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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동세실리아성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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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향기 스크랩 2011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평화로운세상 추천 0 조회 5 11.08.18 19: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베로네세, 가나의 혼인 잔치(부분)
      
      
       
       2011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판관11,29-39ㄱ 마태22,1-14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마태오 22,1-14) 
      
      
      
        
      
      
      
      아랑곳 않는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이들 /김찬선신부님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얘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는 혼인잔치에 비유됩니다.
      
      그리고 이 잔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누구나 초대받습니다.
      
      
      잔치하면 즉시 즐거움, 풍성함 이런 것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즉시 달려가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이는 마치 어떤 음식점이 음식을 많이 차려놓고 먹으러 오라 해도
      
      그 음식이 싫으면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첫 번째로 초대받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하러 가고 돈 벌러 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잔치 초대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 부류의 사람들도
      
      이 세상의 사교 파티에는 기꺼이 달려갈 것입니다.
      
      
      두 번째로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초대에 아랑곳은 하지만 
      
      잔치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로 비유됩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 혼인잔치에는 
      
      어떤 예복을 입어야 하고 어떤 예복이 어울립니까?
      
      
      그것은 아마도 사랑일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나라이기에 사랑이 예복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드님의 혼인잔치이니
      
      하느님의 아드님께 대한 사랑이 우선입니다.
      
      다음은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늘나라 잔치 참석자들은 다 사랑의 예복의 입고 있으니
      
      이 참석자들과 어울리려면 이웃 사랑의 예복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 잔치에 불참자들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잔치에 아랑곳 하지 않는 이들과 잔치에 어울리지 않는 이들입니다.
      
      
      
      
      
      
      
      2011.8.18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판관11,29-39ㄱ 마태22,1-14
      
      
      하늘나라 잔치의 삶 /이수철 신부님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 잔치에 
      
      초대 받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매일 미사잔치가 
      
      삶은 하늘나라 잔치임을 상징합니다. 
      
      
      하늘나라 미사잔치에 참석한 여러분은 
      
      과연 혼인잔치와도 같은 
      
      하늘나라의 잔치예복을 입고 있는지요. 
      
      
      누구에게나 열린 하느님의 초대요 은총입니다. 
      
      
      그러나 초대 받았다고, 
      
      은총 받았다고 구원이 아니라 
      
      초대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응답했을 때, 
      
      또 초대에 응답하여 
      
      치열한 삶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을 때 구원입니다. 
      
      
      세례 받았다 하여, 수도생활에 불림 
      
      받았다 하여 저절로 구원이 아닙니다.
      
      
      값싼 은총이 아닙니다. 
      
      간절하고 절실히 
      
      하느님을 찾으며 노력할 때 
      
      삶은 은총임을, 
      
      감사임을 깨닫습니다. 또 
      
      
      죽음 있어 삶이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사막교부들은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하셨습니다. 
      
      
      매일 마지막처럼 
      
      하루의 선물에 감사하여 
      
      은총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삶은 은총이며 과제입니다. 
      
      
      삶이 은총임을 깨달아 알수록 
      
      감사와 찬미로 
      
      현재의 과제에 투신하게 되며 
      
      현재의 과제에 투신할수록 
      
      삶이 은총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 주신 현재의 과제에 충실하여 
      
      믿음의 옷, 사랑의 옷, 희망의 옷,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살 때 지금 여기가 
      
      은총 가득한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주님의 경종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하느님과 무관하게 
      
      잔치예복을 입지 않고 살면 
      
      선택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잔치 옷을 입지 않아 
      
      잔치에서 추방된 자와 
      
      판관기의 판관 입타가 흡사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려 
      
      판관이 된 입타는 열정은 많았지만 
      
      하느님의 옷을 입지는 않았습니다.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믿음에 눈이 없었습니다. 
      
      
      뭔가 하느님의 뜻을 찾는 
      
      치열한 삶이 
      
      결여되어있음을 봅니다. 
      
      
      그가 하느님의 뜻을 찾음으로 
      
      은총에 맞갖은 
      
      지혜의 눈을 지녔더라면 
      
      자기 딸을 서원 제물로 
      
      바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을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치는 관습은 
      
      예언자들도 비판했고 율법에서도 
      
      금한 일이었습니다.
      
      
      ‘두 달 뒤에 딸이 아버지께 돌아오자, 
      
       아버지는 주님께 서원한 대로 딸을 바쳤다.’
      
      
      입타의 어리석음으로 자초한 
      
      비극적인 결말이 
      
      마음에 긴 여운으로 남습니다. 
      
      
      삶은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은총만으로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평생과제에 항구할 때, 
      
      하느님의 은총에 우리의 노력이 
      
      하나 될 때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평생과제에 충실할 때 선사되는 
      
      지혜와 겸손, 믿음과 희망 사랑이요 
      
      주님 친히 입혀주시는 
      
      하늘나라 잔치 예복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초대에 
      
      그리스도의 예복을 입고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들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시어 
      
      오늘도 주어진 과제에 
      
      충실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잊지 못할 녹색 영대 /양승국신부님
      
      
       
      
      언젠가 수 백 명이나 되는 교구, 수도회 
      
      신부님들과 함께 하나의 
      
      중대한 지향을 두고 공동으로 
      
      미사를 집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미리 도착한 공문에 분명히 
      
      "영대 색깔은 백색"
      
      이라고 적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깜박깜박 잘하는 저였기에 나중에 
      
      보따리를 펼쳐보니 녹색이었습니다. 
      
      
      이를 어쩌나 하다가 "나말고도 
      
      나 같은 사람 분명히 몇 사람 있을거야?"하고 
      
      입장을 했는데, 왠걸 
      
      그날 따라 다 하얀 색깔인데 
      
      저 혼자만 녹색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보다 튀는 걸 
      
      죽어도 싫어했던 저였기에 
      
      "나만 혼자 녹색"이라는 것 때문에 
      
      미사시간 내내 
      
      안절부절하며 보냈습니다. 
      
      
      녹색 영대로 인해 제가 받았던 
      
      스트레스는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 시선이 
      
      저한테 쏠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일을 떠올리며 
      
      장소에 맞는 옷을 적절하게 입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장례식이나 결혼식과도 같은 
      
      중대사에 참석할 때 
      
      장소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려는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주 중요한 예절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반바지에 
      
      멜빵에 티셔츠를 입고 
      
      장례식에 참석한다면 분명히 
      
      "상식 없는"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을 것입니다.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한 사람이 
      
      동네 공원 산책 나온 사람처럼 
      
      추리닝 차림으로 왔다면 
      
      분명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잔치를 위한 예복은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필요한 품위 있는 
      
      고급 정장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가장 어울리는 예복은 바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란 예복입니다. 
      
      "희생"이란 예복입니다. 
      
      "겸손", "자선", "기도"란 예복입니다. 
      
      "고통의 적극적인 수용", 
      
      "십자가를 기꺼이 짐"이란 예복입니다. 
      
      
      그 모든 예복 중에서도 
      
      가장 값진 예복, 예복 중에 예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이란 낡은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예복, 
      
      가장 값진 예복을 입은 사람이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온 몸을 온통 오직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으로 치장한 분이었습니다. 
      
      
      예복 중에 가장 빛나는 예복, 
      
      구원의 빛나는 겉옷인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단장한 
      
      왕후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2011. 8. 18>(마태 22,1-14)
      
      
       초대권과 입장권 /송영진 신부님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0-14)."
        
      
      8월 18일의 복음 말씀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오지 않아서
      
      임금은 종들에게 길거리에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예복을 안 입었다고 쫓아냅니다.
      
      아니, 길거리에서 갑자기 불려 들어갔는데,
      
      예복을 안 입었다고 쫓아내는 것은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한 것은 쫓겨난 그 사람만 예복을 안 입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불려 들어간 것은 같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었을까?
      
      그래서 길거리에서 곧장 잔칫방으로 직행한 것이 아니라
      
      집에 가서 예복으로 갈아입을 
      
      시간 여유는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쫓겨난 그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또 한 가지, 길거리에서 갑자기 
      
      불려 들어간 사람들은 강제로 붙잡혀 간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받은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초대를 받고 그 초대에 응답한 것입니다.
      
      초대에 응답했기 때문에 
      
      다들 예복으로 갈아입고 참석한 것입니다.
      
        
      잔칫방을 가득 채운 손님들 중에는 
      
      악한 사람도 있고 선한 사람도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란 예복을 입지 않은 그 사람일 수도 있고,
      
      원래는 악했지만 회개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에 초대는 모든 사람이 받게 되는데, 
      
      참석은 예복을 입은 사람만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초대권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데,
      
      입장권은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이 이야기의 첫 부분에서 초대를 받았지만 
      
      그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은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을 뜻합니다.
      
      그들은 거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임금의 
      
      종들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반역행위이기 때문에 임금은 그들을 처벌합니다.
      
        
      그 다음에 길거리에서 초대받은 사람들은 신약시대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복음 선포는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초대권은 무차별, 무제한으로 주어지는데, 
      
      그 초대에 응하는 것은 각자 자유선택입니다.
      
      그런데 초대에 응하고, 초대권을 
      
      입장권으로 바꿔서 받으려면 자격을 갖춰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입장권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생활,
      
      즉 입장 자격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생활이고, 
      
      예복으로 갈아입는 과정입니다.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입장권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혼인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을 
      
      그냥 쫓아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은 다음에 갈 곳은
      
      '혼인 잔치의 잔칫방'과 '바깥 어둠', 
      
      그렇게 두 곳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 밖은 모두 '바깥 어둠'입니다.
      
      '바깥 어둠'은 연옥과 지옥을 
      
      모두 포함하는 말일 것입니다.
      
        
      손과 발을 묶는다는 것은
      
      한 번 바깥 어둠으로 쫓겨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예복을 
      
      입을 수 없음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옥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지금 신자가 되어 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서 자만할 수 없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신앙인들(성직자, 수도자, 
      
      신자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경고입니다.
      
      
      
      
      
      
      
      초청받은 혼인잔치 /김웅태 신부님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당시 유대교의 대사제들과 원로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의 
      
      이야기 속의 사건은,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볼 때, 
      
      으례 있는 일 중에 하나인 것이다.  
      
      
      이들의 풍습에서 보면 
      
      혼인 잔치와 같은 큰 잔치에 있어서 초청할 만한 사람들에게 
      
      미리 초청을 해 두지만 시간을 정해주어 알리는 것은 아니고, 
      
      잔치 준비가 다 되면, 
      
      손님들을 부르기 위해 종들을 보내서 오라고 알렸던 것이 
      
      그들의 관습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풍습을 
      
      잘 알고 계셨기에, 하느님의 진실한 초대에 응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이와 같은 생활 속의 일을 예로 하여,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아들의 복음이라는 
      
      말씀의 잔치에 유대인들은 먼저 불림을 받아 초청 되었으나,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그들 따르고 영접하도록 
      
      유대인들을 초대했지만, 그들은 소홀히 여겨 그 초청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로 
      
      임금님의 아들의 잔치의 초대는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초대를 당시 그들의 생각 속에는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임금님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잔치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잔치에 초대 받음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임금님의 관대한 아량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요, 
      
      어디까지나 은혜의 초청이요, 거져주는 은혜의 부름인 것이다.
      
      
      그런데 먼저 초청을 받은 자들은, 
      
      그 초대를 거절했다.  이유는 그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가고, 어떤 사람은 초대하러 온 종을 때리고 죽이곤 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다.  
      
      
      우리 모두에게도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부르심이 있지만, 
      
      이 세상 일에 분주하여 영원한 것을 외면하기 일 수이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되어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기 쉽고, 강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기회를 놓치기 쉬운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현세 생활에 너무 분주하다 보면, 
      
      영원함에로 부르시는 참 삶 그 자체를 잃어버리는 비극에 
      
      떨어지는 결과가 온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이란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이 넘치는 만남의 초대인 것임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도 
      
      그 잔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듯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영원을 내다보며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믿음의 자세여야 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안소근 수녀님
      
      
       
      
      오늘 복음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을 
      
      아들의 혼인 잔치에 
      
      손님들을 초대하는 임금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라시지만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언제나 하나의‘초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받은 이들은 거부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두 번에 걸쳐 
      
      손님들을 초대합니다. 
      
      하느님 편에서는 계속 손을 내밀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 친교,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원한다면 그 초대에 
      
      응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밭으로 일하러 가거나 장사하러 간 사람들처럼 
      
      그 분의 손길을 뿌리칠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말이 
      
      초대를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차이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결과는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선하시고 너그러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택된 이들은 적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느님의 부르심을, 
      
      우리를 위한 초대를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구원은 우리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선물을 감사하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선택의 결과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초대? /고성균 수사님
      
       
      
      
      우리가 살아가며 하는 일 가운데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의 중요성은 당사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같은 가정주부라도 어떤 이한테는 요리를 잘 해서 
      
      가족이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고, 어떤 이한테는 
      
      청소를 잘 해서 가족이 쾌적하고 정돈된 환경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들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중요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다른 일보다 그 일에 더 정성을 기울인다는 점입니다. 반대로 
      
      중요하지 않은 일은 그리 급하지도 않고 대충해도 괜찮다고 여기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께서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사람을 하늘나라로 
      
      초대하셨음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아(아마 ‘그냥 가서 
      
      밥이나 한 끼 얻어먹자.’는 생각으로 잔칫방에 왔나 봅니다.)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온 사람은 잔치에서 쫓겨납니다. 
      
      임금에게 혼인 잔치는 무척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께 받은 이 초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혼인 잔치에 맞는 예복을 갖추어 입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고 있습니까? 나의 신앙생활은 급하지도 않고 
      
      대충해도 될, 그런 대수롭지 않은 일에 불과합니까? 
      
      미사·기도·봉사·자선·양심에 따른 삶 등은 예복을 갖추어 입고 잔칫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성껏 임해야 할 우리의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바쁩니다 /윤원진 신부님
       
      
      
      
      오늘도 바쁩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오늘도 24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습니다. 
      
      이번 주만큼은 저녁기도, 아침기도를 빠지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건만 막상 집에 돌아오면 해야 할 일들에 떠밀려 
      
      십자가 앞에 앉기 힘듭니다.
      
      ‘이해해주시겠지…’, ‘용서해주시겠지…’라는 
      
      생각으로 애써 위안해보지만  이러한 불안함 속에서도 
      
      선뜻 그분께 시간을 내어드리기 어렵습니다.
      
      이러다가 정말로 하느님이 내 앞에 나타나셔도 
      
      “조금만 있다가요”라고 미룰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만 하고요”라고 모른 척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2,13).
      
      
      이것이 본래 제가 당해야 할 심판인데 
      
      하느님께서는 아직도 저를 기다려주고 계십니다. 
      
      이 원고를 당장 덮고 기도부터 해야겠습니다.
      
      
      
      
      
      
      
      부르심과 선택 /전삼용신부님
      
      
      
       
      보좌신부로 있을 때 한 자매가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청했습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도록 겸손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따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스승을 따라한다는 말은 자신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모든 것을 따라하려 했기 때문에 물위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판단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저의 판단기준은 무조건 ‘겸손함’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참으로 겸손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저를 나무라고 가르칠 것 같은 느낌마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자를 키울 정도의 스승이 못 되니 
      
      안 되겠다고 적당히 거부하려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참으로 제자가 되고 싶다고 오랫동안 졸랐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 청하자 저는 “제자는 스승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러면 제가 하는 기도들이 이러이러한데 
      
      이것을 일 년만 빠지지 않고 매일 하실 수 있다면 제자로 받아줄게요.”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분은 자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그 분은 더 이상 제자가 되겠다는 말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몇 달 하다가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신랑의 의복을 입고 있다면 그 사람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부에 합당한 옷을 입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의복을 입어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스승을 닮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복을 갖출 수 없는 사람은 
      
      비록 받아들여졌더라도 아직 선택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 즉 하느님은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초대했던 그 백성은 그분의 초대에 응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이 보내신 예언자들과 아들까지도 죽였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고 이방인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따라서 누구도 초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이방인들까지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하느님은 공평하게 초대하신 것입니다. 
      
      
      잔치에 참석한 이들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교회 안에도 혼인 의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의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초대받았지만 그 초대에 응답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가 되고 맙니다. 이는 교회엔 나오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하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미사에 나온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결국 ‘부르심’은 다 받았지만 ‘선택’된 이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또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들은 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
      
      이지만 사실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 그건 하느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또 사제가 되었다고 해서 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도 아니니 
      
      사제가 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스승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야만 선택받은 자로 남게 됩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십니다. 우리가 모두 부르심을 받았지만 
      
      선택을 받고 안 받고는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과연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유다는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할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부르셨다면 일부러 
      
      죄짓게 만드셨다는 뜻이기에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12사도에 당당히 받아들여졌습니다. 
      
      왜 부르심을 받지도 않았는데 받아들여졌을까요? 이는 
      
      유다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해 한 몫을 차지하려는 마음에 
      
      자신이 그 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건들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와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원하기만 하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도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려 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현세적인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데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결국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선택받지는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원하는 모든 사람은 
      
      다 받아들이십니다. 그렇다고 다 선택받는 것은 아닙니다. 
      
      혼인 잔치에 합당한 옷을 입어야합니다. 이 의복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잔칫상에까지 앉았다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쫓겨나지 않기 위해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 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세상이라는 하느님의 잔칫상 /상지종신부님
      
      
       
      
      세상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칫상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온갖 피조물들이 함께 어울려 
      
      생명을 꽃피우고, 기쁨과 희망을 가꾸어 가는 축제의 마당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은 이 축제에 초대받은 특별한 손님입니다. 
      
      손님이면서 하느님과 함께 주빈의 역할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동료 사람들과 어울려 이 세상을 평화와 정의가
      
      넘쳐흐르게 하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세계를 보살핌으로써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를 더욱 흥겹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이 잔치에 함께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인간은 
      
      오만하게 하느님의 잔치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잔치를 만들려고 하고, 
      
      때로는 이기심과 탐욕 때문에 잔치에 초대받은 다른 손님들을 
      
      몰아내고 잔치의 기쁨을 혼자 독차지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세상이라는 잔치는 
      
      모든 이가 함께하는 기쁨의 자리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 기쁨의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가난한 이, 소외된 이,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한 이와 
      
      인간의 탐욕으로 마구 파헤쳐지는 고통 받는 창조세계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에 초대하여 함께 즐겨야 합니다.
      
      
      
      
      
      
      
      하늘 잔치 세상 잔치  감귀웅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고 예언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에서 잔치를 벌이며 기뻐하고 흥겹게 지내는 것은 
      
      모든 신앙인들의 기본적인 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진짜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을까 의문을 가져봅니다. 
      
      레지오 회합이 끝나면 오늘 점심은 어디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먹을까 의논하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우리 동네 아파트 값이 몇 억 원이나 올랐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이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최상위 7퍼센트에 매겨진 세금을 두고서 
      
      폭탄이라고 죽는 소리를 하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시골에 땅도 조금 있어야 하고, 경치 좋은 곳에 별장도 한 채 있어야 
      
      사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건강을 위해 몇 시간씩 골프도 치고, 이것저것 몸에 좋다는 보약과 
      
      비싼 건강보조식품도 꼭 챙기는 모습도 떠오릅니다. 
      
      노년을 위해 얼마의 돈은 저축되어 있어야 하고, 
      
      상해보험이나 건강보험 몇 개는 
      
      들어놓아야 안전하다고 믿는 모습들도 떠오릅니다. 
      
      그러고 보면 하늘 나라 잔치보다는 이 세상에서 흥겹게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며 세상 잔치를 준비하는 것이 
      
      바로 나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초대 받은자의 예복은?  /방윤석 신부님
      
       
      
      
      오래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미국의 한 교도소에 수감된 사형수가 신문 
      
      한 장을 손에 쥐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신문의 머리기사는 '미국 
      
      제22대 대통령 클리블랜드 취임'이었습니다. 간수가 사형수에게 슬피 우는 
      
      이유를 묻자 그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습니다. "클리블랜드와 나는 대학교 
      
      동창입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나오다가 둘은 교회의 종소리를 들었어요. 
      
      클리블랜드는 내게 속삭였어요. '친구여, 교회에 가보세.' 그때 나는 거절했지요. 
      
      결국 클리블랜드는 교회로, 나는 술집으로 향했어요.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확연하게 갈라놓았습니다." 클리블랜드는 그날 새 삶을 다짐했고, 다른 친구는 
      
      주지육림에 빠져 들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교회의 종소리를 '경건한 하늘의 초청'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대통령, '환락의 소리'로 여긴 사람은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인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구원의 잔치에 참여할 기회를 
      
      거절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어떤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어떤 이들은 거절하고 어떤 이들은 참석했고, 
      
      어떤 이들은 참석을 하고서도 예복을 입지 않아 쫓겨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임금은 하느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님, 잔치는 하늘 나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복은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이 예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여, 신자들에게는 속하지만 악인들에게는 
      
      결핍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것이 정확히 말해 혼인 
      
      잔치 예복일 것입니다... 이 예복에 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한 지시의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티모1,5). 혼인 잔치에서 갖추어야 할 예복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아무렇게나 알아듣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흔히 부정직한 사람들도 자기들끼리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서 깨끗한 마음과 고운 양심과 거짓 없는 사랑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이 거짓 없는 사랑이 바로 혼인 잔치를 위한 예복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표현한 "깨끗한 마음과 고운 양심과 거짓 없는 사랑"의 
      
      예복을 우리는 실천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입니다. 오늘 매일미사에서 
      
      잔치의 예복은 “기쁨을 갖고 사는 생활‘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무런 기쁨 없이 억지로 가고 있다면, 삶이 멍에로 느껴진다면, 
      
      십자가가 무겁기만 하다면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리는데 미사 참석시 옷을 잘 입고 나오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미사에 오신 여러분 모두는 
      
      하늘나라 잔치에 초대받고 참석한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아멘. 
      
      
      
      
       
      
      
      <독서> : 하느님과의 서원에 충실한 입다 /경규봉신부님
       
      
       
      
      입다는 길르앗 사람으로서 창녀의 소생이다. 길르앗의 아들들이 
      
      입다를 내?자 입다는 돕이라는 곳에 가서 비적떼의 두목이 되어 살았다. 
      
      암몬 백성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길르앗 사람들이 입다를 찾아가 
      
      그를 사령관으로 모셨다. 입다는 군대를 이끌고 암몬을 공격하면서 
      
      하느님께서 승리하게 해주신다면 자신의 집 문에서 자신을 맞으러 
      
      처음 나오는 사람을 주님께 번제로 올리겠다는 서원을 했다. 
      
      입다가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오자 그의 무남독녀가 누구보다도 
      
      먼저 나와 아버지를 환영했다. 이때에 입다는 그의 서원으로 인하여 
      
      걱정하였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를 두고 
      
      야훼께 하신 말씀이 있으시다면 그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하며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과 아버지께 순종하는 효도의 자세를 보였다. 그녀는 
      
      의리를 위하여 자신의 희생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두 달이 지난 후 입다는 딸을 서원한 대로 하였다. 
      
      
      딸을 번제로 바쳤다는 것은 불살라 제물로 바쳤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에 자녀를 불살라 제물로 바치는 것은 극악한 죄로 규정
      
      되어 있기 때문이다(레위 18,21; 20,2-5; 신명 12,31; 18,10). 
      
      입다는 이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암몬 족속이 몰록 우상을 
      
      섬겼는데(1열왕 11,7), 그들은 자녀를 불에 태워 우상에게 바치는 악습에 젖어 
      
      있었다. 입다는 암몬과 싸우면서 그러한 미신도 증오하였다. 입다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신뢰하였으므로 하느님께서 금하시는 죄악을 
      
      범했을 리 만무하다. 더욱이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인 입다가 자신의 
      
      집에서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가장 먼저 나올 사람으로 자신의 가족을 제외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입다가 하느님께서 엄금하시는 죄를 범하였다면 
      
      그는 레위기(20,2-5)의 말씀대로 저주를 받았을 것이지만, 그는 그 후에도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6년 동안 활약하다가 죽었다(12,7). 신약성경은 
      
      그러한 입다를 신앙의 인물로 칭찬하고 있다(히브 11,32). 때문에 서원대로 
      
      했다는 것을 딸로 하여금 평생 성막에서 봉사하도록 처녀로 봉헌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입다는 자신의 상속자인 딸을 처녀로 성전에 봉헌함으로써 
      
      무남독녀인 딸이 독신으로 평생 성전에서 봉사하며 
      
      상속받지 못하도록 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계획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 없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에 
      
      따라 당신께서 필요하신 사람을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입다는 비록 
      
      비천한 창녀의 소생으로 형제들로부터도 버림받고 비적떼의 두목이 되어 살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를 뽑으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셨다. 하느님께서 
      
      그를 당신의 도구로 뽑으신 까닭은 그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신망과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깊은 믿음을 가진 신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의 영이 이끄시는 대로 암몬군을 공격했고 승리했다. 
      
      그는 공격에 앞서 하느님께 서원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인정받았다. 그는 
      
      비록 자신의 딸을 바치는 아픔을 겪었지만 자신이 서원했던 그대로 실천했다. 
      
      그의 딸 역시 아버지의 서원에 따라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했다. 
      
      
      사람들은 상황이 변하면 흔히 약속을 어기곤 한다. 사람에 대한 약속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서원과 맹세까지도 어기곤 한다. 자신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이익인가 손해인가를 따져 약속을 어기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약속의 하느님이시다. 약속을 소중히 여기시며, 약속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약속을 잘 지키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신앙인은 약속에 충실한 사람이다. 
      
      특히 하느님과의 약속에 충실한 사람이다. 오늘 입다처럼 
      
      하느님과의 서원에 충실한 신앙인, 약속을 잘 지키는 성실한 신앙인이 되자. 
      
      
       
      
       
      
      
      † 예복을 준비하라 /박상대 신부님
      
      
      
      
      예수께서는 요르단강을 따라 여러 마을들을 거쳐 예리고
      
      (요르단강 서쪽 10Km, 예루살렘 북동쪽 36Km)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다.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식도 있었다.(마태 21,1-11) 이제 예수님의 활동무대는 
      
      이스라엘의 도성 예루살렘이다. 환전상들과 장사꾼들로 오염된 성전까지도 정화하셨다. 
      
      예수님의 대담 상대자는 막연한 군중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인 원로들과 대사제들로 바뀌었다. 
      
      
      예복을 준비하라.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바로 이들에게 들려준 ‘혼인잔치의 비유’이다.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나귀를 타고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성대한 행렬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21,1-11)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일(21,12-16) 
      
      때문에 이미 백성의 지도자들과 한바탕 대립을 벌였다(21,23-27). 
      
      
      이어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두 개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두 아들의 비유’(21,28-32)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33-43)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곧바로 ‘혼인잔치의 비유’가 잇따른다. 
      
      이 비유가 오늘의 복음이다. 
      
      이 시점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정리를 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마태오복음 20장부터 22장까지에서 모두 네 개의 비유를 대면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상경 중에 제자들을 상대로 말씀하셨던 
      
      ① 포도원 일꾼의 비유(20,1-16), 예루살렘에 와서 백성의 원로들과 대사제들에게 들려주신 
      
      ② 두 아들의 비유(21,28-32), 
      
      ③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21,33-43), 그리고 
      
      ④ 혼인잔치의 비유(22,1-14)이다. 
      
      네 개의 비유는 모두 하늘나라에 관한 은유법이다. 
      
      
      예복을 준비하라.예복을 준비하라.
      
      그런데 비유내용의 강도에 주의해야 한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구약의 백성과 신약의 백성 모두가 
      
      초대되어 똑같은 차원의 후한 대접을 받지만,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 
      
      오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는 구약의 백성들이 대접을 받기는커녕 
      
      이미 차지한 특권마저 빼앗기고 추방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물론 그 잘못과 책임은 백성의 지도자들 측에 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는 구약의 백성들이 맞이하게 될 
      
      종말의 심판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 이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마태오가 특별히 강조하는 부분이다. 
      
      
      오늘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부분은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을 위해 베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제각기 변명과 이유를 둘러대고는 
      
      오기를 거부하자,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아무나 불러들여 잔칫집을 가득 채운다.(1-10절) 
      
      이 대목을 거듭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와 딱 맞아떨어짐을 알 수 있다. 
      
      하느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예언자들, 신약시대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계획을 알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을 배척했고 때로는 죽였다. 
      
      
      예복을 준비하라.예복을 준비하라. 이
      
      에 대한 하느님의 정의는 실제로 기원후 70년 로마군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육하고 성전을 불태우는 사건으로 드러났다. 
      
      그들이 구원받을 자격을 스스로 상실한 셈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역사는 비극으로 끝나지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여시는 것이다. 
      
      임금의 종들이 거리로 나가 아무나 잔치에 초대한다는 것은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선인이나 악인이나 할 것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둘째 부분은 임금이 손님으로 가득 찬 잔칫집을 돌아보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집어내어 추방하는 장면이다.(11-14절) 
      
      이렇듯 길바닥에서 아무렇게나 초대해온 사람들로부터 
      
      ‘예복’을 운운하는 임금의 처사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비유의 사실적 표현에서 눈을 떼어 비유의 우의적 표현으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 
      
      
      예복을 준비하라.예복을 준비하라. 
      
      여기서 예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외적 치장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내적 자질을 말한다. 
      
      이는 곧 예수께서 내리신 산상설교의 가르침으로 무장된 정신이다. 
      
      이 정신은 단순히 ‘굳게 마음먹음’이 아니라 
      
      ‘실제로 행함’이요, ‘덕행의 열매’를 말한다. 
      
      교회는 거룩하나 그 안은 별의별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종말이 오기 전에 ‘예복’을 잘 갖추어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복의 의미 /구경국신부님
      
      
      
      
      어릴 적 이 성서구절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왜 거리에 있던 사람을 갑자기 불러놓고 
      
      단지 예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쫓았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길 가던 사람이 늘 예복을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또 평소에 예복을 차려입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부자나 가능할 터인데,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구원의 가능성마저도 가질 수 없다는 말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예복이란 평소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이 구절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길 가다가 잔치에 불려가는 것처럼 우리도 갑자기 하느님께 불려
      
      간다는 사실은 이해에 더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 삶의 마감을 미리 예측할 수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예복을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면 기도와 선행, 그리고 희생과 봉사로써 
      
      만들어진 이 예복을 평소에 마련해두는 것이 가장 확실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또 언젠가는 아주 갑작스럽게 하느님 앞으로 가야할 것입니다. 
      
      그때 후회하지 않도록 오늘,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죽어서 더욱 빛을 내는 선행의 예복 /이기양 신부님
       
      
      
      
      오늘 복음에는 특이한 혼인잔치가 벌어지고 이상한 손님들이 등장합니다. 
      
      어떤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에 손님들을 초대했지만 
      
      사람들이 통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청장을 가지고 온 사람마저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지요. 
      
      몹시 노한 임금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없애 버리고 
      
      아무나 잔치에 불러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다 데려왔고, 
      
      잔칫집은 큰 성황을 이룹니다. 
      
      임금님은 잔치가 성황리에 잘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을 흡족히 둘러보다가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쫓아버립니다. 
      
      예복을 입을 시간을 주지도 않은 채 복장 검사만으로 사람을 
      
      쫓아내는 이상한 잔치입니다. 
        
      
      복음을 통해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첫째는 임금의 초대를 우습게 여기고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무나 다 불러오라고 명령했던 임금이 
      
      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끌어내어 쫓아버렸을까 하는 점입니다. 
        
      
      첫 번째, 임금의 초대를 우습게 여긴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유다인을 지칭합니다. 
      
      유다인은 구세주가 오실 것을 오랜 세월 동안 고대했지만 
      
      막상 하느님께서 그들을 초청하자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전하러 왔던 많은 예언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박해했으며 
      
      마지막에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지요. 
        
      
      초대에 응하지 않는 유다인들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불러오라고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지요. 
      
      그래서 이제는 유다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이 하느님 잔치에 초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초청 받은 모든 사람이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것이 오늘의 두 번째 묵상 주제입니다. 답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예복은 파티복을 입었느냐, 한복을 입었느냐, 
      
      전례복을 입었느냐 따위가 아닙니다. 
      
      예복은 바로 믿음과 선행을 의미합니다. 
      
      신자가 됐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하느님 나라의 천상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선행의 예복을 입은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영국의 템스 강변에서 거지 노인이 낡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 때 웬 낯선 외국인이 그를 측은히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지금 제게 돈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도 바이올린을 좀 다룰 줄 아는데 
      
      대신 몇 곡만 연주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거지 노인은 바이올린을 건네줬습니다. 
      
      그런데 그가 활을 당기자 놀랍도록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지요. 
      
      거지 노인의 모자에는 순식간에 돈이 쌓였습니다.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를 쳤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외쳤습니다. 
        
      "저 사람은 바로 파가니니다!" 
      
        
      바이올린 명연주자였던 파가니니가 런던에 연수차 왔다가 
      
      잠시 산책하던 길에 거지 노인을 도와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을 나누며 사는 것은 
      
      돈 몇 푼의 자선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길이 빛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마음을 담은 예복을 우리는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옷장에 쌓아둔 아름답고 눈부신 옷들은 때가 되면 다 사라져 버리지만 
      
      믿음과 선행의 예복은 죽은 후에도 하느님 대전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선행의 옷장에는 얼마나 많은 예복이 걸려 있습니까?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초대받은 당신 /김영춘 신부님
       
      
      
      
      로마로 출발하기 일주일 전에 
      
      교황청 사회홍보평의회의 실무자로부터 빨간색의 
      
      긴급표시가 달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가톨릭 라디오 회의(6월19일~21일)에서 
      
      제가 아시아를 대표해 한국의 평화방송 라디오에 대한 
      
      발표를 해 달라는 간곡한 요청이었습니다. 
      
      늦게 청탁해 미안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빠른 응답을 
      
      구하는 때늦은 초대가 제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해 놓아야 할 일도 산적한 가운데, 
      
      발표문을 준비하고 또 국제회의에서 발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선뜻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황청 사회홍보평의회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가톨릭 라디오로 평화방송을 선정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평화방송을 국제적으로 소개할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까? 초대에 응했지만, 로마로 
      
      떠나는 전날 밤 늦게까지 발표문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세계 45개국에서 관계자 100여 명이 참석해 사흘의 일정으로 
      
      열린 가톨릭 라디오 회의는 둘째 날 낮 한 시 경에 교황님 알현을 
      
      마련했습니다. 교황청궁 3층의 접견실에는 
      
      의자가 줄지어 있었는데, 첫 번째 줄에는 사회홍보평의회 의장인 
      
      첼리(Claudio Maria Celli) 대주교님을 비롯해 각국에서 참여한 
      
      주교님들과 고위성직자들이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메일을 보냈던 실무자가 발표자들은 
      
      두 번째 줄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교황님이 참가자 전체에게 
      
      훈화를 마치신 후, 개별 알현이 시작되었고 사정상 
      
      두 번째 줄까지만 허락되었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교황님의 손을 맞잡고 친구하고 대화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발표 초대를 수락했던 것이 
      
      저에게는 교황님을 알현하는 뜻밖의 행운을 가져왔습니다. 
      
      
      오늘 복음(마태 22,1-14)의 비유에 나오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임금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께로 
      
      끊임없이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초대하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이 
      
      이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비유에서처럼 초대를 거절하고 
      
      자신의 일에 매몰되어 밭으로 가고, 돈을 벌기 위해 장사하러 갑니다. 
      
      
      자신의 일과 장사라는 현실의 삶에만 매달려 
      
      하느님의 잔치를 거절합니다.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할 때, 
      
      비유가 가르쳐 주듯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후회와 슬픔이고, 
      
      결국 하늘나라의 잔치에서 추방됩니다.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에는 하느님의 초대를 수락한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음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들여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신약에서는 마리아가 하느님의 초대를 수락하여 
      
      믿는 이의 어머니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마리아는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초대를 수락합니다. 
      
      
      신앙인의 지상 여정은 구원의 잔치를 준비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초대를 기꺼이 수락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삶의 현실에서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도 구원의 영광이 주어집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잔치에 참여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당신 /남종기 신부님
      
       
      
      
      13세기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사상가이자 시인이며 
      
      이슬람 신비주의(수피) 교단을 창시한 루미(Mevlana Jelaluddin Rumi 
      
      : 1207-1273)의 시 한편을 먼저 들려드릴까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영혼들 위에 당신의 빛을 흩뿌리신다.
       
       옷자락을 펼처 그것을 받는 자들은 행복한 자들이다.
      
       그 행운아들은 하느님 말고 다른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는다.
      
       사랑의 옷자락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 몫을 잃는다.
      
      
      
      마지막 구절의 '사랑의 옷자락(skirt of Love)'은 
      
      사랑으로 펼치는 옷자락 혹은 
      
      사랑을 담는 옷자락 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한편의 시가 오늘 복음을 새롭게 알아들을 수 있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빛을 모든 영혼들 위에 
      
      흩뿌리시듯 우리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잔치는 바로 하느님 나라, 충만한 삶, 
      
      기쁨 가득한 삶, 활기가 넘쳐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이러한 잔치의 삶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잔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사의 걱정거리들-먹을 것, 입을 것, 헛된 욕망들에 빠져 
      
      매일 번민과 고통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무언가가 부족하고, 무엇을 해도 기쁨이 없으며 
      
      활기가 없습니다. 그들의 삶은 잔치의 삶이 아닙니다. 
      
      
      그들 마음 깊은 곳에서 잔치의 삶을 원하고 있고 또 하느님께서 그들을 그 
      
      삶으로 초대하셨음에도 그들은 그러한 삶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기까지 합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우리에게 보내주신 잔치예복, 
      
      사랑의 옷을 입고 그 옷자락을 펼쳐 그분께로 향하기만 하면 될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안에서 자신이 잔치의 
      
      삶으로 초대된 것을 알고 잔치처럼 충만된 삶을 살았던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렇기에 루미는 사랑의 옷을 펼쳐 입고 하느님의 빛을 받는 사람, 
      
      잔치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행운아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의 능력을 주셨고 
      
      그 사랑의 능력이 바로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에서 잔치의 삶을 살도록 합니다. 
      
      일상의 걱정거리들을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이제 
      
      사랑의 옷자락을 펼쳐 입고 잔치에 참여할 때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영혼들 위에 당신의 빛을 흩뿌리신다. 옷자락을 
      
      펼처 그것을 받는 자들은 행복한 자들이다. 아멘.
      
      
      
      
      
      
      
      우리들의 천국 /장재봉 신부님
      
      
      
      
      천국, 얼마나 마음 설레는 말인지요? 
      
      우리는 흔히 천국을 두렵고 떨리는 
      
      심판의 결과에 따라 ‘들어가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는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 비길 수 있다”고 합니다. 
      
      천국은 외형이 으리으리한 공간적인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 
      
      즉 영적인 차원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생각하며 사랑하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기꺼이 헌신하는 마음 안에 이미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삶이 불안하고 괴롭고 힘들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팽개쳐버린 
      
      탓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내는 일을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비록 자신의 뜻을 이루어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뜻이 하느님의 뜻에 빗나간 것이라면 
      
      그 성공은 실패와도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일이 곧 죄이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서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주겠다”(에제 36,26)고 
      
      약속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천국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렇게 간절한 하느님의 마음 안에 머물면 우리는 늘 천국입니다.
      
      
      
      
      
      
      
      부르심을 받는 사람은 많지만 뽑힘을 받는 사람은 적다 /박기흠  신부님
      
      
      
      
      어제에 이어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마태 22, 14)라고 이스라엘 대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주님께 뽑히기 까지 그 삶의 수고를 
      
      다해야 하지만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지 못함을 
      
      간접적으로 탄식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늘나라란 ‘한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는 비유로 시작하십니다. 
      
      
      임금님 아들의 혼인잔치인지라 '모든 것'(4절)은 그야말로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여러 번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초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임금이 초청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자리이며, 개인에게는 그러한 자리에 
      
      초청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왕의 초청을 거절한 간이 아주 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첫 번째 왕의 초청에 '오기를 싫어하였습니다.'(3절) 
      
      왕이 다시 두 번째로 초청하였을 때 그들은 아예 그 초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4절) 그리고는 각자 자기의 일터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5절) 
      
      더욱 기가 막힌 일은 그들은 왕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고 했습니다.(6절) 
      
      
      그러자 그 대단한 사람들에게 임금이 노하였고,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라버리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입니다. 어찌 감히 임금의 명령을 거절한단 말입니까? 
      
      더욱이 보낸 임금님 자신의 종들까지 욕을 보이고 죽이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으니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임금은 그 잔치에 빈자리를 원치 않으시고, 초청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라도 그 자리를 채우라고 명하십니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구별 말고 만나는 누구든지 다 데려오니 혼인 잔치 자리에 이제야 손님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왕의 반대편에 있는 자들은 언제나 버림을 받겠지만, 
      
      반대로 그들이 업신여겼던 '이방인'들에게 그 행운이 
      
      넘어왔고, 죄 많은 우리 역시 이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임금님의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초대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격이 없는 사람이 초대를 받는 것은 오직 초대하신 
      
      분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인 우리가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하늘나라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예복은 반드시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잔치가 시작되기 전 손님들을 맞으러 
      
      나왔던 임금님의 눈에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임금님의 눈에 띄었던가 봅니다. 
      
      그가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종에 의해 
      
      아무렇게나 불려온 그들이 임금님의 수많은 종들에 의해 좋은 예복으로 
      
      잘 입혀 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복 입기를 완강히 거절하였기에 
      
      쫓겨 나갔다고 가정해보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임금님의 
      
      호통에 의해 그는 손과 발이 꽁꽁 묶여 바깥 어두움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거기서 
      
      통곡하며 슬피 울고 후회한들 이미 엎질러져 담을 수 없는 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꼭 입어야 할 그 예복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 3, 27) 우리가 받은 세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복’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똑같은 예복을 
      
      입었다는 것은 우리가 한 공동체이며, 나뉠 수 없는 연대를 상징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늘나라와 관계된 불가분의 시민들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 14)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예복을 잘 갖춰 입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정의로 살아야 할 산 신앙은 더욱 소중합니다. 
      
      
      
      
      
      
      
      하느님의 초대 /임문철 신부님
      
      
      
      
      성령기도회나 ME 강의를 나가다 보면, 가끔 
      
      사람들이 예상만큼 모이지 않아 
      
      준비한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거절해야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나마 
      
      오기로 약속한 이들마저 펑크를 내 이렇게 작은 수로 
      
      모임을 진행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합니다. 
      
      
      그럴 때 봉사자들은 “맛있는 음식을 잔뜩 
      
      준비해놓고 기다리는데 아무도 오지 않을 때처럼 
      
      황당하고 허망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인이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남편을 기다리다 
      
      늦기만 하여도 화가 날 터인데, 
      
      임금의 아들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하찮은 일상사를 돌보느라 오지 않고, 
      
      초대장을 들고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니 
      
      이런 모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임금이 진노하실 수밖에 없겠지요.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이라면서도 
      
      하느님에게 거저 얻는 구원이기에 우리가 
      
      너무 값싸게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이 하도 마음 좋은 분이시라 너무 
      
      업신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억지를 부릴 줄 모르시는 우리 주님,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끝까지 존중하시며 
      
      우리 스스로 마음을 열기를 기다리시는 우리 주님, 
      
      
      상처받을 줄 뻔히 아시면서도 
      
      또 기회를 주시는 우리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보는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김찬선신부님
      
      
       
      
      오늘 형이상학 놀이를 좀 할까요?
      
      
      德이란 무엇일까?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德이란 善과 관련한 능력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돈을 잘 버는 능력,
      
      사람을 잘 사귀는 능력,
      
      음악을 잘 하는 능력,
      
      경영을 잘 하는 능력 등.
      
      여러 가지 능력 중에서 
      
      
      德은 善을 잘 모으고, 지니고, 나눌 줄 아는 능력입니다.
      
      반면에 惡德은 惡을 잘 모으고, 지니고, 유포하는 능력이라 하겠지요.
      
      그러므로 德이 많은 사람, 즉 厚德한 사람은 
      
      남에게 善을 많이 끼치는 사람,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德에는 여러 가지 덕이 있지요.
      
      그리스 철학에서는 知義勇節의 四樞德을 얘기하고
      
      중국 철학에서는 知, 仁, 勇의 三達德을 얘기하여
      
      
      知者不惑(지혜로운 사람은 헷갈리지 않음)하고 
      
      仁者不憂(어진 사람은 걱정하지 않음)하며 
      
      勇者不懼(용기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음)함을 얘기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信望愛 3德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덕중에서 
      
      사랑이란 積善을 잘 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리 악한 것이 판을 쳐도 선을 쌓는 능력이요,
      
      아무리 누가 악한 짓을 자기에게 해도 선으로 되돌리는 능력이요,
      
      더 나아가서 자신의 德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德分, 덕을 나누어 줌으로서 
      
      많은 사람이 덕을 보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누구 德에 잘 먹었다고 하고
      
      누구 德分에 일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누구를 잘 먹게 하려면 
      
      좋은 음식을 사 줄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있던지
      
      돈이 없으면 직접 음식을 맛있게 잘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뿐입니까?
      
      좋은 음식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하지요.
      
      사랑이란 내 德을 보게 하고픈 마음의 힘, 心力이요
      
      선을 나눠줄 수 있는 能力입니다.
      
      
      오늘 복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사랑의 德을 봅니다.
      
      얼마나 사랑의 德이 많으신지 수없이 많은 사람이 德을 봅니다.
      
      
      예수님 德分에 잘 먹고,
      
      예수님 德分에 병을 고치며,
      
      예수님 德分에 팔자를 고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측은지심으로
      
      가르치시고
      
      고쳐주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善인 하늘나라를 선사하십니다.
      
      
      
      
       
      
      
      세속에 찌든 낡은 예복을 벗어 버리고 /양승국신부님
      
      
      
      
      저희 집에 있는 차 가운데서 
      
      유일한 승용차이자 제일 고급 승용차, 
      
      그래서 서로 타기 위해 경쟁이 심한 ‘비스토’가 
      
      요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며칠 전 무작정 상경했다가 죽을 고생을 다했던 
      
      한 친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귀가조치’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싶어 
      
      아이를 비스토에 태워 가까운 국철역으로 향했습니다. 
      
      
      역까지 길어봐야 5분밖에 안 되는 시간
      
      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안 씻었는지 그 ‘냄새’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너무나 지독해서 
      
      차창을 있는 대로 다 열었습니다. 
      
      그래도 못 참겠어서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앞으로 차 트렁크에 방독면을 하나 
      
      준비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는데도 
      
      차에서 냄새가 빠져나가지 않았습니다. 
      
      방향제를 뿌린다, 향수를 뿌린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합니다. 
      
      
      혼인은 인생의 여러 단계 가운데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무엇보다도 
      
      기쁨의 잔치입니다. 
      
      축복의 잔치입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에 
      
      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신경을 써야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혼인잔치 참석자들은 당연히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평소 잘 안 입던 예복도 꺼내 손질해야 합니다. 
      
      헤어스타일도 한번 점검해봐야지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제대로 씻지도 않아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예복도 아니고, 추리닝차림으로 
      
      혼인잔치에 참석한다면 
      
      잔치의 주인공들 기분이 ‘팍’ 상할 것입니다. 
      
      
      ‘형식이, 외모가, 옷, 이딴 것이 뭐 그리 중요해? 
      
       마음이 중요하지!’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게 아닙니다. 
      
      
      ‘나 하나쯤이야’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잔치의 격을 떨어트리는 일이 됩니다. 
      
      신랑신부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상당히 은유적입니다. 
      
      혼인잔치를 총괄하는 임금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혼인잔치는 천국에서의 생활입니다. 
      
      종들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하느님의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예복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갖춰야할 예의입니다. 
      
      예복은 하늘나라의 공연에 입장하기 위한 티켓입니다. 
      
      입장권 없이 연극을 관람할 수 없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서는 
      
      하늘나라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예복은 무엇보다도 성령안의 삶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쌓은 자선이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결국 예복은 예수님 그분 자신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세속에 찌든 
      
      낡은 예복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노력하길 바랍니다. 
      
      
      
      
      
      
      
      무지(無知)의 어리석음 /이수철 신부님
      
      
      
      
      단적으로 말해 하느님은 빛이고 인간은 어둠입니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밤의 어둠이 걷히듯, 
      
      하느님 현존하시면서 걷히는 인간의 어둠입니다.
      
      
      불교의 삼독(三毒), 탐진치(貪瞋痴), 
      
      즉 탐욕과 성냄과 무지의 어리석음, 
      
      바로 어둠과도 같은 
      
      인간 존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빛과도 같은 깨달음의 지혜를 통해 
      
      이런 어둠을 타파하는 것을 목표로 
      
      한 불교의 수행입니다. 
      
      
      마치 독과도 같이 인간 전 존재에 스며들어 
      
      심신을 어둡고 무기력하게 하는 탐진치의 삼독(三毒)입니다.
      
      그러나 이 셋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탐욕 자체가 어리석음이요, 
      
      탐욕이 좌절됐을 때 
      
      자연스레 뒤따르는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해를 배경으로 
      
      오늘 말씀을 묵상합니다.
      
      
      1독서 판관기의 입다, 
      
      열심히 지나치다보니 
      
      무지의 어리석음이 눈을 가렸습니다. 
      
      하느님의 심중을 헤아리지 않고, 
      
      경솔하게 일방적으로 암몬 군대에 승리를 주신다면 
      
      자기를 환영 나온 첫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합니다. 
      
      
      입다의 어리석은 서원으로 무죄한 외동 딸, 
      
      서원한 대로 번제물로 바쳐졌습니다. 
      
      교회 역사상, 
      
      무지한 지도자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죄한 이들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는지요. 
      
      
      오늘 복음의 혼인잔치 비유를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임금의  혼인잔치에 영광스럽게 초대 받은 이들, 
      
      모두 거절했다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하지만, 
      결국은 우리 모두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욕심에 귀가 먹고, 눈이 가려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초대에 응했다 해도, 
      
      복음의 예복입지 않은 사람처럼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기에 
      
      삶의 잔치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탄식처럼 흘러나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평생 경구로 삼아야 할 화두와 같은 말씀입니다. 
      
      세례로 인해 신자로, 수도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해도 
      
      뽑히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방심은 금물입니다. 
      
      
      환히 깨어있지 않으면 
      
      탐진치의 어둠이 우리를 덮어버려 
      
      부르심을 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생명의 잔치에 
      
      초대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깨끗한 마음의 예복으로 
      
      주님을 맞이하도록 하십시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94,7)”아멘,
      
      
      
      
      
       
      
      자격이 없는 자들 /강영구신부님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일의 우선순위를 잘 알고 따라야 합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거나 내일 해도 좋은 일을 지금 서둘러서 
      
      한다면 결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바느질이 급하다고 하더라도 바늘허리를 묶어서 옷을 꿰맬 수는 없습니다. 
      
      싹이 돋고 잎이 패고 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법이지, 
      
      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에 먼 사람들은 
      
      차례와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열매를 따겠다고 덤빕니다. 
      
      순리(順理)를 거스르는 어리석음일 뿐 아니라 인생을 헛살게 됩니다.
      
      
      하늘나라(天國)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잔치이자 축제입니다. 
      
      누구나 그 축제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그 축제를 즐기게 됩니다. 
      
      
      하늘의 소리보다 사욕(私慾)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사람,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기보다 욕망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잔치를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잔치는 만사를 제쳐놓고 
      
      우선적으로 응답해야 누릴 수 있습니다. 
      
      사욕(私慾)에 사로잡혀 ‘지금, 여기’의 하늘나라를 놓치는 사람은 
      
      미래의 하늘나라를 누릴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당신은 하늘나라에 초대받고 있습니다.(一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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