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인물고 권40 사자(士子)
내가 들으니, 공주(公州)의 치소(治所) 동쪽에 고(故) 태학생(太學生) 이공(李公) 휘(諱) 정환(廷煥), 자(字) 휘원(輝遠)의 정려(旌閭)와 묘(墓)가 있는데, 공은 생전에 일명(一命)의 관직(官職)도 없어서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지가 지금 20여 년이 되었는데도 향당(鄕黨)에서는 오히려 그의 행의(行義)를 칭송하며 외우는 이들이 줄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 공의 손자 이경열(李景說)이 공의 묘표(墓表)를 세우려고 나에게 찾아와서 그 글을 청하였다. 나는 이미 공의 나타나지 않은 숨은 덕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던 터에 이경열의 성근(誠謹)한 효(孝)를 중히 여겨 감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였다.
공의 관향(貫鄕)은 완산(完山)으로, 원조(遠祖) 이백유(李伯由)는 태조(太祖)를 도와서 개국 공신(開國功臣)에 책봉(策封)되었고, 5대조 이목(李穆)은 태학생(太學生) 때부터 곧은 절개로 성대한 이름이 있었는데 마침내 사화(史禍)에 죽으니 벼슬이 평사(評事)에 이르렀고 유림(儒林)들이 향사(享祀)를 올린다.
평사가 관찰사(觀察使) 이세장(李世璋)을 낳았고, 관찰사가 증(贈) 참의(參議) 이난(李鑾)을 낳았고, 참의가 군수(郡守) 증 우찬성(右贊成) 이구순(李久洵)을 낳았고, 찬성(贊成) 이 봉사(奉事) 이격(李格)을 낳았다.
봉사 이격의 배위(配位)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증 참판(參判) 신발(申潑)의 딸인데, 만력(萬曆) 갑진년(甲辰年, 1604, 선조 37)에 공을 낳았다. 공은 숭정(崇禎) 계유년(癸酉年, 1633, 인조 11)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신해년(辛亥年, 1671, 현종 12) 4월에 본주(本州, 전주) 당동(堂洞)의 집에서 졸(卒)하니 그해 10월에 만자동(滿子洞) 곤좌(坤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효행(孝行)이 독실한 사람이었다. 봉사공(奉事公, 이격)이 만년에 깊은 병을 앓았는데, 공이 상분(嘗糞)을 하여 증세를 가늠하고 북신(北辰)에 기도를 하고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서 그 피를 올리는 등, 사용하지 않은 방법이 없이 극진하게 하였다. 심지어 음식(飮食)과 약이(藥餌)며 옷을 벗겨드리고 입혀드리는 일, 눌러드리고 긁어드리는 일까지 모두 손수 직접하였다.
주머니에 콩을 담아 이마에 대고 앉아서 밤새운 것이 여러 해로, 두 눈에 눈곱이 끼고 흐려서 거의 실명(失明)하기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신 부인(申夫人)의 상사를 당하여 복(服)을 입는 6년 동안에 한번도 최복(衰服)과 수질(首絰), 요질(腰絰)을 벗은 적이 없고 조석(朝夕)으로 성묘(省墓)를 하며 이마를 짓찧고 발을 구르면서 부르짖어 통곡을 하니, 보는 자들이 감동하였다.
복을 다 마친 뒤에는 오직 향사(享祀)에 정성을 다하여 미처 다하지 못한 봉양을 추급(追及)해서 하였으니, 물품에 혹 미비(未備)함이 있었을 지라도 효성만은 남음이 있었다. 두역(痘疫)이 있을 때에는 제사(祭祀)를 꺼리고 지내지 않는 것이 잘못된 풍속으로 어디나 똑같았다.
그러나 공은 평상시와 같이 제사를 지냈는데, 얼마 안되어 아들이 두역으로 죽었다. 그러자 이웃과 마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제사지낸 것을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못들은 척하였다. 공은 부모를 섬기던 것을 미루어 제부(諸父, 백숙부)들을 섬겼고, 또 미루어 자매(姊妹)에게도 그렇게 하였다.
또한 친족이 성대하고 수가 많았으므로 인품(人品)이 고르지 않았으나, 존비(尊卑)와 소척(疎戚)간에 각각 그 분계(分界)를 적당하게 대우하니 그들의 열복(悅服)을 얻지 못한 적이 없었다. 누가 혹 서로 다투고 와서 시비를 묻는 자가 있으면 일찍이 그들의 잘잘못에 대하여 따져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공의 뜻을 알고 경청(敬聽)하고 믿고 따랐으며 감히 피차(彼此)의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공의 가르침은 말보다 먼저 있다고 인정하였다. 보통 때에는 사람들과 간격없이 친절하게 지내지만, 그러나 일의 가부(可否)를 논의할 때에 취사 선택(取捨選擇)의 정의(正義)를 분별함에 있어서는 아무리 지위가 높고 훌륭한 관직에 있는 이와 친지(親知)로서 마음을 통하고 지내는 사이일지라도 일찍이 뜻을 굽혀 용서하거나 편들어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공에게 어울리면서도 휩쓸리지 않는다고 인정하였다.
공이 젊었을 적에 과거 공부를 하여 과거장에서 명성을 날렸으나,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청국(淸國)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갓과 신[冠屨]이 상하의 위치가 바뀌어 일을 그르친 뒤부터 두문 불출(杜門不出)하고 집에만 들어앉아 비가(悲歌) 10수(首)를 지어 자기의 회포(懷抱)를 나타냈다.
그러나 이것으로 자신(自身)을 표방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미 부모(父母)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뜻을 진취(進取)에서 끊었을 뿐이다.”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독행(篤行)으로 조정에 올려서 여러 번 전조(銓曹)의 의망(擬望)에 들어갔고 현종[顯廟] 병오년(丙午年, 1666, 현종 7) 온천(溫泉)에 거둥할 적에 탁행(卓行)이 있는 자를 물으니 도신(道臣, 관찰사)이 공의 효행을 보고하니 특명(特命)으로 쌀을 하사하고 아름다움을 장려하였다.
금상(今上, 영조) 신유년(辛酉年, 1741, 영조 17)에 어사(御史)가 계문(啓聞)하니, 또 문려(門閭)에 정문(旌門)을 추설(追設)하도록 명하였다. 공의 배위(配位)는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의 손녀이고 부사(府使) 증(贈) 참판(參判) 이성남(李星男)의 딸이다.
아내로써의 현숙한 덕을 갖추고 있어서 그 후손이 창성(昌盛)하였다. 공보다 35년 먼저 졸(卒)하였으며 묘(墓)는 공과 이혈 동분(異穴同墳)이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기경(李基慶), 이기정(李基定), 무과(武科) 출신의 군수(郡守) 이기창(李基昌), 이기형(李基亨)이며, 딸은 민치중(閔致重)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도 5남을 두었다. 손자와 증손(曾孫) 이하가 수십 인인데, 비문(碑文)을 청한 자인 이경열은 바로 이기경의 계자(季子)라고 한다. 내가 이미 행장(行狀)을 상고하여 서술을 하고 또 사(辭)로 이으니, 다음과 같다.
옛날 맹자(孟子)가 벼슬을 논하되 천작(天爵)과 인작(人爵)의 다름이 있었으니,
그 가볍고 무거움의 구분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후세의 사람이 또한 어찌 공에게만 유감으로 여기겠는가?
평생 동안 이(利)를 멀리했을 뿐 아니라, 또한 명예도 멀리하였지.
이 때문에 공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가 부모를 효성으로 섬김을 알고,
선(善)을 즐거워하길 게을리 하지 않음을 알고, 세상에 구함이 없었다는 것을 알고,
지방관이 글을 올려 천거한 것이나 임금의 장려하는 명이 내린 것도 다만 독행으로 명칭한 것임을 알 뿐이다.
바다에 뛰어들어 죽겠다는 높은 절의에 이르러서는 그 자취가 작고 그 말이 은미하여 남들이 뭐라 일컬을 수가 없으니,
어찌 인멸되어 알려지지 않는 데 이르지 않는 경우가 얼마이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도 연명(陶淵明)은 쓸쓸한 한 산인(散人)이지만,
다행히도 형가(荊軻) 한 편을 지어 본상(本相)을 드러내서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의 지닌 바를 알 수 있게 했다.
만약 공의 비가(悲歌) 10수(首)가 세상에 전해질 수 있다면 또한 오래지 않아 알아줄 자가 없을런지 어찌 알리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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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國朝人物考四十 / 士子
이정환李廷煥 墓表[南九萬]
余聞公州治東有故太學生李公諱廷煥字輝遠之閭若墓, 其生也無一命官, 不得推行其愛物之心, 而下世今二十有餘年, 鄕黨猶誦其義不衰云。 今公孫景說將表公墓, 踵余乞文。 余旣嘉公之潛德, 重景說之謹孝, 不敢終辭。
公籍完山, 遠祖伯由, 佐太祖策開國勳。 五代祖諱穆, 自太學生有直節盛名, 竟歿於史禍, 官至評事, 而儒林俎豆之。 評事生觀察使諱世璋, 觀察生贈參議諱鑾, 參議生郡守、贈右贊成諱久洵, 贊成生奉事諱格。 奉事之配高靈申氏, 贈參判潑之女, 以萬曆甲辰生公。 崇禎癸酉登上庠, 辛亥四月, 卒于本州堂洞之第, 其年十月, 葬于滿子洞負坤之原。
公篤孝人也。 奉事公晩有沈淹之疾, 公嘗糞禱辰, 刲股進血, 靡極不用。 至於飮食、藥餌、脫著、抑搔, 皆手親之, 囊盛豆拄額, 坐達曉累年, 兩眼眵昏幾失明。 繼遭申夫人艱, 持制六年, 未嘗脫衰絰, 朝夕省墓, 頓踊號慟, 觀者感動。 服闋, 後惟斤斤於享祀, 以追不洎之養, 物或未備而誠自有餘。 痘疫忌祀, 謠俗同然, 而公行之如常。 俄而子以痘死, 隣黨譁然咎之, 公如不聞也。 公以事父母者, 推之以及諸父, 又推之以及姊妹。 且族大而衆, 人品不齊, 而尊卑疎戚, 各適其分, 無不得其悅服。 人或有相爭而就質者, 則未嘗察察言曲直。 而人自知公之意旨, 敬聽而信從, 無敢爲彼此言, 以此人許公敎在言先也。 平居姁姁, 與人無畦畛。 然於論事可否之際, 別白趣舍之誼, 則雖崇高、通顯與親知、許與之間, 未嘗詘意而假借, 以此人許公和而不流也。 公少治擧子業, 有聲場屋間, 及丁丑下城, 冠屨易處, 杜門不出, 作悲歌十首以寄懷。 然亦不欲以此自標, 語人曰: “吾旣失怙恃, 故絶意於進取耳。” 州人以篤行貢于朝, 屢入銓擬。 顯廟丙午行幸溫泉, 詢訪卓行, 道臣以公孝聞, 特命賜米褒美。 今上辛酉御史啓聞, 又命追旌門閭。
公配慶州李氏, 領議政文忠公恒福之孫, 府使、贈參判星男之女。 克媲賢德, 以昌其後, 先公三十五年卒, 與公異穴同墳。 有四男: 基慶: 基定, 武科, 郡守: 基昌: 基亨。 一女適閔致重。 側室有五男。 孫曾以下又數十人, 而乞文者景說, 乃基慶之季子云。 余旣按狀而敍之, 又系之以辭曰:
昔孟子論爵, 有天人之殊, 其輕重之分, 夫人皆知之, 後之人亦何恨於公哉? 獨公平生不但遠利, 亦且遠名。 以此人之知公者, 惟知其事親者而已, 樂善不倦而已, 無求於世而已。 剡章之所擧, 褒命之所及, 亦只以篤行名而已。 至若蹈海之高節, 其迹微, 其言隱, 人無得以稱焉, 幾何其不至於堙滅而無聞也? 雖然, 陶靖節蕭然一散人, 而惟幸有詠荊軻一篇露出本相, 使後人得揣其志之所存。 若使公悲歌十首得傳於世, 亦安知無朝暮遇之者歟?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