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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3일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욥기 19,21-27
복 음 : 루카 10,1-12
그때에 1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2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9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10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11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상황을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곳이
아직 많고 듣지 못한 이들도 많은 상황입니다.
파견할 제자가 일흔두 명이나 있어도 부족합니다.
어림잡아 비교한다면 비신자들이 많은 지역에
선교를 시작하는 상황과 비슷할까요?
그러나 신자들이 많아도 일꾼은 많이 필요합니다.
신자들이 많다고 해서 복음 선포가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교회가 없는 지역에 처음 교회를 세우는 것과는 다르지만
그 상황에서는 또 그 나름대로 할 일이 있습니다.
결국 언제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확할 것은 많고 일꾼은 적을 때,
일꾼은 할 일이 많다고 하여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밭의 주인이라면 그 밭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볼까요?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많다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들이고자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밭의 주인이라면 일이 많은 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선포에서 지금의 처지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지만,
언제나 우리 밭에는 일꾼이 부족하고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도 ‘밭 주인’에게서 파견되었음을 생각하며,
게으른 종이 되지 말고 주인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충실한 종이 됩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독일의 어느 공장에서 작업 효율을 높이려고 기술 고문을 초대했습니다.
이 기술 고문은 공장 전체를 돌아본 후에 한 가지 지시 사항을 내렸습니다.
“매일 공구를 정리 정돈하십시오.”
사람들은 모두 이 지시 사항에 불만이 커졌습니다.
기술 고문이라고 특별히 초청했는데, 뻔해 보이는 지시 사항을 내렸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기술자들은 귀찮다고 짜증을 냅니다.
공구 정리 정돈으로 무슨 효율이 높아지겠냐며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일 효율이 20%나 상승했습니다.
일하다 공구를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일상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짜증이 많은 사람, 우울과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은
대체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신앙생활 역시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신앙은 자기를 죄인으로만 만드는 것 같다며 짜증 나서 성당을 멀리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본인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방법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기도하며 주님과 가까운 사람은 신앙의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저것 챙겨줘도 잘될까 말까 한데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이 전교 여행의 기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본은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다.”라는 선포였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평화였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장 기본을 열심히 선포하고 행동하는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고을이 있는 반면,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도 있었습니다.
이 기본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라고 말하면서,
소돔보다 더 심한 벌을 받을 것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땅을 떠날 때 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자기네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바로 이교도들을 저주하는 표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을은 저주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잘 받아들이고 있나요?
신앙생활의 기본인 기도를 멀리하면서,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만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주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초기에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바 있으십니다(루카 9,1-6).
그리고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다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일흔’ 혹은 ‘일흔둘’이라는 숫자는 요셉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 백성의 수였고(탈출 1,5),
모세와 함께 시나이산에 올라갔던 이스라엘의 원로들의 숫자로
이스라엘을 대표하기도 합니다(탈출 24,1; 민수 11,25).
또한 <창세기> 10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의 수로 표기되는바,
열두 제자의 파견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파견이라면,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을 상대로
파견하시는 의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졌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는 이로,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이루는 이로 보내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이곳, 이 세상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파견하실 때,
‘돈지갑이나 여행 가방이나 신발을 가져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도움에만 의존하라 하십니다.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이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는
‘돈지갑도 여행가방도 신발도 없이 가서,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물으시고
제자들이 ‘아쉬운 것이 없었다.’(루카 22,35)고 대답했을 때에는
‘돈주머니와 여행 가방과 칼을 장만하라’(루카 22, 36 참조)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박해받을 각오를 하고,
말씀의 칼로 무장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의 돈주머니’와 ‘희망의 여행가방’과
‘말씀과 성령의 칼’로 영적 무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먼저 다름 아닌 기도로 무장하는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고’
서둘러서 사명을 이행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라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먼저 기도하는 일이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파견 받은 자로서의 삶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먼저 주님이신 그분께 기도하는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일이요,
세상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이루고 증거하는 일이요,
무엇을 하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앞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주님!
이리 떼에 둘러 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시고,
등에는 여행 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시고,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오늘도 말과 행동 지켜주시고 온갖 악 피하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혀 삼가토록 보살피시어 시비에 말려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 눈 조심토록 지켜주시어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성무일도의 찬미가 일부입니다.
온갖 악을 물리쳐 이겨야 하고, 헛됨에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몰라서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의지가 약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큰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고 하시며
헛됨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넉넉해야 무슨 일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여장을 꾸리고 인사치레를 하는 것에
그리고 고의로 거부하는 이를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락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파견받는 제자는 파견된 곳에 전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소돔이나 띠로, 시돈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하느님의 저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경고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결국 그 지역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파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헛된 것에 빠지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시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나 없이 나를 내신 하느님께서는 나 없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도 자칫 그릇된 신심에 빠져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중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은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삶은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주장에 빠지는 그들에게는 겸손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치가 없고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분열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사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받을 것입니다”(집회 15,17).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에서든지 생명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주변을 보면 제복을 입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사는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사에게 신뢰와 존경을 드리고 있습니다.
경찰도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경찰의 안내와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질서를 유지하고,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있습니다. 군인은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우는 사람입니다.
군인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방대원도 제복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방대원의 차가 지나갈 때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합니다.
소방대원들이 위급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제복을 입고 있는 동안, 그 제복이 가지는 권위와 가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 사회의 질서와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더 많은 비난과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의사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사기를 친다면, 경찰이 모여서 도박을 한다면,
군인이 사람을 다치게 한다면 더 큰 비난과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한 아이가 제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왜 사제복을 입으세요?’
아이는 사제복에 있는 하얀 칼라가 궁금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별 뜻 없이 ‘그것이 법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신부님이 아이에게
영어로 사제복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클러지 칼라(clerical collar)라고 불리는 하얀 색 칼라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헌신과 순결: 하얀색은 사제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
자신의 삶을 봉헌하고 순결하게 살아가겠다는 서약을 상징합니다.
사제는 이 칼라를 통해 자신이 세속적인 생활과 구별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사제의 정체성: 사제복의 하얀 칼라는 사제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직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종으로서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는 이로 구별됩니다.
하느님의 빛: 하얀색은 성서적으로 하느님의 빛과 진리를 상징합니다.
사제는 이 칼라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과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저도 신부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사제복이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 27 –28)"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모두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신앙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보다 더 큰 비난과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는다.”
간디의 눈에 그리스도를 입었다는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고, 세례받는 신앙인이 줄어드는 이유는
박해가 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빛을 잃어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하는 신앙인들이 세상의 질서와 세상의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을 입은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를 요청하셨습니다.
첫째는 열정입니다. 작은 물방울이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불가능한 것 같지만 열정에 시간이 더해지면 이루어집니다.
돈도, 지팡이도, 조직도 열정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도착한 프랑스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돈도, 지팡이도, 조직도 없이 머나먼 길을 떠나 조선에 도착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박해와 순교가 있었지만, 한국교회는 순교자들의 피와 땀 위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둘째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눈이 먼 소경을 치유하실 때도 믿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믿음이 약하다고 한탄하셨습니다.
조건을 따지는 믿음은 계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아무런 조건이 없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으로 빠진 건 풍랑이 거세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믿음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토마 사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주님께서는 제게도 열정과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다면, 무기력하고 의욕이 사라진다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께
열정과 믿음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심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 외에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당신이 가시려는 모든 곳으로 보내셨다.
그러시면서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3절) 하신다.
양들은 이리 떼의 먹이가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총이 되도록 보내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어째서 양들과 같은 사도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셔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을까?
평화밖에 모르는 양들이 어떻게 잔인한 맹수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분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에게 목자가 되어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도와주시고 모든 악에서 구해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께만 의탁하면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돈주머니와 여행 보따리,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바삐 다녀야 한다. 그들이 생필품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신발을 신었느냐 벗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살아가는 일을 모두 주님께 맡기기를 원하셨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23)라고 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일꾼들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 주시는 분이시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이는 길에서 누구와 이야기하느라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늦어지지 않도록
복음 선포의 직무를 서둘러 수행하라는 말씀이다.
인정에 끌린 행위가 거룩한 임무를 방해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5절)
우리는 방문을 하면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한다.
좋은 습관이다. 우리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빌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빌어준 평화는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복음 전파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전하는 사람에게 더 유익하다.
평화가 전달되면 그 사람과 우리에게 다 유익한 일이다.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10,14)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응징하시겠다고 한다.
이 응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12절) 라고 하신다.
나는 이제 어떠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할 것인가?
깊이 묵상하면 좋겠다.
욥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결코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마땅히 이유도 모르겠는 극심한 고통을 겪은 경험이 있는지요?
내가 잘못한 게 무엇인지 아무리 따지고 따져봐도 모르겠는데,
난데없이 다가온 불행 앞에 망연자실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한없이 나약한 결핍투성이의 존재로서,
한계를 지니고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욥처럼 극도로 비참한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모두 이 한 세상 살아가며 이런저런 다양한 고통과 시련에 노출됩니다.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고통이 아니라 욥처럼 뼛속 깊이 사무치는 고통일 경우,
우리는 하느님도 원망하고, 이웃도 원망하고, 나 자신도 원망하며 크게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욥의 절규 같은 경우 우리와 살짝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극한의 고통 앞에 울부짖지만, 그 울부짖음이 결국 주님 안의 울부짖음이요,
주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의 울부짖음입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 26-27)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욥은 극심한 피부병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도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마지막 희망을 둡니다.
이런 욥이었기에 결국 하느님께서 그의 절규, 그의 몸부림,
그의 울부짖음을 귀여겨들으십니다.
그를 지옥 같은 병고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새로운 피부, 새 인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때로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가혹한 나머지,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이며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냐며 따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그분께서 이 혹독한 고통 너머에서 주시려고 마련하신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한 희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10,5)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10,5)라는 현판은
신자 가정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뜨입니다.
그리고 교회 입교하려는 예비자와 오랜 신앙생활을 하신 신자 분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바로 신앙생활 곧 교회를 다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응답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분은 참으로 평화로우며,
삭막한 세상 한가운데서도 평화를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라는 의문이 듭니다.
여러분 가정의 현관에 붙어있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집에 나갈 때와 들어올 때마다 성찰해 보십시오.
절의 일주문一柱門의 의미가 본래 청정한 도량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처럼
집에 들어올 때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는 현판을 보면서
나와 내 집에 주님의 평화가 깃들이지 못하도록 저해하고 방해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우면서 주님의 평화가 머물도록 마음을 되잡는 순간을 갖길 바랍니다.
이는 곧 우리가 참 평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체험하며 살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세상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고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평화를 말하고 전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이 평화를 체험하고
평화를 살려는 마음을 간직하는 게 파견된 제자들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이는 곧 그만큼 선교지역이 넓어졌고, “수확할 것이 많아졌기”(10,2)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을 파견한
1차 선교 여정과 거의 동일한 여장 규칙
곧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10,4)는
당부와 함께 파견 임무를 주십니다.
물론 파견될 선교지의 여건은 마치 이리 떼가 득실거리는 험악한 곳이며
이런 곳에 파견될 제자들은 어린 양에 비유하신 것은 같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맡겨진 파견 임무는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10,8)고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는 곧 거룩한 활동과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대 제자들의 역할이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의 파견 소명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는 것”(10,5참조)입니다.
그 어떤 집이란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가난한 처지와 상관없이
먼저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인사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평화의 인사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과 그 사람 위에 머물 것이다.”(10,6)하고 예수님은 당부하십니다.
제자들의 평화는 바로 자신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의 평화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일꾼은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의 사절이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대접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자신에 집으로 환영하고 환대한다는 것이기에
이는 곧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예수님과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와 같습니다.
평화란 속마음에 갖고 있던 보이지 않은 무장을 해제한다, 는 표현임을
저는 파푸아 뉴기니와 인도네시아의 정글에서 만난 원주민을 통해서 체험했습니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친구로 받아들이며 친구 사이에는 분쟁과 불목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견된 제자들에 대한 거부 행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하느님과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견된 제자들은 단지 거부하는 집이나 고을을 향해
폭력 행위가 아닌 “자신들의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림”(10,11)으로 끝나지만,
그들에 대한 거부는 하느님에 대한 거부이기에 마치 심판으로 멸망한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10,12)라고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집과 고을에 대해 제자들처럼
평화의 사절로 파견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복음 거부에 대한 경고로 고작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는 일일지 모르지만,
훗날에 그로 인한 엄청난 심판은 하느님으로부터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파견된 그리스도인은 그런 상황에서도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끝까지 평화를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평화의 사도였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선교 임무의 핵심 : 평화주의, 성사와 말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셨듯이
제자들도 스승이신 예수로부터 세상의 복음선포를 위해 파견된다.
열두 제자의 파견은 공관복음의 공통된 보도이지만(마태 10,1-39; 마르 6,8-11; 루카 9,1-6)
오늘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루카복음만의 특종기사에 속한다.
물론 열둘과 일흔둘이라는 파견의 규모에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루카복음이 제자들의 파견기사를 두 번이나 보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루카복음이 나름대로 설정한 예수님 공생활의 시기적인 구분에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열두 제자의 파견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카 4,14-9,50) 안에서 이루어졌고,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상경기(루카 9,51-19,28)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예루살렘 상경을 결정하시고
사마리아 지방을 통하여 가려 하셨음을 보았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와 거부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돌아가는 우회로를 택하시게 된 것이다.(9,51-56)
따라서 이제 완전히 새로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야 하는 사실을 감안 한다면, 앞으로 거쳐 가셔야 할 곳으로
또 한번의 제자파견은 지극히 필요한 사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카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10,2)는 말씀을 삽입하여
일흔두 제자라는 대규모 파견의 시급함과 타당성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2차 파견에서도 1차파견(루카 9,1-6) 때와 똑같은
선교상의 여장규칙과 임무를 훈시하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파견되는 제자들이 어린 양에 비유되고,
파견되는 곳의 환경과 사람들이 이리떼에 비유되는 것을 보면,
선교상의 어떠한 안전장치나 무장도 허용되지 않는 파견자의 강한 의지가 돋보인다.
파견되는 제자들의 임무는 딱 두 가지이다.(9절)
병자들을 고쳐 주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일이다.
이는 곧 聖事를 베풀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는 그곳에서 마귀가 들려 고생하는 사람이나
병이 들어 마음과 몸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이리 떼와도 같은 백성들을 하늘나라의 복음으로 교화하여
그 나라의 어린 양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리가 복음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이리로 머물기를 고집한다면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심판을 면할 길은 없다.
파견된 제자들을 거부하는 행위는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와 같다.
만약 한 동네가 連帶的으로 예수의 제자들을 거부한다면
제자들은 자신의 발에 묻은 흙을 털어 버리고 가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선교사의 거부는 곧 복음의 거부이고, 복음의 거부는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거부하는 동네 전체에 대한 심판은 하느님의 몫으로 돌아간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 땅이 그 동네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12절)이다.
소돔이 어떤 곳인가?
도시 전체의 엄청난 죄상이 야훼의 분노를 사게 되어
아브라함의 애끓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義人 열 명이 없어
고모라와 함께 유황불로 멸망 당한 도시가 아니었던가?(창세 19,24-28)
복음을 거부하는 동네는 소돔보다도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지는 구우너의 은총을 거부한 만큼의 정당한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은 누구도 아닌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복음 거부에 대한 경고로 고작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는 일뿐이다.
따라서 교회의 복음 선포는 그저 이리 떼 속에 보내어지는 어린양처럼
철저한 평화주의와 두 가지 임무, 즉 성사 집행과 말씀 선포를 준수해야 한다.
한 손에는 복음서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복음을 선포하거나,
세속적인 특혜와 지위확보나 정치외교적 목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수용하는
昨今의 선교행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원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