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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밤새 눈이 내려서 그래서 저 서울 쪽에서 오는 신도님들은 참여를 못 하셨습니다 한편으론 섭섭합니다만 오늘 다 오셨더라면 또 저 밖에서도 많이 좁아서 밖에서 떨고 계실것인데, 그런 면으로 봐서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부처님 법도 그러려니와 이른바 종교일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그 마음이 편안하다. 우리 마음이 그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되어서 마음이 편안치 못하면 종교의 그런 가치가 없습니다. 특히 부처님 가르침은 이른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 마음을 편안히 하는 그런 법문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를 믿는 분들이 마음이 편안치 않으면 공부를 지금 잘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이 편안할 것인가. 더 어려운 말로 하면 이른바 아집我執 법집法執이라, '나'라는 집착이 있고, 또는 내것이라는 집착이 있고 또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가 (상대적으로) 실제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집착하는 것이 법집法執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라는 존재에 대해서 집착이 없고(아집我執) 또 모든 대상적인 존재에 대해서 집착이 없어야(법집法執) 그래야 아집 법집을 않는 것이 됩니다.
우리 고민이라 하는 것은 내내야 다른 데서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아집과 법집에서 우리 불안스럽고 또는 고민이 있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집, 법집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아까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안심이 된다 말입니다.
그 달마스님께서 2조 혜가스님에게 맨 처음에 하신 법문도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달마스님도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즉, 그 마음만 딱 지적해서 마음을 깨닫게 하는 간단 명석한 법문이다 이렇게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달마스님은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자교오종藉敎悟宗이라, 잘 기억해 두시길 바랍니다. 자교오종藉敎悟宗이라는 것은 빌 자藉자, 교리 교敎자 그 교리를 빌려서 오종이라, 깨달을 오悟자, 종교 종宗자 그 교敎를 빌려서 우리가 종지宗旨를 깨닫는다 말입니다. (자교오종藉敎悟宗이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잘 모르는 사람들은 달마스님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 문자는 소용 없이 그냥 마음만 닦으라고 했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만 그 달마스님 말씀이 아까 말씀마따나 자교오종藉敎悟宗이라 교敎를 빌려서 종지宗旨를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지금 달마 어록이 돈황문서로부터 나와있습니다. 그 전에는 달마스님 어록이 너무나 없어놔서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구구한 말이 있었지만 1910년 경에 이른바 돈황敦煌문서, 돈황에서 우리 불교의 소중한 문헌이 많이 나왔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가운데 참선의 갈래라던가, 또는 초기 참선의 역사가 다 밝혀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런데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달마스님도 그 단순히 그냥 문자를 전이 다 없애버리고서 마음만 닦는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순서대로, 조금도 무리없이, 교敎와 선禪과 참선과 그런 교리와 절대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선교일치禪敎一致)
우리 중생들은 자꾸만 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 성자들은 본래 근본자리를 아는 분들은 가를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우선 내가 네가 있고 미운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고 그럼 벌써 마음도 불안스럽고 그만치 남하고 화해도 못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종교도 다종교사회라, 기독교가 있고 이슬람교가 있고 힌두교가 있고 이렇게 많이 있는데, 꼭 자기 종교만 옳다. 이래버리면 그것도 하나의 그야말로 법집이 됩니다. 집착이 되어서 이른바 이렇게 갈라놓고 보면 자기 마음도 괴롭고 남하고 화해도 못한다 말입니다.
현대란 사회라는 것은 그야말로 이른바 지구촌 시대 아닙니까. 정보화시대라는 것은 지구과학적으로 그야말로 한 집안 같단 말입니다 이런 때 있어서는 그 다종교 다원적인 문화, 이것과 저것과의 문제 그런 문제에 가서 갈등없이 화해가 되어야지, 그렇지 못하면은 그때는 마찰과 투쟁과 분열과 그런 불안한 가운데서 우리가 항시 괴롭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위대한 도인들 분상에서는 절대로 가르는(나누는) 법이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그리스, 그리스는 그야말로 참 서구 문명을 위해서 문명의 시초같은 그런 훌륭한 업적을 남긴 그런 곳입니다. 이른바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보다도 한 80년 전 더 앞서서 나오신 분들이 있어요. 그분들이 이른바 자연철학자들인데, 그분들에 있어서도 그 위대한 분들은 절대로 가르는 법이 없단 말입니다.
왜 가르는 법이 없는 것인가. 모든 존재의 근본본체根本本體, 근본본체를 깨달아 버린다 말입니다. 가령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BC 540?~BC 480?)라던가 또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os BC544~501) 라던가 그런 분들이 남겨놓은 가르침을 보면, 모두가 다 하나의 도리 하나의 로고스logos, 하나의 진리로 해서 통합을 시켰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인도의 가르침, 인도 철학 옛날은 석가모니 부처님 나오실 그 당시는 바라문교이지만, 지금은 힌두교인데 힌도교도 지금도 굉장히 성(융성)합니다. 그런데 힌두교의 본 뜻이 무엇인가. 힌두교의 본 뜻은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라, 모두가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의 진리(하나의 도리)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하나의 진리란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니깐, 우리 중생들은 상相만 보니깐 둘이요 셋이요. 내가 네가 있고, 밉고 곱고(좋아하고) 한다 말입니다. 그러나 근본성품자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원래로 하나인 것입니다.
다행히 현대물리학에서는 하나란 도리를 지금 알고 있어요. 에너지 일원론一元論이라. 우주란 것은 모두가 에너지뿐이란 말입니다. 그런 도리를 지금 물리학에서는 압니다. 아나, 그네들이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그 에너지의 정체가 무엇인가. 모든 존재를 구성한 에너지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걸 모른다 말입니다. 모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왜 모를 수 밖에는 없는가 하면 자연과학적인 실험이나 실측으로 해서는 모양이 없는 것은 알 수가 없어요.
어려운 말로 해서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모양이 있는 것은 실험도 하고 분석도 하고 하지만, 모양이 없는 그 생명 자체, 불교에서 말하는 이른바 영원적인 법신불法身佛이라던가, 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 하나님이라던가, 또는 우리 마음이라던가. 우리 마음이 지금 보입니까. 따라서 우리 마음이라던가, 또는 신神이나, 법신불法身佛이나 그런 자리는 증명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이른바 마음이 편안하게 안심이 된다 말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자성自性이라, 스스로 자自자, 성품 성性자 자성이라. 자성이란 말을 더 구체적으로 하면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자성청정심이라. 자성이란 말은 뜻을 풀이해서 말하면 모든 것의 성품性品을 말합니다.
우리 사람 성품이나, 다른 동물들의 성품이나, 이런 식물들의 성품이나 또는 무생물의 성품이나, 또는 하나의 그 에너지의 성품이나 어떠한 것이나 본래적인, 근원적인 실상자리 근원적인 본래의 자리가 이것이 자성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자성自性이란 말을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우리 불교 입장에서는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구체화 시키면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 이렇게 말한단 말입니다. 그 자리는 진리의 자리이니깐 그러니깐 진여眞如라. 그런 생명적으로 말하면 자성이고, 불성인 것이고, 또 우주의 합리적인 이치로 말하면 그때는 그것이 이른바 진여眞如란 말입니다.
저는 육조단경을 근래에 와서, 나이도 많이 먹었으니깐 주로 인제 많이 봅니다. 많이 보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육조단경은 참선하는 사람의 교과서 같아요. 달마선達摩禪의 모든 선법禪法이 그 속에 가서 다 이렇게 포괄적으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육조단경에서 보면은 자성自性 (불성佛性)이란 말씀이 100군데가 넘어요. 조그마한 경 하나에 가서 자성이란 그 술어가 100번 넘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성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바로 부처 불佛자, 성품 성性자 불성이란 말입니다. 얼마나 육조스님께서 그 진여불성자리를 우리한테 역설하고자 했으면 조그마한 경에다가 100번 이상 말씀을 할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중생들이 그 자리를 모르니깐 우선 범부인 것이고 그 자리를 깨달으면 그때는 바로 부처입니다.
오늘은 금타金陀대화상의 열반재일입니다. 금타대화상(1898~1948)은 1898년 윤閏 3월 29일에 탄생하셨습니다. 그래서 1948년 만 50세로 입적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제 저희들이 미흡해서 그 어른께서 해 놓으신 여러가지 귀중한 법설들을 빛내지를 못하고 구현을 시키지 못했어요. 그러나 금타스님께서 하신 법문 내용이 어떤 것인고 하면, 이것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육조단경에서 하신 말씀하고 똑같습니다.
처음에는 전적으로 같을 수는 없지만은 내용 그 정수精髓는 똑같습니다. 어떠한 점이 같은고 하면 육조단경도 그 단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가? 그러면 그 단경壇經속에는 여러 가지 훌륭한 말씀이 많이 있고, 아까도 말씀마따나 자성이란 그런 말씀이 백번이상 되풀이해서 말씀하셨는데, 그런 가운데도 그 의미적으로 핵심이 무엇인고 하면 그 단경 가운데 가서 참회품懺悔品이라는 품이 있어요.
무슨 경이나 무슨 품 무슨 품 다 장절章節이 있지 않습니까. 헌데 그 참회품이란 품을 보면 그 단경의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고 본인도 하시면서, 내가 지금 여러분들한테 이것은 육조스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지금 여러분들도 하여금 일체삼신자성불을 깨닫게 해서 스스로 자기 자성을 보고 스스로 자기 불성을 보고 깨닫게 하리라. 이런 대문이란 말입니다. (귀의일체삼신자성불歸依一體三身自性佛)
그러면서 그런 말씀을, 그 혜능대사 육조스님이 혜능대사입니다. 혜능대사께서, '이 혜능의 입을 따라서 여러분들도 똑같이 나를 따라서 다 세번씩 되풀이해서 부릅십시오.' 이렇게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遮那佛에 귀의하고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에 귀의하고,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에 귀의하고, 이렇게 세번씩 되풀이해서, 이 삼신 이것이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이 세 부처님 이것이 하나의 부처님인데, 그 부처님이 바로 무엇인고 하면 우리마음의 성품입니다. 우리마음의 성품. 우리 중생들이 자기 마음(자성,불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몸뚱이사 우리가 보이니깐 (인정) 하지만 마음은 지금 안 보이니깐 무엇인지 모른다 말입니다. 마음을 꼭 우리 몸뚱이 안에 들어있는 무슨 어느 측장의(잴 수 있는) 하나의 생명으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 동서철학의 위대한 성인들께서 여러 가지로 이론체계를 세우고 하신 그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 '다 마음뿐입니다'. 마음이 무엇인가뿐입니다. 어떻게 마음을 닦을 것인가. 성인들은 마음을 닦아서 마음을 깨달은 분이고, 우리 중생들은 마음을 닦지 못 해서 그대로 분별시비하는 것이 우리 중생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마따나 금타대화상께서 하신 그런 법문 내용이 어떤 점에서 육조혜능스님 법문하고 똑같다고 할 것인가. 그것은 방금 제가 육조혜능스님 참회품에서 삼신일불三身一佛 법신 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삼신에 귀의하라는 그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헌데 금타대화상의 그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 보리방편문도 약간 표현은 다르습니다. 표현이 더 쉽고 문장적으로 돼 있을뿐인 것이지, 내용은 똑같습니다.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자리인데, 마음 성품인데, 즉 마음 자성인데, 자성自性에 먼저 귀의해야 그래야 인제 참다운 불교인이 됩니다.
우리가 가령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아, 부처님이 저 밖에 계신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방편염불입니다. 참다운 염불이 못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본래로 부처니깐 오랫동안 하면 업장이 녹아져서 하나가 되긴 되겠지요. 그러나 참다운 염불은 내 마음 자성미타自性彌陀라, 내 마음의 자비가 바로 관세음보살이고, 내 마음의 원력이 그때는 보현보살이고, 내 마음의 지혜가 문수보살이고, 또 내 마음 자체가 온전히 그때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때는 참말로 옳은 염불인 동시에 그러면 염불참선念佛參禪이라, 이른바 염불선念佛禪이란 말입니다.
그 반대로 마음이 내 밖에 어디가서 있다가 우리가 기도를 모시고 부처님을 생각하면 우리한테 와서 그 가피를 주신다. 이러면 그때는 그것이 방편염불입니다. 방편염불은 되어도 이른바 참다운 염불이 되지를 못합니다. 이른바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 참 염불은 방금 말씀마따나 내 마음자리가 바로 부처인 것을 확실히 알고서 그래가지고서 '나'와 내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닌 것을 깊이 느끼면서 우리가 염불을 해야 참다운 염불이고, 염불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다 그러면 알듯말듯 하지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나는 지금 아는 것도 별 것도 없고, 내가 항시 이따금은 기분 사나우면 또 성도 내고 그러는 것이 어떻게 부처가 될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모양(상相)에 집착해서 그럽니다. 모양에. 모양은 허망한 것인데, 이 모양이라는 것은 자기 몸뚱이를 위시해서 이 삼천대천세계 三千大天世界 모든 모양이 사실은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저는 법문 할 때마다 말씀을 합니다. 그런 것은 무엇인고 하면, 제 스스로도 공부할려면 아직 멀었고, 여러분도 그 모양이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해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여러분들이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러니깐 저도 재인식을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한테도 다시 깊이 인식을 시키기 위해서 제가 그때그때 어느 때나 법문을 할 때는 그 말씀을 합니다.
모양은 이것은 꿈이나 그림자나 허깨비 같이 사실이 아닙니다. 물 속에 비친 달 그림자가 그것이 사실입니까. 어린애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물 속에 달이 비치면 꼭 달이 물 속에 있는 것 같이 생각이 되겠지요.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들은 참말로 내가 있고, 또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대로 우리 중생이 느끼는 대로 지금 대상적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안단 말입니다. 그러면 불법佛法의 진수眞髓를 모릅니다. 불법을 모른다 말입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은 모두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환상인 것입니다. 어째 그러는 것인가, 어째 그러는 것인가 하면 용수보살께서도 말씀했듯이 모든 법이 인연생因緣生이라,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일 뿐이란 말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이 모양 있는 존재라는 것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툽니다. 모양을 나투어가지고서 이것이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 찰나 찰나 변화해서 마지 않는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변화하는 것을 못 느낍니다. 그러니깐 있다고 생각한다 말입니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항시 선지식도 말씀하시고, 여러분도 다 (반야심경을) 외이면서 공부 안 하십니까.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오온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우리 허망한 관념이나 모양이 이것이 본래 자취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없는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우리가 착각할 뿐이란 말입니다.
성자가 본다고 할 때는 당체當體가 즉공卽空이라, 모두가 다 훤히 비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육조혜능스님께서 깨달은 게송 가운데도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也塵埃리요. 본래 아무런 그런 물질이나 분명히 없단 말입니다. 오직 천지우주는 사실은 마음뿐입니다.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은 불성佛性입니다. 따라서 우주라는 것은 모두가 다 부처뿐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다른 것이 없이 어느 것도 모두가 다 바로 보면 다 진여불성眞如佛性뿐이다. 이렇게 돼야 우리 마음이 비로소 편안합니다. 근본성품을 여의지 않는다 말입니다. 사실대로 보니깐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사실대로 생각을 못 하고 사실대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없는 것 보고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생명자체는 그때는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끝도 갓도 없이 미래에도 또는 과거에도 항시 생명자체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 이라, 더러울 것도 없고, 더럽혀 지지도 않고, 원래 더렵혀 지지도 않았으니, 새삼스럽게 정화를 시킬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가 오직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런 자리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의 철인들 헤라크레이토스나 또는 파르메니데스나 또는 소크라테스나 말입니다. 인도의 그런 무수한 성인들이라던가 모두가 다 그런 도리를 말했단 말입니다.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이라, 모두 하나의 도리를 말했습니다. 근데 그 도리는 말로 해서는 우리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체험해서 진리를 증證해야 할 것인데, 진리를 증명證明하기 위해서 이른바 기도를 모시고 참선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이른바 선정禪定에 딱 들어간단 말입니다. 선정에 들어가서 우리 나쁜 습관성, 나쁜 버릇이 녹아나야 정식으로 체험이 되고, 그때야 비로소 증오證悟라, 우리가 증명하고 깨달아 버린다 말입니다.
제가 요즈음 어느 박사분이 논문을 저한테 보내와서 봤습니다만, 그 박사분은 미국까지 가서 공부를 하고, 지금 현재 대학교수로 있는 분입니다. 이 가운데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학자분들은 자칫 하면 이론적으로 알고, 이론적으로 아는 걸로 해서 이른바 이성적으로 아는 걸로 다 알았단 한단 말입니다. 그래 버리면 정말로 참 큰 손해입니다. 이른바 증상만增上慢이라, 증상만이라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 하고, 깨달았다고 한단 말입니다.
참말로 아는 것은 그렇게 해서 이론적으로 이성판단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업장業障이 녹아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업장業障이라는 것은 금생에도 우리가 많이짓고 또 과거세부터서 내려오는 그 카르마Karma, 이런 우리 업이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녹아놔버려야 직관적으로 우주가 훤히 트인 우주가 무량광명無量光明으로 빛나는 영원적인 이른바 진여불성의 생명으로 화化한다 말입니다.
그 중국의 송나라 때 위대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장로자각종색長蘆慈覺宗賾, 910~1092?)이 선원청규禪院淸規라, 이른바 선원에서 지켜야 될 청규를 말씀해서 지금까지도 그 청규를 지키고 있어요. 그래서 공부한 사람들은 압니다만, 중국 송나라 때 분인데 그이가 장로종색이라는 분이어요.
그분이 거기에서 아주 역점을 두고 한 말씀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단의금구성언但依金口聖言이라, 다만 단但자, 의지할 의依자 단의금구성언但依金口聖言이라, 쇠 금金자, 입 구口자, 성인 성聖자, 말씀 언言자 말입니다. 오직 성자의 말만 따를뿐이지, 단의금구성언이라, 오직 성인들의 말만 따를뿐이지,
성인들이라는 것은 아까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생과 모든 존재의 근본을 체험을 다 하신 분들입니다. 석가요, 예수요, 공자요 그런 분들은 모두가 다 성인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어떤 방법으로 했든지 간에 우주의 생명자리 진여불성眞如佛性을 깨달은 분들입니다.
그래서 장로종색이라는 그분도 선원청규에서 단의금구성언이라, 다만 우리가 공부할때에 깨달은 분들의 말씀이 이른바 금구성언金口聖言입니다. 쇠 금金자, 입 구口자, 성인 성聖자, 말씀 언言자 그래서 우리 후래인後來人들이 그 깨달은 분들의 금구성언에만 의지할 것이지, 막순용류망설莫順庸流妄說이라, 아니 불不자 의지할 의依자 보통 그 범부 용렬한 사람들의 망설을 듣지 말라는 것이어요.
사실은 깨닫지 않은 사람들의 말씀은 대체로 우리가 절대로 옳다고 시인을 할 수가 없습니다. 체험을 못 했으니깐 말입니다. 제아무리 현재 지금 난다 긴다 하고 별 소리를 다해도 정말로 진여불성을 깨달은 성자가 아니면 확실한 것을 아직 보지를 못했으니깐 체험을 못했으니깐 꼭 바르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고비(주제)에 관해서는 엉뚱한 말도 한단 말입니다. 즉 그런 사람들은 결국은 아집我執을 못 털었습니다. 자기라는 하나의 아상我相을 못 털었단 말입니다. 또 그분들 가르침이 제아무리 그럴 듯 해도 해탈을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들의 카르마Karma 업으로부터서 해탈하는 가르침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은 이 현대같이 정보가 얽히고 설키고 또 다종교 다원화 시대 아닙니까. 얼마나 복잡합니까. 따라서 이런 복잡할 때 일수록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성자의 가르침을 의지할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자기가 이론적으로 좀 알아가지고서 자기 개별적인 분별시비를 한단던가 또는 이상한 또 다른 명상법을 한단던가. 이런 것은 결국은 자기 생명의 손해입니다. 자기도 손해고 남한테도 손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만으로도 우리 생명을 몇 개를 바쳐도 그때는 너무나 인생이 짧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제일 재미도 있고, 우리한테 제일 유익하고 말입니다. 또 우리한테 모든 가호를 모든 공덕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천지우주라는 것은 우주자체가 영원히 진리 그대로 움직이고 있어요.
이른바 생철학生哲學인, 생철학자인 니체(1844~1900) 니체도 천재 아닙니까. 니체가 영겁회귀永劫回歸라는 그 사상을 알프스산에서 명상을 3년해가지고 깨달았다고 그래요. 영겁회귀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 이 우주라는 것이 형체가 이루어졌다가, 또 중생이 살다가 또 파괴가 되었다가 결국은 텅텅비어서 제로zero가 되어버린다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께서는 벌써 2,500년전 이상에 그 우주라는 것이라는 것이 이른바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성겁成劫에서 형체가 이루어지고, 또 모든 존재가 살고 말입니다. 다시 그것이 엔트로피entropy가 증장이 되어서 파괴가 되고 말입니다. 드디어는 텅텅비어버리고. 또 다시 우주가 이루어지고, 어떻게 해서 우주가 이루어지는가? 이것은 파괴가 되고 텅텅 비었다 하더라도 물질이 없는 것이지, 생명자체는 그때는 영생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성자리는 그때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 아닙니까. 우리가 닦아가지고 닦은 뒤에 불생불멸이 아니라 본래로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본래로 제법공諸法空인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할 때는 꼭 여러분들께서 본래로, 본래本來로 라는 것을 깊이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닦은 다음에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우리가 본래 생긴대로 바로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 본래 부처라는 것을 믿어야 그래야 참다운 대승大乘입니다. 본래 부처인 것을 안 믿으면 그때는 대승이 아닌 것입니다. 법화경法華經이나 화엄경華嚴經이나 모두가 그런 도리를 말씀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자의 금구성언에 의지해야 그래야 하루 닦으면 닦은만치 해탈로 유도가 되는 것이지, 범부들이 재밌다고 그래서 해 놓은 것을 따르다 보면 그때는 그것이 해탈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범부의 말이기 때문에, 다소의 그 유루법有漏法적인, 유한적인 공덕은 될 망정 우리 인간을 참말로 안심입명하는 그런 길로 인도를 못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범부분상에서는 자꾸만 갈라서 교敎와 선禪도 따로 있고, 또는 염불念佛과 참선參禪도 따로 있고 자꾸만 이렇게 갈라선다 말입니다.
우리 한국불교도 지금 종파 수가 50개나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름도 다 모릅니다만, 그렇게 갈라설 필요가 뭣이 있는 것인가. 기독교인들도 류영모(1890~1981)교수나 함석헌(1901~1989)씨나 그런 분들은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라, 그 하나의 종파가 생겨놓으면 고놈들 지킬려고 그래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의 종파宗派가 종정이 있어야 되고, 총무원장이 있어야 되고 또 정회원이 있어야 되고, 또 원로회원이 있어야 되고, 벌써 그 감투만 해도 몇십 개 되어버립니다. 50종파나 있다고 생각할 때에 감투만 쓴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오직하니 아까 말씀마따나 함석헌씨나 류영모씨나 그런 분들이 (무교회주의라) 기독교는 불교보다 더 갈래수가 더 많습니다. 그러니깐 갖다가 무교회주의라, 아예 그냥 교회를 부정한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절대로 진리가 둘이 아닙니다. 그 옛날 그리스철학도 그러고, 로마철학도 그러고 현대 인도철학도 그러고 말입니다. 다행히 현대물리학도 결국은 우주를 하나의 에너지로 이렇게 봅니다. 이런 때 있어서 우리가 무슨 필요로 이렇게 저렇게 나누어서 볼 것인가 그러나 우리 중생이 지금 보이는 견해는, 그 대상이 우리가 보이니깐 미운 사람 밉게 보이고, 고운 사람 곱게 보이니깐 우선 분별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 중생의 하나의 억측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참말로 바라보고 있지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중생들은 꼭 부처님 말씀, 성자의 말씀을 우리가 표준으로 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즉 말하자면 염불의 교과서 같은 것이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또 21대 세친世親조사가 내 놓으신 이른바 정토론淨土論, 그런 정도가 염불의 그것이 귀감이어요. 표준이어요. 그런 경전을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은 훨썩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기본적인 염불경전을 안 본 사람들은 자꾸만 상에 걸려요. 결국은 자기 주관을 보태가지고서 이상한 쪽으로 이끌어가고 말입니다
그러니깐 참선하는 사람들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참선의 교과서 같은 육조단경을 그래도 하여튼 10번 남짓은 봐야 됩니다. 그런 경전은 사실은 원리를 알고 보면 굉장히 쉽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군더더기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꼭 진리 그대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염불에 관해서도 정토삼부경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가 이런 법문이 있어요.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여래는 내내야 부처 아닙니까. (불설관무량수경 상관像觀, 제불여래 시법계신諸佛如來 是法界身)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부처라는 것은 이 법계法界를 몸으로 한다 말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이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우주를 몸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 가운데나 우리 몸 가운데나 어디에나 부처는 다 충만해 있어요.
그러고 부처 기운은, 부처님의 그 법신法身 기운은 물질이 아닙니다. 조그마한 물방울에 들어 있는 부처 기운이나 또는 전자나 양성자나 그런 소립자에 들어 있는 부처 기운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 가운데 일체가 들어있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들어있고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절대로 어렵게 생각 말으십시오. 부처님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시고 절대로 우리 중생을 속여서 하신 말씀이 조금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계행戒行을 지키고, 계행은 윤리도덕의 행동 아닙니까. 계행이 바르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선정禪定에 못 들어갑니다. 이른바 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이라. 계율이 발라야 그래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서 우리 마음의 근본번뇌가 녹아놔버려야 참다운 우리 자성自性, 불성佛性을 훤히 깨달아 버린다 말입니다.
경전의 말씀은 어디에나 똑같습니다. 화엄경, 법화경, 금감경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금타스님께서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 우리 자성 우리 불성 가운데 들어있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삼신三身 우리한테 들어있는 불성은 단순히 그냥 단순한 것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는 우주를 다 통괄하는 그런 법신인 경계도 있는 것이고, 또는 모든 자비, 지혜, 능력 능력이 다 들어있는 결국은 보신적인 그런 능력도 있는 것이고, 그런가 하면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이라, 산이 되고 다른 별이 되고 금성이 되고 토성이 되고 또 일체 존재를 일으키는 화신이 있단 말입니다.
부처가 밖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가 바로 부처덩어리입니다. 런데 우주의 끝도 갓도 없이 영원적인 자리 영원적인 생명 자체는 법신인 것이고, 그 가운데 들어 있는 모든 가능성은 보신인 것이고, 천지만유로 이루어지는 이런 존재는 모두가 다 화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셋(법신,보신,화신)이 셋이 아니라 하나의 몸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입니다.
그래서 육조혜능스님께서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자리를 먼저 믿으라 했단 말입니다. 그 자리를. 여러분들 내 입 따라서 그 자리를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입 따라서 3번 되풀이 하십시오. 이랬단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법문은 모두가 다 거기에 따르는 법문입니다. 그런데 금타스님께서 하신 보리방편문菩提方便文이 간단한 것 같지만은 그 삼신일불三身一佛이 다 들어있습니다. 더 쉽게 문장도 다듬어서 되어있단 말입니다.
그러고 또 육조혜능스님이나 사조 도신스님이나 달마 때부터서 육조혜능스님까지 사조 도신스님이 또 법문을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다른 2조(혜가스님)나 5조 홍인스님 그런 분들은 법문이 많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달마스님 다음에는 4조 도신스님이 아주 고구정녕으로 법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라는 그런 경(능가경)에가 있습니다만 그 다음에는 6조 혜능스님께서 법문을 하셨는데, 적어도 6조 스님때 까지는 순수한 참선입니다. 이걸 보고 전문적인 술어로 하면 순선純禪 그래요. 순선이라, 순수한 선이란 말입니다.
화두話頭를 든다, 또 그냥 화두 없이 잠자코 묵조黙照를 한다 그런 법문도 다 훌륭한 법문이지만, 그런 법문은 6조 혜능스님 뒤에 송나라 때에 그런 법문이 나왔단 말입니다. 달마스님 때 그런 화두가 있고 뭣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6조 혜능스님 때는 그것이 없어요. 당나라 때는 그것이 없어요. 쭉 내려와서 송나라 때 각 종파로 분열되면서 화두가 생기고 선도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 뭐다 서로 피차 옥신각신 한단 말입니다.
당나라 말엽까지는 모두가 여래선뿐입니다. 여래선 가운데가서 모든 선이 거기에 다 들어있어요. 그 (당나라) 말엽을 지나서 송나라 초기에 이르러서 그때 그때 그 우월논쟁이라, 서로 옳다는 그런 논쟁 때문에 여래선 보다 소위 조사선이 높다 그래서 그런 부질없는 논쟁이 되었는데, 일본서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 도원선사(道元, 1200~1253) 도원선사 그분은 그것을 굉장히 신랄하게 비판을 했어요.
무슨 필요로 또 여래선을 왜 달마선에 놓을 것인가. 여래선 가운데 다 들어있는데 무슨 조사선을 내어가지고서 부처가 한 여래선은 별것도 아닌 것이고, 조사祖師가 한 조사선이 높다 이와 같이 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다 중생들의 하열된 근기로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정말로 참 통탄스럽다고 일본 도원선사가 그런 말씀을 했어요.
그러니깐 우리는 될수록 가를 필요가 아무것도 없어요. 가를 필요가 없는 자리에 갈려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6조 혜능스님한테 우리가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까지가 순수한 선이란 말입니다. 그 순수한 선을 금타스님께서 그대로 이른바 계승을 했습니다. 저는 제 은사스님이라고 제가 조금도 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도 진리를 구하는 사람이 하긴 뭐 은사가 그른 것을 옳다고 하고 옳은 것을 그른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앞으로 두고두고 공부를 해 보시면 충분히 긍정을 할 것입니다.
어떤 점인가 하면 아까도 말씀마따나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이란 그 말씀과 또 한가지 중요한 말은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육조단경에서도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가 5군데나 있어요, 5군데가. 그러고 모든 경이 부촉품付囑品이 가장 중요한 결론 같은 것인데 그 부촉품에 가서 육조스님께서 그대들이 만약 여래如來의 일체종지 일체종지一切種智는 모든 부처님의 지혜가 일체종지입니다. (만약 여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을려고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증證할 지니라. 이런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고 4조 도신스님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 법문도 그와 비슷한 법문입니다.
천지우주가 하나의 진리거니, 천지우주를 하나의 진리라고 보면은 그것이 일상삼매一相三昧입니다. 상이라는 것은 형상 상相 아닙니까. 우리 중생들은 잘 보지 못해서 여러 가지로 구분해 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진여불성 하나란 말입니다. 그래서 천지우주를 하나의 실상으로 보는 하나의 중도실상中道實相으로 보는 이른바 그런 삼매가 일상삼매입니다. 일행삼매一行三昧는 무엇인가. 일행삼매는 한 일一자, 행할 행行자.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진리다 그런 도리를 그때는 끊임없이 상속적으로 앞 생각 뒤생각에 틈이 없이 그 생각을 이어간다 말입니다. 그 대승불교의 할아버지인 마명대사馬鳴大師도 그와 비슷한 법문이 있고 용수보살龍樹菩薩도 마찬가지이고,
사실 대승불교란 것은 다 똑같습니다. 선禪 가운데 교敎가 있고 교 가운데 선이 있고 따라서 다 필요해요 모두가 다. 선禪만 필요하고 교敎는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다 필요한 것입니다. 또는 자력自力과 타력他力도 그래요 그것이. 타력도 필요하고, 자력도 필요합니다. 다만 어디다가 역점을 두는가 그 차이뿐인 것이지, 참선이라고 그래서 자력만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염불이라고 그래서 타력만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다만 어느 것에다가 중점을 두는가 그 역점만 차이만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가르기(나누기) 좋아해서 꼭 하여튼 가르고 본다 말입니다. 가르고 말입니다.
이 다종교사회는 아까 허두에 말씀한 바와 같이 다른 사람하고 화합도 못하고 다른 종교하고 화합을 못합니다. 기독교나 이슬람이 모두가 방법은 좀 달라도 우리 부처님 가르침 같이 대승적인 그런 가르침은 온전히 없다 하더라도, 그래도 다 진리를 닦을려고 애를 씁니다. 왜 그런고 하면 사람 마음자체가 영원한 진리를 다 추구합니다. 로마 때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 때나 말입니다. 그런 이집트나. 모두가 다 인간존재는 다 영원한 해탈解脫의 길을 지향하고 있어요. 다 훌륭한 스님을 못 만나고, 복이 적어서 훌륭한 가르침을 미처 못 만나서 그런 것이지, 모두가 다 영원한 해탈의 길로 갈려고 애 쓰는 것이고, 또, 어느 존재나 종당에 가서는 다 해탈을 하는 것입니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 보면 훌륭한 이런 법문이 있어요.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기 때문에,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누구나 다 부처가 된다 말입니다.
그러고 또 금타대화상 자랑을 한가지만 또.. 여러분들이 좀 지루하시겠지만 중요한 것이니깐 한가지만 더 말씀을 드려야 되겠지요 그 과거 위대한 사람들은 보통 법문도 하지만 꼭 우주론적인 천문天文 이야기를 합니다. 현대란 사회가 과학만능시대 아닙니까 마땅히 위대한 그런 도인이라고 그러면 우리 중생들이 지금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이 이 자연자체는 무엇인가 또 물질의 자체는 무엇인가, 또는 원자는 무엇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그때는 응당 의심을 품습니다. 무엇인가 잘 모르면 그때는 항시 마음이 불안스러우니깐 말입니다.
그래서 금타대화상께서도 그런 문제를 풀었단 말입니다. 자연과학이 가장 중요시 하는 우주의 본질 문제를 풀었단 말입니다. (금강심론金剛心論 제4편 우주의 본질과 형량) 그냥 푼 것이 아니라 정확한 비단 그 수치로 해서 태양계가 이루어져서 몇백억? 만에 이것이 파괴가 되고 또는 지금 달에는 어떻게 되어있고, 또는 수성은 가 가지고 무슨 중생이 살고 있고, 이런 것도 모두가 다 가르키고 있어요. 이 시대는 그게 꼭 필요한 시대입니다. 과학자나 누구나 그런 문제를 지금 문제시 하니깐 말입니다.
전자는 어떻게서 나오고, 또 양성자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이런 것도 현대물리학자는 전자나 양자나 그런 것의 현상은 알지만, 그런 것이 어떻게 존재가 되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우리 불교의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이런 것을 금타스님께서는 정확한 과학과 수학적인 논리로 해서 풀어놨어요. 그러니깐 어느 물리학자 말마따나 노벨 물리학상이 몇개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인데, 따라서 그와 같이 그러한 위대한 분이 우리하고 같은 시대에 살다가 가셨습니다.
그 양반 가신지가 올해로 쉰셋돌 됩니다. 53년 됩니다. 금타대화상께서 살아계시면은 올해 103세 입니다. 장수하실 분 같으면 지금까지도 살아서 호령을 하실 것인데, 빨리 가셨습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그분의 업이 그래도 남아있으니깐 말입니다. 두고두고 우리 불교의 자랑인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시대의 있어서 이 세상이 정말로 화해하고, 종교가 화해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모두로 금타스님 가르침을 귀감으로 할 것입니다.
특히 성인설, 4대 성인설 같은 것도 가령 우리가 기독교와 화해하고 이슬람과 화해한다 하더라도 무원칙으로 화해가 되자 않지 않습니까. 우리 불교인들도 신학도 공부를 해야 됩니다. 저쪽(타종교) 사람들도 불교의 부처님 교학을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저쪽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님이 우리 불교를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떠한 위치에 있는 것인가. 이슬람의 마호메트가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가. 그런 것도 금타스님께서는 보살십지菩薩十地 우리 불교의 성인들의 차원 따라서 그런 성인들도 덮어놓고 외도라 이렇게 안 해버리고 맙니다. 다 성자를 포괄해서 성자 가운데서 어느 정도의 성자다 이렇게 말씀을 다했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참 중요합니다.
근래 우리 큰스님들은 다른 종교의 창조를 한 분들이라던가 또는 이른바 종교의 할애비 같은 사람들을 함부로 외도라고 쳐버리지 않습니까. 그래버리면 참다운 대승적인 그런 아량이 못되겠지요.
허나 금타스님께서는 정말로 하여튼 아주 보살적인 아량으로서 그분들을 모두가 다 보살십지라. 같은 성자도 똑같은 성자가 아닙니다. 보다 더 업의 습기習氣가 몽땅 없어져버린 완전무결한 부처의 경계가 있는 것이고, 그런가 하면 보살 초지나 2지나 3지나 성자는 성자이지만 아직 습기가 온전히 못가신 그런 분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것도 구분이 되어줘야 그래야 우리가 공부하는데 있어서 내 공부가 얼마만치 올라갔는가 그런 것도 알 수가 있고, 다른 사람 공부도 갖다가 저 사람 공부가 얼마만치 되었다 이렇게 점검할 수가 있는 것인데, 그런 차서次序적인 그런 한계나 계단적인 정의가 없어놓으면 우리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암중모색한단 말입니다.
참선도 그러니깐 암중선暗中禪이라, 암중모색하는 것은 우리가 금해야 합니다. 자기 공부를 얼마만치 지금 내가 되었는가. 저 사람 내 도반들 공부는 얼마만치 되었는가. 그걸 갖다가 우리가 다 감정을 할 수가 있고, 그래야 결국은 서로 피차간에 도움이 됩니다. 그런 것이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없으면 모르거니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는 그런 계단적인 한계가 다 있어요. 모두가 다.
우리가 참선할 때에 그런 문제를 따지고 있어 놓으면 참선에 방해가 되지만은 적어도 우리가 논리적으로 체계는 세워 놓아야 아까 말씀마따나 암중모색은 않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깐 우리가 문자를 많이 배워도 꼭 그런 우리 공부에 필요한 것을 배우고 필요하지 않는 것은 그런 엉성한 것은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꼭 배워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른바 암중선 암중모색하는 그런 선禪은 지양을 해야 합니다.
역시 우리가 오직 하나의 진리인 것을 그래저래 교敎와 선禪으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것도 역시 교가 있어야 또 선의 방향을 알 수가 있고 또 마땅히 교가 있더라도 선이 없으면 그때는 해탈을 못 하니깐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그야말로 참 증오證悟하기 위해서는 해탈하기 위해서는 그때는 꼭 필수적으로 참선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염불참선念佛參禪도 그래요. 그 본래 자성자리, 본래 자성을 안 떠나면 절대로 염불하고 참선이 둘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염불을 한다 하더라도 '내 자성自性 내 불성佛性이 바로 부처다' 이렇게 생각하고 염불하면 바로 그것이 염불선念佛禪 염불참선念佛參禪이 됩니다.
그러나 부처를 우리 마음 밖에다 두고서 우리가 염불을 하면 그냥 부처님 기운이 우리한테 와서 가피를 주신다. 이런 정도는 이것은 방편염불이고, 참다운 염불도 아닌 것입니다. (방편염불을) 물론 애쓰고 하다보면 그때는 차근차근 마음이 정화가 되어서 차근차근 부처하고 가까이 갈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기왕이면 본래 생긴대로 본래 법대로 우리 마음이, 모든 존재의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마음 밖에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부처 가운데 우리 마음이 있고 마음 가운데 부처가 있습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절대로 부처와 마음을 갈라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도 모양도 없는 것이고, 또는 부처라는 우주의 생명인 그런 법신불法身佛도 모양이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모양이 없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어요. 그것이. 그러니깐 그대로 바로 부처가 바로 마음이고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 잘 납득이 안 가시더라도 이것은 한가지 불설佛說 인 것이고 또 대승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 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우리 몸에 담긴대로 쪽쪽쪽 짜아내서된 그런 것이 우리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형체가 없어놔서 상이 없어놔서 상이 없는 것은 어떻게 논리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교(불경)에도 이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또는 더러워지지도 않고 정화시킬 필요도 없는 것이고, 그런 것이 우리 마음이기 때문에 김가란 사람 마음도 우주에 충만해 있고, 박가란 사람 마음도 우주에 충만해 있고 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중생들은 내 마음은 내 몸속에 들어있다. (몸에서) 쪽 짜아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꼭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말씀하신 즉 성자가 말씀하신 그대로 내 마음과 저 사람 마음도 겉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내내야 마음 바탕은 똑같단 말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상相으로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본체本體로는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이렇게 느끼시고 염불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참선과 염불이 둘이 아니고, 또 다른 교敎와 참선參禪도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도 결국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떠한 교리나 모두가 다 참선으로 유도하는 그런 법문입니다. 참선으로 깨닫는 법이 없으면 교敎라는 것도 별로 의의가 없어요. 모두가 다 그런 참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참선의 과정이 어떠한 것인가. 이런 것을 밝힌 것이 결국은 교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와 참선도 똑같이 아울러서 봐야 할 것이고, 또는 염불과 참선도 그래요.
부처님을 간절히 흠모하는 그 마음(갈앙심渴仰心) 우리가 생각할 때에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아까 말씀마따나 광대무변하고 본래는 본체는 끝도 갓도 없는 것이라놔서 우리가 간절히~ 우리 마음 자리를 이른바 갈앙심渴仰心이라. 간절히 그리워하고 흠모하면 그 마음이 우리마음을 비약을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그 부처님을 부처님 자리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그 마음은 우리 마음을 굉장히 그 순간 순수하게 만든다 말입니다. 이러한 그 마음의 갈앙심渴仰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법화경에도 심회연모心懷戀慕 갈앙어불渴仰於佛이라. 우리 마음으로 간절히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그것이 우리 마음을 그렇게 해탈로 인도한다 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나쁜 짓을 많이 하고서 어언간에 그냥 죽을 때가 이르렀다 말입니다. 임종에 당하면 그때는 우리가 당황을 많이 하겠지요. 그러나 (평소에) 닦을 겨를도 없이 임종에 다다랐으니 겨를이 없지요. 그것은. 그렇더라도 그 평소에 나쁜 짓을 많이 하고 죽을 때가 되면 누구나가 보통 참회를 합니다. 하나의 새도 그냥 죽을 때는 슬픈 소리를 해 나가듯이 우리 사람도 평소에는 그렁저렁 지낸다 하더라도 죽을 때는 보통 다 선량해진다고 그래요. 그래서 죽을 때 참회를 하면 평소에 안 닦은 사람은 그때는 당황을 많이 하겠지요.
그런 때는 아주~ 지성至誠(지극한 정성)으로 지성으로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염불 하시면 됩니다. 이른바 임종염불臨終念佛이라, 그러면 불경에 있는 바와 같이 정토삼부경에 다 있는 법문입니다. 저는 뭐 제 말 하지를 않습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에) 있는 바와 같이 나무아미타불 10번을 부를 때 10번을 미처 못채워도 우리가 극락세계에 간다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건 왜 그런고 하면 우리 마음이 본래로 부처이기 때문에 본래로 부처이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해서 부처님을 외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순식간에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된다 말입니다. 마음이 정화가 되면 정화된 그 마음으로 우리가 내생來生 들어갑니다. 분명히 천상天上도 있고 극락極樂이 있습니다. 그것이 방편설이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없는 것을 있다고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단계는 아직은 해탈의 단계는 못됩니다. 그래서 종당에는 다 해탈을 해야 되겠지만, 그동안 미처 해탈을 못한 그런 존재도 역시 닦은대로 천상도 가고 천상도 욕계천欲界天 또 색계천色界天 무색계천無色界天 삼계三界가 돼있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듯이 그 천상도 존재하는 것이고, 또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모두가 다 꿈 같고 그림자 같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간도 환상인 것이고 천상도 환상인 것이고 다 그러면 환상입니다.
그러나 잠시나마 존재하고 있다는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사람도 인간존재도 잠시간 존재하고, 또는 (욕계 천상도) 색계 천상도 잠시간 존재하고 무색계 천상도 잠시간 존재하고 존재한단 말입니다.
오늘 금타대화상 열반재 즈음해서 금타대화상께서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주 그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그대로 전수한 순선純禪시대 육조혜능스님 때까지는 순선일 때 입니다. 지금으로부터서 1,200년 세월이 경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혜능스님의 즉 말하자면 가르침을 그대로 계승한 분이 금타대화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그 금타대화상의 금강심론金剛心論, 금강심론하고 육조단경하고 이렇게 놓고서 대조를 한번 해보십시오.
가장 중요한 점은 아까 말씀마따나 일체삼신자성불一體三身自性佛이라(귀의일체삼신자성불歸依一體三身自性佛) 우리 마음에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 다 갖추고 있고, 원래 삼신이 원래 이것이 셋이고 넷이란 말입니다. (삼신三身은) 오직 하나의 자성自性이고 이것이 우리 마음의 본성입니다. 우주의 본성이고 말입니다.
그리고 일상삼매一相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라, 그 모든 수행법이 많이 있지만 다 포괄하면, 포괄해서 한번에 말하면 그것이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그것은 4조 도신스님도 능가사자기에서 그 고구정녕으로 말씀했단 말입니다. 육조단경에서도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5번이나 되풀이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부촉품에서는 아주 또다시 재차 역설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그 부처(여래如來)의 한없는 지혜를 알려고 하면 마땅히 똑똑히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증할지니라. 그러면 마치 종자를 땅에 파묻어가지고서, 그 종자가 비를 만나고 온도를 만나서 차근차근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우리 중생도 역시 종당에는 그렇게만 닦으면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닦으면 틀림없이 참다운 부처님의 열매를 맺으리라, 이렇게 결론적으로 육조단경의 부촉품付囑品에서 말씀을 했습니다. 이 말씀을 명심하셔서 우리가 성불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길이 절대로 아닙니다.
달마스님께서도 우리 범부를 넘어서 성자가 되는 것이 눈 깜작할 동안에 있건만 우리중생이 자꾸만 분별시비를 한단 말입니다. 본래 부처인데,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본래 부처니깐 우리 마음은 만능의 자리입니다. 만능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자기한테 갖추고 있는 본래 공덕을 믿고서 부지런히 공부하면 최상의 행복인 성불이 곧 눈앞에 다가오리라 생각됩니다.
여러분들 가실 적에 지금도 눈이 아직 안 녹은데도 있습니다. 참 조심하셔야 됩니다. 조심 운전하셔서 편안히들 가시길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 20010216 금타대화상 열반재일 청화큰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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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존 텍스트가 없는 법문으로 유튜브 영상법문 작업으로 녹취를 하였습니다.
자막본 영상은 아침에 업로드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늘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무영지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근념하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참다운 염불은 내 마음이 자성미타라,
내 마음의 자비가 바로 관세음보살이고
내 마음의 원력이 보현보살이고
내 마음의 지혜가 문수보살이고
또 온전한 내 마음자리 자체가 바로 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로 부처인 것이다.
이 우주가 바로 부처덩어리다.
법신 보신 화신이 셋이 아닌 하나의 몸, 삼신일불 이라는 일체삼신자성불은
우리 마음의 본성이고 우주의 본성이다.
나와 내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닌 것을 깊이 느끼면서 (본래 자성을 안 떠나는) 하는 염불이
참다운 염불인 동시에 염불선이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