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
나라가 자주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면 제일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 말과 글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세월을 약 40년으로 잡습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는 세월의 영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 언어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일본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노동과 관련된 말들입니다.
“노가다, 땡깡, 빵구, 리야카” 등입니다.
그리고 또 대표적인 말이 무대뽀라는 단어입니다.
"분별없이" "무모하게"라는 뜻의 일본어입니다.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사랑의 밀어를 속삭입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사랑의 수혜자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무대뽀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대표적으로 보면 말라기 1장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말라기 1:2)
저희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습니다. 이름을 감자라 부르는데, 숫놈입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다른 고양이에게 임신을 시켰고 어미 고양이가 4마리의 새끼를 낳았습니다.
문제는 며칠 전부터 어미 고양이는 보이지 않고 새끼 네 마리만 교회 주변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중 한 마리가 영양실조에 걸렸는지 아내에게 포획이 되어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 고양이가 잘 먹지 않으며 비실비실 거리는 겁니다.
살아있는 동물이 먹이를 앞에 두고서도 먹지를 않는 모습을 바라보는 입장도 참 못할 일입니다.
이러한 고양이를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사랑은 수혜받는 이보다 베푸는(주는)사람이
약자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셨겠지요?
세상에 무대뽀로 나가는 자식을 감당할 방법이 없는 법입니다.
구약성경 에스겔 16잘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버림받은 핏덩이
아기 모습으로 은유합니다.
이스라엘의 상태는 갓난 아기 같음에도 전혀 돌봄을 받지 못한,
천하게 여겨져 들에 버림바 된 상태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불쌍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16:6절입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만신창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볼품없고 버린바 된 이스라엘 백성들임에도 살아만 있어다오라 애원하며 살리기 위해
마음을 쏟는 하나님의 모습은 이땅의 교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사탄은 언제나 사람들을 속이고 파멸과 멸망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꾀이며
속삭이고 이끄는 세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의 모습을 입으시고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잃어버리거나
죽이는 것이 아닌 사람을 살리려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격없지만, 나아가 아무에게도
불쌍히 여김 받지 못했고 들에 버린바 된 이스라엘을 향하여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며 애원하시는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그리고 절절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피투성이라도 살아있으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겔16:6)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