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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3년 4월 16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매우 깊었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교회는 오늘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정하여 하느님의 큰 자비를 기리는 날로 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내려 주시며 죄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자비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이 자비를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체험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 미사에 참여합시다.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엉뚱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이든지 누구나 그것으로부터 방어태세를 갖습니다. 문을 잠그고 아무도 들이지 않게 하는 방법도 있고, 높은 담을 넘어 들어오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장애를 설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결국 그 장애를 뚫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서양에 '아무리 성벽이 두꺼워도 깨지게 되어있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느끼는 두려움에는 장벽이 없는 것처럼 지금 제자들은 마음으로 느끼는 두려움에 처해있습니다. 몸으로 받을 위험을 마음으로 더욱 크게 느끼고 있는데 이 두려움을 물리쳐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이며, 평화의 원천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이 두려움을 멀리 쫓을 수 있습니다. 두려울 때 주님 함께 계시고 그 주님은 부활하신 분이시니 제자들은 뛸 듯이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 항상 내가 느끼는 두려움은 부활하신 그 분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아 드리는 두려움입니다.
아버지께서 주님을 우리 사이에 보내심과 같이 우리를 주님은 보내십니다. 우리를 악으로 몰아넣으며 죽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세상에 보내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두려움을 없애줄 성령을 주시며,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주님의 증인이 되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증인은 참 어려운 일이어서 없는 것을 있다고 할 수 없고, 못 본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가 이루어집니다. 못 본 것을 철저하게 보고, 그리고 본 것을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확실하게 있음을 증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권한을 주시고, 우리에게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시며, 제자들이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이르십니다. 우리가 용서 받지 못할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이는 사랑으로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용서는 사랑의 극치이며 사제의 사죄권으로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음을 표징으로 삼습니다. 그 것은 최종적인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서 용서하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느 영화에서 보니까,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 훔쳐 갔다고 하니까 예수님의 시신을 찾으러 다니느라고 혈안이 되어서 제자들과 같이 있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을 만나서 복수하려는 마음이 가득했다고 전합니다. 이는 영화의 얘기지만 아마 나 또한 시신마저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결코 없어진 시신을 찾기 전에는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토마스를 내세워 의심하고 믿지 못하는 당시의 제자들이나 사람들을 대변합니다. 주님의 상처에 손을 대어보고, 상처를 직접 눈으로 보고 믿겠다는 정신은 좋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경영학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속담에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 재삼 확인을 강조합니다.
토마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데 아무런 장애도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분명 토마스보다 더 그렇게 확인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토마스는 바로 주님과 같이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항상 눈뜨면 보았을 주님을 그렇게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주님과 같이 생활하지 않았으니 더 비통해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 또한 실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덜 의심하니까 그만큼 신앙도 미지근할 것입니다. 마치 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나는 많이 슬펐고, 친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덜 슬픈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멀게 느껴졌을 때 그냥 대충 믿게 됩니다. 그렇게 대충 믿음을 갖는 것이 바로 토마스의 경우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토마스를 비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토마스의 비통함과 간절한 사랑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토마스의 신앙이 부러울 것입니다.
토마스는 즉시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의심을 품었음을 용서 청합니다. 진정으로 토마스는 주님의 못 자국에 손을 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의심을 버리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지금도 부활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믿음을 가지기도 어렵습니다. 그 것은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오늘 주님은 확실하게 설명하십니다. 다른 제자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시신을 찾으러 다니느라고 성령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엉뚱한 것에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성령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속 에서도 엉뚱하게도 신앙을 다른 곳에서 찾고 하느님을 실제적인 세상에서 찾으며, 성령을 받지 못하면 결국 겉에서만 맴돌 수밖에 없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성령을 받아 그 사실을 믿습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분명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을 누릴 자격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보고 믿는 것과 보지 않고 믿는 것은 정말 천지차이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사실 확인의 수준에서 머물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보지 않고도 확신을 가지고 믿음에 이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권권복응'(拳拳服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윗사람의 말씀을 두 손을 마주 잡고 공손하게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면서 따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말씀은 직장 상사의 말이나 본당 신부님의 말씀보다도 더 소홀하게 생각하고 지키지 않는 안일한 태도를 가지고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습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4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일4월 16일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 (Benedict Joseph Labre)
신분 : 평신도, 증거자
활동 연도 : 1748-1783년
같은 이름 : 베네데토, 베네딕도, 베네딕또, 베네딕뚜스, 베네딕투스, 베네딕트, 분도, 요세푸스, 요제프, 조세푸스, 조세프, 조셉, 조제프, 주세페, 쥬세페, 호세
성 베네딕투스 요셉 라브르(Benedictus Josephus Labre, 또는 베네딕토)는 부유한 상인의 15자녀 가운데 맏이로 불로네 근교에서 태어났다. 1770-1776년 사이에 그는 수차에 걸쳐 수도회에 입회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너무도 신중하다는 이유로 또 건강상의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결국 수도성소가 자신의 길이 아니라 생각한 그는 로마(Roma) 순례 길에 나섰는데 맨발로 구걸하면서 기도 중에 걸어갔다. 그로부터 3-4년 동안 그는 서유럽의 성지 이곳저곳을 순례했는데, 이탈리아의 로레토(Loreto), 아시시(Assisi) 그리고 바리(Bari), 스위스의 아인지델른(Einsiedeln), 프랑스의 파레르모니알(Paray-le-Monial),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등지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무소유를 실천한 순례자로서 어디를 가나 항상 맨발로 여행하며 노천이나 추녀 밑에서 밤을 새웠다. 누더기 옷을 입고 더러운 몸으로 문전걸식 하면서도 약간의 돈이라도 얻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말 수가 적은 대신 기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다른 사람들의 냉대마저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1774년부터 로마에 머물던 그는 낮에는 성당에서 기도와 성체조배를 하고, 밤에는 콜로세움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건강을 많이 해치게 되었다. 결국 그는 1783년 성주간 수요일에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한 뒤 허물어지듯 쓰러진 후 어느 푸주한의 집에서 임종을 맞았다.
로마 사람들은 이 '새로운 프란치스코 성인'의 높은 성덕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40시간 성체조배 신심의 전파자이기도 했던 그는 1860년 복자품에 올랐고, 1881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성되면서 노숙인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또한 성 베네딕투스 요셉 라브르는 서방 교회보다 동방 교회에 더 많이 알려진 수덕적인 성소를 받은 성인이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된 그리스의 살로이와 러시아의 유로디비에 견줄만한 위대한 성덕을 쌓았다고 평가된다.
오늘 축일을 맞은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 (Benedict Joseph Labre)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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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