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로 율법 안에 복음이 들어있는가?
(3) 그리스도의 율법을 뜻하는 자유의 율법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2) 복음 및 계명과 겹쳐지는 자유의 율법!
● 갑작스러운 변수와 치열한 연구 끝에 도달한 결론!
ㄱ) 우리가 첫째로 해결해야 할 의문은 18절과 19절이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문맥을 자세히 보면 답이 보입니다.
개역개정은 21절에서 "너희 영혼을 구원할"이라고 번역을 했고, 미래의 구원을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가 이처럼 시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구원의 서정, 즉 칭의 성화 영화 모두 시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제를 통해 이 구절에서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원어가 시제와 무관합니다. 그래서 존 맥아더는 이 구절의 '구원'이 '구원의 서정' 전체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저는 이 견해가 미덥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제와 무관하다는 사실 때문에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을 통해 18절과 19절 사이의 단절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21절의 "구원할"이 구원의 서정 중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과거의 구원, 현재의 구원, 미래의 구원, 현재와 미래의 구원, 세 가지 다 등 모든 유형의 해석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또, 뚜렷한 단서가 없고 너무 복잡해서 굉장히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동안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시제 위에 문맥이 있다!'
그래서 문맥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미래를 염두에 둔 현재시제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저는 21절의 "구원할"이 구원의 서정 중 어떤 것을 뜻하는지 비로소 정확히 분별하고 캐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깨달은 것을 녹취한 것이 워낙 방대해서 간단한 것부터 복잡한 순으로 세 가지로 정리를 해서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먼저, 가장 간단한 설명입니다.
이미 말한 대로, 21절의 "구원할"은 시제와 무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서정을 모두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의 구원과는 무관합니다.
그 이유는,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구원받은 신자들입니다. 그들에게 구원을 잘 이루고 반드시 궁극적인 구원을 받으라고 권하고 있는 곳이 1장과 2장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나타난 구원이 그들이 이미 받은 이미의 구원이라면 어색하지 않나요? 그러므로 이 구절의 "구원"은 과거의 받은 구원과는 무관합니다.
다음은, 중간 길이의 설명입니다.
21절의 "구원"은 구원의 서정 중 중생이 아니라 성화 및 영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 미래에 받을 궁극적인 구원과 간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지금 궁극적인 구원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은 물론이고 2장 14절도 이것을 뒷받침해줍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러므로 미래의 구원과도 관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다음으로, 이 구절의 구원은 현재에 방점이 찍혀 있고 현재의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물론 야고보는 궁극적인 구원에 관심이 있고, 그것을 얻게 하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구입니까?
야고보는 2절과 19절에서 그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18절에 의하면 거듭난 신자들입니다. 이런 그들이 궁극적인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재의 구원을 잘 이루어야 합니다. 때문에 야고보는 13절부터 끝까지 현재의 구원에 촛점을 맞췄습니다. 15절도 직접 궁극적인 멸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장성하면 살아 있어도 구원을 상실한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현재 상태에 대한 것입니다. 또, 19절부터 그들처럼 되지 말라고 설명하면서 결국 현재의 순종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2장도 현재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12절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했으므로 궁극적인 구원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는 것 자체의 초점이 현재입니다. 또한, 13절도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것이고 14절도 그러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그러나 그 뒤 계속 현재의 칭의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1장 21절의' '구원할'이 과거가 아니라 미래와 관계가 있고 현재에 방점이 찍혀있다. 미래의 궁극적인 구원과 관계있지만 현재가 초점이다.'라고 한 것이 매우 정확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21절의 "구원"은 현재와 미래 두 가지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제와 관계가 없는 단어를 사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구원할'이라는 표현 때문에 현재의 구원을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현재의 구원은 받는 것이 아니라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빌 2:12). 저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의 구원 둘 다와 관계가 있다면 이런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더구나, 현재의 구원도 이미 구원 받은 신자들이 계속 이루어 나가야 할 구원이고 미래의 궁극적인 구원도 받아야 할 구원입니다. 때문에 "너희를 구원할" 즉 너희를 구원할 수 있다는 표현이 아주 잘 어울립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길고 자세한 설명입니다. 참고로, 이 설명의 끝에 18절과 19절의 단절에 대한 해법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야고보서 1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이 구절은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또, 13절은 하나님이 마귀처럼 사람을 악으로 시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절은 그러므로 사람이 시험을 당할 때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오롯이 사람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또, 15절은 그 엄중한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으니라."
그다음, 야고보는 16절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당부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런데 이 구절에서 크게 두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뜬금없이 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할까?'
저는 오래전부터 이것이 궁금했습니다.
먼저, 이것은 13절의 '하나님은 사람을 악으로 시험하지 않는다'는 것에 근거한 것입니다. 악은 좋은 것도 온전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악이 아니라 좋고 온전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좋으신 분입니다.
또한, 이것은 15절의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것의 반대입니다. 그래서 '은사'와 '선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다음 구절들을 보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더 잘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