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4)-어린 시절의 시련과 연단
- 반석 이영석 -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9)
초등하교 2학년을 마치고 우리 집은 사직동에서 청계천 3가로 이사를 갔다.
그래서 나는 매일 먼 길을 통학하게 되었다.
전차를 타거나 걸어서 다녔는데 좀 힘든 거리였다.
집으로 오는 길은 광화문에서부터 종로로 걸어와서 먼저 화신 백화점에
들려 구경을 하고, 다음은 기독교 서점에서 아동도서를 읽은 다음,
파고다 공원으로 갔는데, 거기에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있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분이 몇 있었다.
여가 시간을 보낼 만한 오락기구가 없던 때라 주로 만담이나 말솜씨로
사람들을 웃겨주는 분 들이다.
어른들 틈에서 귀를 기울여 듣고서, 집으로 오면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여서 집에 도착 한다.
이런 세월이 흘러 내가 4학년 때 어머님이 재혼을 하셨는데 새로운 분이
나에게로 오셨지만, 나는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아버지로 모시기로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어릴 때부터 홀로 되신 어머님과 함께 외갓집에서
자라 왔기에 새로운 분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어색해서 마음의문을 열 수가 없게
되었다.
어머님은 새로운 분을 따라 영주로 가셨고 나는 외갓집에 남아서 학교를 다니며
외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6학년이 되었다.
어느날 서울 하늘에 낯선 비행기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면서 날아왔다. 갑자기
헌병들이 차를 몰고 다니며 스피커 방송을 하는데, 국군 장병들은 빨리 부대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공산군 비행기들이 서울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종로와 을지로 큰 거리에는 군인들을 태운 차들이 분주히 이동을
하는 것이 눈에 보이였고, 북쪽에서는 피난민들이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나타났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대포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던 1950년 6월28일 이른 아침에 나는밖으로 나갔다.
밤새 들리던 총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잠도 못잔 나는 눈을 비비고 거리에 나가니
어디서 탱크 한 대가 굴러왔다.
나는 속으로 '옳치, 우리나라를 도우러 온 미군 탱크구나 하고 생각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에 선 탱크에서 낯선 군인이 문을 쓱 열고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말로만 듣던 북한군 이었다.
'아이쿠! 큰일 났구나, 남한 땅에 이북 공산군이 벌써 들어 와 우리 군인들이
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호기심이 나서 종로 3가를 거쳐서 4가로 가보았다. 엄청난 북한군 병사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북으로 가는 미아리 방향에서 진격해 오고, 길에는 국군들의 시체와
파괴된 차량들이 여기저기 처박혀 있었다.
탱크 포에 맞은 앰불런스가 두 쪽으로 갈라 져 있어서 그 안을 들여다 보니 피와 살점들이
붕대와 엉겨 붙어 흩어져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무더운 날씨에 아스팔트가 녹아서 말랑말랑 한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탱크에 치여서
땅 속으로 쏙 들어간 것도 보았다.
그날 하루 종일 나는 종로와 을지로를 걸어 다니며 전쟁의 아픈 상처들을 직접 보게 되었다.
이날부터 서울은 집집마다 젊은이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외삼촌도 집으로 찾아오는
공산군들 때문에 시골로 도피를 해서 집에는 내가 남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공산군이 점령 한 후 서울 상공에 어느 날 엄청난 B-29 편대가 나타났다. 상공을 몇 차래
선회 비행을 하더니 폭격을 시작 하였다. 주로 공장이 밀집한 용산 지역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인민위원회에서 집집마다 한 사람씩 부역하러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집에는 내가 삽을 들고 나갔다.
사람들을 데리고 간 곳은 얼마 전에 폭격을 당한 용산이었다.
가서 보니 폭격을 맞은 장소인데, 큰 웅덩이를 메우는 작업을 하였다.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에 골아 떨어졌다. 그리고 매일 오라고 해서
나가서 무조건 공산군의 노래를 배웠다. 주로 공산군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였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였다. 영주로 가신 어머님은 소식도 없고, 집에는 외조모님과
이모님과 함께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3개월 후 인천 상륙 작전으로 성공한 유엔군과
국군이 9월 28일 서울에 들어와서 자유를 찾았다.
어느 날 시골로 피신하셨던 외삼촌이 밤중에 몰래 돌아 오셨지만, 곧 발각이 되어서
공산군에게 끌려 나가셨다. 그분은 참 기구한 운명을 가지셨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으로 끌려가셔서 고생을 하셨고, 또 공산군에 잡혀 가셨다
살아오셨으나, 서울이 수복되고는 또 국군에 나가셨다가 전사 하신 불행한 분이시다.
세월을 잘 못 만나 수명을 다 하지 못 한 분이다.
이제부터 어린 나의 인생의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계속 적어 보겠다.

가운데-(외조모님), 오른쪽-(어머니,나), 왼쪽-(외숙모), 위(이모님), 아래(외사촌)

부산 유엔군 기념 공원-묘원
첫댓글 어릴 때의 모습이나 어른이 된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금종님, 늘 관심을 갖고 댓글을 주시니 감사해요.
그시절 어려운 세상살이 였지만 부모님 사랑속이라면 그래도 행복이였을텐데,,, 불우한 가정환경을 극복하며 잘 살아오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시절은 있지요. 그러나 참고 견디고 나면 새로운 길이 열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