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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무사 283 타초경사
'올 때가 되었는데.'
회음면으로 돌아온 장추삼이 창가에 턱을 받친 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종남산에서 돌아온 지 벌
써 사흘. 첫 소문을 접하고 벌써 나흘이란 시간이 흘렀다.
소문은 그 부정확성만큼이나 형태 변화 또한 심한 법. 출처가 불분명한 경우이거나 목적성을 가진 경우
라면 그 폭은 더욱 커진다. 음험한 목적성 말이다.
처음의 소문은 그저 비천혈서의 재등장과 소문의 근거가 유한초자이고 그것에 화산이 관여했다는 정도
였다. 한마디로 비천혈서의 내용 따위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나흘이 흐른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비천혈서가 알고 보면 낱장으로 이루어졌다....라, 맞지, 맞는 말이지"
품에서 종이 석 장을 꺼낸 장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요놈들을 얻으면 뭐, 무림기보? 천하를 좌우한다고? 무슨 헛소리냐고!"
일정부분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현존 최강의 아홉 문파에 관한 과거의 기록이고, 그 과거라는 게 지극
히 추악한 형태니까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을터.
그러나 만약 아홉 문파에서 일정 부분의 손실, 즉 추악한 과거의 들취짐을 감수한다고 친다면 그 영향
력은 현저하게 감소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비천혈서는 구파의 약점잡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거다.
'생각해 보니 골 때리네.'
약점잡기 정도면 만승검존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비천혈서에 연연할 이유는 없다. 지위도 지위지
만 그저 약점잡기 수준의 한계를 모를 리 없는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십장생과 그 배후. 그들역시 과도할 정도로 비천혈서에 집착을 보였다. 구파의 힘과 전통을 모
를 리 없는 그들은 왜 또 그렇게 매달렸을까.
"이거 진짜 무림기보 아냐?"
종이들을 위아래 들춰보던 장추삼이 혀를 쑥 내밀었다.
"바보 같다. 진짜."
이때 태양 가운데 점 하나가 떠올랐다. 검은 점으로 보였던 물체는 점차 커져 하얀색으로 바뀌었고, 이
내 요란한 날갯짓과 함께 그가 머무는 창으로 날아들었다.
"이제 왔구나."
반색을 하며 비둘기를 반긴 장추삼이 구구거리는 녀석에게 모이 몇알을 주며 다리에 매달린 죽통을 조
심스레 벗겨냈다.
"어디 보자..."
호북은 균현 외에 소문이 전무한 상태다.
표국주님의 도움으로 알아본 결과 하남 역시 등봉현과 곤륜산 일대를 제외하고 잠잠하다.
사천이 조금 시끄러운 편이지만 이는 아미와 청성, 그리고 점창과 단일세력으로는 가장 까다롭다는 당
문이 몰려 있기에 그럴거다. 실제로 소문 자체의 근워니 그들의 권역에서 가장 활발하니까.
감숙성 또한 어쩌고저쩌고......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장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예측은 놀라우리만치 정확했으니까.
"시간이 다가오는 구나...."
무슨 시간을 말하는 걸까?
불길한 사건은 모두 음험하고도 은밀하게 다가오는 법일까. 통상의 이야기들을 보면 그렇게들 묘사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너무도 당당하게 일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전개라면 발생이 아니라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더욱 위험하고 불길하다.
전서구가 도착하고 이틀이 흐르자 긴장의 끈을 놓치 않던 장추삼도 점차 맥이 빠졌다. 여기저기서 종달
새처럼 지저귀는 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지친단 말이다.
이런 대비는 그의 몫이 아닐 뿐더라. 방식도 아니다!
"피곤하네, 피곤해."
다탁에 뺨을 대고 축 늘어져 있언 장추삼이 엽차나 마실까 해서 주전자를 들어싿.
"얼레, 비었네."
언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는 터라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기름진 음식도 최대한 자제했다. 최상이 몸과 최고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이번 싸움은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형태가 될테니까.
그런다 보니 천장 바바보다 물 마시고, 천장 바라보다 물마시고를 무한 반복한 지 어언 열흘이 지났다.
하나 소문은 답보상태를 그대로 유지했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간다.
혹시 이러다가 그냥 묻혀 버리는건 아닐까. 단지 한때를 풍미한 단발성 소문에 혼자서 조바심을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순간 장추삼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넘겨 버리기에는 너무도 치밀했고, 점차적이었으며 체계적인
모습이었다. 단순한 소문과는 분명히 다르다.
물주전자를 휙 잡아 던진 그가 침상에 대자로 뻗으며 가슴에서 우러나는 한탄을 입으로 토했다.
"이게 병아리지, 사람이냐고!"
멍청하게 천장을 노려보던 장추삼이 배도 고프고 답답하기도 해서 객잔 일층으로 내려왔다. 며칠간 두
문불출 했더니 온몸이 뻐근한게 상태가 영 아니다.
'역시 면벽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멀어.'
생리에 맞지 않아. 중얼거리며 기세 좋게 대지고기 볶음을 외치고 탁자에 앉은 장추삼이 오차를 홀짝이
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겨울의 끝 무렵이라서 일까. 저마다 두꺼운 옷으로 추위를 감당하고는 있지만
표정만큼은 한겨울의 그것돠 달리 완연한 봄색처럼 유해져 잇었다.
하긴, 늦 겨울을 달리 말한다면 이른 봄일 테니.
"좋은 일이야~"
괜히 기분 좋아진 장추삼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왜 그럴때 있지 않은가, 뭐든지 술술 풀릴 것만 같은.
"주인장, 등딱지가 배딱지하고 조우하겠다고 기승을 부린단 말이오 어서 먹을 것을 좀 주시구려!"
"예, 예~ 곧 나갑니다아~"
장추삼의 투정성 재촉에도 객잔의 주인은 웃는 얼굴을 잃지 않고 여유롭게 응대했다. 이러면 또 약해지
는게 양양의 미식가가 아니겠는가.
"봄이 오는 소오리~"
콧노래는 끝내 입으로 터져 나왔지만 크지 않은 노래였기에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편했고, 그래서 느긋할 수 있었다.
"주문하신 돼지고기 볶음 대령이요!"
"오, 어서 가져와!"
음식을 가져온 점소이가 장추삼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왕방이라는 이 청년은 위임됨이 비록 겉멋에
취해 있다고는 하나 부지런하고 눈치가 빨라 이곳 객잔에서 인정을 받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여장을 푸는 첫날부터 장추삼과 친해져서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대협, 대협!"
요렇게 고개를 숙이면서 귀에 대고 소곤거릴 때는 뭔가를 물어왔다는 뜻인데,
"무슨 목적으로 대협께서 이곳에 머무시는지 몰라도 당분간은 회음면을 뜨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요."
"음?"
장추삼이 의혹 어린 표정으로 왕방을 올려보다 전낭을 꺼내 몇푼을 쥐어주었다.
오가는 현찰 속에 싹트는 정보 공유?
"무슨 말이야?"
재빨리 돈을 갈무리한 왕방이 더욱 소리를 낮추었다.
"요즘 비천혈서인지 나부랭이 때문에 회음면이 뒤숭숭한 건 아실 겁니다요. 그런데 말이죠."
왕방이 계산대의 주인 영감을 흘낏 거렸다.손님더러 객잔을 떠나라는 말을 하는 거니 눈치를 볼 수 밖
에 없을 터. 잠시 말을 멈추었던 점소이 청년이 빠르게 속삭였다.
"이게 좀 커졌는지 회음면으로 무림인들이 속속 몰려오고 있다고들 합니다. 권법명가라는 철권파는 물
론이요, 창으로 한가락한다는 승창문의 무사들에, 섬서 흑방에서 최고라는 조혈방까지 나섰다고들 합니
다요."
"그게 정말이야?"
"물론입죠! 제가 객잔동이 아니겠습니까요. 그들이 아직까지는 화산파의 기세에 밀려 턱밑까지는 오지
않았지만 껀수 하나만 잡으면 언제들지 치고 들어올 기세라고들 하더라고요. 거기다 다른 세력들도 속
속 집결하고 있다고 합니다요!"
그 뒤로 각 객잔의 점소이들과 자신의 친분관계를 분주히 늘어놓는 왕방을 무시하고 장추삼이 생각에
잠겼다.
철권파와 승창문이 이번 일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구파라고 처음부터 구파가
아니었듯 명문으로의 중흥을 꿈꾸는 신흥방파에서 이런 무림사에 얼굴을 내밀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일터.
도한 여타 문파들의 관심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조혈방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말 그대로 조혈방은 흑방이다. 흔히 말하는 마도니 사도가 아니
라 이권과 돈에 목숨을 거는 흑방이라는 거다.
정파라고 전부 이슬처럼 깨끗한 것은 아니지만 흑방처럼 대놓고 나쁜 짓을 일삼는 건 아니다.
'이거 골 아프게 됐는데.'
또한 흑방 세력은 제일차 무림혈겁에서 강호인들의 단결을 이끌기 위해 구파가 중심으로 결성된 무림맹
이 지속적인 압박에 의해 음지로 모슴을 감추었다.
망둥이가 뛰면 꼴뚜기도 뛴다고 하던가?
음지에서 호시탐참 기회를 엿보던 조혈방이었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은근슬쩍 나서겠다는것 아닌가.
"제기랄...."
어처구니없는 건 다른 중소문파들의 반응이다. 나름대로 정도를 표방한다는 철권파와 승창문의 입장이
라면 당연히 조혈방의 발호를 견제하고 막아야 할 터.
그러나 왕방의 얘기대로라면 어떠한 제재 조치도 없다고 하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눈감아주기라고 할까.
이유?
'뻔하지.'
화산이라는 거대 문파가 연관되어 있으니 다만 손 하나라도 어하겠다는 심산 아니겠는가. 그것이 흑방
이든 뭐든.
합종연횡이 약자들의 보루라고 해도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이건 신념도 가치관도 배제된 그저 탐욕이
라는 이름의 머릿수 채우기일 뿐이니까.
물론 장추삼이라는 인간이 강호의 안녕이나 무림의 안위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는 만무. 그가 조혈방의
등장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흑방의 생리 때문이다.
세력없이 뒷골목을 평정하면서 사사건건 흑방들과 부딪치다 보니 어느 누구보다 흑방의 습성에 대해 훤
히 꿰고 있는 장추삼의 눈에 조혈방의 등장은 분명 의외였으니까.
조혈방이 비록 섬서 최대조직이라고는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흑방들 가운데 우두머리 격이다. 결코 섬
서 무림의 윗대가리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승냥이가 난데없이 범의 행세를 하겠다는 말인데, 이건 뭔가 이치에 맞지 않아.'
흑방은 기본적으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사건이 종결되거나 막바지에 이르렀을 대 은근슬쩍 끼어들이
잇속을 챙기고는 바람처럼 사라지곤 한다.
사냥으로 얻는 전리품보다 썩은 고기를 탐닉하는 승냥이들. 그것이 흑방의 속성이거늘. 그렇다고 무림
맹의 서슬이 느슨해져 그들이 마음대로 활보할 판국도 아니다.
그런 그들이 사건의 도입부에 주도적으로 나선다.?
이건 흑방식의 일 처리가 아니다. 지난 세월 동안 얼마의 힘을 비축해 놨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그래
봐야 흑방은 흑방이다. 그리고 흑방에도 전통이란 엄존한다.
그렇게 장추삼이 상념에 빠져 있는데 객잔의 주렴을 급하게 걷으며 사내 하나가 뛰어들었다. 그는 회
음면의 시전에서 도자기를 파는 고천이라는 자였는데 다른 때와 달리 상기된 표정이라 객잔의 주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이보게 고천, 무슨일이라도 있는 건가? 얼굴이 왜 그모양이야?"
"아아. 물이라도 한잔 주게!"
고천의 제촉에 객잔 주인이 주방에서 냉수 한 사발을 떠왔다.
"자자, 물 여기 있네."
물그릇을 낚아채듯 받아 든 고천이 단숨에 들이키고는 옷소매로 턱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세상이 망조야! 조혈방 놈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지 않나! 내참 어이가 없어서!"
"이봐!"
고천의 입을 막으며 객잔 주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이거 놔! 내가 못할 말을 했어! 흑방 놈들이 활개를 친다는게 대체 말이 되냐고!"
"그래도 이사람이!"
주인의 다급한 음성에도 고천은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왜, 조혈방 놈들에게 앙갚음당하는 것이 그리 무서운 거야? 웃기지 말게 자네나 나나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무슨... 말이야?"
워낙 비통한 넋두리라 객잔 주인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물론 흑방의 인물들이 나대고 다니면 일반인들
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은 뻔하다. 그렇지만 다 끝났다는 말을 할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거다.
"대체 무슨 말이냐고?"
주인의 재촉에 한숨을 내쉰 고천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자네, 내가 삼십년 전에 산동 땅에서 이곳 섬서로 이주한 건 알고 있지?"
"그야 모를 리가 있나?"
"이유도 알지?"
주인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모를까. 술자리에서 수도 없이 들은 얘기인데.
고천의 부친은 산동에서 꽤나 큰 도자기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장사수완도 남보다 앞섰던 거의 부친은 저가의 도기상에서 만족하지 않았고, 곧 동방의 청자기에도 손
을 댔다.
물량이 확보되고 고관들과의 거래가 조금씩 활발해질 무렵 산동에 큰 난리가 났다.
두 번째 무림혈겁이라는 흉몽지겁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부친이 운영하는 도자기집이 비천혈서를 소지했다고 의심받았던 어떤 문파와 지근거리에 있었
다는게 고천 부자의 두 번째 비극일 것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무인들은 그 문파를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모자라 근처 객잔과 상가들을 이 잡듯 뒤지
고 불을 질러 버렸다.
관군이 당도했을 땐 창고에 있던 모든 자기들이 산산조각 난 후였고 고천의 아버지는 화병으로 시름시
름 앓다가 그해 가을을 넘기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부친을 안장하고 그나마 건진 세간들을 모조리 정리해서 저주받을 산동 땅에서 벗어난 지 어언 삼십년.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나 싶었다고!"
"그래, 뭐가 문제냔 말이야! 뜸 좀 들이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을 해보게!"
주인이 답답해서 가슴팍을 탕탕쳤다. 가뜩이나 오십견 때문에 결리는 어깻죽지인데 심하게 팔운동을 하
니 뼛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저려온다.
"자네, 삼덕선생 알지?"
뜬금없는 고천의 말에 주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섬서 땅 회음면에 사는 사람치고 삼덕선생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나?"
"그래.. 그 삼덕선생께서 비천혈서를 가지고 있다고들 한다네.}
"뭐!
주인장이 대경해서 소리 지를 때 장추삼은 조용히 왕방을 불러 세웠다.
"자, 잠시만요! 얘기 좀 듣...."
짤랑짤랑~
은자는 호기심보다 강했다.
휘릭-
"무슨 일이십니까!"
새처럼 다가온 왕바으이 속내가 가소롭기 그지없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돈 몇푼을 쥐어주면서 장추삼이
물었다.
"삼덕선생이 누구야?"
"아니, 삼덕선생을 모른단 말씀이십니까?"
모르니까 돈까지 쥐어주면서 물어보지 임마!
삼덕선생은 화산의 수많은 속가제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했다. 별호로 눈치를 챌 수 있겠지
만 무공이 아닌 인품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니 그 위인됨이 어느 정도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단 한번도 관직에 오른 적이 없었고, 무림맹이나 기타 어디에도 얽매이지는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
만인의 우러름을 받는 인물. 그런 사람이 바로 삼덕선생이라는 말인데.
"무공 수준은 어느 정도고?"
"삼덕선생 말씀입니까? 에.. 비록 화산의 전대 장문께 직접 입문 뭔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무학보다는
화산의 수양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합니다요. 현임 장문이신 구양승 도장과도 늘 바둑만 두신다고 들었
습죠."
이렇게 빙빙 돌리는거 딱 질색이다.
"요점만 말해라."
목소리를 깔자 장추삼의 의중을 짐작한 왕방이 빠르게 내뱉었다. 뒷골목을 거친 사람들끼리 느낄 수 있
는 힘의 차이가 여실히 전달되었기에.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저 호신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라고들 합니다!"
"호신 수준이라..."
그럼 기초무학 정도에서 멈췄다는 건데.
'절묘한 선택이로군.'
이때 객잔은 지천명의 두 중년이 내쉬는 한숨에 완전히 장악당해 있었다.
삼덕선생의 거처는 시전에서 불과 이 장도 떨어지지 않은 마을의 초입. 만약 사단이라도 벌어진다 치면
시전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날것이다.
"왜 이리 재수가 없는 거냐고!"
"그러게 말일세!"
한숨 소리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아 장추삼이 몸을 일으켰다. 이 자리에 더 이상 남아 있다간 정신 건강
에 심대한 타격이 올 것만 같았기에.
'삼덕선생이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절묘한 선택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 * *
삼덕선생에 관한 소문이 회음면을 휩쓸고 지나간 지도 어언 보름여. 드디어 승창문과 철권파에서 삼덕
선생에게 반문첩을 발송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장추삼도 이른 저녁을 먹고 거리ㄹ 나섰다.
마을 어귀에서 서성이던 그의 눈에 일군의 무림인들이 잡히기 시작한 건 해가 서서히 떨어질 무렵이었
다.
'벌써 시작이라는 건가?'
다소 빠른 감이 없지 않았다. 최소한 오일은 더 지나고 나서야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면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뭐, 그렇다고 위축된 건 아니지만.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섬서 신흥무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철권파였다.
'간만이네, 그려.'
장추삼으로도 잊기 어려운 문파. 뭐 이제는 젊은 날의 약간 쓰라린 기억 정도로 치부될 일이지만. 그래
도 막상 깃발까지 펄럭이며 행진하는 걸 보니 씁쓸하긴 했다.
반대로 육년 전의 관점에서 일이 잘 풀렸다면 저 꼭두각시의 행렬에 자신도 끼어 있었어야 했을 거다.
이래서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인가.
'새옹지마라...'
그렇게 짧은 회상을 즐기던 장추삼의 눈에 또 하나의 무리가 포착되었다.
'어디 보자.'
깃발도 없었고, 상의에 어떠한 말도 써 있지 않았지만 저마다 들고 있는 장창만으로도 그들이 어느 문
파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섬서에서 철권파와 더불어 양대 신흥세력으로 급부상한 승
창문일 터.
'어림잡아 철권파 사십여 명에 승창문 오십. 벌써 백여 명의 무인이 집합했군.'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좁은 동네에 벌써 백 명이라니. 그러나 무인들의 행렬은 여기서 그치
지 않았다.
그들이 지나가고 약 한 식경에 흐른 뒤, 땅거미도 자취를 감출 무렵 칠흑처럼 새까만 복장으로 전신을
감싼 약 칠십여 명의 무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봐라?'
가슴에 핏빛으로 선명이 새겨진 글자 하나.
조
이들이 섬서 최대 흑방이라는 조혈방이었다.
'이게 조혈방이라고? 정말로?'
뜨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장추삼이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의 놀라움은 조혈방의 인원
때문은 아니었다. 규율 잡힌 행렬 때문도 아니었다.
'이놈들은 철권파보다, 승천문보다도 강하다고! 무슨 놈의 흑방이 무림문파보다 강하다는 거야?'
냉엄한 시선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장추삼의 옆으로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사십대 중반 정
도로 보이는 인물이었는데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기도라 잊혀지기 쉬운 유형이엇다.
그러나...
찌릿!
어깨에서부터 타고 내려오는 전율! 싸움꾼의 본능이 급박하게 외지고 있다!
'이자는 위험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장추삼이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을까?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사내도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다 장추삼을 발견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파팍!
... 하고 섬전이 튀지는 않았다. 한 사람은 호기심에, 다른 한 사람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서로를 말
없이 응시했다.
짧은 눈싸움은 사내가 고개를 돌리면서 걸음을 재촉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렇지만 장추삼은 물과 같은
사내의 등판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흑방의 행력을 지켜본 장추삼이 숨을 크게 몰아쉬고 뒤따라 나타난 몇몇 구경꾼들의 무리에 슬
쩍 끼어들었다. 호사가들로 이루어진 무리들이었기에 다소 시끄러웠지만 이목을 끌지 않기엔안성마춤이
었으니까.
"화산에서도 완전히 모른 체는 하지 못하는 모양이더군."
"그런데 아직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지?"
"그러게 말이야. 관련되어 있으면 관련되어 있다. 아니면 모르는 일이라고 말을 하면 이런 의혹을 받지
않을 것 아니야?"
호사가들은 신이 나서 부지런히 떠들고 있었지만 장추삼은 분주히 머리를 굴렸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화산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입장일 터.
거짓을 고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화산의 자존심에 점수를 줘야 할까?
삼덕선생의 집은 민가와 조금 동떨어진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전과 가까운 것이겠지만, 이
미 그의 집 앞에는 무려 이백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그리고 화산의 도사들. 삼덕선생의 집을 에워싼 일군의 도사들이 형형한 눈을 빛내며 무인들을 쏘아보
고 있었는데 횃불의 일렁임에 따라 넘실거리는 그림자처럼 그들의 마음에는 어두운 무언가가 일렁였다.
첨예한 대치를 깬 것은 역시 철권파였다.
"삼덕선생, 철권파의 석모가 선생께 긴히 여쭈어볼 것이 있어 부랴부랴 찾아왔소이다!"
텁석부리의 장한이 나서서 버럭 소리를 지르자 내공이 약한 이들은 귀를 틀어막았다. 이 사람이 바로
철권파의 문주 일권 개천 석공명으로 심후한 내공에서 우러나오는 권법은 무림에서도 일절로 통하고 있
엇다.
"그렇습니다, 어서 나오시오!"
문주의 외침에 철권파의 문도들도 일제히 발을 굴렀다. 그러나 삼덕선생의 집 안에서는 어떤 기척도 들
리지 않았다.
석공명의 안색에 옅은 노기가 깔릴 무렵 이번에는 깡마른 중년인이 긴 창을 들고 성큼성큼 나섰다.
"삼덕선생, 승창문의 조덕개가 왔오이다! 어서 나와 자초지정을 설명해 주시구려!"
마창 조덕개. 승장문의 문주이자 잔인하고 빠른 손속으로 마창이라는 별호를 얻은 인물, 문파의 위세로
는 아직 철권파에 눌린다고 하지만 무학만을 놓고 본다면 석공명보다 오해려 반수 위로 평가받는 무인.
괴팍하고 음침한 성격 때문에 실추된 인상과 대인 관계만 아니었다면 좁은 섬서를 벗어나 능히 중원 땅
에서도 인정받았을 거라고 호사가들이 입을 모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거에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소위 무관의 제왕이랄까?
그의 저음은 일반적인 것과 차원이 다르기에 목소리만 듣고도 대부분의 무인들은 오금이 저린다고 했다.
이번 경우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와아아!"
쿵쿵쿵!
창을 바닥에 꼽으며 승창문도들이 환호했다. 그러나 삼덕선생의 집은 여전히 침묵 속에 잠겨 있었고,
조덕개의 눈썹이 역팔자로 곤두섰다.
'재주는 곰에게 맡기겠다는 건가?'
두 세력이 어떤 난리판을 벌이든 장추삼의 신경은 조혈방에게 쏠려 잇었다. 그리고 조혈방은 철저한
침묵으로 자리만을 지켰다. 마치 자신들은 상관없다는 듯.
두 신흥방파의 재촉에도 삼덕선생의 집에서는 개미새끼 하나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덕이 높다더니, 쥐새끼처럼 숨어서 뭐 하자는 거야!"
승창문의 젊은 문도가 악을 쓰자 대문을 지키던 화산 문인들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깔렸다.
만약 그 혼자였다면 이런 망발을, 그것도 화산의 도사들이 있는 앞에서 감히 행할 수 있었을가? 수많은
군중 가운데 하나라는 안도감이 책임 의식의 부재를 불러왔던 건 아닐가?
기폭제라는 것이 있다. 젊은 무인의 무책임한 발언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책임감이라는 굴레를 벗어던
지는 발화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내뱉어도 누군가가 책임을 져주겠지.
"맞다. 나와리! 숨어 있지만 말고 어서 나와라!"
"세가지 덕 가운데 서덕이라는 것도 있다더냐!"
군중은 흥분했고 화산 문인들의 분노도 극에 달했다. 그러나 어느 쪽에서 먼저 움직이지는 못했다. 수
적으로야 스무 명 남짓한 도사들이 분명 열세였지만 화산이라는 이름은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것이
었으니까.
"정녕 나오지 않을 셈이오!"
석공명이 우렁우렁한 외침으로 다시 불렀으나 돌아오는 건 차가운 침묵.
"할 수 없지. 주인이 거부한다면 객이 들어서는 수밖에."
무겁게 한마디를 뱉고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떼었다.단 서너 걸음만에 대문에 이른 석공명이 화산의 도
사들을 바라보다 차갑게 입을 열었다.
"비키시게."
움찔.
젊은 도사들에게 석공명은 분명 거물이었다. 풍기는 분위기로나 압도적인 힘으로나. 그렇지만 삼덕선생
을 생각하니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
"그건 불가하오!"
제법 호기롭게 외쳤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석공명의 웃음소리에 완전히 가려졌다. 처음부터 지고 들어간
기 싸움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하하하! 우리가 도사들을 저어해서 망설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화산에 대한 존경심이 아직은
남아 있으니 얼른 비키시게. 만약 이대로 버틴다면...."
그의 눈에서 광화가 일렁였다.
"나도 다음 일은 책임지지 못하네."
또다시 움츠러드는 도사들.
"석 형은 아직까지도 화산에 존경심이 남아 있었구려?"
낮은 저음이 장내에 깔렸다.
'흥, 우리가 대국을 주도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거지?'
한발 나서는 조덕개를 슬쩍 노려보던 석공명이 팔짱르 꼈다.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는 투로.
"난 말이야... 화산에 대한 존경심 같은 건 오래전에 잊어버린 터라 지금 당장이라도 뒤집어 버리고 싶
거든. 다치기 싫으면 물러서는 게 좋을 거야."
존재감의 차이일까, 아니면 저음 때문일까. 화산의 도사들은 조덕개의 눈길을 제대로 받아내지도 못하
고 고개를 숙였다. 그만큼 마창의 살명은 무서운 것이었다.
"비키라고 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조덕개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대문을 막고 있던 젊은 도사들이 본능적으로 비켜섰
다. 비켜서지 않았다면 정말로 손을 쓸 기세였기에.
"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소?!"
물러선 도사 가운데 하나가 창피하고 굴욕스러워 목청껏 항의했으나 돌아온 건 냉소였다.
"무사하지 않으면?"
"으윽!"
알량한 명성 가지고 행세하려 드는 도사들이 가소로워 조덕개가 피식 웃고 대문에 막 들어서려는데 어
디선가 날카로운 교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멈추시오!"
"음?"
방금 돌아선 마창 앞에 자그마한 인영 하나가 훌훌 날아와 살포시 내려앉았다.
"오오!"
"우우!"
순간 세 개의 세력권은 하나가 되어 기성을 질러댔다. 그만큼 등장한 여인의 아름다움이 빼어났다는 반
증이리리라. 그런 반응을 무시하고 여인은 조덕개에게 포권의 예를 올렸다.
"화산의 조소령이라고 합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시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호오~ 난 월궁에서 뛰쳐나온 항아인 줄 알았는데 대화산의 조소령 소저였구려?"
조덕개가 마주 포권하며 느물거리자 화산 문도들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맺혔다. 그러나 마창은 오히
려 이런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히죽히죽 웃었다.
"아깝구려, 냄새나는 도사들 있는 곳에서 썩기에는 너무 아름다운데 말이오.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먹는
다면 소저의 팔자는 비단길을 걸을 수 있을 텐데."
모욕적인 언사에도 조소령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야무지게 대꾸했다. 중재를 목적으로 온 자리에서
싸움을 조장할 수는 없다. 뻔한 도발에 말려들 만큼 멍청한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비단길을 걷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화산에 입문하지도 않았겠지요. 그보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마음을 바꿔 먹으라는 소리가 아니겠소? 하다못해 기루에서 노래를 불러도 천금을
만질 외모인데 이대로 석힌다면 뭇 남정네들에게 도리가 아니외다. 우하하!"
순간 장추삼은 하운이 옆에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었다. 오물과도 같은 말을 토해내는 저 불한당에의
응징보다는 그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
'아까워, 아까워.'
"으음..."
기루라는 말은 여자에게, 그것도 도를 수양하는 입장에서 참기 힘든 모욕이다. 평정심을 유지하려던 조
소령도 순간 이를 악물고 숨을 돌려야 했을 정도로.
이런 변화를 기대했던 조덕개였기에 그녀의 동요는 고무적이었다. 명분은 만들기 나름이고 과실의 기준
은 어디가지나 선공자의 몫이니까.
"기루라는 말에 마음이 상했나 보구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다고, 흐흐.. 뭐 정 기루가 싫다면 다른
자리라도...."
더러움을 보면 외면하는 것이 인지상정. 조덕개의 더러운 말에 조소령은 물론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얼
굴을 찌푸렸다. 이대로 지속된다면 야유까지 나올 판국이었는데 광분하는 인물은 따로 정해져 있었다.
"그 더러운 주둥이를 닫지 못하겠는가!"
구경꾼 가운데에서 앳된 청년이 불쑥 나서며 손가락으로 조덕개를 가리켰다.
"한 번 더 사저를 모욕한다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공자도 화산 사람인가?"
"그렇소. 화산의 서문휘라고 하오!"
조소령에 서문휘까지. 화산의 일대제자 가운데 무려 두명이나 나선 상태라 조덕개도 한부로 입을 놀릴
처지가 아니었다. 무시한다고는 해도 아직은 화산과 전면전을 벌일 상황은 아니니까.
무엇보다 철권파가 저리 발을 빼고 있기에.
'우리만 뒤집어쓸 수는 없지.'
재빨리 머리를 굴린 조덕개가 한발 물러서며 빈정거렸다. 화제를 바꿀 필요를 느꼈기에.
"오, 화산의 이름 높으신 일대제자가 무려 두분이나 왕림하셨구려. 평상시에는 한분 뵙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역시 화산은 비천혈서와 단단히 얽혀 있나 보오?"
비천혈서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서문휘도 얼굴을 돌렸다. 여인네를 도발하는 조덕개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방관하고 있던 석공명에게 이런 전환은 기꺼웠다.
"두 분 일대제자께 이 석모가 감히 묻겠소이다. 화산이 비천혈서와 연관되어 있는 거요?"
그의 차분한 질문에 서문휘가 버벅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것은.. 저희가 답변해 드릴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 말에 발끈한 석공명이 버럭 화를 냈다.
"그것은 저희가 답변해 드릴 수 없는 부분입니다라니! 제자께서 무슨 불고점 사람이라도 되시오?!"
우우우-
군중들도 때아닌 동요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전의 대답은 아니 한 만 못했기 때문이다.
"맞다. 불고점 사람이냐!"
"때려치워라!"
전에 없이 흉흉해지는 분위기. 구경하던 호사가들까지 한목소리로 비난을 퍼부어댔다. 난데없는 반전에
영문을 몰라 뒷머리를 긁다 장추삼이 옆에서 소리소리를 지르는 호사가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아니, 왜들 저 난리요? 불고점에서 뭘 어쨌기에?"
"그걸 몰라서 묻는거요?"
"모르니까 묻지 않소?"
"허! 이런 사람이 있다니, 좋소, 내 설명해 줄테니 귀 청소하고 잘 들으시오."
그의 말인즉슨 불고점이라는 철포점에서 대단히 좋은 농기구와 무기를 팔았다고 했다. 한번 불고점의
물건을 써본 이라면 다른 철포점의 물건은 거들떠도 보지 않을 만큼 성능이 좋았고 장사는 성황이었다.
문제는 사후 관리였는데 사용하다 문제가 생겨서 수리를 의뢰하면 고쳐 내는 것 반, 엉망으로 만들어놓
는 것 반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항의라도 할라치면 늘 같은 대답.
... 그것은 저희가 답변해 드릴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사람들은 점차 성의없는 답변에 지쳐 본래 부처님의 마음처럼 단단한 것을 만
들겠다 하여 붙인 불고라는 이름을 무시하고 불고점이라고 비아냥거리며 하나둘 발길을 끊었다고 했다.
"하지만 물정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이용을 한다니까? 답답한 일이지 애초에."
호사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흥분한 장추삼이 주먹을 치켜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불고점 사람이냐!"
'....!'
아, 이게 아니지.
헛기침 몇번을 하면서 슬그머니 손을 내린 장추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
다더니 조덕개의 망발에 조소령을 동정하던 사람들까지도 화산을 욕하기 시작했다.
"헛소리 집어치우고 어서 대답해라! 관련이 있는 거야, 없는거야!"
"맞다, 얼른 답을 해라!"
난처해진 서문휘가 조소령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도 딱히 할 말이 없어 한숨을 쉬었다. 사실인 걸 어쩌겠
는가. 정말로 대답할 수가 없는데.
긍정도 부정도 않는 장문 도장과 원로전이 원망스럽지만 제자 된 입장으로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이래저래 답답하여 서로만을 바라보는데 조덕개가 다시 나섰다. 흉물스러운 미소를 그대로 담고.
"그런 대답조차 하지 못하면서 일대제자라니, 역시 소저는 기루에서 웃음이나 파는 것이 어울리겠구려.
어서 비켜서시오. 고운 얼굴에 상처 생기기 전에."
얼굴이라도 성해야 먹고살 것 아닌가, 하며 키득거리는 마창의 망언에 조소령의 안면 근육이 바르르 떨
렸다.
"말이면 다가 아니다!"
칼을 빼 든 서문휘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자 승창문도들도 기다렸다는 듯 장창을 곧추세웠고, 철권파
의 무사들도 공력을 불러일으켰다.
일촉즉발의 상황. 만약 싸움이 벌어진다면 어떤 식으로든 화산은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별다
른 방법도 보이지 않았다. 여론마저 등을 돌린 상태였기에 두 사람은 그야말고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결국 힘으로 해결을 봐야겠다는 것인가?"
조덕개가 석공명을 힐끔 처다보며 괴소를 흘렸다.동참을 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기에 일권개천도 어쩔
도리 없이 마창의 옆에 서야만 했다.
여기서 발을 뺀다면 주도권이 문제가 아니라 철권파는 비겁자로 낙인이 찍힐 판이었으니까.
"조 소저, 비켜주시오. 이대로 계속 버틴다면 강호동도들은 화산과 비천혈서를 연관지을 수 밖에 없소
이다."
묵은 약속
이때 장추삼의 귓전에 전음이 날아들었다.
"이거 오랜만일세."
"엥?"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살집이 풍부한 노인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노인은 첫대면 때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었는데 차이라면 나무와 지붕이라는 정도였다.
"누군가 했더니 돼지노인이구려."
"기억하고 있구먼. 맞네, 돼지노인일세."
넉넉한 살집처럼 푸근한 음성이었지만 음성이 가끔 떨리는 것으로 보여 어떤 근심이 엿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여긴 어인일로 오셨소?"
" 올 수밖에 없으니 왔지. 뭐, 각설하고 자네.. 나랑 했던 약속 기억하고 있나?"
"약속?"
그게 뭘까, 하고 곰곰히 생각하던 장추삼이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더라..."
"젊은 친구가 벌서 기억이 어두운건가? 나랑 약속하지 않았나. 얘기 들어준 대가로 부탁 하나 들어주기
로 했지 않아."
"아, 맞다! 까맣게 잊고 있었네."
바보처럼 히죽거리던 장추삼의 눈이 축 처졌다.
"그 얘기를 지금 왜...."
"왜긴. 부탁할 것이 생겼으니 말을 하는 거지. 다름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종료시켜 주게."
"엥?"
상황을 종료시키라고? 말이 쉽지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인가!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화는 섬서 전체로 퍼질 것이네. 그렇다고 내가 나설 처지도 아니고 말이야."
'이 노인네도 화산 사람이었군.'
주위에 뭐 이리 화산 사람들뿐인지.
콧잔등을 문지르던 장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까. 또한 화산의 두 제자가 손을
슨다면 일은 겉잡을 수 없이 번질 테니까.
"자자, 비켜 봐요들."
군중들을 살살 헤집으며 장추삼이 앞으로 나섰다.
"서문 공자라고 했나? 아무튼 칼 치우게."
".....?"
이건 또 뭐지. 하는 표정으로 장추삼을 바라보던 서문휘가 조소령의 눈짓에 칼을 갈무리 했다.
"오랜만이네요, 장 공자."
"간만입니다."
간단한 전음으로 인사를 나눈 조소령과 장추삼이었는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얘기를 입 밖으로 토했다.
"화산의 조소령이라고 합니다. 대협은 뉘시기에 이리 나서는 것입니까?"
"아, 나는 장추삼이라 하오. 화산의 애제자 조소령 소저를 뵙게 되어 삼생의 영광이올시다."
"장추삼이라면 강호삼성 가운데 괴. 성. 장추삼 대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웃음이 아니라 말로 먹고 살아도 되겠는데?
조소령의 능숙한 거짓부렁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장추삼도 성의껏 맞장구를 쳐주었다.
"뭐 남들이 그리 부르더이다."
순간 무인들이 술렁였다. 그리고 의례히 나오는 반응들.
"장추삼이라고!"
"괴성이래!"
뭐 기타 등등의 환호를 무시하고 조소령이 장추삼에게 물었다.
"그런데 강호상에 이름 드높은 괴.성. 장추삼 대협께서 이곳에는 어인일로?"
괴성 자에 유난히 힘을 싣는 그녀의 속내를 짐작하니 헛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장추삼은 전에 없는 진중
함을 유지하며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아까부터 구경을 했는데 뭔가 이상해서 나선 것이오."
"무엇이 이상하다는 겁니까?"
경극을 하면 변검도 필요없을 여자다 어떻게 표정하나 흔들림없이 저렇게 말을 할가.
"아, 그건 여기 모인 군웅들께서 삼덕선생을 핍박하는 이유가 단지 소문 하나만을 믿고 이리 나서는게
어이없었고, 그런 불확실한 정보 때문에 자칫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이리 나서게 되었다오."
간만에 이리 긴 문장을 소화하자니 물이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침을 삼키는 것으로 갈증 해소를 대신하
고 장추삼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렇지 않소이까? 만약에 소문이 거짓이라면 여러분들은 애꿎은 사람을 붙잡고 덤터기를 씌웠다는 오
명에서 평생을 괴로워해야 할 것이오."
... 이 사람, 원래 이리 달변이었나?
그녀가 아는 장추삼이라는 인간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기에 조소령이 입을 떡 벌리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해서... 무의미한 싸움일랑 관두시고...."
"헛소리하는군."
차가운 조소로 장추삼의 말을 자른 조덕개가 장추삼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지금 뭐라고 했소?"
"헛소리라고 했다. 그럼 우리더러 이대로 돌아가라고? 듣자하니 삼성 가운데 유성이 화산의 대제자라던
데 같이 다닌다고 감싸주기라고 하겠다는 건가?
어.
라고 할 수는 없어서 장추삼이 그냥 마주 웃어주었다.
"강호삼성, 강호삼성, 하도 난리들을 쳐서 뭐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냥 피라미가 아닌
가?"
"하. 하. 하."
"왜, 내말이 틀렸나? 역시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거든. 무슨 무당에 소림에.. 웃음만 나오는군."
"잘 아네!"
장추삼이 맞장구를 쳤다. 이 돌연한 반응에 눈살을 찌푸린 마창이 뭐라고 하려 입을 열었으나 연노처럼
퍼부어지는 그의 말을 막지 못했다.
"소문이라는 건 믿을 게 못 된다고 스스로 인정을 하면서 그것에 매달리는 이유가 뭐지? 단지 유한초자
의 말이라고 해서? 그 유한초자가 한 말이라는 것 자체도 소문에 불과하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소문이
소문을 낳았다는 말인데 이렇게 비합리적인 경우가 어디 있을까?"
오늘 말빨 좀 서는군, 속으로 미소 지으며 장추삼이 조덕개를 바라 보고 또 한번 웃어주었다.
씨익.
도발은 이런 것이다. 라는 걸 약여하게 보여주는 표정. 마창은 그리 인내심이 넘치는 인물이 아니었다.
"죽고 싶으냐......"
"그건 당신이고."
"이놈!"
창을 치켜든 조덕개가 불쑥 나서자 장추삼이 손사래를 쳤다.
"잠깐, 잠깐.!"
"왜, 이제 와서 꼬리라도 말고 싶은 거냐? 하지만 늦었다."
"그게 아니라... 이 싸움은 당신하고 나하고 끝내자고, 내가 지면 암말도 하지 않고 뜰테니."
"뜰 새도 없다. 이 자리에서 죽게 될 테니까."
"알았소. 죽지 뭐, 내가 지면 죽을 테니까... 당신이 지면 어떻게 할건데?"
장추삼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조덕개가 창을 가슴에 비껴들며 소리 질렀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진다면 승창문은 이곳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겠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장추삼이 목을 소리나게 꺾었다. 어차피 힘의 차이는 보여줘야 할 판이고 수적
인 열세일 때는 우두머리를 치는 것이 정석이다.
"내 원래 선을 치는데 오늘은 양보하도록 하지."
원래 나이 어린놈에게 이런 말 듣고 선치는 사람 별로 없다. 그렇지만 마창은 별호에서 증명하듯 무자
비한 승부사로 이런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죽을 준비나 해둬라."
라, 자가 끝나기도 전에 달려든 도적개가 창을 쭉 뻗었다.
'명불허전!'
속도도 속도려니와 파고들어 오는 방위 또한 절묘하여 옆으로 피할 각도가 나지 않았다.
스슥-
빠른 뒷걸음질로 아슬아슬하게 창끝을 피해낸 장추삼이 창의 회수에 맞춰 돌진해 들어가려 어깨를 숙였
다.
휙~
'헉!'
다시 날아드는 창극. 분명 완전한 찌르기의 각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마창의 독문절기인 강룡삼식이 첫번째 초식인 독룡재래로 수많은 무인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든 무서운 찌르기였다.
완벽한 이단 찌르기. 그것을 가능케 한 건 조덕개의 빠른 발이었다. 한 번 찌른 상태에서 두 발을 동시
에 옮겨 거리를 줄이고 피했다. 여긴 상대방이 움직임을 보이는 찰라 재차의 공격을 가하기에 역동작에
걸린 적은 허무하게 당하곤 했다.
넙죽!
순간 장추삼이 곤두박질치듯 지면에 몸을 밀착시켰다. 어깨에 들어간 힘을 주체하지 못했기에 감행한
임기응변이었는데 과연 효가가 있어서 마창의 창끝은 허공을 갈라야 했다.
'이런 동작도 있는가?'
철판교를 역으로 펼치면 이런 형태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철판교는 기본적으로 허리를 활처럼 뒤로 당
겨 적의 공세를 피하는 수비법이기에 무너진 몸의 균형은 제자리를 찾으려는 상체의 탄력으로 쉽사리
되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떨어진 경우라면?
허리를 사용할 수 없다!
"차압!"
창을 회수하며 조덕개가 앞으로 내딛은 오른발을 강하게 차올렸다. 오체투지의 형식이라 이대로라면 머
리가 으깨질 상황. 이때 장추삼이 퉁기듯 일어서며 오른손으로 조덕개의 팔을 막았다.
'어덯게 저런 움직임이!'
앞으로 엎어진 상태에서 그대로 몸을 일으킨다는 건 불가능하기에 조덕개가 어안이 벙벙해서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실이건 간단했다.
애초에 그는 앞으로 떨어지면서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았었다. 물론 손바닥은 지면을 향한 채로, 이렇게
되면 지면을 밀어내는 동작만으로 몸을 세울 수 있으니 그 짧은 순간에 다음 동작까지 예비한 처음의
역철판교를 높게 사야 할 것이다.
"깜짝 놀랐네, 거기서 또 한번을 찔러 들어올지 짐작이나 할 수 있겟냐고."
"허허........"
감탄을 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창을 쥔 손에 힘을 실으며 조덕개가 무겁게 말했다.
"경솔한 판단을 한 것은 사과하도록 하지. 그러나 승부는 이제부터다."
슥-
다시 들어오는 창끝에 뒤로 물러서던 장추삼이 인상을 구겼다. 창수와의 대결에서 후진은 금물이다. 무
기 가운데에서 최고의 길이를 자랑하는 창이기에 거리를 어떻게든 줄여야 공격이 가능한 건 당연하 노
릇.
한번 밀리면 그대로 물러서다 끝나는게 창수와의 대결이다.
그렇지만 당최 틈이 나지 않는다. 워낙에 힘있고 정확한 찌르기라 어설픈 전진은 역공을 불러올 판이다.
'찌르기 하나만큼은 중원제일일 거다.'
뒤로 밀리던 장추삼이 지면을 보고 눈을 빛냈다.
무한으로 찌르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신체구조상 그건 불가능한 일. 끌리듯 길게 난 발자취
는 조덕개가 어떤 방식으로 연속 찌르기를 하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역시 보폭이었다는 건가?'
이렇게 되면 길이 보인다.
보법이라면 장추삼, 장추삼하면 또 보법이 아니겠는가.
스슥-
아니나 다를까. 찌르기가 들어온 직후 조덕개의 어깨는 눈에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미약하게 흔들리지
않는가. 전설상의 초상비 같은 보법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지면을 차야 움직임이 가능한 법이고 그것을
드러나지 않게 포장한다고 해도 결국은 사람의 움직임인 이상 어떤 식으로든 표가 날 수 밖에 없다.
단지 꼭 필요한 만큼을 정확히 이동하고 있기에 티가 나지 않았을 뿐.
또다시 찌르기가 들어오고 마창의 어깨가 흔들릴 때 기다렸다는 듯 장추삼의 신형도 따라 흔들렸다.
팍!
오른발과 왼발을 번갈아 축으로 사용하며 두 바퀴를 돌아선 장추삼이 창끝을 이동시키는 조덕개의 옆으
로 신형을 이동시켰다.
"헛!"
순간적인 위치변화라 미처 창을 회수하지 못한 조덕개가 왼발을 쭉 뻗었다.
'오, 발차기도 일품인데?'
발차기를 흘려내면서 장추삼이 감탄스러운 눈으로 마창을 바라보았다.
강호상에 수많은 퇴법이 존재하지만 그 근간은 옆차기다. 간단한 동작만으로 최고의 위력을 끌어낼 수
있기에 퇴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첫 손에 꼽는 기술.
빙글-
시간을 확보한 마창이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켰다.
"빠르군."
"당신도."
눈을 빛내던 조덕개가 창끝을 땅에 끌릴 정도로 낮추면서 앞으로 크게 나섰다. 이 수법이 독룡삼식 가
운데 두 번째은 와룡분루였다.
"밑인가?"
하단을 향한 공격이라고 해도 저렇게 창끝이 아래족이라면 이르는 지점이 고작해야 발등 정도일 터. 고
작해서 발 하나를 보고 들어오는 거라면 지극히 비생산적인 공격인데.
파악!
지면에 닿을 듯 깔려 있던 창극이 장추삼의 전면에서 불쑥 위로 올라섰다. 이렇게 되니 창끝이 노리는
지점은 발등이 아니라 목젖이 되어버려다.
'역시 빠르다!'
감탄은 머리에 맡기고 순간적으로 발을 굴러 창끝에서 몸을 뺀 장추삼이 공세를 피해냈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한 기세로 창극은 그의 인후를 노리고 있었다.
'뭐야?!'
분명히 피했거늘.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순간 장추삼은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제 머리를 한방 쥐어박고 싶어졌다.
'이런 바보! 또다시 창극에 눈을 빼앗겨 발을 놓치고 있다니!'
마창이 남기는 족적을 보라. 일반적인 천왕탁탑식의 올려치기가 아님을 어지러운 흔적으로 말해주지 않
는가. 단발성의 공격이 아니라 끊임없이 위치를 바꿔 상대방을 따라붙는 수법. 이것이 바로 와룡분루의
무서움이었다.
그리고... 답도 역시 정해져 있다.
스스슥-
찔러 들어오는 창끝을 무시하면서 장추삼이 마창의 족적을 역으로 짚었다.
"아!"
"자살하겠다는 거야!"
관전하던 조소령이 입을 가리며 억눌린 비명을 토하고 서문휘가 움찔 몸을 떨었다. 누가 보더라도 장추
삼의 행동은 조덕개의 창에 목을 가져다 대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착각일까?
분명히 관통당해야 하거늘 조덕개의 창극은 장추삼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어, 어떻게?"
놀란 서문휘가 조소령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의 발전은 끝이 없구나. 현재라고 인지하는 순간 그 시간은 이미 과거라는 말을 머리로는 이해
했었는데 그것을 몸으로 구현하는 이가 존재하다니!"
위치를 바꾼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그 위치를 유지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이동은 어떤
식으로든 규칙적이다, 그것이 아무리 불규칙적으로 보인다 해도.
거리의 막싸움꾼들도 습관에 의한 움직임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거늘 하물며 초식에 의거하는 무인임
에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을 파악하는 눈썰미가 선행 조건임은 물론이지만.
'놀랍지 않은가!'
조덕개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와룡분루가 최고의 초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위력적인 초식이라는 사실 또한 틀림 없었다.
그렇기에 최소한 궁지로 몰아넣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괴성은 완벽하게 피해 버렸다. 단 한 치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로지 하나, 시
전자의 움직임을 정확히 한 박자씩 거꾸로 밟아서.
과거로의 회귀.
역으로 밟은 보법의 의미는 그것이었다.
위기 뒤에는 반드시 기회가 오는 법일까. 와룡분루의 변화가 끝나갈 무렵 마창의 뒤를 잡은 장추삼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밀리기만 했던 그에게 최초의 선공 기회.
쿠쿠쿠-
하늘이라도 덮어버릴 듯한 권력의 소나기, 바로 유성우였다!
쏟아지는 권력의 바다를 냉엄하게 쏘아보던 조덕개가 비명과도 같은 일갈을 내지르며 창을 쥐고 맹렬히
흔들었다.
쿠아아아-
풍랑에 노를 젓는 뱃사공이 이런 모습일까. 마창의 의연한 창술은 장추삼의 권력을 봄눈처럼 녹여 내려
갔다. 과연 무관의 제왕이라는 칭호에 걸맞는 수비식.
그러나 장추삼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팍!
당연히 막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처럼 권력의 와해와 동시에 훌쩍 뛰어오른 그가 창끝이 휩쓸고 간 빈
공간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산무영을 수놓았다.
"어!"
산무영을 처음 대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감탄은 섬서에서 가장 강하다는 무인의 입에서도 튀어나왔다.
그러나 섬서최강을 다툰다는 인물의 대처는 과연 일반무인들과 달랐다.
으드득-
이를 앙물고 수많은 장추삼의 분신과 마주선 그가 돌연 창을 크게 들어올렸다.
"가라!"
쿠르릉-
환에는 환이라는 걸까? 마창의 창은 돌연 수십 개로 불어난 듯 사방팔방으로 기운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분명 하나의 창에서 흘러나오는 기세일진데 그의 창에서 흘러나온 기운들은 마치 산무영의 장추삼처럼
장내를 온통 헤집고 돌아다녔다.
이것은 광룡삼식에 속하진 않으나 흔히 호사가들이 광룡질주라 부르는 마창 특유의 다변창법이었다.
'이런!'
딱히 위력적이지도,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어려운 정도로 상대방을 압박하는 기세. 이것은 분명 다음 동
작을 위한 예비일 터였지만 일단은 받아내야 했다.
그 자체로도 충분히 기백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파박!
눈속임 식의 산무영을 포기하고 위치를 바꾼 장추삼이 창기의 한가운데로 돌진해 들어갔다.
'순순히 당할 성싶은가!'
아무리 현란한 변화라고 해도 분명 빈틈은 있다. 그리고 장추삼에게는 그런 공간을 잡아내고 치고 들어
갈 눈가 다리가 있었다.
순가!
서걱-
분명히 안전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창의 기운에 어깨를 베어버린 장추삼이 슬적 몸을 들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판단이 틀렸을까? 아니면 거리 계산에 착오라도 있었을까?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은 희박했다. 지금의 장추삼은 그 어느 때보다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
니까. 최악의 경우를 염두해 두고 무려 이십여 일간이나 자숙한 터였다.
한마디로 그는 지금 최상이란 말이다!
'최상?'
그렇다, 그는 최상이다. 최상인 그였기에 보인 공간이다. 그렇다면 최상이 아닌 그는 보지 못했을까?
본디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사물이 위치하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사물이 움직
이는 경우에 본다는 것은 예측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예측은 빗나갔다. 결과적으로 보면.
왜일까?
과불급 지나치거나 모자랐다는 건데.
'난 나를 믿는다!'
순간 장추삼이 딱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이리저리 뛰놀던 조덕개의 창이 예측 불가능한 각도에서 불술
솟아올랐다.
쿠왓!
노룡등선 강룡삼식의 마지막 초식이자 섬서에서 조덕개의 위치를 공고하게 했던 불패의 창법. 미친듯한
기세로 몰아 부친 상대를 쥐구멍에 가두고 단 한 발로 끝낸다고 하여 일명 노서동창이라 불리는 최강의
마무리.
그러나..
묵직하게 전해져 오는 무엇이 없었다. 적을 벨 때 느껴지는 필목의 존재감이.
'이런!'
창끝의 딱 한뼘 뒤에서 위치해 있던 장추삼이 조덕개의 얼굴에서 낭패의 빛이 미처 피어나기도 전에 껑
충 뛰어오르며 오른발을 차올렸다.
'헉!'
왼손으로 창을 옮기며 손바닥으로 장추삼의 발끝을 받아낸 마창이 어떤 행동을 취하려고 했으나 디딘
왼발에 그대로 힘을 실은 괴성이 오른발을 접으며 한번 더 뛰었다.
쿵!
달리던 탄력이 고스란히 실린 슬격을 명치에 얻어맞은 조덕개가 비틀 뒤로 물러섰다.
"늦었어."
말과 함께 반보 따라붙은 장추삼이 오른손을 접어 위쪽으로 팔꿈치를 차올랐다.
퍽!
턱을 강타당하고 소리조차 내지 못하면서 무릎을 끓는 마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장추삼이 고개를 돌리
며 중얼거렸다.
"이단 찌르기라.. 하나 배웠어."
"대체 어찌 된 일이래요, 사저?"
"으음....."
서문휘의 질문에 아미르 살작 찡그린 조소량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 정말이지 타고난 싸움꾼이라고 할밖엔..."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시간마저 통제하는 능력에 관해서, 그녀조차 겨우 납득하는 바인데.
조덕개의 노룡등선은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의 변환식으로 상대방을 일정 지점으로 몰아넣어 마지
막의 쾌창식으로 단숨에 승부를 결정짓는 방시이다.
장추삼 역시 광룡질주로 대변되는 다변식을 접했을 대 저도 모르게 마창이 파놓은 함정으로 몸을 던졌
었다. 마치 생로를 찾아 몸을 던지는 생쥐처럼.
그러나 마창도 장추삼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장추삼의 예측이 너무 빨랐다는 거다. 구멍
을 파놓기도 전에 그 지점으로 머리를 들이면 형국이라고 할까?
그때문에 변화를 끝내지 못한 조덕개의 창은 괴성의 어깨에 작은 상처를 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마창의 수법은 발동도 걸리기 전에 파악되어 버린 거지, 모든 싸움은 거리가 승부를 결정
짓는 법이고 괴성은 마창의 권역에서 단지 한 발만 물러서는 동작만으로 공격을 와해시킬 수 있었던 거
야."
'본' 것과 '보인' 것의 차이를 단 한순간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일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
보다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장추삼은 알고 있었던 걸까?
"끄응~"
턱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킨 마창이 장추삼을 한번 쳐다보고 몸을 휙 돌렸다.
"철수한다!"
다소 의외로운 담백함. 입은 걸었지만 조덕개는 사나이였다. 몇몇몇 승창문도들이 불만을 터뜨렸으나
마창의 눈길 한번에 고개를 숙였고 승창문은 썰물처럼 장내에서 빠져나갔다.
"괜찮은 사람이었잖아?"
"입은 몰라도 깨끗한 일처리군요."
장추삼이 중얼거리자 조소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마창의 씁슬하면서도 일견 당당한 등을 지켜보
다 고개를 돌린 괴성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일권개천에게 눈을 돌렸다.
"자, 그럼 당신들은 어쩔 것이오?"
이렇게 되자 우스운 꼴이 되어버린 석공명이 인상을 구겼다.
주지하다시피 일권개천 석공명은 마창 조덕개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실정. 그 말은 곧 철권파의 무학이
승창문의 그것에 비해 떨어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창문보다 몸집이 클 수 있었던 건 오직 하나, 인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패도에
가까운 승창문과 달리 공개적으로 정도를 표방했기에 사람들은 은연중에 철권파를 지워했던 거다.
그런 입장에서 승창문까지 떠난 마당에 소문만을 의존해서 화산 사람들뿐 아니라 회음면의 일반인들에
게도 존경을 받는 삼덕선생을 핍박했다는 말이 나돌기라도 한다면?
'고약하게 되었군!'
그렇다고 장추삼이라는 놈에게 뭐라고 할 처지도 안 되는 것이 섬서제일인이라는 조덕개를 깨끗하게 눕
힌 상대에게 뭔가의 반론을 재기했다가 힘으로 결정짓자고 든다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니겠는가.
가득이나 딸리는 무공을 다른 측면으로 메워 이만큼 키워놓은 방파다. 선택의 실수로 잃어버리기에는
들인 공이 너무나 아깝다는 거다.
"어떻게 할 거냐니까?"
뚱하게 물어오는 괴성 녀석의 낯짝에 철권이라도 한 대 꽂아주고 싶었지만 반대편에서 아홉방은 날라
올 것만 같아서 일권개천이 탄식을 터뜨렸다.
돌아가자고 한다면?
지금이야 어떨지 몰라도 문도들 사이에서 분명 말이 나올 것이다. 괴성에게 쫄아서 손 한번 나눠보지
못하고 꼬랑지를 내린 문주라고.
'일단 손이라도 섞어볼까?'
하지 않느니 못하다. 괴성의 무학은 철권파처럼 근접 육박전을 기본 형태로 한다기에 내심 관심있게 그
의 행보를 지켜보고 남몰래 응원도 보냈던 터였다.
그리고 직접 대한 장추삼의 근접전. 이건 신세계의 그것이 아닌가. 동류의 사물이나 움직임은 같이 놓
고 비교했을 때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법이고 만약 판을 벌인다면 마창보다 더욱 비참한 결과를
양산할 게 뻔하다.
"으음...."
"내참, 뭘 그리 뜸 들이는 거요? 내가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쩔 거냐고?"
뭐 거의 협박이다. 이건.
슬쩍 돌아보니 문도들도 소태를 한 웅큼은 씹은 얼굴이라 석공명은 기가 막혔으나 용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문도들에게는 죄스러웠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내 오늘의 치욕은 반드시 갚으리라, 장추삼!'
"우리도...."
그의 입이 막 벌어지는데 그저 지켜보고만 있던 조혈방의 무리에서 한 사람이 쑥 나섰다.
"철권파가 빠진다고 해도 우리 조혈방은 남을 것이다."
역시...
그 사내다. 전신에 위험신호를 안겨주었던 물과 같은 기도의 남자. 그는 석공명의 아연한 눈빛을 즐기
듯 마주하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아니 땐 굴둑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비록 소문이라고 하나 이 정도의 근거를 가졌다면 무림인
으로서 당연히 흥미를 느낄 부분이고, 어쩌면 강호의 판도를 일거에 바꿀 수도 있는 시점에서 외부인의
몇 마디에 흔들린다면 이제라도 무림에서 은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얼굴을 붉히는 석공명을 겨냥했을까. 사내의 마무리는 더없이 통철했다.
"모름지기 사내가 칼을 뽑았는데 무조차 베는 시늉도 없다면 어찌 무리의 수장 노릇을 할까?"
"으윽!"
사내의 일장연설과도 같은 빈정거림에 석공명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괴성이라고 했던가? 그대가 무슨 의도로 우리를 막으려는지 몰라도 이렇게 모인 이상 뭐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갈 것이다. 또한 그것을 어찌할 권리 따윈 그대에게 없다."
말 한번 잘한다.
사내의 거침없는 언변에 장추삼도 입을 떡 벌렸다.
"그렇지 않은가? 밑바닥에서 한번 기어올라 보자가 여기에 온 우리가 무림의 하늘이라는 구파도 아닌,
강호삼성 정도에 발목을 잡혀서야 되겠냔 말이다."
침착하게 말을 하던 사내가 몸을 빙글 돌려 장추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 저기 서 있는 남자가 장추삼이다. 신화니, 영웅이니, 말들은 많지만 알고 보면 이제 서른을 바라
보는 청년이란 말이다. 발을 남들보다 조금 잘 놀리고 상황 판단이 빠른 편이지만 결국 저 친구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일 뿐이다."
"우우~"
"맞다, 물러설 이유가 없다!"
사내의 주위에 포진해 있던 몇몇의 무인들이 맞장구를 놓자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던 다른 조혈방도들도
부화뇌동하여 기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니, 저건 부화뇌동이 아니야.'
냉정한 눈으로 조혈방도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던 장추삼이 고개를 저었다.
이끌려 다니는 자들 특유의 무책임함. 선두의 공무니에서야 안도의 한숨을 짓는 이들의 안도, 그렇게
연명하는 자들의 묻어가기, 그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역시 저 사람은....'
생각에 잠긴 장추삼에게서 눈을 돌린 사내가 만월을 응시하며 말을 맺었다. 남겨진 글자들은 내용과는
달리 스스로에게 보내는 푸념같아서 어쩐지 묘한 감흥을 주었다.
"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인가.."
뭐라고 쏴주려 했지만 당최 어울리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장추삼이 입술만 오물거렸다. 특히나 사내의
맺음말은 대상의 모호함을 떠나 진한 쪽빛이라 감히 끼어들기 어려웠다.
저런 색채의 음성은 대게 사연을 담고 있다. 타인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그런 사정을.
한동한 달을 우러르던 사내가 쓰디쓴 고소를 짓고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흐르는 물과 같아서 시리
다면 시리지만 명쾌할 정도로 깨끗하게.
"이 정도라면 팔을 둥둥 걷어 부친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았던건인가?"
"싸우고 싶소?"
"싸워야 겠지."
"싸워야 하는 거요?"
"싸울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아까 베었던 어깨를 천으로 꽉 동여맨 장추삼이 허리를 살짝 들었다. 굉장한 격전까지는 아니었어도 마
창과의 결투는 그에게도 적잖은 피로를 누적시켰으니까.
이때....
"나는 수맥이라고한다. 강호에서 말하는 십장생 가운데 수자의 이름을 쓰지."
의외의 전음. 그러나 내용은 그가 짐작했던 터라 장추삼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역시"
"역시? 예측했다는 건가?"
"아무리 용감해진다고 해도 승냥이는 결코 범이 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승냥이가 범의 흉내를 낸다면
우두머리가 호랑이라는 말이겠지 그리고 예전의 일을 반추해 보면 당신들을 떠올리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니니."
흑방의 기본적인 속성을 빗대어 표현했는데 용케도 수백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해한 정도가 아니
라 장추삼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순무식 싸움꾼에 천방지축 사고뭉치라고 알려진 그에게 완전히 다른 면이 있었다는 말인가?
"좋다. 그건 그렇고 누구의 부탁으로 이곳에 온 것인가?"
"부탁? 싸움은 부탁을 받아 하는 건 맞지만 이곳에 온 건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게 아닌데?"
부탁을 받지 않고 이곳에 왔다면 우연히 회음면을 지나가다 이번 사건에 관여했다는 것일까?
"당신들이 화산에 볼일이 있는 것처럼 나 역시 화산에 볼일이 있었거든. 시기가 맞아떨어진 거지."
"...!"
놀란 눈이 되어버린 수백을 슬쩍 외면하고 장추삼이 어깨를 살짝 들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조금만 생각해 보고 다리품을 팔면 바로 답이 나오지."
화산에서 문전 박대를 당하고 객잔에서 화를 삭이던 장추삼이 문제의 소문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
은 복룡표국에 전서구를 날리는 것이었다.
목적은 물론 각 지방의 정보 취합이었다. 강호 최강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곳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개
방과 표국이었으니까.
그리고 말을 얻어 회음면을 중심으로 섬서의 외곽 지역을 돌아본 결과 비천혈서에 관한 이야기는 화산
에서 멀어지면 멀어지는 만큼 옅어진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종남산 일대는 소문 때문에 도사들이 나서야 할 형편이었고.
며칠 뒤 받아본 전서구 역시 그의 심증을 대변하듯 각 지역의 주요 거파를 중심으로 소문이 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중심 정도가 아니라 주요문파가 없는 지역에서는 소문 자체를 모를 정도라고했다.
"우습잖소? 소문이라 진원지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번지는 것이 기본인데 이번의 경우는 특정한
지역에서만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단 말이지. 소문이 무슨 봉화도 아닌데 말이야."
장추삼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수백이 턱을 쓰다듬다 탄식처럼 물었다. 과연 이자는 천재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너무 어설프게 일을 처리했는가.
"만약 다를 파를 염두에 두고 일을 벌였다면 어쩔 셈이었느지 묻고 싶군? 자네 말마따마 아홉 군데에서
동일한 소문을 동시에 흘렸지만 결코 대상을 지정하지는 않았었는데?"
수백의 질문에 장추삼이 피식 웃었다. 내가 바보냐는 듯이.
"이곳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내게도 움직일 시간이 주어졌겠지. 삼덕선생이라는 특정인을 지정하고 나
서 이십오 일이라는 시간을 끈 속내가 뻔하니까. 만약 다른 문파를 걸고 넘어졌더라도 그 정도를 끌고
서 일을 진행했을 테니."
"무슨 말이냐?"
수백의 반문에 장추삼이 손가락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었다.
"뭘 이제 와서 부정하려 그러시나? 당신들은 최대한으로 무림인들의 관심과 욕망을 이끌어내려고 했던
거였잖소? 그래서 노렸던 것이..."
이야기를 끊고 수백을 쏘아보던 장추삼이 차갑게 전음을 날렸다.
"흉몽지겁의 도래!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두 번째의 흉몽지겁이겠지?"
"으음....."
"그러기 위해 여타 거파의 주변에 소문을 뿌려 힘의 분산을 유도했고, 삼덕선생이라는 미끼를 걸었던
게지. 본파를 목표로 하기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을 테니까. 그저 그런 무학을 가진. 화산 내외에서도
존경받는 인격자... 화산으로는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대상이라는 말이야."
박수라도 치고 싶었지만 수백은 평정을 유지했다. 이건 똑똑한 정도가 아니라 사건의 이면까지 넘나드
는 날카로움까지 내포하고 있기에 감탄이 절로 나올 판이다.
그럲지만 계획이 알려졌다고 해서 결과까지 정해진 것은 아니다. 결과는 이제부터라도 바꿀 수 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느냐?"
"아니, 이제 시작이겠지. 그런데 말이오...."
수백을 보던 장추삼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벌써 두 시진이 넘게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싸움과 대
화를 하다 보니 목도 칼칼하고 입술도 마른다.
"대체 누구를 끌어내려던 계획이오?"
"음?"
"삼덕선생인지, 다덕선생인지에게 비천혈서가 없다는 것쯤은 지나가는 똥개라도 알 거요. 당신들은 그
저 화산을 비천혈사에 연관 지으려는 것일 테고. 그저 혐의를 씌우려고 이번 일을 벌인다는 건 웃기는
일이거든."
"그래서?"
즐기듯 수백이 되물었다.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요? 이리 크게 일을 벌이는 건 결국 타초경사를 노린 수임에 분명할 테고 내가
생각하는 대상은 바로....."
"그만 하지."
말을 자른 수백이 공력을 슬쩍 일으켰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다는 무언중의 표시. 하지만 아직도
장추삼은 궁금한 것이 남아 있었다.
"좋시다. 거론하기 싫으면 그 문제는 집어치우고 내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물읍시다."
"뭔가?"
어깨를 손으로 쓰다듬은 장추삼이 팔을 붕붕 돌렸다. 생각보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기에 움직임에는
지장이 없었다.
"대체 나와 겨루려는 이유가 무엇이요?"
"그야 당연히..."
아까와 같은 답을 하려던 수백이 장추삼의 진지한 눈빛을 받고 얼굴을 굳혔다.
"선동이 목적이기에 나와의 겨룸을 불필요한 마찰이고, 피하고픈 부분일 텐데? 어차피 나란 존재는 변
수니까. 충돌의 방향은 다소고이 서 있는 화산의 두 제자 쪽이 정답으로 보인단 말이지."
착각일까, 돌연 수백이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마치 소용돌이 처럼 얼굴을 가득 메웠다가 한순간 빨
려 들어가듯 사라졌기에 직접 목도한 장추삼도 허상을 본 것만 같았다.
"맞는 말이다. 자네와의 승부는 이번 일과 별개임에 틀림없다. 솔직히 말한다면 어떻게든 피해야 했
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을 되찾은 수백이 여전한 어조로 전음을 보냈다.
"이 순간이 아니면 평생 하지 못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때 주저할 수 없는 법이지. 이해하겠나, 나의 마
음을?"
너무도 차분하여 그 자체만으로 애조를 띠는 음성. 이런 울림을 가진 사내와 손을 섞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상대가 지목해 주었다면 물러설 수도 없다.
정말이지 듣기 좋은 목소리다.
"영광이오."
주먹 쥔 손을 불끈 치켜들며 장추삼이 나섰다.
삼류무사 284 어둠의 율법자
두 사람의 전음 대담을 기나긴 대치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장추삼의 행동에 숨을 죽였다. 이토록 기나긴
탐색전의 결과는 어떤 형태로 구현될 것인가.
장추삼이 불숙 한 발을 내딛자 수백은 정확히 그 만큼을 물러섰다. 그렇게 한발, 또 한 발.
세 걸음을 옮겼다 싶었을때 장추삼이 그대로 치고 들어갔다.
파악!
이제 그의 추뢰보는 눈으로 따르기 어려울 정도였기에 사람들은 그저 선 하나가 장내를 가로질렀다고
여겼다. 군더더기르 없앴기에 더욱 위력적인 추뢰보.
하나 수백에게는 그의 돌진이 단지 빠른 정도였다. 속도로 재미를 보기에 그의 경지는 다른 차원을 노
닐고 있었으니까.
슥-
발을 한 번 교차시키는 것으로 추뢰보의 접점을 비껴간 수백이 몸을 빙글 돌려 스쳐 지나가는 장추삼을
따라붙었다.
"지나치긴가?"
쿵!
둔중한 충격에 장추삼이 비틀 몸을 떨었다. 순간적으로 어깨를 낮춰서 가해지는 힘을 최소화하지 않았
더라면 이번 한방의 어깨치기로 승부가 결정지어졌을지도 모를 일.
"합!"
이를 악물며 몸을 낮춘 장추삼이 오른발을 강하게 딛어 신형을 멈추면서 타격치를 줄이기 위해 힘없이
내렸던 어깨를 불쑥 들어올렸다.
쿵!
이번에는 수백의 몸에 잔 떨림이 일었다. 그러나 물과 같은 사내에게 그것은 심대한 타격이 되지 못했
다.
스륵-
장추삼에게 슬쩍 몸을 뗀 수백이 그 자리에서 오른발을 축으로 한바퀴 그대로 돌아버렸다. 워낙 돌발적
인 움직임이라 장추삼에게 방비고 뭐고 할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알면서 당한다는 경우가 지금일까?
쿵!
이번의 타격은 멈춰 선 상태에서 행해진 것이라 먼젓번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었기에 울혈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누럴 참은 장추삼이 왼손바닥으로 수백의 어깨를 쥐고 강하게 비틀었다.
휘릭-
강렬한 전사력을 실은 밀어치기였으나 마치 연어처럼 몸을 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수백이 미쳐
회전을 끝내지 않은 장추삼의 손바닥을 향해 발을 차올렸다.
퍽!
회전하는 채로 주먹을 쥐어 수백의 발끝에 실린 힘을 무력화시킨 장추삼이 한 발 성큼 다가서며 주먹
주니 팔을 접어 그의 명치를 노렸다.
"훌륭한 주법!"
무엇이 그리 흥이 난 걸까. 수백은 장추삼의 동작에 일일이 반응하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명치로 날아드는 장추삼을 팔꿈치를 약한 회전력으로 흘린 수백이 처음으로 양손을 치켜들어 그의 가슴
을 노렸지만 이번에는 장추삼도 당하지만은 않았다.
순간적으로 두 손등을 어긋나게 마주 대어 손가락을 서로 억걸고 왼손 엄지가락을 밑으로 돌려 오른손
엄지가락과 서로 끝이 맞닿도록 한 그가 드러난 양쪽 팔꿈치로 수백으 장심을 마주 찔러 들어갔다.
"전법륜인?"
전법륜인. 불가에서 부처가 설법 교화함을 구체화시킨 손가락의 동작. 얼마 전 소림을 방분했을 때 그
특이한 모양새에 흥미를 느껴 서너번 장난삼이 취했던 동작인데 이렇게도 실전에 도입이 되었으니 실로
타고난 무재라 하겠다.
팔굼치는 인체에서 가장 강한 아홉 군데 가운데 양쪽. 결코 장심으로 받아낼 성질이 아니기에 쭉 뻗었
던 팔을 회수하는 수백에게 이번에는 장추삼이 팔을 뻗어 손등으로 그의 가슴을 노렸다.
파르륵!
소매 자락이 펄럭이도록 양팔을 회전시키며 수백이 장심을 재차 뻗어 나오자 허공에서 손등과 손바닥의
격렬한 충돌이 일었다.
쿠웅-
한 발씩 물러섰으니 일견 손익은 동등하다고 보였으나 발자국만큼은 균일한 깊이가 아니었으니.
"정말로 대단하구나, 장추삼!"
"이득 본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을 아닐 텐데?"
투덜거리며 장추삼이 입가로 베어나온 피를 대충 문질렀다.
"역시 옳은 선택이었어."
장추삼의 말마다마 수백의 역할은 분란의 야기가 전부였다. 물론 화산이 그 목적이었고, 그렇지만 괴성
을 보는 순간 그의 사고는 온통 마비되었다.
싸움을 즐겨서는 아니었다. 형제들에의 알량한 복수심을 더 더욱 아니었다. 그 역시 이런 협잡성의 모
략으로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을 싫어했고 복수를 택했다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장추삼에게 지나칠 정도의 관대함을 보였던 노태상의 전언을 들은 직후 나름대로 괴성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던 중 수백은 다소 놀라운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몸소 확인했다.
결과는...
'어떤 식으로든 외로운 분이시로군요, 노태상.'
어쩐지 울적해진다. 이런 자신조차도 노태상에 대한 금석의 맹약을 지킬 자신이 없으니.
"어라? 사람이 언제 이리 늘었대?"
소강상태에서 군웅들의 웅성거림에 고개를 돌렸던 장추삼이 입을 비죽 내밀었다. 전음에 이은 수 나눔
에 열중하는 동안 슬금슬금 모여든 사람의 수가 어느세 처음의 그것에서 세 배에 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음?"
드문드문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함부로 움직일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 아니었기에
장추삼은 잠시 생각에 잠겨야 했다.
'혜광 선사에 무당 장문까지.. 혹시 여기에 구파의 주요인물들이 모조리 행차했다는 건가?"
그가 아는 구파의 장문이라고는 단 두 명. 그리고 그들 두 사람이 모두 모습을 보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이번 일이 그의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역시 가능한 일이다.
이때...
"장 형!"
"멍청아!"
정겨운 두 사람의 음성이 장추삼의 얼굴에 잔 파랑을 불러왔다. 그가 희미한 미소로 친숙한 둘에게 목
인사를 보내려 할 때 일군의 순차적인 응원이 장내를 가득 메웠다.
"정신을 놓고 있더니 이제야 우리를 봤구먼. 실회조의 이름을 걸고 멋지게 싸우라고, 추삼이."
고담의 의뭉스러운 외침에 이어.
"화끈하게 끝내고 한잔 마시러 가야지요, 추삼?"
당소소의 나른하면서도 시원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고,
"장 형님, 날려 버려요!"
형님이라.. 단사민은 전에 없는 호칭을 부르며 펄펄 뛰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사마검군에 이르자 늘 엄격하던 그도 말없이 주먹을 들어 보였다. 입가에 신뢰를 가
득 안은 미소를 담고.
"한 번 더 마술을 보여주게나! 철없는 도사는 이제 자네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버렸다네!"
사마검군 옆에서 양손을 동그랗게 모아 소리를 지르던 짓궃은 표정의 도사가 장추삼과 눈이 마주치자
실실 웃었다.
'알고자라고 했던가?'
"장 가가, 어서 끝내고 집에 갑시다! 좋아하시는 돼지고기 볶음일랑 잔뜩 해드릴게요!"
이들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정혜란이 선머슴마냥 팔을 붕붕 도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그리고...
"장가가! 장 가가! 장 가가!"
'설소저....'
북궁설은 그저 장추삼만을 연호하고 있었다.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고 오로지 단 한마디만을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다.
그들을 보자 왈칵 울음이라도 나올 것만 같아 고개를 돌린 장추삼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소를
한가득 머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그런 웃음을.
그러나 말은 짐짓 퉁명스럽게 나왔다.
"표정들이 왜 그래?"
내가 질 것 같다는 얼굴 따윈 집어치우라고!
"자자, 시작합시다!"
손뼉을 팡팡 마주 두드리며 장추삼이 한발 나섰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방금 전까지 뭔가 허전했었다.
빈 공간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의 전신을 야금야금 갉아먹었지만 좀처럼 정체를 알기 어려웠다.
그리고 지금...
그는 알 수 있었다. 빈공간의 의미를.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야!'
장추삼의 얼굴을 보더니 수백이 담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좋은 얼굴이 되었군."
"그럴 거요, 지금의 나라면 백만 대군이 온다 해도 모조리 때려눕힐 판이니까."
장추삼이 주먹을 치켜들자 복잡한 표정으로 실회조원들에게 눈길을 던지던 수백이 씁쓸하게 조혈방 쪽
으로 눈을 돌렸다.
언젠가는 그에게도 이런 응원이 있었을 텐데. 언젠가는 그에게도 이 세상의 모든 가식을 뛰어넘을 동료
가 있었을 텐데.
하운이 돌아왔다는 것은 맥천 사형의 죽음을 반증하는 것. 이제는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린 것인가. 이
제 세상에서 그들의 맹서를 기억해줄 이가 몇이나 남아 있을가.
'그래 외로운 건가?'
아니.. 외롭지 않아. 외로울 겨를조차 없어. 고독을 느끼기엔 너무도 말라 버린 가슴이야.
"시작하지."
무겁게 입을 열며 수백이 손을 털었다.
혼자라도 좋았다. 혼자라도 아직 세상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남아 있을 것이고 그 모든 관념과 사고가
만들어내는 소용돌이를 접해보지 못했다.
비록 그 와류에 찢겨지고 산산이 부서진더라도 한번은 발을 담가보고 싶다.
그래서 싸운다.
노태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난...'
난 결코 당신들 사조손이 그려놓은 궤적에 끌려 다니지 않을 것이다!
쿠쿠쿠쿠-
장추삼의 기세다 따뜻함이라면 수백의 기세는 노도와 같은 격렬함의 한가운데에 자리하는 정적일까?
스슥-
이번에는 수백이 먼저 나섰다. 나섰다고는 하지만 어깨를 움직이는 순간 그는 이미 장추삼의 면전에서
출수를 하고 있었으니 그 쾌속함은 말로 설명하기 불가였다.
"빠르다는 것.. 반드시 격한 움직임을 수반해야만 구현되는 움직임은 아니야."
북궁단야가 수백의 유연한 보법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 정도는 아마 장 형도 알고 있을 거요."
하운이 빙긋 웃자 말을 꺼낸 한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장추삼의 추뢰보에서 보여주는 폭발
력은 뭐란 말인가.
"단지 장 형은 자신만의 무기로 싸울 뿐이오, 격렬하면서 빨라도 되고, 유연하면서 빨라도 된다는 말이
라오."
"음?"
북궁단야의 의아한 얼굴에서 눈을 땐 하운이 두 사람이 어우러진 한마당에 시선을 두었다.
"빠름이나 정교함이나 모두 부수적인 개념일 뿐, 그것 자체로 전부가 될 수는 없다오, 그리고 그것은
나나 북궁 형보다도 장 형이 인지하고 있을 거요."
"저 바보가?"
설마, 하다 북궁설의 독기 어린 눈에 슬쩍 고개를 돌리는 북궁단야는 하운의 독백을 미쳐 듣지 못했다.
"무학이란 궁극적으로 싸움의 연장선이라는 전제 하에 장 형은 이미 우리와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오...."
파박!
장추삼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수백의 손을 막아내려 했으나 물처럼 담담한 사내는 출수한 손을 기묘하
게 틀어 각도 자체를 바꾸어 버렸다.
예측이라도 했는가?
장추삼도 쭉 뻗은 손을 그대로 미틀어 수백의 변화를 막아냈다. 그러자 수백의 팔은 태산압정의 상태에
서 느닷없이 차올려졌고 괴성이 그려내던 궤적역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며 위에서부터 내리누르는
형태를 만들었다.
파바박!
발을 뺀 수백이 장추삼을 바라보며 숨을 돌렸다.
이 짧은 순간 무려 네 번의 변화와 네 차례의 공수가 오고 갔다는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정작 놀
라운 건 두 사람이 단 한 번도 손을 마주치지 않았다는 거다.
두 사람 모두 근접해서 주먹을 교한하게 되면 아무리 용을 쓰고 피한다고해도 어떤 식으로든 신체 접
촉이 발생하게 됨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다 이 정도로 빠른 공수 교환에서라면?
스르륵-
정지 상태에서의 대결이 재미를 보지 못한 수백이 보법을 밟았다. 그러자 장추삼도 천천히 움직였고 둘
은 느리게, 느리게 서로를 마주하며 돌기 시작했다.
손이라도 맞잡으면 춤을 추는 듯한 모양. 그러나 수백이 속도를 올리자 장추삼도 속도를 올렸고 어느
순간 둘의 신형은 눈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빠르기로 움직였다.
휙!
그렇게 돌던 수백이 한순간 역방향으로 몸을 틀어 다가오던 장추삼고 불쑥 마주했다.
파바박!
유려한 발차기. 인간이 그려내는 발의 궤적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곡선을 그리며 수백이 장추삼
의 턱을 향해 발을 뻗었다. 직선이 아니라 곡선을 그리는 차올리기라서 장추삼으로는 당최 막을 각도가
잡히지 않았다.
'채찍?'
편퇴라면 장추삼도 좀 한다. 전에 간간이 보여준 적도 이싸.
파박!
장추삼이 마주 발을 뻗자 장내에서는 두개의 짧고도 강인한 채찍이 달빛을 벗 삼아 곡예를 부리는 듯했
다.
'전에 이런 싸움이 있었지.'
순간 기학의 얼굴이 떠올랐다. 초췌한 얼굴로 마치 새벽처럼 웃던 남자의 초상이 아른거렸고 이제 그의
움직임은 아마도 자랑이었을 사형이 구현시키고 이사.
그렇다면 질 수 없다.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한단 말이다. 혀가 타 들어가도,
입에 단내가 나더라도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
그래야 기학의 죽음이 덧없지만은 않았다는걸 증명하니까. 그래야 자신과의 마지막 전투를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자신의 손에 달리한 유명이지만 지하에서나마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야.. 쪽팔리지 않을 테니까!'
발과 발끼리의 접촉도 없이 그저 서로의 턱만을 노리며 내뻗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수백의 각도는 점
차적으로 장추삼이 감당할 수 없는 지점에서 날아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역시 발 정지한 상태로 보였지만 수백은 발을 회수하는 순간 축으로 하는 왼발을 이동시켜 조금
씩 위치를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퇴법의 와중에도 보법을 밟았다는 것이다. 발과 몸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니 그저 발로만 상
대하는 장추삼이 밀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노릇.
파라락!
이를 눈치챈 장추삼도 보법을 밟았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수백처럼 유연하지 ㅇ낳았다. 훨씬더 격하
면서 파괴적인 동선을 그려냈기에 지면의 흙들이 비산할 지경이었다.
팍! 팍! 팍!
유능체강이라고 누가 했던가?
극강의 모습으로, 힘을 앞세운 장추삼의 움직임은 점차 수백을 잠식해 들어갔고 유연한 보법을 밟던 수
백의 보법에 점차 균열이 생겼다.
이런 고난이도의 수 나눔은 작은 차이가 승부를 가르곤 한다. 그런 점을 잘 알기에 수백도 일제히 공격
을 멈추고 장추삼에게 멀리 떨어졌다.
"과연 잘 배웠구나."
"킁!"
적의 칭찬은 달갑지 않은 법. 굴복을 한 후라면 모를가.
장추삼이 콧방귀를 뀌다 뭔가 생각한듯 수백에게 물었다. 방금전의 그 말 의미가 담겨 있다!
"뭘 잘 배웠다는 말이오? 당신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는데?"
"들을 이유 다위는 없지. 그저 그렇다는 거다."
"말 돌리지 마시오. 무슨 뜻이냐니까?"
장추삼이 재차 묻자 수백이 들이켰던 숨을 조금씩 뱉어내며 여유를 되찾았다.
"지금까지 싸우면서 뭔가 느낀 것이 없나?"
"뭘 말이오? 당신의 실력이 좋다는 거? 그 정도는..."
장추삼의 의뭉을 수백이 잘라 버렸다.
"자네의 움직임과 내가 취하는 동작. 분위기만 다를 뿐 거의 같다는 것을 몰랐나? 마치..."
장추삼의 놀란 얼굴을 즐기듯 바라보던 수백이 끌던 말으 ㄹ짧게 이어 붙여싸.
"윗옷의 색깔만 달리 입힌 쌍둥이처럼."
"그게 무슨 말이야?"
해석하기 따라서 천 가지는 넘는 가정이 성립되는 발언. 그러나 수백은 여전한 얼굴로 웃었다.
"형제들이 무학을 닦으면서 기본 바탕에 올려놓은 움직임. 물론 나와 기학은 이것에 모든 것을 걸었지.
우리는 이것을 형이라고 부른다."
"에이, 다르잔하. 내가 배운 건 능형백팔식이거든. 이름 한번 거창하지않소?"
키득 거리던 장추삼이었는데 수백의 다음 말에 얼굴을 굳혀야만 했다.
"그렇게 이름 지으셨나 보군."
"뭔 소리야! 내 사부를 알기라도 하는 거야?"
글쎄, 하는 표정으로 장추삼을 바라보던 수백이 공력을 끌어올리며 담담하게 뱉었다.
"형이든, 능형백팔식이든.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이 모두는 일천마라형의 변형일 뿐이니까."
"뭐?"
"몸으로 겪어보면 알 것이다."
쿠우우-
봄날 시냇물처럼 부드럽던 그의 기세가 일변하여 폭풍과도 같이 장내를 지배했다. 시냇물이 모이고 모
이는 자리의 끝자락에 천둥처럼 포효하는 폭포가 존재하는 것처럼.
"타아!"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장추삼도 치고 나왔다. 의문은 나중이다. 일단 이 사내를 꺾어야 했다.
족팔리지 않기 위해!
파바박!
장추삼도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올려 수백이 일으킨 격장과 맞부딪쳐 갔다. 두 사내가
만들어내는 파고에 장내는 긴장과 흥분으로 뒤덮였다.
"결정지으려는 모양이군."
알고자가 중얼거렸다. 이들 가운데 무학으로는 달릴지 몰라도 견식으로 따진다면 최고를 다투고도 남을
그였기에 방금 전 수백의 열세를 짐작했던 탓이다.
"근점박투가들이 긴 승부를 할 이유가 없지요. 시간을 끌어봐야 집중력만 바닥을 드러낼 테니."
당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싸움은 화권수퇴로 요란하게 시작하는 어느 대결들과 달리 해 순간
마다 승부를 걸고 있기에 오랜 승부는 무리였으니까.
부지런히 손발을 놀리던 수백이 순간적으로 뒤로 빠졌다가 양발을 벌리며 장추삼에게 뛰어들었다.
"마지막이다!"
츠츠츠-
순간적으로 수백의 신형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산무영? 그것은 아니다. 산무영이라면 정해진 방위에서 뚜렷한 실체를 보이는 잔상들을 만들어내는 보
법인데 수백이 만들어낸 허상들은 하나가 꺼지면 하나가 나타나는 식의 단계적인 것이었으니까.
"차아압!"
이 돌연한 변화에 잠시 머뭇거리던 장추삼도 곧 발을 굴러 산무영을 밟았다. 아니, 산무영이라고 하기
엔 변화의 폭을 줄여 속도가 무선시 되기에 추뢰보와의 연합 형태인 천고의 보법. 추뢰무영이라고 봐야
옳을 터.
팍!
분명 예측 지점으로 몸을 움직였건만 잔상이라 여겼던 수백의 모슨은 허상이었는지 타격감이 전해지지
ㅇ낳아 급히 몸을 돌린 그의 앞에 수많은 수백들이 움직였다.
"뭐야 이거?"
만들어낸 자신의 잔상보다 세 배는 족히 넘을 수로 밀려드는 수백의 움직임에 장추삼이 양손 바닥을 활
짝 펼였다.
쿵! 쿵! 쿵!
그의 장심에서 천지를 함몰시킬 기세의 장력이 쏟아져 나왔다. 일순간에 하늘마저 가두어 버린다는 장
력. 능신뢰가 두번재로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과연 그의 공격은 효과가 있어서 엄청난 수를 자랑하던 수백의 잔상이 대부분 소멸되었다. 딱히 맞추자
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수백의 발을 잡아보자는 의도였고, 그의 생각은 들어맞은 듯했다.
멈칫, 주춤거리던 수백의 몸이 그대로 퉁겨져 장추삼의 앞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산무영 다음은 추뢰보인가?"
북궁단야가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산무영도 아니고 추뢰보도 아니오 그저 다변과 극쾌의 보법이 저런 모습으로 구현되는 것일 뿐."
하운이 손바닥에 차오는 땀을 쓸쩍 닦으며 수백이 움직이는 동선을 주시했다.
"이대로라면 패배야. 저 바보 녀석보다 저자는 훨씬 빠르고 현란한 변화를 구현하고 있으니까."
"맞소."
말을 꺼낸 북궁단야가 노랄 하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던 그의 입에서 이런 절망적인
대답이라니 뭐든 부정을 바랐는데.
"단일보법만으로는 절대로 저자를 결코 능가할 수 없소. 단일보법만으로는."
능신뢰의 공력 소모는 말할 필요도 없이 격심한 터. 그대로 치고 올라오는 수백을 망연히 바라보던 장
추삼이 급급히 신형을 뺐으나 격랑이 되어버린 사내에게 이 정도의 움직임은 미동과도 같은 것이었다.
쾅!
유려한 각도로 꺾어 들어온 수백의 발이 장추삼의 어깨를 두드리자 한 발 물러서며 왼발에 힘을 준 괴
성이 오른발을 힘차게 차올리며 무려 아홉 번 내질렀다.
"호오~"
슬쩍 신형을 틀어 발로 만들어낸 장추삼의 유성우를 피하는 수백이었는데 또 한 번의 발길질이 날아들
자 눈썹을 찌푸려야 했다.
제아무리 천고의 무인이라 해도 이런 동작을 두번 연속해서 펼칠수는 없는 노릇이고, 치고 들어오는
각도 또한 먼젓번의 그것과 판이하게 달랐기에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사실 이 동작은 간단했다. 아홉 번을 차올렸다고 하나 마지막의 발 차기는 타력에 중점을 두지
않고 빠르게 회수했기에 그것을 축으로 다시 한 번 발길질이 가능했던 것이다.
어쩔 도리 없이 권역에서 물러난 수백이 흐르듯 장추삼의 옆으로 달라붙으며 낮게 속삭였다.
"이제 알겠나?"
부정할 수 없다. 두 움직임은 판박이와도 같음을 같은 형태의 공격이라면 수련도에 따라 승패가 갈림은
불문가지. 그리고 수련도라면 장추삼과 수백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당신 말이 맞았어."
천천히 수백의 접근을 피하며 장추삼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과연 똑같군. 여기까지는 말이야."
"뭐?"
수백이 우뚝 걸을을 멈췄다. 여기까지는 똑같다니. 무슨 궤변을 늘어놓자는 건가. 그런 그에게 장추삼
이 아까의 대답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몸으로 겪어보면 알 거야."
드디어...
드디어 그것을 시험해 볼 기회다! 아직은 미완이라 생각하여 꽁꽁 묶어두었지만 다른 모든 수단으로 통
하지 않을 상대에게 무엇을 더 아낄가?
장추삼이 슬쩍 나섰다. 뭐 하자는 걸가. 이런 접근이라면 수백으로눈 쌍수를 들고 환영할 판인데.
스르륵-
냉정한 얼굴로 보법을 밟은 수백의 얼굴에 차가운 분노가 어렸다.
"이따위 허풍으로 기세를 만회하려 했다니, 실망이로군."
그렇게 그가 다가서는데 장추삼이 처음의 자리 그대로에서 웃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라는 미소를 담
고.
착시 현상일까? 그럴 리는 없다. 장추삼은 분명히 움직였고 눈보다 기세로 그것을 느꼈기에 틀렸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아침 햇살에 동정호의 안개가 산산이 흩어지누나, 누가 있어 감히 그림자라도 밟을까..
조일동정산무영
당황한 그의 앞에 장추삼은 이미 도달해 있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미소따윈 온데간데없이 차가운 눈빛
을 반짝이면서.
달 밝은 밤, 홀로 술을 마실 때 한줄기 우레 무성하여 말없이 눈으로 쫓는다....
월야독작관추뢰
'이런....'
수백으로는 어떠한 동작도 불가한 상황. 그리고 별과도 같은 주먹들이 그의 전신을 지나갔다.
회한의 눈물이 유성의 비처럼 천지에 흩뿌려짐에 능히 대지를 적시는 구나...
회한루여유성우
'대, 대체!
북궁단야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하운은 뭔가를
생각하면서 턱을 아래쪽으로 끌어당겼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알고자가 사마검군을 돌아보았지만 그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게 허공을 쫓던 두 사람의 시선
은 자연스레 당소소에게 머물렀고 그녀는 탁식처럼 한마디를 토했다.
"일수에 세 가지의 변화를 모조리 담는다.... 그것도 손과 발이라는 독립적인 계체로 구현되는 무학을
완전하게 합쳐서... 추삼, 괴물이 되어버렸군요."
그렇다. 수백에게는 하나씩 차등적으로 보였지만 지금 장추삼은 한번에 산무영과 추뢰보, 그리고 유성
우를 합쳐서 펼친 것이다 과거의 추뢰무영이나 가속추뢰처럼 부분 부분을 섞는 것이 아닌 완전한 합일.
그렇기에 수백으로서는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장추삼이 서 있기도 했고, 이미 도달해 있는 그를 원
거리로 인색했던 거다.
벌러던 나자빠진 수백의 앞에 불끈 쥔 주먹을 풀지 않고 망연히 서있던 장추삼이 자신의 주먹을 들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표정, 하운의 그것처럼 약간의 착잡함을 담고 있지 않은가.
"으음...."
잠시의 시간이 흐른뒤 몸을 비척거리며 수백이 꿈틀꿈틀 상체를 세웠다.
졌다. 말이 필요없는 완패다. 부분 부분으로는 분명히 우위였지만 장추삼은 갈래 갈래 나뉜 조각들을
하나로 엮어서 각 부분으로는 도저히 만들어내지 못할 움직임을 그려냈다.
허탈하게 장추삼을 바라보던 수백이 그의 뒤에 수많은 군웅들, 그들 사이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너는 최선을 다했느니, 네 몫은 여기까지다."
아아~
저분에게 이런 온화함도 있었구나.
"아, 아직.. 일이 끝나지 ... 않았습니다."
쥐어자듯 날린 전음.
"물론이다. 이제부터 시작이지. 그러나 이제부터는 노부의 싸움이다."
그런 것인가, 역시 그들은 그 위치밖에 되지 못했던 것인가. 영원히 중심부에 서지 못했던 걸까.
힘없이 일어서는 수백에게 전음이 이어졌다.
"누구도 모를 최후의 한수 정도는 남겨둬야 마음이 든든하지 않겠느냐."
".......!"
그가 몸을 부르르 떠는데 예의 온화한 전음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마치 수백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듯.
"가거라. 광동 어디에 네 사제들이 거처를 정한 듯하더구나."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 사람은 웃고 있었다.
아아...
당신에게도 이런 멋들어진 웃음이 있었군요.
"어서가라. 그들이 네 발을 잡기 전에. 어서!"
비틀거리며 수백이 장내를 벗어나는 동안 장내는 마치 차눌이라도 뒤집어쓴 사람들의 그것처럼 순간적
인 경직 상태로 어떠한 움직임이나, 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빠져나가자 숨을 죽이고 있던 모든 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철권파와 조혈방의 문도들은 슬
슬 꽁무니를 뱄다. 수백의 곁에서 삼엄한 눈ㅇ로 사방을 주시하던 이들은 어느 사이엔가 자취를 감추었
음을 물론이다.
"장 가가!"
장혜란이 소리 지르고 북궁설이 뛰쳐나오는데 장추삼이 손을 들어 두 여인의 발길을 막았다.
"잠깐!"
"...?"
"...?"
"하 형!"
여전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하운이 팔짱을 풀고 성큼성큼 장추삼에게로 다가섰다.
"어떻게 됐는데?"
"음..."
하운이 귓속말로 하남에서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엇다. 선한 도사가 전해주는 말은 워낙 충격적인
지라 표정 관리가 힘들었지만 장추삼은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고 보는 이들은 궁금함이 증폭되었으나 두
사내를 감히 어쩔 도리가 없어서 지켜보기만 했다.
"여기...."
말을 끝낸 하운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 장추삼에게 건넸다. 그것은 종이였는데 아마도 하남 개방주의 무
덤에서 가져온 것들일 터.
"뭐가 이리 많아?"
그의 손에 쥐어진 편지는 모두 세 장. 그러나 개방방주의 무덤에서 하운이 취득한 것은 단 두장. 그렇
다면 나머지 한장은 대체 무엇일까?
이를 알 리 없는 장추삼이 하운을 바라보며 얼굴을 굳혓다.
"이거 ... 내 마음대로 처리한다?"
뚱한 그의 말에 희미하게 웃으며 하운이 짐짓 심통스로운 동료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하오, 하지만 이 일은 역시 장 형의 손에서 끝내야 할 듯하오이다."
"으음..."
편지를 만지작거리는 장추삼을 바라보던 하운이 불숙 한마디를 던졌다.
"방금 전의 그것 만족하시오?"
"음?"
"잊지 마시오. 초식의 융합은 조합이라는 것이 아니라 가락이라는 것을."
"가락이라고?"
장추삼의 질문에 하운은 그저 웃엇다.
가락이라...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렇게 하운마저 제자리로 돌아가자 받아 든 편지를 내려보던 장추삼이 수많은 군웅들을 돌아보며 짧게
외쳤다. 승창문과 철권파, 그리고 조혈방까지 빠져나간 형국인데 오히려 많아진 사람 수,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제 장은 준비되었으니 그만 나서는 것이 어떻습니까?"
누구에게 던진 말일까?"
"불러 모을 사람들도 모두 온 것 같고, 더 끌 필요도 없지 않소이까?"
여전한 침묵.
"아~ 씨! 나오라니까!"
서서히 술렁거리는 사람들을 노려보던 장추삼이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호명을 해야 등장하시는 성격인가 보네. 이거 까다로워서 모실 수가 있나?"
입가에 이유 모를 미소를 띤 그가 동료들을 잠시 쳐다보다 북궁단야에게서 하운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
떤 의미로 받아들였을까. 하운이 곧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를 악문 장추삼이 느닷없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노태상! 아니, 어둠의 율법자 가운데 한 사람? 아무튼 나서란 말이오!"
"뭐? 뭐라고?"
"으음...."
"지, 지금 녀석이 뭐라고 한 거야?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사마검군이 알고자에게 고개를 돌리고 고담이 말을 버벅거렸다. 모인 군웅들도
저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질러댔지만 장추삼의 표정엔 동요를 찾기 어려웠다.
"이상한 일이로군. 판을 벌여놓은 사람이 꽁무니를 빼다니? 아하! 다른 이름을 하나 빼먹었구나. 내 정
정해 드리지. 강호에 이름도 드높은 유하...."
"아하하하하!"
창노한 웃음소리와 함께 군웅들의 사이를 벌리며 노인 하나가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사람들 사이에 끼
어 있을 때는 그 존재조차 희미했던 인물인데 이렇게 나서니 태산이라도 어우를 듯하여 같이 서 있던
군웅들이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래, 내가 노태상이고 어둠의 율법자다."
"오랜만인 겁니까?"
설마 아는 사이? 하운과 북궁단야가 의혹 어린 얼굴이 되엇다. 어떻게 안다는 건가? 거기다 놀라지도
않는 얼굴이라니.
"음?"
노인 역시 놀라 장추삼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면 의당 대경할 판인데 이리도 침착하다니?
"너는 노부가 노태상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데?"
"노인장이 알려줬으면서 뭐 소리요?"
"뭐라고?"
노인이 눈을 껌뻑거렸다. 백 세가 넘어 남들은 치매를 앓아도 열 번을 앓았을 나이지만 그에게 치매를
운운한다면 그야말로 한심한 이야기가 되어버릴 테니.
"허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구나. 혹시 넘겨 짚은 것은 아니냐?"
노인을 물그러미 쳐다보던 장추삼이 혀를 끌끌 찼다. 이렇게 되니 노인은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한 사람
처럼 여겨졌지만 일단은 연유나 알아야겠기게 되물었다.
"말을 해봐라.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더냐?"
툭툭-
순간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늦겨울이라 거의 봄날과도 같았기에 미쳐 결빙되지 못한 하
늘의 낙루는 밤비가 되어 시린 이들의 가슴에 녹아들었다.
"하긴 지나가는 말로 했을 테니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군."
고개를 끄덕인 장추삼이 입을 조금 내밀고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햇다.
"자 봐요, 노인장이 나를 처음 본 건 기루에서 거북이 소저와 싸울때라고 했어요. 맞죠?"
"그랬지."
노인의 동의에 장추삼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소문으로 나에 대해서 뭘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아무튼 그래서 동행을 하게 되었는데..
혹시 이런 말을 기억할 수 있을라나 모르겠네?"
장추삼이 말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남에서 모든 은원을 팔려면 어서 움직여야 하지 않느냐.. 는 얘기를 기억하시오?"
그의 말에 노인이 눈을 위로 치뜨며 회상에 잠겼다 고개를 또 한 번 끄덕였다.
"흠, 듣고 보니 그런 말을 한 것도 같아.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는 거지?"
노인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장추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은원이라고 했소, 일도 아니고 은원. 일반인들기리는 잘 쓰지 않은 은원이라는 단어인데 강호상에서
뱉어질 경우라면 목숨이 관계되었다는 뜻이지. 거북이 소저와의 대결을 보고 그런말을 했다고? 그건 절
대적으로 말이 되지 않음은 노인장이 잘 알것이니 길게 설명하지 않겠소."
노인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그러나 장추삼은 그에게서 눈을 돌려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하남에서 이 장추삼이가 맺고 풀어야 할 은원이라면? 당연히 무룡숙에서의 일밖에 없거든? 그런
데 문제는 세간에의 소문대로라면 강호삼성의 위대한 승전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말이오. 세간의
소문대로라면."
자근자근 떨어지는 빗방울이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을 쳐들고 비를 맞던 장추삼이 조그맣게 입을 열었
다.
'너무도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던 나의 형, 그리고 불꽃처럼 자신을 사르고 간 기학이라는 사내와의 일
이 들어가야 비로소 은원이라는 단어가 성립이 되겠지요? 또한 그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무룡숙의
염소수염과 수뇌부뿐일 거고"
"그렇군 말실수였어."
"또한 십장생과 노인장을 비교해 본다면 나이도 나이거니와 품격에서 차원이 달랐거든. 그러니 뻔한 것
아니겠어? 그들이 신주단지처럼 떠받드는 노태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거지."
장추삼의 다소 긴 얘기가 긑나자 노인이 뭔가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처음부터 알았느냐?"
"처음엔 단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소. 며칠 같이 다녔지만 노인장에게의 악의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물
론 헤어질 때까지 그랬지. 하지만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역시 답은 그렇게 흘렀거든. 그런
결론에 이르니 역시 모르겠단 말이지."
"뭘 말이냐?"
흡족한 얼굴로 노인이 제차 물었다.
"내게 접근했던 이유가 무엇이요?"
장추삼의 질문에 노인이 왠지 격동 어린 표정이 되었다가 곧 얼굴을 굳히고 몸을 돌렸다.
"그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말하자꾸나."
"조금 있다라니 언제...."
이때 노인이 뒤로 돌아보지 않고 짧게 물었다.
"마지막 조각은 건네받았겠지?"
"어?"
귀신같은 노인네나. 하긴 그러니까 이 음모중중의 살얼음판을 버텨낸 것이겠지
장추삼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노인이 군웅들에게 포권을 하며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고 여기 장추삼 소협의 말대로 이 사람이 바로 십장생의 막후에 섰던 노태상이자 삼백 년간 그늘
속에서 살업을 자행했던 어둠의 율법자요. 또한...."
포권을 푼 노인이 오연하게 외쳤다.
"장막 속에 숨어 여러가지 재미난 소문들을 들려주었던 유한초자이기도 하오."
조월회란, 그 마지막의 울림
"유, 유한초자라고!"
"유한초자가 율법자이고 거기다 강호를 폭풍속으로 몰아넣었던 십장생의 배후이라는 건가!"
사람들이 전율에 몸을 떨 때 어둠의 율법자, 아니, 노태상, 아니 유한초자가 천천히 몸을 돌려 어느
한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또 한 분을 소개시켜 드리겠소."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장문 도장인 구양승을 위시한 화산의 도사들이 자리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일을 크게 벌인 보람이 있군. 제 발로 나와주셨으니. 안그렇습니까? 사호 율법자?"
"뭐!"
"무슨 말이냐!"
분명 자신들에게 떨어지는 시선이라 화산의 도사들이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어둠의 율법자라니. 삼백
년 동안 온갖 살업을 저지른 희대의 살수들이 바로 그들일진데 감히 어디서 찾는다는 건가.
그러나...
"허허. 이제 숨어봐야 도리가 없을 텐데? 내가 직접....."
유한초자의 말을 끝나기 전에 도사들을 헤치며 한 사람이 천천히 나섰다. 그는 뭔가 복잡한 얼굴로 유
한초자를 바라보다 자그마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살아 있다고는 생각했다."
"그렇소? 당신도 살아 있는데 나라고 살아 있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소?"
두 사람의 인사는 화산에서 나선 노도사가 율법자임을 인정한다는 소리였기에 군웅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입만 벌려 놀라움을 대신했다.
"숨어 지내기 갑갑햇을 텐데 용케 버텼구려?"
"음...."
특히나 화산의 도사들은 그 충격이 곱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선 이는 다름 아닌 화산의 정신이라
는 즉선검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정작 구양승은 어두운 얼굴로 흐르는 빗물을 망연히 응시하고만 있었다.
즉선검인의 비밀에 싸인 반평생과 신비로운 화산으로의 입문이 바로 이런 연유였던가?
"자, 그럼 가진 패를 꺼내 봅시다. 내가 총 넉 장을 가지고 있고 사사형께서 한장. 그리고 저기 장 소
협이 다섯 장이니."
"내겐 없다네."
즉선검인이 고개를 가로 젓자 유한초자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지금 장난하자는 거요?"
요, 자가 채 끝나기도 전에 즉선검인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쿵!
"커헉!"
땅에 나동그라진 즉선검인이 입에서 한 사발의 피를 뱉자 화산의 도사들이 일제히 칼을 빼 들었다.
"나서지 마라!"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을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도사들을 제지한 노도사가 힘겹게 일어서며 손을 들
을 하운을 가리켰다.
"저, 정말일세, 이미 대제자에게 넘겼단 말이야."
"호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현 무림을 울리는 강호삼성 가운데 두사람이 여섯 장을...."
"한 사람이겠지요."
하운이 잘라 말했다.
"저 역시 장형에게 넘겼으니 그에게 여섯장 모두가 돌아간 돌아간 셈입니다."
하운의 곧은 얼굴을 들여다보던 노태상이 곧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정말 너에게 모두 모였다더냐?"
"받은 걸로 합치면 일곱이지만 하나는 뭐 다른 거니 여섯 장이 맞긴 한데..."
장수에 저리 연연하는 이유가 뭘까?
순간 장추삼은 얼마전 정화진이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거 다 모이면 뭐가 되는데요?"
역으로 말한다면?
'이 열장은 모두 모이면 무엇이 된다?!
그가 안 돌아가는 머리를 애써 굴리는데 유한초자가 장추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둘에게 모두 모였구나, 이제 그것을 돌려주지 않겠느냐?"
"돌려달라고요?"
장추삼의 물음에 유한초자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라면 알고 있지 않느냐? 그것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을 말이다."
안다, 알긴 아는데 돌려주기가 싫다.
그가 주저하는 얼굴이 되자 유한초자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백이십여
번의 겨울을 보낸 사람이 만들어낸 탄식은 장추삼에게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처음 네가 가졌던 넉 장 역시 내가 준것이나 다름없느니라, 노부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셋째
가 그걸 가져가는데 몰랐겠느냐?"
"셋째라고요?"
셋째라니? 누구를 말하는 건가?
"이놈! 비록 뜻이 맞지 않아 돌아섰다고 해도 군사부일체라고 했거ㄷ늘 어찌 쥐새끼처럼 숨어 힐끗거리
고만 있는게냐! 썩 나서지 못할까!"
우웅-
유한초자의 일갈에 흐르는 빗방울마져 작은 진동을 일으키며 비산하였다. 그리고 한 인물이 비척비척
다가와 그의 앞에 부복하며 낮게 흐느꼈다.
"제, 제자가 사부님을 뵈옵니다!"
'이런 젠장!'
불길한 예상은 귀신같이 들어맞는다.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지청한 이었다.
"마, 만승검존!"
혜광 선사의 억눌린 외마디 소리에 사람들이 부르르 몸을 떨렸다. 그도 그렇ㄹ 것이 만승검존이라고 하
면 당대의 제일인이자 무림맹주가 아닌가.
비록 실종되었다고는 해도 그의 위명과 존엄은 아직까지도 세간에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거늘.
"만승검존이 율법자의 제자?"
"그럼 우리가 모신 무림맹주는!"
군웅들이 외침에 지청완이 이를 악물었다.
"봐라, 저들은 저리도 표리부동하게 너를 얘기하고 있다. 단한번도 무림맹주로의 권한이나 역할을 부여
하지 않았으면서 그저 이름만을 들먹이고 있단 말이다. 그러니 이 어찌 한심하지 않을까?"
유한초자의 비웃음에 지청완이 고개를 들어 냉랭한 표정의 사부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런 식이로군요, 당신은'
인정하지 않은 대상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갑고, 마음을 준 상대에게는 더없이 관용적인 사람. 그렇
기에 수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
"한가지 일러주랴? 네 녀석이 무림맹주네. 뭐네 하며 지낼 때 단한 번이라도 맹주직인을 가져 본 적이
있느냐? 없을 것이야. 그 이유에 관해서 누구 하나 알려주지 않았겠지. 후후.. 너는 그저 허울 뿐이었
을것이다."
아마 사부는 아직도 떠단 두 사형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얼마 전에도 하남을 다녀갔더구나. 그래 마지막 넉 장마져도 가져가려 했던 것이냐?"
"아아...."
그들의 말을 듣던 장추삼이 주먹을 꾹 쥐었다. 이숙과 사숙이 주었던 넉 장의 출처가 어디였는지 알았
기에.
"너무 몰아붙이지 마시구려. 주면 될 것 아니오!"
부시럭 품을 뒤진 장추삼이 편지 뭉탱이를 꺼내 유한초자에게 건네려 했다.
"안된다!"
"안돼!"
엎드려 있던 지청완이 일어서며 손을 뻗었고, 한 켠에서 지켜보던 즉선검인이 달려들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들은 이 종이쪼가리에 이리도 필사적인 걸가.
"훗!"
유한초자의 입가에 시선이 그려지며 두 사람은 퉁기듯 나가떨어졌다.
'가공할 파괴력이다!'
지켜보는 장추삼의 얼굴에도 경악이 어렸다. 지금까지 유한초자가 보여준 수법은 그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라 그저 막연한 두려움이 들뿐이었다.
"무형탄강이라니... 내 생전에 저런 경지를 보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여는 노인, 그의 머리는 완벽한 방수 체계를 가진 터라 빗물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
고 닿는 족족 흘러내리기에 바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북궁설이 눈을 반짝이자 북궁노백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처연하게 웃었다.
"무형탄간이란 말 그대로 형체도, 움직임도 없이 몸 안에 촉발되어있는 강기를 내쏘는 것을 말한단다.
그러나 이런 경지는 그저 무림인들에게 꿈의 경지로 전해져 왔을 따름이거늘."
북궁노백의 말에 북궁설이 주먹을 쥐며 흔들었다.
"그래 봐야 할아버지의 일검이면..."
그녀의 말은 북궁노백의 한숨에 의해 간단히 잘려 나갔다.
"대정검보만 극성으로 깨달으면 최고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거늘..."
대정검보
북궁가문의 자랑이자 무림행보에 족쇄가 되었던 문제의 책.
북궁노백조차 그 책이 언제 누구에게서 전달되었는지 모른다.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저 천고의 삼초검식이 담겨 있었고 두번째 초식까지 깨우친 이가 북궁가의 역사상 단 한 명이었을
정도로 오묘하면서도 난해한 검식이었기에 가문이 사활을 걸고 수련에 매진하던 중 북궁노백은 삼초식
의 초입에 접어들면서 한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북궁가의 강호행 금지와 대정검보의 관계에 대해.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평생 북궁가는 천산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는 마침내 비밀
잠행을 하기에 이르고 그가 얻은 결론은 충격적이었다.
대정검보는 어쩌면 마교삼위 가운데 대정일검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몰아친 비천혈서에 관한 소문, 열 장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무림의 하늘이 흔들릴 거라는.
그때부터 북궁가문은 비천혈서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대정검보의 정체를 밝힘은 물론,
마교라 명명되는 명교와 구파간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삼위와 율법자... 이 모두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바로 비천혈서라고 판단했기에..
그렇게 모든 것이 밝혀져 대정검보의 혈흔만 씻으면 강호를 다툴수도 있을 거라 판단했거늘.
손녀의 의아한 얼굴을 외면하며 북궁노백이 탄식처럼 뱉어냈다.
"무형탄강을 막을 수단은 전무하다..."
별레처럼 꿈틀거리는 두 사람을 차갑게 노려보던 유한초자가 고개를 돌렸다.
"옛정을 생각해서 손속에 사정을 두는 것이지만 한 번 더 나선다면 자비를 기대하지 말 것이야."
약간 놀라 눈을 굴리던 장추삼이 유한초자와 마주하자 헛기침으로 속내를 감추려 했다.
"괜찮다. 놀랄 것 없느니."
순식간에 바뀌는 얼굴. 추상같은 기도는 어디로 가고 응성 부리는 손자를 대하는 얼굴이 되어 유한초자
가 장추삼을 다독였다.
"놀라긴 누가...."
말을 흐리며 그가 손에 쥔 편지를 건네자 그것을 받아 든 유한초자의 얼굴에 설명하기 어려운 격동이
어렸다.
"안돼.."
"이럴수가..."
비틀거리며 몇 마디 늘어놓는 둘을 무시하고 유한초자가 편지를 펼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것을 얻고자 얼마나 노력했던가. 수십 년 전에 확보한 여덟장은 지남에 따라 그저 애물단지로 전락
했고 기약없느 ㄴ방향으로 보낸 세월이 몇해던가.
그런데...
"음?"
편지를 확인하던 유한초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어째 이것뿐이더냐?"
"당연히 그것뿐이니까."
장추삼의 태연한 대꾸에 아직도 땅을 기는 즉선검인을 바라보던 유한초자가 애써 들끓는 심정얼 가라앉
히고 침착하게 물었다.
"듣기로 분명 여섯 장을 가졌다고 했는데?"
"맞소이다. 하지만 노인장의 것은 분명 넉 장이니 이제 돌려준 것이오. 남의 것을 함부로 소지하면 곤
란한 일을 겪는 법이니. 역시 난 사리분별이 정확해서 탈이라니까?"
의뭉을 떠는 장추삼을 멍청하게 보던 유한초자가 느닷없이 대소를 터뜨렸다.
"우하하하하! 능청맞기도 딱 희준을 닮았구나! 역시 희준은 제자를 잘 키워냈어!"
"희준... 이라고요?"
장추삼의 질문에 유한초자가 고개를 갸웃 거렷다.
"무슨 말이냐? 너는 설마 사부의 함자도 모른다는 말이냐?"
얘기를 해줬어야 알 것 아닌가.
"하긴, 워낙 엉뚱한 놈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구나. 이제라도 알아두거라. 네 사부의 함자는 권자 희자
준자를 쓰느니."
권희준이란다. 단 한차례도 얼굴을 펴고 웃지 않았던 사부의 함자가 이리도 멋들어졌단다
"제길!"
부슬부슬 내리는 비 사이로 사부의 영상이 천천히 떠올라 장추삼은 그만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를 바
라보던 유한초자도 어쩐지 서글픈 얼굴로 비에 가린 달님을 찾았다.
그렇게 잠시의 정적에 몸을 맡긴 두 사람이 문든 정신을 차렸다. 떠난 이를 추모하기엔 시기가 좋지
않았기에.
"다시 말하마. 그것은 네가 가져 봐야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니 어서 이리 건네거라."
"글세요?"
여전히 버티는 장추삼을 무겁게 보던 유한초자가 받은 편지를 갈무리 했다. 이대로 비에 적실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묻자. 이것이 무엇이더냐?"
"말 그대로 비천혈서가 아니오?"
"비천혈서의 생성 이유는 알고 있느냐?"
"대충은 짐작하고 있소이다."
"짐작이라..."
유한초자가 어느 먼 옛날을 추억하기 시작했다. 구슬프게 떨어지는 빗소리도 그의 추억을 방해하지 못
했으며, 그의 말을 방해하지도 못했다.
"시작은 삼백 년 전, 정확히 말해 마교지사라 일컬어지는 첫 번재 무림혈겁이었지..."
당시 무섭게 세르 확장하던 명교의 기세와 그 사악한 가르침에 분개한 구파의 지사들이 모여 명교의 총
단을 급습했으나 무서운 마공에 가까스로 승리를 이끌었다.
"이건 일반적으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지, 기득권층의 입맛에 맞도록 교정된 얘기라는 말이다."
명교의 총단을 치기 전, 구파는 명분이 없었기에 우선적으로 무공이 강한 몇몇을 선발하여 명교와 비무
를 요청했다. 힘의 차이를 보임으로서 함부로 발호하지 못하도록 기선제압을 하자는 의도였는데 결과는
비참했다.
구파일방에서 보낸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명교의 무학은 중원의 그것과 차원이
다른 것이었고, 또한 변칙적이어서 도저히 그들을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구파일방에 더한 압박으로 다가왔고 마침내 그들은 명교를 말살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무학으로도, 민심으로도 꿀리기에 선택한 마지막 방법.
그것은 바로 거짓이었다. 명교는 며칠 사이에 사교 중의 사교로 낙인이 찍혔고 그들의 세가지 신공은
사공으로 변했으며, 추종자들은 마인이 되어버렸다.
"소문이란 그렇게 무서운 법이지. 상대하지 않으면 가라앉기도 하지만 작정을 하고 퍼뜨리면 방비없이
는 그대로 당하고 마는 법이니까."
그러고도 옥쇄작전을 펼친 이들에게 당문의 독을 풀어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교도들 하나하나를 주살하
여 목적을 달성한 구파연합의 협잡은 끼리끼리 문화라는 암묵적인 동의 하에 전혀 다른 영웅담으로 탈
색되어 세인들에게 전해지게 된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명교지사, 즉 제일차 무림혈겁이지만 이야기는 이제부터란다."
그렇게 기득권을 지켜냈지만 구파로는 더 큰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마교의 삼위고 일컬어지는 명교의
삼대독문무공서가 혼전의 와중에 실종되었던 것이다.
"얼마나 겁이 났을까? 얼마나 두려웠겠느냐 말이다!"
명교의 경천동지할 무공을 직접 목도한 구파일방으로는 그 세 가지 무공서를 두 번째 명교라 부를 수밖
에 없었다.
양대 호법이 구사했던 일천마라형보와 철화정련서, 그리고 교주 서문탁이 단 한 번 보였다는 대정일검
서... 이것을 회수하지 않으면 명교타도의 의미가 없다!
언제든지 제이, 제삼의 세력이 대두될 수 있으니까, 그만큼 그들의 무학은 독보적인 것이었고, 강호라
는 세계는 힘으로 대표되는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니.
최악의 경우 구파와 궤를 달리하는 조직이나 개인이 그 물건을 손에 넣는다면 기존의 질서와 전혀 다
른 무림관을 제시하며 세르 확장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누리던 기득권은 점차 좁아지겠고 한 번 보인 틈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동정호
의 물이라도 들이닥칠 정도로 벌어질 판이니까."
구파일방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끌어들인 당대의 세력들에 자연 의심의 눈길을 돌렸으나 그들
은 한결같이 부인 일색이었고 정도를 표방하는 그들로는 다그치기도 뭐하 노릇.
그래서 탄생한 조직이 어둠의 율법자였다.
"구파일방의 제자면서도 구파일방과는 전혀 상관없는 조직. 삼대무공서의 회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행
동이라도 불사하는 치외의 조직. 그것이 바로 율법자 였느니."
방법은 간단했다. 구파의 냄새가 전혀 묻어나지 않는 무학을 하나 창안하고 충성도가 높은 최고의 제자
를 각파에서 한 사람씩 차출하여 그것을 수련시키면 됐으니까.
최고의 무학을 수련하던 그들에게 신초식은 며칠의 수련으로 충분했고 그들은 곧 명교지사에 구파와
힘을 합쳤던 외부세력들을 하나씩 방문했다.
대결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의 무학은 각파의 장점만을 받아들여 이전과는 판이하게 상승된 상
태였다. 누구라도 그들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삼대무공을 완벽하게 터득했다면 몰라도.
삼대무공서에 대한 질문, 그리고 고문... 결국 시체는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안장했다. 만에 하나
발견되더라도 구파의 흔적은 남지 않을 무학을 사용했기에 구파는 율법자의 살행에서 자유로웠던 거다.
"예상치 못한 문제는 그렇게 닦달을 해도 삼대무공서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쌓이고...
아무리 최고의 무인이라 해도 율법자 역시 사람인지라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지만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그들은 제자를 받아들이고 다시 한 번 율법자로의 길을 걷게 한다.
그렇게 이대가 받든 율법자의 길. 역시 무서는 오리무중이었고 삼대가 받들 무렵부터 율법자와 구파의
끈은 많이 옅어진 상태였다.
그때부터 율법자들은 자파에서 제자 될 아이를 수급하는 사람과 강호행에서 발견한 수재들에게 눈을
돌린 이들로 분리가 되기 시작했으니까.
"자파에서 제자를 받아들인 치들은 구파에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
은 자기들이 이룩한 무학을 사장시키기 싫어서 그랬던 것이다. 사실 이백여 년 동안 분리된 사이였으니
그럴 만도 했지."
중원이 넓다 하나 이백 년을 한결같이 찾아 헤맸거늘 열 사람이 스무명이 되고 다시 삼십명으로 불어나
도 삼대무공서는 꼬리를 감춘 신룡처럼 종적이 묘연했다.
자부심 하나로 버텨온 살업이지만 성과없이 보낸 이백 년과 묘비명조차 새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사부들을 지켜보며 율법자들 가운데에서 불만을 가진 이가 나옴은 당연했다.
제 배가 부르면 종놈이 배를 곯는지 알 도리가 없다고 했던가?
사대에 이른 그들에의 여전한 충성심을 기대한 구파에서 삼대무공서의 존재에 회의감을 느끼고 점차 자
파의 안위에 눈을 돌리다 문득문득 발생하는 충돌의 해결 수단으로 율법자를 동원할 생각을 가지게 된
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원하 수호신이자, 자파의 제자였고,
"개였으니까."
목표는 수정되었다. 각파의 문제를 어둠의 이름으로 처리하는 것을 구파에서 요구하였고, 율법자는 이
를 수락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논을 하였다.
이때 삼대 율법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가 신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일러주었다.
"뜻을 따르겠으되 첫 청부 시에는 반드시 핏빛으로 찍히 장문령부의 인장이 있어야 한다."
이유야 알 도리 없었지만 그래도 사부이자 사숙의 말슴이라 그대로 따로 각파에 전언을 넣은 율법자들
에게 곧 피로 찍힌 인장들의 배달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다시 반복된 살업. 이번은 명분조차 희미했고 때때로 불합리하기까지 하여 율법자들 사이에
점차 고성이 오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사대, 이백여 년간 자파의 무학을 연구하고 실전으로 가다듬고 서로간에 약점까지 보듬어주어 그들의
무학은 그야말로 천지를 울릴 수준 이었거늘 고작 살인청부업이라니.
이런 불만의 목소리가 구파에 전달이 될 무렵. 율법자 가운데 하나가 무당의 청부를 받게 된다. 이때
는 이미 자파라는 개념이 거의 없어진 상태라 청부서가 오면 눈치껏 나가는 수준이었다.
그는 광도 이한모라는 천하의 대도와 귀염장 조치민이라는 무인을 주살하라는 명을 받았고 곧 광도를
찾았으나 그의 입에서 믿어지지 않는 말이 흘러나왔다.
"무당의 조사전에 무단으로 침입을 했다는 그가 본 것이 뭐였는지 아느냐? 그것은 단 다섯 자로 이루어
진 문장이었다."
십혈인봉천.
그러나 당시의 젊은 율법자에게 이런 말은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그저 그런 속뜻이 담겨 있었구나, 하
는 정도였을 뿐.
망외의 소득이랄까? 이한모를 처리하고 흔적을 지우기 위해 품을 뒤지던 중 그의 손에 두 권의 책이 잡
혔고, 덜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책장을 넘겨본 결과 그것은 진품임이 분명했다.
"누가 알았으랴. 마교삼위 가운데 두 권의 향방이 황궁무고로 흘러들어갔었음을."
당시 광도의 황궁무고 침입 건으로 황궁의 무사들이 강호에 나섰던 것은 유명한 일화. 그때 그가 희대
의 기서라는 일천마라형보와 철화정련서를 탈취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이백 년이 아니라 이천 년인들 뒤져도 나오지 않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황궁은 무인들의 발길
과는 상관이 없는 장소였으니.
두 무공서를 본의 아니게 얻었지만 젊은 율법자는 아무도 모를 곳에 숨겨두었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에. 그리고 귀염장을 주살하면서 그들을 명명하는 무림십좌란 이름이 그저 호사가들의 말장난
만은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무인이라는 점에서 같았지만 세인들이 간과한 공통점이 또 하나 있었던 것이다.
"바로 십좌 모두가 구파와는 상관이 없는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지. 동시대의 최고를 달리는
열 사람이 구파를 경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거든. 그래서일까, 남다른 유대감이 그들 사이에 흘렀고
교류 또한 빈번했었지."
이를 알게 된 젊은 무인은 남은 십좌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황궁무고와 광도와의 관계를 지
우기 위한 조치였음은 물론이었다.
덧없이 흐르던 어느 날, 개방에서 날아온 마지막 혈인봉서가 도착하고 내용을 훑어본 최후의 삼대 율
법자가 치중한 얼굴이 되어 고민을 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게 떠난 살행, 비록 백여 세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모두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삼대의 율법자는 그들의 기대처럼 온전히 돌아왔으나 수심이 가득 담긴 얼굴로 제자와 사질들
을 바라보며 던진 그의 첫마디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잘못되었다. 라는.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신비롭게 실종되었다.
마치 명교지사에 관여했던 외부세력과도 같이.
그것이 시작이었을가. 그 뒤로 하나, 둘... 율법자는 사라져 같다. 남은 인물들은 저마다 불안했지만
설마라는 생각으로 애써 담담하려 했다.
"그러다 보게 되었지. 골육상잔을 요구하는 청부서를."
놀랍게도 구파에서는 아직도 충성심이 남아 있다고 판단되는 율법자들을 특정하여 다른 율법자들을 하
나하나 제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도의 이름을 쓰고 어찌 이런 일을 자행한다는 말이냐! 그리고 구파의 허울에 씌어 동료를 배신하는
자들을 난.. 용서할 수 없었다!"
젊은 율법자는 남은 이들을 먼저 제거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들끼리의 무학은 박빙이고, 준비된 자가
승리를 거둠은 당연한 일이었으니.
그렇게 하나씩 제거하다 최종적으로 남은 하나, 그러나 그만은 차마 벨 수 없었다. 일단 그 사람은 동
료를 배신한 적도 없거니와 젊은 율법자와 각별한 우정을 나눴던 처지였으니까.
하여 젊은 율법자는 그의 주요 심맥을 막는 것으로 목숨 값을 대신 하고 떠나라고 했다. 강호상에서
영원히.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소? 한데 당신은 약속을 어겼지. 자파의 청부서를 빼돌렸던 거야. 그리고 화산으
로 기어들어 갔지. 분명히 강호를 떠나겠노라 했고 그것을 믿었거늘!"
유한초자가 핏빛선 눈으로 즉선검인을 쏘아보았다.
"나, 나는 어떻게든 대비해야만 했다..."
"누구를? 나 말이오? 우하하하하! 그런데 어쩌면 좋소? 당신의 알량한 제자로는 나 하나도 감당하기 어
려울 텐데? 그리고 지난 백여년간 나라고 놀고 있었다고 여긴 것은 아니겠지?
후두둑-
빅소리처럼 일군의 인영들이 내려섰다. 그들은 비록 많은 수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일당백의 기세를
흘리고 있었다.
내려선 무인들을 흡족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유한초자가 몸을 돌려 장추삼에게 양팔을 벌렸다.
"자, 이제 알겠느냐? 이 늙은이의 고뇌를? 저들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하고 노부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
저들은 비열하게도 초대 율법자들과 맺었던 십혈인의 약속조차 전달하지 않았고, 그것이 알려질까 두려
워 동료끼리 피를 보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십혈인의 약속? 말이 거창하지. 그것 또한 구파
간에 서로를 믿지 못하여 만들어둔 견제 수단이 아니었던가? 당시로는 열개의 혈인을 한 사람이 가질
수 없아고 여겼을 테니. 그렇기에 십혈인이 구파맹주령이라는 황당한 약속을 첼결했던 것이다. 악취가
진동하는 이런 자들이 정도를 표방하여 무림의 하늘이라 고개를 들고 다니는 것을 절대로 좌시할 수 없
지 않겠느냐!"
그의 온화하면서도 광기 어린 표정을 바라보던 장추삼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들이 추잡하다는 건 충분히 전달되었는데 노인장에게도 자격 따윈 없군요."
그의 무덤덤한 대답은 축축한 겨울비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분명 그 누구라도 노인장을 탓할 수는 없소, 하지만 두 가지의 무공서를 숨기기 위해 죄없는 십좌들을
주살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노인장은 저들과 동등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 거요."
"뭣이라고?"
"거기다 두 번째 무림혈겁이라는 흉몽지겁의 소문을 배후에서 조정하고 아래 사람들을 시켜 피까지 봤
으면서 자격은 무슨! 어이가 없네요."
"아...아!"
유한초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식어버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장추삼의 눈동자 뒤로 또 한사람이
겹쳐지며 잊고만 싶은 과거가 떠올랐기에.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양민까지 동원해 가면서 목적을 이루신다면 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배운 모
든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더 이상 사부님의 뜻을 쫓지 않겠습니다!
"사제지간에 어찌 그리 똑같단 말ㅇ이냐..."
한탄처럼 유한초자가 입을 열었지만 장추삼은 단호했다.
"첫 번째 흉몽지겁. 그건 단지 비천혈서에 대해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모임의 우선이요. 사숙 영감의 강
호행을 빛내는 보조 수단이었겠지. 그럼으로 사숙영감은 자연스레 무림의 최고 수뇌부로 올라섰으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생각이나 해봤소?"
이번 일을 강행하신다면 저 또한 파문시키세요!
"그 일이 그렇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냐. 세 명의 제자에 이어 사손에게까지 버림받을 정도로?"
유한초자의 애달픈은 음성은 순간적으로 장추삼의 마음을 두드렸지만 그는 곧 입술을 물고 잘라 말했
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행하였으니 그보다 나쁜 경우는 천지에 없소이다."
"하..."
"그런 노인장에게 구파의 생살여탈권까지 좌우할 문서를 양도하라는 건 무리지."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녕 주지 않겠느냐?"
"가져가시오."
장추삼의 단호함에 혀를 차던 유한초자가 문들 물었다.
"그렇게 나와 싸우고픈 이유가 무엇이냐?"
"그냥.. 지금 싸우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 것만 같아서."
장추삼의 담백한 대답에 유한초자가 힘없이 웃었다.
"그렇다면 나도 역시 싸워야만 하겠구나."
"에?"
"매일 매일 후회를 하기 위해 깨어나야 하는 사람을 아느냐? 여명을 보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탄식
인 사람을."
유한초자의 음성은 조금씩 힘을 얻었다. 그러나 음성의 크기와 상관없이 그만큼씩 떨려왔다.
"이대로 끝낸다면 또다 매일을 후회하기 위해 보내야겠지."
츠츠츠츠츠-
빗물이 유한초자의 앞에서 기화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남길 후회도 없단다."
눈을 빛내다 한 걸을 물러선 장추삼이 천천히 부복했다.
"장추삼이 사조님을 뵈옵니다. 비록 뜻이 달라 손을 섞지만 사감은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사감은 없다.. 라.
"그래 어서 일어서거라."
쿠르릉!
일견 다정한 말과 함께 유한초자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컥!'
뭐가 어떻게 됐느지 모르지만 장추삼이 붕 떠서 빙글 한 바퀴 굴렀으나 겨우 신형을 추슬었다. 제대로
격중되었다면 단 한방으로 끝났을 터.
힘의 차이를 보여주려는 의도랄까?
쿵!
다시 무언가가 밀려들어 왔지만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인 장추삼이 숨을 헐떡였다. 속도고 위력이
고 이건 뭐 어떻게 해볼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이익!"
힘껏 신형을 뽑은 장추삼에게 무형의 장력이 다가와 부드럽게 밀어쳤다.
콰다!
"아아, 제기랄!"
다시 일어서 그였으나 준비라도 한 듯 또다른 기세가 그를 옥죄었고 장추삼은 비틀 무릎을 꿇었다.
"일단 피해! 있는 힘껏! 죽을힘을 다해서 피하라고!"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군중을 헤치고 나선 하운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건 피할 수준이.."
쾅!
또 한번의 폭발음이 들리고 장추삼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접근? 그런 걸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지금의 그는 쏟아지는 우박에 처마를 찾는 파리보다도 못한 신
세였으니까.
"기를 쓰고 피하라니까!"
쾅!
"바보냐? 발은 뒀다가 뭐에 쓸거냐! 어서 피하란 말이야!"
피하다가 죽을 판이라고, 하 형.
점차 빠지는 다리의 힘과 가빠오는 숨에 장추삼이 헐떡거렸다. 말로야 무엇인들 못할가. 피하기만 할가.
피하고 한 대 날릴 수도 있겠지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고 가까스로 버텨내던 장추삼에게 유한초자의 예고된 일격이 날아들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피한것도 천운이었을 거다.
쾅!
끝내 무릎을 꿇으며 그가 툴툴 웃었다.
'아아 피곤해.'
어떻게 이런 걸 피해? 인간적으로 말도 안돼
졸리고 피곤한 게 딱 한숨만 잤으면 좋겠다. 딱 한숨만.
쉬고.. 싶어.
천근만근 내리깔리는 눈꺼풀을 감당하지 못하고 장추삼이 엉덩이를 땅바닥에 붙였다. 이만하면 최선이
라고 자위하면서
이제 그만 보내 드리거라.
'어, 사부?'
돌아갈 곳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분이다. 네가 아니면 누가 있어 저분에게 안식을 드릴까.
'사부가 직접해요, 그럼.저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사부의 처연한 얼굴을 대하니 어쩔 도리가 없다.
'아, 몰라요! 나더러 어쩌라고!'
여전한 얼굴의 사부, 그러다 점점 옅어지는 초상. 사부의 모습이 희미해짐에 따라 장추삼의 정신은 점
점 맑아졌다. 마치 비 온 뒤의 하늘처럼.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이 빌어먹을 자식! 한번만 피해!"
이젠 북궁단야까지 가세했나 보다. 얼음과도 같은 그였는데 이제 보니 불꽃이다. 그런데 왜 저리 소리
를 지르는가. 귀 따갑게 말이다.
그런데 한 번만이라고?
순간 장추삼이 입술을 물어뜯었다. 따끔한 감촉과 함께 차갑게 가라 앉은 마음.
'한 번만이라?'
츠츠츠-
다시금 밀려드는 잠력에 나동그라진 장추삼이 흙탕물을 뒤집어쓰고도 용케 일어서따. 그러나 그의 행색
은 너무도 초라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했다.
"한 번만 피해! 그리고 목청껏 노래를 불러봐!"
"시끄러워!"
나도 알고 있다고!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말란 말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 장추삼이 비틀비틀 유한초자에게 다가섰다.
"자, 오시구려."
쾅!
위력적인 잠력이었으나 발을 기묘하게 틀어서 어떻게든 정타를 피한 그가 휘청거리며 이죽댔다.
"다시!"
펑!
그러나 이번에도 유한초자의 잠력은 장추삼을 정확하게 격타시키지는 못했다. 순간적으로 장추삼의 보
법이 진화한 걸까?
답은 바로 거리였다. 어차피 무형의 잠력이라 보고 느끼면서 피하기에 무리. 차라리 좁은 거리라면 조
금이라도 피할 여지가 생긴다. 제아무리 움직임이 없다고 해도 분위기라는 건 있으니까.
두드려도, 두드려도, 변화가 없으면 누구나 순간적으로 당황하게 된다. 그건 강호에서 내력이 가장 강
한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정타를 용케 피하면서 차근차근 좁혀 들어가던 장추삼이 유한초자가 주춤 뒤로 물러서는 순간 딱 한
걸음 움직였다.
"가락이라고 했던가?"
내 지금부터 노래 한 곡 할 테니까 잘 들어봐요 사부.
사조께 바치라고요? 난 사부님께 들려주려 했는데
못난 제자의 노래, 살아생전 한 번도.. 들려 드리지 못했잖아요.
하긴 웃어주지 않았으니 비긴 건가? 우헤헤.
음? 아무러면 어떠냐고요?
에이. 헷갈리니까 그냥 짧게 끝낼래요. 어차피 돼지 멱따를 소리라 길게 하래도 못해요.
너무도 이른 달이라 돌아갈 곳 몰라 처량하네.
조월회란.
장추삼의 괴성의 네 가지 초신을 구성하는 네개의 시구에서 따온 첫 글자를 만들어낸 신초식.
산무영의 변화가 여기 있었고, 추뢰보의 쾌속함이 담겨 있었으며, 유성우의 강인함과 능신뢰의 폭발력
이 담긴 단 일보.
그리고 추뢰보도 아니고 산무영도 아니면서 유성우나 능신뢰가 아닌 전혀 다른 모습의 초식.
"커억!"
동시에 뒤로 떨어져 나간 두 사람이 비틀거리며 엉금엉금 바닥을 기었다.
"이이익....."
가까스로 상체를 세운 장추삼이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깨물면서 무릎에 힘을 실었다.
"돌아... 가세요."
엉거주춤 일어선 그가 유한초자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당신은... 이들의 앞에서 이런 모습으로 기어다닐 필요가 없어요 후욱, 후욱.. 어서 일어서서 돌아가
시란 말이에요."
과연 내가 보내 드린 곳이 어디일가. 이분은 만족할 수 있을까?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서던 유한초자가 돌연 손을 뿌리쳤다.
"그래, 네 녀석이 이겼다. 그렇다고 노부가 네놈의 동정이나 받을 만큼 비참해졌다 생각하느냐?"
패배가 사람을 바꾼 것인가. 전에 없는 독기를 뿌리며 거칠게 장추삼을 밀치고는 하늘을 우러르며 소
리 질렀다.
"내 죽을 때까지 네놈들을 저주할 것이다! 앞으로 너와는 사손이라는 인연 따위로 얽힐 일도 없을 것이
야!"
절규하던 유한초자가 구파들을 향해 키득거렸다.
"잘난 영웅 하나가 너희들의 명줄을 유지시켰구나. 그러나 잊지 말거라! 하늘과 땅은 너희 구파가 저지
른 만행을 무림이 끝날 때까지 기억하리니!"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에서 신선과도 같은 풍모를 찾아보긴 어려웠다.
"사조..."
멍하니 서있던 장추삼이 문득 손에 쥐어진 종이 뭉치를 으스러지게 쥐었다. 방금전 장추삼을 밀치면서
남기고간 유한초자의 독백랄까.
"아아......"
빗속으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뒤에서 구파의 인물들이 흉흉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금이야말로 기회다! 어서 저자를 죽이자!"
"어둠의 소산이라는 노태상을 처단하자!"
빗물일까. 눈물일까. 장추삼은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무엇에 숨을 몰아쉬다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
리를 질렀다.
사조는 그를 위해 독한 모습으로 떠나갔다. 전신의 심맥이 가닥가닥 끊긴 채로, 그와의 인연을 무로
돌려 앞으로의 강호행에 오점을 지운 것이다.
동행하면서 문득문득 지었던 자애로운 미소. 넋두리처럼 묻곤 하던 사부와의 추억. 이제야 알 것만 같
다. 그 미소 속에 담긴 의미를. 추억을 상기시켰던 이유를
그것이 그분의 내리사랑인가.
뒤에서 웅성거리는 군웅들에게 천천히 돌아선 장추삼이 어금니를 벌리고 한자핮자 끊어 말했다.
"십혈인의 주인으로 명하노니 구파의 무인들은 절대로 그를 쫓지 말것이다!"
우우웅-
그렇게 하늘을 보던 그가 하늘이 뿌옇게 다가오면서 정신을 놓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어떤 명으로 이 치사한 인간들을 단죄해야 할까?
조월회란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겠어. 이건 싸움도 무공도 아니니까, 살인만을 부를 뿐이거든.
쓰러지면 안 되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설 소저가 울지도 몰라.
아아. 너무 피곤해.
일단은 조금.... 자야겠어.
어느 나른한 오후의 초상
첫번째-팔년 후.
한 사내가 호북성을 밟았다. 그는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성문을 통과하여 단숨에 청빈로를 지나 복룡표
국에 이르러 몰래 담을 타고 표사들의 식당을 지나 작은 소로를 통과했다.
"팔년, 팔년을 한결같이 오늘을 기다렸다!"
사내의 음성은 비장을 넘어서 장엄하기까지 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가. 비록 대상이 바뀌긴 했어도 목표는 오직 하나, 무적의 사나이를 굴복시
키는 것이다. 그건 목표가 아니라 사내에게는 사명이었다.
십삼조의 대기전에 잠시 서서 숨 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괴성 장추삼. 썩 나와라! 팔 년을 한결 같이 절차투심한 사내의 도전을 받아라!"
잠시의 정적.
곧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눈이 쫙 찢어지고 신경질적인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한 낮잠을
방해받아서인지 연방 툴툴거리던 그가 사내를 바라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뭐야? 요 몇년 잠잠하다 헸더니..어?"
"세수하고 와라. 비몽사몽간에 거둔 승리라면 그분 또한 반기지 않으실 테니."
"어..."
멍청하게 사내를 바라보던 장추삼이 휘적휘적 걸어가 물을 뒤집어 썼다. 그러는 동안 어디선가 십삼조
원들이 하나하나 모여 흥미진진한 얼굴로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자자, 오라고."
대충 눈을 비비고 장추삼이 연무장 한가운데 우뚝 섰다.
"좋다."
그들은 포권도 자기소개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다 누가 뭐랄 것 없이 손을 섞기 시작했다.
"특이한 무공이로군."
사마검군이 눈을 빛내며 흥미를 표하자 당소소가 냉큼 대답했다.
"과연 그렇군요. 뜨겁지 않은 화기로 상대방의 공력운용을 봉쇄하고 있어요."
소풍나온 사람들처럼 한가롭게 중얼거리며 대결을 관망하던 실회조원들이었는데 최 연장자인 고담이 슬
쩍 뒤로 물렀다. 아무래도 사내가 내뿜는 기운을 감당하기 어려웠나 보다
"고 아저씨, 더워요?"
단사민의 빈정거림에 고담이 뭐라고 한소리 하려는데 뒤로 물러서기만 하던 장추삼이 슬쩍 앞으로 나섰
다.
파악!
쾌속하게 두번 발을 차올린 장추삼이 신형을 그대로 허공으로 띄웠지만 사내는 여유롭게 공세를 막아냈
다.
"우아.. 강호일절이라는 장 형님의 이단치기를 저리도 쉬게 막아내다니!"
모처럼의 싸움 구경에 신이 난 단사민이 중얼거렸다.
"저놈이 하는 건 다 일절 이냐?"
뒤에서 뚱한 표정으로 관전하던 고담이 아까의 빈정거림을 되돌려주려 했으나 두 사내에 움직임에 넋을
놓은 단사민은 미쳐 듣지 못했다.
파바박!
전설상의 쾌속보법이라는 추뢰보도 무위.
스스륵-
산무영도 무위.
우우웅-
유성우 역시 무위였다. 이는 사내가 내뿜는 기운 때문에 장추삼의 움직움이 전에 없이 느렸기에 위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대로는 어렵겠는데. 장점이라는 장점은 모조리 막힌 상태에서 상대방의 흐름에 따라 끌려가는 격이
야."
"그러게 말이에요. 느슨하게 하더니만."
사마검군의 말에 당소소도 동의를 표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단사민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당소소가 장추삼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바보 아저씨는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나? 작정을 하고 달려들었다면 벌~써 끝냈을지 모를
싸움인데 슬슬 하다 보니 상대의 이름 모를 기우에 저리 허우적대는 거지."
사마검군의 엄숙한 설명이 그녀의 뒤를 받여 주었다.
"상대가 발출하는 기묘한 기운. 한두 번까지는 그저 불편한 정도였겠지. 그렇지만 다섯 번이고, 여섯
번이고 쌓이면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는 모양이야."
하긴 고담이 물러서 있을 정도니.
그들의 한담을 들었는지 기를 모아 능신뢰를 날리려던 장추삼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사내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이 몸에게 함부로 도전을 했으니 그 대가는 몸으로 치러야 할 것이다."
쌩-
순간 사내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나는 결코 지지 않는다."
무거운 분위기가 잠시 흐르고 어느 순가 두 사내는 허공으로 몸을날렸다.
파박!
서로를 스쳐 지나가 위치가 바뀐 두 사람이 몸을 돌리다 사내의 무릎이 휘청 꺾였다.
"이, 이럴수가!"
처연한 사내의 얼굴을 외면하고 득의만만하게 미소 짓는 장추삼이 눈살을 찌푸렸다. 천천히 걸어나오는
단사민의 얼굴에 가득 담긴 장난기가 심상치 않아씩 때문이다.
"뭐야?"
히죽히죽 웃으며 장추삼을 바라보던 단사민이 손가락을 들어 그를 똑바로 가리키며 일갈했다.
"실격패!"
"뭐, 뭔 소리야!"
사내도 아연 놀라 단사민을 올려보았다. 실격패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얼마나 지났다고 스스로 한 말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겁니까?"
"뭐, 뭐!"
당황한 장추삼이 버벅이는데 멀직이 떨어져 있던 고담이 손바닥을 짝 부딪치며 낄낄 웃었다.
"맞다, 맞아. 실격패로구나!"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당소소가 아, 하며 까르르 웃었고 사마검군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보
아싸.
"맞네요. 추삼, 실격패를 인정하세요."
"당 누님까니 이러기요!"
이때 당소소가 불쑥 일어서서 장추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남아일언."
급히 거리를 벌리며 장추삼이 이를 물었다.
"주, 중천그. 제기랄."
이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선 당소소가 고혹적인 미소와 어울리지 않는 음성을 흘렸다.
"일구이언."
다시 거리를 벌린 장추삼이 소리나게 이를 갈았다.
"이, 이부지자. 빌어먹을."
"그럼 승부는?"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당소소를 외면하던 장추삼이 탄식을 트뜨렸다.
이런 동료가 세상에 있다니!
그러나 세 사람이 보내는 무언의 압력에 결국 그가 맥 빠진 음성으로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이거.. 그러니까.. 이건 조일희란이라고 어디까지나 이번에 새로 창안한 신초식이라니까..."
잠시의 정적.
"푸하하하하!"
단사민이 폭소를 터뜨리자
"우겔겔겔겔!"
동물같은 소리를 내며 고담이 바닥을 굴렀고
"오호호홋, 차라리 변명이나 하지 말지. 조일회란이래. 조일회라. 아이고 배야!"
웃고는 있었지만 당소소는 적이 감탄하여 쭈뼛거리는 장추삼의 초상에 고개르 끄덕였다.
'이제 살상을 억제할 정도가 되었군요. 무의 어디까지 보려는 건가요, 추삼?'
방금 전 장추삼이 마지막으로 사용한 초식은 그가 봉인하겠다고 선언한 조월회란이었고, 그것을 가지고
세 명의 실회조원이 장추삼을 놀리는 것이었다.
이들의 정경을 망연히 바라보던 사내가 일어섰다.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마시오. 비록 패배자라고 해도 무인으로서의 자존심만은 지키고 싶으니."
그의 말에 당소소가 콧방귀로 응대했다. 물론 장추삼을 향한.
"누구는 무인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드는데 어떤 졸장부는 남자로서의 자존심마저 팽개치는
구나~"
대답할 말도 없고 해서 장추삼은 떨어지는 낙엽 하나를 잡아서 만지작 거렸다. 그러던 그가 히없이 연
무장을 나서는 사내를 보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펄펄 뛰었다.
"얼레, 도망을 가? 졌잖아! 졌으니까 몸으로 대가를 치러야 할 것 아닌가!"
"....?"
사내가 황당해서 몸을 돌리는데 장추삼이 거의 발악하듯 소리를 질러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천 냥
정도 떼인 사람이 빚을 받으려고 난리를 부린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무인의 자좀심이라면서? 그럼 약속을 지켜라! 네가 그러고도 무인에다 사내라고 할 수 있느냐!"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리인......
아무튼 장추삼의 요구는 일견 정당한 것이라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요구 조건을 말해라."
"진 거 아닌데..."
쫑알거리는 단사민에게 주먹을 치켜들어 조용히 잠재우고 장추삼이 허리춤에 손을 떡하니 올렸다.
"나는 도량이 동정호와 동급인지라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겠다."
동정호라는 우물도 다 있나, 하고 쏘아붙이려던 사내가 장추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실격패니 뭐니,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정당하게 손을 겨뤘고 진 건 진 거다.
경황중의 약속도 약속인 것처럼.
"요즘 우리 표국에 일이 많아져서 몇 가지 특별 부서를 신설하기로 했다."
장추삼의 기세에 꼬리를 말고 당소소의 옆으로 피신했던 단사민이 눈을 깜빡였다.
"정말이에요, 당 누님?"
"낸들 아니?"
두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장추삼이 말을 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이 철포점인데 수석장인 자리를 네가 맡아줘야겠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사내가 입을 떡 벌리는데 청아한 음성 하나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나 수석장인을 구하지 못해서 여태 미루어두었습니다."
순간 이리저리 퍼져 있던 네 사람이 일제히 일어나 포권으로 예를 보냈다.
"국주님을 뵈오이다!"
그들의 인사에 일일이 포권으로 답한 여인이 몸을 빙글 돌려 입을 헤벌리고 손을 흔드는 장추삼을 지나
쳐 사내의 앞에서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청해복룡표국의 제삼대 국주 북궁설이 배금성 대협께 감히 청합니다. 보잘것없는 표국이지만 도약을
꿈꾸는 복룡표국의 수성장인 자리를 맡아주지시 않겠습니까?"
"아아..."
마주 포권하며 난처한 얼굴이 된 사낵 장추삼을 바라보았으나 무정한 친구 놈은 어깨를 한번 들썩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갈 데 없는 낭인에게 이런 자리는 오히려 과분합니다. 맡은 바 성심을 다하겠소이다."
"얼레, 저거? 내가 권할때는 소리 지르더니 마누라가 말하니까 재깍일세?"
그렇다 사내는 다름 아닌 장추삼의 죽마고우 배금성이었다. 사부이자 아버지와도 같았던 일모의 죽음을
두 눈 부릅뜨고 목도한 그가 팔년이란 시간을 들여 무화정련을 완성하고 강호에 출두했던 것이다.
하나.. 절대로 꺾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목표였건만 그는 다른 이에게 유명을 달리했다고 했다. 믿어지
지 않는 사실이었지만 그의 비문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면서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목표는 자연히 새로운 강자에게로 돌아갔다. 이건 꿩 대신 닭도 아니었다. 사부가 절대로 넘지 못했던
벽 가운데 하나가 그에게로 이식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해서 찾아온 양양의 복룡표국. 결과는 패배였지만 억울하거나 분하지 않음은 친구이기 때문만은 아닐
터.
"킁 착각하고 있구나. 내가 제수씨의, 아, 이제부터는 국주님이겠군. 아무튼 청을 수락한 건 네 곁에서
수련을 하며 언젠가는 그 잘난 콧대를 꺾기 위함이다!"
"그건 좋은 자세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장추삼이 슬그머니 배금성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갑자기 왠 친한 척이냐!"
"원래 친했어, 임마. 이봐요 국주님. 신입수석장인의 환영식을 하려는데 퇴근시간도 다 되었고 하니 보
내주시구려!"
장추삼이 넉살에 북궁설이 해맑은 미소로 화답했다.
"물론이지요 어서 가세요~"
"저기 나도...."
"야야, 참아. 팔 년 만에 친구끼리 가지는 술자리다. 낄 데 안 낄데도 구분하지 못하냐, 너는."
엉겨 붙으려는 단사민의 어깨를 잡으며 고담이 면박을 주었다. 요 며칠 술이 고팠던 단사민으로는 억울
한 순간이었으나 일리있는 말인지라 볼만 팅팅 부풀릴 수밖에.
"아냐, 아니에요! 오실 분들은 모두 오세요~ 이건 어디까지나 친구간의 재회가 아니라 청해복룡표국의
수석대장장이에 대한 환영 술자리 라고요!"
"거 봐요!"
쾌재를 부르며 단사민이 뛰어나가자 고딤이 입맛을 다셨다.
"그런 자리라면 빠질 이유가 없지?"
함초롬히 웃으며 당소소가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자 사마검군도 뒷머리를 긁으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실 가는데 바늘이 빠질 수는 없으니."
그렇게 홀로 남은 고담이 멍청하게 서 있다 급히 뛰어가면서 외쳤다.
"같이가~!"
두 번째- 다시 칠년 후
한 소년이 호북성을 밟았다. 그는 폭풍과도 같은 기세로 성문을 통과하여 단숨에 청빈로를 지나 복룡표
국에 이르러 몰래 담을 타고 표사들의 식당을 지나 여러 전각들을 통과했다.
"십년, 십년을 한결같이 오늘을 기다렸다!"
소년의 음성은 비장을 넘어서 장엄하기까지 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가. 비록 대상이 바뀌긴 했어도 목표는 오직 하나. 무적의 사나이를 굴복시
키는 것이다. 그것 목표가 아니라 소년에게는 사명이었다.
아무 표사나 불러서 집법당의 위치를 파악한 그가 집법당주의 사무실 앞에 잠시 서서 숨 호흡으로 마음
을 다스렸다.
집법당주 철무웅은 기가 막혀서 소년을 빤히 올려다보다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실주회수조에 대해 들어본 것이 있나?"
"당연하지요!"
소년이 눈을 빛내며 냉큼 대답했다.
"실주회수조를 모르면서 자원했다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십 년전 숙모님에게서 그 말을 처음 들
었.........."
"표국주께 숙모님이라니! 앞으로 그런 호칭은 용납 할 수 없다!"
철무웅이 고리눈을 뜨는 데도 소년은 처음 표정 그대로 초롱초롱 눈망울을 굴렷다.
"듣던 바와 같이 시시비비가 정확하시군요! 앞으로 주의. 또 주의하겠습니다!"
야무지게 대답하는 소년이 너무 귀여워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공식적인 자리인지라
따뜻한 미소로 마음을 대신한 철무웅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런데.. 정말 무공이 강하다는 건가?"
"글쎄요? 어딜 가든 폐를 끼칠 수는 아닐 겁니다."
이해할 수 없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소년의 부친과 표국주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잇는 철무웅이기에 그의 어린 아들이 표국에 취직하러 온 것
에 대해 별반 감정 따위는 없었다.
어린 아들이 견문을 넓히는데 표국만큼 안성맞춤인 장소는 없으니까. 그렇게 이해했기에 쟁자수 정도
의 편하고 안전한 보직을 주겠거니 했는데 느닷없이 실주회수조 발령이라니!
"후우.. 내가 보건대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국주께서 다른이의 이름을 잘못 올렸거나 보직에
관한 사무 착오가 있었나 보다. 잠시 기다려라."
집무실에서 나갔던 철무웅이 일 다경 후에 뭐라 뭐라 투덜거리면서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이럴 때 국주님은 어딜 가신 게야. 에잉...."
한참을 혼자 웅얼거리던 철무웅이 곧 정색을 하고 소년을 쳐다 보았다.
"이것 보게. 소년, 표국주께선 자네를 사지로 몰아놓고 계시네. 무슨 이유로 그분의 심기가 상했는지
모르지만 어서 가서 사과를 드리게."
"소개장은 확시하니 그대로 집행해 주시면 되는데요?"
"이 친구야!실주회수조는 그냥 표사들하고는 다르단 말이야. 언제나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이라구. 생명
수당이 본봉보다 많은 곳이라고!"
"각오하고 있었어요."
"거긴 괴성 장추삼이나 만화선녀 당소소 같은 당대의 제일인들이 거처한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
나!"
"바로 그거에요. 바로 그거!"
휘파람까지 부는 소년이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자원했다니까요!"
머리까지 다 아파오는 철무웅이 겨우 마지막 말을 했다.
"실.회.조.의 역사상 최연소 직함 말고 자네가 할수 있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남에게 폐를 끼칠 수준은 아닙니다."
너무도 예의 바르고 똑 부러진 대답이라 철무웅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어쩌겠는가, 죽고 사는 것도
제 팔자인 것을.
"갈동!"
"옛!"
꺼지듯.. 이 아니라 세월의 무게를 등에 지고 느릿느릿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 넋 나간 친구를 십삼조 대기전으로 데려다 줘!"
체질 탓에 여전히 깡마른 사내. 갈동이 의아해했다.
"거긴 실회조의..."
"신입이다. 국주 추천이야!"
소년이 빈 관물대에 짐을 푸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은 며칠 갈까?"
뚱한 목소리.
"한 달 이내 정도로 봐요 난."
낭랑하지만 이제는 조금 완숙한 목소리.
"그래? 당돌한 눈망울에 한 달은 추가하고 싶은데?"
다시 뚱한 목소리. 장난기가 넘치다 못해 타고 흐를 정도였다.
"그럼 내기 성립이네요? 평소처럼 은자 두 냥이 어때요? 설마 장 형님께서 내기에서 발을 빼는 건 아니
겠지요?"
낭랑한 음성이 뚱한 목소리를 꼬드겼지만 뚱한 쪽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엇다.
"내기거리로는 그야말로 금상첨화인데 저 꼬마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게 조금그래. 저 나이에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다면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말인데, 실회조는 산전수전 가지고 어찌해 볼 곳이 아
니거든."
무엇보다 구 할을 유지하는 내 승률이 달린 문제야, 라며 뚱한 음성이 주절거렸다.
"에? 장 형님답지 않게 그런 약한 모습이 뭐에요? 불확실성의 시대에 최소한의 조건으로 유추가 엇갈리
는 미래를 예측하는, 그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예술의 극치가 내기라면서 발을 굴리던 것이 엊그
제인데 벌써 잊어버리고 조건 타령이에요?"
뚱한 목소리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언젠가 겪어본 일 같다.
"아, 이거 말이야. 전에 한번 똑같은 일이 있지 않았어?"
뜨끔한 얼굴이 되어버린 낭랑한 음성의 사내가 쥐어짜 내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 하하하! 어, 언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장 형님 요즘 술이 너무 과하셨던건 아니에요? 하긴 그
연세라면 술을 좀 적당히 드셔야 할지도..."
그의 말에 장추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저 깐죽이 녀석과 술을 자주 펐는데 나이가 들었는지 중
간에 기억도 끊기도, 한 말도 잊곤했다.
'두주불사의 호한'은 단호히 거절하지만 계속 있었던 일이라는 타령을 하다간 그야말로 나이 들었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을 분위기가 아닌가?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정말로 내가 나이를... 에잇 몰라! 걸어 두 냥!"
'그런 일이 분명히 있었지!'
놀란 가슴을 쓸면서 단사민이 쾌재를 불렀다. 그런 일이 없었긴? 바로 장추삼 본인이 실회조에 처음 가
입하면서 벌어졌던 일이 아니던가!
그때 두 인간에게 뜯긴 넉 냥이 눈앞에 아른거려 하얗게 지새운 밤이 얼마던가.
이제야 보상을 받으리라! 당사자에게!
"그래요! 그래야 사나이 장추삼이지요, 일구이언?"
"이부지자! 사민아. 너는 따논 당상이라는 표정인데..."
그리고 둘은 과성의 위명을 쫓아 괜히 실회조를 두드렸던 젊은 무인들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으로 꼬리
를 내리고 짐을 쌌는가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때 꼬마가 물건을 정리하고 둘을 쓱 쳐다보았다.
"들었나 본데요?
"응? 저기까지 들리나?"
소년이 한 발 다가섰다.
"기분 나쁜가 봐요."
"음... 또랑한 눈망울에 힘까지 들어서니 더없이 귀엽구먼."
나이 먹고 애 볼 나이 한참 지난 장추삼이야 앳된 소년이 더없이 귀엽겠지만 실회조의 군기반장을 자임
하는 단사민으롤는 소년의 발호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귀엽지만 봐줄 수는 없지.'
성큼성큼 소년이 다가서고 단사민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고 그것을 보며 장추삼이 고개를 절레절
레 저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규칙은 규칙이다. 신참이 기어올라 오기 시작하면 약도 없다는 정도는 스스로의 경험상 잘 알고 있었
으니까.
그리고 둘은 얼어붙어 버렸다.
"그 내기... 저도 낄께요. 여기 두 냥!"
짤랑.
* * *
실회조의 연무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날아오르듯 밟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북궁설의 만면에 봄빛보다
환한 미소가 걸려 있음은 당연한일 일이었다.
"가만있자, 가가께서 우리 운추를 못 본 게 벌써 십 년도 넘었구나! 아기였을 때는 그리 귀여워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애도 엉뚱하지. 한사코 실회조라니. 하긴, 부친은 동정호도 울린다는 한성 북궁단야에
숙부는 천하의 괴짜라는 괴성 장추삼이니. 호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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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후기
말도 많고 탁도 많았던 삼류무사.. 이제 끝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군요.
나름대로 포부를 가지고 도전했던 글이었지만 혹시나 용두사미는 아니었는지.
이제 추삼이, 하운, 단야를 떠나보내고 다른 친구를 초빙해서 놀아야겠지요. 그렇지만 그들은 제 인생
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을 겁니다.
첫 번재 자식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십장생, 노새상... 음... 너무 많으니 패스.
그리고 정혜란을 위시한 어여쁜 꾸냥들도 너무 많으니 패스.
피 터지게 맞아주느라 고생한 엑스트라들도 패스.
아무튼 패스. 그저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넘기기엔 미안하지만 패스.
다음 작품도 여전히 유쾌하게 또한 조금은 생각을 하는 애기를 풀어가 보려 합니다.
뭐.. 그래 봐야 모든 판단은 독자 여러분의 몫이지만요.
끝까지 애독해 주시고 댓글로서 격려해주신 모든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용철이님 감사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그동안 재밋게 읽었네요
항상 건강하세요
용수마을님 감사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랜빠님 감사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좋은하루되세요
갈색잎님 감사합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 이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
정신줄 놓고 지냈네요..
왜 이리 길어 하면서 막판에는 끝나는게 아쉬윘답니다. 올려주심에 감사합니다 . 수고하셨습니다 ~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