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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慶宮의 밤 경치를 둘러보다
5월 17일(음력 4월 11일∙火) 19:00부터 昌慶宮의 夜景을 둘러보았다.
창경궁은 3월부터 10월까지 4번에 걸쳐 야간에 개장하는데 관람시간은 19:00 ~22:00(입장
마감 21:00)이며, 관람할 수 있는 지역은 弘化門·明政殿·通明殿·春塘池·大溫室 일대이다.
(대온실 내부관람은 불가)
19:00에 문을 열자마자 입장했는데 5월 17일 서울의 日沒時刻이 19:35로 청사초롱에는
불을 밝혔으나 아직 夜景을 볼 수 없어 禁川과 玉川橋지역을 보고 弘化門 北行閣을 지나
창경궁 後苑 쪽 春塘池로 향하였다.
춘당지를 시계반대방향으로 돌면서 춘당지 끝에 있는 大溫室 앞을 지나 연못을 한 바퀴 돌고
집복헌-통명전-경춘전-환경전-문정전-명정전-명정문-옥천교로 돌아 오니 19:45경,
이제 겨우 날이 어두워져 건물에 照明이 비추기 시작하였다.
원래의 목적인 昌德宮 주요 殿閣의 夜景을 보려고 다시 玉川橋-明政門-明政殿-文政殿-歡慶殿-
景春殿-通明殿-集福軒과 迎春軒을 거쳐 明政門 北行閣의 永淸門을 지나 明政門-弘化門인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사진을 本殿지역의 夜景을 먼저 올리려고 踏査順序와는 다르게 明政殿지역과 歡慶殿-
通明殿 지역을 먼저 올리고 春塘池 지역을 나중에 올리면서 창경궁 전체를 시계방향으로
볼 수 있도록 춘당지 지역도 시계방향으로, 답사한 순서와는 달리 반대 순서대로 사진을
올렸으니 諒知하기 바란다.
昌慶宮의 밤 경치를 둘러보다(2-1); 弘化門-明政殿-通明殿 지역
昌慶宮의 밤 경치를 둘러보다(2-2); 迎春軒-春塘池-玉川橋 지역
2016.05.20 孤 山 朴 春 慶
昌慶宮 -사적 제123호-
조선시대 別宮으로 世宗에게 王位를 물려준 太宗이 거처하다 昇遐한 壽康宮(1418년 건립) 터에
成宗 14년(1483) 貞熹王后(世祖 妃), 昭惠王后(推尊 德宗 妃/成宗 母后), 安順王后(睿宗 繼妃)등
3명의 大妃를 위해 昌慶宮을 건립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明政殿·文政殿의 正殿과 壽寧殿·歡慶殿·景春殿·仁陽殿·通明殿 등의 寢殿 및 養和堂·
麗暉堂· 思誠閣이 있었으며 昌慶宮은 昌德宮의 부족한 생활공간을 보충하여 왕과 왕비뿐 아니라
後宮, 公主, 宮人들의 處所로도 사용되었다.
前朝後寢∙左右對稱 등 일정한 원칙에 따라 건립된 景福宮에 비하여 창경궁은 建築形式과
制度 面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건립되어 宮闕은 南向이 원칙으로 生活空間은 남향이나 궁궐의
중심부분은 東向으로 배치되었는데 이는 동쪽에 있는 王室 동산인 含春苑과 洛山을
바라볼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라고 한다.
창경궁이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으로 漢陽의 궁궐이 모두 燒失된 후,
昌德宮과 함께 다시 건립되어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으며, 仁顯王后를 毒殺하려다
處刑된 肅宗의 嬪 張禧嬪이 就善堂에 神堂을 차려 놓고 생활했으며, 英祖의 아들 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宣仁門 안뜰에서 죽은 곳이다.
창경궁은 궁궐로서 독립적인 규모를 갖추기는 했으나 당시에 왕이 寄居하면서 政事를 보는
궁궐로는 거의 쓰이지 않고 昌德宮의 부족한 기능을 일정 부분 보완하는 궁궐로서 자리잡게
되었으며 중심 殿閣의 규모가 비교적 작게 건립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궁궐 복구가 시작되어 光海君 7년(1615) 임금이 重建된 昌德宮으로 移御하면서
다음해에 昌慶宮 중건이 이루어졌으나 仁祖 2년(1624) ‘李适의 亂’으로 창덕궁과 함께 또다시
소실되어 인조는 敬德宮(慶熙宮)에서 9년간 머물다가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창덕궁으로 돌아와
이듬해인 仁祖 11년(1633) 광해군 때 인왕산 밑에 지은 仁慶宮의 殿閣을 옮겨 공사를 완료하였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와 修理가 이어지다가 純祖 30년(1830) 큰 화재로 많은 전각이 불길에
싸여 창경궁의 복구는 순조 33년(1833)에 이루어지면서 통명전을 비롯하여 환경전·경춘전·
숭문당·함인정·양화당·영춘헌·오행각 등을 重建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내전의 전각은 대부분
이때 건립된 것들이다.
純宗 卽位 후 창경궁은 日帝에 의하여 크게 훼손되었는데 1909년(純宗 3) 宮 안의 殿閣들을
헐어버리고 動物園과 植物園을 설치하고, 宮苑을 일본식으로 변모시켰으며, 韓日合倂條約 이후인
1911년에는 昌慶宮을 昌慶苑으로 格下시켰을 뿐만 아니라 창경궁과 宗廟를 잇는 산줄기를
절단하여 도로를 開設하고, 궁 안에는 日本國花인 벚꽃나무를 수천 그루나 심고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시작하였다.
光復 이후에도 오랫동안 관광시설로 이용되다가 1983년 宮闕 復元事業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昌慶宮>으로 되찾았고, 궐 안에 있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를
제거하여 소나무·느티나무·단풍나무 등으로 교체하고 한국 전통의 園林을 조성하는 등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苦難을 많이 겪었으나 昌慶宮은 莊祖·正祖·純祖·憲宗 등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이며, 光海君 때
다시 건립한 正門·正殿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바로 옆 昌德宮과 함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遺蹟이다.
昌慶宮의 밤 경치를 둘러보다(2-1); 弘化門-明政殿-通明殿 지역
(01) 昌慶宮 弘化門 -보물 제384호-
창경궁의 正門으로 成宗 15년(1484)에 건립하였으나 壬辰倭亂(1592) 때 불에 타,
光海君 8년(1616) 再建하였으며 지금 있는 건물은 그 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홍화문 앞에서 국왕이 백성을 친히 만나기도 하고 앞에 있는 王室 언덕 含春苑에 활터를
세워 武科試驗을 치르기도 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正殿인 明政殿과 함께 東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02) 창경궁 <弘化門> 편액과 栱包
(03) 창경궁 홍화문 지붕
(04) 창경궁 홍화문 안쪽 모습
(05) 玉川橋와 明政文
옥천교는 정문인 弘化門에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禁川인 玉流川을 가로 질러 있는
길이 9.9m, 너비 6.6m의 다리이며, 明政門은 中門이다.
(06) 昌慶宮 玉川橋 -보물 제386호-
창경궁 옥천교는 전체적인 형태는 半圓아치형태의 紅霓 2개를 이어 붙여 안정감이 느껴지며,
궁궐의 다리에 맞는 양식과 조각이 특별하며, 특히 다른 궁궐의 어느 것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어 이 다리만 보물로 지정되었다. 건립된 시기는 창경궁을 건립한
成宗 14년(1483)으로 보고 있다.
(07) 옥천교의 도깨비얼굴[鬼面]
홍예가 이어지는 공간에 억센 표정의 도깨비얼굴을 새겨놓았는데, 공간에 맞추려는 듯
이마가 넓고 턱이 좁아 逆三角形을 이루고 있으며 다리의 上∙下流 양쪽에 두어 이 곳을 오
가는 이들을 보호하려는 意圖로 보고 있다.
(08) 昌慶宮 明政門 및 行閣 -보물 제385호-
成宗 15년(1484) 창경궁을 세울 때에 지었으나 壬辰倭亂으로 불에 타 光海君 때 다시
지었으며, 행각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일제시대에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이다.
건물의 짜임이 착실하고 알차 조선 중기의 門을 대표할 만하고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宮闕 中門建築 연구에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09) 명정문 추녀 위에 뜬 달 -음력 4월 열 하루 초저녁 오후 8시 17분-
(10) 昌慶宮 明政門 行閣
명정문과 朝廷을 둘러싸고 있는 行閣은 왕실 親衛部隊의 주둔지나 왕실의 初喪을 치르기
위한 齋室로도 사용되었다.
(11) 昌慶宮 朝廷과 明政殿. 조정 바닥에는 薄石이 깔려 있고 品階石이 놓여 있다.
(12) 昌慶宮 明政殿 -국보 제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正殿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며, 外國 使臣을 접견하던 곳으로 成宗 15년(1484)에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光海君 8년(1616)에 再建하였다.
景福宮의 勤政殿과 昌德宮의 仁政殿이 2층 규모로 거대하게 건립되었으나 昌慶宮 明政殿은
궁궐의 정전으로서는 작은 규모이나 朝鮮 前期 建築樣式의 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는 건물로
建築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3) 창경궁 명정전 月臺와 계단과 소맷돌
(14) 창경궁 <明政殿> 편액과 서까래 및 공포
(15) 창경궁 명정전 꽃살창문과 그 위에 설치된 光窓
(16) 창경궁 명정전 御座와 日月五嶽圖 병풍
(17) 창경궁 명정전 추녀
(18) 명정전 月臺에 설치된 靑銅製 드므
드므는 궁궐 正殿과 같이 중요한 건물 월대 네 모퉁이에 防火水를 담아 놓는 靑銅이나 돌로
만든 그릇으로 木造建築物은 불에 약하기 때문에 火魔를 막기 위하여 象徵的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화마는 너무 험상궂게 생겨 불 내러 왔다가 드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간다고 한다.
(19) 昌慶宮 崇文堂
明政殿 뒤에 있는 殿閣으로 ‘학문을 숭상한다’는 의미의 崇文堂은 光海君 때 창경궁이
건립되면서 지은 것으로 보며, 英祖가 太學生들을 접견하고 酒宴을 베풀었으며,
<崇文堂> 편액은 英祖 御筆이며 純祖 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
(*太學生: 成均館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던 儒生)
(20) 昌慶宮 文政殿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신하들과 御前會議를 열고 의견을 나누던 便殿으로
成宗 15년(1484) 창경궁이 창건될 때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明政殿과 함께
중건되었으며, 思悼世子가 뒤주에 갇혀 죽은 徽寧殿이 文政殿의 옛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日帝의 창경궁 파괴작업으로 철거되었다가 1986년에 복원되었으며 2006년 4월 방화로
일부가 불타기도 했다.
(21) 창경궁 <文政殿> 편액과 지붕
(22) 창경궁 文政殿 御座와 日月五嶽圖 병풍
(23) 문정전 井字살창문
(24) 昌慶宮 涵仁亭
이곳은 成宗 때 건립한 仁陽殿이 있던 자리로 임진왜란으로 燒失되어 仁祖가 1633년
仁王山 아래 仁慶宮에 있는 함인정을 헐어 이곳에 涵仁亭을 건립하였으며 純祖 30년(1830)
昌慶宮 火災로 全燒되어 1833년에 重建하였다.
(25) 창경궁 함인정 천장
四季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陶淵明의 <四時>가 계절별 방향에 맞춰 천장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봄에 물은 못마다 가득하고
夏雲多奇峰(하운다기봉) / 여름 구름 묘한 봉우리 많기도 해라
秋月楊明輝(추월양명휘) / 가을 달은 높이 떠 밝게 비추고
冬嶺秀孤松(동령수고성) / 겨울 언덕 소나무의 외로움이 아름답구나
(26) 昌慶宮 五層石塔 (*어두워지기 전 오후 7시 31분의 모습)
明政殿 뒤 歡慶殿 동쪽에 있는 고려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五層石塔은 일제시대
창경궁으로 移建 된 것으로(이 석탑의 본래 위치가 어디였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어느
절에 있었는지 알지도 못한다) 日帝强占期에 日帝는 ‘蒐集’이라는 명분으로 전국의
사찰에서 석탑, 석등 등을 옮겨와 조선의 궁궐 곳곳에 배치, 전시하였다.
日帝는 朝鮮宮闕을 格下시키기 위하여 昌慶宮을 昌慶苑으로, 또 불교 사찰의 石塔을
궁궐로 옮겨 조선시대 <抑佛崇儒 政策>의 本據地인 朝鮮王宮으로 移建하여 宮闕과
寺刹을 동시에 격하시키는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孤山 생각)
*경복궁에도 궁궐을 毁損하면서 여러 基의 석탑을 옮겨 설치했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이
西氷庫로 옮기면서 石造物도 같이 移建 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 옆 야외에 있는 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국보 제101호)은 老朽되어
移建하지 못하였으나 지난 5월 4일에 보니 補修한다고 철거된 상태임.
(27) 昌慶宮 五層石塔 (*조명을 받은 오후 8시 2분의 모습)
(28) 昌慶宮 景春殿과 歡慶殿(오른쪽)
(29) 昌慶宮 歡慶殿
通明殿, 景春殿, 養和堂과 함께 창경궁의 內殿을 구성하는 歡慶殿은 成宗 15년(1484)
창경궁이 창건되면서 임금이 寄居하는 寢殿으로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어
光海君 때인 1616년에 再建, 1624년 李适의 亂으로 燒失, 1633 復元, 純祖 30년(1830)
창경궁 大火災로 소실, 1833년에 또다시 복원되었다.
환경전 앞에는 恭默閣이라는 行閣이 있고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져 있었으나 지금은 건물의
본채만 남아 있다.
(30) 창경궁 환경전 正面
(31) 환경전 정면 띠살창문
(32) 환경전 동쪽 측면 井字살창문
(33) 昌慶宮 景春殿
王后가 거처하던 內殿으로 창경궁을 처음 지은 成宗 15년(1484)에 건립, 임진왜란으로
燒失, 光海君 8년(1616) 再建, 純祖 30년(1830) 창경원 대화재로 소실, 1834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경춘전은 왕비의 産室廳으로도 쓰여 正祖와 憲宗이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正祖는 자기의
탄생을 기념하여 내부에 <誕生殿>이라는 御筆 현판을 걸었다.
(*産室廳: 王妃와 世子嬪의 출산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관청)
德宗(追尊) 妃이며 成宗의 母后 昭惠王后, 肅宗 繼妃 仁顯王后, 追尊 敬懿王后(惠慶宮 洪氏)가
昇遐한 곳이다.
(34) 昌慶宮 <景春殿> 편액. 純祖 御筆
(35) 창경궁 경춘전 띠살창문
(36) 昌慶宮 通明殿 -보물 제818호-
창경궁 寢殿의 중심건물로 넓은 月臺를 쌓고, 중앙 3칸의 마루 양쪽은 온돌방으로 왕과
왕비의 寢室이다.
成宗 15년(1484) 건립, 임진왜란으로 燒失, 光海君 8년(1616) 重建, 仁祖 2년(1624)
李适의 亂으로 전소, 仁祖 11년(1633) 복구, 正祖 14년(1790) 다시 화재로 소실되어
純祖 33년(1833) 重建하였다.
昌德宮 內殿 중에서 가장 큰 건물로 옛 格式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19세기 건축 양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건물이다.
月臺에서는 古宮音樂會가 열려 한국문화재재단 예술단이 國樂 室內樂을 연주하고 있다.
(37) 창경궁 통명전 井字살문
(38) 昌慶宮 通明殿
앞면 7칸∙옆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으며
<通明殿> 편액은 純祖 御筆이다.
(39) 통명전 서쪽 우물
(40) 통명전 서쪽 우물 아래 돌난간을 두른 연못
(41) 통명전 서쪽 우물 아래 돌난간을 두른 연못과 돌다리
(42) 昌慶宮 通明殿과 養和堂(오른쪽)
(43) 昌慶宮 養和堂
大妃의 寢殿으로, 丙子胡亂 때 南漢山城으로 피란했던 仁祖가 還宮하여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高宗 15년(1878) 哲宗 妃 哲仁王后가 승하한 곳이며, 편액은 純祖 御筆이다.
成宗 때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 光海君 8년(1616) 재건된 후에도 몇 차례 화재를
겪고 純祖 34년(1834) 再建되어 오늘에 이른다.
(44) 양화당 띠살창문
(45) 양화당 추녀
(46) 계단 위에는 昌慶宮 風旗臺가 있고 서쪽(창덕궁쪽)에는 慈慶殿 터가 있다.
大妃의 寢殿인 慈慶殿은 正祖가 모친 惠慶宮 洪氏를 위하여 앞쪽으로 멀리 思悼世子의
祠堂인 景慕宮을 향하도록 전망이 좋은 곳에 건립하였으며 뒤쪽에는 아름다운 계단식
後苑이 있었다.
<閑中錄>의 産室인 이 건물은 19세기 후반에 철거되고 日帝强占期에는 근대적 왕실도서관인
藏書閣이 들어섰다가 1992년에 철거되었다.
*야간에는 출입금지이며 전에 찍었던 사진을 다음 편 끝부분에 올린다.
-昌慶宮의 밤 경치를 둘러보다(2-2); 迎春軒-春塘池-玉川橋 지역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