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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영생을”/요14:23-24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지식 즉, 이 세상의 지식(세상의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과 세상 철학자들의 가르침으로는 사후(죽은 후)의 세상에 대해서 도저히 바르고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전지전능하시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시는 분들이야 “하나님이 없다.”라고 하시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신(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들으라.”고 하는 것은 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불신자를 예수님 앞으로 인도할 때에는, 성경을 펴 보이며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간증이나,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라고 하면서 교회로 인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갈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약속의 말씀=예수님의 말씀=성경 말씀)을 믿는 자들(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신5: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이 언약(하나님의 말씀=성경 말씀)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있는 우리 곧 우리와(모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과=지금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과) 세우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우리(기독교인들)의 병든 영혼을 말씀으로 치료하시고 복(영생)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
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기독교인들이 하늘나라(천국)에서 복을 받고 싶다면, 성경을 읽고 듣고 지키려고 노력하시면 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듣는 것은 쉽지만, 그러나 지키는 것은 힘이 듭니다.
성경말씀을 힘써 지키려고 노력하는 기독교인들은 복을 받게 될 것이며, 반대로 성경말씀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화를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등의 신앙의 차원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믿음이 연약한 자도 있고, 장성한 자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성경말씀을 깊이 상고하여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지혜롭게 생각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성경말씀을 많이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의 지혜로(성경 말씀을 좇아) 일을 처리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세상의 지혜=사람의 지혜)을 좇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미련하게 일을 처리하게 됩니다(고전3:19).
그러면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고 한다고 해서 “내 분량은 이 정도다.”라고 고집하고, 신앙의 진보 즉 자라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되면 되겠습니까?
성경은 자라 가라고 하셨습니다.
벧후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성경을 아는 지식)이 조금씩 자라야 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슬하에 자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자녀들의 신체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 나날이 자라기를 바라시지요.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기독교인들의 성경(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자녀와 양과 포도나무(또는 가지)라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말씀)와 햇빛(성령)을 흡수하여 자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성경말씀을 좇아 신앙의 좋은 열매를 맺어서(눅6:43-44) 주님 재림하실 때 드려야 합니다.
열매 없는 가지는(신앙의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불에 던진다고 했습니다(요15:1-6).
눅13:6-7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이 무화과나무는 기독교인들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성경말씀을 멀리하고 자신의 생각과 사람의 계명을 좇아 신앙생활을 하니, 자기 자신이 생각할 때는 열매가 있는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참 열매가 아니고 전부 들포도 열매만 맺었다는 말씀입니다.(사5:2-4)
요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주의 전(우리 교파와 우리 교회)은 지극히 사모하고, 나(예수님=말씀=성경말씀)는 뒷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주의 전은(우리 교파와 우리 교회는) 지극히 사랑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성경=진리)은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다가 잠깐 이 땅에 오셔서, 말씀(복음)을 증거하시고 십자가의 피로써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기까지 하시면서 주신 성경말씀(예수님의 말씀=복음)에 등을 돌리고(렘2:27,6:10-11.호8:12), 우리 교파와 우리 교회만 자랑하니 정말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장로교의 어떤 목사들과 교인들은 ‘장로교만 아니면’ 이단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더러 많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의 교파와 교회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성경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시1:1-2).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사55:7-9) 하나님의 말씀(성경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롬10:2-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의(義) = 사람이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 옳은 행위.
집회, 부흥회, 기도회 등 쫓아다니며 사람의 교훈이나 많이 듣고, 십일조 헌금을 드리고 해봐야 교파의 교회와 목사들만 살찌고,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옳게 쓰이는 것은 별로 없고, 봉사하고 열심히 해봐야 자신의 뜻(자기의 의)대로 하니, 하나님께 열납 되어 천국에 쌓이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선행을 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데, 사람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동네방네 나팔을 부니(심지어 텔레비전에까지 나와서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나팔을 붑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갚아 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마6:1-4).
텔레비전에 나와서 나팔을 부는 목사들과 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상을 전혀 받지 못합니다.
(이런 자들은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서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으므로, “이미 이 세상에서 상을 받았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였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뜻, 그리고 자기의 의를 버릴 때 하나님의 의(성경)를 세울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성경 말씀)에 복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벌레 구더기 같은 인생이 아닙니까(욥25:6).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겸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성경말씀)에 겸손한 신앙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시고 사랑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성경 말씀)을 듣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요14:23-24).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교만하니, 하나님의 말씀(성경 말씀)을 듣는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성경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고 하였습니다.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이스라엘 백성들에게=지금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롬8:13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예수님의 말씀=복음=성경말씀)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눅8:15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듣는 기독교인들은)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음성(복음=성경말씀)을 들을 때가 오는데 곧 이 때라고 했습니다.
지금입니다.
머지않아 북한의 기독교인들처럼 성경을 보고 싶어도 마음대로 볼 수 없을 때가 반드시 옵니다.
지금 볼 수 있을 때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열심히 봐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을 마음판에 새겨야 합니다.(잠3:3)
예수님의 음성(성경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음성(성경말씀)을 듣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고 죽는다(지옥에 간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딤후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은 능히 너로(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영혼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하나님의 말씀)에 구원(영혼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고 하였으니, 기독교인들은 주야로 성경을 묵상하여 성경 말씀에서 구원(영혼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상고(詳考) = 속속들이 자세히 살펴서 생각함.
너희가(이스라엘 백성들이=지금은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성경(하나님의 말씀)에서 영생을 얻는(영혼 구원을 얻는=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속속들이 자세히 살펴서 생각)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그리스도=예수님)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라.”고 하였으니,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열심히 상고해야 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지 않고 멀리하는 기독교인들은 구원(영혼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없는 자들이며, 영생을 얻기에 합당치 않은 자들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사람(불신자)들의 속담에도 “책속에 길이 있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말씀=성경)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요14:6) 하였습니다.
“성경에 구원(영혼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고 말씀하였으니,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모르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수가 없고”(마7:21), 자신의 생각과 사람의 계명을 좇아 행하게 됨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고 하였으니 깊이 생각하여, 성경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온전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엡3:19).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라는, 한 구절의 말씀에만 너무 집착하다 보면, 신앙을 잘못하기가 쉽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딤후2:19).”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6:9-10).
육신을 위한 약을 먹는 사람들도 설명서에,
1. 식후 30분 후에 2알씩 복용하세요.
2. 임신부는 복용하지 마세요.
3. 고혈압 환자는 의사와 상의하세요.
4. 10세 이하는 한 알만 복용하세요.
만약 이렇게 쓰여 있다면 1항부터 4항까지 자세히 보고 약을 먹지, 1항만 보고 약을 먹지는 않을 것입니다.
육신보다는 더욱 귀한 영혼을 치료하는 성경을 한 구절만 주장하지 마시고 넓게 보시고 깊이 상고하여, 예수님께서 백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실 때 후회하고 통곡하는 기독교인들이 없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빕니다. 할렐루야!
측량못할 보혈의 능력/골2:1-5
사람은 내일 일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장래 일을 잘 알 수 있다면 그것도 문제일 것입니다.
가령 10년 후에 내가 어디 가서 어떻게 살며 누구를 만나고 어떤 결과로 죽게 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갖가지 일을 저지르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10년 후의 일은 물론이고 1년 후의 일도 모릅니다.
아니 당장 내일 일도 모르고 심지어 1시간 후에 일어날 어떤 사건도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눈이 먼 양들처럼 살아간다고 합니다.
양의 시력은 2-3미터 앞도 분간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목자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은 결국 내일이라는 비밀을 안고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비밀이라는 말씀이 46회 나오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바울서신에서 나옵니다.
골로새서에도 6번이나 나옵니다.
본문은,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함으로써 골로새서를 쓴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크고 비밀스런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런데 본문을 통하여 크고 놀라운 하나님이 비밀이 무엇인지 밝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받아 누리는 부요에 이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비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핵심은 보혈입니다.
이 측량 못할 보혈의 비밀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축복 받는 인생의 비결인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보혈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건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한 사건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게 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골로새서 1장 15∼19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부터 자세히 설명하며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전 15:1)”고 설명합니다.
이어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강조합니다.
바울이 믿고 전한 이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며 그 비밀의 핵심은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무한대의 가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악 가운데로 오실 수가 없고 우리 역시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장벽이 가로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어둠과 빛이 함께 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죄 있는 채 지성소에 나간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레 16:1-2)”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는 절대로 오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롬 6:23).
신약시대요, 은혜시대인 지금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장벽이 있으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이 죄를 해결해 주어야만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좇아 사람 대신에 짐승의 피로써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죄 사함을 받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그러나 이것은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 피 흘리시기까지의 그림자요, 비유에 그치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양심까지는 씻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히 9:9)”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목숨 바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롬 3:23).
육신을 지니고 있는 한,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만죄, 탐심죄, 남을 미워하는 살인죄(요일 3:15),
멋진 이성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마음에 끌리는 음란죄 등 죄를 짓고 삽니다. 마음과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온갖 죄를 짓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타락한 아담의 피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이 죄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희생을 당해야 했습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그러나 우리의 이 무거운 죄악의 짐은 짐승의 피로도, 우리의 선행으로도, 아니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들의 희생으로도 씻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결한 인격을 지니고 아무리 선행을 해도 그는 원죄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오직 죄 없으시고 거룩하신 한 분만이 우리 죄의 값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그 보혈의 가치는 도저히 인간의 계산으로는 셈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고귀한 희생인지, 얼마나 감사한 보혈인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죄악으로 사망(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찌 돈으로 계산할 것입니까?
우리가 죄를 씻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축복의 길은 주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5-6)”
예수님의 보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혈의 가치를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돈으로 비유해 봅시다.
돈에는 천, 만, 억 단위가 있습니다. 큰돈에 몇 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십 조의 현금을 받는다면 도대체 지폐가 몇 장인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조’ 위에 ‘경’이 있고 ‘경’ 위에 ‘해’가 있고 ‘해’ 위에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억->조->경->해->자->양->구->간->정->재->극 이 위에도 또 몇 단계가 더 있습니다. 3000‘극’의 돈이라면 대략 이해가 됩니까?
저는 9000억이라는 돈도 도대체 얼마나 큰돈인지 어림짐작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식의 생명을 누가 돈 많이 준다고 해서 바꿀 사람이 있겠습니까?
거룩하신 주의 보혈은 9000‘극’도 더 되는 돈으로도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가치와 능력이 있습니다. 이 주의 보혈을 힘입는 자는 모든 것을 은사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주의 보혈이 복음의 핵심이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알면 어떤 율법에도 세상적인 부귀영화에도 매여 있지 않고 무한한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9)”
반항 한 번 못하고 죽은 양 같이 묵묵히 못박히시고 찢기시며 보혈을 다 쏟으신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주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잡아당겨서는 도저히 찢을 수 없었던 휘장,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던 죄의 장벽, 성소 휘장이 이 순간 찢어져 버린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0-51)”
이것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입니다.
이것은 가장 감격적이고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영원한 은혜의 사건입니다.
이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요 확실한 승리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예수님의 보혈의 가치를 깨달은 사람은 축복의 비결을 얻은 사람입니다. 이 보혈을 받고 생활할 때 크고 비밀한 일들을 수없이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실로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비밀과 능력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이 능력을 받는 길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자기 마음을 살펴보고 행위와 율법으로는 도저히 의인이 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히 주님 앞에 나오는 길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19-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고 회개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씻기만 하면 사단 마귀의 참소도 다 물리치고 복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보혈이 그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9)”
오늘도 우리는 겸손히 주의 보혈로 씻고 어마어마한 보혈의 능력을 덧입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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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렘1:4-10, 고전13:1-13, 눅4:21-30
제목 ;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여러분도 뉴스 보도를 통해서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1980년대 후반에 ‘울고 싶어라’는 노래를 불러서 크게 히트를 쳤던 가수 이남이 씨가 지난 29일에 작고했습니다.
이 씨는 평소 하루에 2갑 이상의 담배를 피울 정도로 애연가였다고 합니다.
그처럼 담배를 즐겨 피던 그에게 폐렴 증세가 있어서 지난 해 11월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폐암이라는 선고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하기 보름 전부터 담배를 멀리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던 것입니다.
그는 투병하고 있는 동안에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마다 붙잡고 말하기를 “담배는 쉽사리 끊기가 어려우니 차라리 배우지를 말았어야 했다.”고 하면서 아주 몹시 후회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아직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예 담배를 배우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딸인 단비 씨가 말하기를 “못 말리는 애연가였던 아버지에게 담배를 줄이시라는 충고를 여러 번 했지만, 아버지는 내 충고를 들으시지 않았다”고 하면서 “투병생활을 하는 중에 ‘담배는 피우지도 말고 배워서도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하면서 흐느꼈다고 합니다.
폐암으로 죽은 연예인 중에는 코미디언 이주일 씨가 있습니다.
이주일 씨도 2002년에 62세라고 하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도 폐암으로 작고했습니다.
이주일 씨가 작고하기 전에 흡연의 피해를 말하면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금연을 적극 권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폐암 투병 중에 흡연의 해로움을 경고하는 공익광고에도 출연해서 전국적으로 금연운동을 확산시키기도 했습니다.
담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애연가(愛煙家)라 합니다.
사실은 담배를 좋아하면 ‘호연가(好煙家)’라고 해야 옳은데, 사람들은 사랑 애(愛)자를 써서 ‘애연가’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담배를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연(愛煙)이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해석할 경우, 연기를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담배를 좋아하게 될 경우, 그 몸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망치는 정도가 아니라, 나중에는 제 명(命)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담배를 사랑하게 되면, 그와 반비례해서 자기 몸을 학대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애연가라도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배운 담배를 끊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계속 담배를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피우는 정도가 아니라, 담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결과가 자기 몸을 학대하고 망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입니다.
혹시 담배를 끊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그게 쉽지 않아서 적잖이 고민하고 있는 분들을 위해서 예화를 한 가지 더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예화라기보다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개그맨 ‘박준형’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지난 28일 아침에 TV에서 밝힌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그를 닮아서 예쁜 두 딸이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딸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 엄청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일쑤 성대모사로 책을 읽어주기도 하는데, 딸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동화를 만들어서 읽어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 그야말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박준형 씨이지만, 안타깝게도 담배를 끊는 것은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네 살배기 큰딸 주니가 베란다로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나가면서 주니가 하는 말이 “담배 한대 피고 올게'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정말 많이 놀랐다고, 박준형 씨는 털어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후로 금연 결심을 단단히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화까지 만들어서 읽어줄 정도로, 딸들을 끔찍이 사랑하고 있는 박준형 씨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랑하는 딸이 아빠의 담배 피우는 모습을 흉내 내고 있었으니,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다른 방법으로 아무리 딸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 사랑하는 딸로 하여금 담배를 배우게 한다면, 딸들을 향한 그의 열
렬한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담배에는 60여종의 발암물질과 4천여 가지의 해독 물질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담배로 인해서 생길 수 있는 질병에는 폐암, 심근경색, 구강암, 인후암, 후두암, 식도암, 췌장암, 위암 등이 있고, 여성의 경우에는 자궁암, 유방암, 불임증, 유산율, 조기폐경, 골다공증의 발생위험이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혈병의 발생과도 관련이 있으며, 흡연은 동맥경화를 일으켜서 심장병을 유발한다고 합니다.
또한, 흡연은 시력에도 아주 나쁜 영향을 주어서 백내장의 발생비율도 비흡연자에 비해 두 배이고, 망막세포와 신경세포의 영양공급이 저하되어 시력장애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흡연 량이 늘수록 복부비만이 증가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기 때문에 사랑하는 딸로 하여금 담배를 배우게 한다면, 이런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딸에게 공급해주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말해주고 있는 ‘사랑 장(章)’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말하기를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질투하거나 자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잘난 체 하지 않으며, 버릇없이 행동하지 않고, 이기적이거나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야말로, 담배를 끊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사랑의 실천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나름대로 사랑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곡된 사랑이 참 많습니다.
그 왜곡된 사랑 중에는 자식에 대한 비뚤어진 사랑이 가장 많습니다.
자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서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식에게 무조건 이것저것 많이 베풀어주기만 하면 사랑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부모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많이 먹이고 잘 입히면서 공부만 많이 시키면 되는 줄 알고서 그렇게 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선생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을 보면,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 자식으로 하여금 ‘참으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끔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을 무엇인 줄알고, 그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쟁과 평화’, ‘부활’과 같은 소설을 써서 세계적인 작가가 된, 러시아 출신 ‘톨스토이’도 그의 딸에 대한 사랑이 아주 각별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열 살 된 그의 딸이 밖에 나가서 동네 아이들과 놀다가 큰 소리로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알고 보니, 동네
어떤 아이에게 막대기로 심하게 얻어맞았던 것입니다.
그 딸은
계속 슬피 울면서 아버지 톨스토이에게 말하기를 “저 심술꾸러기 녀석이 막대기로 저를 때렸어요. 제발 저 아이를 좀 혼내주세요!”하고 호소했습니다.
톨스토이는 빙그레 웃으면서 딸을 꼭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딸, 많이 아프겠구나! 그런데, 아빠가 그 아이를 때려주면, 그 아이는 계속 너와 원수가 될 거다. 그러니, 그 아이를 미워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단다. 네가 그 아이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 아이는 다시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그런 다음, 톨스토이는 햄이 들어있는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딸에게 들려주며 말했습니다. “얘야. 이걸 갖다가 그 아이에게 주지 않겠니?” 그러자, 그의 딸은 순순히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 후, 톨스토이의 딸과 그 아이는 아주 사이좋은 친
구가 되어 잘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보통의 부모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 어쩌면, 어떤 부모는 자기 아이를 막 야단치면서 “왜 바보같이 맞고만 다니느냐?”고 혼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부모는 “다른 아이가 한 대 때리면, 너는 두 대 때리면 된다.”고 하면서 그 대응방법을 가르쳐주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부모는 자기 아이를 때린 아이에게 득달같이 달려가서 그 아이를 혼내주거나, 아니면 그 부모에게 찾아가서 “자식을 어떻게 가르쳤느냐?”고 하면서 시비를 거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부모는 그런 계기를 통해서 태권도를 가르치거나 다른 운동을 시켜
서 자기 아이를 튼튼하게 키울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우리는 그런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톨스토이처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듣거나 배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우리가 과연 톨스토이처럼 우리 자녀를 가르치고 있는지요?
1.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 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습니다.
생각으로는 어떻게 해야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사랑하는 길인지 잘 알고 있지만, 막상 그런 일이 닥치면 악한 감정부터 솟구칩니다.
속이 상하고 기분이 나쁘기 때문에, 그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그만 감정이
이끄는 대로 일을 처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분노하셨다는 내용이 자주 나옵니다.
신명기 9장 19절에서, 모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두고 크게 분노하셔서, 너희를 죽이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32장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그토록 제 고집만 부리고 내 말을 듣지 않으니, 나도 이제부터는 내 맘대로 하겠다.
나를 붙잡지 말라. 내가 이 백성에게 엄청난 진노를 쏟아 부어 이 땅에서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진노하셨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질병으로 이스라엘백성을 치셨습니다.
그러면, 그제서야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나아와 눈물로 회개하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금방 다시 죄에 빠져서 하나님을 배신하곤 했습니다.
나라가 평화롭게 되어서 살만해지면,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들 멋대로 살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를 다하려 하지 않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징계하셨고, 백성들은 다시 회개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후의 방법으로 그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희생제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인지 직접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징계하면서 야단을 치신 게 아니라, 그 아들 예수로 하여금 그 죗값을 대신 치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에게 벌을 주시는 대신에 오히려 사랑과 복을 베푸셔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채찍 대신에 당근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 또한, 주님의 작은 제자가 되어서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길, 곧 용서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그 방법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2.참으로 유익하고 영원한 사랑의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더라도, 내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울리는 종과 시끄러운 꽹과리와 다를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말하기를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졌고, 온갖 신비한 것과 모든 지식을 이해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나에게 많은 능력과 재산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가 가진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헛된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저께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한 삼성전자 부사장은 서울대 출신에 스탠포드 대학의 박사학위 소지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연봉이 10억 가량 되고, 그가 가진 주식은 60억이 넘는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제 겨우 51세인 그가 자살했을까요? 그야말로 누가 보더라도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그런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원하던 승진이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이제 삼성전자는 명실 공히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다고, 어저께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약관 51세에 그런 기업의 부사장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세계 최고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건만, 그는 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교회도 다닌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더라면,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진정으로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더라면, 그처럼 허무하게 목숨을 끊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집니다.
누차 말씀드렸듯이, ‘삶’과 ‘사람’ 그리고 ‘사랑’은 동일한 어원(語原)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산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을 함으로써 그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만 제대로 알게 된다면, 환경이 아무리 열악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지금 우리는, 돈이 많은 것을 자랑해도 안 되거니와, 육신적으로 건강한 것도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좋은 집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하는 것도 무익하거니와, 아름다운 용모와 뱃살의 근육도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요즘 같으면, 고급 차를 타고 다니면서 으스대는 것도 참으로 허무한 일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오직 주님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만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입으로만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친절하고, 또한 그 허물을 덮어줌으로써, 예수님이 우리의 스승인 것을 실제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 선생은 말하기를 ‘내 소유 전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작은 사랑이라도, 사랑을 하거나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야, 참으로 유익하고 보람이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모른다면 삶의 참된 의미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 여러분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의 말씀과 그 사랑을 좀 더 깊이 깨닫고, 그 진리와 사랑 안에서 참 자유와 기쁨을 맛보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기독교의 진리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힘쓸 경우, 주님의 사랑과 그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