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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
제1독서 : 창세 2,18-24
제2독서 : 히브 2,9-11
복 음 : 마르 10,2-16
그때에 2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
지난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에 행정복지 센터, 세무사 사무소, 건강보험공단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사무 처리를 하였습니다.
인감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기본 증명서, 호적등본, 제적 등본, .....,
입양 관계 증명서를 떼라고 하기에 “없으면 안 떼어도 되지요?”라고 말하였더니
해당 서류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때에 따라 아버지의 혼인 관계 증명서가 필요하기도 하고,
어머니의 혼인 관계 증명서가 필요하기도 하였습니다.
철저히 조사해서 정확하게 미리 서류를 준비하여서 가려고 노력하였지만, 처음에는 정말 복잡하였습니다.
그때 저희 가족이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별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문제가 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기에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법과 규칙은 점점 많아집니다.
그래서 때로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을 정하여 놓는지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규정이 생기겠지요.
규정을 정할 때 있던 사람들은 대체로 왜 그런 규정이 있는지를 압니다.
규정이 없어도 잘되어야 하는데 신뢰가 없고 사랑이 없어서 안 되기 때문에 규정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규정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불완전함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규정들만 탓할 일은 아닙니다.
이혼장을 써주라는 규정도 아내를 함부로 버리던 사람들 때무에 허락한 것입니다.
문제는 모세가 아니라 아내를 버리는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규정을 열심히 외우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규정이 없어도 사랑으로 그 규정보다 더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모든 일에 있어 권태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욕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모든 일을 마지못해, 할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하면 삶의 권태로움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해 보았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같은 곡들을 수천 번 반복해서 연습하고
또 공연해 왔는데 지겹지 않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아이작 스턴은 연습하고 또 할수록
“이거야!”하는 인사이트를 얻는 순간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막혔던 부분이 뚫리거나, 뻔하게 지나가던 부분에서 새로움을 느끼면서
똑같은 곡을 평생 연주해도 질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권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이렇게 반복 속에서 깊이를 추구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저 역시 25년째 새벽 묵상 글을 쓰고 있지만, 매일 매일이 새롭습니다.
물론 처음 2~3년 동안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반복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새로움도 더 많이 그리고 그 의미도 크게 다가옵니다.
특별히 오래된 부부 사이에서 권태기를 갖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연인이든 부부든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변화 없는 관계가 지속되거나 매일 똑같은 일상을 보낸다면 이 권태기가 온다고 합니다.
반복 안에서의 깊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혼을 율법으로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결합한 혼인을
사람이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요.
혼인은 사랑의 계약이고 하느님의 축복이며 서로 일치를 이루어야 할
영원한 책임과 소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깊이입니다.
이 깊이는 혼인에서만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축복에까지 연결됩니다.
그래서 혼인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율법에 갇혀서 하느님의 계획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계획은 삶의 반복 안에서도 계속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반복이 힘들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대신 반복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의미를 새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반복되어도 깊이가 있으면 늘 새롭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깊이를 마음 깊이 새기면서
가정 안에 하느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충만히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 전례는 혼인의 의미를 되새겨 줍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여
서로 결합하여 한 몸이 되게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고, 우리 모두는 그분 한 분에게서 나왔음을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남녀의 결합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혼인에 대한 '두 가지 원칙'을 말해줍니다.
첫 번째 원칙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마르 10,6)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것과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느님의 고유한 작품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것이 있고,
따라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또한 남자나 여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창조되었다는 것과
서로에게 내어주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서로 보완해서 한 몸을 이루어 가야 할 똑같은 무게,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닌 동등한 동반자로서 서로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하느님의 작품임을 드러내 줍니다.
두 번째 원칙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9)는 것입니다.
이는 혼인이 단지 서로를 위한 인간적인 '약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짝 지워주신 '성사로서의 서약'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혹은 서로가 결혼 합의를 취소하면
그 관계가 끝나버릴 수도 있는 인간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뗄래야 뗄 수 없는 결속력을 지닌, 아무리 당사자들이 그 합의를 취소하더라도
결코, 풀어지지 않는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서약’임을 말해줍니다.
곧 상호신뢰의 인격 관계로 묶어진 평생 운명 공동체로의 ‘서약’입니다.
그래서 혼배성사에서 혼인서약을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 ~는 당신을 아내(남편)로 맞이하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는 어디서나 어떤 처지에서나, 서로 사랑과 존경으로 결합하여 함께 살겠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두 사람의 서약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과의 서약입니다.
수도자들의 서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와 서약임과 동시에 하느님과의 서약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은 상대를 아내로 혹은 남편으로 맞이하여
평생토록 한 몸을 이루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러니 결혼은 한 몸을 이루는 일이 시작되었음을 드러내 줍니다.
곧 일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치를 향한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한 몸을 이루어 나가야 할 과제와 의무를 함께 지는 시작이요,
서로의 부족함을 껴안아 주며 사랑과 존경으로
함께 나아가는 영적 동반자요 협력자로서의 ‘서약’입니다.
그런데 서로의 부족함을 껴안은 사랑과 존경을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로의 자녀인 아기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아기는 자녀만이 아닙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아기이기도 합니다.
남편이라는 철부지 아기와 아내라는 힘없는 어린아이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서로의 무력함과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또한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사실 자녀인 아기를 사랑하기보다도 남편이나 아내
혹은 공동체의 동료라는 아기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낮추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대를 우러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서로를 존경함이야말로 진정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일 것입니다.
또한 결혼 서약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영원으로부터 인간의 신랑이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신부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은 떨어 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을 이루어 나가는 부부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전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예레 31,3)
<오늘의 말·샘 기도>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마르 10,8)
주님!
받아들여야 살 수 있음은 제가 부족해서만 아니라 당신을 사랑한 까닭입니다.
함께 있어야 살 수 있음은 당신이 필요해서만 아니라 당신이 소중한 까닭입니다.
더불어 한 곳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이 바라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지켜 주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입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혼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사랑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시자, 아담이 너무, 마음에 들어 끔찍이 사랑했습니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2,23) 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물었습니다.
“하느님, 어떻게 제 아내를 저렇게 아름답게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래야 네가 사랑할 것 아니냐?”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담이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리 착하게 만드셨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래야 네가 아껴줄 것이 아니냐!”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가만히 보면 쟤가 좀 맹한 데가 있습니다.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하고 아담이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쟤가 너 같은 애를 사랑할 거 아니냐?”
하느님께서 창조의 시작부터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바로 남자만으로도 그리고 여자만으로도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각각 나름대로 아름답고 독특한 개성이 있지만 자기 혼자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고,
반드시 상대방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났어도 모자라는 것이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남녀의 관계는 욕심을 채우기 위한 소유와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부족함을 채워줘야 할 동반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소유 당하고,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는 똑같은 무게, 똑같은 권리, 똑같은 의무를 지니며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소중한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나 피조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서로 나를 위한 맹한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가운데 공로를 쌓고 덕을 닦을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10,7)라고
혼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혼인의 요건을 보면 먼저 “떠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통해 오늘의 내가 되었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부모에게 의지 않고
자기 짝을 만나 독립된 자기 생활을 위해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다 큰 자녀가 자기 생활도 감당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기대고, 얹혀사는 것은
불효이며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부모도 자녀를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자식이 자립할 수 있게 되어 부모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때
배반당했다고 느끼고 비관하는 어르신도 계신 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독립해서 살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에게 큰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서로 “떠나야 할 때 떠나고,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떠남은 자기 짝과의 결합을 위한 것입니다.
새 가정을 형성함을 축복해야 합니다.
성경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줄 배우자를 “거들 짝”(창세2,18)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둘 짝을 만나는 것이 혼인입니다. 그리고 혼인 안에서 인격적 결합을 이루어
“둘이 한 몸”이 되어 비로소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직접 참여하는
자녀의 출산과 교육의 의무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가 살아온 삶의 환경과 양식이 달랐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통계를 보면 결혼을 해서 부모를 떠나는 기분이 남자는
1. 책임감이 앞선다(27%). 2. 자랑스럽다(18.9%). 3. 어른이 된 느낌(16.2%)의 순입니다.
그에 비해 여자는
1. 섭섭하다(41.9%) 2. 어른이 된 느낌(16.1%) 3. 책임감이 앞선다(12.9%)로 조사 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고려하는 사항을 보면
남자는 1. 성격(27.3%) 2. 외모(22.8%). 3. 가정환경(21.4%) 그리고
여자는 1. 사회적 지위(25.6%) 2. 성격(24.2) 3. 가정환경(19.3%).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에 있어 서로 다름을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지 못할 때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일방적인 자기 요구만을 강요하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서로 ‘너와 나는 이것이 틀리다.’ 고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었으면 죽기까지 그 신의를 지켜야 합니다.
서로의 짝을 만나게 해 준 것은 하느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맺어 주신 혼인을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흔히 짝을 만나는 것을 인연이라고 하는 데
인연은 우연히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 서로의 구원을 위해 이끌림을 받은 것입니다.
상대를 통해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도 하지만
상대를 위한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통해서
나도 구원을 얻게 되고 상대방도 구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은 신중해야 하며 신의와 사랑이 없는 혼인은 해서도 안 되며 하더라도 원인 무효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엮어진 이상 사랑에 사랑을 더해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편 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몸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에페5,25).
“아내 된 사람은 자기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듯 순종해야 합니다”(에페5,22.33).
결국 서로 사랑하고 존경해야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충실하여 행복한 날 이루시길 빕니다.
서로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이 혼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교회,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으면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켜야 하고
일상 안에서 그 사랑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녕 총각이 처녀와 혼인하듯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와 혼인하고 신랑이 신부로 말미암아 기뻐하듯
너의 하느님께서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이사62,5).
하느님과의 관계, 부부간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이웃 간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한 주간 되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님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저는 부모님이 모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아버님은 2011년에, 어머님은 2020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기에
신앙 안에서 저는 부모님과 함께 하니 기쁨입니다.
신앙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한 가족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군자삼락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똑똑한 제자를 만나 가르치는 것입니다.
인간이 높은 문화와 문명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부모와 자식, 세대와 세대가 경험과 지식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가르치셨습니다.
사제의 직분 중에는 ‘가르치는 직무’가 있습니다.
저는 예비자 교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였고, 강론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였고,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주일학교 교사의 노래 중에 ‘가르치면서 배우게 하소서’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모두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화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서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뉴욕에 있을 때는 멀리서 신부님들이 제가 있는 신문사를 찾아왔습니다.
저를 보고 싶어서도 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가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한국에서 안식년 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사제들도 왔습니다. 자녀들이 뉴욕에서 공부하는 교우들도 왔습니다.
신문사는 마치 손님들이 머무는 사랑방 같았습니다.
손님들이 오면 맨해튼 구경도 가고, 뮤지컬도 보고, 가을이면 단풍 구경도 갔습니다.
지난 2월에 달라스로 왔습니다. 제가 온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지만, 오겠다는 손님도 없었습니다.
달라스의 여름이 워낙 덥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10월에는 손님이 온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가 있던 신문사의 후임 신부님이 신문 홍보를 위해 왔습니다.
모처럼 뉴욕의 이야기를 들으니 반가웠습니다.
한국에서 동창 신부님이 2주일 정도 온다고 합니다.
5년 동안 달라스에서 사목했던 전임 신부님도 1달 정도 온다고 합니다.
12월에도 손님들이 오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명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그러니 나에게 와서 쉬어라.”
벗들이 와서 쉬어갈 수 있다면 제게도 기쁨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전에 명동거리를 걸을 때입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가는 연인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신발에 껌이 묻었던지, 남자에게 이야기합니다. 신발에 껌이 묻었네.
남자는 기꺼이 무릎을 꿇고서 사랑하는 여인의 신을 벗겨서 신발에 묻은 껌을 떼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발에 신을 신겨주고, 다시 다정한 모습으로 길을 걸어갔습니다.’
가을바람이 따듯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기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고, 신발에 묻은 껌을 기꺼이 떼어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들께서도 아마 그러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여동생과 함께 시골 외할머니 댁엘 갔었습니다.
외할머니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고, 저는 시골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고추, 마늘, 깨를 보자기에 담아 주셨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 짐들은 모두 어머니가 양손에 들고, 오셨습니다.
아버님은 담배를 하나 들고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그런 것을 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를 위해서 짐을 들지는 않으셨지만,
아버님께서도 어머니를 사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님을 대하셨습니다.
아버님도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어머니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부부는 무엇, 무엇 때문이라는 조건을 가지고 살아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신발에 묻은 껌을 떼어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짐을 대신 들어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꼭 부부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주려고 할 때, 가정은 생명이 넘쳐나는 갈릴래아 호수처럼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부부가 서로에게 받으려고 한다면 가정은 생명이 살 수 없는 사해(死海)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지 못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의 전례는 가정과 사랑에 대한 교리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에 대한 근거와 기반을 제시해 주고 있다.
사랑은 가정이라는 원초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갈빗대는 셈족의 언어 감각으로 생명이란 뜻이다.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창세 2,23)이라는 표현은 두 존재가 하나라는 뜻이다.
여기서 뼈는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이며,
살은 존재하는 인간을 뜻하고,
아담은 존재의 깊은 의미를 가리킨다.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부르리라”(창세 2,23)라는 말은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과 같은 의미이다.
남자는 이제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단지 여자와 한 몸, 하나의 존재가 되도록(창세 2,24),
바로 하느님께서 하나로 창조하셨고, 항상 하나가 되었으며, 갈라질 수 없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룰 때, 하느님의 모습, 사랑을 표현해 낼 수 있다.
사람들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5절)라는 말은
하와를 거슬려 한 핑계에 잘 나타나 있다(창세 3,12):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이것이 여기에 이제 사용된 것이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여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한 뜻은 충실성, 사랑, 영원한 일치이다.
창조 시에 인간을 만드실 때, 남녀 모두를 당신의 모습을 닮게 만드셨다(창세 1,27).
하나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하나이다.
남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여자와 어울려 둘이 하나가 되는 것,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하나이신 하느님의 모습, 삼위가 하나인 모습을 닮는 것이다(6-8절).
사랑의 모습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바로 하늘에서와 같이 우리가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느님의 뜻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 체험할 수 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최대의 계명으로 본래 하느님의 계획이고 뜻이다.
하나의 몸이고, 하나의 존재이기에 어떤 이유에서라도
갈라질 수도 없고, 갈라져서는 더욱 안 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으로 이를 거슬러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안에 하나가 된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절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제 제자들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해주신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11-12절).
남자 편에서 하던 여자 편에서 하던 하느님의 계획에 거슬리는 것이며,
그 새로운 혼인은 간음이 된다.
왜냐하면, 먼저 한 혼인의 의무가 계속 남아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배반 혹은 간음이라고 규정하신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혼을 끌어들인 원흉이랄 수 있는
굳은 마음을 가진 마음에 어떻게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린이를 축복해 주신다.
어린이들을 축복하시는 장면은 혼인과 이혼에 대한 논쟁 뒤에 나오고 있다.
이것은 어린이는 거룩한 혼인의 결실, 두 남녀의 하나 된 사랑의 결실이면서
이혼의 첫 번째 희생제물이다.
예수께서는 이 어린 생명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이신다.
어린이는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무엇이든 보고 듣는 대로 하는 단순한 자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에도 실천하는 데도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실천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어린이는 하느님 앞에 계속된 사랑의 관계에 있으며,
믿음의 관계, 또한 그 때문에 포기의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단 하나의 어린이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거룩한 마음에 가까운 형제들을 껴안으시고 축복해 주신다.
새 아담은 구원계획의 완성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은총이시며,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신 분이시다.
주님의 죽음은 당신과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 최대의 은총이다.
주님은 당신의 돌아가심을 통해 모든 이가 당신과 똑같은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견지하고 이루어 가야 할 모습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으며 기쁘게 살 수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우리는 모두,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 그리스도 안에 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셨고,
자신을 희생하시어 모든 이를 하느님께 바치시고,
하느님께 나아가 일치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렇게 우리도 우리 사이의 일치, 사랑을 통해,
하느님께 항상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먼저 너와 나 사이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께 우리가 속해 있으며,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자들임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혼인의 계약으로 태어난 우리 가정이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그 사랑을 본받아 실천할 수 있고
더불어 하느님 안에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으며,
더욱더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통하여
언제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돌아보니 불과 5~60년 전의 일입니다.
가구마다 자녀를 너무 많이 낳다 보니 인구가 너무 급증했습니다.
학교에 가면 학생 수가 너무 많아 한 반에 70명, 80명이 배정되어
담임 선생님이 학년이 끝날 때까지 아이들 이름도 다 못 외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 귀한 줄을 몰랐습니다.
한 명 한 명, 인격적 대우가 아니라 도매금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제가 있는 시골은 아기 한 명이 태어나면 온 마을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줍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너무 기쁜 나머지 마을 입구에 큰 플래카드까지 내겁니다.
너무 귀한 아이들이다 보니, 요즘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감사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어린이들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개념있는 행동이나 예의 바른 처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직 이성적 사고나 판단 능력보다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큽니다.
제자들 입장에서 바라볼 때, 요란스레 예수님 앞에 등장한 어린이들이 무척이나 성가셨을 것입니다.
안 그래도 계속되는 복음 선포 활동으로 격무와 상습 피로에 시달리고 계시는 스승님이신데,
보다 중요한 일을 수행하셔야 할 스승님이신데,
개념도 예의도 없는 아이들이 몰려오니 짜증이 났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가까이에서 군중들의 질서 유지 담당 역할도 수행했었던 제자들이기에,
자연스레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사전 약속도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지금 스승님께 몹시 바쁘시니, 빨리 아이들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본 예수님께서 크게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마르 10, 14~15)
가톨릭교회는 예로부터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자세로 어린이의 예를 들어왔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고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의심이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의 그런 ‘의심 없는 믿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전적인 신뢰와 단순한 의탁을
하느님 나라 입국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십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든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 입국은 불가능하다거나 요원한 것일까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삶의 근본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 세상과 자연을 향한 강한 믿음과 신뢰심,
깨끗한 마음과 단순성, 솔직함과 겸손함을 지닌다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멀지 않을 것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결혼한 부부에 대한 이야기와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신약성서」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言行에서
하느님과 그분이 하시는 일에 대해 알아 듣습니다.
오늘 두 개의 이야기가 모두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오늘의 첫째 이야기는
“모세가 허락한 대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으냐?”는
바리사이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모세가 남성들에게 준 特權이 아니라,
지켜야 하는 법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하기에 그 사실을 감안해 모세가 그 법을 제정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법을 남성들에게 허락된 특권이라 생각하였고,
예수님은 그것이 남성들의 학대에서 여성들을 구출하는 수단으로
모세가 제정한 법이었다고 설명하십니다.
인류역사는 强者가 弱者를 지배하고 학대한 이야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인류 역사가 여성의 인권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현대에도 여성을 학대하는 문화권은 아직 있습니다.
UN이 최근 발간한 세계 人權 현황을 보면,
세계 곳곳에서, 특히 中東의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아직도 많은 여성이 여러 가지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에게 네 명까지의 아내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국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나 남편의 뜻을 거역한 여성을 잔인하게 體罰하는 나라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바리사이가 거론하는 것은 구약성서의 「신명기」가 전하는 법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눈 밖에 나면 남편은 이혼증 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는 법입니다.
그 법이 제정된 것은, 철저한 男尊女卑와 一夫多妻제가 당연시되던 유대교 사회였습니다.
여성이 남편의 눈 밖에 나면, 그 여성은 학대당하며 살아야 하는 사회였습니다.
모세는 그런 학대당하는 여성들을 남편의 학대에서 구출하기 위해
집에서 내어보내라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 시대 남성들은 그 법을 자기들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해석하였지만,
실제로 그 법은 남성의 학대에서 여성을 해방시켜 살리는 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창세기」 2장의 창조 설화를 인용하면서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아내를 버리게 하여 약자인 여성을 구해내는 소극적 방법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하느님이 살아계셔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부부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로우심을 서로에게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장은 하느님이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자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갈비뼈는 心臟을 보호하고 심장의 鼓動이 들리는 뼈입니다.
夫婦는 서로의 심장 고동을 들으면서 상대를 보호하고 위해주라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는 또한 여성은 남성을 “거들어 줄 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들어 준다.’ 혹은 ‘돕는다’는 말은 보조적 역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하느님도 인간을 거들어 주고 도와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부부는 서로 심장의 고동을 들으며, 곧 상대의 뜻을 존중하며,
거들고 도와서 상대를 살리는 노력을 하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돕고 살리는 일은
서로 상대의 존재를 은혜롭게 생각하고 자비롭게 행동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짝지어 주셨기에” 하느님이 두 사람 사이에 살아 계시게 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이 두 사람 사이에 살아있으면,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자비롭고 선하신 하느님은 인간을 짝지어 주고, 함께[ 있어 행복하게 하십니다.
자비롭고 선하신 하느님은 인간을 짝지어주고, 함께 있어 행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완고하여 미워하기도 하고, 서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둘째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이 어린이를 데려와
예수님이 그들을 축복해 주실 것을 청하였고, 제자들은 그들을 막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그런 행동을 언짢아하시고 어린이를 받아 안고 축복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여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린이와 같이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어린이는 겸손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작고 약합니다.
어린이는 자신감을 갖지 않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배우고 베풀어진 것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런 자세, 곧 자신감을 갖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알아들은 하느님을 배우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남녀가 夫婦로 가정을 이루고 살 때,
두 사람 사이에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심장의 고동을 듣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행하며, 거들어 주며 살리고 용서하면,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이 두 사람 사이에 살아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으며, 자신감을 갖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고, 짓밟아서 불행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함께 있는 배우자를 은혜롭게 생각합니다.
가톨릭교회에는 결혼의 「不可解消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을 근거로 교회가 만든 법입니다.
결혼한 부부는 헤어질 수 없다는 법입니다.
부부가 인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신앙생활에 장애가 있다고 말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 법은 사람을 살리는 복음 정신에 온전히 부합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인간 마음이 완고한 것을 감안 한 모세는 법을 만들어 남성의 학대에서 여성을 구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부부라는 사실을 말씀하면서,
하느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자비와 은혜로우심을 서로에게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재 가톨릭교회의 「結婚의 不可解消法」은 부부가 헤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에만 충실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을 잊어버리게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라지면, 완고하고 모진 인간의 마음만 남습니다.
「혼배조당법」도 그 모진 인간 마음의 産物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결혼했거나, 이혼했거나, 어른이거나 아린 아이거나 모두에게
하느님은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분, 자비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알립니다.
그 자비하신 하느님을 선포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상처를 받고 이혼한 사람, 그리고 새로운 배우자를 맞아 행복하게 살겠다는 사람에게도
자비하신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교회는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 안에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살아있게 도와야 할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