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철비는 삼척과 영월 , 홍천 그리고 양양에 있다
울진의 철비 2좌의 (비석전시관) 철비도 강원도에 속하나 행정구역이 변하여 경북에 속하지만
엄연히 당시의 행정은 강원도 이었는데 홍우순은 강원도 관찰사 이었으며, 다른 철비의 이름
인 심해 도 강원도의 현령이라 보면된다.
그리하면 강원도의 철비는 8좌를 가진다.
양양에는 철비가 2좌가 있는데 하나는 양양 현산에 선정비군에 있고, 1좌는 낙산사 부근 도로 식당뒤에
철비가 있다.
여기 철비는 피해를 입은 백성을 위해 구휼을 한 정원기이라는 분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철비를 내린 특별한 경우이어서 적선의 표본이 되었다고 본다.
앞면: 嘉善大夫五衛將鄭元基不忘碑 가선대부 오위장 정원기 불망비
뒷면: 咸豊 十年 庚申 十二月 日 竪(함풍 십년 경신 십이월 일 수)
1860년 12월에 세움.
찬시: 倡義䘏灾 再施千貲
彤庭褒功 蒼生誦惠
재난으로 어려울 때 의로운 마음으로
천금의 재화를 두 번이나 베푸니
조정에서 공을 치하하고
모든 사람들이 은혜를 칭송하네
해설: 양양 낙산사 부근 도로의 식당 뒤에 있는 정원기의 철비로 철종 10년에 양양의 큰 산불로 인해 이재민 3000여 호가 발생하여 큰 피해를 입었는데 정원기와 성균관 진사로 있었던 그의 아들과 함께 백미 천석, 현금 천냥을 내어 구휼 하였다.
은혜를 입은 주민들이 상소를 하여 철종11년에 철비를 하사를 받고, 그 공적을 치하했다. 비와 비각은 강현면 석교리에 있었으나 후손인 정주화가 현재의 자리에 1972년8월1일에 옮겼다.
철비에 새겨진 찬시를 역문으로 옮겨 놓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철비 입구에 설명문과
철비에 명문을 석비에 옮겨 놓았는데 그 내용이 맞지 않아서 양양문화원과 군청에 문의 하였지만 자세한 내용은 얻지 못 하였고, 양양의 금석문에도 역문이 없어 필자 나름대로 譯을 하였다. 그리고 故 심충성의 블로그를 참조 하여 자료를 정리 하였다.
강원감영관첩에는 정원기 선행에 대하여 기록이 전하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강원감영관첩(江原監營關牒)○철종(哲宗)/ 철종(哲宗) 11년(1860) 8월 18일
비변사(備邊司)에서 상고(相考)하는 일. 이번에 계하(啓下)한 것임. 올해 8월 초10일에 대신(大臣)과 비변사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하여 입시(入侍)했을 때 우의정 조(趙 조두순(趙斗淳))가 아뢰기를, “방금 강원 감사 김(金 김시연(金始淵))의 장계를 보니 양양 부사(襄陽府使) 서경순(徐敬淳)의 첩정(牒呈)을 매거(枚擧)하여 말하기를, ‘본부의 재해를 입은 민호는 지금 다행히 집을 짓는 일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향인(鄕人) 가선 대부(嘉善大夫) 정원기(鄭元基)가 정조(正租) 5백 석을 의로운 마음으로 구급(救急)하여 그 뜻이 가상하니 특별히 보답하고 권장하는 은전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5백 포(包)나 되는 재물을 내 놓아 도왔으니 그 척토(瘠土)의 백성이 의리를 좇는 정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앞서의 품계가 이미 가선 대부이니 오위장(五衛將) 실함(實銜)으로 특별히 보답하고 권장하는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傳敎)하였다. 전교의 뜻을 잘 받들어 시행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함풍 10년 8월 18일]
적선을 하였기에 가선대부와 오위장 이라는 품계가 내려졌고 일반 백성의 철비는 드문 것이어서
잘 보존을 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다행히 철비는 비각 안에 보호 되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 더 좋은 방법은 박물관 내부로 가서
습기와 바람에 노출을 시키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