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센 이동
오늘은 오사카, 오카야마를 경유하여 나오시마로 가야하는 데 태풍의 영향으로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도쿄에서 오사카(간사이 공항)까지는 저가항공으로, 이후 오사카에서 나오시마까지는 특급 열차 하루카를 비롯해 신간센, 일반 열차 그리고 페리로 갈아타고 이동하는 일정이다. 많은 이동 거리에도 불구하고 빠른 비행기와 신간센을 이용하기에 소요시간은 오전 한 나절에 불과하다.
도쿄~오사카 구간은 두달 전 저가항공 제트스타에 왕복 4,500엔으로 저렴하게 예약해 두었다. 오사카, 오카야마 등의 구간은 일본 서부지역을 열차 종류에 관계없이 4일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JR West Wide Area Pass를 구입했는데, 발매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은 신상품이다. 이 패스 덕분에 간사이 공항과 연계하여 편리하게 열차를 이용할 수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부담을 많이 덜 수 있었다.
신오사카~오카야마 간, 말로만 듣던 신간센을 타보니 확실히 특급 열차 하루카에 비해 빠르다. 특히 터널 안을 지날 때 휙휙 스치는 소리는 엄청난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일본인들은 검은 색을 꽤 좋아하나 보다. 비가 오는 날씨 탓일까? 창밖을 빠르게 스치는 마을도, 집들도, 사람들이 입는 옷과 우산도 대부분 검은 색 일색이다. 아니 검은 색이라기보다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무채색에 가깝다. 평상 시 감정을 절제하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들의 내면이 반영된 문화의 한 단면인 것 같기도 하다.
이런 환경에서는 개인의 창의성이나 개성이 억제돼 예술 영역의 활동과 그 성과도 그리 클 것 같지 않은 데, 여러 방면에서 세계적인 거장이 많이 배출되고있는 걸 보면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든다.
어느 덧 종착역인 우노역에 도착, 15분 후에 출발하는 데시마행 페리를 타려고 했으나 놓치고 말았다. 사전에 구글맵으로 익혀뒀던 건물이 페리 대합실이 아니어서 한참 떨어져 있는 대합실을 찾아 비를 맞고 헤메다보니 그만 배를 놓친 것이다. 당초 오늘 데시마에 들렀다 마지막 배로 돌아와 미야노우라항에서 숙박하려 하였으나, 아무래도 무리한 일정이 될 것 같아 데시마는 내일로 미루고 혼무라 지구의 집 프로젝트부터 관람할 생각으로 미야노우라 행 페리에 몸을 실었다.
나오시마를 예술의 섬으로 일군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의 신념
나오시마는 일본 가가와현에 속한 세토내해의 수많은 섬들 중 하나이다. 섬 둘레는 16km, 인구는 약 3,600여명. 꼭 가봐야할 명소이자 예술의 섬으로 점차 세상에 알려지면서 연간 50만명에 달하는 국내외 방문객이 찾고 있다고 한다.
본래 이섬은 산업 폐기물과 오염물질로 오랫동안 훼손되고 방치돼 섬 주민들이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후쿠다케 소이치로라는 한 기업가의 철학과 신념에 의해 자연과 현대미술이 어울어진 예술의 섬이자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 되었다.
나오시마 섬의 성공에 힘입어 점차 인근의 데시마, 이누지마 등 다른 섬들까지 예술의 기운이 확장돼 가고 있는 중인데, 지금은 2010년부터 3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세토우치 트리안넬레’라는 국제 예술제로 까지 승화되었다. 이 국제예술제는 배를 타고 세토 내해를 돌면서 섬의 자연과 문화에 융화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국내외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나오시마 섬의 성공신화는 섬 환경에 어울리는 독창적인 작품과 섬 주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도 한 몫을 했지만, 무엇보다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의 남다른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신념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글 일부를 발췌하였다.
“나는 공익 자본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경영 이념을 제창하고 있다. 기업이 문화나 지역 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해 재단이 그 주식회사의 대주주가 되고, 배당금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구조다.
기업활동의 목적은 문화이며, 경제는 문화에 종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수단이 목적화되고 있다. 부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기업활동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부의 배분 방법이 문제이며,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일부를 사용해 기업 스스로가 좋은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에 공헌하는 것은 어떨까? 인간과 기업의 모든 활동은 좋은 커뮤니티를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중략)
그림이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되며 인간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예술이 자기만의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나 역사가 지닌 장점을 끄집어내 상호작용을 하면서 인간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중략)
혼무라 지구의 집 프로젝트(Art House Project)
예술의 섬 나오시마는 크게 혼무라 지구의 집 프로젝트, 베네세하우스, 지추미술관 세가지 테마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미야노우라 항과는 반대편에 위치한 혼무라 지구의 집 프로젝트는 쇠잔해진 마을을 살리기 위한 일종의 마을재생 프로젝트로, 마을 사람들이 떠난 빈집을 개조하여 그 안에 현대미술 작품을 설치한 것이다.
비단 작가들의 손길을 거친 집들 뿐만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오래된 집들도 주인이 직접 솜씨를 발휘하여 다양하게 꾸며놓은 것들이 많아 들여다 볼수록 정이가고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마을 버스를 타고 맨 먼저 하이샤를 찾았다. 하이샤는 예전 치과의사의 집을 오타케 신로가 ‘혀 위의 꿈’이라는 주제로 작품화 한 것이다. ‘혀 위의 꿈’은 먹을 것을 입에 넣었을 때 맛과 냄새 등의 감각으로부터 느껴지는 기억의 과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의도가 어쨌든 재미있고 독특한 외관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으며, 작가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위트를 엿볼 수 있다.
카도야는 1998년 혼무라의 집 프로젝트 제 1탄으로 완성된 곳이다. 집안에 들어서면 조그만 공간에 물을 채우고, 물 위에 붉고 파란 1~9까지 디지털 숫자가 각기 다른 속도로 점멸하고 있다. 그 속도는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정한 것인데, 주민들이 생각하는 각자의 시간 빠르기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한다.
미나미데라는 제임스 터렐의 ‘backside of moon’이라는 작품으로,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어 들어간 다음, 한참 동안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다보면 어렴풋이 빛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어둠 속에서 빛을 체험하고, 빛의 존재와 작가의 의도를 곱씹어 보게 하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작품을 따라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혼무라 마을의 구석 구석을 구경하게 된다. 세월의 풍상과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는 골목과 오래된 집들, 그 사이 사이를 졸졸졸 흐르는 도랑의 물소리가 참으로 정겹게 느껴진다.
골목길 탐방은 내가 해외를 여행할 때 즐기는 나만의 여행 감상법이자 습관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골목길을 다니다보면 으레 그곳의 주민들과 마주치게 되는 데, 일부러 길을 묻기도 하고 인사를 교환하며 소통을 시도해 보기도 한다. 간혹 ‘뭐 이런데를 다 왔지?’하며 의혹의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맞이해 준다. 이렇듯 골목에서는 큰 도로나 관광지에서 느낄 수 없는 현지인들의 실제 삶과 정서, 그 지역의 생생한 문화를 좀더 직접적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
나오시마의 랜드마크, 빨간 호박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미야노우라 항구에는 구사마 야요이의 ‘빨간 호박’이 설치돼 있는데, 이제 나오시마를 상징하는 명물이 되었다. 항구에 배가 닿을 때 마다 여행객들은 제일 먼저 이곳으로 몰려와 호박 앞에서 사진을 찍고, 안으로 들어가서 구경도 하며 재밌어 한다.
항구에 웬 호박? 다소 이질적이고 생뚱맞아 보이지만 자세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또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호박으로 인해 낯선 항구의 풍경이 사람들에게 금방 친숙하고 익숙하게 다가가는데, 작가는 바로 이런 점을 의도했는지도 모른다.
선박 터미널인 마린 스테이션 또한 항구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배려한 멋진 작품으로 보인다. 답답하고 밀폐된 건축 구조물이 아니라 천장을 제외한 사면을 유리 벽체로 구성하여 터미널을 찾는 손님들에게 항구 풍경을 고스란히 조망할 수 있도록 하고, 사방 어디서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개방형으로 설계하였다.
I Love You (공중 목욕탕)
항구 근처에는 아주 재미있는 공중 목욕탕이 있다. 그냥 목욕탕이 아니라 실제 관객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 목욕을 하며 작품을 체험하는 것이다. 치과의사의 집 하이샤를 위트있게 작품화한 바로 그 오타케 신로의 작품이다.
우리 처럼 일본인들 역시 더운 물에서 몸을 푹 담그고 목욕하는 것을 좋아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곳을 이용해 보고 싶어 바로 지척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구룡에 숙소를 정하고 저녁에 들어가 보았다.
<구글 이미지>
목욕탕은 외관도 특이하고 재미있지만, 실내 욕조와 벽, 천장에도 빛 바랜 사진과 그림이 그려진 타일과 각종 콜라쥬가 붙어있어 재미를 더한다. 남탕과 여탕의 경계인 칸막이 위에는 커다란 코끼리 조각상 한 마리가 서있어 남탕, 여탕 양쪽을 다 지켜보고 있다. 또 칸막이 건너편 여탕에서의 여자들 이야기 소리, 물소리가 들려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렇듯 나오시마에는 폐허가 된 낡은 집이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계속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노인들은 여행객들을 위해 기꺼이 자원봉사에 나서고 있고, 골목에서 낯선 여행객과 마주치더라도 밝은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건넨다. 아마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보기힘든 광경이 아닐까 싶다.
오래된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더하여 살리려는 노력, 현대예술로 인해 인생의 달인인 노인들이 웃음과 활력을 되찾아 가는 모습...
물신주의(物神主義)가 만연하고 노인들의 소외와 그들의 우울한 미래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요즘, 나오시마의 신선한 변화와 활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
첫댓글 나오시마는 카페여행으로 추진하려고 찜해놓은 곳인데 이래저래 자꾸 미뤄지고 있습니다.
도쿄에서 나오시마까지....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를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셨네요.
항공편이나 패스 활용의 달인이십니다.^^
나오시마 여행, 충분히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꼭 한번 다녀오시기를 바랍니다.
해외여행시 주로 자동차여행을 해왔기 때문에, 패스는 이번에 처음 이용해 봤습니다. 달인은 말도 아니되어요. *^^*
나오시마는 우리나라 사람이 먹여 살리고 있는듯..반 이상이 한국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