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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루 응접실 ** 스크랩 불굴에 의지로 일어서라
(08)이정순 추천 0 조회 112 11.08.02 23:4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축구선수 출신 변호사, 스타 강사 된 ‘영어 벙어리’, 컴맹 IT맨… 평범했던 2030 성공인들의 ‘얌체 공부법’

신동아|기사입력 2008-01-09 14:35
[신동아]

대학 때 ‘굿모닝’ 처음 써본 체육특기생, 변호사 되다! - 이중재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뭐, 그렇게 생각했죠”



“개나 소나 사법시험 준비한대.”

올 초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경기 김포시 사우동에 나눔법률사무소를 연 이중재(32·사법시험 46회) 변호사가 7년 전, 사법시험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이랬다. 단지 어려운 시험이어서가 아니라 축구밖에 모르고 살아 학교 공부도 제대로 한 적 없는 그에게 사법시험은 그야말로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는 한때 촉망받는 축구선수였다. 김포 통진종고 시절 경기도지사로부터 최우수선수상을 받았고, 체육특기생으로 홍익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전공 수업을 빼먹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건축학과 입학이 허용됐어요. 그래서 일반 학생들을 접할 일이 많았는데, 제 수준이 한참 떨어진다는 걸 깨달았죠. 한 번은 신촌에서 미팅을 하기로 해서 나갔는데, 약속 장소인 ‘파라다이스’ 카페를 찾을 수 없었어요. 휴대전화도 없을 때라 한참을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알고 보니 간판이 영어로 씌어 있어 못 찾은 거였어요.”

이 변호사는 ‘Good morning’을 대학 때 처음 써봤다고 했다. ‘러닝’ ‘인사이드’ ‘아웃사이드’ 같은, 입에 밴 단어조차 말로만 할 줄 알았지 쓸 줄 몰랐다.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새는 좀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학교에서조차 운동선수는 운동만 하면 된다는 분위기였다.

겉만 대학생이지 기초지식조차 없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던 신입생 시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목뼈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축구선수로서의 자부심이 많이 사라졌을 때라 재활의지가 없었다. 결국 1994년 8월에 축구를 그만뒀다.

4개월 만에 공인중개사 합격

간신히 1학년을 마치고 결국 휴학했다. 그리고 찾아간 곳은 신설동의 단과학원. 6개월간 중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그해 겨울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98년에 복학했지만 사정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나마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던 동기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없었다. 제 실력으로 대학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축구도 그만뒀는데 대학을 계속 다닐 자격이 있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축구선수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반학생이 될 수도 없는 처지를 비관하며 허우적대기를 1년.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공인중개사 시험 안내서를 접했다. 뭐라도 해보자 싶어 시험공부를 시작했는데, 뜻하지 않게 재미를 발견했다.

“전에 배운 게 없어서 그런지 하나하나 알아가는 자체가 재미있었어요. 특히 민법과목이 그랬는데, 일상생활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라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공인중개사 시험 교재를 잡은 지 4개월 만에 자격증을 땄다.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자 자신감이 생겼다. 얼마 후 또 다른 시험 과목에도 그가 좋아하는 ‘민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가 서점에서 본 건 ‘사법시험 가이드’였다. 군대 시절, 고시생들이 신림동에 모여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게 기억나 짐을 싸서 무작정 신림동으로 향했다. 2000년 1월이다.

시간에 대한 강박을 버려라

“고시원에서 처음 6개월은 밥 먹고 공부만 했어요. 근데 지옥이더라고요. 집에 와서 ‘하루 12, 13시간씩 공부하는데 지옥이 따로 없다’고 얘기하니까 아버님이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라’고 하시더라고요. 같은 시간까지 아침 6시에 일어나 밭을 간 양과 8시에 일어나 밭을 간 양을 비교해봤더니 별 차이가 없었다고 하시면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다 공부에 쓰이는 건 아니니까 효율을 생각해서 적당히 하라고요. 그 뒤로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과 공부 양을 따져보니까 제겐 하루 예닐곱 시간이 가장 능률이 높다는 걸 알고 딱 그만큼만 했어요.”



그는 잡념이 들면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거나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면서 머리를 식혔다. 언뜻 듣기에 편하게 공부한 듯하다. 그럼에도 2004년 사법시험 1, 2차에 한꺼번에 합격했다. 그 사이 법무사시험에도 응시해 2002년 ‘수석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굿모닝’도 쓸 줄 모르던 그의 어디에서 이런 저력이 뿜어져 나왔을까.

“그렇게 어려운 시험이라는 걸 몰랐으니까 무모하게 덤빈 거죠. 이것저것 재지 않고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라고 생각한 게 자신감을 북돋운 것 같아요.”

법조문엔 한자가 수두룩하다. 그에겐 한자 또한 영어만큼이나 높은 산이었다. 처음엔 여자친구가 민법책에 나와 있는 한자에 일일이 독음을 달아줬다. 여자친구가 달아준 독음 덕분에 우리말로 읽을 수는 있게 되자 내용을 반복해 읽으며 한문의 의미를 추측했다.

그는 소설책 읽듯 법서를 읽었다. 모르는 단어는 위아래 맥락으로 대충 짐작했다. 여자친구가 옥편 찾는 법을 가르쳐줬지만, 모르는 한자의 뜻을 일일이 찾아볼 순 없었다. 다행히 같은 한자가 여러 번 반복해서 나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독음을 달지 않은 한자의 음과 뜻도 알아갔다. PC방에 갈 때마다 법서에서 자주 봐서 기억하는 한자의 음을 한글로 치고 한자로 변환하는 방법으로 자신이 짐작한 게 맞는지 확인했는데 틀린 적이 거의 없어 그 방법을 계속 밀어붙였다.

영어 과락, 법무사 수석합격

하지만 2001년, 2002년 연달아 1차에서 고배를 마셨다. 영어가 문제였다. 40점도 안 되는 점수를 받아 과락을 면치 못했다. 뭣 모르고 시작은 했다지만, 이쯤 되면 자신의 능력으론 역부족임을 깨닫고 나자빠져야 하는 것 아닌가.

“아뇨, 오히려 승산이 있겠다 싶었어요. 중·고등학교 수업 제대로 받고, 좋은 대학 나온 사람들도 70~80점 받는 걸, 알파벳 대문자 소문자도 구별 못하던 제가 공부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40점 받으면 잘한 거 아닌가요. 좌절할 이유가 없었지요.”

하지만 주위 사람들 생각은 달랐다. 아무래도 그가 영어를 극복하지 못할 것 같아 보였다. 2001년 사법시험 1차 불합격 소식이 전해지자, 고시촌에서 가깝게 지낸 형이 그에게 법무사시험을 보는 게 낫겠다고 충고했다. 그는 2개월여 남겨두고 법무사시험을 준비해 1차에 합격, 그 이듬해 수석으로 최종 합격했다.

법무사시험 합격은 그에게 또 한번의 자신감과 더불어 부담감을 안겨줬다.

‘법무사 수석합격자가 사법고시엔 떨어졌다고 하면 법무사 실력을 얕보겠지….’

이제 영어라는 산을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왔다. 이 변호사는 그 산을 어떻게 넘었는지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2004년부터 사법고시 1차 영어시험이 토플로 대체됐는데, 이 변호사는 토플 교재 한 권을 통째로 외웠다고 털어놨다. 그의 표현대로 ‘무식하게’ 영어를 자빠뜨리고 나자 2004년 사법시험 1, 2차에 잇달아 합격했다.

토플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다니…. 이 변호사는 축구선수 시절에도 경기에서 지고 나면 그날 경기를 처음부터 돌이켜보며 패인을 찾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 머리가 좋다 안 좋다보다 집중력과 노력의 차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흔히 천재성이다 하는 것도 결국 집중력과 노력의 결과인 것 같아요. 사법연수원에서도 불성실한 사람은 보지 못했거든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집중력을 발휘하면서 노력을 쏟아 부으면 안 될 일이 없죠.”

사법시험에 통과한 사람들이 시험 준비를 위해 읽은 책의 양을 따져보면 대략 20만~30만쪽에 이른다고 한다. 그냥 한번 세어보기도 어려운 양을 읽고, 이해하고, 그중 상당부분은 암기도 해야 할 터. 초등학교 이후로 공부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 없는 그가 이 많은 양의 책을 읽어냈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다. 이 변호사는 “늦었지만 내게 맞는 걸 찾고, 좋아서 열심히 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묵묵히 기다려준 부모님

“법은 정해진 답이 있다기보다 여러 학설이 있고 저마다 나름의 논리로 타당성을 증명해가는 게 재미있었어요. 수험생이 보는 책은 보통 20~30년의 연구 결과를 함축시킨 거라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다 이해하려면 적어도 10번은 읽어야죠. 민법책은 30번쯤 읽었어요. 같은 문장도 다시 읽으면 방점이 찍히는 위치가 달라지는데 그런 게 오히려 재미있었어요.”

이 변호사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듬해 결혼해 두 살짜리 딸을 뒀다. 딸을 어떻게 키울 생각일까.

“부모님이 초등학교만 나오시고 강화에서 농사지으세요. 공부 못한 게 한이었기에 제가 축구하겠다고 했을 때 반가워하지 않으셨죠. 하지만 결국 제 손을 들어주셨고, 제가 축구를 그만두고 무모하게 사법시험을 보겠다고 했을 때도 묵묵히 지켜봐주셨어요. 전 제가 이룬 것들이 저 혼자 힘으로 된 거라고 생각지 않아요. 부모님이 그렇게 믿고 기다려주셨기에 가능했죠. 저도 제 자식에게 그럴 거예요. 제 만족을 위해 자식을 키우진 않을 거예요.”

희망 없는 여대생에서 스타 영어강사로 - 유수연 “주어진 패 자체보다 그 패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죠”



유수연(35·YBM시사영어사)씨는 국내 최다 수강생을 자랑하는 스타 영어강사다. 한 달에 1500여 명이 그의 토익 강의를 듣는다. 온·오프 강의와 출판 등으로 연간 벌어들이는 돈이 10억원 정도. 조만간 공중파 라디오와 TV로도 진출한다니 수입은 계속 불어날 것으로 보인다. 유씨의 최종 학력은 영국 애스톤대(Aston University) MBA. 2001년 귀국해 학원 강의를 시작하기 전 미국 하얏트 호텔에 근무한 경력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그를 만든 건 외국의 명문대나 특급호텔이 아니다. 스물세 살 까지만 해도 자신이 인생의 낙오자라고 생각했고, 도망치듯 외국으로 떠나 살아남기 위해 영어를 익혔다.

1990년 대입에 실패하고 재수 끝에 경기도에 있는 강남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데모도 하고 신문사 학생기자도 하며 무난한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사회로 나가는 출구에 바짝 다가선 4학년이 되자 냉혹한 현실에 괴로워했다. 10대에 공부를 소홀히 한 대가는 ‘작은 무역회사에 취직해 커피를 타고 복사나 하다 시집가는’ 것으로 확실시되는 듯했다.

초라한 프로필을 대체할 방법은 외국에서 뭔가 이뤄오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작심한 지 꼭 한 달 만에 호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호주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빨리 떠날 수 있는 곳이었다. 대학교 휴학 처리도 남은 가족이 했다.

“미련한 편이에요. 뭘 하나 해야겠다고 결심하면 그냥 밀어붙여요. 많은 정보를 모으거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따져보느라고 머뭇거리지 않아요.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사이에 용기는 사라지고, 떠나지 못할 이유만 많아지니까요.”

‘비디오와 수다로 배운 영어’

그는 월화수목금토일조차 영어로 말할 줄 모르는 상태로 호주에 내려, 3개월 만에 영어 연수를 마치고 호주 대학에 편입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그는 자신의 영어를 ‘비디오와 수다로 배운 영어’라고 표현한다.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이 대부분인 어학연수 프로그램은 영어실력을 늘리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 호주 대학생 여러 명을 랭귀지 파트너로 정해 매일 두 명씩 정기적으로 만났다. 외국인과 단둘이 대화할 정도의 영어 실력이 안 되니 처음엔 한국 친구들과 동행해 통역을 시키기도 하고, 손짓발짓을 동원하는 건 당연했다.

랭귀지 파트너를 만나기 전에 미리 대화 주제를 정하고, 하고 싶은 얘기에 필요한 단어도 몇 개 찾아봤다. 랭귀지 파트너를 만나고 돌아오면 밤늦게까지 비디오를 봤는데 보통 한 영화를 2주일 이상 반복해 보면서 받아 적기를 했다. 문법책도 봤다. 호주 어린이들이 보는 ‘English Grammar in Use’를 보고 또 봤다.

그는 사람 만나는 걸 즐기기보다 부담스러워하는 편이라 긴장을 많이 한다. 하지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한다고, 영어를 잘하기 위해 성격을 바꾼 것이다. 일부러 약속을 잡고 의무적으로 만났다. 적극성을 갖고 수다스러워지는 게 영어 실력을 키우는 데 효과적이라면, 그렇게 해야 했다.

어학연수 3개월 만에 호주 대학 편입에 도전한 건 ‘아무런 목표 없이 막연히 하는 공부와 목표가 분명한 공부는 그 속도와 효율성에 있어 분명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 랭귀지 스쿨 중급(Beginner, Intermediate, Advanced 중 Intermediate)반에 속해 있었으니 영어를 썩 잘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호주 친구들을 동원해 집중적으로 준비한 결과 TOEFL과 비슷한 IELTS(The International English Language Testing System)에서 평소 실력보다 높은 점수를 받고 무난하게 대학에 들어갔다.

그리피스대(Griffith University)에서 마케팅 수업을 들었다. 하루 수십장씩 영어로 된 책을 읽고, 2주에 한 번 프리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고 보니 단어나 숙어, 문법 같은 걸 따져볼 겨를조차 없었다. 어떻게든 읽고 이해하고 기억해야 했다.

조기 유학의 맹점

호주에서 그렇게 1년여 생활하고 돌아와 1995년 가을부터 영어 강사로 활동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춰 조기 유학이나 해외 어학연수가 실제로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영어를 쓰는 환경에 노출됐다고 해서 무조건 실력이 늘지 않아요. 스스로 뭘 배워야겠다는 판단이 서야 영어 실력이 늘죠. 아이가 외국에 다녀와서 발음 조금 좋아진 걸로 만족하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잖아요. 영어를 습득할 목적으로 외국에 보내는 건 대학 이후가 나아요. 단순히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등록하는 것보다는 대학에서 정규수업을 받거나 기업의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게 훨씬 좋고요. 살아남기 위해, 생활하기 위해 영어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몰아넣어야죠.”

호주에서 귀국해 영어강사로 일한 지 1년 반쯤 됐을 무렵, 몸값이 한창 높아질 때 그는 다시 떠날 궁리를 한다. 스물다섯 살에 영어강사로 인생이 굳어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학원에선 “이름 있는 외국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일류대를 나온 것도 아니니 미국이나 영국의 명문대는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이 말에 그는 오기가 생겼다. 다른 유학원을 통해 영국의 몇 개 대학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현실은 유학원 직원이 파악한 것에 가까웠다. 명문대가 아닌 대학들에 원서를 냈지만 입학허가서를 보내온 곳은 하나도 없었다.

여기서 주저앉았더라도 그는 유명강사가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폭발력 있는 스타강사는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수강생 대부분이 20~30대인데, 그중 60%는 토익 점수를 올리기 위해 앉아 있고, 나머지 40%는 나를 보면서 그들도 나처럼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얻으려고 강의실을 찾는다”고 말한다.

영국 유학 첫 번째 도전이 실패하자 그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영국 대학원에 진학하게 됐다고 거짓말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우리의 교육청과 비슷한 런던의 브리티시 카운실(British Council)에서 영국 대학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1997년 당시 영국의 비즈니스 스쿨 중 톱10에 드는 학교를 간추려 지원서를 보내고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영국의 북쪽에서 남쪽까지 왔다갔다하며 인터뷰를 한 끝에 애스톤(Aston)과 리즈(Leeds), 크랜필드(Cranfield)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영국 대학원에 합격했다고 큰소리쳐놓고 떠나왔으니 합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누구나 극한상황에 몰리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요. 다만 그 극한상황으로 자신을 몰아넣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거죠.”

판단 말고, 판을 움직여라

그가 살아온 방식과 비교하면, 요즘 20, 30대는 현실에 민감해서 탈이다.

“현실을 너무 잘 아니까 자꾸 더 작아져요. 지금 20대의 가장 큰 문제는 재능이 있어 보이는데도 한발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는 거죠. 일탈이나 낙오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요. 3년 단위로 단거리만 뛰다가 대학 들어가고, 취업하고 나면 공허해지는 거죠. 그러니까 이직이 잦아지고…. 20대는 잃을 게 없잖아요. 굴러서 흙이나 먼지가 묻으면 그게 자산이 되는데, 가만히 서서 상황 파악만 하려고 하니까 기회도 운도 찾아오지 않죠.”

그는 애스톤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년여 미국 하얏트호텔에서 근무했지만 결국 영어강사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제게 그러죠. 그렇게 잘났는데 고작 강사 하냐고요. 한국에 돌아왔을 때 외국계 회사들로부터 컨설턴트 제의를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석박사가 수두룩한 곳에 들어가 승부를 걸어봤자 용의 꼬리밖에 더 되겠나 생각했어요. 반면 영어강사로 뛰면 제가 하나의 브랜드가 될 수 있겠다 싶었죠. 여긴 개인 플레이어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니까요. 서른 살 때 연봉 2억원짜리 컨설턴트 자리를 마다했는데, 지금 제 연 수입이 10억원쯤 된다고들 하니까 금전적으로 보나 활동 폭으로 보나 브랜드 가치로 보나 잘못한 선택이 아니었죠.”

그는 “패 자체보다 주어진 패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학벌보다 그 학벌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는 것. 그 역시 만약 소위 명문대를 나와 컨설턴트가 됐거나, 영어강사를 했다면 지금처럼 주목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제가 지나온 길은 하나의 샘플일 뿐,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모범답안은 아니에요. 자기 자신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해 그에 맞는 방법을 찾으면 되죠. 자신의 성향이 일반적이지 않다고 판단돼도 걱정할 건 없어요. 오히려 그 희소성이 성공요인이 될 수 있죠. ‘내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끝을 가보고 하는 얘길까요? 어떤 일이든 거기서 최고가 되면 그보다 높은 단계로 이어진다는 걸 왜 모르죠? ‘해도 안 돼’라고 하는 사람은 해보지 않은 사람이 하는 얘기고, 해보고 된 사람은 ‘운이 좋았다’고 말해요. ‘판단’은 정상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하는 거고, 정상에 가본 사람은 ‘판’을 움직이죠.”

‘無’에서 출발, 2년 만에 공인회계사 시험 합격한 - 공평식 “안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없이 무작정 시작”



지난해 공인회계사 시험에 최종 합격해 KPMG삼정회계법인에 근무하는 공평식(26) 회계사가 전문직 종사자로 안착하기까지의 과정은 군더더기가 없다. 지난 2월 홍익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기 전 이미 직장인이 됐으니 병목현상으로 정체가 심한 사회 진입로를 쾌속질주한 셈이다. 요즘 대학생으로는 드물게 어학연수나 해외 배낭여행 경험조차 없는데도 그런 결실을 보았다는 게 주목할 만하다.

공 회계사는 군복무를 마친 뒤 2004년 9월부터 회계사 시험을 준비했다. 경남 김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느 수험생들처럼 성적에 맞춰 대학에 들어갔기에, 처음부터 회계사를 염두에 두고 경영학과를 선택한 건 아니다.

“군대에 있을 때 고참들이 장래를 고민하는 걸 보면서 회계사 시험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막연히 취업 준비를 하는 것보다는 자격증을 갖는 게 더 유리하겠다고 생각했죠. 틈틈이 강의 테이프도 듣고 책도 보다가 제대하고 복학한 다음에 본격적으로 시험 준비를 했어요.”

공 회계사는 카투사(KATUSA)로 군복무를 마쳤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로부터 카투사라는 게 있다는 데 한번 알아보라는 얘기를 듣고 준비했다. 일정 점수 이상의 토익 성적이 있어야 카투사 지원이 가능한데 그 점수가 아주 높은 편은 아니어서 일단 시도했다. 학기 시작하면 수업 듣고 수업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시험 기간엔 적당히 공부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지만, 목표의식이 결여되어 있던 그에게 카투사 경험은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계기가 됐다. 해외로 나가지 않고도 영어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건 덤이다.

“영어로 군 생활을 해야 하니까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드라마와 영화를 열심히 봤죠. 자막 없이 보고, 자막 있는 걸로 다시 보면서 이해한 걸 확인하고…. 군대에서 쓰는 영어가 고급영어는 아니지만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카투사 동료나 고참들이 미래에 대해 고민하면서 성실하게 생활하는 모습이 저를 많이 자극했어요.”

지하철에서의 노력

대학에 복학하자마자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30명 남짓 모여 있는 고시반에 들어갔다. 목표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그 자체로 공부에 방해되는 요소를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목표가 다른 친구들과 소원해지는 걸 감수해야 했다. 그는 공부도 공부지만 친구들과의 약속이나 술자리에 함께할 수 없는 게 더 힘들었다고 한다. 그랬기에 더 열심히 공부해서 빠른 시간 내에 합격해야 했다.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할 때까진 학과 공부와 병행했다. 1차 시험 합격 후엔 한 학기 휴학하고 2차 시험 준비에 전념했는데,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고시반에서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그는 “충분히 자고 일주일에 하루는 늦잠도 자고 쉬면서 일정한 패턴으로 공부한 게 주효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충분히 자고’ 혹은 ‘늦잠’에 방점을 찍으면 성공할 수 없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자신감의 근원을 확인해야 한다. 2차 시험을 앞두고 그는 학교에서 왕십리 집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그날 공부한 걸 속으로 읊었다. 그러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집에 가서 확인했다.

“앉아서 책을 많이 본다고 해서 잘 쓸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읽을 땐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서술형 문제 답안을 작성해야 할 때 글이 막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렇다고 모든 내용을 쓰면서 공부할 순 없으니 집에 가는 길에 속으로 읊었어요.

이런 시험에 합격하고 불합격하는 건 머리가 좋고 나쁜 것의 차이가 아니라 집중력과 노력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우습다고 할지 모르지만, 전 지하철 안에서 공부한 걸 되새기며 속으로 읊은 것도 노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그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쉬거나 잠을 잘 수도 있는 거잖아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뿐만 아니라 지하철에서도, 잠들기 전에도 혼자 머릿속으로 공부한 걸 계속 되새기는 노력을 했기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정보수집으로 허송세월 말아야

공 회계사는 군대에서 회계사 시험을 봐야겠다고 작심하자마자 관련 책을 손에 들었고, 제대하자마자 고시반에 들어갔다. 초반엔 물론 정보 수집에 공을 들였다. 시험이 어떤 식으로 치러지고, 과목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경쟁률 등의 시험 현황은 어떤지, 누구의 강의가 평이 좋은지, 특강은 언제 어디서 하는지 꿰고 있어야 전략적으로 시험에 대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은 시간은 짧았다.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이긴 하지만 질을 담보할 수 없는 만큼 주로 선배들을 통해 걸러진 정보를 수집했다.

주위를 돌아보면 “자격증이나 공무원 시험 알아본다”고 하고 6개월 이상 어영부영 보내는 사람, 각종 시험 합격수기를 찾아 읽으며 그들이 사용했다는 교재들에 수시로 마음을 뺏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노력 않고도 합격할 수 있는 비법이나 정답만 가르쳐주는 교재는 없다.

공 회계사는 과목별로 한 종의 교재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미비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같은 고시반에 있는 친구들의 교재를 빌려 필요한 부분만 복사해서 보충했다. 그는 “합격한 사람이 어떤 교재를 사용했나보다 이러이러한 책은 안 보는 게 낫다고 알려주는 정보가 훨씬 유용하다”고 말한다.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그 시험에 해당하는 교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으면 ‘1회독’이라고 하고, 그 횟수를 경쟁적으로 늘려가는데, 그는 회독수가 중요한 건 아니라고 말한다.

“5회독 한 사람이 10회독 한 사람보다 실력이 나을 수도 있어요. 회계사 시험의 경우 문제를 몇 번 풀었느냐를 갖고 얘기하는데, 그 횟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몇 번 풀었느냐보다 모르던 걸 아는 게 중요하죠.”

공 회계사는 시험을 준비하면서 “결국 안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없었다”고 말한다. “무모하게 시작했고, 일단 시작했으니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그는 운이 좋은 사람일까.

“모든 시험엔 운이라는 게 작용하죠. 그런데 좋은 운보다는 나쁜 운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아요. 정말 열심히 공부했는데 시험 당일에 마인드 콘트롤을 못해서 제 실력을 발휘 못하고 안타깝게 떨어지는 사람이 있거든요. 반면 실력은 별로인데 운이 좋아서 합격한 경우는 못 봤어요.”

컴맹에서 ‘한국의 제리양’으로…nhn게임스 2년차 - 정무정 “열정은 기본, 핵심은 좋은 파트너십”

10대나 20대에게 인터넷은 생활이요 게임은 휴식이다. 자연스럽게 게임업계 진출을 꿈꾸는 젊은이가 적지 않다. 그러나 게임업계 취업문은 바늘구멍보다도 좁다. 대기업에 비해 채용 규모 자체가 작은데다 신입보다 경력을 선호하고, 채용 시기도 정기적이지 않다.

경희대에서 신문방송학과 e-비즈니스를 복수전공한 정무정(27)씨는 ‘IT기업에서 지적 콘텐츠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취업문을 두드려 지난해 nhn게임스에 입사했다. nhn게임스는 nhn 내 RPG(Role-Playing Game)제작센터가 독립해 만든 MMORPG (Massively Multi-play Online RPG) 제작 전문 스튜디오로 지난해 선보인 게임 ‘R2(Reign of Revolution)’가 게이머들 사이에 큰 인기다.

먼저 무식한 질문 하나. “게임만 잘해도 게임회사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글쎄요, 게임만 잘하는 사람은 PC방에 있지 않을까요.”

그도 어릴 적에 게임을 좋아하고 썩 잘 했다. 하지만 요새 유행하는 게임은 그가 푹 빠져 있던 게임과 차원이 다르다. 그가 게임업계를 포함한 IT직종에 관심을 가진 건 어린 시절의 추억과 관련이 없다.

“제대 후 복학을 앞두고 인터넷쇼핑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직원이 10여명밖에 안 되는 작은 회사가 인터넷으로 물건을 팔아 큰 매출을 올리는 걸 보고 세상이 바뀐 걸 실감했어요. 2004년에 복학해 경영학을 복수전공하면서 e-비즈니스에 관심을 갖게 됐죠.”

“제가 똑똑해봐야…”

경영학 전공 수업 중에 ‘비즈니스 모델과 방법론’이란 과목이 있었다. 우연히 듣게 된 수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경영학 중에서도 e-비즈니스로 관심영역을 구체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경전 교수님 수업이었는데 수강학생이 대여섯에 불과했어요. 부담스러울 수 있었는데 오히려 공부 열심히 하고 훌륭한 교수님과 인연을 맺는 좋은 기회가 됐죠.”

그는 잘해서가 아니라 잘 모르기에 더 공부하고, 자꾸 물으면서 이경전 교수와 가까워졌다. 그러면서 컴퓨터 실력도 늘었다. 발표를 하기 위해 파워포인트를 배우고, 자료를 찾기 위해 구글 등 각종 사이트를 옮겨 다니면서 검색 실력도 월등히 좋아졌다.



2005년에 마침 이 교수가 유비쿼터스 관련 정보통신부 프로젝트를 맡게 되자 그는 학부생임에도 연구원으로 합류했다. 졸업을 앞둔 4학년때였는데, 유비쿼터스 관련 논문 2편을 써서 해외 학회에 제출하고, 그중 한 편은 SCI(과학기술논문색인)에도 등재됐다. 그해 가을엔 야후코리아가 주최한 ‘한국의 제리양 선발대회’에서 1등으로 뽑혀 상금 2000만원을 받았다. 야후 창립자 제리양의 이름을 딴 이 공모전에 그가 친구와 함께 제안한 아이디어는 ‘마이미디어박스 서비스’. 기존의 메신저에 TV, 쇼핑몰, 대화명 댓글 같은 복합 미디어 기능을 추가한 것이다.

그는 특별한 재능이나 남다른 배경 덕분에 이 같은 성과를 거둔 게 아니다. 성과를 위해 추가로 비용을 들여 배움을 더하지도 않았다. 그는 “열정은 기본이고, 교수님과 친구 등 파트너를 잘 만난 덕분”이라고 했다.

“제가 똑똑해봐야 얼마나 똑똑하겠어요. 저 혼자서는 절대 못할 일을 좋은 파트너십 덕분에 이뤄낸 거죠. 세상에 똑똑한 사람 많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룹도 많지만, 개개인의 역량 자체보다 더 중요한 건 얼마나 재미있게 관계를 유지해서 시너지를 내느냐인 것 같아요.”

같은 맥락에서 경희대 경영전략연구동아리 ‘프로시드’ 활동은 그의 잠재력을 자극하고 승부욕을 부추겼다. 복학 후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친구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프로시드’에 가입했는데, 거기서 더 열정적인 친구들을 만나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된 것. 기업전략을 분석·수립하는 세미나와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정기적으로 하고, 기업에서 주최한 각종 공모전에 팀을 짜 도전했다.

‘나도 인생을 즐기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곧장 성과로 나타난 건 아니다. 몇 개의 공모전에 도전했다가 입상에 실패했다. 주위에 열심인 사람들이 많아서 안 좋은 점도 있다. 친구들이 하나 둘 공모전에 입상하고 상금도 타오는데, 혼자만 계속 빈손일 때의 기분이란….

그래서 2005년은 그에게 힘든 시기였다.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니 답답했다. 학부 수업에 대학원 수업도 몇 과목 들으면서 연구실 프로젝트까지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거의 매일 새벽별을 보고 잠들었다. 구로에 있는 집에서 학교까지 통학하는 시간이 아까워 학교 앞 고시원에서 생활했는데,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한 게 스윙댄스다.

“우연히 알고 찾아가 배웠어요. 스윙댄스를 배우기 시작한 뒤로는 스윙댄스를 추는 일요일만 생각하면서 나머지 6일을 버텼어요. 스윙댄스로 인해 ‘나도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 자기 암시가 가능했던 것 같아요.”

일주일에 하루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늘어지게 쉬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고 싶고, 그럴 수 있죠. 근데 관성인 것 같아요. 한번 페달을 밟기 시작하니까 가속도가 붙어서 계속 돌아가는 거죠. 그때 이미 제 자신이 많은 일을 하면서 세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춤 하나를 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는 스윙댄스 동호회에서 또 다른 부류의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일주일동안 축적된 스트레스를 해소했기에 앞서 강조한 재미있는 파트너십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흔히 “요새 대학은 취업 정거장”이라고 말한다. 번듯한 대학 간판을 이력서에 집어넣기 위해 초·중학교 때부터 전략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대학에 들어간 다음엔 토익 고득점과 해외 어학연수, 각종 봉사활동 같은 이른바 ‘스펙’을 채우는 데 공을 들인다. 그러고는 대부분 같은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그러니 병목현상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반면 정무정씨는 학과를 정할 때도, 취업전선에 나설 때도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이과였으나 광고에 매료돼 문과로 옮겼고, 결국 신문방송학과가 있는 대학 중 성적에 맞게 지원한 곳이 경희대다. 꿈이 바뀌었을 때 방향 수정을 주저하지 않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과에서 문과로 전과하고, 신문방송학에 경영학을 복수전공한 것. 지난해 졸업 후 취업전선에 나섰을 땐 디지털콘텐츠 관련 업무를 할 수 있는 기업만 물색해서 지원해 결국 취업에 성공했다.

“제가 세상을 너무 몰랐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르죠.”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그러잖아도 요즘 인생의 목표를 잡아야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글쎄, 죽기 전에 1등을 세 번쯤 더 하고 싶어요. 돌아보면 10대에 손에 꼽을 정도지만 1등을 몇 번 했거든요. 그건 혼자서 한 1등이죠. 20대엔 파트너와 함께 1등을 했는데, 혼자서 한 1등보다 성과도 기쁨도 컸어요. 30대에 50명쯤과 함께 1등을 하면 일에 대한 확신도 생기고 저 자신이 많이 달라질 것 같아요. 40대엔 200명쯤과 함께 1등을 하고, 50대엔 그보다 많은 사람과 1등을 해보고 싶어요.”

“익기 전에 뚜껑 열지 마라”

이중재 변호사, 영어강사 유수연씨, 공평식 회계사, nhn게임스 정무정씨에겐 공통점이 있다. 앞뒤 재지 않고 하고자 하는 일을 행동으로 옮긴 점이다. 이중재 변호사는 ““주위에 시작도 해보기 전에 ‘난 안 될 거야, 힘들 거야’ 하면서 지레 겁먹고 주저앉는 사람이 많은데, 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그런 건 없다”고 말한다. 유수연씨는 “자신감을 갖고 일정한 노력을 쏟아 부으면 어느 정도의 결과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며 “문제는 밥이 익기도 전에 자꾸 뚜껑을 열어보니까 밥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서 밖에서 확신을 얻으려고 하니 실력은 안 쌓이고 불평과 불안만 커져요. 성공한 사람에게서 자신과 다른 점을 찾아 자신이 성공할 수 없는 이유를 늘려가죠. 누구는 학벌이 좋아 성공하고, 누구는 집안이 번듯해서 잘나간다는 생각으로 방안에 가만히 앉아 인터넷 악플만 달고 있으면 운이 집안으로 찾아와 끌고 나갈 것 같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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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8.14 18:09

    첫댓글 좋은 경험담입니다. 많이 도움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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