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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세계열강들의 식민지 확장과 선교정책
조선의 선교는 프랑스, 영국, 독일, 미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세계열강들의 식민지 확장과 맥을 잇고 있었습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제국주의의 영토확장은 욕심을 넘어 세계대전으로 확전되었습니다. 아시아의 대국 중국이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중국본토가 세계열강들의 각축장이 되면서 조선정세는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가 계속되었습니다. 지금과 달리 세계열강들의 무역상선들은 해적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화기로 중무장한 상태로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동일한 시대, 유럽과 미주지역의 선교단체들의 선교열정도 강력한 지지기반속에 식민지 국가마다 뿌리를 내리려고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1)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1876년2월27일(고종13년))
조선최초의 국제조약은 조선을 자국에 편입시키려는 일본제국주의와 강제로 체결한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1876년2월27일(고종13년))이었습니다. 강화도조약은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등으로 불리우며 근대 국제법의 기초위에 맺은 최초의 조약이지만 일본의 강압에 의한 대표적인 불평등조약입니다. 일본은 스스로가 무단침입한 “운요호 사건”을 조선에게 전가하고 3척의 군함을 동원하여 무력시위와 함께 전쟁불사를 압박하였습니다. 이에 “신헌” 접견대관과 “구로다 기요타카” 일본전권대사간의 강화도 협상끝에 조선의 청나라의 종주권을 포기하는 등 12개조항에 강제 서명함으로서 1876년 2월27일, 강화도조약(일본측,병자수교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은 이후 다른 나라들과 체결하는 조약의 기준이 되었으며 조선멸망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천황을 절대적으로 숭앙하는 나라로 향후 기독교 선교정책은 암흑기에 접어들고, 흥선대원군 이후 더 많은 순교자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피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1882년5월22일(고종19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의 미국명은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으로 1882년 5월22일 조선의 전권위원 신헌, 김홍집과 미국의 전권위원 "로버트 윌슨 슈펠트"(R.W.Shufeldt) 제독이 제물포(인천항)에서 체결한 국제통상조약입니다. 미국은 1844년 청국과 “미청망하조약”(美淸望廈條約)을 체결하고 1854년, 일본과 “미일조약”을 체결한 후 1878년 4월, 상원의원 “사전트”(Sargent, A.A.)가 조선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General Sherman號) 해결을 위해 파송된 “로저스”의 함대가 퇴각한 이후 1876년 조일조약체결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타이콘테로가”함대를 이끄는 슈펠트 제독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항에 입항하였으나 교섭이 실패하였습니다. 그때 청나라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이 일본의 조선진출을 저지하고 조선의 종주국 위상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미조약 체결을 주선하였습니다. 이후 수차례의 접촉 끝에 청나라 사신 “마건충”이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5뤌22일, 신헌과 김홍집과 슈펠트 간에 조미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미국은 “최혜국대우와 거중조정(居中調停,good offices), 관세” 등 일본보다는 다소 완화된 국제법 적용을 하여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특히 슈펠트는 조선의 청나라 속국설을 일축하고 자주독립국을 명시하려 하였으나 교섭을 위임받은 “이홍장”이 “대한종주권“(對韓宗主權)을 주장하여 별도 조회문에 속국론을 포함하여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테프트 가쓰라 밀약“(1905년,미국의 필리핀 지배권과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권)에 의해 일방 파기되고 조선은 한일합방이라는 수치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조미조약 체결후 조영조약과 조독조약이 1882년 연이어 체결되었고, 1885년에는 이탈리아와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1886년에는 조불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1892년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각각 체결됨으로서 당시 조선반도내에는 서구 열강들이 각자의 영토를 분할하며 마치 점령군과 같은 권력과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3) 견미사절단의 파견과 한국선교(1882년)
1882년, 조미조약이 체결되고 미국에서는 초대공사로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을 역임한 남미공사 “루시우스 푸트”((Lucius H. Foote,1826~1913)를 초대공사로 임명하고 5월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였습니다. 푸트의 입국과정을 지원한 19세의 “윤치호”는 조선 최초의 동경유학생이었습니다. 그가 영어를 배운지 3개월 남짓되었을때 일본 외상 “이노우에 카쿠고로우” 비서관으로부터 푸트 공사를 조선으로 모셔갈 것을 제안받고 그와 함께 제물포항을 경유하여 5월20일 고종 알현 당시 통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공사를 파견하기 어려운 조선조정의 어려운 국면을 접한 푸트가 조정에 건의하여 민영익 특명전권대사를 비롯하여 홍영식 대리공사 등 11명의 “보빙사”(報聘使)라는 최초의 외교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을 “견미사절단”이라고도 불렀습니다. 1883년 7월15일,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미국 함선 아라비스호를 타고 9월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세계적인 미항 샌프란시스코의 야경과 엄청난 규모의 항만시설과 초대형 기선들,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솟아 오른 마천루의 빌딩숲과 밤을 낮처럼 밝히는 마술같은 전기시설에 충격과 감동을 받은 견미사절단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받들었던 지난 세월을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워싱턴 백악관에서 “아더”(Arthur)대통령을 접견하고 체류 3개월 동안 박람회, 병원, 신문사, 육군사관학교, 등 미국의 생활과 제도를 배운 뒤 11월30일 미국 군함 트렌톤을 타고 조선으로 귀국하였습니다.
(4) 조선선교를 향한 외국선교사들의 기대와 소망 : 맥클레이와 엘린우드
견미사절단 보빙사의 미국 방문기간중 미국의 조선 전문가이며 “조선:은둔의 나라”(Corea:The Hermit Nation)의 저자인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와의 만남이 1883년 11월27일, 있었습니다. 민영익과 서광범(종사관)과의 만남에서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는 진전이 없었지만 희망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리교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1845~1922) 목사님이 워싱턴 백악관을 향하는 견미사절단의 열차에 동승하였습니다. 견미사절단으로부터 조선 선교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한 가우처 목사는 11월6일, 감리교 해외선교부 “파울러” 감독(Bishop C.H. Fowler).에게 5천달러의 한국선교비를 후원하고 뉴욕 감리교 해외선교위원회는 1884년 1월31일, 일본주재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1824~1907)에게 조선선교에 대한 가능성을 연구하도록 하였습니다. 맥클레이 선교사부부가 1884년 6월19일 나가사키항을 출발하여 24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였을 때 주한 미국공사 루시우스 푸트로부터 “실행가능한 운동”이라는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파송한 “나가사카”가 1883년 6월, 부산항에 입국하고 1884년 4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오스틴 탐슨”(J. Austine Thomson)부부가 일본인 “미우라(三浦),스가노(菅野)” 부부와 동반하여 조선을 방문하여 지속적인 선교정책을 타진을 하였습니다. 1885년 7월 서울을 방문한 오스틴 탐슨은 조선선교를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강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자격으로 부산에 정착했던 스가노가 1889년 사망함으로서 두 사람의 일본인 사역은 중단 되고 말았습니다. 감리교 주간지 “어드버케이트”(The Aduocate)를 비롯하여 각종 기독교 매체들이 조선 선교를 주장하는 등 미국 본국 선교부에서의 조선선교에 대한 의식은 매우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맥클레이 선교사가 일본 영사 “고바야시”(小林)를 비롯하여 미국공사 “푸트”, 서울주재 해외공관을 찾아가 협력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외무부 외위문 주사 “김옥균”을 통하여 조선선교에 대한 청원을 고종황제에게 올렸습니다. 1884년 7월3일, 고종으로부터 “병원선교와 교육”을 허용한다는 답변을 받았고 이로부터 조선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귀국한 맥클레이 선교사는 일본의 한글번역가 “이수정”을 통하여 감리교 교리문답을 한글로 번역하게 하고 아펜젤러 선교사가 일본을 경유할 때 1천부를 발행할 수 있도록 준비작업에 착수 하였습니다.
미국 감리교 본부는 조선선교를 위한 헌금을 모금하여 재정으로 인한 부담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감리교 선교부에서 의료선교사 파송을 위해 오하이오 클리브랜드 출신 “스크랜톤”(William Benton Scranton,1856~1922)과 모친 “메리 스크랜톤”(Mary Fitch Scranton,1832~1909), 그리고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1902)를 선교 후보생으로 내정하였습니다.
미국 북장로교회의 조선선교는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F.F. Ellinwood,1826~1908)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일본 장로교 선교사들을 통해 이미 일본국에 와 있는 조선인들에 대한 선교가 시작되었고, 그 가운데 “이수정”은 성경번역과 미국 선교부에 감동적인 편지를 보내 조선에 대한 미국 기독교인들을 움직인 사례가 있었습니다. 또한 미국 장로교에서는 이미 1만불의 선교헌금이 모금되어 조선선교의 실행이 가능한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일본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W. Knox)는 조선 선교의 거점으로 한양과 제물포를 정하고 의료와 교육을 통한 간접선교로서 지금 시작할 때라고 말하였습니다. 북장로교 중국 지푸(Chefoo) 선교사 “길버트 리드”(Gilbert Reid)는 1884년 4월14일 조선선교의 긴박성을 요구하며 조지 낙스와 맥을 같이 하는 내용의 편지를 미국 본부에 타전하였습니다. 엘린우드는 1884년 4월, 테네시 메리빌대학(Maryville)과 테네시 의과대학을 졸업한 “존 헤론”(John W. Heron)을 북장로교 파송 조선 선교후보생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미국 선교사상 최초의 파송선교사인 존 헤론은 1885년 6월에 조선에 입국하였습니다.
(5)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 교회 설립
➀ “김청송”의 “즙안현 이양자(裡陽子)교회” 설립(1884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출신인 “존 로스”(John Ross,1841~1915년) 중국 만주 우장지역 선교사가 1875년, 고려문에서 만난 무일푼의 한약재 상인 “이응찬”을 비롯하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서상륜”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들과 함께 성경번역사업을 하였습니다. 1881년, 로스 선교사는 만주 우장 심양에 “문광서원”이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신약성경 번역서를 출간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글을 잘 알지 못하는 중국인 식자공으로 인하여 한글번역성경을 발간할수 없게 되자 서간도 조선촌에서 “김청송”이라는 사람을 식자공으로 채용하였습니다. 성경번역 인쇄작업에 참여 하면서 김청송은 믿음을 갖게 되었고, 1883년 로스 목사로 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1882년, 누가복음 초판인쇄가 종료될 즈음에 김청송은 전도인으로서의 사역을 맡아 서간도 한인촌에서 가서 한글복음서를 전하며 전도하는 일에 주력하였습니다. 한인촌 사람들은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조선의 글로 된 책을 바라보며 마음의 위로를 받고 복음으로 은혜를 입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간도 한인촌인 즙안현에는 임오군란때 피난 온 조선인들이 대부분으로 3천명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1884년 11월 영하 20도의 서간도에 로스 목사와 “윕스터”(J-ames Webster) 목사가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75명이 세례를 받고 1885년에는 25명에게 세례를 베풀어 100명의 세례교인이 서간도 즙안현 이양자에 있었습니다. 이로서 김청송에 의하여 옛 고구려의 수도인 즙안현 이양자에 세례교인 100명으로 구성된 “즙안현 이양자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1년후, 중국인들이 조선인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에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고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굴복하지 않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권서인”을 파송하여 전도와 기독교 확장에 주력하였으며 1886년 압록강 연변지역에 이르기 까지 확장되어 갔습니다. 1898년 이성삼, 임득현을 집사로 임직하고 이양자 교회는 만주지역의 모교회가 되어 남북만주에 1천여개의 한인교회가 설립되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십여개의 “노회”와 “총회”가 조직되고 4~5개의 중학교와 신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락”은 평북 “초산교회”의 설립자가 되었습니다.
➁ 조선최초의 장로 “백홍준”(白鴻俊)의 “의주교회” 설립과 “새문안교회” 장로 추대
1874년, 고려문을 방문하였던 백홍준(白鴻俊,1848~1893)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출신인 “존 로스”(John Ross,1841~1915년) 선교사로 부터 1876년, “이성하”, “김진기”, “서상륜”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최초의 기독교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그후 로스선교사가 운영하는 “문광서원”에서 한문성경 조선어 성경번역작업에 참여하여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출간하였고, 1887년에는 “로스 번역 성서”(Ross version)“라고 불리우는 ”예수셩교젼셔”(신약성경전서)가 출간되었습니다.
1883년, 백홍준과 함께 세례를 받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 “이성하”(여,李成夏)는 출간된 복음서를 조선으로 반입하여 전도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압록강 대안인 구련성의 만주인 여관에 투숙하였으나 국경 경계에 걸려 압록강변에 버리거나 성경일부를 소각해야만 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성서가 던져진 압록강물을 마시는 자는 생명수를 마시는 것과 같고, 성서의 잿더미는 조선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될 것이라”고 이성하를 위로 하였습니다. 그후 이성하는 4복음서와 사도행전 100권을 서울 경기지역에 가져가 전도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조선정부의 외교고문인 “묄렌도르프”(Mollendorf,P.G.von,독일인,穆麟德)에게 로스 선교사의 서신을 전달해 인천세관에 압류중인 한글성경 6천권을 찾아오는데 공헌하였습니다. 1887년 9월, 언더우드 선교사가 14명의 세례교인과 함께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할 때 백홍준은 “서상륜”과 함께 최초의 장로로 추대되었습니다.
이성하가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의 복음전도사업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백홍준은 자기의 고향 의주를 중심으로 강계, 부성, 삭주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1885년 18명의 신자들이 예수를 믿고 백홍준의 자택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1889년, 이성하의 부인은 백홍준의 부인과 함께 언더우드(Underwood,H.G.) 선교사에게 압록강변에서 세례를 받고 “조선교회 최초의 여성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의주 사람 “김이련”과 그의 아들 “김권근” 등 33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이로서 “의주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892년, 로스 선교사와 “마페트”(Moffett,S.A., 馬布三悅) 목사, “게일”(Gale,J.S., 奇一) 선교사의 순회전도를 주최함으로서 이에 적개심을 가진 평안감사 “민병석”(閔炳奭)에 의해 봉천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외국인과의 접촉이 금지된 조선에서 전도선교에 앞장섰던 백홍준은 최초의 기독교 장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➂ 서상륜(徐相崙), 서경조 형제의 “소래교회”설립(1884년)
13세때 부모를 잃은 “서상륜”(徐相崙,1848~1926)은 1878년, 동생 “서경조”(徐景祚,1852~1938)와 함께 홍삼행상으로 만주로 갔다가 영구에서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행상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로스 선교사와 맥킨타이어가 운영하는 기독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가운데 복음을 접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1879년 로스 선교사(John Ross,1841~1915년)로 부터 세례를 받은 서상륜은 1882년, 로스 선교사의 “문광서원”에서 한글번역 성경출판 사업에 참여하였습니다.
1883년 봄, 봉천교회에서 전도인으로 파송된 서상륜은 복음서와 전도문서를 가지고 조선에 입국하려다 고려문에서 중국 관헌의 불신검문을 받고 별정소에 구금되었습니다. 당시 국금에 의해 처형될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 고려문 별정소에 서상륜의 먼 친척인 “김효순”과 “김천련”이 있었습니다. 의정부 집사인 두사람이 서상륜을 당 야사편으로 탈출시켜 고향 의주로 갈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습니다. 서상륜은 압수품 가운데 쪽복음서 10여권을 반환받아 의주로 가지고 들어 왔습니다. 의주에서 황해도 장연군 송천에 터전을 옮긴 서상륜은 열심히 전도하여 18명의 결신자를 얻어 1884년, “소래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서상륜이 가지고 온 성경이 바닥나자 로스 선교사님에게 성경을 요청했고, 로스 선교사는 1884년 봄, 성경 6천여권을 중국 심양에서 제물포로 탁송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천세관에서 성경 전권이 압수당하여 세관창고에 압류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인천세관 책임자인 유태계 독일인 “묄렌도르프”(Mollendorf,P.G.von,穆麟德)는 차관급 협판으로 반기독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독실한 크리스찬인 묄렌도르프의 아내에게 로스의 편지가 도착하였고, 아내의 간절한 부탁을 받은 뭴렌도르프가 6천권의 성경 전권을 서상륜에게 전달해 줌으로서 로스 선교사는 이것을 하나님의 기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 황해도 장연의 솔내와 한양을 중심으로 서상륜은 성경을 전달하며 전도에 힘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1884년 13명이 세례 받기를 원했으며, 79명이 결신하여 1887년 설립된 “새문안교회”는 한양의 대표적인 기독교회가 되었습니다. 서상륜은 새문안교회에서 백홍준과 함께 초대장로로 추대되어 조선 최초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서상륜의 동생 “서경조”(새문안교회목사)는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조선 최초의 목사 7명 가운데 1명이 되었습니다. 1900년, 솔내교회에서 당회를 조직하고 조선 최초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1907년, 서경조는 평양에서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장로교회”가 “독노회”로 출범하여 7인의 목사를 최초로 안수할 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후 황해도 장연, 옹진에서 “사우어”(史佑業, Sharp, C. E.) 선교사와 함께 “전도목사”로 섬겼으며. 1910년, “언더우드”(Underwood, H. G.) 선교사와 함께 “동사전도목사”(同事傳道牧使)로 새문안교회와 “남대문교회”와 경기 지역에서 전도로 사역하였습니다. 1911년, 언더우드의 “동사목사”로 새문안교회에서 시무하였고 1917년 경기충청노회 “근로퇴은목사”로 추대된 후 상해임시정부 요원인 아들 “서병호”(徐丙浩)와 함께 상해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첫댓글 공부해야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