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법문 >
자연스러움
글 | 원공스님
(원공스님은 1990년 미국에 입국한 이후
뉴욕 한마음선원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고 있다.)
어느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사가 대답하였다. “놓아 버려라.”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무었을 놓아 버리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짊어지고 가거라.”
방거사는 “오직 있는 것을 비우고 빈 것을 채우지 말길 바랄 뿐이다.” 하였고, 이 말을 깨치면 한 평생의 공부를 다해 마치게 된다 고려말의 백운 경한 선사는 말씀하셨다.
수행은 놓아버리는 것이라 한다. 놓아버리라는 말은 지금 들고 있다는 뜻이며, 들고 있다는 것은 집착한다는 것이다.집착한다는 것은 집착하는 주체와 대상이 있으며, 그 주체는 ‘나’이며, 나는 대상과 분리되어 있어서 대상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두려움 긴장감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있다.뭔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집착이다.
우리 스님 대행선사께서는 “내가 공부를 한다. 내가 일을 한다. 내가 잘했다. 내 것이다. 나이다 하는 아집,아만,욕심을 쑥 빼어 놓아라. ‘나’가 들어가면 이미 걸린 것이니 당장 죽음이 눈앞에 닥쳤다해도 탁! 넘어설 줄 알아야 제대로 놓는게 된다. 그쯤 되어야 거기에서 생수 맛을 볼 수 있고 부와 자가 상봉을 할 수 있다. 유위법에 한 치라도 착을 두었다 하면 부처를 이룰 수 없다. 부처를 이룬다는 생각마저도 놓아야 한다.”하셨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더나아가 모든 집착의 뿌리인 ‘나’를 놓아버리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이러한 이치를 ‘나를 버려라’ ‘나를 죽여라’ ‘나를 비워라’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열심히 하기도 어렵지만 나를 버리는 것은 더 어렵다고한다. 우리의 삶은 ‘나’로 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를 버리고 어떻게 하라는가? 의문이 든다. 하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하지 말라고 한다. 마음공부는 합리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저 멀리에 있는 것 같아서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런것만 같지는 않다. 물론 지극한 도리는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 것이지만, 수행의 과정에서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지침이 있다. 마치 과학적 실험과 같은 과정이 있는 것 같다.
서양의 불교 수행자들은 참선을 할 때에 몸을 이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몸은 우리의 표면적인 생각이나 감정 느낌보다 더 깊은 의식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한다. 언젠가 증명사진을 찍으니 여러해 동안 번뇌 속에 찌들어 산 것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다. 바쁜 사찰살림살이에서 벗어나 몇 철 한국 선방에서 정진하던 때에 사찰 뒷 산에 올라가 찍은 사진에서얼굴 표정이 변한 것을 보고 몸이 표면적인 마음보다 더 깊은 것을 보여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링컨 대통령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였고, 사람들이 관상을 보는 것도 이러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어서 마음에 긴장이 있으면 몸도 긴장을 한다. 그래서 몸의긴장을 풀고 이완하면 마음의 긴장도 풀린다.금강경에 무쟁삼매라는 말이 있다.무쟁은 다툼이 없다는 뜻이다. 다툼이 없다는 것은 표면적인 현상에서 다툼 뿐 아니라 마음에 다툼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다툼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평화의 상태라는 뜻이다. 마음의 평화는 집착이 없을 때에 나타난다.그리고 집착이 없다는 것은 ‘나’라는 주체와 인식하는 대상인 객체가 분리되어있는 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집착과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리의 뿌리가 되는 ‘나’가 없는 것이 무쟁삼매라 이해한다.
‘나’가 없다는 것은 집착을 일으키는 ‘나라는 생각-느낌’이 없다는 것이며, 나의 존재성-중심-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분별하는 의식이 생겨나면 주체의 느낌-나-과 대상의 인식이 일어나 마음이 주,객으로 분리된다. 그리고 분별이 생기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면 집착에 의해서 긴장이 일어나고 갈등과 번뇌가 일어난다.그러므로 몸의 긴장을 푸는 것은 마음의 번뇌와 긴장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와같이 모든 번뇌는 ‘나’로 부터 일어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나’로 부터 번뇌,갈등,긴장이 일어난다는 것은 의도적인 하는 것-나의 함이 있는,유위-가 있다는 것이다.내가 하려고 하면 굳어지고, 번뇌가 일어나고 ,평화가 사라지고, 자연스러움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자연스러움은 하나의 수행의 지표이다.자연스러움은 삶에서 ‘나’가 한다는 생각이 없이 하는 것이며, 조작이 없이 하는 것이다.예술가들이 무아의 경지에서 표현하는 것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인도의 불교 성자인 틸로빠의 “마하무드라의 노래 The Song of Mahamudra”는 이렇게 시작한다.
마하무드라,
이는 모든 언어와 상징을 넘어섰다.
그러나 그대 나로빠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이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수냐(텅빔,공)는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나의 근본 존재는 어느 것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
마하무드라,수냐의 굽이침이여,(주관과 객관의 나누어짐 속의 유위가 아닌 무위의 사는 것)
무(없음)에 뿌리박은 이 동사의 현재형이여(무에 의존하는 것이 마하무드라이다.)
노력도 없이,그 어떤 인위적인 노력도 없이(‘나’가 한다는 생각이 없는)
여유있고 자연스럽게 남아 있거라.(긴장과 다툼이 없는 마음)
관계의 이 오랏줄을 (멍에) 끊어 버릴 때
절대자유(해탈)을 얻는다.
Mahamudra is beyond all words
And symbols, but for you, Naropa,
Earnest and loyal, must this be said.
The Void needs no reliance,
Mahamudra rests on nought.
Without making an effort,
But remaining loose an natural,
One can break the yoke
Thus gaining Liberation.
이 가르침에서는 자연스러움과 이완을 수행의 핵심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움은 인위적인 노력이 없는, ‘나(주관)’가 대상(객관)을 집착하고 번뇌를 일으키고 다투는 긴장과 갈등 두려움이 없는 본래 그대로의 마음(평화)을 말하며, 무엇이 참다운 놓아버림인가를 말하고 있다. 구할 것이 없다. 구함이 없이 구하라는 뜻이 여기에 있다.
우리가 구하는 지혜는 본래 갖추어져있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뿌리 마음이니, 다만 ‘나’로서 생각의 대상을 만들어 구하지 말고, 그 생각을 놓아버리면 ‘나’도 스스로 사라지고 나의 뿌리가 드러나고 모든 지혜와 자비가 거기에서 나투어진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수행하는 하나의 깊은 길이 자연스러움을 표준으로 삼고 관찰하고 실험하며 살아가는 놓아버림의 수행이다. 먼저 번뇌 망상을 따라가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리고 지켜보며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닦는 방법이다. 옛날 동양의 선비들이 구방심의 수행을 했다고 한다. 맹자가 말하기를 “인(어질 인)은 사람의 마음이다. 의(의로울 의)는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라가지 않고, 마음을 놓아버리고 찾을 줄 모르니 슬프다. 사람들은 닭이나 개를 잃으면 찾을 줄 알면서, 마음을 놓아버리면 찾을 줄 모른다. 학문하는 길은 다른 것이 없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따름이다.” 번뇌를 따라가지 않고 깨어서 자기의 중심을 지키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을 중심으로 망상을 일으키지않고 지금 여기 지켜보는 마음이 중심이되어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움이다. 우리는 남은 잘 보지만 자기는 바로 보기어렵다. 자기 생각으로(사실을 바로 보는것이 아니라) 보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이라는 환상의 세계에서 살면서 우리는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리고 경직되어 다툰다.
한국 사찰의 선방에서 정진할 때, 수행이 깊은 스님도 있고 열심히 정진하는 스님도 있고 성품을 봤다고 생각되는 스님도 있었다. 그런데 그 분들에게서 ‘나’를 세우는 것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나’를 세우는 경직됨이 있었다. 수행은 무아, 무쟁삼매, 자연스러움을 향해서 가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자기를 바로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지나고보면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모두 미숙하고 부끄러운 것이 많다. ‘나’를 놓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향이 직설적이고 숨김이 없는 사람은 더 드러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느정도 ‘나’를 감추고 꾸며야 하기 때문에 덜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자기 안에 감춰지고 왜곡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고 비우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팔정도의 가르침을 우리의 수행의 기준을 삼아 거울처럼 비춰보아야한다. 팔정도는 중도라고한다.중도는 치우침이 없는 것이라 한다. 치우침은 ‘나’의 조작에서 생긴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자연스러움이라 할 수 있다.팔정도의 거울은 자연스러움의 거울이다. 우리는 일상 생활의 자연스러움에서 부터 무위의 자연스러움에 이르는 자연스러움의 거울에 나의 모습을 비춰보면서 수행할 수 있다.그리고 현실의 삶에서 자연스러움을 우리에게 보여준 어떤 스승을 발견하면 기억하고 바라보며 거울로 삼아 정진할 수도 있다. 경전에 나타난 석가모니 부처님과 큰 제자들은 가장 훌륭한 자연스러움의 거울이 될 수 있다.
나에게는 스승 대행선사가 그러한 자연스러움의 거울이다. 스님의 얼굴에는 긴장이 없었다. 번뇌의 흔적이 없었다. 환하게 밝고 따스하고 장엄하였다. 자연스러운 밝음 앞에 있으면 번뇌가 사라지고 생각이 명료해지고 강한 신심이 생겼다. 어느 때, 한 도량에 많은 제자 비구들이 함께 살던 초기에 서로간에 갈등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듣고 스님께서 가셔서 모든 대중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하여 자유롭게 토론을 하셨다. 처음에는 스님의 말씀에도 반론을 제기하며 허심탄회하고 격렬한 토론이 이어졌다. 그러나 스님의 목소리는 고요하면서 장엄하여 전혀 변함이 없었다. 제자들에게 설하시는 고요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따스한 자비와 깊은 지혜의 말씀은 나에게 마치 대장군이 전쟁터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것 같은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모든 제자들은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가 화합하고 화기애애하게 토론을 마쳤다.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나 말씀을 따를 때나 변함없이 따뜻한 사랑과 깊은 위엄으로 위없는 진리와 수행자의 바른 길을 말씀하시는 모습은 내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자연스러움의 거울이다.
자연스러움은 꾸미는 자연스러움이 아니다. 모든 것을 비웠을 때에 텅빈 마음에서 나투어지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마음의 움직임과 몸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나’의 의도가 작용하여 힘이 들어간 것을 볼 때마다 ‘나’를 놓아버리고 자연스럽게 하는 무위의 삶을 연습해야한다.자연스러움은 지혜와 자비가 실천되는 강물과 같은 삶이다.자연스러움은 나의 아픔을 치료하고 이웃의 아픔을 치료하는 우리 내면의 영원한 생명의 표현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