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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12-24 그 형들이
본문에서 모세는 야곱이 요셉을 양을 치는 형들에게 보낸 사실을 기록합니다.
또 모세는 요셉을 죽이려는 형들의 시도를 기록합니다.
(1) 야곱은 요셉을 "세겜"으로 보내면서 그곳에서 양을 치고 있는 아들들의 형편을 알아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한 이유는 일찍이 "세겜"에서 불상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34장). 세겜의 동쪽에는 좋은 초원(草原)이 있고, "도단"은 세겜 북쪽으로 24마일쯤 떨어진 곳입니다. 거기는 세겜보다 더 좋은 초원이 있다고 합니다.
(2) 요셉은 야곱의 명령을 순종하므로 진리를 품은 자로서 질서 있는 행동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또한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므로 우애(友愛)를 나타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그는 "세겜"으로 가서 방황하다가 어떤 사람의 안내로 "도단"에까지 수고스러이 갔습니다.
(3) 요셉의 형들은 그의 사랑을 몰라보고 도리어 그를 죽이려고 계획하였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일찍이 알려졌던 그의 꿈을 문제시하였습니다.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란 말이라든지,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고 한 말이 바로 그들에게 있었던 말썽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마침내 저희보다 높아진다는 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증표였습니다.
요셉의 꿈은 실상 하나님의 계시(啓示)였습니다. 그것이 같은 내용을 가지고 두 차례나 보였던 것은 그들을 놀라게 할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꿈을 멸시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한 우준(愚蠢)한 행동이었습니다.
1. 본문 12-17절은
"(12) 그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비의 양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있는 여부를 보고 돌아와 내게 고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매 이에 세겜으로 가니라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가로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 그가 가로되 내가 나의 형들을 찾으오니 청컨대 그들의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치소서
(17) 그 사람이 가로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요셉이 그 형들의 뒤를 따라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입니다.
모세는 형제 살해라는 두려운 계획을 취급하기 전에 요셉의 여행을 묘사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들어서 그 형제들이 가진 죄악의 잔악성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동생은 그 형들의 형편을 알아 보려는 우애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명령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의 대답에서 나타나듯 그는 자기 아버지의 명령에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이 복종합니다. 그는 애태우며 자기 형들을 찾습니다.
그리고 형들이 장소를 이동했지만 그들을 찾을 때까지 수고나 고생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토록 경건하고 인간적인 동생 살해를 끔찍이 여기지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잔인성은 광적인 데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이 방황 중에 있는 요셉을 만나 그에게 그의 형들이 도단으로 갔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고 진술하는데 여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요셉은 지칠 줄 모르고 열심히 그의 형들을 추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토록 파렴치하게 갚았으므로 더욱 더 변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2. 본문 18-19절은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입니다.
1) 모세는 여기에서 자기 민족의 명예를 돌보거나 아첨하긴 커녕 지파의 우두머리들에게 영원한 치욕의 낙인을 찍고 그들을 만방의 증오와 저주에 노출시킵니다.
만일 어느 때든지 이방인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자기 형제를 살해했다면 그런 불경한 행위는 극히 엄격히 처리하여 다시는 그런 일을 모방하는 자가 없도록 했습니다.
더욱이 아홉 형들이 공모하여 순진 무고한 동생을 멸망시키려고 야수처럼 피묻은 손으로 덤벼드는 사례를 세속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인륜에 대한 감각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자기들 혈육에 대하여 이처럼 잔인한 분노를 터뜨리려고 준비하였습니다.
2) 그러나 모세는 이런 악 외에 하나님께 대한 불경스러운 멸시도 정죄하고 있습니다.
"이 꿈의 주인을 보라"(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 한글 개역) 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이 하늘의 말씀으로 생각지도 않은 존귀를 약속 받은 때문이 아니라면 그들이 어찌하여 그 불행한 젊은이를 모욕하겠습니까?
더욱이 그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비열함을 어느 누구보다 공공연하게 발설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자를 보면 일부러라도 징계하겠다고 나서야 마땅할텐데 자기들이 남보다 더 악하게 날뛰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생에 대한 박해 이유가 그가 꿈을 꾼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속죄할 수 없는 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일 그의 꿈에 분개한다면 어찌해서 차라리 하나님과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요셉은 신적으로 자기에게 계시된 것을 귀중한 기탁물로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하나님께 직접 공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기 동생에게 분노하기 위해 자신을 구름으로 둘러쌉니다.
족장들도 그런 맹목성에 사로잡혔다면 완고한 악에 이리저리 내몰리는 타락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 반항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경고와 징계를 노여워할 때마다 스스로 동요하고 분발하며 복수를 위해 일어나 하나님의 사자들을 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갈을 물려 복종시키지 않으신다면 이런 일은 때때로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분명히 나타났고 그는 극히 존귀한 때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꿈속에서 일어난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악한 형들은 이 꿈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음모까지 곁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간신히 죽음의 위기를 모면합니다.
요셉을 높이 올렸던 하나님의 약속은 이와 같이 그를 거의 무덤에까지 쳐 박습니다.
많은 슬픔의 와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의 신분을 얻은 우리도 똑같은 일을 경험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의 양떼로 모아 들이신 순간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모저모로 우리의 몰락을 허락하셔서 천국보다 지옥에 더 가까워진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뿌리에서 여러 가지 좌절의 싹이 돋아날 때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요셉의 전례를 유념해야 합니다.
또 사실 자체가 증명하듯 요셉에게서 어렴풋이 나타난 일은 나중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한테서 더 완전히 나타났습니다.
이는 교회의 모든 지체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3. 본문 20절은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입니다.
1) 그들은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사람들에게서 자기 죄를 감추기 위한 구실부터 찾습니다.
그러는 동안 사람에게 숨길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선자는 세상 사람의 손가락질을 피해 달아나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정도로 우매하기 짝이 없습니다.
극히 악한 범죄 행위를 그럴듯하게 위장하려는 것은 인간성 속에 깊이 뿌리박은 질병입니다 비록 내면의 심판관이 유죄를 선고하더라도 자기들의 수치를 남들에게 나타내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자기들의 뻔뻔스러움을 확증합니다.
2)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라는 말에서처럼 그들은 마치 한 사람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타도되기라도 하는 듯이 자기 동생을 죽이고 나면 바라던 것을 이루게 된다고 자랑합니다.
그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들이 공언하는 목적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격렬한 시기심이 그들로 하여금 정신 없이 하나님과 싸우게 충동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암암리에 하나님과 다툼으로써 무엇을 의도하든 지간에 그들의 시도는 결국 무용한 것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극히 깊은 심연을 통해 길을 찾아 내셔서 자신이 발한 명령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불신자들이 욕설로 우리를 격동시키며 우리 믿음이 아무런 이득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교만하게 떠들어 대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무례나 방해에 약해지지 말고 소신대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4. 본문 21절은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입니다.
다른 형제들이 요셉의 피를 흘리려고 급급해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르우벤의 보실핌으로 요셉이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르우벤이 단 한가지 일로 그들 중에서 가장 악한 자였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 아비의 침상을 더럽혔던 것입니다.
다른 악과 마찬가지로 제어되지 않은 욕정은 타락된 본성의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경건을 주목하고 형제우애 의무를 기억하여 불경스런 음모를 와해시킵니다.
그가 자기 아버지 총애를 회복하기 위해 보상 수단을 추구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그 소년을 안전하게 아비에게 돌려 보내려는 것이 르우벤의 의도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한 추측은 이 점에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동생의 목숨이 자기가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는 대가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가 자기 동생을 놓아주려고 노력하면서 보여준 인간미는 그가 온갖 종류의 악에 완전히 빠져 있지는 않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마 이 인내의 증언을 통해 그의 이전의 수치를 어느 정도 감소시키려고 의도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 한가지 행동으로 사람의 성격을 평가해서 안 된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설령 아무리 악한 행위라고 해도 그 사람에게서 한가지 행동만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한 구원조차 포기해 버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5. 본문 22절은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 입니다.
르우벤은 경건해지긴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형제들의 분노가 얼마나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는지를 충분히 증명합니다.
그는 터놓고 그들을 반대하거나 죄를 짓지 못하게 설득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는 어떤 이유를 내세워도 그들을 진정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따뜻한 마음이 남아 있기라도 한 듯 르우벤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도 그들의 잔인성을 변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완전히 방면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방도가 필요했다면 요셉으로서는 구덩이에서 천천히 굶어 죽는 것 보다 형들의 손에 당장 죽는 것이 더 나을 터였기 때문입니다.
굶겨 죽이는 것은 형벌 중에도 가장 잔인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들의 큰 위선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손에 동생의 파만 묻히지 않으면 살인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살인을 해도 칼로 찔러 죽이는 것과 질식사 시키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유대인을 정죄하시면서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힐책하십니다.
이 때 그는 그들이 암살자였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고난 당하는 형제들을 살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동생을 산 채로 땅속에 던진 야곱의 아들들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매장 당한 자처럼 죽음과 싸우다가 오랜 고통 끝에 속절없이 죽어가도록 하기 위해 이런 짓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광야에 있는 구덩이를 택한 것은 비록 요셉의 한숨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그가 죽어가면서 외치는 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손을 동생의 피로 물들이지 않으면 그의 생명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야만적인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굶주림으로 그를 죽이려 했지만 그것도 결국 일종의 살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은 자기 언어를 그들의 짐승 같은 생각에 맞춰가며 당장은 어떤 계략으로든지 그들의 성급함을 억누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6. 본문 23-24절은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입니다.
우리는 이들이 허구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마음 편하게 동생의 옷을 벗깁니다.
그들은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고 제 손으로 그를 구덩이에 던집니다 그 구덩이는 열 개의 칼보다 더 무서운 굶주림이 그를 삼킬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가 엄폐되기를 바랍니다.
요셉의 옷을 집으로 가져가면 아무도 그들의 살인을 눈치채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자기 아들이 맹수에게 찢겼다고 믿을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악한 마음들을 이와 같이 얼빠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회피에 얽혀둡니다.
양심은 실로 정숙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사람들을 제 올무에 빠뜨리며 거기 걸려든 자들을 자기 유혹으로 달랩니다. 그래서 그들을 유죄로 간주하여 하나님의 법정에 소환해야 마땅할 양심조차 그들을 더욱 완악하게 만들 뿐 입니다.
그들은 핑계를 찾아냈기 때문에 사람의 눈만 피할 수 있으면 범죄해도 벌을 면할 수 있다는 듯이 더욱 대담하게 죄를 짓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것이 두려워 대담한 시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실로 타락된 인식이며 광적이고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정신입니다.
그런 자들은 사람에 대한 과민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발 밑에 짓밟아 버립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이토록 심한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공경하는 잘못은 너무나 흔합니다.
모세의 글에서 옷이란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는 것은 강조적인 용법으로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의 표시물도 그들의 잔학한 마음을 완화시킬 수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 말씀을 맡은 자도 경히 여깁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 압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가 그 분의 계시를 귀히 여깁니다.
그 분의 말씀을 맡은 자로 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과 함께 고난의 길이라도 갑니다.
하나님의 뜻은 야곱에게 있고 요셉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야곱에게 있고 요셉에게 있습니다. 야곱의 관심이 요셉에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보내면 가고 방황하며 수고도 합니다. 그리고 만납니다. 그리고 당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