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의 뜻을 그래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빠알리어에는 ‘상가sa.ngha’라고 되어 있으므로 ‘스님들’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원본처럼 ‘승가’라고 해야 합니다. 스님에게 귀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님들의 공동체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보다 부처님이 계시는 승가에 공양을 올리는 것이 더 수승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티벳불교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고 한다.
“티벳에서 삼보는 ‘사쌍팔배’만 해당합니다. 범부 스님은 귀의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쌍팔배 중에 수다원도는 아직 수다원이 아닌 범부가 아닙니까? 수다원도는 수다원을 향해서 가고 있는 사람이므로 깨닫지 못한 수행자도 해당한다고 보야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수다원도는 아직 과는 얻지 못했지만 자량도와 가행도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수행자라고 해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자량도와 가행도가 무슨 말인지 몰라 검색을 해보았다. 자량도는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가행도는 오근, 오력을 닦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든 수행자가 당연히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을 함께 닦는 것인데? 그것이 각각 단계별로 성취할 수 있는 물건인가? 수행에는 모두 요소가 함께 들어있는 것이다. 모든 수행자는 이미 자량도와 가행도를 닦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수행자는 이미 수다원과를 향해서 가고 있는 수다원도이다.
그러한 언어 분류는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승가이니 스님들이니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스님들이 곧 승가이므로 이것은 언어의 유희일뿐입니다. 차라리 우리말로 번역해서 ‘스님들’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도 쉽고 좋습니다. 요즘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는데 ‘거룩한’이라는 말은 빼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토론에 맹점이 있다. 이것은 상가sa.ngha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귀의’라는 단어에 있다. 원래는 ‘귀의처’가 아니고 ‘의지처’가 맞다. ‘귀의하다’와 ‘의지하다’는 서로 다른 위치에 있다. ‘귀의하다’는 신도들이 존경하는 대상에 믿음을 낸다는 의미가 강하고, ‘의지하다’는 존경받는 대상이 신도들에게 의지처가 되어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한 스님이 TV에 나와 신도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적절한 처방을 내린다. 세상의 힘든 삶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에 적절한 멘토가 되어준다.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덕담을 해주고 그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나마 평화롭게 해준다. 때로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삶의 지침을 내려준다. 그래서 신도들이 그 스님에게 믿음을 내어 귀의한다. 그 스님은 그들의 훌륭한 귀의처이다.
그럼 그 스님이 또한 훌륭한 의지처가 되느냐? 그건 아니다. 귀의처와 달리 의지처는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경전에서 말하는 의지처는 윤회에서의 의지처이다.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죽음 이후에 악처에 떨어지지 않고 선처에 태어나게 해주는 곳으로서의 의지처이다.
보시에 있어서 ‘삼청정’이 있다. 보시자의 청정, 보시물의 청정, 보시를 받는 자의 청정이다. 보시자의 청정은 보시하는 사람의 마음이 청정한 것을 말한다. 보시물의 청정은 보시물이 도둑이나 사기로 얻은 물건이 아닌 정당한 노동으로 얻은 물건이어야 한다. 보시를 받는 자의 청정은 보시를 받는 사람이 도과를 성취했거나 최소한 계를 청정하게 지킨 사람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그 보시가 선업으로 효력을 발생한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승가에 귀의합니다.’는 승가나 스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승가라는 단체이든 한 명의 비구이든 관계가 없다. 단체이든 개인이든 그(또는 그들)가 도과를 성취했거나 계를 철저하게 지키는 비구이어서 재가자가 그(또는 그들)에게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선처에 태어나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지처이며, 삼귀의의 원래 뜻이다. 그래서 ‘승가에 귀의합니다.’의 원래 뜻은 ‘상가에서 의지처를 구합니다.’이다.
'아라한'의 어원은 ‘거룩한 분’이나 ‘존귀한 분’이라는 뜻이 아니고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분’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당신이 신도들의 음식을 얻어먹고 그들이 그 공덕으로 선처에 태어나게 해주는 의지처가 되어줄 수 있느냐?’라고 물을 때, 아라한은 충분히 당신을 선처에 태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라한(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분)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열 가지 칭호에도 ‘아라한(응공)’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지 않은가?
영어 번역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I go for refuge to the Buddha(Dhamma, Sa.ngha)"
이 말을 정직하게 번역하면 '나는 붓다(담마, 상가)에게 피난을 갑니다.'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의역을 하면 '나는 붓다(담마, 상가)에게서 피난처를 구합니다.'이다.
영어본 번역자들이 삼귀의를 정확히 번역한 것이다.
삼귀의가 단순히 귀의의 대상이 아니다.
윤회의 홍수에서 떠내려가지 않는 안전한 피난처(의지처)를 의미한다.
“정말로 당신은 신도들의 ‘의지처’가 되어줄 수 있습니까?”
과연 그렇다면 당신은 삼귀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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