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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半島) 신라(新羅), 그 동(東)쪽에 장인국(長人國)이 있다?
○ 신라(新羅)!【기원전(紀元前) 57년 ~ 기원후(紀元後) 935년】라는 옛 봉건왕조(封建王朝)는, 무려 일천(一千)년을 이어왔다고 전(傳)해진다. 말이 일천(一千)년이지, 이렇게 장구(長久)한 세월(歲月)을 이어온 봉건왕조(封建王朝)는, 그 유례(類例)를 찾아보기 어렵다.
행성(行星)안에서 오백(五百)년, 일천(一千)년, 이천(二千)년 등의 장구(長久)한 세월(歲月)동안, 단일(單一)왕조(王朝)로, 혈통(血統)을 이어온 왕조(王朝)는, 오직 조선왕조(朝鮮王朝)【통칭】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이어온 세월(歲月)이 일만 년(一萬年)이다.
○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말하는 중국(中國)왕조(王朝)는, 200년 - 300 년이 고작이요, 이삼(二三) 십년(十年)이나 한, 두 명의 왕(王)을 거쳐 망(亡)하고, 한 지방(地方)에 웅거(雄據)했던, 나라 같지 않은 나라들도, 황제국(皇帝國)이라하고, 황제(皇帝)를 칭(稱)했다고 말한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학계(學界)는 아주 웃기는 곳이다. 옛 대륙왕조(大陸王朝)를 무조건 중국(中國)이라고 한다. 신해혁명(辛亥革命) 이전(以前)의 중국(中國)이란 말은, 조정(朝廷)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곳, 황제(皇帝) 또는 천자(天子)가 직접(直接) 통치(統治)하던 곳을 말하는 것 일뿐, 나라이름으로 사용(使用)된 적은 결코 없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以後), 중국(中國)이란 이름을 「다른 주변(周邊)의 집단(集團)이, 무단(無斷)도용(盜用)할까봐, 나라이름(國名)으로 했다.」고 그들 스스로 말한다.
이런 실정(實情)임에도,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는, 옛 왕조(王朝)들을 말 할 때, 무조건 중국(中國)이라고 설명(說明)한다. 조(趙). 위(魏). 수(隋). 당(唐)등의 나라이름(國名)이 있음에도, 이를 마다하고 “중국(中國)”이라고 설명(說明)하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집단(集團)최면(催眠)에 걸렸거나, 누군가에 의해, 집단적(集團的)으로 세뇌(洗腦)를 당한 자(者)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이런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동남(東南) 모퉁이 땅, 손바닥만 한 곳에, 『일천(一千)년 신라(新羅)가 있었다.』고 하면서, 『경주(慶州)는 계림(鷄林)이라 하고, 그곳이 황도(皇都)였으며, 전성(全盛)기 때에는, 이곳에 17만여(萬餘)호가 살았다.』고 열을 올리며 설명(說明)한다.
17만 여 호(餘戶)라면, 최소한(最小限)도 ‘’80만에서 일백(一百)만‘ 명(名)의 백성(百姓)들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만큼의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무엇이 얼마만큼 필요(必要)한 지나 생각해보고, 이곳이 신라(新羅)의 황도(皇都)였다고 말하는 지 궁금할 뿐이다.
○ 우리가 의무교육(義務敎育)으로부터 배운 역사(歷史) 이야기는 : 당(唐)왕조(王朝)와 신라(新羅)는 사대(事大)관계(關係)에 있었으며, 고구려(高句驪)와 말갈(靺鞨), 백제(百濟)등의 연합(聯合)세력(勢力)에 위협(威脅)을 느낀 신라(新羅) 왕실(王室)은, 당(唐)나라에게 구걸(求乞)사신(使臣)을 보내 살려달라고 한다.
황제(皇帝) 왈(曰) :〔너희나라에서는 어떤 계책(計策)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신라(新羅)사신(使臣)왈(曰) : 〔우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당황(唐皇)만을 믿고, 의지(依支)하고 있습니다. 만약(萬若), 당황(唐皇)께서 살려주시지 않는다면, 신라(新羅) 왕실(王室)과 백성(百姓)들은 어육(魚肉)이 될 일만 남았습니다.〕 하였다고 한다.
○ 이러한 당(唐)나라는 결국(結局), 신라(新羅)의 구원(救援)요청(要請)을 받고, 고구려(高句驪)에 군대(軍隊)를 보내는데.........결국(結局), 백제(百濟)는 당군(唐軍)에 의해 무너져, 그 땅이 ‘발해(渤海)와 말갈(靺鞨)과 신라(新羅)’가 나누어 차지해버렸다. 또한 고구려(高句驪) 역시(亦是), 당(唐)의 공격(攻擊)을 받고, 여기에 내부(內部)의 권력(權力)다툼으로, 2인자가 당(唐) 군(軍)의 향도(嚮導)로 출전(出戰)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일천(一千)년 고구려(高句驪)는 역사(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당(唐)나라에서는, 이러한 일련(一連)의 관계(關係)로 말미암아, 신라(新羅). 백제(百濟), 고구려(高句驪)등의 나라에 대한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위치(位置)에 있었다.
○ 당(唐)나라의 역사서(歷史書)인 당서(唐書)에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가 있다. 대략적(大略的)으로 :
(1) 구당서(舊唐書) : 구당서(舊唐書)는 위술(韋述)이 지었는데, 석진(石晉 오대 석경당(石敬唐)이 세운 후진(後晉)) 때에, 재상 유후(劉昫)가 위술의 구사를 근거로 하여, 더 보태기고 하고, 줄이기도 해서 완성한 것으로, 제기 20권, 열전 1백 50권인데, 어떤 것은 번거롭고 어떤 것은 간략(幹略)하여 고르지 못하고 누락(漏落)이 많은 것이 이 구당서(舊唐書)라고 하는데, 청(淸)나라 고염무(顧炎武)는 :〔구당서(舊唐書)가 자뭇 번거롭고 거칠기는 하지만, 사적이 명백하고, 시종(始終)의 기록이 풍부하여, 역시 볼 만한 점이 있다. 상고해 보건대, 이 책은 유후(劉昫)에 의해 찬술되었는데, 그는 후당(後唐) 말제(末帝) 청태(淸泰) 중에, 승상으로 국사(國史)를 감수하여, 진 소제(晉少帝) 개운(開運) 2년(945)에 비로소 완성하였다. 당시에는 고조(高祖)의 이름을 피휘(避諱)하여, 이씨(李氏)의 책이라고도 하였다. 시대가 여러 번 옮겨감에, 간독(簡牘)이 호번(浩繁)해져, 자세하게 편찬할 기회가 없어, 모두 남겨 두었으므로 독자는 이것으로 세대의 변천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2) 신당서(新唐書) : 송(宋)나라 가우(嘉祐 송인종(宋仁宗)의 연호) 중에 증공량(曾公亮)이 조서를 받고 산정(刪定)하였는데, 구양수(歐陽脩)가 기(紀)와 지(志)를 찬하고, 송기(宋祁)가 열전을 지으니, 구서(舊書)로, 약 1백 90권이던 것이, 신서는 1백 74권이 되었는데, 그 속에 표를 더 보태었다. 그러므로 책이 이루어지자, 조정에 올리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사건은 전보다 더 불었고, 문장은 구서보다 생략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논의하는 자들은 영숙(永淑 구양수의 자)은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배워 포폄(褒貶)하기에 힘썼고, 자경(自京 송기의 자)은 문학에 능통하여 문장에만 정성을 쏟았고, 잡설을 많이 채집하여 가끔 서로 상치되는 부분이 있어 실상을 잃었다는 한탄을 한다. 신당서(新唐書)의 지(志)는 구양영숙(歐陽永叔)의 작인데 자못 체재가 갖추어져 있고, 문장 역시 명달(明達)하나 열전(列傳)은 송자경(자경은 송기의 자)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간략하여 명확하지가 않으니, 두 사람의 솜씨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고하(高下)가 현격(懸隔)하다.〕고 평하였다.
▣ 위와 같이, 한 왕조(王朝)의 역사(歷史)를 ‘신구(新舊)’라는 이름으로 펴낸 예는 흔치 않은데, 오대(五代)의 역사서(歷史書) 역시(亦是), 신오대사(新五代史)와 구오대사(舊五代史)가 있다. 당(唐)과 백제(百濟), 당(唐)과 고구려(高句驪), 그리고 당(唐)과 신라(新羅)와의 상호관계(相互關係)는, 우리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기에, 여기서 말해봐야 잔소리가 될 것이 뻔하다.
㉮ 백제(百濟)의 대부분(大部分)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는, 백제(百濟)인들보다 당군(唐軍)이 더 잘 알 수밖에 없는 조건(條件)이었으며,【나라 안의 곳곳에서 치열(熾熱)하고, 처참(悽慘)하고, 처절(凄切)하게 생사(生死)를 가르는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또 주둔군(駐屯軍)이 있었기 때문이다.】
㉯ 고구려(高句驪) 역시(亦是)도, 50-70년 동안, 곳곳을 침략(侵略)하고, 나중엔 평양성(平壤城)이 함락(陷落)당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그 땅을 통치(統治)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고구려(高句驪) 땅의 지형지리(地形地理)에 밝을 수밖에 없는, 환경(環境)을 갖고 있었다.
㉰ 신라(新羅) 또한 마찬가지로, ‘고구려(高句驪)+말갈(靺鞨)+백제(百濟)’의 연합군(聯合軍)에 맞서 싸울 국력(國力)도, 마음도 없었던 신라(新羅)는, 마지막 희망(希望)을 당(唐)에게 걸고, 구걸(求乞)사신(使臣)을 보내, 마침내 당군(唐軍)에 의해 백제(百濟)가 망하고, 그 당군(唐軍) 수십만(數十萬) 군대(軍隊)가, 백제(百濟)땅에 주둔(駐屯)하고 있었으며, 신라(新羅)조정(朝廷)과 긴밀(緊密)한 협력관계(協力關係)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신라(新羅) 땅의 지형지리(地形地理)에 밝을 수밖에 없는 처지(處地)에 있었다.
㉱ 그렇다면, 이러한 당(唐) 역사서(歷史書)속에서, 신라(新羅) 땅에 대한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대해 어떻게 설명(說明)하고 있을까? 정말 궁금한 이야기다. 그러나 누구도 이러한 것에 대해 알려하지 않으며, 의문(疑問) 제기(提起)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러니 할 뿐이다. 각각(各各)의 뇌(腦)세포(細布)는, 세뇌(洗腦)의 영향(影響)과 환경(環境)으로 인해, 고정(固定), 정착(定着)과정(過程)을 거쳐 굳어져 버렸다. 의문(疑問)구절(句節)에 대한, 문제(問題)제기(提起)나 의심(疑心)하는 사고(思考)가 멈췄다. 또 이러한 의심(疑心)에 대한 문제(問題)제기(提起)는 “왕따”를 당한다는 집단(集團) 최면(催眠)에 걸려 있기 때문에, 누구도 말하자 않는다. 불문율(不文律)이다. 이게 대한민국(大韓民國)의 21세기(世紀) 현실(玄室)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대통령(大統領)도, 자신(自身)이 공약(公約)으로 내 놓은 정책(定策)등으로 당선(當選)되었음에도, 지금에 와서 많은 공약(公約)들은 사약(死約)이 되어버렸다. 아니 공약(公約)들을 내동댕이쳐 버렸다. 위에서 말한 대한민국(大韓民國) 학계(學界)와 너무도 똑같은, 반복(反復)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임계점(臨界點)에 도달(到達)했다. 이것은 더 발전(發展)할 수 있는 환경(環境)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이야기다.
『신당서(新唐書) 신라(新羅)편』의 문제(問題)되는 구절(句節)을 보자.
○ 신당서(新唐書) 신라(新羅) :《원문(原文) / 新羅,弁韓苗裔也.居漢樂浪地,橫千里,縱三千里,東拒長人,東南日本,西百濟,南瀕海,北高麗. : 신라(新羅), 변한(弁韓)의 묘예【苗裔 : 먼 후대의 자손】이다. 한(漢)의 낙랑군(樂浪郡) 땅에서 살았다. 횡【橫 : 가로방향 곧 동서(東西)】으로 천리(千里)요, 종【縱 : 세로 종으로 남북(南北)방향을 말한다.】으로 3 천리(千里)인데, 동(東)쪽으로는 장인(長人)에 닿고, 동남(東南)에는 일본(日本), 서(西)쪽은 백제(百濟), 남(南)쪽은 바다 가이며, 북쪽에는 고려(高麗)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이것을 반도(半島)의 지형지리(地形地理)와 비교(比較)를 해보기로 하자.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는가? 알아야 면장(面長)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新 羅, 弁 韓 苗 裔 也. 居 漢 樂 浪 地 : 신라(新羅), 변한(弁韓)의 묘예【苗裔 : 먼 후대의 자손】이다. 한(漢)의 낙랑군(樂浪郡) 땅에서 살았다.》고 하였는데,
➠ 신라(新羅)는, 진한(辰韓)의 후예(後裔)라고 했잖은가? 그렇다면 계림(鷄林) 여섯 고을(村)이 모태(母胎)란 이야기는 또 무엇인가?
결과적(結果的)으로 보면 : 계림(鷄林) 여섯 고을이란 말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증거(證據)다.
➠ 신라(新羅)는, 진(秦) 망인(亡人)들과 함께 이룩된 진한(秦韓)이 모태(母胎)라는 말은 무엇이며, 마한(馬韓)의 동쪽 한 곳을 비워주어 살게 했는데, 이곳이 곧 진한(辰韓)이며, 진한(秦韓)이라고 했는데, 한(漢) 낙랑군(樂浪郡) 땅에서 살았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결과적(結果的)인 이야기지만 : 『한(漢)은, 곧 마한(馬韓)이다』라는 이야기가 된다. 『마한(馬韓)은, 마한(馬漢)이며, 한(漢)이다.』 즉 『마한(馬韓)=마한(馬漢)=한(漢)』이란 등식(等式)이 성립(成立)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조선사(朝鮮史)의 많은 부분(部分)이, 해결(解決)되는데, 이때 진한(辰韓)은 ‘마한(馬韓)=한(漢)’에서 지정(指定)해 준, 동쪽 조그만 땅에 정착(定着)했는데, 이곳이 바로 낙랑군(樂浪郡)에 예속(隸屬)된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때 마한(馬韓) 왕(王)인 『진왕(辰王)은, 월지(月支)성(城)에서 오십(五十)여개 나라를 다스렸다.』이것이 곧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다.
㉡《橫千里,縱三千里,東拒長人,東南日本,西百濟,南瀕海,北高麗 : 동서(東西)로 천리(千里)요, 남북으로 3 천리(千里)인데, 동(東)쪽으로는 장인(長人)에 닿고, 동남(東南)에는 일본(日本), 서(西)쪽은 백제(百濟), 남(南)쪽은 바다 가이며, 북쪽에는 고려(高麗)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 동서(東西)방향(方向)으로 천리(千里)라는 말이 되려면 : 300 내지 400km 정도(程度)되는 거리가 되어야 한다. 삼국(三國)【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이 있었을 당시(當時)의 신라(新羅) 땅은 : 반도(半島) 경상도(慶尙道)뿐이었다. 그 외(外) 강원도(江原道) 일부와 경기(京畿)일부 충청(忠淸) 일부, 전라(全羅) 일부 땅을 가졌을 때는, 그나마 국력(國力)이 있을 때였다. 동서(東西)거리는 가장 긴 곳이 기껏해야 170km 미만이었다. 또한 남북(南北)은 400km미만이다. 【황초령까지라면 700km정도가 될 수 있는데, 이는 반도(半島) 형세(形勢)로,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 『동(東)쪽에 장인국(長人國)이 있다』이런 역사서(歷史書) 기록(記錄)이 나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조선사(朝鮮史)의 가장 아픈, 슬픈, 비참(悲慘)한, 처절(悽絶)한 이야기다』라고 할 수 있다. 국어사전(國語辭典)에서 “반도(半島)”를 찾아보면 : 〔삼면(三面)이 바다에 싸이고, 한 면(面)은 육지로 이어진 땅〕이라고 하였는데, 대표적(代表的)인 것이 우리나라와 이태리와 캄차카 반도(半島)등이다. 예를 든 곳은 : 『동(東)서(西)남(南)이 모두 바다(海)요, 북(北)쪽만이 육지(陸地)와 연결(連結)되어 있다』는 공통점(共通點)을 갖고 있다. 예로 본 것처럼, 반도(半島)의 특성(特性)이다.
➠ 신라(新羅) 동(東)쪽에 “장인국(長人國)”이 있었다면 : 계림(鷄林)이었다는 경주(慶州)동쪽지방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통상(通常), 그 나라의 경(京)을 중심(中心)으로, 방향(方向)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로 미뤄보면 : 신라(新羅)의 동쪽이란, 경주(계림)의 동(東)쪽이나, 동북(東北), 동남(東南)지방을 말한다. 그러나 이곳은 너무나 좁고, 작은 땅이기 때문에 별도(別途)의 나라가 또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곳이며, 그러한 흔적(痕迹)조차 없는 곳이다. 또 대한민국(大韓民國) 학계(學界)에서는 : 신라(新羅) 땅은 분명(分明), 동(東)쪽으로 바다에 임(臨)했다고 이야기한다.
➠ 결과적(結果的)으로 : 당서(唐書)에서 이야기하는 『당시(當時)의 신라(新羅) 땅은, 반도(半島) 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신라(新羅) 땅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반도(半島) 땅이 아니라면, 결국(結局) 누군가 우리들에게, 거짓된 정보(情報)를 주고, 진실(眞實)인 냥 했다』는 이야기다.
▣ 삼국(三國)【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이, 당(唐)과 어울러져 50-70년간 패권(覇權)을 다투며, 전쟁(戰爭)을 벌였던 곳은 : 반도(半島) 땅이 될 수 없다. 누군가 의도적(意圖的)으로 반도(半島) 땅에 옮겨 논 것이다. 이 자(者)들이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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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당서(新唐書) 신라(新羅) :《원문(原文) / 而王居金城,環八里所,衛兵三千人. : 왕(王)은 금성(金城)에서 살고 있는데, 그곳은 주위가 8 리이며, 3천인이 지킨다. 謂城為侵牟羅,邑在內曰喙評,外曰邑勒.王姓金,貴人姓樸,民無氏有名. : 성은 침모라(侵牟羅)라 부르며, 서울(邑)에 있는 고을을 ‘훼 평(喙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을 읍륵(邑勒)이라 한다. 왕(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이며, 귀인(貴人)의 성(姓)은 박(樸)씨이며, 백성(民)들은 씨(氏)는 없고, 이름만 있다.〔長人者,人類長三丈,鋸牙鉤爪,黑毛覆身,不火食,噬禽獸,或搏人以食;장인(長人)은 사람의 일족인데 신장(身長)이 3 장(丈)이며, 어금니가 톱니와 같고(鋸牙) 갈고리 손톱(鉤爪)을 하고, 검은 털(黑毛)이 몸을 덮고 있으며, 음식은 익혀 먹지 않고, 금수(禽獸)를 물어 잡고, 혹은 사람을 때려잡아 먹는다. 得婦人,以治衣服.其國連山數十里,有峽,固以鐵闔,號關門,新羅常屯弩士數千守之 : 부인을 얻으면, 의복이나 짓게 한다. 그 나라는 산(山)이 수십(數十) 리에 이어져 있으며, 협곡(峽谷)이 있어, 철문(鐵闔)으로 단단하게 닫혀 있는데, “관문(關門)”이라 부르는데, 신라(新羅)는 항시(恒時) 쇠뇌 수(弩士) 수천(數千)을 주둔(駐屯)시켜 지킨다. 》
㉮ 《王 姓 金, 貴 人 姓 樸, 民 無 氏 有 名 : 왕(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이며, 귀인(貴人)의 성(姓)은 박(樸)씨이며, 백성(民)들은 씨(氏)는 없고, 이름만 있다.》고 하였다.
➠ 왕성(王姓)과 귀인(貴人)의 성(姓) : 바로 『금씨(金氏)와 박씨(樸氏)』다. 나머지 백성(百姓)들은, 부르는 이름만 있을 뿐, 성(姓)은 가질 수 없었다. 현재(現在) 반도(半島)의 실상(實狀)은 어떤가? 이러한 기록(記錄)으로 보면 : 신라(新羅) 중엽(中葉)이후(以後) 까지도 백성(百姓)들에게는, 성(姓)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작금(昨今), 대부분(大部分) 성(姓)씨들이 신라(新羅)에서 파생(派生)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 족보(族譜)라는 것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조작(造作), 왜곡(歪曲)할 수 있기 때문이다.
㉯《其國連山數十里,有峽,固以鐵闔,號關門,新羅常屯弩士數千守之 : 산(山)이 수십(數十) 리에 이어져 있으며, 협곡(峽谷)이 있어, 철문(鐵闔)으로 단단하게 닫혀 있는데, “관문(關門)”이라 부르는데, 신라(新羅)는 항시(恒時) 쇠뇌 수(弩士) 수천(數千)을 주둔(駐屯)시켜 지킨다.》고 하였다.
➠ 이 말은, 『신라(新羅)의 동(東)쪽은, 바다가 아니라, 장인국(長人國)이 있다』라는 이야기다. 『장인국(長人國) 사람들은, 키가 매우 크고, 어금니가 톱니와 같고(鋸牙), 갈고리 손톱(鉤爪)을 하고, 검은 털(黑毛)이 몸을 덮고 있으며, 음식은 익혀 먹지 않고, 금수(禽獸)를 물어 잡고, 혹은 사람을 때려잡아 먹는다.』고 하였는데, 『이곳 땅은 수십(數十)리에 걸쳐, 산(山)과 험(險)한 계곡(溪谷)이 연이어져 있기 때문에, 신라(新羅) 조정(朝廷)에서는 나라와 백성(百姓)들을 보호(保護)하기 위에, 관문(關門)을 철(鐵)로 만들어 놓고, 이곳에 24시간 쇠뇌를 쏘는 궁수들【弩手】을 주둔시켜 놓고 있다.』라는 이야기다.
➠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와 나라(國)등이 반도(半島) 동남(東南) 모퉁이 땅에 없었다는 말은, 『반도(半島)와 신라(新羅)는 관련(關聯)이 없다』는 뜻이며, 『고구려(高句驪). 백제(百濟). 말갈(靺鞨). 글란(契丹)등등의 나라와 부족(部族), 종족(種族)등 역시(亦是), 반도(半島)북방(北方)과 전혀 관계(關係)없다』는 뜻이다.
▣ 삼국(三國)【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이, 수(隋), 당(唐)과 어울러져 50-70년간 패권(覇權)을 다투며, 전쟁(戰爭)을 벌였던 곳은 : 반도(半島) 땅이 될 수 없다. 누군가 의도적(意圖的)으로 반도(半島) 땅에 옮겨 논 것이다. 이 자(者)들이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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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의 주인공(主人公)은, 당(唐)나라이다. 반도(半島) 땅에 이백(二百)만 대군(大軍)을 파병(派兵)한 수양제(隋煬帝)나, 수십만(數十萬)의 보기(步騎)들을 시도 때도 없이 출동(出動)시켜, 고구려(高句驪)를 토벌(討伐)하려는 야심(野心)을 들어낸 당(唐)!
➊ 이전(以前)에는, 북위(北魏)가 수십만(數十萬) 기병(騎兵)군단(軍團)을 보내, 백제(百濟)를 쳤다. 이들은 또 어떤 전함(戰艦)과 수송선(輸送船)으로, 반도(半島)백제(百濟)에 보냈을까?
➋ 당(唐)은, 십여(十餘)만 보기(步騎)를 파병(派兵), 황해바다를 건너(渡海), 백제(百濟)를 정복(征服)하고, 또 백제(百濟)부흥(復興)군들을 진압(鎭壓)하기 위해, 40만 보기(步騎)를 파견(派遣)한 당(唐)! 이들은 과연(果然) 어떤 전함(戰艦)과 수송선(輸送船)에 40만 병력(兵力)을 반도(半島)백제(百濟)에 보냈을까?
➌ 고구려(高句驪)군과 말갈(靺鞨)병으로 이루어진 ‘고구려(高句驪)부흥군(復興軍)’과의 전투(戰鬪)는, 일만(一萬)리 “우랄산맥”의 동(東)쪽 수천(數千)미터 고원(高原)의 동토(凍土)땅에서도 치열(熾烈)하게 벌어졌었다.
➍ 백제(百濟) 고도(古都) 부여(夫餘)! 이곳엔 15만여(萬餘)호【1호당 5명으로 계산하면 75만의 인구(人口)】가 살았으며, 망(亡)시에 76만여(萬餘)호【1호당 5명이면 3백8십만 인구(人口)】가 백제(百濟) 땅에 살고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천5백여 년 전(前)의 이야기다. 인구(人口)증가율(增加率)을 생각하면, 희극(喜劇)이요, 반도(半島) 땅에 존재(存在)할 수 없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이야기다.
➎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백제국(百濟國) 편을 보면 :〔句麗旣畧有遼東,而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今營·平二州之間也.中略.地多下濕,率皆山居.其王都東西二城 : 구려(句麗)가 원래 요동(遼東)을 다스릴 때, 백제(百濟) 또한 요서(遼西). 진평(晉平) 2군의 땅에 의거하였다. 이곳은 영주(營州)와 평주(平州)의 사이이다. 중략. 땅의 많은 곳이 낮고 습도가 많아 모두 산(山)에서 사는데, 그 나라 서울(王城)은 동(東)쪽과 서(西)쪽에 2개의 성(城)이 있다.〕고 하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➏ 당(唐)나라! 이 자(者)들이 한반도(韓半島)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몰랐다고 한다면, 『당(唐)』이란 『옛 왕조(王朝)는 지구(地球)상에 존재(存在)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의 기록(記錄)한 자(者)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 항상(恒常) 강조(强調)하는 말이지만,『반도(半島) 동남(東南)쪽 모퉁이 땅에, 신라(新羅)가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면, 열도(列島) 황기(皇紀) 2,600 년은 거짓으로 판명(判明)된다.』 이름 숨기기 위해 열도(列島) 아이들은, 서슴없이 고전(古典)을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는데, 심혈(心血)을 기울인다. 열도인(列島人)들이야 자신(自身)들과 깊은 관계(關係)에 있는 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반도인(半島人)들은 왜 그러한 일에 앞장서서 동조(同調)하고, 협력(協力)하는 것일까?
본인(本人)은 이게 가장 못마땅한 것이다. 제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제에, 남의 나라 역사(歷史)이야기에 끼어들어, 자국(自國)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는데 앞장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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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昨今)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상(社會相)을 보라.
법(法)이나 규칙(規則)은 : 그것을 지켜야 사회질서(社會秩序)를 지키고, 사회정의(社會正義)를 실현(實現)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意見)과 합의(合意)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엘리트층이라고 하는 분(?)들은, 이러한 법(法)이나 규칙(規則)등에는 예외적(例外的)인 층(層)이다.
부동산(不動産)투기(投機). 위장(僞裝)전입(轉入). 부동산(不動産)거래(去來)가격(價格)의 속임과 세금(稅金)포탈(逋脫). 증여(贈與)상속(相續)에 관한 세금포탈(逋脫). 고의적(故意的)인 병역기피(兵役忌避). 불법(不法)취업(就業). 뇌물수수(賂物授受). 정상(正常)거래(去來)를 벗어난 급료(給料). 망국(亡國)론까지 들먹이는 고액(高額)사교육. 매관매직(賣官賣職)등등 수없이 많은 범법자(犯法者)들이 우글거린다.
청문회(聽聞會)를 보면 : 이들의 얼굴가죽엔, 미국(美國)으로 수출(輸出)하는 자동차(自動車) 강판(鋼板) 두께만한 철판(鐵板)을 깐 자(者)들이다.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매스꺼울 지경(地境)이다. 법(法)과 규칙(規則)을 만들 때, 별 볼일 없는 대다수(大多數) 서민(庶民)들의 목을, 올가미 속에 넣어 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할 정도(程度)로, 자신(自身)들은 치외법권(治外法權)지대에서 산다. 과연(果然) 이러한 것이 사회정의(社會正義)를 실천(實踐)하려고 만든 것인가? 사회질서(社會秩序)를 유지(維持)하기 위해 만든 것인가?
▣ 국민(國民)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로 정신(精神)을 차리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미래(未來)는 없다.
2015년 07월 0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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