지 모를 하운의 돌격을 막아섰다. 그리고 머
리에서 아니, 가슴에서 울려 퍼지는 작은 깨달음 하나.
잊고 있었다.
내겐 장 형처럼 빠른 발이 없다는 사실을.
귀신도 곡하리만치 놀라운 임기응변도 없는 평범한 무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내겐 북궁형처럼 만인을 압도할 만한 장악력은 없다는 사실을.
그 어떤 시련도 일도양단해 버릴 힘과 기세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유약한 검수라는 사실을.
그러나...
나는 나다.
장 형처럼 빠른 발도, 임기응변도 없지만,
상대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분석할 줄은 아는 무인이다.
나는 나다.
북궁형의 장악력도, 힘과 기세도 없지만,
한가지 단서로 나머지 몇개 정도는 추론할 줄 아는 유연함을 가진 검수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의 방식으로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가장 잘하고 가장 익숙한 무엇을 토대로 일어서야만 한다.
그것이 분석이든 추론이든.
절대로 발이 아닐 것이고 힘과 기세도 아닐 것이다. 그것나의 몫이 아니니까.
절대로 잊지 말자.
나는 장추삼이 아니다, 북궁단야가 아니다.
나는...
하운이다!
'싱겁지 않은가.'
가일수를 위해 공력을 모으며 맥천이 속으로 혀를 찼다. 드러내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보였던 압도적인
자신감의 말로가 고작 이 정도였다면 그야말로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니까. 아무튼 승부를 매듭지어
야 할 때다, 상대를 과대평가했든, 과소평가를 했든 문제될 것이 없으니까. 중요한 건 자신이다. 자기
실력에 견주어 상대의 능력이 책정되는 것이다.
'그럼.. 음?'
공력을 내쏘려던 맥천이 잠시 손을 거두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동정이라도 받겠다는 거야?"
그도 그럴 것이 하운은 두눈을 꼭 감고 가슴까지 올렸던 검극을 아래로 늘어뜨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무방비의 상대에게 손을 쓰는건 누구라도 기꺼운 일이 아니다.
"동정을 빈다 한들 들을 것도 아닌데 그런 말이 의미가 있겠소?
곧 죽어도 말은 잘한다, 누구를 닮아서일까.
"흠..."
뭐 아무래도 좋다. 무방비의 상대에게 가일수를 하며 쾌감을 느끼는 변태까지는 아니지만 주어진 승리
를 차버릴 정도의 박애주의 또한 기대할 상황은 아니니까.
생사결을 벌일때는 이미 오욕칠정 따위는 잊어야 한다.
"훗!"
맥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살의를 듬뿍 머금은 조소가.
'집중하라!'
순간 하운은 전신의 모든 감각을 하나로 일치시켰다.
츠츠-
어디선가 희미한 무엇이 느껴진다.비록 한없이 미약하고도 미약한 기운이지만 분명히 잡아낼 수 있었다.
'왼쪽!'
빠르게 몸을 틀어 검신으로 이화접목을 시도했으나 완전한 흘림은 하지 못하고 손목에 어느 정도의 충
격을 입었으나 하운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떻게 치장해도 맥천의 공격은 분명 장력이다. 제아무리 기운을 죽이고 소리를 최소화했다지만 그것이
장력인 이상 어느 정도의 기운과 소리는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건 곧 방어도 가능함을 의미함이니.
츠츠-
다시금 날아오는 장력. 그러나 이번에는 하운의 동장이 조금 빨라졌다.
스륵-
그의 칼이 허공에서 유연한 궤적을 그리자 맥천의 공격은 하운의 검신을 타고 흘러 애꿎은 땅바닥을
쳤다.
"음?"
처음으로 무위에 그친 공격. 피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흘려졌다는 사실에 맥천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전의를 잃은 상대로 방금전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우연이라고 여겼기에.
"운으로 버틸 상황은 아니다."
낮은 음성과 함께 맥천의 다음 공격이 시작되었다.늘 그러하듯 방향과 소리가 배제된 장력
츠츠-
눈을 감고 멍하니 서 있던 하운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이제 확연히 잡힌다. 형태도 소리도 없다고 여겼던 정체불명의 장력이 소용돌이치는 경로가.
'그렇구나!'
방금 전 첫 타를 완전히 흘리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맨천의 공격은 기본적으로 역방향 회전을 하고
있기에 기존의 장력들이 가지는 궤적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 말은 상대방이 속기 쉽다는 말
과 일치한다. 거기다 소리를 줄이고 발출시에 움직임을 최소화했기에 그야말로 알고도 당하는 격이 되
어 버리는 형국이다.
하나...
스르륵-
하운의 검이 허공에서 유려하게 방향을 바꾸며 역회적의 장력을 비스듬히 받쳐 들었다. 그 모습을 보노
라니 그의 손에 들린 것이 정말로 쇠붙이가 맞을까 싶어 맥천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야 했다.
퍽!
또다 지면으로 고개를 처박아 버린 장력. 이제 맥천은 인정해야만 했다.
아까의 흘림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나 인정하기는 어려웠다. 대체 어떤 계기가 있어서 다 죽어가던 불씨가 저렇게 살아났다는 건가.
그것도 회광반조처럼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생생한 모습으로 말이다.
으득-
본시 자의식이 강한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이 부정되었을 때 혼란을 느낀다. 열등감이라는 이름
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허상의 자아 아래 억눌려 있는 잠재된 관념이 크면 클수록.
'나, 나는 최선을 다했다!'
형제들이 성취에 박수를 보내고 환호성을 질렀지만 돌아서면 남는 허전함에 스스로를 책망했었다. 따라
가지 못하면 인정이라도 해야지, 고작해야 질투 따위를 가슴에 담아서 어쩌겠냐고.
그래서 자꾸만 포개 올린 마음의 탑.
나보다 대의, 나보다 형제라는 미명하에 억지로 재워둔 무인으로서의 열망.
보면 볼수록 넘고 싶어서 도저히 이르지 못할 만큼 쌓아올린 열등의 성이었지만 의식 건너편에서 꿈틀
거리는 인간 본연의 욕구는 결코 충족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만들어 놓은 마지막 탈출구가 바로 형제들은 지나치는 단계라고 여겼던 암영기의 완성형일진대.
"언제까지..."
맥천의 입술이 비틀렸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셈이냐!"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가 한 발 나섰다.
츠츠츠츠-
이번에 한 방향이 아니었다. 형체도 소리도 없는 장력들이 서너 갈래에서 퍼져나와 하운에게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마치 일시지간에 뻗어 나오는 거미줄처럼.
그러나..
'들린다.'
무음이라고 여겼던 소리들이.
'보인다.'
무형이라고 여겼던 궤적들이.
'느껴진다.'
그 뒤에 비틀거리는 한 인간의 설움이.
스르륵-
검을 비스듬히 눕혀 허공에 휘젓는 하운의 동작은 일견 정신나간 사람의 그것처럼 보였으나 그의 검신
은 얄미우리만치 정확하게 맥천의 장력을 집어내고 있었다.
퍽! 퍽! 퍽!
검신을 타고 낙엽처럼 지면으로 떨어지는 장력. 또다시 무위로 그친 공격은 가뜩이나 쫓기는 맥천을 나
락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허명이 아니었다는 거지? 오냐, 이것도 받아봐라!"
츠츠츠츠츠츷-
사방을 가득 메우는 장력의 파도 이번에는 최소 네 발 의상의 장력이 발출됐음이다. 하나보다 둘이 많
고, 세번보다 네번의 주먹지러이 방어하기 힘든 것은 당연한 사실.
'너무 많다!'
이론적으로야 장력 하나하나의 속도가 다름은 자명한 사실이기에 순차적으로 하나씩 흘리면 된다. 그러
나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다가오는 네 개 이상의 장력을 완벽하게 흘려낸
다는 건 무리다.
거기다 맥천의 장력은 통상의 그것돠 다른 침투경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감각만을 의존해야 하는 상황.
스르륵-
다시 한 번 눈을 질끈 감은 하운이 검을 유려하게 움직였다.
퍽! 퍽! 퍽!
치칙-
세발은 흘려냈으나 나머지 하나는 야속하게도 하운이 휘두른 검의 궤적을 조금 비껴가 그의 손목을 스
치고 지나갔다.
'으윽!'
이런 고통이 어디 있을까. 손목이 아니라 오른팔 전체를 울리는 고통에 하마터면 검을 놓쳐 버릴 뻔했
지만 하운은 왼쪽 다리를 뒤로 강하게 짚어서 신형을 고정시켰다.
"으윽..."
결과만으로 따진다면 방금 전의 겨룸에서 우위를 점한 쪽은 물론 세개의 장력을 흘려내고 하나를 빗맞
은 하운에게 있다고 하겠으나 그간 누적된 충격으로 그 역시 정상은 아닌 상황.
이를테면 호각지세라고 할까?
하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맥천은 스스로에게 오히려 벌점을 부가했다. 자승자박인 줄도 몰랐다.
그는 그저 현 상황이 싫었고 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 내 한계가 고작 이 정도였다는 건가.'
제아무리 천재 소리를 듣는 상대라지만 하운의 나이는 기껏해야 서른 남짓, 밥그릇 수가 아니더라도 칼
을 휘두른 수양 정도가 아니더라도 밀릴 이유가 없다.
그런데 쫓기고 있다.
'천재라는 놈들은 늘 이모양이지.'
툴툴 웃는 맥천의 얼굴에 짙은 살의가 깔렸다. 이제 비천혈서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오직
하운에 대한 아니, 하운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기재들에게의 열등의식이 수면위로 올라와 다른 어떤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럼 이것도 받아보거라!"
그가 허공으로 몸을 날려 양팔을 세차게 휘둘렀다.
"..........!"
여태까지의 공격방식을 버린 그야마말로 원초적인 장법
쿠쿠쿠-
장력의 발출 시 움직임을 최소화하던 맥천이었는데 그것을 벗어던지자 장풍의 소리까지 실체화될 정도
로 크고 뚜렷하게 들렸다. 그야말로 대놓고 주먹질을 해대는 형국.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한다? 어떤 의미지?'
이화접목의 기본만 익힌 검수라도 피해낼 정도로 명확한 장력, 그러나 하운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다시금 눈을 감았다.
뭔가 석연치 않다, 뭔가가................
그가 눈을 감고 제자리에서 장력을 하나하나 감아 재차 허공에 몸을 띄웠던 맥천이 얼굴이 심하게 일그
러졌다.
'단 한 번의 동요도 없다는 것이냐, 단한 번도!'
잠시의 망설임. 그리고 맥천의 얼굴에 어떤 결심이 서렸다.
펑!
두 손을 가볍게 합장했다 풀자 맥천의 얼굴에 옅은 서기가 맺혔다.
그러나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눈을 감은ㅊ채 상대방이 쏘아낸 장력과 노닐고 있는 하운으로는 알 도리가
없는 노릇.
'정말 이것으로 족하는가.'
합장한 상태로 맥천이 자문을 툭 던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여러가지 이야기들, 사람들,
이제는 다시 만나지 못할 형제들과 떠나간 형제, 남은 형제
산산조각으로 흩어진 형제들의 자리만큼이나 깨져만 가는 그들의 이상이어지만 아직은 형재진행형이다.
문득 떠오르는 대사형의 넉넉한 웃음.
왜 그리도 마음으로부터 밀어내려고만 했을까.
단 한 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해 봤더라면 이리 후회가 남지 않을 텐데.
'이제 편안하시오?'
그리고 노태상. 끝내 이를 수 없다면 최소한 흉내라도 내보고 싶다.
대사형께 죄송한 말이지만 목숨 값으로 인정받고 싶지는 않다는 거다.
'그래 내게는 이것이 정의다.'
입술을 깨문 그가 합장을 풀고 양손을 쭉 내밀었다.
츠츠츠츠츠-
밀려오는 기세를 가늠하려던 그의 어깨가 움찔 굳어졌다.
이건 차원이 다른 공격이었으니까. 맥천의 장력은 사방, 아니, 팔방, 아니, 이 공간을 가득 메워 그 어
느 한 치의 틈도 없었다.
'자, 장막밀밀!
장막밀밀이라고 했다. 장력의 고수가 일수에 열두 번 이상의 조화를 부리며 시전이 가능하다는 그야말
로 꿈의 경지
제아무리 공력이 높은 무인이라도 일수에 다섯 번의 변환이 최고라고 한다. 신체 기관을 활성화시켜 꿈
의 움직임을 보인다는 장추삼도 일수에 아홉번이 고작인 정도니 장막밀밀의 무서움이 어느 정도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을터.
'장막밀밀을 두고 막거나 피한다는건 어불성설이다!'
무작정 치고 나갈까?
집중에 집중으로 댓개를 흘려낼 수도 있으리랴. 그리고 나머지의 장력은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갈 것이
자명한 상황. 이대로 몸을 내맡기느니 동귀어진이라도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추뢰보를 밟을 다리가 있었으면!
자신의 다리를 굽어보던 하운의 눈길이 자연히 칼을 거머쥔 손으로 이동했다.
전력을 다해 깨뜨려 볼까?
이화접목의 극성이라면 다는 아니더라도 한두 개를 제외한 나머지 장력들은 어찌어찌 막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상대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에게 회심의 두번째 공격을 가할 것이 뻔하다. 이렇게밀릴 바에야 한
번쯤 강공으로 전환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만근거석을 분쇄해 버릴 힘을 가질 수만 있다면!
'아니야!'
그건 장추삼이다, 그건 북궁단야다. 그렇게 싸워서 이겼을 거라면 애초부터 그리했을 터. 그는 결코 장
추삼일 수 없으며 절대로 북궁단야가 될 수 없다.
화려하지도, 멋들어지지도 않지만 기다려야 한다. 답답하고 좀스러워 보이는 싸움이라도 놀려도 할 말
은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방식이다.
그렇다.
'나는 하운이다!'
피하다 피하다 구석에 몰려 초라한 모습으로 배를 뒤집으며 나자빠질지도 모른다. 흘려내다 흘려내다
가중되는 무게에 짓눌려 힘없이 고꾸라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더라도 열심히 피하고 부지런히 흘려낼 것이다. 그렇게 수비하고 방어하며 헤아릴 것이다.
그것이 그의 방식이니까!
"자아~ 오라!"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하운이 한발 나섰다.
순가...
무심경에서 실체를 만들어내니 이를 두고 사관이라했다
아와 비아의 차이를 알고 인정하니 이를 두고 인관이라 했다.
그리고...
이 모두를 받아들여 자신만의 주관으로 세상을 살펴볼 수만 있다면 이는 바로 천관이 경지가 아닐까!
쾅!
사물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새롭다. 공기의 흐름도, 미세 먼지들의 속삭임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의 낙
하가 어느 때보다 정겹기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리고 열세 가닥의 애닯은 기운들.
거칠게 밀려들어 오고는 있지만 결고 힘찬 모습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당당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없는
서러움을 강인함으로 포장하고 애써 뚜벅뚜벅 다가올뿐.
'너희들 하나하나마다 이름이라도 붙여주고 싶구나.'
그렇게 다가온 열세 가닥의 슬픈 화음이 그에게 무언의 춤을 종용하고 있다. 본시 강건하고 웅장해야
할 선율이건만 어찌해서 저리도 슬픈 음색인지.
'그리도 서글프게 울고 싶다면...'
내가 고수가 되어주고...
하운이 검결을 맺은 손을 풀어버리고 양팔을 벌려 크게 몸을회전시켰다. 얼핏 보면 권수퇴에 익숙한 경
극단원의 그것이었으나 자세히보면 일퇴가 절도가 있었다.
내가 무희가 되어주리....
그러면서도 무한한 자유로움으로 일견 방종하게, 일견 여유롭게 시전 나들이 나온 한량의 몸짓마냥 허
허로움이 가득배인 장난끼마저 내포했다.
스르륵-
천잠사로 지은 옷마냥 빈틈없어 보이던 장막밀밀이건만 그의 어수룩한 일검 일검이 내쳐질 때마다 한
올 한 올 실밥이 뜯겨 하운의 검무가 정점으로 치달을 무렵 마지막 하나의 선율만이 외롭게 귓전에 맴
돌았다.
그리고 남은 하나.
어떤 자유로움에, 어떤 미련에 떨고 있는 미약한 불씨 쪽으로 빙글 몸을 돌린 하운이 나지막한 손짓으
로 중재를 종용했다. 부드럽지만 결코 거역하지 못할 그것으로.
스륵-
하운의 검이 허공에서 유려한 선을 하나 그려내자 작은 핏물 몇방울이 튀며 맥천의 신형이 휘청 흔들렸
다.
"컥!"
흔들~
잠시 몸의 중심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맥천이 입가에서 흐르는 피를 소매로 슥 닦으며 씨익 웃었다.
"할 말이 없군, 그래."
뭐가 그리 좋은지 껄껄 웃던 맥천이었는데 갑자기 다리가 꼬이며 풀썩 주저 앉았다. 그러나 하운은 아
니까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제야 알 것만 같구나! 음음.. 이렇다는 거지? 아, 이럴수도 있구나 그랬어!"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천관을 본 그의 뇌리에 지워졌던 화산의 무공이 되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
시 그대로의 모습이라도 반가울 터인데 칠 년 전의 미성숙했던 그것이 아니라 이제는 완연히 자라난 형
태라서 생소하면서도 기꺼운 형태로.
그렇게 열심히 혼잣말에 취해있던 하운이 문득 입을 다물고 곰곰이서 있다 무겁게 한마디를 뱉었다.
"이게 그분이 말씀하시던 천관이라는 건가."
칠 년 동안의 고독. 그리고 헛되이 날려 보냈다고 자괴했던 시간들, 시간들, 세월은 흘러갔고 추억은
아침이슬처럼 저물었지만 송골 송골 맺혔던 자리에 뚜렷한 흔적을 남겨두었다가 이런 식으로 되살아 난
다.
지우고만 싶었던 세월이었는데.
공심법의 종착역에서 잠시 감회에 젖은 하운이었는데 그보다 더 놀란 이가 있었다.
'천관이라고?'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던 맥천이 입을 떡 벌렸다.
천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찬찬히 하운을 뜯어보던 맥천이 몇 번의 기침을 뱉고는 고소를 지었다. 지나칠 때는 몰랐는데 그 말을
들으니 어떤 사람이 떠올라 자연스레 하운과 겹쳐지지 않는가?
하운과 기질적으로는 너무도 달랐던 인물.
오만하기가 하늘을 찔렀으며 괴팍하기로 따진다면 전 무림을 오시해도 모자람이 있었던, 무인이라기보
다 학자에 가까웠던 한 사내의 초상.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발상으로 주위르 ㄹ놀라게 하고 자신의 이론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라면 하나밖
에 없는 사제의 몸에 금제를 가하고 사형과의 내기도 불사했던, 그런 고집쟁이 그렇게 다른 성격인데
묘하게도 이 선한 청년의 가슴 한구석에서 그 사람의 심장고동 소리가 들려옴은 맥천만의 착각일까.
'마지막까지도 당신들의 그늘이라는 거요, 이공자?'
역시 다다를 수 없는 벽일까. 그리도 오르려고 기를 썼건만 제자에게도 보기 좋게 패했다. 이 정도라면,
이 정도라면 하면서 닦고 또 닦았건만 그들과의 간극은 조금도 좁혀지지ㅣ 않았나 보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그들과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지 못했던 걸까?'
하긴,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했으니 결과에 승목할 뿐 대상이 누구이든 무
슨 상관일까. 여한이 없을 만큼 부딪혀 보았으니 그것으로 됐다.
하나 남게 되는 한 사람.
문득 노태상이 안쓰러워 맥천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자들과 하나가 되지 못하여 불면을 밤을 보내더니 이제 사손의 위치에 선 사람들과도 등을 져야 하는
운명이라면 조금은 가혹하지 않은가.
물론 이런 사실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인생의 여로는 남겨진 자들의 몫이니까.
맥천의 복잡한 상념과는 상관없이 멍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하운이 피식 웃었다.
"천관전능. 그래 천관정능지체라.. 어쩐지 낮설지 않더라니 그런걸 보면 나와 장형은 전생에 무척이나
질긴 인연을 맺었나 보구나, 그게 악연이든, 선연이든."
석벽의 천장에서 눈을 땐 그가 알 수 없는 어딘가로 아스라이 시선을 던지다 문득 고개를 끄덕이며 확
신에 찬 어조로 불쑥 입을 열았다.
"만약 천관전능이 내가 가정하는 그것이라면 더 이상 장 형에게 해줄 것은 없다."
그렇게 혼자의 세계에서 돌아온 하운이 천천히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
칠공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맥천의 모습에 그가 깜짝 놀라 옆에 앉았다.
"괜찮소?!"
"후후.. 헉헉, 이게 괜찮은 꼴로 보이나?"
말하는 중간중간에 선지피를 흘리는 맥천을 내려보며 하운이 탁식을 터뜨렸다.
활인검은 아직도 요원한 것인가, 잠깐이나마 봤다고 여겼던 천관은 순간적인 당황이 만들어낸 허상의
세계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물밀듯이 다가오는 깨달음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선을 긋지 않았다고 생각했건만.
그의 침울한 음성에 잠시 하운을 노려보던 맥천이 고개를 홱 돌렸다.
"끝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들려고 하는가."
"아, 그런 의도는 없었...."
'끝까지 미워할 수 없게 하는구나.'
잠시 하운을 노려보던 맥천이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무공으로도 인품으로도, 그 모든 것을 포함해
서 완패다.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항복 선언이다.
"맞다, 자네의 칼은 나를 항거 불능 정도로 만들었지 결코 사지로 이끈 것은 아니야."
"그럼!"
놀란 하운이 그제야 맥천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쉴사이 없이 경련을 일으키는 어깨, 칠공에서
번져 나오는 붉은 피, 그리고 꺼져 가는 눈빛
"왜 이런 행동을!"
칠공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경우라면 내부 장기가 강기계열의 공격으로 모조리 상했거나 독을 마신 경우
에 해당된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 경우라면 검은색의 죽은 피가 흘러나와야 옳다.
그리고 급격히 꺼져가는 눈동자. 생명의 불씨는 그리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법이고, 하운의 검은 주요
신체 부위쪽으로 향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생멸은 납득하기 어렵다.
최소한 맥천 같은 고수라면 회광반조의 조짐이라도 보여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이런 가정이 모두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고?"
하운이 허탈하게 물었다.
"누구나 한번쯤은 미치곤 하지. 쿠, 쿨럭. 그럴때는 말이야. 쿨럭, 쿨럭, 앞뒤 재지 않는 법이라내."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으리만치 너무나도 느긋한 대답. 그래서 하운의 탄식은 더욱 깊어
만 갔다.
"본신진기를 격발시키면 비록 승리한다고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노릇. 동귀어진까지 불사할 정
도였다는 거요?"
그것이 자신에 대한 미움이었을까. 아니면 비천혈서의 한조각에 대한 열망이었을까.
아니 그 두가지 모두라고 해도 과연 목숨 보다 소중한 가치일까.
"말했잖나. 그냥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동귀어진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었지."
그리고 맥천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단 한번만이라도...."
그 뒤의 말은 너무나 작아서 고개를 숙여서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운은 어깨를 부르르 떨어야 했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구나.
하운과 맥천. 둘의 차이는 간단하면서도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가로놓여 있었다.
"당신은 당신 나름의 싸움이 있었는데."
"아아, 쿨럭, 내게 훈계하려고 들지 말게. 한번쯤 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제 후회는 없어."
그것은 바로 아와 비아의 차이를 인정하는것, 하운은 깨끗하게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였고 맥천은 오르
지 못할 타인의 성역을 움켜쥐려고 했던 것이다.
그 작은 차이가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가장 비참한 일이 적에게 동정의 눈을 받는것. 이제 가라,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으니 먼저 간 형제들
도 책망하지는 않겠지."
일종의 해탈일까. 광기에 사로잡혀 악귀처럼 달려들던 모습은 오간데 없고 그저 편안한 모습으로 죽음
을 받아들이는 중년의 무인만이 이자리에 누워있다.
"후...."
뼛속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면서 하운이 일어서는데 맥천의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두르는 편이 좋을 것이야."
"....?"
"지금껏 노태상께서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단지 비천혈서 때문만이라고 생각하나? 쿨럭, 쿨럭! 그건 아
니지."
"그게 무슨 말이요?"
뭔가 불길하다. 유언과도 같은 말에 괜히 심장 박동수가 빨라진 하운이 급하게 몸을 돌렸지만 격한 기
침으로 신형을 오그리는 맥천의 모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쿨럭, 노태상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표면적으로는 흉몽지겁의 실패와 대사형의 패배
라네, 하나 쿨럭, 일차적으로는 그분의 세 제자가 .. 아 이런 말은 필요 없겠군."
이제 흰자위가 보이는 동공으로 허공을 쫓으며 맥천은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며, 며칠 전에 사제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노태상께서 백 년간의 시름을 덜었다."
"백년간 이어져 온 시름?"
"물론 의미는 모른다. 쿨럭, 쿠에엑~ 다, 다만 대사형을 묻으시면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하는
데........"
'태양광무존 수고초심이련가.'
윤 파파의 노상객잔에서의 짧은 만남. 잠시 회상에 빠진 하운에게 청청벽력과도 같은 한마디가 들려왔
다.
"사제는 화산으로 간다고 했다. 뒤따라 노태상께서도 가시겠지."
쿵!
"무슨 말이오? 어째서 화산이라는 거요!"
다급한 하운의 질문에 맥천이 빙그레 웃었다.
그 미소는 너무도 모호하면서도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어서 질문을 던진 하운이 다 어색해질 지경이었
다.
급하게 발길을 떼려던 하운이 맥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왜 이런 말을..."
"후우~ 쿨럭,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이상해진다고들 하지. 쿠에엑~ 컥, 헉헉... 지, 지금의 나처럼 말
이야."
말이 되는 걸까. 고개를 돌리려는데 맥천이 마지막 중얼거림이 하운의 귓전에 꽂혔다.
...... 이제 정리할 때도 됐지.
'그렇구려.'
우리에겐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사건이지만 당신들은 아주 먼 옛날에 발을 디딘 거였고. 날이면 날마다
같은 사건과 같은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최소한의 자유도 없었던 거였고.
'맞소, 이제는 끝내 봅시다.'
누워있는 맥천에게 하운이 정중히 포권을 올렸다. 망자에 대한 예우일까. 그건 아니었다. 자신의 방식
으로 최선의 선택을 감행한 무인에게의 송별이라고 할까.
"허허...."
흰자위만으로도 하운의 포권을 보았는지 기분 좋은 미소를 입에 그린 맥천의 머리가 옆으로 툭 떨궈졌
다.
향년 오십셋. 무림맹과 강호 전체를 위협했던 십장생의 이대 주인의 말로치고는 다소 초라할 수도 있
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승부였기에 일점 후회를 남기지 않은 마지막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선택을 하니까.
묵묵히 맥천의 시체를 내려보던 하운이 고개를 쳐들고 빠른 걸음으로 석실을 벗어나자 장내에는 맥천이
남기고간 속삭임만이 아련히 떠돌아다녔다.
"...단한번만이라도 이 손으로 풍운을 일으켜 보고 싶었다네, 자네들처럼 말이야..........."
삼류무사 282 징 조
대사형이라는 직함빨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화산을 오르는 장추삼의 얼굴을 봤다면 누구나 뭔가를 잘못 먹어도 크게 잘못 먹은 상태로 느꼈을 거다.
나른하게 내리깔린 눈꺼풀, 비스듬히 올라간 거만 그 자체를 풀풀 날리는 입꼬리.
정상인이라면 평소 절대로 짓지 않는 표정의 전형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육년 전 일이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리는 장추사의 표정에 어떤 비감함이 서렸다.
당시 장추삼은 거의 야반도주의 형태로 가출한 터라 가진 것이라곤 그야말로 불알 두 쪽이 전부인 처지
였다.
왜 야반도주를 했냐고?
일단 가출의 이유가 너무 쪽팔렸고- 별로 잘난 건 없지만 자존심은 하늘을 팍팍 찌르는 장추삼일진대
가출의 사유가 여자한테 차여서라고 자백하라는건 나가 죽으라는 말과 진배없었다.- 두번째로는 가출의
가, 자만 꺼내도 아버지 장유열에게 반쯤은 죽었을 터였으니까.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불과 육 년 전의 장유열은 술 한동이를 다 비우고도 장정 둘은 들어야 할 장작더
미를 단숨에 옮겼고, 성격 또한 급해서 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부전자전, 장추삼의 폭급함은 아버지를 그대로 빼 닮은 것이라 하겠다.
이런 여러가지 악조건을 감안해 볼 때 한번의 쪽팔림으로 영원한 미제를 안겨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
여 영광의 탈출을 감행한 것인데 문제는 돈이었다.
변변한 일자리 하나 없었던 터라 모아둔 돈이 있을 리 만무하고, 상인들 도와주며 받은 서푼은 그날 술
값으로 써버리는 성격인 장추삼에게 비상금이라는 단어는 별천지느이 이야기일뿐.
친구들에게 사정해서 돈을 좀 마련하려고 해도 구차하게 이것저것 설명해야 할 터였다. 결정적으로 완
전범죄를 추구했던 장추삼에게 이런 식으로 증거를 흘리는 일은 용납이 되지 않는 일.
아버지는 잊고.
그러나 보니 몸만이라도 안전하게 빼보자는 심산으로 편지 한장 덩그러니 남겨놓고 떠났던 고향. 방구
석을 샅샅이 뒤져 사나흘 버틸 만한 돈은 마련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물론 돈 하나 없이 떠난 데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뭐냐고?
그야 간단하다. 그는 구파에서-이 갈리는 무당만 빼고- 무공을 배울 심산이었으니까.그리고 구파는 기
본적으로제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마련이니까.
돈따위는 필요없다! 목표하는 문파까지만 가면 될 뿐!
일단 문파에 들어서기만 하면 자신의 재질을 한눈에 파악한 노고수들이 버선발로 나와 제발 제자가 되
어달라고, 자파의 무공을 배워줄 것을 간곡히 부탁할 것이다!
왜?
"난 싸움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거든! 뭐, 도구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떤 식이라도 상관없어!"
....그렇게 자신만만했다.
처음에는 가장 가까운 문파를 찾아가려 했으나 곧 좌절이었다.
호북에서 가장 큰 문파라면 무당이었고 호북 그 어느 곳을 찾아보아도 무당의 무학을 능가할 걸 가르쳐
줄 곳은 없었으니까.
"에잇, 집에서 가까웠더라면 편했을 텐데. 가끔 점심 먹으로 들르고 하면 좀 좋아?"
태평한 녀석이었다, 이때까지는.
객잔에서 남들이 홍소육에 술까지 곁들여서 푸짐하게 한상 차린 걸보고도 이를 악물며 소면 한 그릇으
로 주린 배를 채우고, 대충 새벽 이슬 피할 만한 장소를 골라가며 잠을 청했다.
그나마 있는 서푼의 은자를 무도 쓰고 아버지의 간식거리였던 건포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겨우ㅠ 다다른
섬서땅.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섬서엔 종남파가 있다. 비록 도가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만 그나마 속가의 무
문적인 성격이 강해서 장추삼이 눈을 돌린곳.
다만 한가지 걸린다면 종남파의 무학이랄까?
종남의 무학을 말하라면 천하삼십육검으로 대표되는 검법이 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홍엽수 같은 수법
이나 오뢰정인 같은 지법도 강하지만 대표 무공은 역시 검법일 터.
"좋아, 좋아! 검법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오늘부터 청성의 무학은 수법과 권법으로 바뀌는 거다. 이
창추삼이로 인해서!"
자신있게 산문을 두드린 장추삼이었는데 불행하게도 일각이 채 지나지 않아 종남산에서 하산해야 했다.
"뭐? 추천서? 빌어먹을, 그런걸 누가 가지고 다니냐!"
기분 나빴냐고? 당연했다, 이런 천하의 인재를 몰라보다니!
그렇기에 더욱 당당했고, 걸음걸음마다 족적이 뚜렷이 파일 지경이었다. 어디까지나 손해는 자신이 아
니라 추천서를 들먹이며 잘난 척했던 종남의 몫일 테니까.
"문파가 종남 하나밖에 없냐! 저 하늘에 떠도는 샛별보다 많은게 중원의 무림문파다. 카악~ 퉤!"
종남산 쪽으로 시원하게 가래침 한 방을 날린 그가 눈살을 지푸리는 몇몇 종남의 도사들을 무시하고 소
매를 둥둥 걷어 쫙 소리나게 감자바위까지 몇십 차례 먹인 후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화산은 싫은데..."
그 주제에 가리는 것은 있었다, 이때까지는.
종남과 더불어 속가적인 색채가 강하다고는 해도 화산이라고 하면 자타공인의 도문, 장추삼 같은 날건
달ㅇ의 입장에서 마음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좋아, 좋아! 비록 화산이 앞뒤 꽉 막힌 말코들의 집합이라지만 오늘부터 이 장추삼이가 사바세계의 모
든 고통과 기쁨을 알려주겠어! 화산으로는 거의 땡잡는 날이로군."
아끼고 아낀 은자로 저녁을 해결하며-점심은 늘 건포였다.- 가까스로 회음면에 도착한 그가 단숨에 화
산으로 올랐다. 한두달 술과 고기를 멀리할 것을 각오하면서
이 얼마나 대단한 양보냔 말이다!
그러나...
역시 일각이 채 되지 못한 시간에 장추삼은 물을 먹었다.
사유는 전과 동일.
감자바위 일만 번을 먹어봐야 허기만 가중됨을 알고 있었지만 저도 불끈 쥔 오른손은 왼쪽 손바닥과 경
쾨한 마찰음을 일으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퍽, 퍽, 퍽, 퍽!
"웃기고 있네, 이 말코들아! 잘 먹고 잘살아라!"
여전히 기세는 등등했지만 남은 돈은 한 푼도 없었고 육포는 두번 먹으면 끝이었으니.
현실적인 문제는 종종 이상의 부피를 눈에 띄게 줄여주는 기능을 담당하곤 한다.
섬서를 대표하는 문파는 화산과 종남이지만 그렇다고 섬서땅에 그 두개의 문파만 있는 것도 아니다. 비
록 지금은 군소방파지만 실력있는 방주의 아래에서 힘을 키우는 소규모의 문파들도 꽤나 많았다.
철권파가 그 가운데 하나였다.
다소 유치한 뒷골목 건달들이나 사용하는 조직명과도 같은 문파이름을 걸고 있었지만 철권파는 생각보
다 내실이 충실한 방파였고, 방주 일권개천 석공명은 말 그대로 철권을 휘두르는 사나이라고 호사가들
사이에 정평이 자자한 터였다.
그래봐야 무당과 비교한다면 명월 앞의 반딧불 신세겠지만.
"이곳이 철권파란 말이지?"
철권파의 정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주위 전경을 살펴보던 장추삼이 고개를 저었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
만 너무도 작은 규모였고 문도 수도 고작해서 서른 명 남짓으로 보였으니까.
과연 이런 방파의 주인이 무림에서 권을 잘 쓰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맞을까 싶었지만
마음넓은 장추삼은 인심 한번 크게 쓴다고 치면서 결단을 내렸다.
"좋아, 이 몸이 철권파를 섬서 제일의 문파로 격상시켜주지, 단 삼년 만에 말이야!"
손가락 세개를 펴 보이고 회심의 미소를 지은 그가 보부도 당당하게 철권파로 들어섰다.
반 각 후...
"놀고들 있네, 진짜! 끼리끼리 아주 입을 맞췄구나! 내 더러워서 안배우고 만다!"
이를 부득부득 갈며 철권파의 문을 왈칵 열어젖힌 장추삼이 빌어먹을 소개장을 떠올리며 다시금 분노의
감자바위를 무려 십연타로 날린후에 몸을 빙글 돌렸다.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아 보이는 기색과 눈빛, 그렇지만 이번의 박대로 입은 타격은 종남의 그것과 차원
이 달랐다
현실적인 입장을-주머니사정을- 고려해서 최대한 낮춘 눈높이란 말이다. 그런데 무전 박대라니. 거기다
이유까지 어찌 그리 한결같을까.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다. 이러다가 빈손으로 집에가야 할지도 모른다.
"절대 안돼!"
불길한 가정이 그의 전심에 엄숩하자잠시 당황하던 장추삼이었는데 그는 곧 특유의 방어기제를 발동시
키기 시작했다.
'망상'이라는 이름의.
"킁, 섬서지방은 무관에 발을 딛으려면 추천서가 필요한 동네였군. 하긴, 성 자체에서도 기후 차이가
이정도로 심하니 신입자들의 변덕이 탕 끓듯 하는 건 당연할지도 몰라."
섬서지방은 남과 북의 기후 차이가 너무하다 싶으리만치 크다.
남쪽지방은 기온이 온난하면서도 비가 많이 내려 쌀과 차 이외에도 동유, 칠, 한방약의 원료등 임산물
까지 풍부한 반면 북쪽 지방은 강수량이 턱없이 모자라면서도 집중 강우의 형태를 띠고, 심지어 모래
바람까지도 분다.
그런 기후를 빗대어 섬서 젊은이들의 인내심이나 기타 성격을 마음대로 예단한 장추삼이었으나 ㅁ니 만
약 섬서에서 사는 청년들이 알았다면 경을 칠 이어었다.
뭐 어떤가. 없는 곳에서는 황제도 입방아에 오른다는데.
아무튼 멋진 결론(?)에 도달한 그가 미련없이 섬서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역시 문제는 돈이었다.
그런 고로 장추삼 인생에서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 그가 시전에서 물건을 팔았
다면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무려 한 달간 말이다.
생각보다 짭짤한 수입이 기꺼워 본래 예정했던 시간을 늘리려고도 했지만 깔짝거리는 동네 건달패들을
보아 넘기지 못하고 그만 일을 벌인 것까진 좋았는데..........
뒷감당이 전혀 되지 않았다.!
사람 좋은 그릇집 주인장이 한달번 돈에 쌈짓돈까지 찔러주며 그를 떠나보냈기에 망정이지 알량한 주먹
만 믿고 시전에서 버텼더라면 거적이 둘둘 말린 시체로 발견되었을지도 모를ㄹ 일이었다.
그때 장추삼은 다짐했었다. 끝까지 책임질 것이 아니라면 섣부른 의협심이나 정의감으로 나서지 말자고.
그렇게 뒤로한 섬서땅. 많이 열받고 조금은 착잡해고 조금은 아쉬었지만 일단 두둑해진 전낭과 이유모
를 자신감이 그의 발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행선지를 주저 없이 하남으로 정했다.
이유?
하남엔 소림이 있으니까!!
무거워진 전낭만큼이나 회복된 자신감은 장추삼에게 분홍빛 미래를 속사였고 그의 눈은 당대 최고의 문
파로 고정되었다.
까까머리는 싫지만 그래도 최고가 아닌가! 더불어 속가제자들이 거치는 삼십육방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허드렛일을 하던 전대고수에게서 비기 한두 수 정도는 전수받을 지도 모르고 그렇게만 된다면 앞길은
탄탄대로일 것이다.
머릿속에 계산을 꽉 짜놓고 달려든 소림문...
일각 후도 아니었다. 단 몇마디만에 추천서의 유무가 거론되었고 그는 또다시 신성한 불문의 성지에 감
자바위를 먹이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내려오던 길에 이름 모를 노인네를 만나서 오 년간 이끼와의 씨름을 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다르지. 암, 다르고 말고!"
잠시 화산의 주턱에서 상념에 빠졌던 장추삼이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어깨를 쭈욱 폈다. 그리고 소리도
요란하게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면에 발자국이 팍팍 남을 정도로.
멀리서 화산의 정문이 보이자 장추삼은 다시 한 번 육년전의 그날로 아스라이 흐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날의 치욕과 그날의 한심함이 다시금 전신을 감싸 움찔 몸을 떨어야 했다.
하나, 오늘은 다르다. 절대로 다르다!
정문을 지키고 선 도사들의 눈동자는 형형했으나 장추삼은 어쩐지 그들이 반가웠다. 아니, 정겹기까지
했다.
'어이쿠, 수고가 많구먼. 날도 추운데 따끈한 술이나 한잔하지. 뭐? 도사라서 안된다고? 에이, 자네들
의 대사형 양반도 가끔 즐긴다네. 내동생 같아서 주는 거니 부담가지지 말고....'
상상의 나래는 거기까지였다. 어찌 신성한 도장에서 그런 불경한 언사를 사용할까!
그래서 그들의 앞에서 척 서서 짜릿하게 눈씨름을 한판 벌인 다음에 오른쪽 다리를 뒤로 조금 이동시키
고 최대한 어깨에 힘을 실어 느긋한 어조로 툭 내뱉었다.
"여기가 화산파요?"
순간 정문을 지키던 두 젊은 도사들은 똑같은 생각이 퍼뜩 들었다.
바보 아냐?
아니 다른 곳도 아니고 대화산의 정문에 서서 여기가 화산이냐니?
열 걸음 양보해서 화산인지 몰랐다고 해도 그들의 뒤에 걸린 편액도 읽지 못한다는 건가?
그래도 샌긴게 영 허술한지라 생명체에 대한 존중을 바탕에 깔고 정중히 대답해 주었다.
사실 문맹은 크나큰 골치고 나라도 해결하지 못하니까.
"화산파가 마습니다. 무량수불..."
"아 그래요?"
반색을 하며 한발 나선 허술한 인간이 이를 반짝이며 웃었다.
"내 장문도우께 긴히 할 얘기가 있으니 안내 좀 해주시게."
" 예?"
당연한 반응. 은근슬쩍 흘린 하대에도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놀라는 두 도사의 반응을 이미 짐작한 바
였기에 장추삼은 빠르고도 명확하게 뒷말을 이어 붙였다.
"아아, 그리 놀랄 것 없소 내가 이곳 대사형과 각별한 사이라오. 대사형말이야. 대. 사. 형"
"대사형이라고요?"
"그게 무슨...
두 도사가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를 바주볼 때 장추삼의 입술이 한껏치켜 올랐다.
'짜식들.'
놀랐을 거다. 정문이나 지키는 말단들이니 대사형이라는 직함에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렇지만 장추삼은
결코 나재지 않았다. 그저 한마디를 더 해주었을 뿐.
"설마 대사형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 도명도 찬란한 하운도사 말이오, 하. 운."
".....!"
".....!"
경악과 황당이 뒤범벅이 된 얼굴들. 그 모습에 적이 만족한 장추삼이 느긋하게 뒷짐을 지었다.
"모, 몰라뵈어서 송구스럽습니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그럼. 그럼. 많이 미안해해도 된다.'
여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장추삼이 짐짓 손사래를 쳤다. 이 정도에서 물러나 주는 것도 군자의 예
의니까.
"송구는 무슨. 그리 미안해할 것 없으니 어서 장문 도장께 기별이나 넣어주시게."
둘 가운데 나이가 조금 많은 도사가 얼른 머리를 숙이고 돌아설 때까지만해도 장추삼의 예상대로 이야
기는 전개됐었다.
그런데...
"아참?"
막 문을 열려고 하던 도사가 몸을 돌려 장추삼에게 깊숙이 포권을 했다. 그는 계오자라는 도사로서 나
이는 젊지만 도명처럼 거만함을 멀리하는, 도인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다.
"송구하지만 소개장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송구는 그만 찾고 어서 기별이나.. 뭐? 소개장?"
"소, 소개장?!"
입을 떡 벌리며 반문하는 장추삼에게 의혹의 눈을 던지며 또 한명의 도사가 옆으로 몇걸음 옮겨 정문을
막아섰다. 그는 계율자라는 도사로 율자가 들어가는 도명만큼이나 규칙에 살고 규칙에 목숨을 거는 도
사였다.
그리고 도사로서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입방정이었다.
이제 겨우 약관을 넘긴 나이지만 입씨름만은 상대가 여동빈이라도 반수 정도는 첩어주고 여유롭게 이길
정도니 딱 장추삼의 그것이라고 하겠다.
어쩌면 어쩌면 그를 능가할지도.....
"설마하니 소개장이 없다는 것이오?"
황당을 넘어서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
그도 그럴 법한 것이 화산의 대사형을 아는 인물이라면, 아니 강호에 몸담은 무림인이라면 최소한의 규
범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한 문파의 장문과 독대를 신청할 때는 최소한 소개장은 기본이니까.
문제는 그런 규범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인간도 저 하늘의 샛별만큼 많다는 거다. 화산의 대사형과 돈독
한 관계라고 해서 전부 무림인이 아닌 것처럼.
"어. 그게. 에 . 또 없는데...."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바보처럼 헤벌쭉 웃는 장추삼을 냉랭한 시선으로 쏘아보던 계율자가 단호하게 잘
라 말했다.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도우로군, 장문 도장과 독대를 요청하면서 소개장 하나 가져오지 않았다니.
썩 돌아가시오! 화산의 문이 그리도 만만하게 보였단 말이오!"
거기까지는 그냥 참으려고 했다. 그런데 계율자의 입방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대사형은 무슨, 어디서 대사형의 함자를 얻어듣고 와서는....."
버럭!
"지금 뭐라고 했어? 뭐? 얻어들어?"
발끈한 장추삼이 앞으로 나서자 계율자도 물러서지 않고 한 발 나섰다.
"그렇고, 얻어들었다고 했소이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소?"
"잘못?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됐다. 얻어듣긴 누가 얻어들었다고 그래!"
"그럼 증거를 대보시오!"
"사람간의 관계에 증거 같은게 어디있어? 하형이 몸담은 문파라서 높게 보았는데 이런 바보를 수문장으
로 세우는 걸 보면 화산도 별볼일 없는 문파로군, 그래?"
"지금 뭐라고 했소!"
일촉즉발이지만 너무도 유치한 상황. 대화 내용이나 분위기로는 완전히 유아들의 한판 승부라 잠자코
지켜보던 계오자가 한숨을 쉬고는 끼어들었다.
"계율, 그만 하게나! 도우께서도 진정하시고 숨을 돌려주기 바랍니다."
"저자가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누가 쓸데 없는 말을 했는데!"
"계율!!"
계오자가 왈칵 성을 내자 끝까지 종알거리던 계율자의 입이 닫혔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살아 매섭게 장추삼을 쏘아보고 있었다. 물론 이걸 참아낼 장추삼이 아니었고.
"눈 안깔아?"
"흥, 오지랖이 넓은 도우로군. 상대방의 눈 각도까지 조절해 주려는 노력이 가상하나 빈도의 눈까지 걱
정할 건 없소이다."
"이게!"
부창부수.
"계율...."
유부에서 들려오는 유령의 곡처럼 낮게 깔리는 목소리. 그건 다름아닌 계오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이
었다. 아무리 방방 뜨는 계율자지만 이 순간은 흠칫 몸을 굳혔다.
계오자가 이런 목소리를 낸다는 건 인내의 끝에 다다랐다는 반증이고, 이럴 땐 무조건 몸 사려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한번만 더 입을 놀린다면 한달간 무한비무를 청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무한비무라니! 계자 돌림의 도사들 가운데 최고수이자 비무시에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고 하여 연무
장의 호랑이로 통하는 계오자와 한 달간 비무라니!
"됐거... 든요"
치렁치렁 늘어뜨려 바닥에 질질 끌리던 꼬리를 급하게 말고 계율자가 옆으로 물러섰다.
"아직 수양이 부족한 도사의 망언을 가슴에 담지 말아주시길. 사제를 대신해서 사과드립니다. 무량수
불..."
고개를 떨군 계율자를 쥐 잡듯 노려보던 장추삼이 계오자의 정중한 사과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성격
은 성격인지라 고운 웅대가 나가지는 않았지만.
"흥 도사만 아니었다면 저기 바보는 내일 아침부터 죽으로 연명해야 했을 것이오."
"아하하하....."
발작을 하려던 계율자에게 엄한 눈길을 보내고 너털웃음으로 상황을 종료시킨 계오자가 뒤늦은 포권으
로 자신을 알렸다.
"경황이 없어 도명조차 밝히지 않았습니다. 빈도는 화산에서 수양중인 계오자라고 합니다. 대사형을 아
신다는 대협의 존성대명은 어찌 되시는지요?"
이렇게 되면 맞 포권으로 응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까지 무슨... 쩝, 장추삼이라 하오."
순간 두 도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장추삼?"
"무림을 떨쳐 울리는 강호삼성 가운데 괴성 장추삼이 본인이라고 하셨소?"
장추삼이라니 강호의 모든 젊은이들에게 거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장추삼이 아닌가!
만약 눈앞의 이 사내가 괴성이 맞다면 대사형과 친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다.
유성 하운 역시 강호삼성 가운데 한 사람이고 그들 세 명은 같은 표국에 몸담고 있었을 뿐더거 함께 행
동한다고 하니까.
"장추삼이라..."
계오자와 계율자가 눈썹을 역팔자로 올려 장추삼의 전체적인 외관을 낱낱이 살펴보았다.
쭉 찢어져 다소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눈초리, 건들거리다 습관적으로 치켜 올라가 불량기를 풀풀 날리
는 어깨, 언제든지 폴발할 준비가 되어 보이는 분위기.
액면으로는 딱이다, 액면으로는.
두 도사의 과민 반응에 머쓱해서 장추삼이 또 한번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괴성이나 강호삼성인가는 잘 몰라도 하운과 친한 장추삼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그 사람이라오."
이 말은 동명이인이 아닌 괴성임을 간접적으로 인정한것. 뚫어지게 그를 쳐다보던 두 도사가 장추삼의
말을 듣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푸하하하!"
뭔가 말을 꺼내려던 계오자를 앞서서 계율자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냥 웃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무릎을
꿇은 채로 땅바닥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사제!"
"우하하하하하하! 별 웃기는 도우를 다 보겠네! 댁이 괴성 장추삼이라면 빈도가 만승검존이겠소! 말로
는 누군들 되지 않을까!"
"진짜로 죽고 싶은 거야, 뭐야!"
껄렁한 분위기 하나로 괴성 행세를 한다면 나도 오늘부터 건달 흉내나 내볼까, 하며 키득거리는 사제를
제지하려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계오자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주먹을 불끈 쥐는 장추삼을 만류
했다.
그 자신도 믿지 못하겠으니 뭐라고 하겠는가. 그렇다고 아니라는 증거 또한 없으니 난감한 노릇. 그래
서 이렇게 응대를 했다,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응대를.
"험험, 장추삼 대협 본인이 맞든 아니든 지금 중요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역시 문제는 소개장의 유무겠
지요"
"나도 장추삼이라고 박박 우길 생각은 없는데 소개장이 없다니까! 없는 소개장을 만들어낼 수는 없지
않소?"
딱하다. 괴성인지 아닌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달랑 말 한마디, 외모만 보고 '~ 이런저런 고로 장추삼이
라는 사람이 독대를 요청했습니다.'라고 보고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문파의 수장과 독대 요청이라면 두 사람 간의 친분 관계가 확실하든가 아니면
믿을 만한 인물의 소개장 정도는 소지해야 가능하다.
그건 장추삼이 아니라 절대오존이라도 마찬가지.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 진짜 답답하네! 도사가 죄송할 거는 없으니 일단 기별이라도 넣은 후에 말하라고!"
기별조차 할 상황이 아니라 침묵으로 일관하는 계오자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가슴을 탕탕치며 펄펄
뛰는 장추삼이 다 부러울 지경이지만 수양을 업으로 삼은 이가 어찌 그럴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뭐야, 그러니까 지금 기별도 불가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이를 악물고 박작하려던 장추삼이 계오자의 침중한 얼굴을 보고 천둥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칙이 그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열은 받지만 이 도사들은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거다. 이들은-어린 도
사놈을 끼워 넣기 싫었지만 어쨌든 함께 서 있다- 정문 위사라는 자신들의 본분에 충실한 거고 그렇기
에 화는 나지만 별 달리 할 말이 없다.
"돌아버리겠네."
육 년 전엔 추천서가 발목을 잡더니 이제는 소개장이라는 신성이 등장해서 길을 막는다. 구파의 문턱이
옾은건가, 아니면 자신이 무지한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들어가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고 여기서 땅을 아무리 꺼지게 해봐야 뾰족한 수가
나올 리도 없다.
"규칙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처연한 얼굴이 되어 몸을 돌리던 장추삼이 땅바닥에서 겨우 일어나 아직까지 배를 잡고 있는 계율자를
쳐다보다 입맛을 다시며 투덜거렸다.
"하형만 아니었더라면 낮ㅇ도 수 많은 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몸소 일깨워줬으련만."
뚝-
웃음을 그친 계율자가 튕기듯 일어섰다.
"지금 뭐라고 했소?"
"눈썰미도 황인데다 귀까지 먹통이야? 별 보여주려고 했다. 왜 아니꼬운가?"
"그런데 이 도우가!"
"기억력까지 깜깜이로군. 내 이름은 도우가 아니라 장추삼이라고. 장추삼. 알아들어?"
"이익!"
또다시 유아 싸움이 재현되는 순간이라 계오자의 눈썹이 상큼 올라갔다.
"계율!"
사형의 역정에 계율자가 억울하다는 듯 양팔을 벌렸다.
"보시다시피 저자가 먼저 시비를 걸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응대를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배배꼬는 응대라면 입으로 받아칠 수준을 넘어서지."
"대협께서도 그만 하시지요. 이름 드높은 괴성 장추삼 대협이 나이도 어리고 수양까지 얕은 젊은 도사
와 실전을 벌인다면 무림동도들이 눈살을 찌푸릴 것입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넓은 아량으로 이해
해주시길."
"에휴~ 알았소, 알았는데 한마디만 첨언하지. 이봐, 어린도사! 그렇게 물정 모르고 입방아 찧다간 별이
아니라 태양을 볼지도 모른다고. 나니까 참지, 얼음덩어리였더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성질 많이 죽었다 장추삼, 하며 빙글 돌아선 장추삼이 계율자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워낙 쓸쓸한 기색이라 박대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계오자가 미안해서 그의 등에 대로 포권을 올리는데
뚱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고 있던 계율자가 끝내 참지 못하고 종알거렸다.
"흥, 누가 성질 죽었는지 모르겠네! 내 도복만 벗었다면 당분간 무언가를 씹는 즐거움을 앗아갔으련
만!"
"허허허...."
"아니, 왜 웃는 겁니까, 사형?"
"계율."
불만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계율자에게서 눈을 돌린 계오자가 중천에 떠오른 태양에게 시선을
돌렸다.
"태양을 가장 가까이 보고 싶었나?"
"예?"
"만약 도복을 벗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씹는 즐거움을 박탈당하는 쪽이 누구였을까?"
"당연히 저 도우...."
"그래서 사제는 수양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거다. 그런 눈썰미로 무엇을 하겠다는 건가?"
순간 계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말씀은 정말로 저 철딱서니 없는 건달이 괴성 본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왜 대사형께서는 소개장 하나 써주지 않은 걸까....."
고개를 모로 꼬고 잠시 생각을 하던 계오자가 문든 생각났다는 듯 계율자를 불렀다.
"아참 그리고...."
"예?"
"내가 아까 했던 말 똑똑히 기억하고 있겠지?
"뭐, 뭘 말씀이십니까?
영문을 몰라 눈동자를 굴리는 계율자에게 계오자가 천천히, 그러면서도 낮게 그러면서도 단호한 어조
로 입을 열었다.
"내 분명히 한번만 더 입을 놀린다면 한 다간 무한비무를 청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했었지?"
"헉!!"
대경하여 입을 떡 벌리는 계율자를 무시하고 손바디를 뚝뚝 소리 나게 꺽던 계오자가 멀리서 다가오는
교대자들과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마침 식사 시간이로군. 점심 식사를 마치고 즉시 연무장으로 오거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입
방정을 떨었으니 변명거리는 없을 것이다."
그날부터 화산의 연무장에선 일정 시간만 되면 어떤 도사의 곡소리가 애달프게 울려 퍼졌다고 한다.
꽤나 소란스러우면서도 불쌍한 비명이었기에 누군가 나서서 말릴 만도 할 법했지만 저간 사정을 아는
화산의 문도들은 애써 외면을 했고 결국 한 달을 꽉 채우고야 그 소리는 멈췄다고 했다.
아울러 입방정이 심했던 젊은 도사 하나가 화산의 그 누구보다 진중한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하지만 이
건 어디까지나 먼 훗날의 일이다.
"제기랄!'
또다시 문전 박대라니!
"육 년이나 지났고 아는 사람도 있었는데!"
맞는 말이다. 육년이 흘렀고 아는 사람도 생겼다. 그 아는 사람은 놀랍게도 문파의 대사형이라는 지위
까지 가진 이였고, 그러나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으니.
"내 수중에는 왜 빌어먹을 종이 쪼가리가 늘 없는 거야?!"
누굴 원망하겠는가,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거늘.
이렇게 되니 육 년 전의 섬서땅에서 느꼈던 감정과 지금의 느낌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아, 한가지는
확실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변했으니.
"내가 지금 고기를 씹는 거냐, 돌을 씹는 거냐."
그것은 주머니의 무게였다. 육 년 전이라면 최고로 허름한 객잔에 앉아 소면 한 그릇을 후후 불면서 맛
나게 먹었겠지만 이번엔 꽤나 근사한 객잔에 엉덩이를 떡하니 붙이고 앉아 좋아하는 돼지고기 볶음은
물론, 두어 가지의 요리를 추가하는 과감함을 발휘했던 것이다.
열받는 김에 먹고 죽자는 심정으로.
그런데...
무거워진 주머니만큼 입맛도 고급화되어 버린걸까. 아니면 문전박대의 충격이 지대했던걸까.
늘, 언제나, 어느 곳에서 먹어도 맛있던 돼지고기 볶음인데 오늘따라 별반 맛이 없다. 맛을 느끼지 못
하니 씹고 있는 음식물의 정체까지도 혼동이 된다.
특히나 이 객잔은 화산의 바로 밑에 위치한 수많은 객잔 가운데에서도 음식 솜씨가 좋기로 소문난 곳이
었다.
말할 것도 없이 화산이라면 하루에도 몇십명의 유람객과 무림인이 출입하는 명소, 수요에 따르는 공급
의 법칙처럼 그만큼의 객잔들이 손님을 호객하고, 그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음식 실력이라면 어디 내놔
도 뒤지지 않는 맛이라는 건데.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환상적인 맛이었는데!
"아아....."
물 하잔으로 입을 행군 그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구파, 구파, 구파,.....
어째서 구파랑 연관이 생기면 이리도 일이 꼬일까.
"아 제기랄! 하 형은 소개장 같은 거에 대해서 왜 한마디도 해주지 않는 거야!"
이런 걸 두고 동에가서 뺨맛고 서에 가서 화낸다고 하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사숙이라는 양반도 걸려든다. 명색이 무림맹주였다면서 그런 것 하나 알려주지 않고
뭐 하는 건가. 이런 기본 상식은 서로 공유를 ㅐ야 명랑 사회가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란... 위의 푸념에 표적이 된 두사람이라면 이구동성으로 버럭 소리 질렀을 거다.
물어나 보고 그럴 말을 해라 좀!
뭐 아무튼 이런저런 망상끝에 장추삼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탁자에 고개를 처박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
도 지금의 난관을 타개할 방법은 오직 하나고 그건 정말로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 결론은...
'아, 또 담을 타야 한다는 거야!'
월장은 무당에서의 한번으로 족하단 말이다!
'거기다...'
여긴 화산이다! 걸리지 않을 자신이야 충분하다 못해 넘쳐 나지만 만에 하나라도 발각된다면?
'하형을 어떻게 대하냐고!
그렇다고 이대로 죽치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 그들의 요구대로 소개장을 얻으려면 최소 보름은 걸릴
거다. 그것도 하운이 성공적으로 하남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는다는 전제하에.
그리고 십오일이라는 시간은 무림에 또 다른 사건과 기류가 넘실거리기에 충분하다는 거다. 고로, 결론
은 오직 하나, 피하고 싶지만 담을 타야 한다.
'아, 젠자앙~!'
머리를 휘휘 흔들던 장추삼이 혓바닥을 불숙 내밀어 그 끝을 손으로 조심스레 만졌다.
"이렇게 구렁이처럼 남의 담만 넘다들다간 조만간 요 끝이 갈라지고 말거야."
푸념섞인 넋두리를 늘어놓던 장추삼이 너무 원통하고 기가 막힌 현실에 먹고 죽자는 심정으로 점소이를
부르려 손을 들었다.
순간.
"정말이야? 정말로 비천혈서가 이 동네에 있다는 거냐고?"
"쉬! 쉬! 목소리 좀 낮추게!"
띠잉-
이게 무슨 소리인가? 비천혈서라니?
손을 잽싸게 내린 장추삼이 엉덩이를 슬슬 옆으로 이동시켜 옆 자리의 인물들에게 최대한 접근했다. 월
장이나, 구렁이는 비천혈서라는 한방에 저 하늘의 별이 되었음을 물론이다.
"그러니까 비천혈서가 그 비천혈서 맞는거야? 이거 당최 믿을 수가 있나?"
"이사람아. 그럼 비천혈서라고 이름 붙은 책이 그 말고 또 어디 있겠나?"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은 삼십대 중반의 두 사내였는데 자랑스럽게 내려놓은 대도가 아니더라도 외관상
으로 무림인이라는걸 팍팍 일깨워 주는 용모를 하고 있었다.
비록 주의한다고는 하지만 가끔씩 놀라 소리를 지르는 통에 대화 내용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누
구나 알아들을 정도였고, 사실 그들도 크게 상관하지는 않는 듯했다.
소문을 전달하는 쪽은 커다란 칼과 어울리지 않게 주위를 갸웃거리며 고개를 숙이는 장한이었는데 이마
에 길게 드리운 흉터가 아니라면 꽤나 잘생긴 용모였을 터였다.
반대편의 청자는 허리춤에 달랑거리는 판관필을 무기로 삼는 듯했고 머리에 문사건까지 떡하니 쓰고 있
었지만 진중하지 못한 대꾸로 보아 위의 외관은 어디까지나 장식일 터였다.
"그러니까 이곳 회음면에 정말로 그 귀물이 있단 말인가? 이것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일세!"
"섬서땅이라고 하면 내가 이리 놀라지도 않지! 분명히 회음면이라고 했네, 회음면!"
"아니, 우리 회음면엔 대화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어떤 작자가 있어 그런 귀물을 소지하고 있다는
거야?"
"그게..."
이번 얘기는 중요한 것인듯 주위를 둘러보던 대도장한이 고개를 숙여 동료에게 귓속말로 쑤근거렸다.
그러나 주의한다고, 나름대로 소리 낮춘다고는 했지만 거의 집성기 수준으로 극대화시킨 장추삼의 청력
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럿게 엿듯던 와중에 걸린 한마디.
ㅓ"... 한마디로 화산이 비천혈서와 관련이 있다는 거라고!"
쿵!
물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킨 장추삼이 놀라움을 애써 감추고 그들의 다음 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게 무슨 말이야? 화산이 비천혈서와 연관이 있다니! 자네 회음면에서 살기 싫은가?"
"소리 좀 죽이라니까! 이사람아, 이런 내가 어디서 거짓부렁 따위나 주워듣고 와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는 거야, 뭐야?"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화산이라니! 아무래도 자네 한번 단단히 경을 쳐
봐야 정신 차리겠구먼?"
판관필의 사내가 고개를 모로 꼬고 킁, 콧방귀를 뀌자 가슴을 텅텅치던 대도장한이 술 한잔을 따라 벌
컥벌컥 비우고는 손사래를 휘휘쳤다.
"아아, 믿든지 안 믿든지 그건 자네의 자유니까 내 암말도 하지 않겠네."
"누가 뭐라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래, 그래, 말이 되지 않아서 이미 섬서땅 전체에 쫘악 소문이 퍼졌고? 답답하기는!"
'섬서땅 전체라....'
장추삼의 생각과 무관하게 이들의 말은 이어졌다.
"섬서땅? 어이쿠, 섬서땅 전체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자네처럼 부화뇌동하는 치들이 많긴 많은가 보
군."
"이 사람이 그런데!"
빈정거리는 판관필사내를 노려보던 대도장한이 한숨을 쉬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 진짜 이런 말까지는 하기 싫었는데... 지금 이 말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나?"
쫑긋!
장추삼의 귀가 그야말로 최고의 집청 기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듣기로... 유한초자라고 들었네, 누군지 알지, 유한초자?"
"뭐? 정말로 유한초자란 말인가? 천 리 방방곡곡을 다니지 않은 곳 없고 중원 십팔만 리 모든 소문을
줄줄 꿰고 있다는 그 유한초자 본인을 말하는 건가?"
판관필의 놀람에 신이난 대도가 박장대소하여 껄껄 웃었다.
"누가 아니라나? 비천 혈서에 관해서 처음으로 언급된 시를 배포했음은 물론이고, 두번째 무림혈겁이라
는 흉몽지겁의 와중에서 신비롭게 사라진 그 유한초자가 이번 소문의 진원지라고 하네, 그래도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건가?"
일발역전, 그때까지 빈정거리던 판관필이 입을 떡 벌리고 연방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기고만장해진 대
도장한이 한껏 거드름을 부리며 소채를 질근질근 씹다 생각난 듯 한마디 덧붙였다.
"이번 일에는 화산이 그냥 개입한 정도가 아니라 최상층부가 개입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네."
"최상층부라면 장문 도장?"
"글쎄, 모를 일이지."
해원?
뒤로 그들의 얘기가 쭈욱 이어졌지만 장추삼은 지체없이 묵고 있는 이층 객방으로 올랐다. 들을 것은
다 들었다. 뒤의 이야기는 별 가치가 없을 터
"자자, 생각을 정리하자. 생각을."
나탁 주위를 빙빙 돌며 머리를 굴리던 장추삼이 곧 고개를 끄덕이고 침상 밑에 숨겨두었던 새장을 꺼냈
다.
"별 생각 없이 가져왔는데."
형편없는 서체지만 낑낑거리며 몇자 적은 그가 죽통에 서찰을 밀어넣고 비둘기의 다리에 조심스레 매달
았다.
"쩝, 얼른 가라."
후두둑-
손을 쫙 펼지자 하얀 비둘기는 지면으로 추락할 듯 위태롭게 퍼덕이다 곧 힘찬 날개짓과 함께 하늘로
치솟아올라 이내 까만 점이 되어버렸다.
"자, 그럼 이제는...."
턱을괴고 비둘기의 마지막 비행을 독려하던 장추삼이 행낭을 뒤져 전낭을 꺼내 들고 객잔을 나서 시전
에서 가장 가까운 마방으로 향했다.
"여기 기똥차게 빠른 말 한 필 주쇼!"
이런 손님이 등장하면 대부분의 업주들은 두 가지의 반응으로 나뉘게 된다.
첫번재,
" 손님이 찾으시는 말이 바로 이놈입니다. 겉보기에는 일반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놈 어미가 천리
마요, 아비가 관운장께서 타고다니시던 적토마의 사백팔십대 후손........."
두번째
"저희 집엔 그런 명마까지는 없지만 손님의 기대를 충족시킬 정도의 말 정도는...."
그런데 천목마방의 주인은 조금 다른 정신세계의 소유자였다.
그는 바보처럼 더듬거리를 점원에게 눈짓으로 자리를 피하게 하고는 장추삼의 위아래를 쓱 하니 훑어보
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투덜거렸다.
"빠른 말이면 빠른 말이지, 기똥차게 빠른 말은 또 뭐야?"
"힛!"
맞는 말이다. 빠른 말이면 빠른 말이지, 기똥차게 빠른 말이 어디 있다는 건가.
자고로 사내대장부라 함은 자신의 잘못을 바로바로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장추삼은 누가 뭐라 해도
사내대장부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바로 말을 정정했다.
"내 실수를 했구려,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여기 죽여주게 빠른 말 한필 부탁하오."
"아니, 그러니까 죽여주게 빠른 말은 또 뭐라는...."
"그럼 끝내주게 빠른 말로 부탁하오."
"이봐!"
"아아, 좋소 그럼..."
"됐어! 됐어!"
손을 휘휘 저으며 업주가 뚱한 얼굴로 장추삼을 보고는 마구간으로 가서 백마 한 필을 가지고 왔다.
"자, 이놈이 우리 마방에서는 가장 좋은 놈이야, 뭐, 기똥차지도, 죽여주지도, 끝내주지도 않지만 우리
집에서는 최고로 훌륭한 녀석이지."
"호오~"
윤기가 쫘악 흐르는 털이 아니더라도, 균형 잡힌 몸매가 아니더라도, 주인장의 소박한 호언장담이 오히
려 마음에 들어 장추삼이 씨익 웃었다.
"좋소, 이놈으로 하리다. 얼마요?"
"내고 싶은 만큼만 내도록 해."
"예?"
전낭을 열려던 장추삼이 주인을 올려보았다.
"얼마나 급한 일이 있는지 몰라도 이놈은 파는 말이 아니란 말이야. 얼마든 사정이 되는 대로 내고 빌
려가라고, 보증금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기분이 나빠. 그저 이 녀석에 대한 예의 정도만 되면 족하다 이
거지"
"아니, 그리 좋은 말이라면서 생면부지의 내 어디가 미더워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놀라 반문하는 장추삼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주인이 입맛을 쩍쩍 다셨다.
"장사 한두 번 하나."
"예?"
"망아지 거래하면서 밥술이나 먹지만 결국 장사라는 건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말이야. 떼어먹고 도망칠
인간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단 한번에."
"아....!"
한방 먹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장추삼이 전낭을 슬그머니 집어넣고 품을 부시럭 거리다 뭔가를 꺼내 들어 주인에게
불쑥 내밀었다.
"음? 복룡표국 십삼조 장추삼?"
동그란 목판에 새겨진 단 열 개의 글자. 그건 복룡표국의 표사임을 증명하는 명패였다.
"이 말이 주인장의 자존심이라면 이 명패는 나의 자존심이라오. 이만하면 이 녀석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오만."
"흐음...."
명패를 빙글빙글 돌리던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패를 품에 갈무리했다.
"이 정도면 아주 바꿔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겠군."
"뭐라고 했소?"
워낙 작은 중얼거림이라 듣지 못한 장추삼이 반문했지만 주인은 등을 돌려 마구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른 가라고, 나도 바쁘단 말이야."
"에....."
"은파라고 해."
"은파?"
"녀석의 이름말이야. 말 못하는 미물이라지만 이름 정도는 가지고 있는 법이야."
마지막까지 퉁명스러운 주인의 대꾸에 입을 쭉 내밀고 장추삼이 말을 끌고 마방을 나섰다. 그가 마방에
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마구간에서 얼굴을 비죽 내민 주인이 품에서 명패를 꺼내 들고 빙글빙글 웃었
다.
"강호출두를 축하한다. 은파. 최고의 젊은이에게 내준 등이니까 부끄럽지 않은 초행일 거다. 괴성 장추
삼이라면 절대로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야."
말을 급히 몬 장추삼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회음면의 초입에 위치한 객잔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거창한 일성과 함께 당당한 걸음으로 객잔을 들어선 그가 한 일은?
탁자에 앉아 간단한 음식을 시키고 깨작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 보낸 그가 음식을 그대로 남기고 계산을 치른 후에 이십여 장 정도 떨어진 객잔으
로 장소를 이동하여 같은 짓을 반복했다.
네 군데의 객잔을 돈 장추삼이 다음번에 향한 곳은 인근에서 가장 번성하는 시전이었다.
"어디 보자~"
시전하면 장추삼에게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정신이 다 빠져 버릴 듯한 상
인들의 호객성 정도는 애교처럼 받아넘기면서 요리조리 시전을 오가던 그가 반 시진을 허비하고 은파를
맡겨둔 객잔에 들렀다.
"역시.. 딱 한 군데만 더 확인하면 대략적인 굳를 잡아낼 수 있겠군."
내일 갈까, 생각하던 장추삼이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비록 바로 닥칠 일은 아니라고 보이지만 언제 어떤 형태로 터질지 모른다.
유비무환이라는 말, 괜히 나온건 아닐터.
턱을 쓰다듬은 그가 전신에 엄습하는 귀찮음을 기지개 한방으로 승화시키고 말고삐를 움켜쥐었다.
"목표 종남산! 자, 달리자, 은파!"
종남산이라면 또 감회가 남다른 곳이다. 말이 좋아 감회지, 솔직히 얘기한다면 절대로 떠올리기 싫은
퀴퀴한 골방에서 피어 나오는 냄새와도 같은 기억의 덩어리지만.
멀리서 종남산의 끝자락이 보이자 장추삼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이건 어디까지나 조건반사적인 것이라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예민한 은파로는 못내 걸렸나 보다.
푸르륵!
"어, 왜 그래?"
달음질을 멈추고 투레질을 하는 은파를 재촉하려던 장추삼이 곧 무언가를 깨닫고 잔등에서 내려 은파의
목을 쓰다듬었다. 비록 단 사흘간을 같이했지만 이 말은 그저 운송 수단으로 치부하기엔 남다른 무엇이
있었으니까.
"그래, 그래. 내가 그만 흥분을 해버렸구나. 아직 수양이 부족해서 그러니 네가 이해를 해다오."
푸륵- 푸륵-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 어서 가자꾸나."
은파를 달래고 다시 말에 오른 장추삼이 종남산의 아랫마을로 말을 몰았다.
'어라?'
여기저기 눈에 띄는 복장들. 단순한 도사들과 차원이 다른 무게감과 눈빛으로 거리를 순시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종남의 문인들이었는데 세 명에서 많게는 다섯 명이 짝을 이루어 동행인들을 주시하다 병장
기를 소지한 인물들이 보이면 다가가 무언가를 묻곤 했다.
"젠장!"
무려 육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제는 많이 희석되었다고, 아니, 완전히 떨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하니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불쾌감에 장추삼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첫사랑의 자리에 남은 향기가 오래가듯 첫 문전 박대의 자리가 남긴 멍울은 생각보다 깊었나 보다.
'아냐 아니지,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말에서 툭 뛰어내린 그가 애써 표정을 감추고 종남인들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그러다 보니 장추삼의 얼
굴은 기묘한 형태가 되었지만 본인은 알 도리가 없었다.
"수고 많습니다아~"
'음?'
막 무인 하나를 검열하고 보낸 다섯 명의 종남 도사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뉘시오?"
"아니, 나는 그냥 지나가던 사람인데 종남의 도사 분들께서 청정도, 수양도 마다하시고 이렇게 산문을
나선 것이 궁금해서 그러는 거요."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장추삼을 꼼꼼히 살폈다.
"혹시 이 동네에도 비천혈서 운운하는 괴 소문이 돌고 있는 것 아니오?"
움찔.
넘겨짚었는데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무언의 긍정 정도가 아니라 몸으로 대답을 해주지 않는가.
단 한방의 유도신문으로 전체를 파악한 스스로에 도취되어 히죽거리는 장추삼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도
사들이 불쾌한 얼굴로 뭔가 쑤근거렸다.
그리고 첫마디.
"그말 어디서 났소?"
".........?"
말의 진의르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추삼에게 사나운 눈길을 던지던 도사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붉
혔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요?"
남자의 목소리치고 다소 고음이라 듣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기에 충분한 음성이었지만 자신의 말에
대한 칭찬이라 장추심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도우께서 데리고 다니는 말, 어느 마방에서 구입한 거냐고 묻지 않소? 행색으로 보아 그리 여유있는
사람은 아닌 듯한데."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말을 보는 눈 정도는 가지고 있다.
속도와 지구력을 겸비하면서도 성격까지 유순한 말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또한 그런 말을 소유하고 있다는 건 죽을 목숨 한 번은 건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마디로 선마안은 강호인에게 있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할 수 있다. 고로 명마를 대한 무인이 탐
을 내고, 마방의 이름을 묻는 건 당연한 일.'
"오, 도사들도 이 녀석의 가치를 한눈에 짐작했구려? 이말로 말하자면... 가만?"
그러나 마방을 물으면서 남의 주머니 사정에 관심을 보일 까닭은 없다.
있다면 오직 하나의 경우.
"지금 내가 이 녀석을 훔치기라도 했다는 거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장추삼이 침착하게 반문했다. 그의 차분한 응대에 높은 목소리의 도사가 짐짓 딴
청을 부렸지만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내 살다 살다 이젠 말 도둑으로까지 몰리네."
자조 섞인, 아니, 자조를 푹 담근 음성으로 한탄하던 그가 자신에게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는 도사를
처연하게 바라보다 양팔을 벌렸다.
.. 그래, 흠쳤다면 어쩔 거고, 아니라면 어쩔 건데?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말을 간신히 눌러 참으며 몇 번의 숨 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힌 장추삼이 어깨
를 축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밀려드는 삶에의 회의.
"아아... 죽고싶다."
그때 뒤따르는 날카로운 목소리.
"어느 마방이냐고 묻지 않았는가!"
빙글-
몸을 돌린 장추삼이 억지로 웃었다. 성질 같아서는 그대로 엎어버렸을 일이나 일 벌이자고 온 것이 아
니니 도량 넓은 그가 참을 수 밖에.
그렇다고 마냥 받아만 주기도 싫다.
해서...
"이제 관아의 일까지 대신 떠맡으려는 거요?"
라고 했다.
"뭣이!"
꼬투리를 잡던 도사가 드디어 한발 나섰다. 이 도사는 주황자라는 인물로 종남의 수법 가운데 비기라고
칭송받는 홍엽수에 매진하여 섬서에서도 수법으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는 도사였는데 작은 일에
발끈한 수양은 아니었건만 오늘따라 분명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얼머무리는 보니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 도우로군? 어서 마방을 대라!"
"켕기긴 얼어죽을."
콧방귀를 클 날리고 장추삼이 다시 가던길을 가려는데 대붕처럼 몸을 띄운 주황자가 그를 막아섰다.
"그리 쉽게 보내줄 것이었다면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
떡하니 버티고 선 주황자를 보던 장추삼이 나머지 네 명의 도사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들은 주황자보다
항렬이 아래인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한 얼굴로 사태를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 지금 실력 행사를 하겠다는 거요?"
"필요하다면. 무량수불...."
뭔가 찔리는지 은근슬쩍 도호를 가져다 붙이는 주황자와ㅗ 달리 팔짱을 낀 채로 여유만만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장추삼이 소리나게 목을 꺾었다.
우드득-
누가 뭐라고 해도 건방을 풀풀 날리는 동작. 뭔가 말하려 입을 때려는 주황자를 앞질러 장추삼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내 어디가 말 도둑 같아서 이러는 거요? 그 연유나 알아야 억울하지 않겠는데."
선수를 뺏긴 억울함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주황자의 대답은 도인의 입에서 흘러나올
법한 말이 아니었다.
"개발에 편자를 보고 마음속에서부터 저어함은 당연한 노릇."
"개발에 편자라........."
배운 바는 많지 않아도 지금 이 도사가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 수 있다. 오는 말이 고와도 가는 말이
대체적으로 꼬였던 편인 인간인데 이런 경우라면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개발에 편자가 달려 있다는건 들어본 적은 없군. 뭐 하지만 개에 관한 얘기가 나왔으니 나도 한마디합
시다."
슬쩍 옆으로 몸을 들 장추삼이 종남산에 대고 포권을 올렸다.
"오뉴월 개 패듯 패야 할 부류들이 간혹 있다는 거지. 뭐, 예를 들면 쓸데 없는 입방정으로 선량한 시
민에게 불쾌감을 팍팍 심어주는 도사 나부랭이라던가."
휘르릉-
주황자의 도포가 미친 듯이 펄럭이며 팽팽이 부풀려졌다.
"그저 말 도둑이라고 여겼거늘 입 하나는 절대오존도 울고 가겠구나. 하나 오늘 종남산 자락을 밟은 것
을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말 도둑 같은 거 아니라고 했지!"
"목청까지도 수준급이로군."
으드득-
여기서 장추삼이 잠깐 고민했다.
'이 말코를 잡고 그냥 동네를 떠버릴까.'
순간적으로 그 이후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단매로 꼴 난 채하는 도사놈을 떡으로 만든다.
옆에 있던 같은 패거리 도사 놈들 광분, 분분히 나선다.
그래 봐야 파리떼 역시 떡 반죽해 준다.
소식은 쏜살같이 종남파로 접수, 자파의 쪽팔림을 만회하려는 노도사들이 떼거지로 몰려든다.
...결론 무지 피곤해진다.
'어쩐다?'
그렇다고 눈앞의 도사 놈은 전생에 정말로 멍멍이였는지 당최 말귀를 알아먹지 않으니.
"아 진짜, 여기 싸우자고 온 거 아니거든? 내가 어쩌면 좋겠소?"
"이실직고를 하라!"
"뭘?"
"말을 훔친 죄를 낱낱이 고하고 종남으로 가서 치죄를 논하면 된다. 개선의 여지가 보이면 가벼운 처벌
로...."
"치죄라고!"
듣기 싫은 단어인데 또 들어버렸다. 어떻게 구파에 몸담은 치들은 단어의 활용 빈도가 이리도 단순화되
어 있다는 건가. 그 상황이면 딱 그 단어라니.
말씨름은 무의미. 이 도사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말 도둑으로 몰아갈 거고, 똥개도 제 집에서는 오
할을 먹고 들어간다 하니 사건의 결과는 뻔한 노릇.
'결국 또 일을 벌려야 한다는 건가?'
한숨이 나왔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어떻게 구파와는 말 한마디만으로도 악연이라는 건가. 뭐
악연도 인연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문제는 시간이다. 시간.
눈앞의 싸움이 무서운 건 아니다. 종남 문인들과 숨박꼭질이 두려운것 또하 ㄴ아니다. 단지 그럴 시간
이 없다는 거다.
무림의 영웅이 되고자 함은 아니다. 그저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의 발생할 조짐이고 부인하려
해도 사단의 중심에 속해 있었던 터라 외면하지 못함이다.
"도사..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거요."
오랜만에 던진 진심 어린 충고였건만 주황자에게는 그리 고운 해석을 유도하지 못했다.
"협박이라. 내 비록 이름없는 도사라 하나 종남의 이름을 걸고 절대로 좌시하지 못하겠군."
쾅!
발을 크게 디딘 주황자가 양손을 치켜들었다.
'제길...'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장추삼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야말로 일촉즉발. 웅성대던 종남의 도사들도 숨을 죽였고 어느새 몰려든 행인들도 눈만 데룩데룩 굴
리고 있었다.
그 순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위맹한 목소리와 함께 장내로 두 명의 도인이 뛰어들있다.
"당주님들께서 어찌 이곳에!"
기를 모으던 주황자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나타난 두 명의 도사는 초로에 갓 접어든 사람들이었는데
옷자락 하나 스치는 소리 없는 보법으로 보아 그 공력을 짐작케 했다.
"대체 무슨 말인가?"
대치 상황이라는 건 한눈에 알겠다. 그런데 평범한 서민과의 마찰은 금물이거늘.
"음...?"
주황자에게서 눈을 돌린 도인들이 장추삼을 보고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분명 내공력 같은 건 털끝만큼
도 없어 보이는데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전해져 오지 않는가.
전설상의 반박귀진에 오른 고수? 그렇다면 정체를 감춘 무림인이라는 소리인데.
그렇게 보자니 또 중량감이 없다. 어디를 뜯어봐도 은거기인의 존재감 같은 건 찾기 어렵단 말이다. 지
금 취한 자세를 놓고 봐도 그저 막 싸움꾼의 그것이거늘.
"무량수불...."
아무튼 중요한 건 일의 전후.
"어찌된 일인지 설명해 보거라."
"그게...."
순간 당황한 주황자가 뒷머리를 긁었다.
"뭐 하는 것이냐? 어서 설명해로도!"
추상같은 명령. 그러나 이 불쌍한 도사는 여전히 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그러니까 그게...."
더듬더듬 이어지는 주황자의 설명을 채 듣지도 않고 세사람 가운데 눈초리가 매서운 도인이 탄식을 터
뜨렸다. 이 도인이야말고 천하삼십육검을 거의 완벽하게 익혀 종남에서 가장 강한 세 사람중 하나라고
손꼽히는 무환 진인이었다.
종남 오대당 가운데 무련당을 맡고 있으며 단호하면서도 합리적인 성품으로 차기 장문을 논하는 자리에
서 언제나 최우선적으로 거론되는 인물.
"고로 네 말인즉슨 저 도우가 단지 이방인이고, 행색과 어울리지 않는 명마를 소유하고 있기에 구입한
마방을 물었더니 딴청을 부리더라, 그래서 계속 추궁을 해도 여전히 답이 없어 물리력을 행사하려 했
다.. 이런 말이더냐?"
"그러니까 어쩔 도리 없이..."
"허허......."
주황자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우러르던 무환 진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답답하구나, 참으로 답답해."
"..........."
고개를 떨구는 주황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가 혀를 찼다.
"너를 탓하는게 아니란다. 너를 탓하는 것이 아니야. 소문 하나에 놀라 이리저리 휩쓸리고 청정과 수양
으로 만인의 모법이 되어야 하거늘 행인들에게 불신의 눈이나 던져야 하는 작금의 현실이 기막히구
나.....!"
한탄처럼 길게 말을 늘이던 무환 진인이 장추삼을 보며 정중히 포권을 올렸다. 나이도 지긋하고 지닌
바 인품까지 남달라 보이는 도사의 인사에 그 역시 포권으로 예를 취했다.
"우리 종남의 젊은 도사가 도우께 커다란 결례를 한 듯하오이다. 뒤숭숭한 시국에 마음이 급하여 저지
른 실수로 여기시고 너른 마음으로 용서하시길. 무량수불..."
"에........."
이렇게 나오면 장사없다. 뭐, 사실 문제 일으키지 않고 끝나게 되어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에이, 마음에 담지 마슈~ 저는 바빠서 이만........."
휙 몸을 돌리는데 무환 진인이 급히 장추삼을 불러 세웠다.
"잠깐, 잠깐만!"
"남은 용건이 또 있었소이까?"
"빈도는 종남의 무환이라 하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이름 석 자 정도는 교환해도 될
성싶소만?"
안 봐도 훤하다. 아무리 경황중이라 하나 주황자 정도 되는 무인이 내력 하나 끌어올리지 않은 사람과
손을 섞으려 했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압박을 받았다는 것.
껄렁껄렁한 태도 때문에? 빈정거리는 눈빛 때문에?
그건 주황자에 대한 모욕이자 종남파에 대하 ㄴ모욕이다. 그 정도로 발끈한 거면 처음부터 수양을 쌓지
도 않았을 터였고, 무학의 길을 밟지 않았을 터였다.
또한 반대편의 입장에서 보면 저 눈 찢어지고 퉁명스레 생긴 청년이 종남파의 의복을 몰랐다고 가정한
다고 해도-이 가정또한 우스운 것이 도복 상의 한복판에 떡하니 종남이라 박혀있다- 그도 아니면 종남
파 자체를 몰랐다고 치더라도 내력을 발산하는 무인의 노기를 일반인이 감당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눈앞의 청년은 단순한 동네 건달패 따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수법 하나만으로 섬서 지방을 울리는 무인을 단 한 줌의 공력을 돋우지 않고 도발시킬 인물이 몇
이나 될까.
"에이~ 이름은 무슨, 관둬요."
킬킬 웃으며 장추삼이 싹 돌아섰다.
"아 저, 저기....."
오만방자하다면 참으로 오만방자한 행동. 그런데 저 청년이 취하니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 모습을 한 켠에서 지켜보던 또 한명의 초로 도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허참'을 연발했다.
"허참, 분명히 낯이 익은데, 분명 어디에선과 봤단 말이야......."
"저 청년 말씀이십니까, 사형?"
"그래, 분명히 낯익은 청년이야 뭔가 굉장히, 확실하게,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어."
이 도인은 오당 중 내율당을 맡고 있는 무상진인이라는 사람으로서 무환 진인의 사형이자 종남 문도들
의 규율을 감독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게 뭘까, 하던 무상 진인이 끝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장추삼을 불러 세웠다.
"이보시게, 소도우!"
"아, 또 왜요?"
귀찮음을 팍팍 풍기며 돌아서는 장추삼의 태도에 순간 눈썹이 말려 올라갔으나 아쉬운건 이쪽이라 표정
을 풀고 무상 진인이 헛기침을 연발했다.
"험험. 다름이 아니라. 우리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나?"
멀뚱한 장추삼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무상 진인이 손을 마구 휘저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뭐 특별한 뜻은 없나네! 그저....."
"특별하고 뭐고 간에 낯익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소이다."
'이, 이런 깐죽이 녀석!'
말을 딱 잘려 버린 무상 진인의 안면에 옅은 파랑이 넘실거렸다. 맡은 일 자체가 규율을 통제하는 터라
경로우대사상과 예의범절에 투철한 그가 아닌가.
만약 종남 문도가 이와 비스무리한 행동이라도 벌였다면 모르긴 몰라도 종남산이 짜르르 울렸을 거다.
그런데 낯익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니?
궁금증은 분노조차 무력화시키는 법. 도호 몇 번으로 마음을 다스린 무상 진인이 깐죽이에게 다시 물었
다.
"소도우의 말은 너무 어려운 듯하네. 낯이 익으면 익고 아니면 아닌거지 어찌 그런 두루뭉술한 대답을
하는가."
"어려웠단 말이오?"
그말이 그렇게 어려웠나, 하며 입을 쭉 내민 장추삼이 입맛을 다시다 갑자기 씨익 웃으며 오른 소매를
둥둥 걷어붙이고 주먹 쥔 상태에서 비스듬히 틀어 옆구리에 붙였다.
순간 무환 진인은,
'저, 저리도 사악한 미소를 내 평생에 견식할 줄이야!'
라고 생각했고
옆에 있던 무상 진인은,
'마, 마소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위의 눈 때문에 그저 안색만 딱딱하게 굳히고 깐죽이 마도의 다음 행동을 기다려야 했다.
"이걸 보면 생각이 날지도 모르지."
사악에 사악을 더한 음성을 흘리며 깐죽이 마도가 왼손을 쫙 펴서 배꼽 정도에서 하늘을 향하고 있는
오른쪽 주먹을 밑에서부터 감싸 안았다.
"흐흐흐... 잘 보시구려."
다시금 터져 나온 마소.
상체마저 조금 앞으로 숙이고 오른발을 뒤로 반보 가량 뻗으니 오른쪽 주먹은 언제라도 출수가 가능한
형태가 되었다. 그에 따라 번져 오는 위험스런 분위기.
순간 무환 진인은,
"저런 기수식도 있었소이까. 사형?"
이라는 전음을 보내며 살짝 공력을 끌어올렸고,
옆에 있던 무상 진인은.
"형태로 보와 쾌속을 위주로 하는 권법일 가능성이 짙지만 처음 보는 동작이라 짐작키 어렵네, 아무튼
조심하게나. 보통 사악한 기운이 아니니."
라고 대꾸하며 방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목만 없었다면 선공이라도 취해서 저 마도를 응징하련만, 정황을 모르는 보통사람들의 눈에 저 마도
가 흘리는 마기를 감지하긴 어려운 일일 테니.
만약 먼저 손을 쓴다면 선량한 양민을 종남의 이름 높은 도사들이 핍박했다고들 할 거다. 종남의 문도
들이 거리를 통제하며 순찰을 다닌다 하여 가뜩이나 흉흉한 민심인데 이런 말까지 나돈다면 골치 아파
진다.
'좋다. 와라!'
'한번 해보자!'
초로의 두 도사는 간만에 찾아온 전율을 내심 즐기고 있다는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 순
간은 자연스러웠고 마도의 위험성은 입체적으로 다가왔으니까.
깐죽이 마도의 사악함이 절정에 달하고 두 도사의 긴장감이 극에 달할 무렵 마도가 입을 벌렸다.
"잘 보시구랴~"
그리고...
마도의 오른쪽 주먹이 왼쪽 바닥을 스쳐 지나가며 허공을 힘차게 갈랐다.
짜악~
움찔!
주춤 뒤로 물러선 두 도인이 이후의 여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때 마도의 짓궂은 음성이 두 도사의
긴장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나른하게 깔렸다.
"뭐 생각나는 것 없수?"
"........!"
"........!"
이게 무슨 말인가!
"아니, 이게 다인건가?"
"이게 다라고?!"
두 도사가 어처구니없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장추삼으로는 도사들의 광분을 이해하기 어려웠
다.
"아니, 그럼 뭘 기대한 거야?"
그의 심드렁한 대답에 두 도사가 분통을 터뜨렸다.
"그 기수식은!"
"그 마기는!"
억울했다. 너무나 분했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흘리는 젊은 깐죽이 마도의 살인적인 공세를-솔직히 한판
승부를-기대 했던 초로의 도사들에게 이런 공허함은 잔인한 것이었다.
"기수식에 마기? 내참. 뭐라는 건지."
툴툴거리는 장추삼에게 망연한 눈을던지던 무상 진인의 얼굴이 점차적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문도들의 규율과 규범을 책임지는 내율당주의 신분이라 무련당주인 무환 진인과 달리 바깥 출입이 잦은
그였고 그런 와중에 자연히 알게된 속가의 욕설들.
그 가운에 상체를 최대한 사용하는 온몸으로 표현되는 욕설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는 것이 있었으니.
"감, 감자바위!"
무상 진인의 외마디 비명에 무환 진인이 고개를 갸우뚱 흔들었다.
"감자바위? 그런 초신도 있더이까?"
"...."
그럴 법도 하다. 이런 걸 아는 도사가 그리 흔하지 않을 테니. 거기다 무환 진인같이 고지식한 경우라
면 더할 터. 하지만 감자바위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다.
방금 전까지 형태로 보아하니 쾌속을 위조로 하는, 운운해 놓고 이제 와서 '사실 저거 욕일세!'라고 하
라고?
죽어도 못한다!
"감, 감자바위가 맞는 건가?"
무환 진인의 물음을 무시하고 무상 진인이 장추삼에게 물었다.
"보고도 몰라요? 감자바위가 그럼 이것 말고 또 있냐?"
"으, 으윽!"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푸들푸들 떨던 무상 진인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뭔가 불쾌한 기억이 아스
라이 저편에서 몰려왔기에. 아주 아주 찝찝한 기억이.
"가만?!"
두 도사의 반응을 음미하듯 팔짱 끼고 실실 웃는 장추삼을 보노라니 그 기억 또한 실실 웃으며 자신을
내려보는 것 같아 무상 진인이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안하무인, 막무가내, 감자바위...
"산문 앞 감자바위!"
손가락으로 장추삼을 지목하며 한 걸음 비틀 물러선 무상 진인이 탄식을 뱉었다.
짝. 짝. 짝.
"그 자리에 계셨구려, 밎소. 육 년 전에 산문 앞에서 열심히 감자바위를 날렸던 사람이 저올시다."
박수라는 행위는 보통 상대방을 칭찬하거나 인정할 때 취하는 동작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시간을 두고
뚝뚝 끊어서 치니 완연한 비꼬임이 되어버렸다.
용케도 기억을 했구먼, 하며 히죽히죽 웃는 장추삼에게 이를 갈던 무상 진인이 머리를 짚었다.
"끄응~ 추천서 하나 없이 산문에 난입해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우기다가 거절당하니 방장 불러내라고 난
리 부리고, 이도 저도 안되니까 감자바위에 가래침까지 뱉을 인간은 흔치 않으니까."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무환진인과 주황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뭔지는 몰라도 장추삼이 잘못을 한 것
같기는 한데 뭔가 명확하지 않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보시오, 도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주황자가 장추삼에게 몸을 돌려 고개를 깊숙이 숙이면서 포권을 올렸다.
"방금 전 이 불쌍하고 치기 어린 도사의 행동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만약 용서해 주신다면 그에 합당
한 벌은 제가 스스로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변화? 지금까지 뻣뻣한 고개 였는데?
그러나 이번에는 장추삼도 비꼬지 않았다. 진심이란 표정한번, 말 몇마디로 약여하게 드러나는 법이니
까.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요?"
"개인 감정에 치우쳐 도사로, 무인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했으니 당연히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무량수
불..."
검문조로 차출되었을 때 주황자는 홍엽수의 마지막 초식이라는 추월낙로에 매진하고 있던 터였다. 이럴
경우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궁극을 볼 수도 있고 평생 대성이 그림자만 쫓다 끝날 수도 있다.
당연히 차출에 반발심이 들었고, 화살은 쓸데없이 일을 만드는 일반 무인들에게 쏠린 터. 그 와중에 말
한 필 끌고 건들거리는 인간을 만났는데...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종남에의 종남 문도에의 불쾌감을. 불쾌감을 넘어서 거부감을 말이다.
무엇보다 내공하나 불러 모으지 않으면서 수법이라면 섬서에서도 손꼽힌다는 자신의 기를 여유만만하게
받아낸다는 건 어쩌면 모욕에 가까웠다.
그래서 붙었던 시비였는데.
입문을 거부당한 문파에, 그 문도를 보며 기본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감정도 품지
못한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선일 터.
'주황자야, 주황자야, 사감에다 호승심이라니 정말 최악이로구나. 그러고도 청정을 거울삼아 진리의 길
을 걷는 도인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진심을 넘어선 사과에 장추삼이 인상을 구겼다. 최악으로 간 사건도 아니고, 물리적인 여하한의 충돌도
없었다. 그래서 훌훌 털고 떠나려 했는데 난데없이 왜 이러는 걸까.
"내참..."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
"대단하구나."
의미모를 장추삼의 혼잣말에 주황자가 포권을 풀고 그를 올려보았다.
"용서고 뭐고 할 건덕지도 없는 사건이었소. 그러다 허리가 뚝 부러지겠소이다."
북궁단야나 하운이 주황자에게 손을 건네는 그를 보았다면 '저건 장추삼이 아니야!' 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쳤을 거다. 그만큼이나 지금의 장추삼은 온화하면서도 포용력이 있었다.
"전통이란 대단한가 보오."
주황자의 어개를 잡아 올리며 씨익 웃는 장추삼의 얼굴엔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떤 난관이 닥쳐도 당분간 구파를 어떻게 하지 못하겠군. 어쩌면 좋소이까?"
"....?"
무슨 말일까. 그러나 장추삼은 짓궂은 미소만 덩그러니 남겨둔 채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럼 갑니다~"
"자, 잠깐만!"
"또 뭐요?"
"도우의 함자를 알고 싶소이다! 나중에 산문에 들르시면..."
"됐다니까!"
뒤로 돌아보지 않고 손사래를 치는 장추삼의 얼굴에 햇살이 가득 걸렸다. 젊은 도사의 진심 어린 사과
한 번이 육 년 전의 불쾌감을 한순간에 날렸던 걸까?
그때 구경꾼 가운데 몇몇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맞지, 그렇지?"
"어, 빈정거리면서 느물거리는 것하며 종남 도사들한테 한 치도 꿀리지 않는 것 보면 딱이야."
그들은 시전을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장돌뱅이 패거리들이었다.
"역시 대단하하구먼. 종남의 서슬 퍼런 도사들에게 할 말 다하고 유유히 떠나다니."
"그러니까 괴성이지. 달리 괴성인감."
띵-
"뭐라고, 괴성?"
"괴성 장추삼?"
그들의 대화를 슬그머니 넘겨듣던 주황자와 무상 진인이 놀라 장돌뱅이 패거리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
다.
"분명 저 도우가 장추삼이란 말인가?"
"강호삼성 가운데 괴성 장추삼이 저 도우라는 말씀이오?!"
도사들의 기세사 하도 엄중한지라 소곤거리던 장돌뱅이들이 순간적으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예나 지금
이나 일반인들에게 무인은 어려운 존재인 법이니까.
그건 도사든 승려든 마찬가지다.
"그, 그렇습죠."
"괴성 장추삼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호북 군현에서 있었던 일화를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군현 시전에 물건을 넘기려 갔다
가 우연히 접하게 된 무당신룡과 장추삼의 대결을
그리고 비겁한 암수와 한 젊은이의 의지를.
"장돌뱅이 이십여 년에 는건 눈칫밥하고 사람 구별하는 것입죠. 저 젊은이는 장추삼이 확실합니다."
"그런 결투와 의기를 보고서 어찌 얼굴을 잊겠습니까! 꿈에서도 종종 다시 보곤 하는데."
"장추삼이라고...."
허허, 웃던 주황자가 장추삼이 떠나간 빈자리에 볓 번이고 포권을 올렸다.
힘이 있으되 남용하지 않으며
의지는 굴강하나 선을 넘지 않으며
시시비비는 확실하나 용서또한 모르지 않으니..
"이 어찌 군자라 아니할까.'
주황자가 깊숙한 포권으로 자신만의 어떤 결심을 하고 있을 때 무상 진인은 놓쳐 버린 월척에의 아쉬움
을 입맛 다시기와 한숨쉬기로 풀어보려 애쓰는 중이었다.
"소개장만 있었어도."
쩝쩝.
"조금만 공손했어도."
휴우~
그렇게 혼자 괴로워하는 무상진인의 뒤로 유령처럼 어떤 물체가 다가왔다.
스르륵`
그리고 던진 한마디.
"사형............"
"음?"
"감자바위가 무엇이오?"
"............."
그뒤로 무상진인과 무환 진인의 숨박꼭질은 당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틈만 나면 유령처럼 다가와 같
은 질문을 퍼부어대는 무환 진인의 집요함도 집요함이지만 당황한 가운데에서도 초지일관 도망만 다니
는 무상진인의 고집 또한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의 이러한 모습을 보며 종남이 속가제자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손바닥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고
들 하는데 이 역시 먼 훗날의 일이다.
첫댓글 즐감합니다.
좋은하루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