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4.11.11.월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316-397) 축일
이사61,1-3ㄱ 마태25,31-40
최후의 심판
“심판의 잣대는 구체적 사랑 실천”
옛 어른의 말씀이 좋은 도움이 됩니다.
“내 안의 고통은 억지로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해야 하는 것이다.”<다산>
죽음도 고통도 참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때로, 아니 자주 원인을 캐기 보다는 주님 안에서 화해함이 지혜요 겸손이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성 마르티노 주교의 수도생활에 있어서 각별한 인연 때문에 기념이 아닌 축일미사를 봉헌합니다.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라 일겉는 성 베네딕도 보다 거의 백년전 수도생활의 모범을 보여준 성 마르티노 주교 수도승입니다. 저녁 성무일도 후렴도 성인의 삶을 잘 요약합니다.
“복된 마르티노는 임금이신 예수를 한껏 사랑하고,
지상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도다.”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목자 주교 성 마르티노였습니다. 성인의 생애도 참 파란만장합니다. 당시 유럽은 로마제국 휘하의 한나라였고 성인의 평생 체험 영역이 참 넓고 깊었습니다. 헝가리에서 태어나 이태리에서 성장과정과 15세부터 25년간 군복무기간을 지낸후 전역하는데 전투를 거부함으로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된 셈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병사입니다. 따라서 저는 싸울 수가 없습니다.”
제대후 성 힐라리오의 제자가 되어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371년 시민들의 열렬한 요청에 따라 투르의 주교로 서임되고 수도생활도 병행하면서 주교직도 충실히 수행합니다. 성인은 특히 본당 사목에 열정을 다했고 397년 81세로 선종했으니 당시로는 천수를 누린 셈입니다. 특히 성인에 관한 “성 마르티노의 외투”라는 유명한 전설적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가 군문에 있으면서 18세에 세례를 받게된 동기가 되었고 수도성소의 계기도 된 생생한 체험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마르티노는 걸인을 만났고 측은한 마음에 외투 절반을 잘라 줍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속에서 걸인에게 준 외투를 걸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서 “마르티노는 아직 예비신자이지만 나에게 이 옷을 입혀주었다.”라고 천사들에게 하는 말을 듣습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외투는 완전히 새로 복구되었음을 보게 되었고 이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일화입니다. 바로 이 전설적 일화에 근거한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에 관한 마태복음 25장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비유가 아니라 예언적 장엄한 서술입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각자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자비의 선행을 베풀었는지 여부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굶주렸을 때, 목말랐을 때, 나그네였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을 도와 준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합니다. 바로 곤궁에 처한 이들과 자신을 일치시키며 이들을 도와줌이 바로 자신을 도와준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참으로 기존 종교의 틀을 벗어나는 놀랍고 놀라운 주님의 말씀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곤궁중이 이들을 내 형제라 칭하며 이들을 도와 줌이 바로 자기를 도와 준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전례가, 기도가, 공부가. 계명 준수가 아닌 이런 구체적 사랑의 실천이 최종 구원의 심판잣대라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 하여라.
자비를 행한 이들에게 천국행을 선언하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랑의 잣대에 의한 심판은 오늘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의 연장선상위에 있음을봅니다. 다음 이사야서의 말씀이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시고, 슬퍼하는 이들을 모두 위로하게 하시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재 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기쁨의 기름을, 맥 풀린 넋대신 축제의 옷을 주게 하셨다.”
바로 이런 주님의 사랑의 구원활동에, 해방활동에 종사한 이들에게 자비로운 구원의 심판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 주위의 곤궁중에 이들을 도와줌이 주님을 도와드리는 것이며 구원의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구원은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곤궁중에 있는 형제들과 더불어 고해인생이 아닌 기쁨의 축제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구원의 축제 옷을 입혀주시어 찬미와 감사,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에 전하리라.”(시편89,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