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1월 10일
말씀: 출33:18-19
제목: 중보기도의 중요성
제가 자주 동원해서 사용하는 단어 중에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이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드린다면 이런 것입니다.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태초’히브리어로 ‘베레쉬트’인데 창조의 출발점을 말합니다. 그리니까 그 때는 하나님이 무엇인가 창조하실 때를 말합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그 시점을 의미합니다. 물질과 시간과 공간이 처음으로 창조하실 때가 태초입니다. 우리가 측량수 없는 시간이지만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창조하실 그 시점을 의미합니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창세기 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헬라어로 ‘아르케’인데 시간의 영원성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기 훨씬 이전입니다. 그 때 말씀이 있으셨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훨씬 전에 하나님이 창조하시기 전에 존재한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닌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함께는 영어로 ‘with’입니다. 내 말은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입을 다물면 나가지 않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말도 함께 죽습니다. 이것은 존속된 계념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존속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함께 계셨다는 것은 존속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헬라어는 ‘프로스’입니다. 이 전치사에는 함께라는 단어가 있지만 ‘프로스’를 가장 정확하게 번역한 것은 ‘face to face’ 얼굴과 얼굴이 맞대어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이 맞대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기 훨씬 이전에 계신 것 입니다. 이것이 말씀입니다. 요1;1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하나님이 창조하기 전에 계신 분, 얼굴과 얼굴이 맞대어 계신 분, 동등한 분이신 그 분이 하나님이시랍니다. 하나님이 또 다른 성부 하나님과 독립된 존재로 얼굴과 얼굴이 맞대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독립된 존재로 얼굴과 얼굴이 맞대어 계신데 이 말씀이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독립된 존재,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성부하나님과 독립된 존재로 계셨던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진리에 흔들리면 안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성령하나님이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다른 영으로 오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삼위일체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요, 성령의 임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란 말입니다. 그리고 친밀한 교제라는 단어, 이것은 하나님만 구하는 것, 그러니까 시편57:7절에서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고착되었다, 고정되었다, 굳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친밀한 교통과 교제는 하나님께 고정되고 굳건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하나님, 즉 인격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성자예수그리스도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창조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하나님이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성부하나님만이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창조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수가 엄청나신 분이시라고 시편139편 17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하나님은 수가 많으시답니다. 바둑 9단은 10수를 본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마추어는 절대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수는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수가 우리의 삶에 적용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삶 가운데 중보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함께 나누어 보겠는데요, 중보기도하면 모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은 좀 정리하는 차원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33:18-19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실제적으로 몇 번을 설교를 들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의 자리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죄의 성격은 하나님의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엡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과 죄’‘허물’은 문자적으로 경로에서 떨어지다는 뜻입니다. 죄는 과녁에서 벗어나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생애를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목표와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떠난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역도금메달리스트가 후배를 폭행한 사건이 저번 주에 떠들썩하게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사재혁선수인데요, 사실 국가대표자격이 없는데, 역도의 침체된 시선을 씻어 내기위해 사재혁선수가 투입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선수로서의 경로를 벗어나고 목표와 비전에서 벗어난 것이 그를 선수생활에서 몰락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죄는 하나님이 주신 목표와 꿈에서 벗어난 것이 죄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리가 한 번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부르심을 알고, 그 부르심을 깨닫는다면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 자리에 서야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중보기도를 쉬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요.
모세의 중보기는 출32장에서는 금송아지 사건이 있었지요. 그 결과 하나님이 진멸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33장에서 진노를 돌이키고 34장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에 중요한 것은 단계적으로 모세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다시 확인해 봅시다.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를 범했을 때, 그들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출32:10‘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진멸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모세가 11절에서부터 13절까지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켰습니다. 모세의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진노를 돌이키시죠.
하나님이 진노만 돌이키실 뿐입니다. 모세가 내려와서 보니 가관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온 돌판을 던져버리고 하나님 앞에 설 자나오라 하니까 레위인들이 나옵니다. 그 레위인들에게 명령하지요 칼을 차고 그들을 쳐라 그래서 쳐서 죽인 사람들만 삼천 명에 달합니다. 철저한 구별을 의미합니다. 이 죽음은 구별을 말합니다. 처단한 후에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출32:31 ‘모세가 여호와께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그 다음 절에 33절‘누구든지’ 이제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다시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시고 천사의 능력으로 그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고비가 넘어갔지요. 그런데요 이 말의 의미는 무섭습니다. 33:3‘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왜요?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 또 다시 범죄함녀 하나님이 진멸하실까봐서 같이 안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업은 주지만 너희와 함께 안 가겠다는 것입니다. 천사의 능력으로 약속을 이루지만 하나님은 같이 가지 않겠다는 말은, 임재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 때 세 번째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 집중적으로 구합니다. 하나님을 구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교통이 있었습니다. 출33:12-13 이렇게 기도하니까 14절에서 응답이 있습니다. 너희와 함께, 나의 임재와 함께 가리라입니다.
다시 정리를 해 봅시다. 모세의 기도를 드리고 진멸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변한 것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올라가서 나를 생명책에서 제하여 달라고 생명을 건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천사와 함께 가서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안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다시 올라가서 목숨을 건기도 생명을 건기도 하나님과 친밀한 교통가운데 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다시 가겠다, 임재 하겠다는 응답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모세의 기도, 마지막기도가 오늘 본문입니다. 33:17절에서 여호와께서 응답을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모세가 무엇을 구합니까? 18절 ‘주의 영광’을 구합니다. 그랬더니 21절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내 영광이 지나갈 때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한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에 대한 행동으로 34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영광으로 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을 진멸하려고 했을 때부터 지금 영광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무엇이 깊이 작동을 했습니까? 중보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와 같은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교회에서 중보자가 나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여러분 중보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곱이곱이 때마다 모세의 기도가 있고 응답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될 것은 모세의 자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발견하고 깨달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바꾸어져야할 것입니다.
그 자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서 나와야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진멸될 위기에서 모세가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현실에 대한 심각함이나 인식이 없기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쳐해 있는 상황, 이 시대가 쳐해 있는 상황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금송아지를 만드는데 주된 역할을 했던 사람이 아론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짓는데 앞장섰고 하나님도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사태가 영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 것을 아론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론이 모세에게 금붙이를 사람들이 가지고 왔기에 불에 넣었더니 금송아지가 나온 것이라고 해명을 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백성들에게 전가합니다. 모세가 없었으면 그 죄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영적으로 위기상황임을 영적으로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을 붙들고 간곡히 중보기도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금송아지 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백성들의 타락된 신앙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인도함을 받기 까지 가장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은 모세였고 모세가 이런 과정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이끌게 된 주된 무기는 바로 중보기도였습니다. 여러분 금송아지 사건은 예배의 타락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배가 타락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고 생명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영적인 위기를 모세가 알고 중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가 타락하면 연쇄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에서 타락된 예배로 인해 하나님과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약속이 파기될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판과 임재에서 떠나는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의 타락이 하나님의 임재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임재에서 벗어난 삶을 통해 나타난 심판은 하나님 없는 삶, 자신이 주인 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내가 주인 된 예배이며, 내가 주인 된 예배는 타락된 예배인데 타락된 예배인줄 우리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큰 문제지요.
성경에는 송아지를 보고 신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송아지로 표현되었습니다. 사실 이것이 우상숭배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송아지를 섬기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여전히 섬기는데 송아지가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이지요. 사실은 거기에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사람이나 당시 중근동에 있는 사람들은 신은 네발달린 짐승위에 계시다는 사상이 있습니다. 이 사상을 알아야 금송아지사건 부분이 이해가 됩니다. 아론이 이야기한 것은 저 금송아지가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 금송아지 위에 여호와가 계시다, 그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금송아지 위에 있는 여호와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강조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백성들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타락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 분을 온전히 구하고 그 분께 내 삶을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구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기쁨을 허락하시며, 그 영광을 보고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내 자 신을 보게 되고, 철저히 내 자신의 죄성과 연약함과 영적인 타락을 보게 되고 그럴 때 하나님이 가정과 교회와 이 시대를 이 땅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와 이 땅의 죄악상을 보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중보기도의 역할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타락한 이스라엘백성들을 보고 하나님을 찾고 그 분께 중보기도 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인데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실하게 믿어지면 그 길로 갈 때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운데 도우십니다. 그래서 그 뜻을 구하기 위해 기도해야 되고요, 그리고 그 뜻이 구해졌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과 의중과 길이 보여 졌을 때도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지요. 바울은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을 땅 끝까지 이루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깨닫고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이제 가정교회를 중보기도로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바꾸게 된 배경과 당위성에 대해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분별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는 예배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내 자신을 보고 그리고 내 가정과 자녀들을 보고 이웃을 보는 영적 시각이 날마다 열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그 말씀에 비추어 나를 보고 내 가정을 보고 내 이웃을 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시작이며 가정교회에서 감당해야할 중보자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 하나 바꾸어가는, 하나 하나 변화의 삶을 추구해가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간구합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내 자신이 비추어지고 그 말씀에 따라 적용해가면 내 가정이 보이고 내 교회가 보이고 내 자녀가 보이고 내 이웃과 이 시대가 보일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 분을 찾고 그 분을 구하고 그 분께 내 삶을 드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자신을 날마다 죽여야 할 문제이고 갈등 속에 엄청난 역적인 싸움이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지요, 기도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이 일을 위해 힘쓰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보기도 아니겠습니까?
노소영씨가 신앙 간증한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트센터 나비관장, 미디어아트 전문가, 전직대학교수, 대통령의 딸, 재벌기업 회장의 부인,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에게도 기도제목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남편은 SK 분식회계 사건으로 감옥아 갔고 아들은 소아 당뇨라는 난치병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평생 인슐린을 맞고 살아야 되는 병입니다. 노소영씨는 이런 어려움 가운데 주님이 찾아오신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데요, 아이가 입원 했을 때, 허름한 누더기 옷을 입고 병실에 나타난 분이 계셨는데 눈을 뜨고 누구냐고 물어봐야하는데 너무 피곤해서 내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주님이신 것을 깨닫고 아이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아버지인 노태우전태동령을 전도할 때도 그러 어렵지 않게 전도가 되었답니다. 노전대통령은 전국 사찰에 굵직굵직한 시주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조용기목사, 하용조목사 김장환목사님들이 중보기도 해 주어서 전도가 되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 만큼 중보기도는 중요합니다. 어느 때든 중보기도가 필요 없을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지금 한국의 실정을 보십시오. 북한은 수소탄실험에 성공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고, 그래서 대북방송을 재계하면서 남 북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고, 경기는 얼마나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지 모릅니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 이런 이야기가 들릴 정도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어떻습니까? 총선을 앞두고 민생은 뒷전이고 당리당약에 편 가려기를 시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상황이 위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이 중보자의 사명을 주신 것으로 믿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중보기도가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얼마나 나약하냐하면 저 같은 경우는 꼭 해야 될 말이 아니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이런 말들은 하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결심해도 나도 모르게 하더란 말입니다. 참 나약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협력해서 서로 기도로 섬겨야할 때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각 가정교회가 중보기도체제로 바꾸었습니다. 말씀을 함께 나누고 그 말씀대로 적용하며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철저히 하나님을 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정마다 기도제목 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며,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여시며, 하나님이 지키시며, 일하심을 중보기도를 통해 확인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영명학교 때문에 자료를 찾을 일이 있어서 저장되어 있는 교회일지 기록을 쭉 보다가 중보기도하면서 응답받을 것을 쭉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성향과 기도를 통해 받는 내용들을 기록해 놓았는데, 2001년부터 기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전 것도 어딘가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을 확인하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고 하나님이 여신 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정말 중보기도가 중요하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유혹으로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혹적이고 매력적이고 달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어떤 가치와 어떤 영광과 세상의 어떤 보상보다 더 크고 더 가치 있고 더 영광되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신 길을 순종하며 가는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이런 축복의 여정 속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중보기도며 이 중보기도가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고 축복인지를 중보기도에 동참함으로서 깨닫고 확인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