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들을 가만보면 역사를 일본 핑계대고 자기합리화 하면서 그 지옥같은 시대를 미화하는 일종의 괴팍한 취미가 있다
"귀한 것은 천한 것 위에 군림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 라는 이런 개쓰레기 같은 유교적인 가치관,덕목아래 조선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였던 나라
하버드대 교수로서 국내에서도 강의했던 한국학 전문가 와그너 교수 논문을 보면 지금의 서대문구와 마포구일대,수색리,가좌동,연희궁,합장리,여의도,홍제동
일대 681호 총 인구 2374명 중 양반이 220명으로 9.27퍼센트, 양민이 334명으로 14.7퍼센트, 천민이 1820명으로 76.7퍼센트라는 숫자를 내 놓은바가 있다
이런 옛 자료들은 숫자가 불확실한 경우가 많지만 여러가지 자료를 종합해봐도 천민은 절반을 훌쩍 넘는다 우리나라 신분제 사회의 변동을 가장 먼저
광범위하게 연구했던 사람중에 하나인 1937년 일본학자 '사카타 히로시'의 자료를 봐도 대구와 울산 지역등의 자료를 토대로 연구가 이루어 졌는데
그 결과는 서울과 대동소이하다
1684년 (숙종10년) 대구 지역의 성분 분포를 연구한 자료를 보면 양반호는 5프로 내외,중인이 20퍼센트,나머지 75퍼센트가 천민계층이다
그 숫자가 족보를 돈주고 사고 팔면서 1858년이 되면 완전히 뒤집어지게 되는데 양반 집안 호적에 올라가 있는 인구가 70.3퍼센트로 늘어나게 된다
알다시피 조선시대 노비는 팔고 사는 물건과 같은 신분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서울인구는 12만명 이었는데 그 중 절반이 노비였다 노비는 기본적으로
관노비,사노비 할 것 없이 양반들이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는 가축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실의 노비는 왕 마음대로 포상으로 나눠줬다
세종 1년 1월 한확에게 노비 10구를 내려주다
성종 1년 3월 봉선사에 노비 40구를 내려주다
현종 1년 11월 고부사 정유성에게 노비 7구를 하사하다
숙종 7년 12월 역적 허견 등으로부터 몰수한 노비 500여구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다
숙종 12년 3월 현감 김창국의 딸을 숙의로 삼고 노비 150구를 내려주다
세종 6년 2월 중국인 장청 일행에게 살림살이와 전토 및 노비 3구씩을 주다 (외국인에게도 하사함)
마치 물건을 배급해 주는 듯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각 관청,지방,공신들에게 나눠줬다 명칭도 사람이 아니라
시체나 가축을 헤아릴 때 쓰는 '구'라는 말을 썼다 노비들의 사고팔 떄 가격은 얼마였을까?
태조 때 노비 값이 너무 싸기 때문에 가격을 좀 올리자는 제안도 나왔다
태조 7년 "무릇 노비의 값은 많아도 오승포 150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 값은 4,5백 필에 이르게 되니 이것은 가축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을 경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거슬리는 일입니다" 원컨데 이제부터는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나이 15세 이상~40세 이하인 자는 4백 필로
14세 이하와 41세 이상인 자는 3백 필로 정하소서" 이렇게 왕의 허가를 받았다 이 가격은 그 뒤 들쭉날쭉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조선 내내 노비 가격은
조랑말 한 마리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럼 이 많은 노비들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세종 즉위년 10월 반역죄를 범한 이방간의 아들 맹종의 노비 128구를 관속시키다
광해군 즉위년 8월 역적 집에서 몰수한 노비 등에 대해서 숫자를 파악하고 각 관아에 나눠 지급하라
정조 9년 3월 역적 모의자 주형채를 능지처참하고 처자식을 노비로, 재산을 적몰하도록 청하였으나 불허하다
1469년 예종 1년 역적으로 처형된 강순의 처첩과 자녀들을 노비로 보낸 광경은 그야말로 참혹하다
난신 강순의 아내 부귀를 곤양에, 그 첩 춘월을 웅천에,아우 강말생을 해남에,서얼 아우 강춘생을 고성에, 아들 강석손의 첩 옥금을 하동에,
첩 관음비를 사천에,...영속시키고 <예종실록 1년>
끔찍하다 죄인읜 처첩 자식은 물론이고 부모형제까지 노비로 삼아 전국에 뿌린것이다 강순은 영의정까지 지낸 무장으로 남이 장군의 역모사건때
모함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러나 사후에 모함이었음이 밝혀져 사면되었다
심지어 근대 시기인 고종 때에도 이런 전통은 변함이 없었다
제천의 죄인 남종삼을 가둔 다음 그 처는 창녕현에,9세 딸은 산청현에,7세 딸은 영산현에서 계집종으로 삼고, 4세 아들은 의령현에서 종으로 삼도록 한다
이런식이었다 각각 다른 곳 노비로 보내자는 보고가 올라오자 고종은 어린 아이들을 뿔뿔히 흩어 버리지 말고 어미가 있는 창녕현으로 같이 보내라고 명했다
그나마 군주로서 일종의 인도주의적인 처사 였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 많은 노비들은 모두 죄인의 가솔인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려에서 조선왕조로 넘어 오면서 상당한 숫자가 노비로 전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성계는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으니 전 왕조의 인물은 모두 정적이 된다 당연히 정적 제거가 1차 목표였을 터이므로 그들을 노비로 신분을 강등시켜
버리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있었을 것이다
예전부터 이렇게 노비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나라현 정창원에는 신라시대 고문서가 남아 있는데 청주 부근 4개 부락의 인구 구조를 기록한 것이다
거기에 보면 노비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10퍼센트 미만이다 고려 시대에도 매우 낮았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서 급증한 것인데 이유는 미스테리다
연구자료도 없고 결과도 없다
노비들이 많아진 이유 중 다른 하나는 노비가 낳은 자식 또한 노비가 되는 제도 때문이다 한 번 노비이면 평생 노비이고 그 자손도 노비가 되는것이
조선의 전통이었다 당연히 노비는 숫자가 늘어나게 되고 결국 조선은 노비의 나라가 되었다
그런 짓눌리고 억압된 봉건 노예제도 속에서 아래부터 위로의 혁명이 폭팔한것이 바로 동학농민 운동 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역사적인 반성도 없이 조선의 황실을 복원하는건 이 나라의 수치라고 생각한다
출처는 여기로 보입니다 : i1.daumcdn.net/svc/attach/U03/blogbook/52B7B7AC025DB10006
1. 천민이 76.7퍼센트 혹은 절반이 넘는다는게 사실입니까? 실제적으론 더적었던걸로 알고있습니다.
2 서울인구 절반이 노비라는것이 진위여부가 의심되고 사노비랑 관노비가 취급이 같았습니까?
3 노비가 생긴이유랑, 신라와 고려에선 엄청적었다가 조선에서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설명이
맞는 설명입니까?;
혹시 그외에도 잘못된부분들이 있다면 부디 가르침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이신기오로 그럼 어떤 문제가 농민운동을 촉발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노비의숫자 10퍼센트 미만 드립은 그럼 헛소리란 말이군요. 혹시 반박하는 자료같은게 있나요? 그리고 사노비와 관노비는 다르게 취급받았다고 봐야합니까?
그리고 뭐 조선조 들어서 죄수를 노비로 전락시켜서 노비수가 많아졌다고하는데 이에대한 반박같은게 있나요?
@찰스디킨스 일단 조선 이전 시기에 한해서 십퍼센트 운운한는 건 이영훈 교수도 그렇고 여러 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기반합니다. 조선조에 들어서 가시적 노비 인구가 증가한 건 대체로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보통 생활고 겪는 양민들이 노비로 되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죄수들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게 주를 이루진 않았죠.
조선인 칠팔십 프로가 범죄자였다는 해괴한 결론에 이르니까요
@Sinsigel 그럼 펌글에서 언급하는 동학농민운동의 이유같은경우는 잘못된거라고 봐야되는겁니까?;
@Sinsigel 이영훈 교수님 글을 찾아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성종시대를 전후로 호수 측정의 변화(기존의 대가족적 헤아림을 핵가족으로 변화시키면서 사적으로 드러나지 않던 예속관계 하의 인구가 드러남.)와 여러 분류의 천민들을 노비로 통폐합하는 작업의 결과가 노비의 증가로 나타나죠.
@아이신기오로 양수척과 같은, 아예 국가의 통제 밖에 있는 천민들이 꽤...
어 고려시대는 모두가 평등했나봐여??
@우에스기 겐신 ㅋㅋㅋㅋㅋㅋ
@우에스기 겐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도 촌철살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귀족 양민 향 소 부곡민 천민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고려왕국. 키야
노비 비율 저거 대체 어느 연구서에서 나왔는지부터 한번 봅시다. 그리고, 노비를 노예인양 취급하는데, 노예와 농노의 차이가 뭔지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와그너의 통계자료는 맞는 걸로 기억하지만, 사카타 히로시 자료를 정확하게 인용했는지는 모르겠군요.
물론 17세기 후반 이전 노비 비율을 50퍼센트까지 추정하는 사학자들도 있으니 '노비가 전체 인구 절반'이라고 운운하는 대목이 아주 그른 것은 아닙니다.
노비를 말하는 물건이라고 양반들이 취급을 안한 것도 아니고요. 다만, 실질적인 노비의 매매가 흔하지 않았다는 점, 한정적이나마 양인과 같은 권리(재산 상속, 처분권 및 송사를 제기하거나 증언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점, 그리고 18세기 이후로 노비 인구가 격감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고용인인 머슴과 비슷하게 변해갔다는 것만 지적하고 싶네요.
팔레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노비제라는 억압적인 신분제에 대해 무감각했던 건 맞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을지언정 세월이 지나면서 조선 내부적으로도 나름대로 반성과 개선의 흔적이 보였다는 점을 간과한다면, 과거라고 무작정 미화하는 것 못지않게 혹평 일색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우를 범한다고 생각합니다.
쿨타임 찼나보네. 천민수치가 저렇게 미칠듯이 높았으면 재정붕괴가 당연한건데 말입죠. 이런 일이 조선 후기에 일어나지 않았나요. 저기 써 놓은 양반의 급증으로.. 예시라고 든 것도 자극적이지만 영양가 없는 조선 초기 그것도 숫자가 상당히 적은 예시고, 숙종대의 자료 역시 대구지방의 근거 하나만있는데 국가 전체가 동일한지는 알 수 없는데 말이죠.
조선시대의 세법은 요즘으로 치면 재산세개념의 자산보유자에게 걷는 세금에 가깝기때문에, 천민수치랑 재정과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당대 세제상 상민에게 걷는 세금인 부역이 있고, 비슷한 계급에게 부과되는 세금으로 청에서는 인두세가 있긴 하지만, 청대의 조세흐름은 이러한 세금은 경감해주고, 온니 자산보유자에게만 걷어서 국세를 충당하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천민수치랑 재정과는 그닷 무관합니다.
오히려, 무산자의 소득(주로 임금노동자)에 더 많이 의지하고 있는 세법체계는 현대에 와서 두드러졌습니다. 그 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것은 그리고, 조선당대에 있어서는 무산자로 몰락한 상민은 노비로 후딱 인정해주는 것이 세부담을 경감시켜주는 조치였다고 사료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세법에 관한한 조선의 계급적 관건은 상민호구로 유지, 등록이 불가한 계급이 후딱 노비로 인정받고, 상민에게 부과되는 역과 공납의무를 벗는 것이므로, 획일적으로 상민육성이 국가대계라고도 말 못합니다.
근데 희안하게 조선에서는 아무리 노비라도 외국에 팔거나 인신매매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네요. 옆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전국 시대 시절 옆 쿠니라고 해서 심심하면 잡아다가 팔아먹은 걸로 알고 있는데.....
잘 모르는 서양인이나 현대인의 눈엔 노예하면 마소나 기계취급당한걸로 아는데, 이건 문화에 따라 달라요.
로마의 노예가 오히려 프랑스혁명기전의 농노보다 자유로웠을걸요? 또한 그런 로마에도 마소취급된 노예, 가족의 구성원취급됬던 노예등 취급이 가지각색이였구요. 서양사에서만 해도 노예의 그림이 이리도 가지각색인데 왜 맘대로 조선의 노비를 농노보다 못한 존재로 단정지어서 결론을 내는지 모르겠네요. 하긴 서양측에선 농노들을 노비처럼 부리고선 세금도 다 받았으니 90프로가 노비여도 나라가 돌아가는줄 알겠죠. ㅎㅎㅎ
그리고 유교적인 가치관드립 아놔...- - 개독보고 예수깔 사람이군요.
숙종조 천민 70% 드립이 맞다 쳐도 불과 150년 후에 이게 30%대로 떨어지는 이유는 과연 뭘까요 ㅋㅋㅋㅋ
사실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의 신분제도의 완고함은 일>한>중 수준이지 말입니다.
그리고 노비=천민=노예의 시점부터 글러먹었어요(....)
혹시 그거에 관한 자료나 그런거 링크 달아주실수있나요?; 신분제도 완고함이라던가 30프로대로 떨어지는거라던가
@찰스디킨스 사무라이 중 묘자를 쓰고 칼을 차는 신분과 하코셩이라고 부르는 농민의 경우 사무라이는 농민을 적법한 절차 없이 행차하는 길을 막아도 그자리에서 사형시킬 권리가 있었고.. 실제 사츠마와 영국군간의 전쟁이 일어난 이유가 사츠마의 번주의 행차를 서구인이 막은 것(나마무기사건)을 문제삼아 아주 사츠마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죠(사쓰에이전쟁). 또한 일본전설 처럼 내려오는 사무라이가 칼의 강도를 실험하기 위해 지나가든 사람을 벳다식의 이야기는 일본에서 너무나 흔한이야기죠..
@찰스디킨스 백정白丁은(하쿠쩌)백성을 말 합니다. 조선중후기 들어와서 백정이 천민중 도축,가죽업자를 말하는 것으로 바꿨지만 고려-조선초기 까지 백정은 백성을 말하는 것이었고 일본에서 백정은 백성이며.. 일본천민의 경우 부라쿠민(部曲)이라고 하죠
@양시칠리아 아 제가 말한건 사무라이가 사형시키는 권리에 관한걸 말한거였습니다;
@찰스디킨스 상급 사무라이들 다이묘나 바쿠에 소속된 사무라이중 묘자를 받은 고위 사무라이 경우 하쿠쩌들을 재판 없이 즉결 처분으로 그자리 에서 참살 할수 있는 권리를 당연시 했고 일종의 특권으로 생각 했으며. 상위 사무라이가 즉결 행사로 바쿠후나 다이묘로 재제를 받은 경우는 손에 꼽힐 정도 입니다. 백성들의 수탈로 인한 잇키가 발생하지 않으면 사무라이에게 특별한 제재는 없었고 오히려 상인의 돈을 빌려 갑지 않은 죄가 더 무거웠음
500년 동안 노비의 정의는 어땠고, 어떻게 바뀌었고, 어떤 식으로 운용됐고, 그런게 전혀 없이 그냥 자극적인 토픽 몇 개만 올려놓았다는 느낌밖에 안들어서...
서울은 양반이 많고, 따라서 천민도 많습니다. 양반 수가 천민보다 많을리가 없잖... 최소한 부호들인데.
중~고등학교 국사책만 봐도 이런 소리 못하지 -_-^ 까고자 한다면 사람의 손가락 발가락 모습만 보고도 비난 질을 할 수 있는 게 인간의 심성입니다.
만사가 부정적이고 이론적이며 소견이 좁고 자기반성을 잘 못하는 사람이 이런 태도로 왜곡된 시야를 절대화 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무슨 스파르타도 아니고....
1. 과거 시대를 현대와 비교해서 현대의 매우 이상적인 자유 민주주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현실"을 까면 안까일 존재가 없겠네요.. 아니 현실에도 돈 문제 때문에 성매매하고 사실상 노예상태로 묶여서 권리 보호 못받는 사람 널렸는데요?
2. 역적에게 연좌제가 폐지된 것은 동양에서는 100년도 안되죠.. 서양도 완전하게 연좌제에서 벗어난 것은 150년 조금 넘습니다. 형벌로 노비로 만든건에 무슨 잔인ㅋㅋㅋㅋㅋㅋㅋ 원래 다 사형인데 나름 관대해서 그냥 목숨은 붙여준거죠.. 저렇게 노비로 팔려도 돌고 돌아서 노비 신분 면하는 케이스도 많습니다.
http://ww.hotge.co.kr/b/v/ilbe/203505/5
조선황실을 복원하는건 나라의 치욕 +89 [16]
일간베스트 원문링크 www.ilbe.com/3856079140
이 자들을 가만보면 역사를 일본 핑계대고 자기합리화 하면서 그 지옥같은 시대를 미화하는 일종의 괴팍한 취미가 있다
"귀한 것은 천한 것 위에 군림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 라는 이런 개쓰레기 같은 유교적인 가치관,덕목아래 조선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비였던 나라
검색하다 찾게됬는데 일베꺼였군요;
세종 즉위년 10월 반역죄를 범한 이방간의 아들 맹종의 노비 128구
숙종 7년 12월 역적 허견 등으로부터 몰수한 노비 500여구
나름 어깨에 힘좀주고 살았다고 해도 그리고 저당시 대가족으로 집안이 이뤄어 졌을것이라 짐작하더라고 너무 많은 노비의 숫자 아닌가요?
저당시 양반가들의 평균적이 노비 보유숫자를 모르겠지만 저정도 숫자의 노비를 보유했다면 어쩌면 노비의 숫자는 정말 많지 않았을까요?
노비의 숫자야 많았지요. 사노비는 외거노비와 솔거노비로 구분됩니다. 공노비는 입역노비와 외거 노비로 구분되고요.
재밌는 사실은 노비가 노비를 소유하는 것도 가능했죠. 주로 외거노비들이 그러했는데, 그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조선시대 노비에 대한 개념은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고 해당 노비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지금과 같이 현대적인 합리주의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사례를 통해서 이해하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중기에서 후기엔 노비에게 빛을 진 주인 양반이 빌빌 거리며 곡식을 꾸어 먹는 경우도 많았으니, 단순하게 노비=노예의 관점으로 사회를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춘자 조선 중기에 성리학과 불경에 통달하여 유학적 지식이 경지에 이른 노비의 밑으로 선비들이 배움을 청하기 위해 엄청나게 몰린 일도 있었는데
서경덕의 제자 박인수라는 노비가 그러했습니다. 노비의 숫자가 많기도 했지만 그들 중에 특출난 자나 재산을 모아 신분의 벽일 뛰어넘는 자들도 많았으며
주로 외거노비들이 재산을 쌓아 신분의 벽을 넘곤 했는데 이는 조선시대 땐 외거노비를 통해 대토지 경작이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죠.
그들이 부를 쌓아 점차 양인의 신분을 얻어 노비의 신분을 벗어나는 사람이 많았기에 조선 후기에 신분제의 동요가 일어난 겁니다.
아마 위에 어깨에 힘 좀 준 양반의 노비는 대부분이 외거노비였을 겁니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사람들을 보세요. 왕족, 그리고 당대에 손꼽히는 중신입니다. 당대 탑 엘리트지요. 오늘날의 상류층 중에서도 이건희 수준의 재산과 힘을 가진 사람은 손에 꼽을 수준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