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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7일 월요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제1독서 : 갈라 1,6-12
복 음 : 루카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의 묵상>
안소근 실비아 수녀
오늘 복음을 가만히 보면, 율법교사가 질문하지만, 사실 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다른 곳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예수님이 아니라 율법교사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명기에 있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레위기에 있으니
율법학자가 이 계명들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고,
예수님께서 그 계명들을 지키게 하신다고 하여서
그에게 새로운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라고 다시 묻는 것은
그가 어제 우리가 묵상한 것처럼 규정이 없어도,
규정보다 더 나아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이웃의 범위를 한정하려 합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웃의 범위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만 계명을 지키려 하였습니다.
법을 최대한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10,28)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이웃을 한정하려 할 때, 그는 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 계명을 실천하여 생명을 얻었을까요?
마지막에 그는 강도에게 이웃이 되어 준 이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10,37)이라고 말하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계명을 진심으로 실천한다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언제나 남의 떡이 더 커 보입니다.
이런 현상이 언제부터 생겼을까요?
저의 경우,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겼던 것 같습니다.
옆집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 제 장난감보다 더 좋아 보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의 가방, 옷차림 등에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지고 싶은 것을 사주지 않는 부모님께 대한 원망도 가졌습니다.
시기심은 평등의 원칙이 깨졌다고 생각될 때 나옵니다.
그토록 갈망했지만,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 삶을
누군가가 살고 있을 때 불평등하다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불평등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삶을 보고
자기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져도 순간의 만족일 뿐 영원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모든 감정을 통해, 불공평의 결과는 나
의 욕심일 뿐 불공평 자체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욕심 가득한 마음을 내려놓을 때 삶이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상태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고,
또한 다른 이들을 향해 축하의 마음을 전달하는 여유도 갖게 됩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자기 안에서 치워나갈수록,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자리하시게 됩니다.
여유와 편안함을 갖게 되고,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필요한 사랑의 마음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고 물었고,
그는 율법에 나오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이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즉,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인 사랑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통해 하십니다.
자기는 옳고 따라서 자기는 당연히 최고의 것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말로써 정의를 잘한다 해도,
이웃으로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즉, 율법의 세부 조항을 열심히 잘 지킨다고 하더라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자기가 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욕심, 시기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에 갇혀 사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사랑에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떤 율법교사와 예수님과의 두 번의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기는 하나, 율법교사의 편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 구원을 받으리라 여기고 있습니다.
마치 스스로의 ‘행실’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자신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는 것’과 ‘자신은 그분께 매여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은 ‘무엇을 하느냐?’는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라는 존재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사랑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곧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는'(루카 10,27) 일입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마르 10,29)
이 질문 뒤에도 역시 그의 옹졸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의 대상에는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제외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마르 10,36)
예수님께서는 누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대답하기보다
오히려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우리는 모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이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모두에게 ‘이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단지 이웃이 아니라 ‘형제’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문제보다
‘나는 이웃이 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먼저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그가 나의 형제인가?’ 묻기에 앞서
‘나는 그의 형제가 되어 주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곧 내가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여기는 사람’을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루카 10,37)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에서,
이제는 “주님, 저희가 자비를 입었으니,
저희도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보다
“서로에게 사랑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핵심 메시지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대화의 마지막 구절에 있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37)
그러니 아는 것에 멈추지 말고 행동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실행하고, 의무적으로나 형식적으로 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사랑으로 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를 알 때가 아니라 실행할 때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주님!
초라해진 저의 모습을 봅니다.
초주검 당해 쓰러진 이들이 여기 저기 웅크리고 있건만,
나는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앉아
신문쪽지를 바라보며 혀만 끌끌차면서
슬며시 길을 피해 슬금슬금 달아나고 맙니다.
'누가 제 이웃입니까?' 묻기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게 하소서!
그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사랑이 필요하기에 사랑하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을 간직한 사람, 무엇을 하더라도 사랑으로 하는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이웃이 되어 준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웃사촌만도 못하다(잠언27,10)고 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실제로 표현되어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에는
“네 친구와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고
불행할 때 형제의 집으로 가지 마라.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잠언27,10).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이가 이웃입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려는 마음이 불타오르길 희망합니다.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되었는데
마침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는 지나가 버렸고
또 레위인도 지나갔는데 그도 역시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료해 주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입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율법 교사가 자신 있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10,37) 하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누가 이웃이며, 이웃이 아닌지에 대해서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남으로 보았고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표현된 것입니다.
마음에 품은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사실 “우리가 병들고 궁핍한 사람을 만지는 것은,
곧 고통을 받는 예수님의 몸을 만지는 것입니다”(성 마더 데레사).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는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려고 마음을 먹을 때 이웃이 보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이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지 말고,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이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까지 미워하는 셈이며 멸시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오늘이길 바랍니다.
그저 '어떤 사실을 보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 납니다.”
“친구란 언제나 사랑해 주는 사람이고,
형제란 어려울 때 도우려고 태어난 사람이다.”(잠언17,17).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세상일은 참 모를 때가 많습니다.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자식도 무척 다릅니다.
저의 형제들도 모두 성격과 외모가 다릅니다.
큰형은 예술적인 감각이 좋았습니다.
필력도 좋고, 그림도 잘 그리고, 음악적 재능이 있었습니다.
작은형은 좋은 몸을 지녔습니다. 형제 중에 키가 제일 컸습니다.
달리기도 잘했고,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렸습니다.
저는 큰 형과 달리 예술적인 감각이 부족했습니다.
작은형과 달리 좋은 몸을 타고 나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제게는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성품을 주셨습니다.
공장에서 출고 되는 물건은 기능이나 성능이 다르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소비자들이 반품을 요구할 것이고, 회사는 곧 어려움에 처 할 것입니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기에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났어도,
같은 선생님에게서 배웠어도 성품과 기질이 다른 것입니다.
진화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성격과 체질이 좋다고 합니다.
코로나와 같은 질병이 찾아와도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실 때입니다. 같은 로마 병사지만 반응이 달랐습니다.
어떤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했습니다.
빨리 끝내려고 예수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러나 어떤 병사는 이방인이었음에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 저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구나!”
예수님 옆에 있던 죄인들도 반응이 달랐습니다.
한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오. 그리고 나도 구해 주시오.”
그러나 또 다른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으로 갈 것이다.”
오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
그러자 율법학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율법학자의 관점은 ‘나의 이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
예수님의 관점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입니다.
나의 삶은 과연 어떤 관점에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 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훗날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제안으로
2002년부터 빛의 신비가 묵주기도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로써 묵주기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환희의 신비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한 묵상입니다.
빛의 신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묵상입니다.
고통의 신비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영광의 신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들 또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희망하는 묵상입니다.
신학교에서 지낼 때입니다.
매일 저녁 7시 15분이면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혼자 할 때도 있지만 함께 할 때도 많았습니다.
본당 신학생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교구 모임과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학교에는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하는 신학생들의 기도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 기도는 신학생들을 지켜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묵주기도는 신학생들을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주었습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묵주기도를 하려고 차를 잠시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큰 차가 제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차를 멈추지 않았으면 큰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막 하려고 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오늘 하루를 묵주기도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착한 사리아인의 비유
조욱현 토마 신부
율법 교사는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25절)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26절)
율법 교사는 계명을 말씀드렸다. 주님께서는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신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주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36절)
사제도 레위인도 아닌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37절)이 그의 이웃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34절)이라고 한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의사는 필요한 치료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분의 말씀이 치료제이다.
어떤 말씀은 상처를 싸매고, 어떤 말씀은 기름을 바르고 어떤 말씀은 포도주를 붓는다.
그분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싸매주고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노새에 태우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도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말씀하신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 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5절)
이튿날은 바로 강도를 맞은 사람이 구원받은 날로 부활의 날이다.
그리고 두 데나리온은 하느님의 두 계약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아들이 상처 입은 값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다.
그 고귀한 피가 우리를 구원하여 죽음의 아픔을 면하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매 맞고 반죽음 상태로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도와준 이가 당신이심을 알려주셨다.
우리의 상처를 보살펴 주는 이보다 더 가까운 이는 없다.
그분을 우리 주님으로 사랑하고 우리 이웃으로 사랑하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사랑하여야 한다.
하나 된 몸 안에서 다른 어려운 지체들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 매일의 사랑 고백, 묵주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여기저기 몸도 아팠지만,
이 길을 계속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갈등도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업 땡땡이도 많이 치고, 제대로 신학 공부도 하지 못했습니다.
늘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지라, 30년 전부터 반성하는 마음으로
매일 영성 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습니다.
좋은 영적 독서 책 한 권을 만나면 마치 횡재한 기분입니다.
탁월한 영성가들의 신앙과 삶, 지혜와 경험이 맞춤형으로
내 손안으로 딱 들어오니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최근에 영적 독서를 하던 중에 묵주 기도와 관련된 풀톤 쉰 대주교님의 말씀을 접하고
정말 가슴이 뛰고 설레었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때로 우리가 매일 바치는 묵주 기도는
지루한 반복이나 그저 해야 하는 일상의 의무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인들 사이에서는 수시로 서로 사랑을 확인합니다.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해요 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진리에는 지루한 반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 묵주 기도는 성모님과 예수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치면,
그것은 “성모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묵주 기도를 누구보다도 좋아하셨던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묵주 기도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단순하고 깊이가 있고, 훌륭한 묵상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 영혼의 눈앞에는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이 지나갑니다.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로 구성된 그 신비들은 성모님의 마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있는 친교를 나눌 수 있게 저를 이끕니다.
찬미의 기도이며 간구의 기도인 묵주 기도가 묵상 기도로 넘어가길 희망합니다.
묵상을 동반하지 않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신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묵주 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구원송 등
염경기도의 조합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묵상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는 염경기도와 묵상기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기가 막힌 기도입니다.
묵주 기도문 매 신비 안에 반드시 ‘무엇무엇을 묵상합시다!’ 라는 문구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묵주 기도는 당연히 묵상 기도입니다.
묵상이나 관상에로 나아가지 못하는 묵주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체에 불과합니다.
또한 묵상 없이 그저 입으로만 줄줄 바친다면
묵주 기도가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이방인들의 빈말처럼 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묵주 기도를 자주 바치면 좋은 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정성껏 묵주 기도를 바칠 때, 성모님께서 더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성모님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더 우리 가까이 현존하십니다.
결국 묵주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현존 체험, 성모님 동반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주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
성모님께서 언제나 내 인생 여정을 동반하신다.’는 의식을 지니게 되니,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쁘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묵주기도 잘 바치는 법: 묵주기도는 어머니께 내미는 어린이의 손
전삼용 요셉 신부
10월은 로사리오 성월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이 기념일이 정해진 이유는 교황 비오 5세와 교회의 묵주기도를 통한
엄청난 하늘의 개입을 온 교회가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적 사건은 이렇습니다.
1571년 그리스도교 신성 동맹은 해군력이 훨씬 우월하고
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엄청난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두 세력은 그리스 레판토 바다에서 결정적으로 맞붙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전투는 패배로 끝날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모든 유럽이 이슬람화될 위기였습니다.
이때 교황 성 비오 5세는 그리스도교국에 대한 큰 위험을 인식하고
신자들에게 승리를 위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모든 교회와 수도원에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했으며,
자신도 큰 신심으로 묵주기도를 인도했습니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신성 동맹은
많은 역사가가 기적적인 해군 승리로 간주하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오스만 군대는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그들의 제국이 유럽으로 확장되는 것은 중단되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교황 비오 5세는 승리를 성모 마리아와 묵주기도의 덕분으로 돌렸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교황님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셨고,
나중에 이 축일을 10월 7일에 묵주기도의 성모 축일로 바꾸었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그의 묵주기도 장려는 이 강력한 기도에 대한 신심을
가톨릭 세계 전체에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가 제정한 로사리오 성모 축일은 묵주기도가 단순한 개인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개입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바꿀 힘을 지닌 기도라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해주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자랑 중의 자랑은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 어머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멀게만 느껴질 때 어머니를 통한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처음에 꺼리셨음에도
첫 기적을 행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성모님의 청원 때문이었습니다.
묵주기도는 본래 시편 150편을 하루에 다 낭송하던 수도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시편도 내 생각을 끊고 이미 있는 기도문에 정신을 집중하는 행위입니다.
묵주기도가 잘 바쳐지려면 기도하는 중에 나를 믿는 마음을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생각을 끊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행위입니다.
아이들의 가장 강력한 힘은 “엄마!”라고 반복해서 부를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소화 데레사가 꿈을 꾸었는데 자신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며 불쌍하고 애절한 눈만 치켜뜨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안타까움에 다른 누구보다 소화 데레사를 들어 가장 높은 곳에 앉히십니다.
묵주기도의 힘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단순하게 반복하는 말 속에 나를 파묻으면 주님께서 들어주십니다.
내가 하는 말과 각 신비를 묵상하며 최대한 나의 생각을 내려놓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엄마에게 내미는 아이의 손에 다른 생각이 들어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은 나를 믿는 행위입니다.
공동으로 묵주기도의 힘의 사례에 대해 들은 것은 수없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사목하던 신부님이 자기를 비웃던 마귀 들린 사람을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하며 쫓아냈던 일,
그리고 성당 레지오 단원들이 밤새워 기도하여 익사한 청년을 되살린 일 등 너무나 많습니다.
여기에는 성모님께 청할 때 예수님께 청하여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묵주기도는 개인적으로도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르완다 대량 학살의 생존자인 임마꿀레 일리바기자의 책
『로사리오: 내 생명을 구한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녀는 당시 숨어있던 91일 동안 묵주기도를 바치며
자신이 체험한 묵주기도의 능력을 크게 네 가지로 말합니다.
1. 하느님의 손에 숨겨져 보호받는다는 믿음:
임마꿀레는 그녀가 숨어있는 동안 묵주가 그녀의 방패가 되어
외부의 압도적인 두려움과 위험으로부터 그녀에게 깊은 보호감을 제공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밖에서는 폭력이 만연하고 살인범들이 집을 수색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녀는 묵주를 꼭 붙잡고 자신과 벽 너머의 혼돈 사이에 거의 물리적인 장벽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그녀를 둘러싼 공포로부터 그녀를 보호하시고,
겉옷으로 그녀를 덮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의 형태가 아니라, 성벽 밖의 악의 손길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손에 숨겨졌다.”라는 심오한 느낌이었습니다.
2. 하느님 용서의 능력을 받게 됨: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성모님께서 경험하신
가장 중요하고 신비로운 순간 중 하나는 마음의 심오한 변화였습니다.
은신 초기에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살인자들을 포함하여
자신의 동족을 살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묵주기도를 계속 바쳤고, 특히 고통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이 그녀의 영혼에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용서가 그녀와 그녀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깨달았고,
원수들을 위한 예수님의 수난의 고통에 자신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3. 천사들의 존재를 느낌:
임마꿀레는 숨어있는 동안 천사들이 거의 눈에 띄게 나타났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녀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동안 그 방에 천사들이 있어
그녀와 다른 여성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살인범들이 위험할 정도로 그들을 발견할 뻔했지만,
항상 뭔가가 그들이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처럼 보였던 여러 사례를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기도하는 순간 하늘의 존재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개입하고 있다는 깊은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성모 마리아께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셨다고 믿으며 끊임없는 묵주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여겼습니다.
4. 혼돈 속에서도 신비로운 평화의 힘을 느낌:
상황의 극도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임마꿀레는
묵주기도가 어떻게 그녀에게 신비로운 것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평화에 대한 심오한 감각을 가져다주었는지 설명합니다.
대량 학살이 밖에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동안,
화장실 안에서 그녀는 공포를 뛰어넘는 평온함을 경험했습니다.
특별히 환희의 신비를 바치면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탄생을 연결했으며,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예수님의 세상에 오신 것이 희망을 가져왔다는 것을 스스로 상기했습니다.
이는 그녀를 둘러싼 악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희망과 평화의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이 평화를 묵주기도를 사용하여
그녀에게 은총을 부어주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신비로운 선물로 여겼습니다.
임마꿀레는 묵주기도가 자기 생명을 구했다고 말합니다.
기도를 하기 전에는 그 두려움과 고통에 차리라 발각되어 죽기만을 바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5단짜리 묵주는
그녀가 용서하고, 평화를 찾고, 하느님의 자비를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심오한 내적 치유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손만 내밀면 잡아주실 어머니가 계심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