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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7일 현 부산시민공원 정문 앞에서 거행된 하야리아 기지 반환식. 국방부 주한미군이전사업단이 부산시에 기지를 반환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국제신문 DB |
1996년 터 반환원년 선포, 서명운동·
매주 수요집회 등 전개 시민들 끈질긴 노력에
미군도 "2005년 돌려주겠다" 약속
기지 이전비 놓고 진통…대책위, 시민공원추진본부 전환
남이 점령해 주인행세 100년 만에 2010년 부산시로 귀속
아픔의 역사 딛고 새단장 거쳐 드디어 오롯이 시민 품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며 [옛 하야리아 부대 부지] 부산시민공원이 개장됐다.
말끔하게 단장된 공원은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새롭게 다가선다.
어찌 보면 낯설기도 하다.
많은 사건들이 부산시민공원의 이름으로 제기되고 대두되면서 시민참여와 관심으로 연결되었다.
그만큼 부산시민공원의 탄생은 많은 사건과 사연을 지니고 있다.
기억되는 이름과 잊혀진 이름들이 겹친다.
이쯤에서 부산시민공원 조성, '1등 공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해 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산시민 모두가 주인공이다.
지난 20년 간 [하야리아 부지가 시민 품으로 반환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가?
뒤돌아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 열혈 대학생 120명 연행되다
1990년 초 5월 어느날...
솔직히 기억이 또렷하진 않다.
아마 1990년대 초 5월 어느 날로 기억된다.
당시 하야리아는 우리 땅이되 남의 나라 땅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알려고 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몇 명의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금의 국립부산국악원 앞 하야리아 정문에서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문지기들은 코웃음을 쳤다.
상대 자체를 해주지 않았다.
모욕감에 욱하는 심정으로 돌아서 오는 길,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벼락 너머로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지금에야 농담삼아 이야기하지만, 당시에 꽤나 위험해 보이는 시민운동도 전개되었다.
한 예로 한 시민단체가 김영삼 총재가 대통령이 된 후 첫 해
지방순시차 부산으로 내려와 어느 코스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습 도로 시위를 도모하였다.
대통령이 탄 차가 자나갈 찰나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어 현수막을 펼친다는 작전이었지만,
대통령은 전혀 다른 코스로 이동했다.
모든 시민운동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렇듯 즉흥적 시위나 집회가 하야리아 부지 반환운동 초기에는 많았다. 물론 나름의 정세 판단과 목적에 따른 회의를 거친 움직임들이다.
초기 하야리아 부지의 반환운동은 부경총련 소속의 대학생들의 크고 작은 항의 방문과 집회 등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993년 5월 8일
공식적으로 제기된 이전 촉구안은 바로 이날 연지동 정희철 구의원의 주도로 작성한
'하야리아 부대 이전 촉구 결의안'이 부산진구 의회를 통해 발표되면서부터였다.
같은 해 11월 사회단체인 '민주주의 민족통일 부산연합'이 연구소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운동의 이론적 검토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95년 3월 6일
공원 조성 범시민협의회 창립회의. |
약 1년간의 논의 과정을 거치면서 24개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우리 땅 하야리아 되찾기 시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결성되었다.
대책위가 결성된 계기는 엉뚱했다.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하야리아 부대 안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하야리아 부대 후문 쪽 게이트 쓰리로 진입했는데
이상하게도 부대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어떤 제지도 없었다.
지금의 장소로 친다면 시민공원 기억의 벽과 뽀로로 도서관 쯤
진출했을 때 용역 경비병들이 달려왔고 미군들이 가세하면서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학생들도 어찌하다 보니 들어오긴 했지만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오를 수습하면서 원래 목적이었던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구호가 선창되고,
"하야리아 부대 물러가라"는 소리와 함성이 하야리아 부대 안에 퍼질 때, 쫓아온 미군 관계자들과 경비들,
학생들이 서로 뒤엉키면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결국 부대 안으로 들어왔던 대학생 120명 전원이 출동한 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 소식은 곧바로 부전역 근처에 사무실을 두고 있던 민주주의 민족통일 부산연합(이하 부민련)에 알려졌고, 상근자들이 수습에 나서게 되었다.
이 해프닝 이후 부민련에서는 [하야리아 부대와 관련]한 회의가 조직되었고
하반기 중점사업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념적 투쟁보다 대중의 이해에 초점을 맞춘 운동이 모색되었고
지역으로 파고드는 운동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 부지 반환을 넘어 시민공원 조성이란 목표가 설정된 것도 이때부터다.
하여 슬로건도 '하야리아 반환받아 시민공원 조성하자'였다.
이때만 하더라도 부지반환 운동은 부산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조직은 점차 확대되어 다른 영역의 시민단체를 아우르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1996년 2월 9일
대책위는 하야리아 반환 원년을 선포하면서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하야리아 부대 인근 범전동, 부전동, 초읍동 소재 마을을 찾았고 가가호호 방문이 이루어졌다.
설문조사도 병행됐다.
시민공원 조성을 찬성한 집에는 스티커가 붙여졌다.
'우리 집은 시민공원 조성을 찬성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스티커는 일대를 도배했다.
하야리아 부지 반환을 촉구하는 염원이 지역 주민들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부산진구 정재문 국회의원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부지 반환에 대한 정부의 협조를 요청하기에
이르게 되고 그해 6월 8일 부산을 방문한 자리에서
하야리아 부대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해결할 것임을 약속했다.
1996년 10월 1일
대청동 미국문화원이 폐쇄됐다.
미군부대 폐지 반환운동이 힘을 받기 시작했다.
매주 수요일 오후 1시에는 으레 하야리아 부대 정문 앞에서 집회가 열렸다.
참가자가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1인 시위 형태로 이어졌다.
정체불명의 유령단체가 한 달 동안 부대 앞 정문을 선점하여 집회가 어려울 경우에도
시민들은 정문에서 100여 m 떨어진 곳에서 계속적으로 집회를 진행하였다.
정기적으로 부대 앞을 트럭과 택시로 운행하던 시민들은 경적을 울리며 격려하였다.
# 부지반환 인간 띠 잇기 대회
1999년 4월 30일
미 문화원 반환 결정은 침체 국면에 있던 반환운동에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개별적 활동을 벌여왔던 '우리 땅 하야리아 되찾기 시민대책위'와
'아메리칸 센터 반환을 위한 시민대책위'가 발전적 해체를 통해
[미국점유 부산 땅 되찾기 범시민추진위]로 통합됨으로써 부지반환 운동 추진의 단일 창구가 만들어졌다.
문화원 반환에 고무된 대책위는 1999년을 '유솜부지 반환 집중의 해'로 설정하고 집중 캠페인을 전개했다.
1999년 7월 24일
2011년 8월의 부산시민공원 기공식 모습. |
부산진중학교에 2000여 명에 달하는
일반시민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모였다.
사전 참가자 모집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풍물패가 길을 열었다.
비록 부대 안으로 들어 갈수는 없었지만
부산시민들의 의지가 미군부대를 압박하였고
하루 빨리 부산의 땅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행렬은 양정 현대아파트에서 출발하여 하얄리아 정문~유솜 앞~부암교차로~부산진구청~하야리아 후문을 코스로 했다.
정문 앞에서는 풍선이 날아올랐다.
행렬 중간 중간에서 시민들의 불만이 미군부대 담벼락에 가해졌다.
마치 동서독 분단의 벽을 허물듯 억눌린 분노들이 곳곳에서 분출되기도 했다.
손과 손을 맞잡은 시민들의 대오가 부대를 에워싸고 옥죄이며 인간 띠를 이루면서
반환 요구 구호가 미군부대 안으로 날아들었다.
'우리 땅 속 남의 땅'을 되찾기 위한 염원과 한미간 불평등 조약인
한미행정협정(SOFA)에 대한 화형식이 이어졌다.
정리 집회가 열렸던 후문에서는 부지 반환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바람이 적힌 종이비행기 수백 대가 하야리아 하늘을 날았다.
많은 주민들이 나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차츰 어둠이 내려앉자 어린이들의 손에는 양초가 하나씩 쥐어졌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대열에 따라 하나씩 전달된 초는 1000여 m를 넘어섰다.
노란 불꽃이 정문에서부터 댕겨져 미군 부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이 같은 시민들의 활동을 의식한 부산시의회와 부산진구의회가 부지반환 결의문을 채택했고,
12월 5일에는 당시 미군장교 숙소인 유솜(USOM)부지가 반환되었다.
# 무지개 연대로 꽃 피운 반환운동
2004년 7월 23일
FOTA(미래 한·미동맹정책구상) 8차 회의를 통해
'하야리아 부지 2005년 조기 반환'이 발표되면서 반환운동이 분수령을 이루었다.
전국의 34개 기지를 총 17개로 통폐합하면서
서울 부산 춘천 의정부 인천 원주 대구 7개 대도시의 도심지에 있던 370여만 평이 반환되고,
이 가운데 춘천 부산 파주 의정부 등은 종전의 LPP(Land Partnership Plan)
계획보다 1~6년씩 앞당겨 돌려받게 되었다.
시민대책위 명칭도 지역 내 모든 시민사회단체를 아우르는 차원에서
'하야리아 부지 시민공원화추진 범시민운동본부'(이하 범시민운동본부)로 확대개편 되었다.
범시민운동본부는 발족 기자회견을 통해
주한 미군 기지의 이전에 따른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고 무상양여 주장을 분명히 했다.
부산시는 미군이 주둔 중임에도 불구하고
하야리아 부지를 도시계획법상 '근린공원'으로 결정하여 정부와 미군 측에 부지 반환을 압박하였다.
2005년 1월 13일
그럼에도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의 방침은 평택으로의 기지이전 비용을 지자체에 강요하였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점검차 부산을 방문한
이해찬 국무총리는 '무상양여 불가, 부지매각 방침'을 제시했다.
분노한 부산시민들은 다시 서명운동을 벌였다.
부지 반환 무상양여 특별법 제정을 위한 시민 서명운동의 결과는 놀라웠다.
2005년 2~8월 사이 부산시민 절반에 해당하는 152만 명의 서명을 받아낸 것이다.
부산시민의 간절한 염원과 바람이 정치권과 국방부, 미군당국 등에 전달되었다.
전국적 연대도 가동되었다.
그만큼 하야리아 부지의 반환은 시민의 일상을 관통하고 있었다.
미군기지 반환운동 10주년 되던 해였다.
2006년 8월 28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 하야리아 부대 부지에 대한
정부지원 국고부담률을 60~80%에서 20%로 낮추려는 기획예산처의 발표가 있었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즉각적인 규탄 기자회견을 통해 대정부 반대투쟁이 예고되었다.
부산시도 시민들의 활동에 힘을 보탰다.
시민결의문이 작성되고, 대규모 집회 개최를 위한 제반 준비와 시민단체들에 대한 총동원령이 전달되었다.
오전 일찍 청와대 면담팀이 서울로 출발하고 부산역에는 피켓이며 현수막을 든 단체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했다.
점심 무렵 서울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시민대표들에게 당초 행정자치부 시행령안대로 추진할 것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대규모 규탄 시민결의 대회는 경과보고로 급히 조정되었다.
# 기억해야 할 것과 새로운 상상 도모
2010년 1월 27일
100년만의 귀속이었고, 반환을 요구한지 15년 만에 이루어낸 성과였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
부지반환 운동의 역사는 기지가 폐쇄되는 시점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재생을 통한 개장까지를 담기 때문이다.
이제 하야리아 부대와 반환운동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새롭게 단장한 부산시민공원이 시민들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파란만장했던 반환운동의 활동은 부산시민공원 내 기억의 숲길에 벽화로 남아 있다.
또한 공원역사관에는 부지 반환운동에서 조성이 이루어지는 시기별 활동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백을 가지고 볼 일이다.
그리고 새로운 상상을 도모할 일이다.
이성근 (사)부산그린트러스트 사무처장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시설공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