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명낙가사(燈明洛伽寺) 만월보전
주변
▲ 낙가사 일주문(一柱門)과 똥배 포대화상 |
괘방산(掛榜山,
339m)을 뒷배경으로 삼으며 넓게 자리한 주차장을 지나면 맞배지붕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선 그는 '괘방산 등명낙가사' 현판을 내밀며 이곳의 정체
를 알려주고 있는데, 문 앞에는 똥배가 매력적인 포대화상(布袋和尙) 2기가 나란히 자리하여
해맑은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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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생긴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비석의 알맹이인 비신(碑身)은 없고, 달랑 귀
부와 이수만 있다. 나중에 절 사적비(事蹟碑)
나 다른 용도로 쓰려고 미리 장만한 듯 싶은데
, 이수에는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반룡(이무기
)
2마리와 그들과 등진 용 2마리가 현란하게
새겨져 있다. (2006년에 왔을 때도 저렇게
있
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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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주문 부근 3층석탑
파리도 능히 미끄러질 정도의 매끄러운
하얀
피부의 탑으로 근래에 마련했다. |
▲ 이곳이 서울의 정동(正東)임을 알리는 나침판 석물
석물 피부에는 대한민국 정동이라고 쓰여있으나 정확히는 서울 동북쪽 끝자락
(도봉산, 수락산)의 정동쪽이다.
▲ 등명약수 주변
(돌탑과 관세음보살상, 등명감로약수 표석)
▲ 등명낙가사 등명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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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북쪽에는
이곳의 자연산 명물인 등명약수가 있다. 절에는 늘 샘터가 있기 마련이나 이
곳 약수는 좀 특별하여 무려
탄산 기운을 머금고 있다. 게다가 영산전을 짓고 500나한상이 봉
안된 이후에 발견되어 절에서는
아주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낙가사는 약수에 대한 자신감으로 국립보건원에 약수의 성분을 의뢰했는데, 철분과 황산염(黃
酸鹽), 알루미늄, 유리산도 성분이 나왔다. 이들로 인해 빈혈, 위장병, 신경통, 피부병, 부인
병에 좋다고 하며, 특히 목욕을 하면
피부병, 습진, 신경통에 아주 그만이라고 한다. 목욕까
지는 대놓고 못해도 무한 섭취는 가능하니 이곳에 왔다면 괘방산이 내린 특별한 선물인 이 약
수를 꼭 마셔보기 바란다. 나는
무려 3모금이나 마셨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도 건강을
생각
해야 될 나이에 이른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등명낙가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 똥배를 쑥 내민 포대화상
납작한 모습의 포대화상이 갈림길에 자리하여 자신의 배를 쓱쓱 만져줄 것을
주문한다. 그의 배를 만지고 소원을 빌면 그것이 이루어지고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여인들의 인기가 대단하다. |
괘방산 동쪽에 자리하여 동대해(東大海)를 바라보고 있는 등명낙가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
으로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말사(末寺)이다. 정식 이름은 '등명낙가사'이나 3자로 줄여서
'낙가사(洛伽寺)'라 부르기도 한다.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시절,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했다고 전
한다. 그는 절을 짓고 수다사(水多寺)라 이름 지었는데, 그 시절 강릉 지역은 고구려(高句麗,
고구리)의 공격에 늘 고통을 받고 있어서 부처의 힘으로 이를 막고자 절을 짓고 석탑 3기를
마련해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그가 이곳에 머물던 중, 꿈속에서 당나라 오대산(五臺山) 북대(北臺)에서 만났던 승려가 나타
나 '내일 저 큰 소나무 밑에서 꼭 봅시다!' 그랬다. 하여 다음날 그 자리에
갔더니 그곳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했다고 한다.
과연
자장이 창건했는지는 심히 회의적이나 그는 신라 불교의 1인자로 위엄을 날렸다가 원효(
元曉)에게 밀려나 변방 산골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가 말년을 보낸 곳을 강원도로 보고 있는
데, 그런 연유로 강원도에는 그가 창건했다고 우기는 절이 꽤 많다.
신라 후기에 병화(兵火)로 파괴된 것을 고려 초에 중창하여 등명사(燈明寺)라 했다. 12세기에
활동했던 문인 김극기(金克己)는 이곳을 찾아
'불법의 높은 길이 푸른 연봉에 둘러있고, 층대
위에 높은 사전(寺殿)은 겹겹이 공중에 솟아
있다. 그윽한 숲은 그늘을 만들어 여름을 맞이하고, 늦게 핀 꽃은 고운 빛을 머금으며 봄을
아름답게 하여 봉우리의 그림자에 걸렸고, 절에서
울리는 북소리는 골짜기에서 부는 바람을
전한다'고 했으며, 이승휴(李承休) 등 많은 문인들이 이곳에서 해돋이를 구경하거나 풍경을
찬양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강릉부 동쪽 30리에 이 절이 있다고 나와있는데, 풍
수지리적으로 이곳이 강릉도호부(江陵都護府)에서 암실(暗室)의 등화(燈火)와 같은 위치에 자
리해 있고, 여기서 공부하는 수학도(修學徒)가 3경에 산에 올라가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
가 빠르다고 해서 등명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절 부근에는 고려성터(高麗城址)가 있는데, 고려 때 등명사의 주요 물품들을 보관하고자
창고를 짓고 고려성을 쌓았다고 한다. (성 둘레는 1km) 이를 통해 절 규모가 따로 성곽(城郭)
까지 둘 정도로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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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된 석탑의 잔재들
지붕돌과 탑신 등이 헝클어진 모습으로 구석에 모여있다. 낙가사에는 만월보전
5층석탑 외에 함포 사격으로 파괴된 탑이 있는데, 탑에서 고색이 격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그 탑의 잔재들이 아닐까 싶다. |
그렇게 잘나갔던 등명사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 갑자기 풍비박산이 나 사라지고 만다. 그 시절
어느
왕이 안질(眼疾)이 유독 심해 점술가에게 이유를 물어보았는데, 그는 동해 정동(正東)의
큰 절에서 보내는 쌀물이 동해로 흘러가 동해 용왕(龍王)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하였다. 그 말
에 왕은 사람을 보내 원산(元山)에서부터 배편을 이용해 의심되는 절을 찾다가 등명사가 딱
정동쪽이므로 가차 없이 때려부셨다는 것이다.
또한 등명사가 서울 정동쪽에 있어 궁궐에서 받아야 될 일출을 늘 먼저 받으므로 정동쪽 등불
을 꺼야 조선에서 불교가 망한다는 주장에 따라 부셨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병화로 파괴되었
다는 설도 있다. (왜군은 동해바다를 장악하여 강원도와 함경도까지 치고 올라갔음)
이후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하다가 1956년에 이르러 경덕 영해당(景德 靈海堂)이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는 절터에 있던 10여 채의 민가를 사들여 극락전을 지었으며, 관세음보살이 머물던
보타낙가산의 이름과 등명사의 이름을 합쳐 등명낙가사라 하였다.
1977년 영산전을 짓고 청자오백나한상을 봉안했으며, 1982년에 청우(淸宇)가 극락전, 약사전,
삼성각, 범종각, 요사를 건립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극락보전과 영산전, 만월보전, 안심당, 요사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유
산으로는 5층석탑이 있다. 그는 자장이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다는 3개의 탑의 하나라고 하는
데, 현실은 고려
때 탑이며, 다른 탑은 함포사격으로 파괴되어 터만 남아있고, 다른 것은 바
다에 있는 수중탑으로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영산전에는 이곳의 자랑인 청자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일주문 북쪽에는 탄산 기운이
있는 등명약수가 있어 나그네들의 목마름을 아낌없이 해소해준다.
이제는 기억 조차 흐릿한
2006년 5월, 별 의미도 없는 것들과 이곳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는 만월보전 구역만 봤다. 영산전과 청자오백나한상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만
월보전 구역과 영산전 구역이 조금 떨어져 있어 잘 살피지 않으면 만월보전 구역이 이곳의 전
부인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다. 그러니 등잔 밑도 잘 살펴 영산전 구역도 꼭 살펴보기 바란다.
* 등명낙가사 소재지 :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산17 (괘방산길 16 ☎
033-
644-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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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명사지 5층석탑 - 강원도 유형문화유산 37호 |
만월보전 뜨락에는 옛
등명사의 흔적인 5층석탑이 고색의 기운을 드러내고 있다. 그를 중심으
로 만월보전와 요사(寮舍) 등의 건물이 사방(四方)에 자리하여 그를 둘러싼다.
그는 바닥돌과 2층 기단(基壇), 5층 탑신(塔身), 머리 장식으로 이루어진 잘생긴 탑으로 기단
의 맨 윗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석재 일부 모서리를 직각 대신 곡선으로 처리했다.
1층 탑신은 넓게 지어졌으나 2층부터 5층까지는 지붕돌을 따닥따닥 배치하여 탑신이 없는 것
처럼 보인다. 1층 탑신과 지붕돌은 별도의 돌로 지어졌지만 2층부터는 같은 돌로 만들었으며,
지붕돌 밑면 받침과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져 있다. 그리고 1층 탑신에는 감실(龕室)과 자물
쇠 조각을 두었고, 탑 머리장식에는 지붕 모양의 노반과 연꽃잎이 하늘로 향한 앙련(仰蓮)이
있으며, 탑 앞에는 세월을 검게 탄 배례석(拜禮石)이 놓여져
있다.
지붕돌 귀퉁이와 탑 일부에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있으나 대체로 건강 상태는
양
호하다. 절을 세운 자장이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고자 세웠다고 하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
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 외에 2기의 탑이 더 있다고 하나 1기는 함포사격으로 파괴되어 잔해
만 남아있고, 수중탑이라 불리는 다른 탑은 바다가 가져가버려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탑은 등명낙가사 경내에 있으나 '등명낙가사 5층석탑'이라 하지 않고, '등명사지5층석탑'이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등명낙가사가 옛
등명사의 뒤를 이었건만 이름이 현
실과 좀 따로 노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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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
▲ 남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
▲ 만월보전(滿月寶殿)과 등명사지5층석탑
만월보전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의 거처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 만월보전 약사여래삼존상
왼손에 약합을 쥐어든 약사여래 좌우로 고운 자태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들만의 물건과 자세를 취하며 자리해 있다.
▲ 만월보전 구석에 자리한 조그만 존재들
붉은 피부의 관세음보살상과 하얀 피부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검은
피부의 불상 머리, 관세음보살좌상 등
▲ 만월보전 구역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경내에서 바다까지 거의 1리 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