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과 박종홍, 20세기 한국 지성의 두 라이벌
장 승 구(세명대 교수, 한국철학)
며칠 전 한 고서점에서 1960년대 초에 나온 함석헌(咸錫憲:1901~1989) 선생의 『인간혁명』이란 책을 사보았다. 빛바랜 낡은 종이 속에서 4·19 혁명 실패 직후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 미래의 희망을 찾고자 애쓰던 함석헌의 인간적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 흰 두루마기를 입고 캠퍼스에서 사자후를 토하던 함선생의 강연을 나는 들은 적이 있었다. 여든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혼이 담긴 열정적 강연으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한국의 20세기 최후의 지사적 지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함석헌의 평양고보 동창생 가운데는 유명한 철학자 박종홍(朴鍾鴻: 1903-1976)이 있다.
함석헌과 박종홍!
20세기 한국 지성의 쌍벽을 이룬 이 두 사람의 인생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함석헌은 195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민주화와 시민운동에 앞장섰던 ‘저항’하는 재야 지식인의 상징이었다.
이에 비해 박종홍은 박정희 시대에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하였고 대통령 교육문화 담당 특별보좌관으로서 권력의 심장부에 몸을 담았던 체제 참여적 지성을 대표한다.
평양고보 동창생, 저항적 재야 지성 vs 창조적 체제참여 지성
박종홍과 함석헌은 1950-60년대 지식인 사회의 담론을 주도했던 『사상계』 잡지를 통해 그 시대의 이념을 이끌었던 양대 산맥이었다. 함석헌은 『사상계』에 그 유명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5·16을 어떻게 볼까” 등의 명논설을 발표하여 서슬이 퍼런 권력에 정면 도전함으로써 민중의 아픔과 분노를 대변하였다.
박종홍은 서울대 교수와 대학원장으로서 동서철학을 아우르는 명강의와 저술을 통해 당시 대학가와 지성계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1916년에 평양고보에 함께 입학한 두 사람은 일생 동안 보이지 않은 경쟁을 하였다. 두 사람에게 사상적으로 눈을 뜨게 해 준 사건은 3·1운동이었다. 3·1운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공부밖에 모르던 두 모범생은 민족의식을 각성하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갔다.
함석헌은 3·1운동 이후 평양고보를 그만두고 오산학교에 편입하였다가 동경고등사범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모교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을 양성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해방 후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여 사상가 · 언론인으로서 명논설과 강연을 통해 독재에 저항하였다.
박종홍은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대구고보 교사를 하다가 경성제대에 입학하여 철학을 전공하고, 해방 후 서울대 교수로서 철학을 연구하는 한편 현실 참여에도 적극적이었다.
인생의 전반기를 불행하게도 식민지 시대에 살아야 했고, 전근대에서 근대로 변화하는 격변기를 체험하였던 이 두 지식인은 사상적으로는 서로 아주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박종홍은 힘이 없어서 일제 식민지가 된 슬픈 역사를 교훈삼아 힘이 있는 민족과 나라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힘 있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실용주의와 같은 철학이 우리 민족에게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학자로만 남지 않고 현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박종홍은 힘 있는 새로운 나라의 창조를 위해 철학은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다고 보았다.
박종홍 철학의 화두는 현실의 건설(창조)에 있었고, 창조의 논리를 탐구하고자 하였다. 그의 실용주의적 창조의 철학은 산업화 정책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던 박정희 정부와 코드가 맞았다. 박종홍은 전통사상 가운데 실학을 좋아하였으며, 특히 실학자 최한기(崔漢綺) 철학에 대해서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남겼다.
함석헌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기독교는 그의 정신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는 일본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무교회주의를 공부하였고, 귀국 후 김교신과 더불어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해방 후 스승 유영모로부터 동양사상을 깊이 공부하면서 기독교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벗어나 동서를 초월하는 보편적 진리를 탐구하였다.
박종홍이 ‘민족’의 입장에서 근대적인 힘 있는 나라를 지향하였다면,
함석헌은 그가 ‘씨알’이라고 부른 ‘민중’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다보았다. 함석헌은 오천년 역사에서 늘 소외되고 뒷전에 밀려났던 민중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였다.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 전이나 후나 주인 대접을 못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권력에 짓눌릴 대로 짓눌려 제대로 말 한번 시원하게 못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였다. 함석헌은 자신의 철학을 ‘저항의 철학’이라고 규정하였다.『사상계』를 통해 4·19 혁명의 정신적 에너지를 제공한 함석헌은 쿠데타 정부와 숙명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동서고금을 아우른 인문정신의 두 거인, 역사의 균형을 이뤄
함석헌과 박종홍의 사상 세계는 동양과 서양 ·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고 있고, 역사와 철학, 종교와 과학을 통섭하고 있다. 두 지성은 당시로서는 최고 · 최신의 지식을 가지고 현실의 긴박한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 온몸으로 사색하면서 새로운 사상의 길을 열기 위해서 분투하였다. 서재에 안주하지 않고 인문학을 보급하기 위해 전국을 동분서주하며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함석헌과 박종홍은 각자의 독특한 사상과 지식, 개성과 매력으로 열정을 다해 인문학을 살린 인문정신의 거인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이념 과잉은 국민들에게 실망을 가져다주었다. 이제는 창조적 실용주의가 요구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미 50년 전부터 창조적 실용주의를 외친 박종홍의 철학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박종홍과 같은 시대에 함석헌과 같은 사상가의 비판적 저항의 철학이 있어서 우리 역사가 균형을 이루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항이나 비판이 없는 실용은 독선과 독주로 흐르기 쉽다. 또한 실용적 창조가 없는 비판과 저항은 공허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을 치열하게 살았던 두 지성, 박종홍과 함석헌. 이 두 라이벌은 실용적 창조정신과 비판적 저항정신, 현실적 지성과 우주적 영성, 민족의식과 세계의식을 오늘날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가 하는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글쓴이/ 장승구
· 세명대학교 교수, 한국철학 전공
· 저서: 『삶과 철학』,『정약용과 실천의 철학』,『다산경학의 현대적 이해』(공저),
『중용의 덕과 합리성』(공저),『다산의 사상과 그 현대적 의미』(공저),
『민본주의를 넘어서』(공저), 『동양사상의 이해』(공저) 등
· 역서: 『관자(管子)』(공역)
첫댓글 _()_
두 분의 다른 국민 사랑법을 봅니다. 두 분의 조화로운 융합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도 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