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斷想) '자연(自然)과 종교...
우리나라의 조그마한 산속 절간의
벽(壁)에는 거의 불타(佛陀)의 일생에
관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어떤 것은 유치하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틀림없이 산과 강이 있으며 나무와
물도 함께 그려져 있다.
성스러운 부처가 그림의 주제인데도,
그것과 나란히 자연이 숨쉬고 있는 것이
한국적인 불교관이라고도 말 할 수
있겠다.
유럽과 북미 지역의 대성당에는 유서
깊은 성화聖畵들이 많다.
그들은 성모나 그리스도像은 물론
실락원의 이야기, 예언자의 수난의
생애들이 성서의 내용대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성서에 나오는 요단강이나,
시나이山, 골고다의 언덕 等,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자연의 경관이
거의 그림의 배경에는 없다.
우리나라의 자연관에 안기어 온 나는
무의식적으로 성서의 내용보다는
자연에 기대를 걸고 있었고, 자연의
배경이 없는 기독교의 神과 인간만의
세계에 긴장감마저 느끼기도 했다.
원래 기독교사상에서는 자연을 인간
밑에 두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肉畜)과 온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라.](창세기 1:26
또 인간을 창조한 후 神은 인간을
축복한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창세기 1:28)
이 세계관에서 생각한다면, 자연은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별로 큰 이미를
지닐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의 성화 배경에는
자연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사막에서 헤매야만 했던 그들은
자연에의 응석을 부릴 수가 없었고
항상 자연과 대결하여만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 이외의 것 모두가
내 밑에 있고, 자연은 인간만 못한 것
으로 여겨진다. "자연은 정복하는 것"
으로서 외경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의 유서깊은 교회에 있는 성화에
그려진 성자와 예언사상은 살아있는
인간처럼 생생하고 사실적인 것이
많다.
그러나 여기에는 계절이나 바람, 구름
等 자연이 전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자연을 정복해야만 하는 인간의 강력한
자의식이 성화와 교회의 벽화에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불교의 교리가 어렵다고 여겨질 때
무심히 산중의 절을 찾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머리에서보다는 피부로서 불교의 뜻을
느끼는 것일까?
江을 건너가는 수단은 많다.
배도 있고 뗏목도 있고, 어떤 이는
수영을 해서 건너갈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미련스럽게 자연을 통해서만이
불교에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
山川草木悉有佛性(자연속에 불성이
있다는)인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어디에나 부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별나게 나는
자연에서 그 뜻을 보다 선명하게 느낀다
나이 탓일까?
어느 새 나는 이 땅의 풍토처럼 고마운
것이 없고 그것을 통해서만이 부처의
뜻은 이해될 것만 같은 심경이 된 것이다...!
戶堂 김건우 씀